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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祖一孫之墓



모슬포에 가서 4.3항쟁에 대한 증언을 듣다보면 흔히 그 분들은 ?누구는 대살 당해 죽었수?하는 말씀 끝에 ?송악산 굴에 강 많이 죽었주?하는 말씀을 꼭 덧붙이는 걸 많이 경험하게 된다. ?송악산 굴?이라면 일제 식민지시대 말기에 일본군들이 송악산 지역을 군사기지화하면서 연합군 함정이 접근해 오면 어뢰를 싣고 돌진해서 자폭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그 굴을 말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6.25 후 제주도에서는 가장 큰 학살사건으로 볼 수 있는 ?百祖一孫之地?의 희생자들은 그 굴에서 학살당한 것은 아니었다. 백조일손지지의 희생자들은 송악산 서편 자락에 위치한 ?섯알오름의 탄약고터?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던 것이다.

섯알오름의 탄약고터는 일제가 항복하면서 탄약고( 지금은 많이 메워져 있었지만 섯알오름의 동편 자락을 허물고 들어가 입구를 만들고 또 오름 정상까지 부수고 지하 깊숙히까지 파서 만들었던 창고는 그 실면적이 실히 3-4백 평은 될 듯 싶을 정도로 넓었다. 창고터의 면적 등 여러가지 면을 고려해볼 때 통상적인 군수물자 창고였다고 증언하는 분도 있었음 를 폭파시키자 지상의 건물 형채는 사라져 버린 채 큰 웅덩이로 변해버린 입구에서부터 보면 굴로 보일 수도 있는 그러한 곳이었다. 해서 몇년 후 시신을 수습할 때도 밑바닥이 콘크리트여서 물이 고여 있었고 그 물을 떠내고 나서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남쪽으로 송악산이 보이고 동북쪽으로는 산방산이 우뚝서 있는 ?사계리 공동묘지? 한 켠에 132구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의 땅?이라는 의미의 ?백조일손지지?의 희생자들은 그렇게 먼 발치로 내려다보이는 섯알오름의 탄약고터에서 유족들이 이야기하듯 ?맬젓 담듯이? ?여자들은 들어올리지도 못할만큼 큰 돌덩이에 눌린채? 학살되었다고 한다.

입구쪽 큰 웅덩이에 132명 몇 발자국 안으로 떨어진 작은 웅덩이에 한림 사람들 62명, 합쳐서 194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42년전 6.25 얼마후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를 건너 사랑을 속삭인다는 칠석날 새벽 무참히 학살되었던 것이다. ?섯알오름의 대학살?이 지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89년 8. 9일자 제주신문을 통해서였다. ?칠석날에 [한의 제례]?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기사에는 ?30여명 유족들이 모여 고인의 넋을 기렸는데 그동안 후손들은 [빨갱이 가족] 취급을 받아 뿔뿔이 흩어져서 겨우 몇 명만이 제사를 지내왔다 한다?고 했다. 사실 4.3은 ?항쟁?이었다는 학설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는 요즈음 학살의 명분이 무엇이었든 정당화 될 수는 없을 것이라 보며 유족들과 당시 상황을 직접 체험했던 분들의 증언 그리고 당시의 여러 기록들을 참조하면서 진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 예비검속 >

1950년 6.25가 발발하면서 제주도에는 소위 ?예비검속?이라는 피바람이 전도에 휘몰아쳤다. 그 예비검속의 대상자들을 증언을 통해 추론해보면 전에 검속되었다가 일차 석방되었던 사람, 경찰이나 서청 등의 우익단체에 한번 잡혀가서 그 기록이 남아 있던 사람들이 주로 검속 대상이었던 것 같다. 1948년에 일어났던 4.3항쟁이 다음해에는 군경이 대토벌로 어느 정도 와해되자 정부당국에서는 ?선무공작?을 통해 귀순을 유도하고 계엄령을 해제한다. 정부에서는 귀순자들을 엄격히 심사한 후 어느 정도는 귀가해서 가족들과 생활하도록 배려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6.25가 발발하고 정부가 부산으로 옮기는 등 상황이 악화되면서 귀순자,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던 기록이 남아있던 사람, 혹은 무고한 양민들이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다시 체포되고 백조일손지지에 묻혀있는 희생자들처럼 많은 애매한 양민들이 대량학살을 당하게 된 것이다.

결국 계속해서 밀리기만 하던 당시의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을 그냥 놓아둘 수는 없는 게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항변이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그럼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우리들이 학살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보다 도움이 될 듯 싶다. [제주년감]과 [제주민중항쟁] 그리고 [동아년감] [말]지 1988년 12월호 등을 통해 일지 형태로 백손일손지묘의 학살을 즈음한 주요 사건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949

1. 19; 제주도 선무공작대 활동 개시 (제 2연대장 행정고문 이기영을 대장으로 120명 정도로 구성)

3. 2; 총사령부에서 제주도 전투지구사령부 설치(사령관 유재홍 대령, 참모장 제 2연대장 함병선 중령)

5. 10; 재선거 실시(제주도 북군 갑구 홍순령, 을구 양병직 당선)

5. 15; 전투지구 사령부 해산

6. 5; 국민보도연맹 결성. 좌익계 각 정당 사회단체에서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 가입은 반 강제적이었던 것 같이 보이며 1950년 초에는 가입 맹원수가 30만 명에 이르렀다 함

6. 29; 김 구 피살

7. 5; 지방자치법 공포

8. 13; 제 2연대 독립 1대대(대대장 김용주 소령)에 제주도 경비를 인계하고 인천으로 이동

9. ; 제주도 방위군, 학도호국단을 조직하여 군사훈련 실시

10. 12; 계엄령 해제

1950

4. 1; 청년방위대 발족(단장 강성건)

5. 30; 제 2대 민의원 총선거(당선자 북군 갑구 김인선, 을구 강창용, 남군 강경옥)

6. 25; 6.25 전쟁 발발

6. 25 ∼ 예비검속 시작

7. 8;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

7. 16; 제주, 성산, 한람항으로 1만여 피난민 쇄도. 현 제주주정공장에서 육군 제 5훈련소 창설(소장 김병휘 대령)

7. 20; 공산군 대전 점령

8. 1; 제주도 유지 12명 모함사건 발생

8. 11; 비상향토방위령 선포. 동세칙에 의해 남녀노소 할 것없이 전체 도민을 강제동원하고 재산을 군사상 필요에 의해 징발해 감

8. 18; 정부 부산으로 이전

8. 20; 섯알오름의 대학살(음력 7. 7)

8. 27; 도내 청년 다수 해병 3기생으로 지원 출정

9. 15; 인천상륙작전 개시

9. 28; 서울 완전 수복

10. 10; 제주도에 한하여 비상계엄령 해제

10. 27; 정부 서울로 환도

다음에는 예비검속과 [국민보도연맹](약칭 [보련])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보련은 1949년 6월 5일에 결성되었는데 좌익 전향자들은 반 강제적으로 가입이 되어서 1950년 초에는 가입맹원수가 전국적으로 3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들은 반강제적으로 가입되어 일부 적극분자들은 경찰 끄나플로서 자수하지 않은 좌익의 검거에 나섰고 그 밖에 반공시위(49. 11. 6)등의 활동을 한다. 그러다 6.25가 터지자 철수하던 국군들에 의하여 보련맹원들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한다. 보련맹원의 수가 30만 명이 넘었다 하니 학살이 없었던 서울과 기타 몇 지역을 제외하더라도 엄청난 숫자가 죽었을 것이라고 [말]지는 추정을 했다.

그럼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제주도에서 예비검속 후 학살로 이어졌던 일련의 과정이 보도연맹사건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보련이 전국적인 조직이었고 해서 제주도에서도 조직이 안되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제주도에서도 조직이 되었다는 것은 제주신문의 [4.3의 증언] 제 1회분 기사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그 글에서 4.3을 시기 구분하면서 제 7기를 50년 6월 25일 ∼ 51년 3월 20일로 잡고 이 기간을 ?대대적 예비검속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해당시기를 ?이 시기에 보도연맹가입자와 통비가족이란 이유 등으로 예비검속되 많은 인명이 희생됨?이라고 설명했다. 위와 같은 설명으로 보아서 조직되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인데 결국 이 [보련제주도 조직]에 관한 증언과 자료가 더욱 발굴되어야 예비검속에서 학살로 이어지는 상황을 더 정확히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 절간고구마 보관창고 >

현재 대정읍 상모리에 위치한 대정읍민관은 일제 시 ?절간고구마 보관창고?였다 한다. 그 절간고구마 보관창고(이하 창고)가 예비검속자들의 수감 장소였다. 당시 모슬포 경찰서는 한림에서부터 한경, 대정, 안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6.25가 일어나자 관할 지서에 예비검속되어 일시 수감되었던 사람들이 모슬포경찰서로 이송되면서 창고에 수감되었다 한다. 그럼 검속되어 창고에 갇혀있던 인원은 어느 정도였을까. 6.25후 얼마 동안 창고에 갇혀 있다가 석방되었던 현재 대정읍 상모리에 거주하는 고모(현 70세)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당시 매일 몇명씩 석방되기도 하고 또 계속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고해서 창고 두 개에 항상 사람들로 가득찼다고 하며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도 창고의 검속 인원과 섯알오름에서 학살당한 사람들 숫자사이의 차이가 가장 큰 의문점이었다. 계속 검속되어 들어오고 석방되어 나가고 하는 과정에서도 창고는 항상 검속자들로 가득찼다고 한다.

< 김순애 여인 >

김순애 여인(현재 56세 김령리 거주)은 제주신문의 [4.3의 증언] 제 1회분(89. 4. 3)에 증언을 해주신 분이다

?그녀는 4.3당시 국민학교 2학년(당시 13살)으로 안덕면 동광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48년 11월 21일 소까이 가라는 날까지 농작물 정리에 바빠 내려가지 못하던 식구들이 그 날 토벌대에 의해 외삼촌 내외와 사촌동생이 그녀의 눈 앞에서 살해된다. 그 때부터 그녀와 어머니 등은 폭도 아닌 폭도로 해변 마을로 소까이 가지 못하고 산야를 헤메 그 해 겨울을 보내게 된다. 뒷해 3월 그녀와 어머니는 귀순(?)하면 살려준다는 말에 하얀천을 단 깃발을 들고 화순으로 귀순한다. 귀순후 2개월을 서귀포 수용소에서 보낸 그녀의 어머니는 석방되어 안덕면 사계리를 거쳐 화순리에 일시 터를 잡고 농사를 짓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6.25후 어느날 여름농사를 짓고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예비검속되어 화순지서를 거쳐 모슬포로 이송되고 모슬포 군대 비행장에서 학살되었다는 사실만 아는 사람을 통해서 전해 들었다.?

위의 내용은 제주신문에 게재된 증언의 요약이다. 그녀가 화순지서에 어머니가 수감되었을 때 면회를 가자 어머니(강무생, 학살 당시 36세)는 ?나는 3일 후면 모슬포에 조사받으러 간다. 금방 끝난다고 하니 곧 돌아올 수 있다?고 그녀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오면서 어린 마음에도 어쩜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후 모슬포로 면회를 가자 아는 분을 통해 어머니는 창고에 수감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일주일쯤 후에 다시 면회를 갔을 때에는 어머니는 송악산 굴에서 죽었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그날이 음력으로 6월 22일이라고 해서 지금도 어머니 제사를 6월 21일날 지낸다고 김여인을 이야기를 했다.

위의 증언을 살펴보면 학살날짜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김순애 여인의 어머니 강무생씨도 섯알오름 탄약고터에서 학살된 것 같다. 귀순후 예비검속되고 모슬포 창고에 갇혔다가 송악산굴에서 학살되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섯알오름의 타 희생자와 아주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어쨌든 김순애 여인의 경우도 막연히 섯알오름에서 어머니가 학살되었던 것이라고 믿고 있다. [김순애 여인]의 경우는 공식적인 기록으로 나와 있는 부분을 살펴본 것인데 그럼 기록되지 않은 유족 중에 막연히 송악산 굴에서 가족 중 누군가가 학살되었다고 믿고 있는 그러한 분은 없을까 앞서 제기했던 의문점대로 창고에 검속되어 갇혀있었던 최소 3-40명의 사람들 중 132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석방된 것일까. 아니라면 그럼 나머지 분들은 어떻게 되었다는 말인가.

< 백조일손지묘의 조성 >

학살된 바로 그날 아침 유족들은 소문을 듣고 학살장소로 달려간다. 신사동산에서부터 하나씩 떨어져 있는 신발을 따라 섯알오름 탄약고터에 도착한 유족들은 학살된 시신을 보고 넋을 놓아 버린다. 탄약고의 큰 구덩이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그냥 총으로 난사해버리고 나서는 맬젓담듯 엉궈있는 시신위에 또 왕돌로 꼭꼭 눌러서 ?남자들이 그 왕돌을 치우지 않고는 시신을 건드려보지도 못할?정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넋을 놓고 앉아 있던 것도 잠시, 이모씨의 증언대로 ?이걸 다 파헤치자?고 시신들을 파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열둘쯤 시신을 파냈을 때 순경들이 달려온다. 다시 시신을 파뭍었다가 순경들이 가버리면 파내고 하다 결국에는 순경들의 위협에 더 이상 작업을 진행치 못하고 그 후 만 7년을 시신을 어떻게 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다. 그후 세월이 좀 풀리자 1957년 희생자 이현필씨의 부친 이성철씨와 같은 희생자 이자익씨의 형 이모씨가 주장을 해서 유족들을 수소문하고 해서 연락된 132명의 가족 116명에게서 각각 1,000원씩 총 116,000원을 모집하고 그 돈을 기초자산으로 해서 묘지를 구입하고 묘지 담장을 두르고 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해나간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 1957년 4월 26일 기금조성 시초부터 더 이상의 유족회를 이끌어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1963년 7월 3일까지를 기록한 것으로 8절지 앞면에는 희생자 명단 및 유족 이름이 적혀있고 뒷면에는 기금조성에서부터 묘지구입 축장비 비석을 만드는 비용 등 그 사용내역이 적혀있다.

57년 여름 백명에 가까운 유족들이 모여 공동기금으로 132명치 칠성판을 장만한다. 칠성판에 창호지를 깔고 머리뼈 하나에 긴뼈 3-4개씩 맞추어서 사계리 공동묘지까지 운반하고 했는데 김경육씨는 칠성판이 모자랄까봐 걱정했는데 몇 개가 남았다고 했다. 누구네 시신인지 구별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유족들은 사계리 공동묘지 동남쪽 귀퉁이에 사두었던 땅으로 시신을 운반하고는 애기무덤보다 조금은 클까한 규모로 6줄씩 한줄에 22기의 묘지를 조성한다. 그 묘지에 서면 동북쪽으로는 산방산이 서남쪽으로는 학살터인 섯알오름이 손에 잡힐 듯 내려다 보인다.

묘지 이름은 이성철씨가 지었다 한다. 다른 유족들이 칠석날 함께 죽었으니 `칠석합방? 으로 하자는 걸 이씨는 ?백명도 넘는 많은 사람들이 한날에 죽어 누구의 시신인지도 모르는 채 무덤도 같고 제사도 같이 치르니 한 자손이 모시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백조일손지지?라고 이름을 붙였다. 묘지를 조성하고 비석을 세우고 하는 일에 3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60년 칠석날 `백조일손지지?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는데 비석 뒷면에는 희생자 명단 전부가 올라와 있었다 한다.

그러나 61년 5.16후 정부에서는 ?나쁜 사람들을 죽여쁜 건디 호사스럽게 무슨 비석이냐?고 당장 때려 부수라고 했다. 그리고 유족 개개인에게 빨리 이장하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이때의 상황을 희생자 고운경씨의 부인(현 73세)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하루는 경찰에서 와서는 ?당장 묘지를 이장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좋지 않다?고 닥달을 하더라는 것이다. 해서 ?61년 음력 5월 3일날 이장을 했는데 그날은 시아버지의 제일이어서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런데 이장을 하고 보니까 자기말고도 몇 분이 더하긴 했지만 대다수는 버티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은 자기 같이 ?몰명헌 사름?이나 한게 아니냐?고 한숨을 쉬었다.

4.19후의 민선 리장을 지낸 오병헌씨는 당시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공동묘지에 갔던 오씨는 서귀포 경찰서장을 만나 따졌다고 한다. ?돌연 이묘를 하라니 무슨 말이냐. 나도 자식과 동생을 6.25에 보내서 죽인 사람인데 물 삭고 산 삭은 판에 다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잘못이다.?

?위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럼 축담이라도 치워달라?고 서장은 사정을 했다. ?축담도 마소들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해서 결국은 비석을 철거하는 선에서 합의를 보았다 한다. 그래서 어렵게 세웠던 비석을 몇 명이 메를 들고 가서 두동강이 내고 그 자리에 파묻었다고 했다.

그 후에도 신원이 파악된 유족들은 이장을 했던 모양으로 현재는 20여기가 이장한 흔적이 있었다. 여하튼 비석을 부순 후에도 계속 압력이 있었다 한다. 경찰과 방첩대 등에서의 압력에 시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김경육씨는 말했다.

< 만뱅듸 모슬포 공동묘지 >

한림읍 명월경에 있는 작은 갯거리 오름 남쪽에 `만뱅듸모슬포 공동장지?라는 묘지가 있다. 남서쪽으로 금악오름이 보이고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작은 갯거리 오름에는 한림읍 관내 4개리(현재 명월, 금릉, 옹포리)공동장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62구의 시신도 백조일손지지와 마찬가지로 50년 칠석날 섯알오름 탄약고터에서 학살된 분들이다. 여기에 안장되어 있는 분들도 결국은 백조일손지지와 동일한 희생자이다. 그러나 학살된 위치가 백조일손지지의 희생자들이 학살된 곳보다 몇 발자욱 안으로 떨어져 있고 학살된 시간도 다르며 한림지서에서 직접 옮겨져 왔다는 사실 등 백조일손지지의 희생자들돠는 다소 차이점이 있기는 하다.

현재 명월리에 거주하는 김달천(현 89세)씨의 증언으로 학살의 진상을 살펴보자

?섯알오름으로 가잰허믄 지서 앞을 지나야 하거든. 그래서 전에 모슬포지서에 근무해난 사름도 태우고 한림, 명월 유족 스무명쯤이 아침 일찍 출발했지. 지서 앞에서 순경했던 사름은 지서에 강 우리가 올 때가지 놀고 있으라고 해놓고 우린 섯알오름으로 갔주. 처음에 갈 때는 59구로 알았지 유족들이 따라가던지 못가는 사름은 부탁도해서 59구로 알아신디 파다보니 3구가 남는 거라. 그것도 그냥 담아단 묻었지 참 애무헌 사름 다 죽었지. 칠석날 며칠 전이라실 거라. 소까이 갔단 다들 올라와 성도 쌓고 민보단허연 보초도 서는디 한림에서 도리우찌 쓴 육지말 쓰는 토벌대 사름 하나가 나타난거라. 민보단 사무실에 오더니 며칠 조사허고 보내준다고 허면서 이름을 부르는거라. 이름 부른 사름 중에 그 디 있던 사름들은 바로 잡아가고 없는 사름은 집을 가리키라고 해서 우리 중동에만 8명을 잡아다 놓더니 ?여기 귀순자는 없느냐?고 또 물어봐 오용승이랜 헌 스물댓 난 놈이 미련하게 가만히 있었으믄 안 죽었을 건디, ?네 여기 있습니다?허고 대답헌기라, 대답했단 같이 간 죽었지. 누구가 밀서헌 걸 그 밀서헌 놈도 경찰에서 ?너같은 놈은 또 배반헌다?고 죽여부렀댄허대 다 애무헌 사름털이지 오용승이도 겁나 산에 도망갔단 귀순헌 아이고. 나머지는 경찰에 한번 안 잡혀가본 사름덜이라 한림지서에 2-3일 갇혔단 칠석날 밤 2시쯤에 모슬포에 데려단 죽여부렀다고 나중에 소문이 났대. 우리가 시신을 파는데 보니 몇 사름이 완 구경허면서 물어보데 ?어디 사름덜이 완 파가느냐?고 우린 한림서 왔댄 허난, 자기낸 ?옆에 백 몇 사름이 죽은 디 사름덜이라?고 했어. 우린 옆 웅뎅이에 백 몇 사름 죽었다는 것만 알지 자세한 건 몰라?

김달천씨도 큰 웅덩이에서 132명이 어떻게 학살되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백조일손지지의 유족들도 대충 옆에 있는 작은 웅덩이에는 한림 사람들이 학살됐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학살 장소와 그 날짜만 동일하다는 것인데 그럼 이 두 학살사건은 연관이 없다는 말인가.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한림지서는 모슬포 경찰서 관할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모슬포 ?창고?에 있던 사람들은 모슬포 경찰서 책임하에 그리고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채 모슬포?창고?로 이송되지 못 했던 사람들은 관할 지서 책임하에 검속자들을 처리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중에 한림지서에 있던 사람들은 섯알오름 탄약고터로 이송하라고 했을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하는 것으로 현재 상모리에 거주하는 유모씨는 전에 이 사건을 알아보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창고에 있던 사람들을 밤 2시에 차에 태워 섯알오름으로 가려했는데 차 한대가 고장이 나서 고치다보니 새벽이 되어 버렸고 그래서 학살 후 돌아오던 차가 유족들에게 발견되어버렸다?고.

이 말을 한림 유족들의 말과 연관시켜 보면 그때의 상황이 뚜렷이 부각된다. 모슬포 창고에 있던 사람들과 한림지서에 있던 사람들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학살하려 했는데 사고가 생겨서 한림 사람들이 먼저 학살당한 것이라고. 사실 한림 사람들이 학살된 작은 웅덩이는 탄약고터의 조금 안쪽에 있고 백조일손지지의 희생자들이 학살된 큰 웅덩이는 작은 웅덩이와 입구쪽으로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바깥쪽이다. 결국 같은 시간에 학살하려던 계획이 몇 시간 간격으로 학살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장소도 약간 차이가 나게 된 것 같다.

< 비석은 무사 뿌솨부렀는지 >

학살이 있고나서 얼마동안은 모슬포의 개들까지도 전부 미쳐 헤매다녔다고 한다. 8월 한여름에 299구의 시신이 썩어가는데 그럴밖에 더 있느냐고 한숨을 쉬면서 말을 하던 하모리의 이모씨는 마침내 분노를 터뜨리고 만다. ?비석은 무사(왜) 뿌솨부러 자기네가 세워준 것도 아닌디 이제난 우리가 어디 가서도 허릴 펴고 말도 햄주, 그때사 우릴 추접하게 볼걸로만 생각허연 어딜 밖에 나가나졌더?

원래 모슬포는 조선말기에는 민란의 진원지이고 4.3시에도 항쟁의 중심지나 다름 없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러한 표현이 학살을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남편 대신 얻은 피붙이들이 이 어머니의 한을 풀어줄 수 있을까.

작년 칠석날에는 백조일손지지에 유족들 30여명이 모여 ?한의 제례?를 지냈다 한다. 이제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유족들의 멍든 가슴은 서서히 희망에 불타오르기 시작하고 있다. 적극 조사에 협력해 주는 몇몇 유족을 보며 ?비석은 무사 뿌쇠부렀는지?가 아니고 ?우리도 다시 비석을 파내어 부서졌으면 부서진대로 다시 세워야지?하는 날이 어서 오기를 유족회가 재결성되어 활발히 진상규명에 나서는 그 날이 어서 오기를 기대해 본다.

** 참 고 문 헌 **

현장기획, <百祖一孫之地의 恨을 넘어서>, <<4.3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