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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의 입지 형태


+------------<< 目 次 >>-------------------+

1. 신앙공동체로서의 촌락

2. 자연 환경에 의한 촌락

3. 사회.경제적 조건에 의한 촌락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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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락은 생활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에 발달하는데 그러한 조건에는 물이나 기후 지형같은 자연적인 것과 교통이나 방어적 기능 또는 문하적 기능과 관련된 인문적인 것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다른 어느 지방과는 달리 신앙공동체로서의 촌락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1. 신앙공동체로서의 촌락

제주도에는 이백 군데가 훨씬 넘는 자연부락마다 할망당이 있고 할망당마다 당신이 다르므로 제주도 안의 당신 본풀이도 그 부락 수호만큼 된다. 육지에서는 당신 본풀이가 거의 전해지지 않으나 제주도에서는 당마다 독특한 당신 본풀이가 전해온다. 그 많은 당신 본풀이를 대표할 만한 것으로 송당 본향 본풀이를 들 수가 있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울의 남산에서 솟아난 임정국의 따님인 백주 할망이 송당의 소로소천국을 찾아가 부부가 되어 살게 되었다. 아들 일곱형제를 낳고 여덟째는 아직 뱃속에 있었는데 예전처럼 사냥을 해가지고는 살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래서 백주할망은 소천국에게 농사를 짓기를 권했다. 하루는 소천국이 널따란 밭을 혼자 가는데 삼진산이란 중이 지나다가 밥을 좀 달라고 했다. 그가 조금만 먹으라고 하며 싸온 점심을 내놓았더니 중은 소천국이 먹을 구 아홉 그릇과 밥 아홉동이를 깡그리 먹어치우고 도망쳐 버렸다. 점심을 빼앗긴 소천국은 배가 너무 고파서 밭을 갈던 제 소를 잡아 먹었으나 그래도 모자라서 남의 소까지 잡아먹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부부는 싸우고 헤어졌다. 소천국은 오백장군의 따님을 첩으로 삼아 딴 살림을 차려 나갔고 백주 할망은 여덟째 아기를 낳아 길렀다. 그 애가 세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 소천국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애는 재롱이 지나쳐 아버지인 소천국의 수염을 뽑기도 하고 더 심한 장난도 함부로 해 참다 못하 소천국이 돌로 만든 궤에 담아 동해 바다에 띄워 버렸다. 이 궤는 동해 용왕국의 세째딸에게 발견되어 궁궐로 들어가게 되었고 이 여덟째 아이가 용왕의 세째딸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한개에 먹어치우는 양이 ?고기도 장군 밥도 장군?으로 엄청나게 많아 용왕은 사위와 딸을 돌궤에 같이 넣어 띄워보내 버렸다. 그들은 강남천자국에 닿았는데 그곳에서 일어난 난리를 평정해 주는 큰 공을 세웠다. 그들은 천자가 내려주는 사례도 굳이 사양하고 제주로 돌아왔다. 열일곱살 때 돌궤에 넣어 띄워버렸던 아들이 살아 돌아옴을 본 부모는 겁이 나서 도망가다가 죽고 그의 일곱형들도 죽었다. 그리고 어머니 백주할망은 웃손당 송당머리 큰 팽나무 밑으로 아버지는 앞손당 고부니마을로 맏형은 거머문 곡성으로, 둘째형은 대정 광정당으로,세째형은 정의 시선당으로,네째는 제주성 안 내왓당으로,다섯째는 김녕의 궤내갓으로,여섯째는 걸머리 멍동국으로,일곱째는 다리산으로,여덟째는 토산 본당으로 들어가 저마다 본향신이 되었다.

이 신화에서는 첫째로 이곳 사람들의 생활수단이 사냥에서 농사로 ?겨진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농사법이 제주도 바깥에서 들어온 것임을 암시해 준다. 둘째로 아버지나 아들이나 한결같이 바깥에서 여자들을 맞아들였다는 점에서 바깥에서 사람들이 제주도로 잇달아 몰려왔음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짐승을 사냥하여 그 고기를 즐겨먹는 장사들인 남신이 그 고기를 싫어하는 바깥여신을 맞아들였다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겠다. 부락마다 거의 수호신으로 ?본향당신(本鄕堂神)?이 좌정해 있으면서 부락과 부락민을 보호해준다고 믿고 있다. 이 당신들의 내력 신화인 ?당본풀이?에는,당신이 어느 부락을 차지해 마을을 열고 ?단골(신앙민)?들의 제의를 받아가며 살아가는 신앙공동체로 묶여져 설촌이 만들어진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2. 자연환경에 의한 촌락

촌락의 입지에 기본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은 식수나 농업용수 등 물의 이용조건이고 이런 요소들과 결부된 경지면적과 생산활동의 특성을 고려되는데, 그 밖에도 바람이나 일조시간 등 기후적 조건이 중요하다.

제주도는 부락형성 중 물과 관계가 깊은데 온섬이 다공질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타도와는 달리 물이 잘 고이지 않고 땅을 파도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마실물을 쉽사리 얻을 수 없었다. 해안선을 따라 지하수가 용출되는 곳이 산재해 있고 중산간 지대에는 물이 고인 늪이나 못이 드물게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내도 비가 그치면 말라버리는 건천이다. 그러다 보니 물을 보다 쉽사리 구할 수 있는 해안가 물이 쉬 마르지 않는 내나 못이 있는 중산간지대에 부락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3. 사회.경제적 조건에 의한 촌락의 변화

전란이 심했던 옛날에는 방어가 촌락입지에 큰 영향을 주었으므로 고려 중엽부터 잇따른 왜구의 침탈로 인해 해안 부락은 많은 손상을 입게 되어 중산간부락으로의 이주가 많아졌다. 특히 조선 말기에는 관의 침탈이 가중되어 관에 ?기는 사람들이나 생활이 어려워진 사람들은 중산간 내지는 산간부락으로 이주해 화전갈이를 하며 살아갔다. 이 화전민들이 설촌한 부락은 안덕면의 동광리 서광리 광평리 등인데 이렇게 ?겨간 사람들은 관을 불신하고 관을 상대로 끝없는 항쟁을 벌이는 힘겨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4.3항쟁중인 1948년 겨울에는 모든 중산간부락은 소개령에 의해 불태워졌다. 그 이후 파괴된 중산각부락 중 아직도 폐촌으로 남아 있는 부락이 많으며 설령 부락이 재건되었다고 해도 원래의 부락위치가 아닌곳으로 세워진 부락도 많다. 그러나 1914년부터 1917년까지 해안선을 따라 제주도를 도는 ?일주도로?가 도민들의 부역으로 노폭이 확장 전면 개수되고 1925년에 처음으로 대중교통수단이 등장하면서 도 전역이 일일 생활권으로 통합되었다. 또한 제주를 비롯하여 서귀포 모슬포 성산포 한림이 상업과 무역의 팽창과 더불어 신흥취락으로 번창하게 된 후로는 행정과 경제적 중심이 중산간부락에서 해안부락으로 바뀌게 되었다. 일제 초기(1915) 면사무소는 제주, 애월, 명월, 대정, 서광, 중문, 홍로, 의귀, 고성, 평대, 조천 등 중산간 마을에 대부분 위치하고 있었으나 일주도로의 개통 후 절반이상이 해안부락으로 옮겨지고 현재는 전부가 해안부락에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