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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의 진실은 무엇인가
徐 榮 洙(단국대 역사학과)

1. 머리말-廣開土大王碑의 역사적 의의

歷史란 과거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이긴 하지만 단순히 과거로서만의 의미를 지닐 때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 부르지 않는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 하더라도 오늘의 우리 속에 생생히 살아 있고 나아가 우리들의 미래를 밝혀 줄 수 있는 의미를 지닐 때 우리는 그 것을 진정한 역사라 이름한다.

민족사의 영광을 위하여 명멸하였던 숱한 인물도 이러한 성격을 지닐 때 우리는 그들에게 역사적 인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점에 있어 역사의 태동기를 지나 뚜렷한 실체로서 부각되는 인물로 廣開土大王을 들 수 있다.

高句麗의 정복국가로서의 성장과정 중에서 廣開土大王代는 高句麗史를 구획하는 영광의 시대라 할 것이며, 民族史에 있어서는 격동하는 동아의 정세속에서 움트기 시작한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統一秩序의 구축에 부심하던 전환기라 할 것이다.

따라서, 高句麗史 연구에 있어서나 三國을 중심으로 한 東亞의 교섭사연구에 있어 이 시기가 갖는 역사적 의미가 보다 부각되어야 할 것이며, 大王의 훈적을 전하는 廣開土大王碑도 자연 이러한 시각에서 보다 면밀히 검토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陵碑가 재발견된 이후 그 연구는 고구려사를 비롯한 한국고대사의 발전과정을 해명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 온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陵碑는 參謨本部를 비롯한 日本帝國主義官學에 의해 '任那日本府'라는 허구를 토대로 한 古代 日本의 한반도 진출을 합리화하기 위한 근거로서 변조 제시되었던 까닭에, 이후 근 1세기동안 陵碑硏究는 고구려사를 해명하였다기 보다는 古代 韓日關係의 주도권 논쟁을 둘러 싼 공방으로 韓日學界의 최대 쟁점이 되어왔다.

陵碑의 변조와 왜곡은 최근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나 망언등에서 보는 것처럼 일본인의 식민지사관에 입각한 한국사 왜곡의 출발점이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최근 침묵을 지키고 있던 中國學界에서도 현지조사의 이점을 토대로 한 새로운 연구를 내는 동시에 한일학계에 고구려 유적을 개방함으로써 능비에 대한 현지조사가 가능해짐에 따라 한중일 삼국학계의 관심이 새로이 고조되어 가고 있다.

陵碑의 연구는 이와같이 高句麗史를 비롯한 한국고대사 자체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近代 日本의 한국사 왜곡에 대한 체질비판에 연결되며, 나아가 東亞交涉史의 문제로 확대된다.

광개토대왕은 이미 1,600년전의 인물로 우리와는 시공을 달리하는 역사적 존재이지만, 이러한 점에 있어 오히려 우리와 호흡을 같이하는 현재적 의미를 갖는 인물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廣開土大王碑文의 올바른 해석과 연구는 곧 왜곡된 한국사의 再構를 의미할 뿐만아니라 동아교섭사의 정당한 이해에 직결된다.

2. 광개토대왕은 누구인가

4~5세기의 동아시아는 격동과 활력의 시대였으며 삼국의 정립이 국제적 교섭을 배경으로 본격화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정세속에서 위대한 정복군주가 탄생하였으니 바로 고구려 제19대 임금인 광개토대왕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역사상에서 두 번 태어나셨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연인으로서의 출생과 대왕의 훈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陵碑가 19세기 말 재발견 됨으로써 대왕의 훈적이 보다 뚜렷한 실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온 사실이 바로 그 것이다. 대왕은 소수림왕 4년 (374년) 왕제 伊連(고국양왕)의 아드님으로 태어나셨으니, 바로 백제의 정복군주인 근초고왕의 몰년에 해당된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의 축을 이루었던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에 있어 명암이 엇갈리는 숙명적 사건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에는 물론 [牟頭婁墓誌], {三國史記}, {晉書}, {資治通鑑}등에 대왕의 치적이 실려 있다. 대왕의 인간적인 면모를 담은 기록은 희소하지만 대체로 태어나실 때부터 체격이 웅위하고 기상이 늠름하였으며 성인의 풍모를 지녔다고 한다. 이는 물론 고대의 영웅사관에 기인하는 기술이라 할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대왕의 성품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고국양왕 3년 13세에 태자로 봉해졌다가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셨으니 바로 신묘년(391년)의 일이었다.

대왕은 이후 22년간 짧은 재위기간 동안이었지만 남정 북벌하여 고구려사에 있어서나 한국민족사에 있어 한 시대를 구획하는 문자 그대로 '광개토경' 위업을 이룩하셨다. 즉, 대왕은 위대한 정복군주로 서쪽으로는 풍부한 철산지인 遼東을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요하를 넘어 大凌河유역으로부터 멀리 흥안령 산록의 시라무렌강 유역을 원정하고, 동쪽으로는 牧丹江유역으로부터 연해주 일원에까지 영역을 확대하였으며, 북으로는 松花江유역의 북만주일원으로 통치영역을 넓히고 남으로는 곡창지대인 한강유역을 획득하는 한편 멀리 낙동강 유역에까지 정복전쟁을 수행하셨다.

뿐만아니라 대왕은 내치에도 능하시어 佛法진흥의 문화정책을 전개하는 한편 새로운 경제정책을 실시하여 '國富民殷'이라는 풍요를 구가하였다.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대왕은 백제,북연,동부여,신라,가라제국을 朝貢國으로 복속시키는 한편 太王號와 永樂 년호를 사용하여 중국과 대등한 동방의 패자이심을 사해에 알리셨으니, 이는 당시의 고구려가 팽창된 국력을 바탕으로 전제왕권을 완성하고 帝國秩序로 이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위업을 이룩하신뒤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임자년(412년)에 붕어하셨다. 대왕의 본명은 談德(중국문헌에는 安이라 하였다.)이나 생전에는 호태왕 또는 영락대왕으로 불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능비문에 의하면 년호는 永樂, 시호는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호우총;국강상광개토지평안호태왕, 모두루묘지;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으로 대왕의 생전 업적이 잘 나타나 있다.
 
 

광개토대왕년보

년대         대왕의 약력과 업적
374 탄생

386 13세에 태자로 봉해짐

391(永樂元年)18세의 나이로 즉위

392 백제의 북변을 쳐서 石峴등 10성을 획득

392 북으로 契丹을 정벌

393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창건

393-395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백제와 교전

395 흥안령산록 시라무렌강 유역의 거란부족의 일부인 稗麗를 정벌하고 北豊 등 요동 일원의 土境巡狩

396 수륙양군으로 백제를 쳐서 大山韓城,阿旦城등 한강유역의 58성을 획득

398 국경지대인 帛愼土谷을 순시하고 이웃한 국가(신라또는 숙신)를 복속시킴

400 신라에 침입한 倭寇를 격퇴하여 신라를 구원하는 동시에 任那加羅,安羅등 가야 여러나라를 복속시킴

402 大凌河유역에 진출하여 後燕의 宿軍城을 공략

404 후연의 燕郡을 정벌

404 황해도 연안인 帶方界에서 백제와 왜 연합군 격파

405-406 국경에 침입한 후연군을 격퇴

407-408 후연을 붕괴시키고 이를 계승한 북연왕 高雲에게 종족의 禮 를 베품,이후 북연은 고구려의 종속국이 됨

407 백제의 후방을 공략하여 沙溝城등 6성을 획득

410 동부여및 연해주 일원 정복

? 吉林등 북부여의 옛땅에 수사(守事;지방관)를 파견하여 통치함

412(永樂22年) 9월 붕어

414(장수왕3년)9월 광개토대왕비 건립됨

3. 광개토대왕 비는 언제 발견되었는가

능비의 현상

廣開土大王碑는 대왕의 勳績을 기리기 위해 대왕이 崩御하신 뒤 만 2년째 되는 414년, 즉 長壽王3년 9월에 대왕의 능과 함께 국내성 동쪽 언덕(지금의 中國 吉林城 集安市 太王鄕 大碑街)에 세워진 사면석비로 당대 고구려문화를 대표하는 기념비이다.

능비는 동쪽으로 45도 정도 치우친 동남향에서 서북방 방향으로 서 있는 데, 臺石과 碑身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대석은 약 20cm 두께의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다듬은 것으로 길이 3.35m 너비 2.75m의 크기인 데,현재 3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깨어져 나갔다. 비신은 우리가 흔히 보는 화강암이 아니라 방주형의 현무암질 화산암(종래에는 응회암으로 보았다.)에 약간의 인공을 가한 것으로, 너비 1.35 ~2.0m 높이 6.39m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크기이며, 蓋石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로 되어 있다.

비신의 4면에 모두 문자가 새겨져 있는 四面環刻碑인데,대체로 5.5m높이에서부터 비문을 조각하기 시작하였으며,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위하여 각면의 위와 아래에는 횡선을 긋고, 매행은 약 13cm간격으로 가는 종선을 그었다. 여기에 漢의 隸書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0~15cm 정도 크기의 모두 44행 1,775자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어 최근에 발견된 中原高句麗碑와 더불어 당대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밝혀주는 최고의 金石史料로 평가된다.

특히,韓國古代史의 경우 당대의 문헌 사료를 갖고 있지 못하여 미해결의 장으로 남겨진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陵碑는 고구려사는 물론 한국고대사의 발전과정을 해명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자료라고 할 것이다.

능비의 재발견

그러나 陵碑는 평양천도로 서서히 잊혀져 가다가 고구려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만주의 옛 땅과 더불어 역사의 비밀 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후 능비의 존재가 다시 알려지게 된 것은 麗末鮮初 때이다.세종대에 편찬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39,註解)}에는 공민왕 19년(1370)에 있었던 태조 이성계의 우라산성(于羅山城:지금의 오녀산성)공략을 칭송한 노래에서 집안지방에 皇城이 있으며 그 북쪽 7리되는 곳에 비가 있다고 기록하여 처음으로 능비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있다.이후 {芝峰類說}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문헌들에 능비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으나,여진족의 유적으로 오인하였을 뿐 이를 광개토대왕의 기념비로 인식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와같이 오랬동안 잊혀졌던 능비의 재발견 경위에 대해서는 보고가 엇갈려 있어 정설이 없으나,대체로 청나라가 만주지역의 封禁을 풀고 이지역에 懷仁縣을 설치한 직후인 1880년경이다.당시의 지사였던 章?이 개간에 종사하던 청나라 농부에 의하여 발견된 비를 關月山을 시켜 조사하게 한 뒤 비의 부분적인 탁본이 북경의 금석학계에 소개됨으로써 비의 실체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이 일대는 농민들이 이주하여 막 개간이 시작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능비는 황량한 벌판에 우뚝 서있는 상태였다.이후 능비는 1928년부터 1976년까지는 집안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등이 세운 2층 비각속에 있었다.

1930년대까지 활발히 진행되던 능비연구는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가 재조사가 시작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인 데,1963년에는 '中朝聯合考古調査團'이 구성되어 중국과 북한의 공동조사가 이루어지도 하였다.1976년에 관리소홀로 2층비각이 소실되어 능비는 또 한번의 수난을 겪게 되었는 데,이 때 비문 일부도 훼손되었을 뿐만아니라 능비 자체가 크게 손상되었다.

현재는 1982년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속에 있으며,비 주위는 보호구역으로 설정되어 철책으로 된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비의 파손을 막기 위해 5년에 한번씩 합성수지액을 주사하여 비를 보호한다고 하는데,그 부분의 변색 흔적이 역력하며 오랜 풍화와 여러 차례의 탁본등으로 현재의 비면은 옛 사진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표면의 마모된 흔적이 뚜렷하여 보호대책이 시급한 형편이다.

비문의 탁본과 조사

陵碑가 荒草중에서 발견되었을 때는 오랜 세월의 이끼로 인한 碑面 상태의 불량과 탁본여건의 미비로 정교한 전면 탁본이나 해석문은 만들어 지지 못하였다. 오히려 초기에는 가볍게 手拓을 하여 文字를 임의로 판정한뒤 문자 테두리를 먹으로 칠한 雙鉤加墨本이 일반적이었다 .

이러한 과정에서 1882년경에 만주를 정탐여행중이던 일본군 參謀本部의 밀정 포병중위 酒勾景信(사까와 카게노부)에 의하여 비문의 일부문자가 변조되기에 이르렀으며,酒勾景信이 일본으로 반입하였던 문제의 탁본도 바로 현지의 拓工을 매수하여 만든 쌍구본이다.

雙鉤加墨本이 일본에 반입되자 일본은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몇몇 역사가들을 동원하여 비문의 해독작업을 비밀리에 진행한 끝에 1889년에 어용기관지인 {會餘錄} 5집을 통해 그 내용을 세상에 처음으로 공표하였다.

중국의 경우 1887년경부터 李雲從(大龍)을 비롯한 北京과 천진의 탁공들에 의해 정교한 원석 탁본이 만들어 지자 비에 대한 금석학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의 원석 정탁본도 이미 비문 일부가 손상된 이후에 만들어 졌을 뿐만아니라 해석문 대부분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석문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이후의 능비연구가 일본에 의해 주도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뒤 1899년경부터는 일,청 양국에서 비문변조를 합리화 하거나 고가매매를 하기위해 보다 선명한 탁본을 얻고자 비면에 석회칠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비면의 마멸과 일부문자가 오독되기에 이르렀다.오늘날 남아 있는 탁본의 대부분이 이른바 石灰加工拓本으로 이경우 文字의 誤讀과 교란이 불가피하여 많은 논쟁이 되어 왔던 것이다.

이와같이 淸,日양국에 의해 주도된 碑文의 초기연구가 國內에도 알려져 {增補文獻備考}(1908)에 그 釋文이 수록되고 [皇城新聞]등에 碑文의 내용에 대한 소개 기사가 실리고 있는 것을 보아 舊韓末에 이미 碑에 대한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만주 일대를 방랑하면서 고구려유적을 답사하던 申采浩의 ?기구가 없어 자신의 팔로써 능묘의 둘레와 비의 길이,넓이를 재어서 몇발 몇뼘이라고 기록했을 뿐?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형편상 비문에 대한 우리학계의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음은 애석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陵碑의 탁본과 함께 노일전쟁이후에는 주로 일본인학자에 의해 능비주변의 유적조사가 진행되어 {朝鮮古蹟圖譜}{通溝}등으로 정리 출간되기도 하였다.그뒤 공백기를 거쳐 1957년부터 일부 중국학자에 의해 陵碑주변의 유적이 재조사되기 시작하였으며, 1963년에는 박시형을 비롯한 북한학자와 중국학자의 공동조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한학계의 연구를 제외하면 별다른 연구의 진전은 보이지 않으며, 1978년에는 능비의 보호각이 화재로 소실되어 비의 일부분이 손상되기도 하였다.

1981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중국학계의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며, 王健群의 {好太王碑硏究}가 공표된 1985년 이후에는 일본학자의 현지조사가 허가되어 {好太王碑探訪記} {好太王碑ど輯安の壁畵古墳}등이 일본에서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한국학계에서도 1986년에 처음으로 집안지역의 고구려 유적이 국내에 소개된 후 1989년부터 필자를 비롯한 관련학자들의 陵碑에 대한 현지 조사가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간헐적으로 비에 대한 개별적인 조사가 진행되고는 있으나, 아직까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학술조사는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더우기 비면 상태의 불량으로 단순한 육안관찰에 의한 릉비연구는 한계점에 온 것으로 보인다. 즉,陵碑의 경우 비문을 새긴 각이 깊고 재질이 부드러운 까닭에 마모되기가 쉽고 탁본을 뜨기가 어렵게 되어있다.이러한 이유로 비문의 문자 판독에 誤讀이 생겼으며 극단적으로 좋은 형태의 탁본을 만들기 위해서 비문에 진흙을 바르거나 石灰칠을 하기도 하여 비문변조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학계의 쟁점이 되어왔던 것이다.현재에도 일부 문자 주위에는 석회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오랜 풍화와 여러 차례의 탁본등으로 현재의 비면은 옛 사진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표면의 磨耗된 흔적이 뚜렷하였다.

따라서,앞으로는 보다 과학적인 장비를 동원한 정밀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며,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초기 原石精拓本의 조사와 각종 탁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시급한 형편이다.
 
 

4. 광개토대왕비문은 왜 변조되었는가

陵碑가 재발견된 이래 韓中日 삼국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었으나,능비의 연구는 고구려사를 중심으로한 한국고대사의 발전과정을 해명하였다기 보다는 辛卯年記事를 비롯한 고대 한일관계의 연구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陵碑의 연구사가 신묘년기사의 연구와 궤를 같이하게 된 주된 이유는 參謀本部를 중심으로 한 日本帝國主義 官學이 초기의 탁본 과정에서 변조 또는 오독된 자료를 토대로 신묘년기사를 왜곡 해석하여 이른바 '任那日本府'라는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진출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고, 나아가 일제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征韓論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酒勾景信에 의해 반입된 '雙鉤加墨本'을 처음으로 해독한 일본 참모본부의 촉탁 요코이(橫井忠直)는 '신묘년기사'를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0 0 新羅以爲臣民?으로 석독하고({會餘錄}5집,1989), 이를 바탕으로을 바탕으로 那可通世등 어용학자들의 '백제와 新羅는 예로부터 屬民이어서 朝貢을 해왔는데 倭가 辛卯年부터 바다를 건너와 百濟, 加羅, 新羅를 정복하여 臣民으로 삼았다.'는 요지의 해석이 오랫동안 정설로 인정되어 {일본서기}의 신공황후의 삼한정벌론과 결합되어 任那日本府說의 가장 중요한 논거가 되었으며,전후에도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이러한 견해가 수정되지 않은채 계속 주장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역사적 상황과는 모순된 견해가 일본학계의 통설로 인정된 이유는 幕末에서 明治維新기에 등장한 征韓論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정한론은 국학자들의 존황사상을 이념적 축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열강의 외압에 따른 위기와 손실을 조선침략으로 만회해야 한다는 代償論에서 비롯된 것인 데, 존황사상의 근거가 바로 일본서기의 건국신화에 나타난 삼한정벌, 임나경영등이었기 때문이다. {日本書紀}의 기사는 허구적 기록으로 사료적 가치가 떨어졌기에 이를 보완할 필요가 절실하던 차제에 마침 능비가 발견되자,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일본학계는 능비연구에 필요이상의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곧 근대 일본관학에 있어 능비의 변조와 왜곡은 그것이 단순한 고대 한일관계사의 문제여서가 아니라 근대 일본의 팽창정책의 동력이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당시의 역사적 史實과는 물론 한문의 어법에도 어긋나며(來渡海) 앞뒤의 문맥이 전혀 연결되지 않을뿐만아니라 고구려인이 大王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능비에서 倭를 主體로 기록하였을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이는 논리정연한 碑文의 일반적 문체와는 전혀 거리가 먼 의도적 견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위당 정인보선생에 의해 '왜가 신묘년에 건너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왜를 공파하였다'는 해석상의 반론이 제시되기도 하였으며, 당연한 결과로 신묘년기사중 일부 문자가 변조되었으리라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결국 신묘년기사의 쟁점은 지극히 단순한 사실인 비문의 주체와 객체가 누구냐는 것이며,현재의 비면상에서 그 점을 확실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가 변조나 오독에 의한 것이라면 누구에 의해 그러한 일이 진행되었으며,비문의 원상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 점을 제탁본의 변천과정을 통해 추적해 보기로 하자.
 

5. 광개토대왕비문의 진상은 무엇인가

-신묘년기사의 변상과 진상-

1) 사까와 쌍구가묵본(酒勾雙鉤加墨本)

쌍구가묵본이란 일반적인 탁본이 아니라 임의로 문자를 판독한뒤 비문에 종이를 대고 문자의 테두리를 그린 이후 문자의 바같쪽을 먹물로 칠하여 가공한 것으로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으로도 불리운다.이 경우 문자를 오독하는 경우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문제의 사까와 쌍구본은 능비 발견 직후 일본 참모본부의 밀정인 사까와가케노부(酒勾景信)중위가 변복을 하고 만주 일원을 정탐하던중 집안(集安)현지에서 비문 일부를 일본측에 유리하게 조작한 뒤 탁공을 매수하여 만든 수십매의 쌍구 단편을 일본에서 재편집한 것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탁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문제의 신묘년기사중 [海]자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2) 원석정탁본(原石精拓本)

능비의 발견당시는 비의 상태 불량과 현지 여건의 미비로 단편적인 탁본이나 가묵본이 유행하였을 뿐 정밀한 원석정탁본은 만들어 지지 못하였다.

최초로 전면 탁본이 만들어 지기 시작한 것은 천진(天津)이나 북경(北京)에서 전문 탁공이 파견되기 시작한 1882년 이후의 일인 데,지금까지 알려진 초기 원석탁본은 불과 4-5종에 지나지 않아 능비연구의 최대 난관이 되어 왔다.

일본의 미즈다니(水谷悌二郞)씨가 소장하였던 탁본,대만 부사년도서관 소장 탁본,한국의 임창순소장 탁본,최근에 발견된 중국의 북경대학 소장탁본등은 탁출년대에 약간의 異論이 있으나, 능비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인 능비 발견 초기의 원석탁본으로 비교적 선본(善本)들이다.

{쌍구본과는 달리 신묘년기사중 [海]자 부분의 자획은 분명치 않다.}
 
 
 
 
 
 
 
 
 
 
 
 

3)석회칠이 된 1918년경의 능비 모습

능비가 발견되어 얼마 지나지 않은 1900년대부터 청,일(淸日)양국에서 탁본의 고가매매(高價賣買)와 참모본부의 해독을 은폐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면에 진흙을 바르거나 석회칠(石灰塗付)을 하기도 하여,'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러한 짓을 하였을까?' 하는 비문변조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학계의 쟁점이 되어왔다.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탁본이 석회칠을 한 후의 탁본이며,지금도 비면의 일부에는 석회의 흔적이 남아 있어 비문연구의 장애가 되고 있다.
 
 
 
 
 
 
 
 
 

4) 석회가공탁본

문제는 석회가 탈락하기 시작하면서 원비면의 문자가 달라진다는 점이다.초기의 석회탁본에는 문제의 [海]자가 분명히 들어나지만 석회가 탈락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자획이 분명치 않아진다.초기의 원석탁본에는 보이지 않던 쌍구본의 [海]자가 왜? 보다 후일에 만들어진 석회탁본상에는 나타나는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석회칠을 통한 비문변조가 단순히 고가매매를 위한 것이 아니라 참모본부의 설을 은폐 보강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집단에 의해 의도적으로 저질러졌음을 알 수 있다.}
 
 
 
 
 
 
 
 
 
 
 

5) 석회가공탁본의 '왜만왜궤';원석탁본상의 ?왜?대궤?

신묘년기사 뿐만아니라 경자년(庚子年;永樂10년,400년)기사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들어난다. 종래의 석회탁본에는 ?왜만왜궤(倭滿倭潰)?로 '왜(倭)'의 등장을 부각시키는 방향에서 문자가 변조되어 있었으나,석회가 탈락한 후 집안현지에서 정밀 제작된 원석탁본에서 ?滿倭? 두글자는 찾을 수가 없으며, 주운태탁본을 비롯한 최근의 탁본에는 ?왜구대궤(倭寇大潰;왜구가 크게 궤멸되었다.)?임이 분명해져 비문변조를 둘러싼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한 일본 관학의 음모를 알 수 있게 되었다.
 
 
 
 
 
 
 
 
 
 
 

6)최근의 대표적 탁본

최근에 들어와 현대적 기법에 의해 새로운 원석탁본이 중국에서 만들어 지기 시작하였는 데 장명선탁본(張明善拓本,1963년)과 주운태탁본(1981년)이 대표적인 것이다.

중국학계에서 만든 최근의 탁본은 문자는 비교적 선명하지만 여기에서도 새로운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즉,중국에서 널리 사용되는 주운태 탁본은 정밀조사를 통해 종래에 오독되었던 문자를 바로잡는 성과도 있었으나,이것이 지나쳐 경우에 따라서는 문자를 임의로 판단한 뒤 기술적인 가묵법에 의해 불명확한 자를 명확한 자로 탁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묘년기사의 경우에도 일면 [海]자가 명확한 것처럼 보이지만 [海]자의 [ ]변은 다른 자와 달리 종선(縱線;비문을 반듯하게 쓰기 위한 세로금으로 비문의 모든 문자는 종선안에 새겨져 있다.)에 걸쳐 있는 것이 확실하다.여기에서 문제의 [海]자는 후대에 가획된 문자임이 오히려 분명해진다.}
 
 
 
 
 
 

7) 신묘년기사의 진상(眞相)

적외선 촬영을 한 현재의 비면이나 정밀한 원석탁본상에서도 [海]자는 찾을 수가 없다.더우기 종래에 [海]자의 { }변으로 추정하였던 자획은 문자로 볼 수도 없지만 종선에 걸쳐 있는 것이 분명히 확인된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같이 탁본상에는 물론 현재 비면의 손상이 심하여 [海]자의 원상이 어떤 자였는지를 정확히 확인하기는 어렵지만,{王}자와 같이 고구려가 문장의 주체임을 나타내는 동시에 고치기 쉬운 간단한 자형의 주어(主語)가 변조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며,'破百殘'다음의 또다른 목적어인 {倭}자는 의도적인 음모에 의해 삭탈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종래 아무 의심없이 보아왓던 신묘년기사 상부의 "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의 유래도 현지의 정밀한 조사에 의하면 '由未'일 가는성이 보다 높다고 보여진다.

즉,신묘년기사는 원래 ?백제와 신라는 옛 속민인데도 아직까지 종공을 바치지 않고 왜는 (무엄하게 대왕의 치세에 함부로) 건너오자, 대왕이 (臣下가 되기로 한 誓約을 어긴) 백제와 (그 동조자인) 왜를 공파하고,신라는 복속시켜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는 간단 명료한 기사인데,참모본부를 비롯한 일제의 관학이 그들이 설정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허구(虛構)를 증거하기 위하여 비문의 당연한 주어와 목적어를 교묘히 변조,삭탈하여 바꿔치기 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거짓에 의해서는 온전히 꾸밀 수 없는 것이며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다.오늘에 있어 능비는 그들의 가설을 증명해 주는 사료이기는 커녕 오히려 帝國主義에 봉사한 일본 근대관학의 체질적 한계를 밝혀주는 자료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6.광개토경은 어디인가

1)북방경략의 웅지

廣開土大王은 소수림왕대의 국력배양을 바탕으로 남진정책을 강화하는 동시에 전통적인 중국 대륙으로의 西進을 비롯한 북방영역의 개척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다만, 廣開土王代의 북방경략은 새로운 영토확장만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방대해진 帝國내의 영역과 제 민족집단을 중앙통치하에 효율적으로 집결시키고, 遼河線에서 大凌河유역에 이르는 유동적인 국경지대를 확보하여 對 중국관계에서 외교적 우세를 점하는 데에 중요한 정책적 목표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⑴ 契丹征討와 西北方 領土 巡狩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후 최초의 대규모 원정은 영락 5년(395년)에 이루어졌다. 비문에 의하면

?영락5년에 대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富山,부산을 지나 鹽水가에 이르러 稗麗 3부락의 6백-7백營을 공파하고 수많은 소,말,양등을 획득하였으며, 襄平道로 개선하는 길에 北豊등 遼河부근의 土境을 巡狩하였다.?

고 한다.패려의 정체와 원정지역인 염수의 위치에 대한 학계의 견해는 엇갈려 있지만, 대체로 패려는 高句麗인이 契丹을 지칭한 비칭으로 생각되며, {三國史記} 소수림왕·광개토왕紀에 나오는 契丹관계 기사는 이를 반영한 것이라 생각된다.

契丹은 후일 만주에서 遼라는 정복왕조를 세우지만, 당시에는 아직 국가로서의 규모를 갖추지 못하고 8部로 분립된 채 중국의 북변이나 高句麗의 서북방을 침구하던 유목 민족이었다.

따라서 유목민족인 契丹의 住地를 정확히 추정하기는 힘들지만, {屬通典}과 {遼史} 食貨志 등의 기록으로 보아, 이때의 契丹 3部는 원주지인 흥안령산맥 남쪽의 시라무렌강 유역의 염호부근에 이동 중이었던 契丹족의 일부로 보여진다.

시라무렌강 유역은 後燕의 도성이 있는 朝陽의 서북쪽으로,高句麗의 對後燕 견제정책의 의미를 지니는 작전인 동시에 만주의 서쪽 끝인 초원지대를 공략한 상징적인 정복전쟁이라고 할 것이다.

후반부의 순수기사는 종래의 연구에서는 주목받지 못하엿으나, 유동적인 국경지대의 통치권을 재확인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한 성격의 기사로, 이때에 이르러 요하일대가 고구려의 영역으로 완전히 편제되었음을 뜻한다.

⑵ 大凌河유역 진출과 後燕의 복속

소수림왕대에 高句麗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던 前秦이 ?水의 싸움에서 붕괴되자 北中國은 다시 혼란기에 접어들어, 慕容垂에 의해 세워진 後燕이 신흥한 北魏의 압박에 밀려 遼河의 서쪽 朝陽으로 옮겨오게 되자, 高句麗는 자연 遼東을 사이에 두고 後燕과 대립하게 되었다.

{三國史記}와 {資治通鑑}의 기록에 의하면 王 9年(399년)에서부터 17年(407년)에 이르기까지 後燕과의 공방전이 간단없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後燕과의 전투는 高句麗의 공세적 입장에서 시작되었으며, 王 11年에는 遼河를 넘어 멀리 後燕의 都城 가까이에 있는 宿軍城을 공략하여 平州刺史 慕容歸를 패주시켰으며,이어 燕郡을 공략하였다. 이로써, 高句麗의 영토는 遼河線을 넘어 大凌河유역까지 확장되었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後燕과의 전쟁은 대왕의 남진정책 수행을 이면으로 하여 전개된 까닭에 오래 지속되었지만 결과는 高句麗의 일방적 승리였다. 後燕은 高句麗와의 항쟁 과정에서 내분이 일어나 붕괴되고 高句麗의 지속인 高雲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는 高句麗의 영향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즉, 1976年에 발견된 德興里古墳의 幽州刺史 鎭은 그 墨書銘文에서 後燕의 고위관직에 있었던 人物임이 분명한데, 이러한 인물이 귀화하여 廣開土大王의 重臣으로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宿軍城전투 이후 後燕은 거의 高句麗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永樂 17年에 大王이 北燕 왕인 高雲에게 宗族의 예를 베푸니, 高雲이 사신을 보내어 여기에 보답하였다는 기사는 이 점을 보다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對中國 關係가 高句麗의 우세한 입장에서 우호 외교관계로 들어감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遼河線의 완전한 확보를 뜻하는 것으로 高句麗史의 발전과정에 있어 그 역사적 의의가 적지 않다고 하겠다.

(3)동부여 및 연해주 정복

후연과의 공방전과 남진정복이 일단락 된 뒤인 ?영락20년에 대왕은 조공을 중단한 東夫餘를 친정하였는데, 동부여가 저항없이 왕의 덕화에 귀의하자 대왕은 그를 가상히 여겨 은택을 베풀었다.?고 한다. 여기에서의 동부여는 국초의 동부여라기보다는 모용씨에 ?긴 북부여의 잔류세력이 이동하여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그 위치에 대해서는 吉林일대로 보거나(중국학계), 영흥만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두만강에서 목단강유역에 이른 동부만주와 연해주 일대로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陵碑에서 북방경략기사는 남진기사에 비해 비중이 낮으나, 과소 평가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된다. 이는 만주 중심부가 이미 고구려의 구토였기 때문이다.따라서 정복기사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한 만주의 극서와 극동지역의 정복기사는 {自治通鑑}에 보이는 後燕 정토 기사와 더불어 당대 고구려 팽창정책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2)남진정복의 성격- 국부민은과 통일의지의 구현

고구려의 대외발전에 있어 대중국항쟁을 통한 요하선의 확보와 북방진출에 못지 않게 중요한 정책 목표는 남진에 잇었다. 이러한 남진정책은 이미 한군현의 세력을 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한 미천왕때부터 그 역사적 기반이 마련되지만 이때에 이르러 보다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비문의 기사중에서도 영락6년에서 부토 17년에 걸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백제에 대한 정토전과 신라에 대한 복속정책 및 이에 부수되는 왜에 대한 토멸전으로 표현되는 남진 정복기사이다. 이러한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실질적인 농경지의 확보에도 중요한 목적이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사의 발전 과저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인 동일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한 통일의지의 실천적 구현이라는 점에 있다.

(1)백제정복

永樂 6년(396); ?영락6년에는 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관미성,아단성 등 58성과 700촌을 공파하고,阿利水를 건너 백제의 도성에 까지 육박하니 백제의 阿薪王이 영원히 신하가 되겠다는 맹세를 하고 항복하므로, 대왕이 은택을 베풀고 백제왕이 바친 生口와 인질을 받아 개선하였다.?고 한다. 신묘년기사와 연관하여서는 논란이 있으나, 6년조 자체의 경우는 구체적인 지명비정에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당시의 작전지역을 황해도 남부에서 한강 유역 및 서해안 일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충남일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전쟁의 결과 고구려는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백제와 예속적인 지배관계인 朝貢關係를 맺는다.

이후 영락9년,14년,17년에 걸쳐 백제와의 치열한 전쟁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永樂14년(404); 고구려가 후연과의 남방전선에 소홀해진 틈을 타 백제가 "영락14년 왜병을 앞세워 고구려의 대방계에 침입하니,대왕이 친히 친위병을 동원하여 이를 격파하고 무수한 왜구를 참살하였다."고 한다. 종래에는 왜 단독의 군사행동으로 보았으나 왕건군의 석문이래 백제와 왜의 합동작전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지고 있으며, 왜를 백제의 용병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永樂17년(407); "영락 17년에 대왕은 5만의 보기를 파견하여 (백제?)를 처서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으며,개선하는 길에 사구성등 6개의 성을 공파,획득하였다.?고 한다. 영락17년의 경우 후연의 宿軍城공략기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획득한 沙口城이 {三國史記}전지왕조에 나온다는 점과,{自治通鑑}의 숙군성 공략은 영락 11년의 일로 연대가 맞지 않으며, 능비가 건립된 장수왕대에는 이미 후연을 이은 북연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이때의 고구려에 있어서는 이미 요하선의 확보가 새로운 영토확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던 까닭에 능비에서는 숙군성 공략기사뿐 아니라 후연 정벌기사 전체가 생략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2)신라구원과 복속

永樂8년(398); ?소규모 군사를 파견하여 국경지역의 백신토곡을 관찰하고, 이어서 인접한 국가의 加太羅谷등에서 3백여인의 民戶를 획득하는 한편,이 후부터는 조공관계를 맺기로 하였다.?고 한다. 문자의 마멸과 구체적인 국명의 생략으로 종래부터 8년기사의 정복대상을 연해주 일대의 肅愼이나, 강원도 일대의 穢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어왔다. 최근에는 백제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는 8년기사 전체를 동일한 성격의 기사로 보았던 때문으로,전반부와 후반부의 기사가 동일한 지역의 작전기사가 아니라는 점과 동예는 태조왕때,숙신은 서천왕때에 고구려가 이미 정복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반부의 기사는 강원도 일대의 고구려토경을 관찰한 기사이며, 후반부는 산악을 경계로 하여 이에 인접한 국가,즉 신라에 대한 복속기사로 볼수 있으며 이로부터 신라는 고구려의 조공지배권에 편입 된것으로 생각된다.

永樂9년(399); ?영락9년에는 백제가 전일의 맹세를 어기고 倭와 화통하자,이를 응징하기 위하여 대왕이 평양으로 南巡 하였는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전일에 이미 대왕의 덕화에 귀의하여 신하가 되었음을 전제로 국경에 침구한 왜구를 격퇴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마모된 곳이 적어 기사의 내용은 명확하지만 '奴客爲民'의 해석을 둘러싼 한일학계의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일본학계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신라왕이 倭에 대해 '노객'을 자처했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반면 한국학계의 경우는 대체로 신라왕이 광개토대왕의 신하임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고 있다.

永樂10년(400); 이를 명분으로 ?영락10년에 왕은 5만의 보기를 파견하여 낙동강 유역에서 왜를 격퇴하고,任那加羅 및 安羅를 복속시키는 한편 신라를 구원하였다. 그 결과 종래와는 달리 신라국왕이 직접 고구려에 조공하였다.?고 한다. 결락문자가 많아 종래부터 이론이 많은 부분으로 왕건군의 석문이후 安羅人戍兵의 정체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견해가 나타나고 있다.安羅로 보는 통설에 대해 羅人을 신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최근에는 특정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순라병으르 보는 견해도 제기 되었다. 명확한 것은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조공지배가 강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기사이다.

(3)왜구토멸

대왕의 남진 정복 가운데 특기할만 한 것은 왜의 등장이라 할 것으로 능비문의 왜 관게기사는 한일 양국에서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부부이다. 그러나 변조와 결락문자가 잇는 신묘년기사를 제외한다면 비문에 있어 고구려의 왜에 대한 토벌전은 오히려 그 성격이 명확하다. 즉,고구려의 남진에 있어 倭는 백제,신라,가라와는 달리 복속의 대상이 아니라 '追,滅'의 대상이었다는 점을 본다면,당시의 왜는 고정된 거점이 있었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또한,비문의 임나가라는 대가야의 원명으로 추정되며,작전과정에서도 가라,안라등이 주이며,왜는 종으로 나타난다.따라서 비문의 기사는 일본에서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이를 반증하는 자료라고 볼수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같이 능비의 기사는 주로 남진기사에 경도되어 있다.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에 있어 주 정복대상은 백졔와 신라 및 동부여였으며,왜와 비려등은 부수적인 대상으로 단지 토멸의 대상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중원 고구려비의 '世世爲願,如兄如弟,上下相和,守天'의 표현에서 보듯이 이는 당대 고구려에 있어 백제와 신라 및 동부여가 왜,비려와는 성격이 다른 동일 세력권 내의 민족집단으로 인식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광개토대왕의 남진 정책은 단순히 구복(口腹)을 채우기 위한 침략전쟁이 아니라 민족사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최초의 統一意志의 표현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7. 맺는말-능비의 연구과제와 廣開土境의 역사적 의미

廣開土大王碑는 문자 그대로 '광개토경'의 위업을 이룩한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기리는 頌德碑로서 朝貢支配를 이상으로 하여 인국에 대한 정복전쟁을 수행하는 한편 국내영토의 순수를 통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완성하고자 한 당대 고구려 정치사의 다양한 사실이 유기적으로 구성된 생생한 역사기록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광개토대왕의 팽창정책을 비롯하여 고구려인의 天下觀등 고구려사의 발전과정은 물론 동아시아세계의 생동하는 국제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능비의 연구는 문헌사료의 부족이라는 韓國古代史가 갖는 일반적 한계와 高句麗史硏究의 현실적 한계및 삼국 학계의 입장의 차이에 의하여 방대한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논의는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辛卯年記事의 판독과 해석에서 보는 바와 같이 變造된 碑文을 토대로 한 初期 日本官學에 의해 陵碑가 '임나일본부'의 주요 근거로 제시된 이래 일본학계는 당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서 倭를 주도적으로 보고자 한 까닭에 비문연구의 방법론상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답보상태에 머므르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학계의 경우에도 碑文의 구조나 用辭의 면밀한 검토없이 倭의 등장에 대한 攻防에 경도된 나머지, 主客이 전도되어 일방적 해석이나 缺字의 복원도 단순한 방법에 의거 古代 韓日關係의 입장을 합리화 하는데 지나치게 노력을 낭비해 온 느낌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능비연구의 기본적인 자료가 되는 원석탁본을 비롯한 연구자료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입장의 차이에 의하여 객관적인 자세를 지키지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같이 비문을 통한 고대 한일관계사연구는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최근 한국학계의 {日本書紀}를 비롯한 고고학적 자료를 활용한 '任那日本府'를 비롯한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는 하나의 진전이라고 할 것이다.

정복기사의 연구에 있어서도 그간의 연구는 주로 정복지역의 비정에 매어 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따라서 陵碑가 원래 나타내고자 하였던 高句麗의 朝貢支配라는 自尊的 對外意識을 배경으로한 征服戰의 성격에 대한 구조적 이해가 부족하였다. 그 결과 오히려 정복대상이나 위치비정에 혼선이 오게 되었다.특히 廣開土境의 의미를 단순히 영토확장으로 이해하였던 까닭에 남진의 대상을 북방에서 구하고자 한 오류가 생기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북방진출의 범위도 이미 고구려의 구토가 된 지역에서 구하는등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辛卯年記事를 비롯한 광개토왕릉비의 연구는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한 韓國古代史 자체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학계의 한국사 왜곡에 대한 체질 비판에 까지 연결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비문의 올바른 判讀과 解釋은 곧 왜곡된 한국고대사의 再構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능비연구가 倭의 등장에 대한 논쟁에서 벗어나,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고대사의 발전과정의 해명이라는 능비연구 본류에 도달하기 위하여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의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가 요망된다고 할것이다.

광개토대왕은 위대한 정복군주인 동시에 유능한 통치자였다.광개토대왕대 고구려의 정복전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실질적인 농경지의 확보와 민호의 획득을 통한 국력배양에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전제왕권의 자존적 대외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인국에 대한 정토를 합리화하는 동시에 주 정복대상에 대하여는 그러한 복속관계를 구체화하고자 하였던 점에 있다고 하겠다.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에 있어 주 정복대상은 백졔와 신라 및 동부여였으며,왜와 비려등은 부수적인 대상으로 단지 토멸의 대상일 뿐이었다는 점이다.이는 고구려에 있어 백제와 신라 및 동부여가 왜,비려와는 성격이 다른 동일 세력권 내의 민족집단으로 인식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광개토대왕의 남진 정책은 민족사의 발전과정에서 최초의 統一意志의 표현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민족의 영광을 위해 점철하였던 광개토대왕의 생애가 어제의 것이 아니라 오늘의 것으로 항상 새롭게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는 잃어버린 만주의 옛 강토에 우뚝서 있는'廣開土大王碑'는 남북분단이란 현실을 극복하고 민족의 통일이란 민족사적 과제를 안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웅변으로 말하여 주고있다.
 
 
 
 
 
 
 
 
 
 
 
 
 
 
 
 
 
 
 
 
 
 
 
 
 
 
 

參 考 文 獻

1.韓國 論著

[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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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進熙, {好太王碑の謎} 講談社,1973

文定昌, {廣開土大王勳績碑文論} 柏文堂,1977

李進熙, {廣開土王碑と七支刀} 學生社,1980

李進熙著,李基東 譯, {廣開土王碑의 探究} 일조각,1982

李亨求,朴魯姬, {廣開土大王陵碑 新硏究} 同和出版公社,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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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봉편,{고구려 남진 경영사의 연구}백산자료원,1995.참조.

임기중, {광개토왕비원석초기탁본집성} 동국대출판부,1995

서영수 외,{광개토호태왕비연구 100년} 고구려연구회,1996

[論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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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중, [북경에서 조사한 광개토대왕릉비 탁본과 석문 13종에 대하여]({서통}1994,8)

연민수,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대외관계]({한국고대사연구}10,1995)

윤명철, [광개토대왕의 대외정책과 동아지중해역학관계]({군사}30,1995)

2.北韓 論著

[著書]

朴時亨, {廣開土王陵碑} 사회과학원출판사,1966

金錫亨, {朝日關係史硏究} 사회과학원출판사,1966;{고대한일관계사}한마당,1988,서울.

리지린,강인숙, {高句麗史硏究} 사회과학원출판사,1976

[論文]

리지린, [광개토왕비 발견의 전말에 대하여] ({력사과학} 5,1959)

金錫亨, [三韓三國의 日本列島分國들에 대하여] ({歷史科學} 第1號,1963)

김유철, [고구려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왜의 성격] ({력사과학} 1986-1)

손영종, [광개토왕릉비를 통하여 본 고구려의 영역] ({력사과학}1986-2),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수묘인연호의 계급적 성격과 립영방식에 대하여]({력사과학}1986-3)

채희국, [광개토왕비문의 해석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력사과학}1988- 2)

박진석, [호태왕비문을 통하여 본 임나일본부의 존재여부 문제](1), (2) ({력사과학}1989- 1,2)

高寬敏,[永樂10년,高句麗廣開土王の新羅救援戰についで]({조선사연구회논문집}27,1990)

3.中國 論著

[著書]

王健群,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1984(일역,{好太王碑}の硏究,雄渾社,1984; 임동석역,{광개토왕비연구}역민사,1986)

王健群ほか, {好太王碑と高句麗遺跡} 讀賣新聞社,1988.6

박진석, {好太王碑與古代朝日關係硏究}연변대학출판사,1993

耿鐵華, {好太王碑新考},吉林人民出版社,1995

[論文]

王志修, [高句麗永樂好太王碑攷] ({高句麗永樂好太王古碑歌攷},1898)

榮 禧, [高句麗永樂好太王墓碑?言] ({古高句麗永樂太王墓碑文攷},1903)

羅振玉, [高句麗好太王陵碑跋] ({唐風樓金石文字跋尾},1907)

楊守敬, [高句麗廣開土好太王談談德碑跋] ({增訂?宇貞石圖},1909)

談國桓, [手札] ({遼東文獻徵略},1925)

劉 節 , [好太王碑考釋] ({國學論叢} 第2卷 第1號,1928)

王健群, [好太王碑的發現和垂拓] ({社會科學戰線} 4,1983,)

高明士, [臺灣所藏高句麗好太王碑拓本] ({韓國學報} 3,1983)

徐建新,[好太王碑原石拓本的新發見及其硏究]({世界歷史}1993,2),[北京現存好太王碑原石拓本的調査與硏究]({韓國硏究}1994,12)

4.日本 論著

[著書]

佐伯有淸, {硏究史 廣開土王碑} 吉川弘文館, 1974.{廣開土王碑と參謀本部} 吉川弘文館, 1976.

水谷悌二郞, {好太王碑考} 開明書院, 1977.

佐伯有淸, {七支刀と廣開土王碑},1977.

寺田隆信,井上秀雄 {好太王碑探訪記}日本放送出版協會,1985.

寺田隆信, {好太王碑} ぎようせい,1985.

三上次男ほか, {シンホウム好太王碑} 東方書店,1985.

藤田友治, {好太王碑論爭の解明} 新泉社,1986.

武田幸男,{廣開土王碑原石拓本集成}(東京大出版部,1986)

讀賣テレビ放送編, {好太王碑と集安の壁畵古墳} 木耳社, 1988.

山尾幸久{古代の 日朝關係}槁書房,1988.)

武田幸男,{高句麗史と 東アシア} 岩波書店, 1989

白崎昭一郞,{廣開土王碑文の硏究},吉川弘文館,1955.

佐伯有淸,{古代東アジア金石文論考}吉川弘文館,1995

[論文]

靑江秀, [東夫餘永樂太王碑銘之解] (國會圖書館藏,1884)

橫井忠直,[高句麗古碑考(明治寫本)] (宮內廳 書陵部藏,1984),[高句麗古碑釋文] ({會餘錄} 第5集,1989)

那珂通世,[高句麗古卑考] ({史學雜誌} 第47~49號,1893)

三宅米吉,[高麗古卑考] ({考古學會雜誌} 第2編 第1~3號,1898)

津田左右吉,[好太王征服地域考] ({朝鮮歷史地理} 第1卷,1913)

黑板勝美,[高句麗好太王碑縮本,同解說] ({朝鮮彙報} 6月號,1918)

末松保和,[好太王碑の辛卯年にっいて] ({史學雜誌}46-1,1935)

池內宏, [廣開土王碑の由來と碑石の現狀]({史學雜誌}49-1,1938,)

酒井改藏,[好太王碑面の地名にっして ({朝鮮學報} 第8輯,1955)

水谷悌二郞,[好太王碑考]({書品} 100,1959)

中塚明, [近代日本史學史における朝鮮問題- とくに{廣開土王陵碑} おめぐって]({思想} 第561號,1971)

佐伯有淸,[高句麗廣開土王陵碑の再檢討-とくに'辛卯年'の倭關係記事めぐで]({續日本古代史論集}上,1972)

井上秀雄,[高句麗の南下と廣開土王陵碑] ({古代朝鮮},1972)

古田武彦,[好太王碑文 '改削'說の批判] ({史學雜誌} 82-8,1973)

旗田魏, [古代日朝關係史の硏究] ({朝鮮史硏究會會報} 33,1973)

浜田耕策,[高句麗廣開土王碑文の虛像と實體] ({日本歷史} 第304號,1973),[高句麗廣開土王碑文の硏究]1974,[高句麗廣開土王碑文の硏究-碑文の構造と史臣の筆法を中心とて]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1;{古代朝鮮と日本},學生社)

武田幸男,[高句麗好太王碑文にみえる歸王にっいて] ({古代東アジア史論集}(上),1978),[廣開土王碑文辛卯年條の再吟味] ({古代史論叢} 上,1978)[高句麗廣開土王紀の對外關係記事] ({三上次男頌壽紀念論集},1979)

鈴木靖民,[好太王碑の倭の記事と倭と實體] ({好太王碑と集安の壁畵古墳},1988)

鈴木靖民,[廣開土王碑文の 倭關係記事] ({東アジア古文書の史的硏究},1990)

李成市,[表象として廣開土王碑文]({思想}842,1994)
 
 
 
 
 
 

1 廣開土大王陵碑 釋文 (1)王健群-水谷
14 13 12 11 10 9 8 7 6 5 4 3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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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廣開土大王陵碑 釋文(2)
14 13 12 11 10 9 8 7 6 5 4 3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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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 滿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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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4
? 35
? ? 36
? 滿 ? 37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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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倭  40
? 退 ? 41
 
 

3 廣開土大王陵碑 釋文 (3)
14 13 12 11 10 9 8 7 6 5 4 3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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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廣開土大王陵碑 釋文 (4)
14 13 12 11 10 9 8 7 6 5 4 3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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使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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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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