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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 제주도와 秋史 金正喜


1. 유배지 제주도

제주도의 역사를 말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곳이 우리 민족의 파란많은 역사를 증언하는 유배지라는 사실이다.

고려때에도 우왕 8년인 1382년에 명나라에 정복당한 운남 양왕의 아들 백백 태자와 그 손자 육십노같은 양왕의 자손들이 제주에 유배되었고, 1388년에 명나라에 멸망당한 원나라의 달달친왕과 왕족 80가구가 이 섬에 유배되어 만리 이국에서 최후를 마쳤으며, 조선왕조 5백년 동안에는 3백명에 이르는 많은 국사범들이 이 섬에서 한맺힌 귀양살이를 했다.

그들 중에는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을 비롯해서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부인,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의 처자 다섯식구,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의 세아들과 손자 임창군과 임성군, 그리고 이명혁과 완창군의 아들인 이하전 같은 왕족이 있었는가 하면, 김정, 보우, 정온, 송시열, 장희재, 최익현, 백낙관, 이근택, 김윤식, 박영효, 이승훈 같은 우리 역사를 주름잡던 인물들도 있었다. 또 홍유손, 김춘택, 임징하, 조관빈, 임관주, 조정철, 김정희 같은 학자나 예술인도 있었다.

숙종때 우의정을 지낸 조태채 일가의 경우를 보면, 그의 아들 정빈과 관빈, 손자 영순, 증손자 정철의 삼대에 걸친 일가 네사람이 따로따로 귀양온 일이 있고, 김진구와 그의 아들 김춘택, 심명규와 그 아들 임처럼 부자 2대가 잇달아 귀양온 경우도 있다.

이들이 제주에 귀양와서 산 행적을 보면 그 시대의 사정과 사람에 따라 저마다 형편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김정희, 최익현, 김윤식, 박영효처럼 목사나 주민들의 각별한 대우와 존경을 받으면서 지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우대사처럼 목사에게 杖殺당하거나 노씨 부인이나 조정철처럼 관리에게 갖은 학대를 받다가 간신히 풀려난 사람도 있다.

수많은 유배인들 가운데에는 낯선 이역의 외로움과 가시울타리 속의 괴로음을 견디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형이 풀렸거나 새 시대를 만나 돌아간 사람도 있었지만, 이와는 달리 이 섬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2. 추사 김정희와 세한도

충청도 예산 향저에서 父 魯敬 母 兪氏의 장자로 태어 났다. 字는 元春 號는 阮堂, 秋史, 秋齊,禮堂, 詩菴, 尊硏齊, 果坡 등이다. 本貫은 慶州 6세 春書帖을 朴齊家 선생이 보더니 내가 장차 가르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라고 예언하고 15세로부터 사사받기 시작했다. 43세(1819년)에 문과에 급제 병조 참판에 이르고 예서 행서의 명필가이고 저서로는 <阮堂集>, <金石過 眼錄> ,<實事求是說> 등이 있다. 중국문인과의 교류는 24세때 10월 28일 父 魯敬 冬至兼 謝恩使로 入燕하여 曹江, 徐松, 翁方綱, 翁樹培, 翁樹崑,謝學崇 등과 결교면학 했다. 55세에 우의정 조연영의 관구로 멸사 제주 대정에 위리 안치되고 63세에 방송되기까지 9년간 제주 유배 생활 동안에 歲寒圖, 無量壽閣, 長壽山房, 水仙花室, 詩境軒, 등을 제작하였고 가문과 친지에게 보낸 간찰들은 그 당시 제주의 풍속과 자신의 주변을 소상히 그려낸 귀중한 자료이다. 세한도는 그의 나이 59세로 제주 유배 4년째 되던해 1844년에 그려진 작품으로 모진 북풍한설에도 꿋꿋하게 병립한 늙은 松栢의 사린간은 하늘을 꿰뚫었고 금새 꺾일듯이 가로지른 솔가지 아래로 토담집이 있는 황량한 풍경을 간결하게 그린 것인데 우리나라 문인화중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되어진다. 그후 이 세한도는 손에서 손으로 전전되다가 日帝때 <李朝에 있어서의 청조문화의 移入과 阮堂>이라는 논문능 쓴 藤塚隣 博士의 손에 들어갔던바 이를 애석하게 여긴 素筌 孫在聲 선생이 일본으로 건너가 한달 남짓 간곡한 요청으로 등총린박사의 연구실 한채를 지어주고 이 천하의 지보는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어 국보 180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손세기씨가 寶藏하고 있다.

** 참 고 문 헌 **

1. 문기선, <書法과 歲寒圖>,{ 제주문화의 재조명}, 일념, 1986.

2. 양순필, <추사의 濟州流配漢詩考>,{제주문화의 재조명}, 일념,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