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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句麗 土器의 形成에 대하여

                                                                       朴淳發(忠南大 考古學)

I.머리말
II. 渾江 및 鴨綠江 中流流域의 靑銅器文化 展開
III.渾江 및 鴨綠江 中流流域의 初期鐵器 文化
IV.高句麗 土器의 形成
V. 高句麗 土器의 變遷
VI. 맺음말

I. 머리말
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 전반경 즉, 구체적으로 B.C. 75년경에는 聯盟王國의 단계의 국가로 성립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李基 白 李基東1996 : 81). 고구려의 국가 성립에 대한 이러한 연대관은 고고학적인 연구의 결과(Rhee, Song-nai 1992)와도 일치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고구려의 국가성립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고고학적인 양상으로서 고구려 토기의 형성에 대해 검토해 보 고자 한다. 삼국시대의 경우 특정 양식의 토기 형성은 대략 국가단계에 이른 특정 정치체의 형성과 거의 일치되고 있음이 최근 일련의 고고학적인 연구들에서 확인되고 있어(朴淳發1996 ; 李熙濬1997) 고구려의 경우도 과연 그러한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백제 건국세력의 出自를 고구려계 또는 부여계 고구려로 파악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이를 고고학적으로 검토할 필 요를 느껴왔다. 종래 가락동2호분 등 한강유역의 백제고분에 보이는 黑色磨硏土器를 근거로 이를 고구려토기의 영향으로 이해하 여 백제 건국세력의 고구려 출자설의 고고학적인 자료로 보는 견해(金元龍1986 : 175)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뒷 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고고학적인 검토는 없었다. 필자는 종래의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인 입장을 취한 바 (朴淳發1992) 있다. 본고는 필자의 입장과 관련한 고고학적 검토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토기의 구체적인 모 습을 살펴봄으로써 한강유역의 흑색마연토기와의 차이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본고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들을 중심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첫째, 고구려의 발상지인 渾江 및 鴨綠江 중류지역 일대의 청동기시대 유적들에서 확인되는 무문토기의 양상과 변천에 대한 것 이다. 이는 고구려토기의 형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공간적인 토대가 된 이 지역의 선행문화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기 때문이 다.
둘째, 혼강 및 압로강 중류지역의 초기철기문화 유적의 분포와 그 출토유물에 대해 일별하고자 한다. 이 역시 청동기시대 이래 의 고구려의 선행문화로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고구려토기의 형성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 불가결의 전제적인 단계이기 때 문이다.
셋째, 이와 같은 선행문화들의 검토를 통해 고구려토기의 初現形으로 이해되고 있는 魯南里型土器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 형성과 관련한 여러 요소들을 알아 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남리형토기의 출현 시기와 고구려의 국가 성립 시점을 비교해 봄으로써 국가체의 형성과 노남리형토기 형성과의 관련성도 밝혀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구려토기의 변천상을 일별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강유역을 비롯해 최근 남한지방에 점차 확인예가 증가하고 있는 고구려토기의 편년적인 위치를 판단할 수 있는 기초자료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본고의 내용은 대부분 도면과 보고서상의 記述을 토대로 할 수 밖에 없는 자료접근상의 제약으로 인해 다수의 오류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고구려토기의 형성과 관련한 專論이 없었다는 점에서 하나 의 試論으로서의 의의는 가질 수 있으리라 위안하고자 한다.
 

II. 渾江 및 鴨綠江 中流流域의 靑銅器文化 展開
필자는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의 변천을 청동기의 제작 및 사용을 근거로 크게 3단계로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다.(朴淳發1993a) 첫째단계는 아직 琵琶形銅劍이나 銅斧 등 발달된 청동무기가 등장하지 않는 단계로서 靑銅刀子나 간단한 장식품만이 제작 사용되 는 시기이다. 이 시기를 先銅劍期라 부르고 있다. 다음은 비파형동검을 표식으로 하는 본격적인 청동기가 제작 사용되는 단계로 서 이를 琵琶形銅劍期로 부르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비파형동검이 細形銅劍으로 변천된 단계로서 이 시기를 細形銅劍期라 한다. 한반도의 각 지역별 구체적인 청동기문화의 전개과정은 다음 <표1>과 같은데 이러한 시기구분은 혼강 및 압록강유역에도 적용가능한 것으로 판단된다.

<表 1>韓國 靑銅器文化의 展開

이제 이를 토대로 최근까지 확인된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의 전개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 지역에서 확인된 대표 적인 청동기시대의 유적 및 토기문화의 내용은 다음 <도1>과 같다. 千山山脈 이동의 요녕동부지역 및 吉林 남부지역에 대 한 청동기문화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 최근에 확인된 것이어서 아직 자세한 지역 편년이 설정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최근 논의되고 있는 이 지역 청동기문화에 대한 기초적인 편년연구의 결과들(李恭篤1985 ; 鄭漢德1990)에 따르면 필자의 전술한 편년체계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즉, 비파형동검으로 대표되는 본격적인 청동기의 제작 사용 시점을 기준으로 그 이전 의 시기와 그 이후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이에 해당되는 이 지역의 구체적인 청동기문화들로는 선동검기의 廟後山類型文化와 비파형동검기의 公貴里類型文化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유형의 문화는 토기의 형태상으로는 뚜렷이 구분되기는 어려우나 후자의 경우 비파형동검과 공반되는 美松里形土器를 포 함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토기의 형태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전자의 묘후산유형토기에는 구연부 아래 또는 목부분에 突帶가 부착되거나 胴體에 닭벼슬형의 장식이 있어(李恭篤 劉興林 齊俊1985) 공귀리유형과 구분이 가능하다. 이러한 특징은 요동 반도를 비롯한 遼南지방의 新石器末期 단계 于家村 下層文化의 토기들에서 전형적으로 관찰되는 장식이어서 묘후산유형은 이 지 역의 신석기말기-청동기초기에 이르는 과도기로 이해되고 있으며 그 시작은 C14연대에 의해 B.C. 1600-1300년경으로 비정하고 있 다.(李恭篤1985)
공귀리유형은 미송리형토기를 공반하고 있음은 전술한 바와 같은데, 미송리형토기는 <표1>에서 보듯이 비파형동검의 초기 형과 함께 B.C. 1100 경에 출현하여 B.C.7세기 중엽경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미송리형 토기의 後身인 묵방리형토기를 포함하 면 기원전 400년경까지 지속되고 있어 그 시간폭이 매우 길다. 그런데, 공귀리나 심귀리 등 공귀리유형의 유적에서 공반되는 미 송리형토기는 대략 제2기 단계까지로 볼 수 있어 공귀리유형의 시기는 기원전 10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기원전 600년경까지로 비정할 수 있다.
혼강 및 압록강 중류유역의 청동기시대 토기 가운데는 공귀리유형과 거의 동일하나 把手의 형태가 橋狀으로 된 것들이 있다. 이 들을 출토하는 유적들의 대부분이 아직 정식 발굴조사된 것이 아니어서 정확한 양상 파악이 어려우나 공귀리유형 보다 얼마간 늦 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해당되는 유적들로는 本溪地域의 後台子, 九龍頭, 桓仁地域의 圈溝, 通化地域의 王八 子, 拉拉屯, 그리 고 평안북도 벽동군 송련리 등이 있다.(圖2참조) 이들 유적 출토 토기들에 특징적으로 보이는 縱 橫의 교상파수는 미송리형토기 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그 것은 어떻든 이러한 교상파수는 고구려토기인 노남리형토기의 전형적인 요소이므로 이것 이 다음의 고구려토기의 기반이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공귀리유형 이후에 이어지는 이와 같은 토기문화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한 연구가 없으나 필자는 편의상 대표적인 유적의 명칭을 따라 拉拉屯類型이라 부르고자 한다.
납납둔유형은 결국 이 지역의 청동기말기에 해당되는 토기문화인 셈이다. 그런데 그 하한연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가 없다. 그러나 뒤에서 보는 것처럼 세형동검과 더불어 나타나는 철기문화와는 공반되지 않아 <표1>에서 보듯이 B.C. 30 0년경을 하한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여 혼강 및 압록강 중류유역의 청동기시대 토기문 화의 전개를 정리하면 다음의 <표2>와 같다.
<표2> 渾江 및 鴨綠江 中流流域 청동기문화의 編年

III. 渾江 및 鴨綠江 中流流域 初期鐵器 文化
우리나라의 초기철기문화의 전개과정은 크게 3단계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朴淳發1993b) 제1단계는 청천강이북의 한반도 서북지 역에 국한된 것으로서 그 대표적인 유적들인 요녕지방의 무순 연화보유적과 평안북도 영변군 세죽리유적의 명칭을 따라 세죽리- 연화보유형(細竹里-蓮花堡類型)문화라고 부르는 전국계 철기문화이고, 제2단계는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의 토광묘 계열의 무덤들에서 출토되는 철기들로서 戰國系 鑄造鐵器 및 秦漢交替期 또는 漢初의 철기문화이며, 제3단계는 漢四郡의 설치와 함께 본격적으로 확산되어 오는 漢代의 철기문화이다.
그러나 제1단계의 세죽리-연화보유형은 자세히 살펴보면 다시 세분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기원전 300년경을 전후한 시점에 처 음 들어온 千山山脈 以西의 戰國 燕의 철기문화와 그 이후 진에 의한 연의 멸망시기,진한교체기 그리고 한초의 위만세력의 이동 등의 복합적인 결과로 나타난 그 以東 청천강 이북지역의 철기문화로 구분될 수 있다. 따라서 보다 엄격히 한반도지역만을 대상 으로 한다면 청천강 이북의 철기문화는 전국 연나라의 철기문화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국연과 진대의 철기문화를 현실적으 로 자세히 구분하기는 어려우므로 기왕에 지칭해오던 세죽리-연화보유형이라는 명칭을 굳이 다른 것으로 바꿀 필요성은 느끼지 않는다.
제2단계의 대동강유역에까지 미친 철기문화 역시 당시 이 지역의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세분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 선 고조선과 연의 군사적인 충돌의 결과로 인해 천산산맥 이서의 요녕지역에 전국 연의 철기문화가 직접적으로 미친 이후 머지 않아 고조선에도 연의 철기문화가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 철기문화를 소지한 인간집단의 직접적인 이주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나 적어도 철기의 기술만은 파급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와 관련되는 고고학적인 자료로는 황해도 솔뫼골에서 세형동검, 다뉴경 등과 함께 출토된 주조철부를 들 수 있다. 이 무덤은 토광목관 주변에 돌을 채운 이른바 돌돌림무 덤으로서 이러한 형식의 무덤은 요녕지방의 세형동검기에 나타나는 것이어서 전국 연과 관련되는 묘제는 아나다. 그리고 연의 철 기문화가 직접 미친 요녕지방의 경우 주조철부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주조철기가 전국시대의 특징적인 타날문토기와 함께 나오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보면 주조철부 1점밖에 없는 솔뫼골의 철기문화는 매우 빈약하다. 이러한 이유로 솔뫼골의 주조철부를 연과 접촉한 고조선이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 받아 들인 철기문화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이어 나타나는 토광목곽묘 출토 철기들은 타날문토기와 화분형토기 등 종래 한반도에서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토기 와 공반될 뿐만 아니라 주조 철기 이외에 발달된 단조 무기류도 포함되어 있어 이전의 솔뫼골 철기와는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이는 衛滿朝鮮의 성립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위만세력은 진말-한초의 철기문화를 소지하고 온 유이만들로서 대략 천산산맥 이 동∼청천강 사이로 추정되는 고조선의 서변에 얼마간 머물다가 기원전 195년 경에 평양에 들어와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위만조 선을 세웠으므로 이때 대동강유역으로 파급된 철기문화는 준왕조 고조선의 철기문화 보다는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무렵 대동강유역에 등장한 철기문화는 제1단계 세죽리-연화보 유형의 철기문화 가운데 천산산 맥 이동의 세죽리 철기문화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제1단계 : 1기-천산산맥 이서의 요녕지방까지만 직접 파급된 戰國 燕의 주조철기 문화
2기-천산산맥 이동으로부터 한반도의 청천강 이북지역까지만 직접 파급된 秦代 또 는 秦漢交替期의 철기문화
제2단계 : 1기-천산산맥 이서의 전국 연 주조철기문화와의 간접적인 접촉에 의해 파급된 대동강 유역의 準왕조 고조선의 철기문화
2기-위만조선의 성립으로 대동강 유역에 직접 파급된 진한교체기 또는 한초의 철 기문화
제3단계 : 위만조선 멸망후 한사군의 설치로 직적 파급된 전한의 철기문화

혼강 및 압록강 중류유역의 초기철기문화는 이 가운데 제1단계의 2기 및 제3단계에 해당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까지 이 지 역에서 확인된 초기철기 유적들의 분포 및 출토유물은 <圖2>와 같다. 이들은 대부분 세형동검과 공반되고 있는데, 이러한 양상은 윤가촌 12호 토광목관묘(사회과학원출판사1966 : 115-119)로 대표되는 요남지역과 대비된다. 윤가촌 12호 무덤에서는 세 형동검이 아직 철기를 공반하고 있지 않다. 타날문토기,주조철기 등의 전국계 철기문화는 윤가촌 12호가 속한 아래층2기문화와는 층위를 달리하는 윗층문화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혼강 및 압록강 중류유역의 초기철기문화의 구체적인 연대는 유적에 따라 얼마 간의 차이가 있으나 거의 대부분 전국말-한대에 걸친 시기로 비정 가능하다.
이 무렵의 토기양상은 현재까지의 자료로 보는 한 매우 불투명하지만 桓仁 望江樓 無基壇式積石塚(梁志龍 王俊輝1994)의 예로 보면 태토가 泥質化되고 있어 漢灰陶의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망강루에서는 특히 楡樹 老河深(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1987 ) 등 夫餘地域에서 보이는 金製 귀걸이가 확인되고 있어 그 시기가 기원전후한 무렵임을 알려줌과 동시에 환인지역이 그 무렵 부 여지역과도 연관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부여지역과의 관련성에 주목하여 이를 卒本夫餘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梁志龍 王俊輝1994)도 있다. 아무튼 이 무렵의 토기는 아직 자세하지는 않으나 魯南里型土器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인 泥質 胎土가 사용되고 있는 점등으로 보아 고구려토기와 유사한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형태적인 측면 에서의 유사성 정도는 현재의 매우 영성한 자료로써는 판단하기 어렵다.

IV. 高句麗 土器의 形成
고구려 토기의 初現型인 노남리토기는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유적의 윗층에서 출토된 토기들을 표식으로 한다. 노남리토기의 특 징을 우선 제작기술적인 면에서 보면 이전의 청동기시대이래의 토기들의 모래 섞인 태토와 달리 고운 점토로만 구성된 泥質이라 는 점과 아울러 표면을 磨硏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제작기술상의 특징은 전술한 것처럼 초기철기문화와 함께 들어 온 중국의 전국말-한대의 灰陶의 영향으로 보인다.
다음, 형태상의 특징은 종방향 또는 횡방향으로 붙은 橋狀把手이다. 이러한 형태의 손잡이는 거슬러 올라 가면 청동기시대의 공 귀리유형 및 미송리형토기에 그 연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형적인 측면에서 보면 노남리형토기의 특징은 외래적이기 보다는 고유의 지역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러한 지역 전통과 관련하여 磨硏 技法과 같은 제작기술도 이미 미송리형토기에 그것이 보이고 있어 노남리형토기의 형성 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은 미송리형토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니질의 태토는 분명히 전국말-한대의 회도와 관 련된 것으로 보이므로 결국 노남리형토기의 형성 이면에는 초기철기와 더불어 나타난 새로운 제작기술과 재래의 형태적인 요소가 함께 작용하고 있었던 것오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남리형토기의 형성시점은 구체적으로 언제로 비정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북한 학계의 견해는 기원전 2세기 경으로 보는 것(정찬영1973 : 40-41)과 기원전 3세기로 보는 것(리창언1991)로 나뉘어 진다. 기원전 3세기로 보는 견해의 근거는 노남리형토기가 明刀錢과 공반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나 철기의 내용으로 보는 한 이러한 연대관은 너무 올려 보는 것으로 판단된다. 노남리유적은 청동기문화층인 아래층과 노남리형토기가 나오는 윗층으로 구분되는데 윗층문화에 속 하는 유구는 집자리와 야철지가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철기들은 철촉,철부, 띠고리, 송곳, 낚시바늘 등 漢代 이래의 단조철기들 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 지역의 다수의 유적에서는 명도전은 흔히 半兩錢, 五銖錢 등과도 공반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명도 전만을 근거로 연대를 올리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해 최근 淸原縣 南口前 大南溝 石棺墓( 達 張正岩1989 : 144-145)등에서 출토된 토기가 주목된다. 여기의 토기는 노남 리형토기의 특징들인 니질태토, 마연 등의 기술적인 요소와 더불어 縱耳의 교상파수가 달린 有頸壺 등 형태적인 요소들이 모두 나타나고 있어 분명한 고구려토기들이다. 이 석관묘의 연대에 대해서 보고자들은 戰國末-漢初로 비정하고 있어 대략 기원전 200 년경으로 볼 수 있다. 이 연대관 역시 분명한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현재의 자료로 보는 한 노남리형토기의 정확한 성립시점을 特定하기는 어렵다. 필자는 이러한 검토내용을 염두에 두고 잠정적으로 기원전 200년경을 노남리형토기의 등장 始點 으로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 단계의 토기는 아직 기종이 縱耳把手가 양쪽에 달린 유경호 이외에는 확인되지 않고 있어 기종의 확대와 더불어 土器樣式上의 통일성은 그다지 뚜렷하지 않아 노남리형토기의 완전한 성립단계로 보기에는 다소 이르다.
한편 노남리형토기의 분포지역을 보면 지금의 桓仁, 集安지역을 중심으로 압록강 건너 한반도의 북부 및 太子河의 상류지역에 걸쳐 있다. 이 지역은 앞서 살펴본 묘후산유형 및 공귀리유형 등의 청동기시대의 유적 분포권과도 대략 일치하고 있다. 주지하는 것처럼 고구려는 消(涓)奴部, 絶奴部, 順奴部, 灌奴部, 桂婁部 등의 5부가 聯盟王을 중심으로 통합되면서 연맹왕국으로 성장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연맹에 참여한 5부의 구체적인 위치 및 그 물질문화의 내용이 어떠하였는 지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하지 않으나 이와 관련해 李殿福은 구체적인 위치 비정을 시도한 바(李殿福1986)있어 주목된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의 初都地로 널리 인정되는 桓仁지역을 계루부로 전제하여 소노부는 그 서쪽인 지금의 新濱縣 일대, 절노부는 그 북쪽인 지금의 通化縣 일대, 順奴 部는 동쪽인 集安縣 지역, 관노부는 남쪽인 환인 남부 및 寬甸縣 일대 등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러한 지역 범위는 노남리형토기 의 분포범위와도 일치되고 있어 구체적인 비정지에 대한 확실성 여부는 접어 두더라도 노남리형토기라는 일정한 토기양식의 통일 성이 보이는 지역을 고구려 국가성립 시점의 5부의 영역으로 파악되고 있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국가단계 정치체의 등장과 특정 토기양식의 일정한 지역적인 통일성 사이의 관련성이 있음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예로 받아 들여도 좋음을 시사하 는 것으로서 이러한 양상은 삼국시대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의 각 정치체들에서도 관찰되고 있음은 冒頭에서 말한 바 있다.
고구려의 국가 성립 즉, 연맹왕국단계로의 성장 시점을 기원전 1세기 전반경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노남리형토기로의 양식적인 통일성이 나타나는 시점은 전술한 것처럼 이 보다 얼마간 올려 볼 수 있어 적어도 토기로만 본다면 고구려의 연맹왕국 성립의 시점은 기원전 2세기까지 소급해 보아도 좋을 듯하다. 이는 또한 고구려의 특징적인 묘제인 積石塚의 등장 시점 역시 노 남리형토기와 비슷한 시기인 전국말-한초 무렵까지 소급되고 있는 최근의 조사결과(張雪岩1981)와 결부해 보면 더욱 그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고구려의 국가 형성은 戰國 燕의 軍事的인 압박으로 비롯되어 이후 秦-漢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외부적인 압력이 혼강 및 압록강 중류유역의 청동기 말기 단계의 사회에 가해지면서 새로운 철기 기술의 유입과 함께 사 회분화가 더욱 촉진되고 이어 5부로 대표되는 지역 정치체들이 외부의 압력에 대응하여 내부적으로 긴밀히 결속되면서 연맹왕국 으로 성장한 것으로 이해된다.

V.高句麗土器의 變遷
고구려 토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耿鐵華 林至德1984)는 극히 최근에 시작되었다. 비교적 자료의 축적이 많은 집안지역의 자료 를 토대로 이루어진 耿鐵華 林至德의 연구에 의해서 처음으로 고구려 토기의 기종구성 내용과 더불어 전기,중기,후기의 3단계의 시기 구분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이후 시기적인 변화가 비교적 잘 나타나는 대표적인 고구려 토기 기종인 廣口長頸四耳壺를 대 상으로 보다 구체적인 편년 연구(魏存成1985) 그리고 토기를 포함한 종합적인 고구려 문물의 편년체계(東潮1988) 등이 잇따라 발 표되었다. 東潮는 고구려 토기를 早期 (A.D.200-300), 前期 (300-400), 中期(400-500), 後期(500-600), 晩期(600 이후) 등 5기로 세분함과 아울러 절대연대도 제시하고 있어 가장 자세하다. 그러나 고구려 토기의 형성을 200년 이후로 보고 있어 노남리형토기 로 대표되는 초기의 고구려 토기 양상이 생략되게 된 점은 문제이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확인된 고구려 토기의 출토예들을 가능한 한 충실히 취합하여 보았다. 그 내 용은 다음의 <표3>과 같다. 그리고 각 유적의 연대에 의해 고구려 토기의 변천 양상을 관찰해 보면 다음의 <圖4>와 같다. <圖4>를 보면 노남리형토기의 출현시점으로 잠정적으로 비정한 B.C. 200년 이후부터 A.D. 300년 무렵까지의 특징은 縱耳把手를 가진 기종이 많다는 점과 廣口長頸四耳壺이 아직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300-500년 사이의 특징은 종이파수가 소멸 되고 거의 대부분의 파수는 횡이의 교상파수 일색으로 된 점과 광구장경사이호의 발달, 문양의 등장 등을 들 수 있다. 500년 이 후에는 광구장경사이호의 最大 胴徑이 점차 아래로 쳐지는 한편 동체에 비해 구경이 축소되는 경향이 눈에 띄며 甁이 새로이 등 장하고 있다. 이러한 관찰 결과는 아직 토기 출토 유적의 양이 적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료상으로는 시기별 해당유적의 편중현 상이 심한 편이어서 확실하지는 않으나 대략 300년, 500년을 기점으로 토기문화상의 변화 경향은 인정하여도 좋을 듯하다.
한편 각 시기별 유적들의 공간 분포 양상은 <圖3>과 같은데 이는 고구려의 영역확대 과정과 잘 일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이는 고구려 토기의 형성과 국가 성립과의 밀접한 관계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경우 특정 토기양식의 분포와 정치제의 영역이 긴밀한 상관관계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1998.4.16)
 

VI. 맺음말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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