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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민중항쟁의 전개과정


< 목 차 >

1. 항쟁의 전개와 민중의 대응

1) 항쟁 전개의 시기구분

2) 민중.남로당과 미군정의 대결시기(1948. 4 - 1948. 8)

(1) 남로당의 대응과 민중과의 연대투쟁: 4.15도당대회 이후

(2) 미군정의 의도와 전략: 4.28 평화회담 결렬

(3) 민중의 통일정부 투쟁과 미군정의 공격: 5.10 단선을 중심으로

(4) 항쟁의 성격변화와 민중의 갈등: 두 정부의 출범을 중심으로

2. 미국과 단독정부의 제주도 대토벌 정책과 민중대학살

1)제주도 대토벌 정책의 원인과 배경

(1) 단독정부의 정통성 확립과 대토벌 정책의 감행

(2) 민중대학살의 감행과 실상
 
 

1. 항쟁의 전개와 민중의 대응

1) 항쟁전개의 시기구분

1948년 4월 3일(음력 2월 24일) 새벽 1시 한라산과 제주지역의 89개 오름에 일제히 봉화오르면서 시작된 4.3항쟁의 전개는 제주지역 해방공간의 전체적 상황전개 속에서 파악되야 한다. 1946년의 상황은 민중의 자치정부 수립과 자주교육운영의 시기이고, 1947년 상황은 민주의 평화항쟁과 민중과 미군정의 대립시기이며 1948년의 상황은 본질적으로 민중이 미군정에 정면으로 맞서는 민중항쟁과 또한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단독정부수립 관철과 이에 비롯한 민중 대탄압의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구분은 주체들의 대응과 전략적 내용 및 객관적 정세변화(분단국 수립)와 상황변화를 고려한 것이다. 먼저 제 1시기는 민중과 남로당이 공동으로 미군정과 치열한 대결을 벌여 단선.단정투쟁을 성공적으로 거부한 것이 가장 특징적인 양상이었다. 제 2시기는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북한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성립됨으로서 항쟁의 성격이 변한다. 이와 더불어 항쟁지도부가 축소되며 민중은 생존의 길로, 잔류 항쟁지도부는 방어적.고립적 게릴라전의 길로 나뉘어 간다. 아울러 이 시기에 미국의 조종, 자원을 받은 이승만 세력은 지속적인 대토벌작전과 민중대학살을 감행한다. 제 3시기는 항쟁지도부가 무너져 종결된다. 그리고 민중은 4.3공포증이라는 굴레를 걸머지게 되고 6.25전선에서 반공전사로서의 희생을 강요받게 된다.

2) 민중.남로당과 미군정의 대결시기(1948. 4 - 1948. 8)

항쟁의 결행에서 민중 및 남로당과 미군정의 직접적 대결은 4월 초순의 무장대의 공세, 남로당의 4.15도당대회, 4.28평화회담의 개최, 민중의 단선저지, 미군정의 공세로 특징지울 수 있으며, 8월에 이르러 남한의 대한민국의 출범과 9월의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출범으로 항쟁은 축소되며 그 성격이 변한다.

(1) 4.3 무장봉기

1948년 4월 3일 오전 2시를 기하여 한라산의 영봉을 비롯한 각지의 천봉 산악위에서의 세차게 타번지는 봉화와 ?탕! 탕!?하는 총성은 전 조선인민이 죽음으로써 배격하는 망국 5.10 단선을 파탄시키기 위한 활동가들에 대한 행동개시의 신호이였으며 동시에 애국적인 전체 도민을 이에 호응 궐기하라는 경종이었다. 이날의 신호에 의거한`인민무장자위대?의 무장봉기는 제주도에서 미군정의 지방통치 기관을 뿌리채 뒤흔들어 놓았을 뿐만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남한 민중들의 반미투쟁을 고무 격려하는 신호로도 되었던 것이다. 이날 각면 단위로 편성된 인민자위대는 산과 들, 동굴과 밀림에서 완전한 무장을 장비하고 행동개시의 지휘부의 신호만을 기다렸다.이 무장봉기에서 자위대원을 선두로 한 가장 열렬한 [여맹원],[아동단원] 심지어는 백발의 노인들까지도 포함된 3000여명의 무장력은 각 오름에서 일시에 올린 통일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한 횃불 과 ?탕! 탕!?하는 총소리에 호응하여 봉기하였다. 무장대는 ?미제는 즉시 물러가라!? ?매국단선단정 절대반대!? ?유엔 조선 위원단은 철거하라!? ?미제의 주구들을 타도하자!? ?조선통일 독립만세!?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영웅성과 대담성, 기동성과 은밀성을 발휘하면서 주어진 거점을 급습했다. 인민자위대는 조천, 함덕, 삼양, 외도, 한림, 저지, 고산, 구감, 애월 , 남원, 성산, 안덕, 중문, 대정, 무륙 등 14개소의 지서, 출장소와 제주서귀포 서장관사를 비롯한 경찰, 서북청년단의 숙소, 독촉국민회, 대동청년단의 박우상.김충희.김인선.문인옥(제주시), 김도현.김봉화.김두일.문영백(애월면), 임창현.김인옥.얀병직.현주선.박창히.진문종(한림읍), 강영술.강필생.허만필(대정읍), 오룡국.강성건.강성익.고인선(서귀읍), 고두종.조창국.고태휴.조안석.이공오.이기휴(안덕면), 김문경.이완우(한경면), 강창진.강인옥.고성중(성산면), 홍태규.김태옥(표선면), 김대홍.김시권(구화면), 김태옥.고군칠.고칠종(안덕면) 등과 유해진, 김영배와 같은 ?악질 관공리?의 집과 행정기관들을 기습 파괴하였으며, 그외 다수의 경찰원, 관공리, 극우세력들을 살상시켰다.

이날 무장대는 행동을 개시하자 곧 다음과 같은 요지의 호소문을 탄압기관 행정기관과 시민들에게 널리 뿌렸다.

시민동포들에게!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여!

[4.3]오늘은 당신의 아들 딸 동생은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미국 단선단정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 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 부르는 길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면 4.3항쟁은 전면적인 무장항쟁이었는가, 아니면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공격이었는가. 첫째 공격의 대상은 경찰지서와 우익인사의 집으로 한정하여 일시에 공격하였기 때문에 항쟁을 알리는 상징성을 지닌 보복적 차원의 제한적 공격이었으며, 둘째 공격의 폭력성과 유형, 피해의 정도와 공격에서의 무장수준을 볼 때, 1)?10월항쟁?이나 ?2.7투쟁?등의 수준을 크게 넘지 않았고, 2)당시의 미군정과 경찰은 항쟁의 발발을 파악하고 있었는데도 비상근무령조차 내리지 않고 방임했으며, 3)당시 무장대의 무장수준은 소총 30정 정도와 나대, 칼, 죽창 및 사제 폭발물이었는데, 이러한 무장수준은 군정과 경찰의 그것과 비교도 안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날의 무장 기습은 민중의 대중투쟁과 결합된 형태로서 선별된 특정 대상에 대한 자위적이고 제한적이고 상징적인 기습공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항쟁 결행과 관련한 남로당 중앙당과 제주도당의 관계, 그리고 제주도당 조직의 내부 역학관계는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살펴보자. 4.3항쟁의 결행은 중앙당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지령설과 단독감행설이 있다. 전자의 주장은 박헌영이 단독선거의 전면적인 거부투쟁의 장소로 좌익세력이 강하고 특수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제주도를 선택했으며, 3월 중순에 김달삼에게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명백한 근거가 없을 뿐더러 상황전개와도 어긋난다. 오히려 남로당 제주도 당위원회가 단선, 단정 반대의 전국적 맥락과 미군정, 경찰, 서청의 탄압에 맞서야만 하는 제주도적 상황을 결합시켜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려 감행하였고, 중앙당은 이를 조정함과 동시에 전남당부 조직지도원(남도 오르그)을 파견하여 이를 지도하였다고 해석된다.

(2) 제주도남로당의 대응과 민중과의 연대투쟁: 4.15도당대회 전후

제주도 남로당의 첫번째 대응은 4.15도당대회에서 나타난다. 이 대회는 4.3민중항쟁을 선포한 4월 3일의 무장공격에 대한 평가를 토대로 중앙남로당에의 보고와 제주도당내의 의견조정, 본격적인 유격전의 준비체제 정비, 단선저지의 대중투쟁, 민중과의 연대강화 등을 논의한 것으로 보여진다. 남로당이 조직을 개편하는데 고려한 점은 군사부를 중심으로 개편하되 민중의 강렬한 대결의식과 온건파의 의견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남로당은 4월 3일 공격을 지휘, 감행한 무장대의 공격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 조직체계를 확대, 개편하고 공식화 하였다. 당시 남로당의 편제는 표1)과 같이 개편되었다.

표 1) 제주도 남로당 조직표

+--------------+ +----------+

|상임집행위원회+--------|위 원 장|

+--------------+ +----+-----+

* 이중엽 | 安世勳 趙夢九 金達三 김유한 姜圭燐 金龍寬

* 김두옥 | (安堯儉) (李承晋) (김영관)

* 김서옥 |

+---+--------+

|부 위 원 장 |

+---+--------+

| 李幸祐 김유환 김용해 이도백 김정로 조노구 오군표

| +-----------+

+-------------------+산 하 단 체|

| +-----------+

| 민주청년동맹(미주애국청년동맹)

| 민주여성동맹, 농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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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군사부| |조직부| |간부부| |총무부| |선전부| |노동부| |농민부| |청년부| |부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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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부 : 金達三, 이덕구, 정명호, 김성규, 김대진, 김민성, 고대성, 김의봉, 김상윤, 김창권, 김만옥, 김상훈, 오원권, 송태삼, 정관수, 양근, 양병시, 이보택, 고갑수

조직부 : 조몽구, 고칠봉, 이시행, 김태헌, 김양근, 김창옥, 기민화, 문재진, 이도일, 정도일

간부부 : 이행우, 현두길, 김규찬, 강규찬, 김용해, 김정로

총무부 : 이좌구, 김두봉, 현복유, 김귀환, 이도백, 김두봉

선전부 : 현호경, 김정환, 김용환, 김정풍, 김운방, 김석환, 김소광

노동부 : 김유환, 이종우, 박남호

농민부 : 김완배, 이종우, 현호진, 한병택

청년부 : 김유환, 강대석, 김상희

부녀부 : 고진희, 이정숙, 김이환, 김진선, 김옥희

* 자료: {제주신문}, 1989년 4월 25일, 4월 28일의 내용과 김봉현의 증언({濟州道 血の歷史: 4.3武裝鬪爭の記錄}, 大阪: 國書刊行會, 1978)과 {제주민중항쟁}Ⅰ(소나무, 1988)의 인명록

또 남로당 군사부 직속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3.1지대: 조천, 제주, 구좌면

2.7지대: 애월, 한림, 대정, 안덕, 중문면

4.3지대: 서귀, 남원, 표선면

총대장: 이 덕 구

군단장: 고 대 성

예비지대: 특공대대(대장: 김대진, 정찰업무관장과 부대간 업무조정)

특경대대(대장: 고대성, 경찰.서청등의 동정파악과 3지대의 관

리와 연결)

정치소조원(각 지대의 상상교육)

자위대(유격대와 외곽조직 및 각 마을과의 연결)

이러한 조직개편은 남로당의 조직을 군사부 중심으로 하되 민중과의 연대를 통하여 기존의 조직을 유지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4.15도당대회를 통해서 남로당은 전반적인 항쟁의 방향설정과 역할을 정하여 주고,군사부는 각 지대별로 기습과 방어를 전담하였다. 당시 자기의 거주지에서 ?겨나 남로당의 선전부원이 된 한 학생은 대중투쟁의 정도와 민중과의 연대관계를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산에 가니까, 나는 선전부에 배치를 받았지.등사기로 삐라도 만들고.... 당시는 나같이 쫓기던 학생들이 많이 올라갔지. 간부들에게 교육도 많이 받았는데 이름은 몰라. 그사람들이야 가명을 썼지 하루는 밤에 선전활동하러 북촌으로 갔지 마이크로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아버지 어머니 안녕하십니까 ? 우리는 여러분의 자위대 자식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도와주십시요?라는 등의 선전을 하고 다니는 거였지. 그리고 나면 그 동네는 난리가 나지. 우리들을 잡아 들이지 않았다고 경찰이 난리를 펴지...... 어떻게 신고를 하겠어. 모두 자기들의 아들딸인걸. 그때야 경찰이 잡으로 오면 ?어느집에 가서 숨어라?하고 오히려 숨겨주었지 ......토벌대가 산으로 올라오면 우리 선전부는 제일 앞에 도망을 갔지. 그 다음은 당, 총무부, 다음에 군인들 순으로.....그리고 피남민은 군인들과 뒤섞여서 도망갔지. 백록담까지도 두 번이나 도망갔지. 선전부가 제일 안전지대로 가야 된다고 등사기와 무전기를 짊어지고 도망갔지 ......재미있는 것은 군인이 올라오면 산으로 도망가고 경찰토벌대가 오면 거꾸로 밑으로 내려가서 숨었지.

남로당의 단선저지 무장봉기투쟁의 선언(4월 16일)과 더불어 무장대의 공격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데 공격대상은 경찰지서로 집중되다가 면사무소, 선거사무소 등으로 확대된다. 도당대회이후 4월에 이루어진 무장대의 주요 습격을 보면 다음과 같다.

4월 16일: 모슬포 습격

4월 17일: 제주시 습격

4월 19일: 제주시 전화회선의 일체 절단

4월 18일: 토평리 선거사무소와 선거관계 공무원 습격과 선거서류 탈취

4월 24일: 제주공항에 착륙하는 미군 C-47기 저격

4월 24일: 미군정청내의 PX건물 공격

이러한 공격과 병행된 대중투쟁(삐라투쟁)의 내용은 경찰타도와 통일정부수립, 도민의 대동단결 호소 등이었고 이러한 삐라투쟁은 마을별로 젊은 층(주로 학생과 여성)이 담당하였다. 따라서 항쟁초기의 투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로당의 기습공격투쟁은 민중의 봉화투쟁과 삐라투쟁과 결합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둘째, 투쟁의 목표가 단선.단정저지의 통일투쟁과 미군정과의 대결로 상승되었다. 셋째, 무장기습공격이 선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혈의 정도가 타 지역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었다. 이 기간중 총 사망자는 60명이었는데, 그 내용은 경찰 8명, 우익 및 그 가족 27명, 무장대 또는 좌익 25명으로 좌.우익이 비슷하였다. 전국의 사망자가 154명이었으며 제주지역의 사망자는 전국의 3분의 1정도였다. 넷째, 경비대는 중립을 표명함으로써 미군정의 탄압에 무언의 저항을 하였을 뿐더러 민중의 진압작전에 투입되지 않았다. 다섯째, 미군정과 경찰.서청의 진압작전은 민중의 참여와 경비대의 중립 등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민중은 지역의 정의를 세우고 민중의 자치를 세우고 민족의 자주를 이루는 항쟁의 실질주체가 되어 지도적 주체인 남로당과 결합되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4.3항쟁은 민중의 자치의식과 평화의식과 자주의식을 결합시킨 자주항쟁이 되었다.

(2) 미군정의 의도와 전략: 4.28평화회담의 결렬

4.15도당대회 이후 계속되는 무장대의 기습공격과 민중의 항쟁동참으로 미군정은 4월 27일 경비대의 진압작전 투입을 결정하였다. 4월 중순에 경찰의 증원이 있었고, 5월초에는 국방경비대의 증원이 있었다. 미군정의 당시 병력수준은 경찰 450명, 국방경비대 제9연대 1개 대대, 미군 수십명, 우익단체원 수백명이었다. 미국의 정책은 제주도를 초토화시키더라도 가능한 한 빠른 시일내에 항쟁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진압작전 방침에 대하여 국방경비대는 반발하고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였다. 이는 국방경비대측이 민중항쟁을 폭동이나 반란이 아니라 경찰 등의 체포, 고문등에서 비롯된 억압적인 탄압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협상에 대해 미군정의 허가를 얻은 제 9연대장 김익렬은 이윤락 중위를 협상추진의 중간연락책으로 하여 김달삼에게 회담을 제의, 4월 28일 구억리 구억국민하교 교정에서 회담이 열렸다.

김익렬은 ① 전투행위 즉각 중지, ② 무장 해제, ③ 범법자 명단제출 등 3개항을 요구했고, 김달삼은 ① 단선.단정획책하는 미군철수, ② 제주도민이 행정과 경찰업무를 수행하고 악질경찰과 서청 추방, ③ 제주도민의 경찰이 편성될 때까지 군대가 치안을 맡고 지금의 경찰을 해체할것, ④ 의거참여자를 전원불문에 부치고, 안정과 자유를 보장할 것 등 24개 항을 요구했다. 이 합의에 따라 무장대는 일부지역의 무장기습 중단 조취를 취하여 3일후 무장대결은 종식되고 김익렬은 미군정의 입회하에 무장해제를 실시할 마지막 조치를 성사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경찰이 5월 1일 오라리 사건을 조작하여 4.28평화회담의 합의를 깨버린다. 오라리사건은 경찰이 무장대로 위장하여 오라리를 기습, 방화한 사건이고 애월리 사건은 경찰과 경비개가 애월리를 기습하여 불을 지르자 주민 100여명이 이들에 대항하여 싸운 사건을 말한다. 이로써 4.28평화회담은 때지고 양측은 다시 대결의 길로 들어섰다.

(3) 민중의 통일정부 투쟁과 미군정의 공격: 5.10 단선을 중심으로

평양에서의 남북지도자 연석회의의 노력과 제주지역의 4.3항쟁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단선을 추진하였으므로, 5.10단선이 임박해지자 남한에서의 대결이 치열해졌다. 5.10단선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국민회와 김성수 중심의 한국민주당세력만이 참여하는 선거이자 분단의 구조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좌익.민족세력 뿐만아니라 민중들도 반대투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제주도 지역은 단선을 파탄시킴으로써 단선이 민중의 뜻과 상반됨을 보였으며 미군정은 평화회담으로 위장하여 시간을 벌면서 강경진압작전을 통해 단선을 성공시키려 하였다. 무장대와 민중은 총력을 다하여 단선저지투쟁에 나섰다. 이 당시의 투쟁은 5월 7.8.9.10일 집중적으로 나타났으며 목표는 단선거부로 집중되었다. 공격의 내용은 선거사무소인 읍사무소의 공격이나 관계 공무원납치 선거인명부 탈취였다. 아울러 대중투쟁은 선거인들에게 투표거부를 요약하고 선거 관계자들에게 사표를 종용하는 것이었다. 5월 10일 제주도의 65개 지역의 투표구가 선거관계 공무원의 투표사무거부와 무장대의 습격, 민중의 투표용지 소각과 투표참가거부로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어 선거가 사실상 거부됐다. 이 시기 단선저지투쟁은 무장대와 민중의 합일된 연대투쟁으로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 무장대의 사망자가 우익 사망자의 3배가 되었다는 점은 무장대의 공격보다 우익의 방어력이 강하였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치러진 제주도의 선거는 완벽한 실패로 돌아갔는데 남제주군 선거구만이 간신히 선거가 치러져 오용국(무소속)이 당선되고 북제주군 2개 선거구는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투표자수가 모자라 선거가 무효화 되었다.

표 2) 단선거부의 투표현황

-------------------+---------------------------+----------------------

북제주군 | 갑 구 | 을 구

등록인수 | 27,560명 | 20,917명

투표인수 | 11,912명(43%) | 9,724명(46.5%)

총투표구수 | 73개소 | 61개소

투표실시 | 31개소(42%) | 32개소(52%)

투표구수 | 42개소 미실시 | 29개소 미실시

각 후보자 | 양귀진 3,647표 | 양병직 3,474표

득표 정황 | 김시이 3,479표 | 박정희 3,190표

| 김충희 2,147표 | 김덕준 691표

| 문대우 1,693표 |

-------------------+---------------------------+---------------------- 자료:{조선일보}, 1948년 4월 14일, 5월 16일, 5월 20일

투표등록율: 전국; 64.9%

제주; 46.9%

전국투표율: 전국; 90.82%

제주도 선거관리위원회는 제주도의 2개 지역의 선거의 무효화를 건의하고 딘 장관은 5월 24일 제주도 2개 지역 선거의 무효화와 동시에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으나 이 또한 민중의 철저한 반대로 재선거를 실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선거의 실패는 제주민중에게는 단선거부의 승리를,미국에게는 전략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중들의 투쟁이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는지 용강리 민중들의 4.3에서 5.10선거 이후까지의 대응을 통해 확인해 보자.

4.3이 일어나고 그 다음날 용강리에 그 소식이 들어왔다. 이날 공격을 총지휘한 사람이 이덕구라는 것이 알려지자 마을사람들은 ?아, 조천고등공민학교 수신 선생이 사령관이었구나? 하면서 무릎을 쳤다......소문이 마을에 파다하게 퍼진 후부터 죽창을 만드는 청년들은 저들의 결정이 옳았다고 신명이 났다. 그 당시 용강리 마을은 자위대 1명을 한라산의 자위대원으로 올려보냈고 마을에는 남로당 조직책 한 명이 있었다. 해방 이후 마을에 예고도 없이 경찰(경찰과 서청을 동일하게 불렀다)이 들이닥쳐 집집마다 들쑤시고 다니며 빨갱이들 나오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아이들과 아낙만 남고 다른 사람들은 어디론가 숨어 있었다. 마을의 유일한 남로당원은 수류탄 한 자루와 단도 한 자루를 휴대하고 다녔는데 경찰대가 마을을 떠나갈 때 정자나무에 올라 ?돌격, 돌격. 인민들이여 앞으로 나가자?고 고함을 질렀다.......4.3 일 주일 후 국방경비대 1개 중대가 용강마을로 행진해왔다. 남로당원이 우리 편이 되려고 오는 것이라 하여 마을사람들은 환영나갔고 마을사람들은 식사를 대접했다. 산군인들은 밤이면 산에서 마을로 내려가고 낮에는 마을에서 산으로 올라갔다. 그 즈음부터 마을사람들은 밤이 되면 이웃사람들과 합세하여 수백 명이 왓샤왓샤 구령을 붙이며 시위를 했다. 그들을 이름하여 죽창부대라 하였다. 며칠후 누가 죽고 누가 죽었다는 불길한 소식이 들려왔다. 경찰의 잦은 수색과 산군인들이 머물다 가는 고무적인 선동으로 활기에 차 있었다. 그 해 여름은 농민위원회 세상이었다. 용강마을에는 5.10선거에 대해 잠잠했다. 그럴 정도로 마을은 농민위원회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들 스스로 거기에 동조했다. 그 즈음 화북사람들이 피신을 왔는데 그들을 통해서 비로소 남한만이 단독선거를 치른다는 것을 알게됐다. 피신해온 사람들은 이번 선거를 막지 못하면 나라는 독립하기는 커녕 두 동강이 난다고 말해줬다. 용강마을에는 이에 투표구도 설치되지 않고 그 날을 넘겼다.

우리는 4.3에서 5.10까지 민중들의 대응이 마을단위로 이루어졌고 자주항쟁의 원동력이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겠다. 이러한 민중의 대응으로 단선이 파탄되자 미군정은 강경한 1차 토벌작전을 감행하기 위하여 5월 4일에 창설한 제 11연대를 제주도로 이동시키며 경비대를 진압작전에 투여하고 경찰 특수부대까지 파견한다. 진압작전을 경찰에서 경비대로 바꾼 미군정은 5월 12일 첫 공격을 개시하여 두 마을에서 218명을 체포한다. 이 같은 공격을 시작으로 미군정은 5월 중에만 무려 3126명의 포로를 체포하는 기록을 남겼고 6월 중순에 이르러 포로의 숫자는 6천명을 넘어 설 정도였다.박진경의 토벌작전은 유격대의 근거지를 집중 공격하되 민중을 대거 체포함으로써 무자대와 민중의 연결망을 절단내고,나아가 민중에게 죽음의 공포를 불러일으킴으로써 민중이 유격대에 등을 돌리게 하는 것이었다.이러한 무자비한 공격의 목표는 무장대의 투항이었다.그러나,무장대는 경비대의 공격에도 응전을 하지 않으면서 그들과의 평화적 타협을 끝까지 시도하였다.그러나 끝내 타협이 불가능함을 인식한 무장대는 항전으로 결론을 내리며,군사부를 인민해방군으로 편재를 개편함과 동시에 생명을 건 대결을 결정한다.이 결정은 다음과 같은 삐라로서 박진경의 투항요구에 항전이라고 대응하였다.

친애하는 장병형제여 ! 제형의 민족적 양심과 정의에 불타는 올바른 행동을 우리는 믿는 다. 만일 친애하는 장병들이 왜 우리들이 총대를 메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그 원인을 몰각한다면....우리는 정의의 이름 앞에 백만군이 오더라도 싸울 것이다......사태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하여 다음에 우리들의 정당한 요구를 제시하노라. 1. 무장경관대의 즉시해산, 1. 사설 테러단체의 해산과 처벌, 1. 도지사 유해진을 즉시 파면하라, 1. 유엔조선위원단 철수, 1. 미소 양군 즉시 철퇴, 1. 단정반대, 1. 남북통일정부 수립 절대 추진

이러한 제주도의 항쟁이 박진경과 최경록의 무자비한 학살로 전개되자 대결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은 전국의 사회단체를 포함한 재육지 제주친목단체 중심으로 추진되었다.그러나 미군정의 대토벌은 확고하였다.그들은 이미 제주도를 봉쇄하여 제주에서 육지로,육지에서 제주로 가는 길을 차단하였다.

(4) 항쟁의 성격변화와 민중의 갈등: 두 정부의 출범을 중심으로

박진경과 최경록이 지휘한 국방경비대의 진압작전 투입과 이들의 부자비한 강경진압이 있은 후 무장대와 토벌대의 강결한 충돌은 현저히 줄어들고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이러한 소강상태의 근본 이유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정부가 남과 북에 세워져 출범하는데 기인한다. 남북한 모두 정부 출범에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항쟁의 성격과 목표가 변화되어 소강상태를 유지하게 되었고 항쟁의 지도세력인 남로당 지도부 핵심들이 제주를 떠남으로써 지도부가 축소되어 버리고 항쟁의 실질적 주체인 민중들은 이와 같이 상황의 변화와 무자비한 탄압으로 죽음에의 공포에 휩싸이고 생존의 길을 선택한다.

4.3 이후 중산간 부락인 우리 마을에 경찰과 군인들이 왔다......그 때 이웃마을 도두리에 양민증을 발급받으러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남편과 나는 줄을 서서 기다렸다. ?저기 빨갱이 중대장이 있다?하는 누군가의 말에 남편은 빨갱이가 되어버렸고 3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총살당하였다......남편이 빨갱이가 되어버려 우리집의 젊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피신하여야 했다.....며칠 뒤 학교운동장에 끌려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앞뒤로 어긋나게 세워졌다.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라 했다.......그리고 총 소리가 울렸다......죽은 사람들은 구덩이에 옮겨져 묻혀졌다......4.3이 지난 후 습격이 끊이지 않았다......산으로 피신했다 해서 산사람이 되어야 했고 마을에 남았다 해서 군인이나 경찰가족들처럼 죽임을 당해야 했다. 4.3이후 죽은 것은 마을사람들뿐이었다.......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공포의 나날 속에서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싶을 때도 있었다.

박진경과 최경록의 무자비한 제 1.2차 대토벌작전은 미군정에게는 잔인한 승리를, 민중에게는 참혹한 죽음을 던져줌으로써 미국의 의도를 일정 정도 충족시켰다. 첫째,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불완전한 단선을 치르면서 대한민국의 수립에 전력하였다. 그들은 제주도의 항전을 초강경으로 1.2차 진압을 하고 7월 12일 ?토벌의 성공?을 천명함으로써 표면적이나마 항쟁을 일단락지었음을 과시하려 하였다. 따라서 미군정은 남한 정부의 정통성에 도전한 제주도의 항쟁을 철저하게 분쇄하려는 전략을 구사한다. 둘째, 남로당 역시 남한에 단독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단선저지의 통일운동에서 남한 정부반대, 북조선 정부지지로 항쟁의 목표를 바꾼다. 이러한 상황 변화에 따라 제주도 남로당은 8.25지하선거에 역량을 집중하였으며 제주도를 ?인민해방구?라고 부르면서 3개의 선거구에서 선거를 실시하였다. 선거는 통일정부와 북한에서의 선거를 지지하고 남한정부를 반대하는 내용에 지지서명을 받는 서명투쟁이었고 주로 밤을 이용해 중산간 마을이나 세력이 강한 마을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실시한 8.25지하선거는 시간의 촉박과 지도부의 과대목표로 자발적인 지지에 의하기보다는 강제성을 띠었기 때문에 예상만큼 많은 지지를 못 받아내었을 뿐만아니라 서명을 거부하거나 북한정권과 북한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살해 구타 방화하는 잘못도 있었다. 이 선거명부를 가지고 남로당의 실질적 대표 및 4.3항쟁의 핵심지도부인 김달삼, 강규찬, 고진희가 해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8월초순 제주도를 떠난다. 이러한 항쟁의 축소에는 첫째, 두개의 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남로당이 항쟁에 지원할 수 없게 되었고, 둘째, 북조선 건설에 총력을 투입해야 한다는 점에서 항쟁을 정리하였다는 점 등이 작용하였다고 생각된다. 셋째, 민중은 객관적 정세변화에 갈등을 느끼기 시작하지만 생존의 삶터에서 계속해서 추방당하여 입산한다. 항쟁 목표가 변화되고 승리를 장담하던 항쟁지도부는 북조선지지 선거 투쟁으로 전환하다가 항쟁지도부가 축소되면서부터 민중과의 단절현상이 일어나고, 민중들은 항쟁실패와 생존에의 불안감으로 항쟁의 대열에서 점점 이탈하여 생존의 길을 모색한다.

2. 미국과 단독정부의 제주도 재토벌정책과 민중대학살

1) 제주도 대토벌 정책의 원인과 배경

(1) 단독정부의 정통성 확립과 대토벌 정책의 감행

해방 3주년과 두 개의 정부의 출범은 제주 4.3항쟁의 성격을 북조선지지운동으로 변화시켰다. 미국의 전략과 단독정부의 입장은 8월 25일 제주도 경비 사령부의 ?최대의 토벌전이 있으리라?는 발표로 구체화 되었으며 이러한 토벌전을 위해 8월 14일 제 6연대의 2개 중대(350명)를 제 9연대에 합류시켜놓고 있었다. 토벌대는 제 3차 대토벌 정책의 일환으로 무장대의 9월과 10월의 산발적 공세를 계기로 10월 8일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 다음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여 제 9연대 1개 대대, 제 6연대 1개 대대, 제 5연대 1개 대대, 해군부대(해군함정), 제주경찰대를 통합시킴으로써 제 3차 대토벌 작전의 준비를 완료하며 10월 17일 통행금지령을 내린다. 한편 10월 19일 제주도 진압을 거부한 여수의 제 14연대가 군인봉기를 일으켰고 제주도 인민유격대는 10월 24일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제주도 경비사령부 전

친애하는 장병, 경찰원들이여 !

총뿌리를 잘 살펴라 !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그 총은 우리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귀한 총자루, 총탄알을 허비 말라.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준다.

그 총은 총 임자에게 돌려주자.

제주도 인민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침략자 미제를 이 강토로부터 쫓겨내기 위하여

매국노 이승만 일당을 반대하기 위하여

당신들은 총뿌리를 돌리라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 지켜주는 빨치산들과 함께 싸우라.

친애하는 당신들은

내내 조선 인민의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라.

미군정과 단독정부는 정통성을 확보하고 좌익세력을 척결하기 위하여 제주도의 끈질긴 항쟁을 전면적으로 진압하는 전략으로 일관하였다. 제주도 경비 사령부 작전의 전과를 [G-2보고서]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박격포와 전투기를 동원한 제 3차 대토벌작전의 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 3차 대토벌작전의 전황(10. 29 - 12. 8)

10월 29일 : 포선면 고성리 135명

11월 3일 : 제주시 6명

11월 5일 : 중문경찰 2명, 경비대 1명, 무장대 50명

11월 10일 : 월왕봉 무장대 21명

토평무장대 25명

11월 11일 : 신양리 무장대 80명

조선 경찰 1명

11월 13일 : 행원리 무장대 115명

행원리 부근 무장대 4명

오동리 무장대 4명

11월 18일 : 북톤 경비대 2명

11월 19일 : 모슬포 무장대 3명

11월 21일 : 월평리 무장대 15명

모슬포 무장대 88명

11월 23일 : 선흘리 무장대 15명

11월 24일 : 노형리 무장대 79명

11월 28일 : 남원, 위미리 무장대 30명, 민간인 50명, 경찰부상 3명

12월 3일 - 6일 : 무장대 105명

12월 4일 : 무장대 105명

12월 18일 : 무장대 130명

위의 전과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10월 29일부터 12월 18일까지의 50일간 무장대 1032명 사살, 민간인 50명 사살, 경비대 3명 사망, 경찰 3명 사망, 경찰 3명 부상으로 나타난다. 이는 하루 평균 21명 정도(최소한)로 사살하는 전과를 남겼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대목은 무장대와 군경토벌대의 전사자 비율이 150대 1로 나타난다는 사실과 전사자를 모두 무장대로 분류한 점에 있다. 무장대로 분류한 근거가 명확치 않을 뿐만아니라 집단적으로 분류하였기 때문에 무장대의 사망자에는 민간인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울러 군경토벌대의 토벌방식이 직접교전이라 하지만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150명 정도를 몰살시키는 작전은 논리상으로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직접교전의 토벌이 아니라 집단몰살의 토벌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작전은 동시에 마을단위로 체포(젊은 사람들)→소개→방화→처형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진압작전의 전율할 효과에 대해 [G-2보고서]는 ① 민간인의 협력, ② 경비대의 훈련강화, ③ 대유격전에의 자신감과 좋은 전과를 올리려는 과대한 욕망에 있다고 분석하였다.

(2) 민중대학살의 감행과 실상

3차 대토벌이 엄청난 성과를 거두자 미국과 단독정부는 제 9연대에서 제 2연대로 부대를 교체하여 제 3차 민중대학살을 준비한다. 여수.순천의 봉기를 겪은 주한임시고문단(PMAG)은 연대선정을 신중히 한 끝에 여수.순천 봉기의 성공적 진압으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제 2연대(연대장: 함병선 중령)를 12월 29일 제주도에 투입하였다. 제 2연대는 1949년 1월 4일 육해공군 합동작전으로 제 4차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해군함정이 해안선 차단과 박격포 사격, 공군비행기(L-4, L-5형)의 공중폭탄공격과 육군의 무차별 포격과 집단학살과 무차별 방화의 공격이었다. 민중대학살의 상황을 현장 증언을 통해 확인해 보자. 우선 토산리 경우를 보자.

1948년 11월 12일(음력) 중산간 부락 토산리에 거주하는 리민은 바닷가에 위치한 토산2리로 전부 철거하라느 명령을 받고 일제히 이주를 시작해서 오막살이나 소외양간 등 닥치는 대로 빌고 빌려주고 해서 토산 1, 2리의 2개 부락이 순식간에 한 개 부락으로 바뀌어 세상을 원망하고 한숨만 짓고 있었는데 1948년 11월 14일(음력) 17시 당시 표선에 주둔했던 제 9연대와 부수 대원들이 부락에 들이닥쳐 리민들을 향사(리사무소)에 집합시키고 그 중 18세 이상 40세까지 분리하여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광포한 군인 한 사람의 명령에 따라 무참히 총으로 폭살하고 창으로 도륙하여 157명의 순진한 양민이 죽었으니 표선 백사장은 피바다가 되고 진동의 울음소리는 천지를 울리며 우리 고장의 피맺힌 비극이 되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한이 되고 지울수 없는 멍울로 남았습니다.

같은 시기에 북촌리의 경우를 보자.

1949년 1월 17일(음력 1948년 12월 19일) 세화리 주둔 군인 2명이 함덕리로 오다 두 명이 무장대의 기습으로 사망했다.......군인들은 급했던지 2명의 전사자를 내버린 채 본부로 가버렸다. 얼마 후 중위가 인솔하는 2개 소대가 북촌리로 들어왔다. 마을사람들을 교정으로 모이라 하였다. 곧바로 무차별 사살을 시작했다. 1차, 2차, 3차, 4차에 걸쳐 학교 서쪽 밭과 남쪽 밭 등에서 무차별 총살형을 집행했다.......마을의 연로자 8명이 앞의 두 군인의 시신을 끌고 함덕리 대대본부로 찾아갔다. 대대장은 부재중이었다. 하급장교는 시신을 들고 온 노인들을 해변 서우봉 기슭으로 끌고 가서는 모두 사살해버렸다.......다음날도 군부대는 빨갱이 가족을 색출한다고 북촌사람들을 모았다. 그 당시 해군정보원이 사람들을 지목했고 처형하였다. 이틀간 처형된 사람은 600명 정도에 이른다.......300호 이상이 사는 마을에 남자는 4명쯤 살아남았다.

이제 이 시기에 자행된 민중대학살의 참상을 23개 마을을 중심으로 정리함으로서 부분적으로나마 대학살의 진실에 다가서 보자.(표 3) 을 통해 다음과 같은 점을 추론해 볼 수 있다. ① 1일 평균 23명 즉 한 마을에 한 사람씩 죽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제주도 전체 마을(169개 마을)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한 마을에 한 사람씩 매일 169명이 죽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② 사망자의 비율이다. 무장대에 죽은 사람과 토벌대에 죽은 사람의 비율이 1대 16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③ 무장대에 죽은 사람은 명백히 드러나지만 토벌대에 죽은 사람은 막연할 뿐만아니라 빨갱이로 분류시켰다는 점이다. ④ 앞에서 지적되었지만 마을을 습격하여 젊은 사람을 체포하고 마을 사람들을 소개시키고 난 후 체포자를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 방식을 채택하였다는 점이다. ⑤(표3)에서 보듯이 토벌대가 죽이는 방식은 집단총살과 질식사, 그리고 생매장이었다. 이러한 민중대학살을 자행한 미국과 단독정부는 또 다시 부대를 교체하고 최대의 민중대학살을 전개한다. 1949년 3월 2일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였다(지휘관: 유재흥). 정부는 3월 25일 까지 귀순기간을 설정해 놓고 제 5차 대토벌을 감행하여 계속해서 민중대학살을 자행하였다.

표 3) 23개 마을의 민중대학살의 실상(제 4차 대토벌작전시의 일부 사례)

----------------+---------+--------------+---------------------------- 지 명 | 가구수 |가해자(무: 군)| 집단처형일 및 장소

| |희생자(숫자) |

----------------+---------+--------------+----------------------------한림읍 명월리 | 200호 |무: 5 |1948. 11. 10(음)

| | | 한림읍민회관 앞 30명

| |군: 65 |1948. 11. 18(음)

| | | 까마귀왓 20여 명

| |소개일: 10 .20|

----------------+---------+--------------+----------------------------조천읍 교래리 | 100호 |군: 100명 |1948. 10. 12(음)

(도리) | |소개일: 10. 23|

----------------+---------+--------------+----------------------------조천읍 선흘리 | (300호) |군: 17명(20) |1948. 10. 28(음)

| | | 억수동 20명 총살

----------------+---------+--------------+----------------------------제주시 이호동 | 200호 |군: 150 |1948. 11. 5(음)

오도동 | |소개일: 12. 15|

----------------+---------+--------------+----------------------------제주시 외도동 | 200호 |군: 70-80 |1948. 12. 5(음) 60명 총살

(도평) | | |

----------------+---------+--------------+----------------------------제주시 오라동 | 380호 |무: 4 |1948. 10-11월경 9-12명 총살

| |군: 146 |1948. 1. 15(음) 97명 총살

----------------+---------+--------------+----------------------------구좌유 동복리 | 208호 |무: 3 |1948. 12. 19(음) 굴왓 108명

| |군: 113 |

----------------+---------+--------------+----------------------------한경면 조수리 | 550호 |무: 30 |10. 21 학교마당 20명 총살

| |군: 50 | *(1950. 7. 7: 송악산)

| |소개일: 11. 18|

----------------+---------+--------------+----------------------------안덕면 감산리 | 180호 |무: 16 |48. 11. 4(음) 경찰지시 10명

| |군: 47 | 총살

----------------+---------+--------------+----------------------------표선면 가시리 | 363호 |무: 16 |48. 11. 4(음) 경찰지서 10명

| |군: 47 | 총살

----------------+---------+--------------+----------------------------조천면 북촌리 | 332호 |군: 400-600 |48. 12. 19-20(음) 북촌국민

| | |학교 400-600명 총살

----------------+---------+--------------+----------------------------봉계동 용강리 | 130호 |군: 135 |49. 1. 7(음) 93명 총살

| |소개일: 10. 20|

----------------+---------+--------------+----------------------------표선면 토산리 | 200호 |군: 157 |48. 1. 7(음) 리사무소 157명

| |소개일: 11. 12|총살

----------------+---------+--------------+----------------------------제주시 사수동 | 70호 |군: 50 |

----------------+---------+--------------+----------------------------성산읍 동남리 | (200호) |군: 28 |48. 12. 15(음) 우뭇개 백사장

----------------+---------+--------------+----------------------------제주시 해안동 | 170호 |군: 60-70 |1948. 11. 7-8(음) 28명질식사

| |소개일 10. 19 |

----------------+---------+--------------+----------------------------제주시 영평동 | 150호 |무: 5 |

| |군: 25 |

----------------+---------+--------------+----------------------------제주시 노형동 | 90호 |군: 30-40 |1948. 11. 7(음)

| | | 호병밭과 관덕정

| |무: 다수 |30-40명 총살

----------------+---------+--------------+----------------------------표신유 성음리 | (400호) |무: 30 |1948. 12. 14(음)

----------------+---------+--------------+----------------------------구좌읍 새화리 | 300호 |무: 48 |1948. 11. 3(음)

----------------+---------+--------------+----------------------------성산읍 오조리 | (250호) |무: 다수 |1948. 1. 4일경 터전목

| | | 1차 20명, 2차 40명 총살

| |군: 60 |

----------------+---------+--------------+----------------------------한림유 금악리 | 300호 |무: 1-4 |49. 2. 20(음)

| |군: 23-24 |한림지서 5명

| |75명 |모슬포 제 3구 경찰서 16-17

----------------+---------+--------------+----------------------------이리동 오두승 | 169호 | 17명(?) |

----------------+---------+--------------+----------------------------총 23개 마을 | 6,092호 |무: 145명 |

| |군: 2,275명 |

| | ?: 85 |

----------------+---------+--------------+----------------------------

* 가해자중 `무`는 무장시위대,`군`은 군경토벌대를 가리킴.

* 전체 통계를 보면,1가구당 0.5명이 사망한셈이고,제주도 전체주민의 13.2%가 사망한셈이다.

자료: 오성찬 채록, {한라의 통곡소리}(소나무, 1989)의 증언 가운데 마을 희생자를 정리한 것이다. 이 실상은 한정된 시기와 산정된 마을에 관한 증언에 불과하다. 4.3연구소 및 여러 단체들이 마을별 조사를 진행하게 되면 전체적인 실상에 접근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UN 한국위원단에 제출한 보고서는 제 5차 대토벌(3. 12 - 4. 12)의 전과를 폭도 2,345명, 민간인 1,608명으로 최소한 하루에 40명 이상을 학살하였음을 보여 주었다. 유재흥부대의 5차 대토벌 작전으로 항쟁의 불길은 꺼졌으나 그것은 민중대학살의 비극을 초래하였다. 단독정부는 1949년 5월 5일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를 해체하고 소규모의 주둔군으로 대체한 다음, 이어 5월 10일 무기한 연기시켰던 국회의원 선거를 치러 단선의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6월 9일 제 2대 제주도 인민군 사령관 이덕구가 살해되었으며 전투사령부가 해체된 후에도 1953년까지 진압작전은 지속되었다. 마침내 항쟁은 미국과 단독정부의 무자비한 대토벌정책과 민중대학살로 종식되었다. 끝으로 한 소녀의 삶과 경험을 통하여(1948년 초부터 지금까지) 4.3항쟁을 조명해 보기로 한다.

나는 국민학교 2학년에 다니는 열세살 때에 4.3을 만났다. 나는 내가 다니는 국민하교 옆에서 폭도들이 내려와 어느 경찰관의 부친을 살해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그 얼마 후 폭도를 잡아왔다고 해서 폭도를 구경하였다. 그때까지 짐승처럼 생겼을 거라고 생각해 왔던 폭도는 하얀바지.저고리를 입은 사람이었다. 그 해 11월 15일 군인들이 올라와 마을 어른들을 동네 한가운데 모아놓고 두 줄로 세워 총살을 했다. 이때 죽은 사람들은 당시 40대, 50대의 마을 유지였다.....내가 더 큰 충격을 받은 일은 11월 21일 일어났다. 그 때 동네사람들은 며칠이면 사태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해서 며칠간의 식량을 갖고 마을 주변 토굴이나 해안가로 피신 갔는데 우리 식구는 외삼촌네의 메밀.산디 같은 농작물을 정리하느라 집을 떠나지 못하였다......그 날 모슬포에서 올라온 토벌대가 집마당에 있는 외삼촌을 보더니 다짜고짜 총을 쏘았다. 외삼춘이 순경으로 재직중이던 인척을 대어가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총은 발사되고 외삼촌은 쓰러졌다. 옆에 있언 외숙모가 ?이럴 수가 있느냐?고 나서다가 총알로 끝장이 났다. 이어 세 명의 토벌대는 짐을 챙기던 12살 난 사촌동생을 쏘아 죽였다. 마당에는 외할머니와 내가 있었다. 이제 내 차례구나 하고 생각이 미치자 마당을 순간적으로 뛰쳐나가 대나무숲으로 숨었다......조금 있으니까 토벌대는 호루라기 소리를 불더니 열 명가량의 대원이 트럭을 타고 마을을 떠났다. 이 날 마을은 온통 불바다였다. ?산사람?의 은거처를 없앤다고 집집마다 불을 놓은 것이었다. 겁에 질려 숨었던 우리들은 집에서 나와 밭에 구덩이를 파서 동네 사람들과 은거했다. 해안마을로 피신할 엄두도 못낸 우리들은 며칠분의 양식을 갖고 마을에서 1킬로쯤 떨어진 넝쿨 속으로 거처를 옮겼다. 외삼촌네는 세 명이 토벌대에 죽고 나이 어린 동생 세 명도 난리통에 숨져 4명이 남아 우리 일행은 7명이었다. 넝쿨 속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며칠 후 넝쿨 속에서는 추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마을서 10킬로 떨어진 돌오름 근처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거처를 옮겼다. 나는 이때부터 폭도 아닌 폭도가 되었다. 나는 산사람들을 보았고 피난민들은 노인네와 아녀자 어린이들이었다. 토벌대는 동굴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총을 쏘거나 폭발물을 던졌다. 이 날 몇 명만 부상당했고 사망자는 없었다. 이 일로 굴 안에 있던 사람이 동요했고 살기 위해서는 한라산 쪽으로 더 올라가자는 의견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해서 나는 어머니와 함께 영실 서쪽인 볼레오름으로 향했다. 맨 처음 간 곳이 숱 굽던 집이며 이틀 후 초기밭으로 옮겼다. 그 곳은 ?산사람?이 많았고 우리를 ?피난민?이라 부르며 따로 취급했다. 이 곳에서 다시 토벌대의 고역을 받은 것은 보름 뒤였다.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나는 뛰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 생각하고 어머니의 손을 끌고 뛰었다. ?저기 꼬마다 ! 잡아라!?는 소리에 이이 총알이 귓전을 때렸다. 이 때 잡힌 사람들이 서귀포 정방폭포 위에서 총살 폭포 아래로 떨어뜨렸다는 소식은 한참 후에 들었다 다시 외톨이가 된 모녀는 겨울산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해 고향집 근처롤 돌아왔다. 낮에는 넝쿨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는 밤고양이처럼 폐허가 된 마을 안을 뒤져 한 톨의 곡식이나 먹을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찾아 연명했다. 그 해 겨울을 동네 근처에서 보낸 1949년 3월 우리는 동네 사람들이 귀순하면 목숨을 살려준다는 권유에 따라 그리고 ?저 한길을 대낮에 한번만 걸을 수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나의 뜻에 따라 깃대에 하얀 천을 달고 6명이 자수하였다. 우리는 조사를 받은 후 서귀포 단추공장에 마련된 수용소에서 2개월을 보냈다. 나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은신처에서 토벌대의 총탄에 숨졌다는 비보를 들었다. 그리고 6.25가 터진 후 어머니가 ?예비검속?이란 이름으로 잡혀가 처형되었다. 어머니가 모슬포 군비행장에서 죽은 것을 확인하였으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천애 고아가 된 내가 아버지의 고향인 김녕에 가보니 나는 폭도가 되어 이미 죽은 걸로 기록되어 호적에 제적되어 있었다. 41년이 지난 지금도 관절염에 시달리며 어머님의 시신조차 못 찾는 한에 밤잠을 못 이루는 아픔 - 어느 세상, 어느 하늘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 참고문헌 **

1. 고창훈, <4.3민중항쟁의 전개와 성격>, <<해방전후사의 인식>>4,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