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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4.3 민중항쟁의 배경


< 목 차>

1. 제주도 4.3항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1) 환경적.생태적 조건

(2) 해방후 제주도의 사회.경제적 상황

2. 제주도 4.3민중항쟁의 정치적 배경

(1) 5.10선거 결정전까지의 일반적 정치 상황

(2) 5.10선거 결정전까지의 제주도 정치 상황

(3) 1947년 3.1 평화항쟁

(4) 남로당의 5.10선거 반대투쟁

(5) 제주도 4.3민중항쟁의 발발
 
 
 

제주도 4.3항쟁은 남북한 통일정부수립이라는 쟁점에 대하여 남로당의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그 시기를 같이하여 1948년 4월 3일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뒤 최초로 발생한 조직적인 반미무장투쟁이다.

이 사건의 발발한 이유와 그 배경을 고찰한 이 글은 이 사건이 우연히 혹은 어떤 하나의 계기에 의해서만 도발된 것이 아니라 제주도민이 조선시대 말기부터 겪어야 했던 역사적 경험과 해방 당시 제주도에서 전개되었던 사회. 경제적 생활 및 미군정의 대한반도정책에서 파생된 제주도의 정치적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함으로써 발발하였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1. 제주도 4.3항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구조기능주의자들의 소론을 빌 것도 없이 공산주의 운동, 정치폭동 등을 포함한 정치적 상황, 사건은 그 주위를 둘러싼 ?환경적? 혹은 ?생태적?조건들과 무관하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후자에게서는 일정하게 영향받고 또 그것을 반영하면서 전개되어 간다.

B.Cumings는 해방직후의 남한의 지방정치와 환경적,생태적 요건간의 관련성을 분석하면서 인구변동, 운송과 통신망, 토지소유관계, 지리적 위치, 정치적 공백기간, 과거의 정치적 경험 등의 생태적 변수들이 지방인민위원회의 활동과 정치참여의 급진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는데, B.Cumings의 가설들을 검토함으로써 해방당시 제주도의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4.3항쟁의 발발에 어떠한 기여를 했는가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1) 환경적.생태적 조건

?.운송과 통신시설은 정치적으로 혼란시기에 두가지 양상을 띨 수 있다. 게릴라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을때 그것들은 게릴라의 상호작용을 용이하게 해주지만, 진압군에 장악되어 있으면 게릴라를 진압하는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상황에 따라 근대적 지역과 후진적 지역 양쪽에서 힘을 발휘했다는 역설을 찾아볼 수 있다.

?.1945년 한국처럼 토지소유관계가 불평등한 나라는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조선의 그러한 조건때문에 야기된 농민들의 깊은 분노는 인민위원회가 활발히 활동하도록 하였으며, 소작제도와 미곡수집 및 지주제에 대한 인민위원회의 공격이 농민들에게 호소력을 지니게 했다. 정치참여에의 급진성은 소작비율과 반비례관계에 있는데 결국 지주-소작관계가 강할수록 지주의 소작인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어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불리했고 정치참여의 급진성도 낮았다.

?.여러 인민위원회의 지리적 위치는 위원회의 힘을 평가하는데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당시 남한에서는 지리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제주도와 강원도 및 경상도의 해안지방은 한 군을 제외하고는 거의 인민위원회가 지배했다. 따라서 ?지리적 고립성은 인민위원회의 존립 및 활동에 도움을 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일제의 지배와 미군정 간의 정치적 공백 기간은 일면 지리적 위치에 의하여, 일면 미군정의 가용인원 및 필요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군일수록 뒤늦게 점령되었기 때문에 위원회의 존속기간은 길었으며, 공백기간이 길수록 인민위원회는 그만큼 더 강했다.

?.한국역사에서는 해방후 정치운동에 앞서는 정치활동의 수많은 선례들이 보여진다. 해방후의 상황에까지 이어진 가장 직접적인 선례 중에서 가장 강력한 운동이었던 적색농민조합을 보유했던 군들과 해방후 인민위원회에 의해 지배되었던 군들 간에는 놀랄만한 일치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과거의 적색농민조합의 존재 유무가 인민위원회의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2) 해방후 제주도의 사회.경제적 상황

해방직후에 제주도가 겪어야 했던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급증하는 인구의 문제였다. 해방직후 제주도는 그 증가 비율이 전국에서 2위에 해당하는 25%이상 급증한 인구를 감당하여야 했으며, 이것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여러 문제가 제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본과 중국대륙등지에서 귀환한 도민은 이제 더 이상 농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전형적인 노동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농촌사회의 전통적인 행동양식 및 의식을 탈피하고 있었고 제주도민에게 새로운 경험을 전파했다. 특히 이들 가운데는 일본군에 종군하였던 군인, 군속, 징용노무자들과 중국에서 의용군, 팔로군의 적을 가졌던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은 후에 제주도민의 정치의식을 일깨우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도민의 이와같은 대규모 귀환과 더불어 제주도는 심각한 경제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등지에서의 노동을 통하여 송금을 하던 도민이 귀환함으로써 제주도의 경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던 송금액이 감소하였고, 또한 귀환도민도 마당한 일자리가 없어서 실직상태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상황은 대일교역의 불법화 및 도 승격, 그리고 여기에 따른 통상형태의 붕괴와 북으로부터의 원료공급의 두절에 의한 공업 및 농업생산고의 감소등의 문제에 의해 더욱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에 의한 제주도에서의 곡물수집정책의 실시는 별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고, 또한 곡물수집에 대한 도민의 반발이라는 새로운 사회문제를 초래하였다.

1947년 3.1절 시위사건이 발생하고 미군정은 우익청년단을 파견해 소요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하였는데, 결과 우익청년단과 도민간의 충돌이 빈발하게 되었다. 특히 우익 청년단은 정규적인 봉급을 지급받지 못했기 때문에 도민들에 대한 갈취, 협박, 공갈등의 수단으로 생계를 꾸려나갔고 결국 도민의 미군정에 대한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2. 제주도 4. 3민중항쟁의 정치적 배경

(1) 5. 10선거 결정전까지의 일반적 정치 상황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이 발표되자 여운형, 안재홍 등은 1944년 이미 조직되어 있던 항일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을 모태로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수립하고 신속하게 전국적인 통치조직을 건설해 나갔다. 이 결과 8월말까지 건준은 전국각지에 145개의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초기의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나 이러한 상황은 미군의 진주가 알려지고 또 미군의 진주함으로써 반전되어 가기 시작한다. 국내 우익은 미군의 진주가 알려지자 비로소 조직결성에 착수하여 힘을 규합해 나갔고, 9월 8일 미군의 진주와 때를 맞춰 ?인공타도?라는 팜플렛을 제작하여 서울시내에 살포함으로써 인공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9월 16일에는 한민당을 창당하였다. 미군은 해방자로서 (한국을) 점령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기구를 합법적 통치기구로 온전시키려고 시도함으로써 해방된 한민족의 감정과 의사를 무시하려 했으며, 9월 20일 ?군정청은 남한에 있어서 유일한 정부? 라고 선언하여 인공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어느 것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결과 인공과 적대관계에 있고 附日요소가 있다고 지탄받던 한민당과 미군정의 제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국에 대한 미군정의 정보는 일본의 패퇴와 더불어 이미 조직되어 있던 지하정부구조(인민위원회. 건준)가 손쉽게 권력을 인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었고, 또한 일본인 및 한국인 지주에 의한 강탈적인 토지소유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미국무사관 그류는 전쟁의 종결로 한국의 소농계층은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기대할 것이며 일반적으로 말해 ?한국의 경제적,정치적 상황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하기 쉬울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결국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은 일제 식민통치기구를 온존시키는 방향의 식민주의의 계속유지에 일차적으로 두어질 수 밖에 없었으나 이것은 한민족의 격렬한 저항을 필연적으로 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의 토착 좌파를 분쇄하여 한국에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해 나갔고, 동시에 카이로 선언이래 미국의 일관된 대 한반도 문제해결 방식이있던 신탁통치안을 제기하게 된다.

한국에 관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이 알려지자 한국의 정국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김구 중심의 임정세력은 즉각적인 반발을 보이면서 전투적인 반탁시위를 주도해 나갔다. 좌익계는 처음 반탁의사를 명백히 했으나 46년 1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총체적 지지를 표명하였다. 좌익계의 이러한 방향전환은 결국 반탁과 반공, 반소가 동일시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즉 미군청은 반탁운동에 나타난 민중의 지지를 착안하여, 그 반공 이데올로기의 유효성을 충분히 이용하면서 우파의 반탁운동을 묵인했고 결과적으로 김구 중심의 전투적인 반탁세력의 에네르기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반공노선에 흡수되어 좌익계를 공격하는 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미군정은 반탁운동의 분위기에 편승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전후한 시기에 우익강화와 좌익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미군정은 46년 2월 23일 정당의 비밀활동을 규제하려는 의도가 숨겨진 ?정당등록법?을 발표하여 좌익계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으며 9월초 박헌영,이주하 등의 조선공산당의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다. 미군정의 전면적인 공격에 대응해 좌익계는 46년 7월 ?신전술?을 채택하여 반격을 준비했고, 이러한 때에 발생한 ?9월 총파업?과 이에서 발전한 ?10월 인민항쟁?을 통해 그들의 힘을 과시했다. 46년과 47년에 걸친 좌익계의 대미군정 투쟁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들이 준비가 없는 무모한 도발로 세력의 약화를 자초했으나, 여전히 전면적인 무장투쟁의 준비는 미처 안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주장도 ?권력을 인민위원회로 돌리라?는 정치적 요구가 투쟁목표 핵심으로 ?미제 축출?의 주장은 전면에 부각되지 않고 있다.

(2) 5.10선거 결정전까지의 제주도 정치상황

일제의 항복이 발표되자 제주도민은 패전군임을 망각한듯한 일본군에 의해 여전히 자행되고 있었던 위압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를 극복하면서 제주도의 건준 및 인민위원회의 결성에 착수하였다. 제주도 인민 위원회는 이 당시 일본군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제주도 전역을 지배한 도내의 자치행정기구로서, 제주도의 유일한 정당, 즉 유일한 정부였으며 전라남도에 속박됨이 없이 독립적으로 기능하였다. 인민위원회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실시하여 도민의 적극적 지지를 얻었고, 계몽활동등을 통해 도민속에 파고 들었다. 이 결과 제주도는 1945 - 46년 사이에 인민위원회의 완전한 통제하에 있었다. 미군의 제주도 진주는 9월 28일에 이루어졌고 미군정은 제주도 통치기구를 확립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은 한때나마 일본경찰을 미군정의 경찰로 온존시키려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였고 또 각 통치기구의 우두머리들은 모두 친일행각으로 비난받고 있었던 자였다고 한다. 결국 미군은 친일분자를 축으로 권력기구를 지탱하는 기반을 구축하고 그 통치기구를 확립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의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능가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은 차츰 좌익계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우익의 우세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제주도 점령정책을 전환시켜 나갔다. 46년 본토에서의 ?10월 항쟁?이후 미군정은 경찰조직을 정비,강화하였고 해안경비대를 제주근해에 배치하여 제주도의 좌익계를 압박하는 등 47년 3. 1절 시위사건이후 좌익계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을 개시해 나간다.

미군정의 공공연한 공격에 직면한 제주도 좌익계는 46년부터 이에 대항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 미군정의 통치에 대항하는 제주도 좌익계의 저항의 특징은 통치질서를 부인하려는 미군정에 대한 직접적 공격, 즉 반미구호의 공공연한 제기에서 찾아진다. 제주도의 좌익계와 미군정의 관계는 제주도 우익이 도민의 독립주의적 심리를 이용한 도제 승격 운동이 성공되고 난 후에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고, 47년 3. 1절 시위사건이 발행함으로써 더 이상 회복될 수 없게 되었다. 미군정의 경계태세에도 불구하고 3,000명의 군중이 3.1절 기념식을 개최한 후 가두시위에 돌입하였고, 미군정 경찰은 군중을 무력으로 해산시키고 제주도 경찰력을 보강하고 다음날부터 활동가들에 대한 대규모의 검거에 들어감으로써 제주도 상황은 긴장되기 시작했다.

(3) 1947년 3.1평화항쟁

3월 1일 제주도의 평화항쟁은 제주지역에서만 3만명, 서귀포지역까지 합쳐 5만명이 넘게 참여한 전도적인 항쟁이었다. 3.1항쟁의 주장은 ?미군철수, 삼상회의 절대지지, 3.1정신의 계승, 파쇼세력의 타도, 경찰의 학원탄압 반대? 등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평화적인 3.1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여 6명을 사망케하고 수명을 부상케 하였다. 미군정은 보다 강력한 탄압을 위하여 목포로부터 100여명의 군정경찰을 증원받아 대대적인 체포와 구금을 한다. 이에 민중세력은 민전과 각 지역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총파업으로 맞선다. 제주도 총파업투쟁위원회는 3.1절 기념행사에서의 군정경찰의 과잉진압에 의한 6명의 사망에 항의하는 총파업을 3월 12일부터 19일까지 8일간 계속하였다. 이때 참여한 집단은 군정청관리, 행정공무원, 산업단체, 금융기관, 중등,초등학교에 이르기가지 광범위화여 전도민의 15퍼센트 수준에 이르렀고, 투쟁방식은 민관합동의 총파업이었다. 일부 제주도 군정경찰과 군정관리까지 파업에 참여하는 사태에 이르자 미군정은 400명의 군정경찰을 증파하면서 강경탄압을 계속한다. 제주경찰의 전면수사, 대량검거(2천명), 대량구속(2백명), 대량파면(66명), 무자비한 고문(고문치사 3명) 등 미군정의 탄압은 극에 달한다. 이러한 강경탄압에 박경훈 지사가 항의의 표시로 도지사직을 사임하고 民戰에 가입하자, 미군정은 좌익과 민중탐압에 보다 강경한 대응책을 마련하여 유해진을 도지사로 하는 극구파들로 행정기관을 개편하고, 제주민중의 자치운동을 좌익으로 몰고가면서 이를 탄압하려는 전략을 세우게 된다.

민중은 이러한 미군정의 강경진압과 조직적인 조작에 직면하면서도 즉각적인 저항에 나서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민중의 저항은 중문리의 석방요구사건과 종달리의 경찰체포사건 등으로 나타났다. 3월 15일 중문면의 농민 3백여명은 중문지서앞까지 데모를 하면서 구속자 석방과 경찰의 탄압 중지를 요구했는데, 이러한 시위에 경찰은 발포하여 1명이 사살되었다. 또한 6월 6일 종달리에서는 경찰이 애국청년회의장을 급습했다가 마을청년들에게 붙잡혀 규탄받는 사건이 생겼는데, 경찰은 이를 빌미로 100명의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70며명의 종달리 주민을 체포, 구속하였다.

미군정은 1947년의 중반을 넘으면서 미소공동위원회에 관계없이 남한 단독정부 구성을 보다 확실히한다. 미국은 이 즈음부터 소련과의 냉전(cold-war)단계에 들어가며, 한국은 미소가 가장 첨예하게 대결하게 된 지역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군사적, 안보적 차원에서 한국을 전략기지의 모범으로 삼아야 하였고, 여기에 걸림돌이 되는 한국내 반미세력 내지는 좌익세력을 소탕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대한 정책이 가장 시범적으로 실행되게 된 곳이 바로 제주도였다.

1947년 하반기 미군정은 군정경찰, 행정관료, 서북청년단 등을 동원하여 좌익지도자들을 속속 체포하였고, 이 과정에서 서청단원들의 테러와 약탈이 자행되었다. 제주민중들은 미군정의 무자비한 탄압정책과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구책이 필요했고 은신처가 필요했다. 그들은 체포, 테러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라산의 중산간지역 곳곳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이때 좌익세력들은 미군정, 경찰, 우익테러의 적극적인 테러와 때를 같이 하여 투쟁의 목표를 반미로 설정하고 한라산에 투쟁의 거점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4) 남로당의 5. 10선거 반대투쟁

한국문제가 유엔에 이관되고 그것이 결국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통한 단정수립을 의미한다는 것이 점차 명백해지자 남한의 정국은 단독선거의 실시라는 쟁점을 놓고 다시 가열되기 시작한다. 한편 남로당의 좌익계는 처음부터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목표가 남한에서의 단선 단정수립이라고 규정하고 47년 12월 중순부터 단선 단정 반대투쟁을 전개해나갔다. 1948년 2월 7일 전평산하의 각 노동조합이 주도한 총파업에서 시작된 ?2.7구국투쟁?은 경인 일대를 위시하여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 제주도까지 거의 전국적인 규모로 파급되었다. 그 결과 각 지역에서는 단선에 반대하는 폭동과 파업이 빈발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남로당의 조직역량과 동원역량을 과시하는 계기로 되어 국내외에 걸쳐 단독정부 수립에 상당한 충격을 주는 요소로 작용하였으며, 동시에 5. 10선거의 직접적인 방해투쟁의 서곡을 이루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투쟁의 목표는 제한되어 있었고,특히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좌익계에 의한 5. 10선거 반대투쟁은 ?2.7구국투쟁?을 계기로 계속되어갔다.

한때 잠잠했던 좌익계의 공격은 2월말의 2차 총파업을 계기로 재연되었고, 5.10선거가 다가옴에 따라 다시 가열되었다. 좌익세력은 당시 개최되었던 남북협상을 이용한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정치투쟁과 함께 비합법적이고 격렬한 폭력투쟁을 추진하였고 이를 위해 ?남조선 단선반대투쟁 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로 하여금 5.10선거 반대를 위한 모든 투쟁을 총지휘케하여 파업과 동맹휴학, 관공서 습격 등을 단행하였다.

(5) 제주도 4.3 민중항쟁의 발발

한편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7년 3. 1절 시위사건이후 제주도민 사이에 만연되고 있는 미군정 및 우익세력에 대한 반감의 열기를 조직해 47년 가울부터 당원충원을 시작했고, 지도부의 조직개편에 착수아였는데 군사적 경험이 많고 교육수준이 높으며 보다 젊고 급진적인 리더쉽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1948년 2월경부터 한라산 입산자들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조직으로서의 ?자위대?를 편성하기 시작해 면리단위까지 그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도민에 침투된 그들의 전 조직을 효과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자위대의 훈련 및 본격투쟁에 소요되는 식량과 무기의 조달을 최대한도로 뒷받침했는데 여기엔 부녀자와 학생, 아동가지 가담해 통신,연락,의료와 구호 지원의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경찰은 48년 1월 1일 좌익계 주민들을 체포, 투옥한것을 시발로 제주시 일대 지역의 좌익계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48년 1월 22일 ?신촌회담?장의 습격이다. 1월 22일 제주도 남로당 조천지부의 핵심간부들이 화합을 갖고 있던 비밀회합장소를 습격하여 106명을 체포하였다. 그 결과 남로당의 핵심조직은 노출되고 안세훈, 김유환, 이좌구, 이덕구, 김양근 등은 체포되고 김달삼과 조몽구는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남로당 중앙과 민전은 전국적인 차원에서 ?단선?을 반대하는 ?2.7구국투쟁?을 결정하였다. 제주도의 경우 남로당의 조직이 대폭 노출되고, ?심간부들이 검거됨으로써 ?2.7구국투쟁?은 사실상 결행될 수 없었다. 그러나 2월 9일부터 11일 사이에 제주도에서도 야음을 틈탄 17차례의 시위가 있었고, 6개의 경찰지서가 공격당하고, 각종 삐라가 뿌려졌다.

여기서 우리는 4.3항쟁이 결행된 배경과 원인을 종합해낼 수 있다. 첫째, 미군정은 제주도를 전체 도민의 80퍼센트가 좌익인 ?빨갱이들의 섬?이라고 조작하고 ?제2의 모스크바?로 규정해왔다. 아울러 그들은 지속적인 물리력 보강을 통해 경찰과 서청을 동원하여 민중과의 대리대결을 시도하는 한편, 1948년 1월부터 항쟁 지도부의 조직체계만이 아니라 항쟁 결행의 시기를 파악하고 이를 기다리고 잇었다. 이는 그들의 G-2보고서 등을 통해 확인된다.

둘째, 제주도의 남로당조직은 1947년 후반이후 두개의 파로 나뉜다. 하나는 인민위원회 활동의 주역이었고 나이도 비교적 많았던 온건파(강규찬, 김정로 등)이고, 다른 하나는 남로당의 군사부를 신설하고 주도한 젊고 군사적인 경험이 많은 강경파였다. 이들은 3.1항쟁 이후 계속해서 주도권을 다투다가 1947년 가을에 이르러 갈경파는 군사부 직속의 자위대를 편성하여 한라산의 몇 개 오름에서 훈련을 시키는 한편, 국방경비대에 입대시켜 군대내의 지지세력을 도모하고, 각종 외곽단체를 이용하여 무기확보에 착수한다. 이 두 파는 무장항쟁의 결행에 대해서도 이견을 보여, 전자는 무장항쟁의 결행은 지역적 역량에 바탕을 구어야 하고, 혁명과 민중에 이익을 가져올 시기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반면에 후자는 무장항쟁의 결행은 전국적인 상황과 제주도적인 상황하에서 일종의 기폭제가 되어 전국적인 봉기를 유발시킬 것이라는 낙관적인 현실인식을 갖고 있었다. 1948년 1월 22일에 있었던 ?신촌회담?에서 강경파들은 1)미국의 직접개입은 국민여론상 불가능하고, 국방경비대도 최소한 중립을 지킬 것이며, 2) 3.1평화항쟁에서 보여준 민중의 역량은 항쟁을 적극 지지할 것이며, 3) 제주도남로당의 조직이 전면 노출되어 지하활동이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 한계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광범위한 민중의 대중투쟁과 무장투쟁을 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4)?단선반대=통일?이라는 명분과 미군정,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일어난 민중적 분노를 무장투쟁 결행의 조건으로 주장하였다. 결국 시대적 과제와 상황의 절박성, 제주지역 민중의 고조된 분위기등은 강경파의 결행론이 온건파의 신중론을 압도하면서 승리할 수 있게 하였다.

** 참 고 문 헌 **

1. 染 漢 權(1988), <제주도 4.3폭동의 배경에 관한 연구>, <<제주도연구>>

제 5집.

2. 아라리연구원편, <<제주민중항쟁>>1,2,3,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