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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역사개관

-탐라에서 조선시대까지- 


+-----------<< 목 차 >>-------------+

| 1. 고대국가 탐라 |

| 2. 고려에 빼앗긴 주권 |

| 3. 삼별초와 함께 들어온 뭍의 문화 |

| 4. 조선의 건국과 행정제도의 개편 |

| 5. 왜구의 침입 |

| 6. 조선시대의 출륙금지령 |

| 7. 조선시대의 물산 |

| 8. 공물과 조세수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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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국가 탐라

제주도에 언제 고대국가가 들어섰는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문헌기록이 없다. <삼국사기>에 ?탐라?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그 중에 가장 앞선 것이 ?백제본기?에 나오는 것으로, 서기 476년 4월에 ?탐라국이 특산물을 바쳤으므로 임금이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은솔이라는 벼슬을 주었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으로 보아 제주도에는 삼국시대에 이미 ?탐라?라는 고대국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기원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다. 중국의 진나라의 진수가 285년쯤에 쓴 <三國誌>의 ?魏志?와 육조시대에 범엽이 쓴 <後漢書> 같은 것이 ?주호?(제주도의 옛이름)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이 제주도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마한 서해에 있는 큰 섬에 주호가 있는데, 그 인종은 몸집이 작고 언어는 韓族과 같지 않으며, 머리를 짧게 깎아 鮮卑族과 비슷하다. 그들은 가죽옷을 입는데 웃도리만 걸치고 아랫도리는 입지않고 소와 돼지를 기르며 배를 타고 한나라와 왕래하며 교역한다?고 적혀있다. 이 기록으로 서기 285년 이전에 제주도에 주호적이 살았던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모습과 언어와 옷과 생업과 교역관계, 그리고 문화같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같은 기록들을 가지고 그 종족과 원류를 규명하려는 시도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다. 어떤 이는 2세기 중엽에 강성했던 만주의 선비족이 남쪽으로 내려와 제주도에 살게 되었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옛날에는 딴 곳에서 온 참략자를 잡으면 머리를 짧게 깎고 노예로 삼았는데 제주도에서도 표류자나 해적을 붙들어 머리를 짧게 깎아 노예로 삼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기록에 나타난 주호인이 그곳의 노예였다면 그들을 지배했던 종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따라서 이는 그때에 제주도에 살앗던 보편화된 종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 제주도 향토사학자 김태능씨는 주호족을 도서족 계통, 즉 일본의 원주민이었던 고루보구족이나 아이누족으로 보았다. 고루보구족은 아이누족 전에 일본 열도 전역에 걸쳐 움집생활을 했던 종족이며 체구가 작고 옷도 웃도리만 걸치고 아랫도리는 입지 않았으며 사냥과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종족을 비교해보면 몸집이나 언어나 옷에서, 또 이따금 발굴되는 석기나 토기에서 공통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제주와 일본열도의 서남쪽에 있는 섬인 규슈와는 사백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거나 옮겼을 가능성이 있다.

고루보구족에 이어 일본에 거주했던 아이누족과도 공통성을 발견할 수 있다. 최남선은 제주족은 체모, 수염, 성격 같은 것이 아니누족과 닮은 데가 많고, 특히 언어와 땅이름에서도 비슷한 발음이 많은 것을 들어 제주에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아이누계통이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 주호족이 그 때의 제주도에 주로 살던 종족이었다고 할지라도 한라산의 폭발이 심했던 것을 참작하면 그들이 살아남기가 매우 힘들었을 듯한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완전히 멸망해서 사라져 버렸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주도에 화산이 폭발한 기록을 살펴보자.

<고려사절요>에 고려 목종 5년인 1002년 6월에 ?탐라의 네 곳에서 구멍이 뚫려 붉은 빛깔의 물이 닷새 동안 솟아나오다가 그쳤는데 그 물이 모두 기와와 돌이 되었다?고 적혀 있다. 이는 용암이 분출한 것을 의미하는데 그 5년뒤인 1007년 10월에도 탐라에서 ?첨음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컴컴해지고 땅이 움직여 우뢰소리가 나더니 이레만에 그쳤는데 바다 가운데 높이가 百丈이나 되고둘레가 사십리나 되는 큰 산이 솟아났다. 풀과 나무는 없고 연기가 산위를 덮어 마치 석유황같으므로 사람들이 두려워 감히 갈 수 없다?고 보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뭏든 제주도의 선주민은 어느 한 곳에서만 흘러들어온 단일족으로 볼 수가 없을 것이다. 한반도로부터 들어와 주류를 이룬 韓族과 이곳 저곳에서 들어온 남방계 島嶼族들이 뒤섞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고려에 빼앗긴 주권

탐라의 건국연대와 선주민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다른 의견이 있으나, 삼국시대에 탐라가 독립국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삼국사기>만의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탐라가 처음에는 백제를 섬기다가 백제가 망한 뒤에

신라를 섬기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가 건국되자 탐라는 처음에 고려에 예속되기를 거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가 군사를 보내어 치려고 하자 탐라왕 고자견이 굴복하여 태자 고말로를 입조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에 고려 태조는 탐라왕 고자견을 성주로 삼고 양구미라는 인물을 왕자로 삼아 한 대에 한 차례씩 입조케 하였다. 그리하여 탐라는 해마다 감귤을 위시하여 우황, 쇠뿔, 쇠가죽, 말린 소라, 비자, 바닷말, 거북껍질 같은 공물을 바쳤으며, 고려 조정에서는 그때마다 운휘대장군, 상호군, 유격장군같은 높은 벼슬을 내리고, 공복, 은대, 채단, 약물 같은 많은 선물을 내렸다. 또 탐라국 사람으로 고유와 고조기같은 이는 고려의 높은 관직에 중용되기도 했다.

탐라가 고려의 한 군이 된 것은 숙종 10년인 1105년 5월이다. 고려는 이때에 탐라라는 국호를 폐지시키고 탐라군을 설치하였는데 이때부터 城主나 王子의 직위는 명예직으로 두고 고려에서 이 곳을 다스리는 관리를 파견했다.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고려조정에 최척경을 부임하게 했는데 그는 제주도 사람이 아니면서 제주도를 다스린 최초의 사람이다. 그 때가 의종 15년이 1161년이고 그로부터 안무사, 부사, 판관, 목사, 만호 같은 벼슬의 관리가, 삼별초의 난 뒤에 원나라의 다루가치가 통치한 한 세기를 빼고는, 이곳에 와서 정사를 맡았다. 그러나 고려의 관리가 백성을 다스리기 시작하고부터 제주에는 뜻하지 않았던 民亂과 소요가 일어났다.

의종 22년인 1168년 11월에 일어난 양수의 난을 비롯하여 신종 5년인 1202년의 10월에 번석의 난이, 원종 8년인 1267년에 문행로의 난이, 충숙왕 5년인 1318년 3월에 사용과 김성 일당의 난이, 공민왕 5년인 1356년 10월에 목호 가?적홀과 고탁 일당의 난이, 공민왕 11년인 1362년 8월 목호 고독불화 일당의 난 이, 공민왕 21년인 1372년 3월에 목호 석가을비 일당의 난 이, 우왕 1년에 차 현유일당의 난이 일어났다. 이 난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가 고려의 관리거 탐라를 다스리기 시작하고부터 그들의 폭정에 항거하여 탐라인들이 뒤에 제주에 왔던 원나라의 목호들이 원나라가 망한뒤에 명나라가 마필을 헌상하라고 하자 이에 항거하여 일으킨 반란들이다. 폭정에 항거했던 민란들은 그 원흉인 관리들이 쫓겨가고 그 대신에 새 수령들이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면 민심이 가라앉아 그 주모자들을 처형시키고 나면 진압되었다. 그러나 목호들이 일으킨 반란에서는 목사와 판관과 심지어 중앙에서 파견되어 온 도순문사 같은 이들이 피살되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공민왕 23년인 1374년 8월에 도통사 최 영이 전함 314채에 군사 이만오천륙벡명쯤을 이끌고 들어와 반란군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3.삼별초군과 함께 들어온 뭍의 문화

중세 이전부터 제주도에는 중국 한나라 상인들과의 교역이 있었고 또 제주 도민이 한반도와 자주 교류했던 사실로 보아 고대 탐라국 시대에 이미 뭍의 문화가 이 섬에 흘러든 것으로 보이지만 뭍의 문화가 한꺼번에 흘러든 것은 삼별초의 난 때일 듯하다. 그때에 이섬은 한반도 문화권의 중심이었던 지금의 개성인 개경과 지금의 강화도인 강도의 문물제도와 생활양식과 언어 풍속 같은 것을 이곳으로 온 삼별초군과 고려군으로부터 받아들이게 되었다. 농경법과 누에치기와 베 짜는 기술과 가축치기 기술과 토목기술과 건축기술같은 것이 점차로 전해졌는데, 한편으로 삼별초군과 함께 들어온 승려들은 이곳에다 절을 세우고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가축치기는 훨씬 전에 들어왔으나, 충렬왕 3년인 1277년에 원나라가 수산평 곧 지금의 남제주군 성산읍 수산리에 목마장을 설치하고 몽고 말 160 마리와 소, 나귀, 양, 낙타 같은 것을 들여와 방목하고 단산관을 파견하여 목축을 주관하개 하여 일본 정벌을 위한 거점으로 삼고 난 뒤주터 크게 발달하였다. 이때에 불교도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졌는데, 수정사, 법화사, 원당사 같은 큰 절이 모두 이 무렵에 세워진 것이다.

4.조선의 건국과 행정 제도의 개편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세운뒤에 강력히 추진했던 중앙 집권 정책은 제주도라고 예외로 두지 않았다. 성주 고 봉례와 왕자 문충세는 태종 2년인 1402년 10월에 새 왕조에 입조하여 비록 이름뿐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때까지 써온 나라 이름과 성주와 왕자의 작호를 스스로 내놓았는데 조선 왕조는 이를 거두어 들이고 이때부터 국호를 사용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주와 왕자의 직책을 세습하던 제도도 폐지하였다. 그 대신에 성주에게는 좌도지관의 벼슬을, 왕자에게는 우도지관의 벼슬을 내려 얼마쯤 명예를 지키게 해 주었다. 그러나 세종 27년인 1445년에 이르러서는 ?진무?와 ?부진무?로 바꾸어 부르고 그 뒤에 다시 부진무의 벼슬을 ?유향?으로 고쳤다. 태종 16년인 1416년에 안무사 오 식이 올린 장계에 따라 한라산 남쪽 지역을 東과 西로 나누어 동쪽에 ?정의현?을, 서쪽에 ?대정현?을 두었다. 이미 제주목이 한라산 북쪽에 있었으니 이로써 이른바 삼읍 제도가 처음으로 확대되었으며, 이 제도는 광무 10년인 1906년까지 계속되어 조선 왕조 오백년 동안에 제주도의 고을을 나눈 행정 단위가 되었다.

제주도는 특히 태종 시대와 세종시대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여러 분야에 걸쳐 새로운 질서와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곧 앞에서 말했듯이 오랜 전통을 지닌 성주와 왕자의 제도를 폐지하고 행정구역을 삼읍제도로 개편한 것말고도, 첫째로 고려 충렬왕 3년인 1277년에 원나라가 설치했던 동서아막을 철폐하였으며, 둘째로 마필의 등급을 매겨 공부제도를 확립하고, 세째로 관리들이 마음대로 전세 곧 농지세를 거두는 일이 없도록 한 수조법을 제정하였으며, 네째로 향교와 교수관을 두어 교육제도를 마련하였으며, 다섯째로 홍화각같은 문화시설을 세웠으며, 여섯째로 감귤나무를 널리 보급하였으며, 일곱째로 방호소, 봉화둑, 수어소 같은 것을 설치하여 방위 시설을 강화하였으며, 여덟째로 김 위민이 지적한 공사적폐 십개조를 받아들여 오랫동안 백성의 원망을 사 온 공사 적폐를 쇄신하였다. 광해군 1년인 1609년에는 동서방리 를 설치하고 지방 관리인 약정을 두었다. 그러니까 제주 본주 곧 지금의 제주시와 북제주군에 중면과 좌면과 우면을, 정의현에 좌면과 중면과 우면을, 대정현에 우면과 좌면을 두고, 그 뒤에 제주본주에 신좌면과 신우면을, 정의현에 동중면과 서중면을, 대정현에 중면을 더했으며 면에는 존위, 경민장, 동장, 기실장 같은 관리를 두어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다.

5. 왜구의 침입

제주도는 일본에 가까이 있으므로 고려 중엽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그치지 않았는데 조선 왕조 명종 때에 이르러서는 더 심하였다. 명종 7년인 1552년 5월에 정의현 천미포 듣 지금의 남제주군 표선면 천미천 앞바다에 왜선 여덟채가 정박하고 몇십명이 상륙하여 약탈을 일삼다가 관군과 충돌하였다. 배에 남아있던 왜구 몇백명도 모두 상륙하여 완강하게 대항하므로 조정에 급히 원병을 청해다가 겨우 격퇴하였는데, 왜구들은 고깃배를 빼앗아 도망쳤으나 미처 내빼지 못한 서른명쯤은 산 속에 숨어 끝까지 항거하다가 마침내 소탕되었다. 그로부터 세해가 지난 명종 10년인 1555년 6월 21일에는 왜선 예순채가 화북포 곧 지금의 제주시 동쪽 2 킬로미터쯤에 있던 포구의 앞바다에 나타났는데 천명쯤이 상륙하여 제주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다. 이때에 목사 김 수문과 판관이 선원은 전에 왜구가 천미포에 침범한 것을 잊지않고 평소부터 잘 대비해 두었으므로 군사와 주민들을 격려하여 철통같이 성을 지켜 적 한명도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때에 제주에 침입한 왜구는 잘 훈련된 사나운 무사들이었지만 관군과 백성이 굳게 뭉쳐 잘 싸웠으므로 그들이 사흘 동안 줄기차게 공격하였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병력을 거두어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때에 목사 김 수문은 날랜 용사 일흔명을 골라 특공대를 편성하고 퇴각하는 적을 역습하여 많은 적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또 적선 다섯채를 빼앗는 큰 전과를 올렸다.

6. 조선 시대의 출륙 금지령

조선 왕조 오백년 동안에 걸친 제주도의 인구 동태를 보면 초기에 해당하는 세종 때에는 2,569호에 18,89명이던 것이 현종 13년인 1672년에는 8,490호에 29,578명으로 늘어났고, 정조 13년인 1789년에는 6,700호에 39,762명으로 인구는 늘어났지만 가구 수효는 오히려 줄어들었으며, 순조 16년인 1816년에는 10,305호에 61,795명으로, 현종 2년인 1836년에는 15,760호에 75,120명으로 늘어났는데, 철종 1년인 1859년에는 다시 가구수효는 11,124호로 줄어들었고 인구는 79,910명으로 늘어났으며, 철종 14년인 1863년에는 7,258호에 49,766명으로 가구와 인구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고종 1년인 1864년에는 11,887호에 85,778명으로 되었다. 이와같은 과정은, 통계가 맞다고 치면, 출륙금지령 같은 특별한 주민 통제 정책을 폈음에도 아랑곳없이 거주 인구가 매우 들쭉날쭉했던 양상을 보여준다. 제주도민이 뭍으로 나가 살 수 없게 법으로 막은 이 출륙 금지령은 제주도 사람이 그때에 겪었던 고초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드러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관리들의 수탈과 왜구의 노략질과 해마다 닥치는 흉년으로 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른 제주도 사람들은 기회가 닿고 틈만 생기면 뭍으로 내빼려고 들었고 또 관리들은 이를 막으려 들었다. 김 상헌의 <<남사록>>에는 ?주민들이 서울에 가서 이 딱한 사정을 전하고자 하나 수령은 제 잘못이 임금에게 알려질까 봐 진상하려 가는 자 말고는 아무도 섬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 육지 사람들은 제주에 오는 것을 마치 죽을 곳에 들어가는 것처럼 생각하여 모두 피하고, 섬 사람들은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육지에 나가기를 마치 천당에 가는 것처럼 생각했다?고 적혀 있어 그때의 제주 사람들이 얼마나 뭍을 그리워했는지를 잘 말해 준다.

제주도를 빠져나간 사람들은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 지방을 떠돌며 고기를 잡고 해물을 따며 살았는데 그 수효가 점차로 늘어나 몇천명에 이르자 나라에서도 이들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들의 무리를 두모악, 도독야지, 두무악 같은 이름으로 불렀는데 이는 한라산의 다른 이름이었다. 성종 2년인 1477년에 임금이 경상도 관찰사에게 내린 유시에, 이들을 내쫓으면 놀라 바다로 나가 해적이 될지도 모르니 잘 달래어 살게 하되 드나듦을 엄중히 하라는 말이 들어있다. 이들은 그 지방에 눌러살면서 그 지방에서 진상해야 하는 해물을 대는 역을 맡기도했고 더러는 떠돌아 다니기도 했다. 나라에서는 이들에게 역을 주어 한곳에 모아 정식 주민으로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섬을 빠져나오는 사람의 수효가 많아지자 새로 도망쳐 오는 자들은 ?아 무거운 벌을 주고 조천과 별방을 뺀 모든 항구를 폐쇄하여 불법으로 드나드는 것을 엄하게 막았다. 그래도 이들은 죽기를 마다 않고 계속해서 빠져나갔다.

7. 조선 시대의 물산

역사에 나타난 제주도의 생산품을 살펴보자. 우선 감귤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다. 문헌을 더듬어 보면, 감귤이 이미 삼국시대로부터 재배되었던 것을 알 수 있고 <<탐라지>>, <<읍지>> 그리고 여러 문집에 나타나는 품종만 보아도 감, 유, 금귤, 왜귤, 병귤, 소금귤, 석금귤, 선귤, 소감자, 당귤, 소귤, 청귤, 동정귤, 동자귤, 대귤, 하귤, 소유자 같은 20여가지나 되는 감귤이 생산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마는 영조 39년인 1763년에 일본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대마도 사수나포에서 보내와 처음으로 제주도에서 시험재배를 한 뒤로 이곳의 중요한 산물에 들게 되었다. 이밖에 콩, 보리, 조, 밭벼, 돌피, 메밀, 무명 같은 것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주식거리인 논벼가 이 고장에서는 거의 생산되지 않았으므로 쌀을 육지에서 들여와야 했으며, 밀, 감자, 삼, 사과, 배, 포도같은 것도 전혀 생산되지 않거나 생산되어도 그 양은 매우 적었다.

조선시대에 한 농가의 경작면적 평균치는 2정보 2단보로 육지에 견주어 넓은 셈이었으나 워낙 토질이 척박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특이한 풍토이므로 복토법, ?재법 같? 특수한 농경법이 도입되었다.

또 목마장은 열 소장으로 나누었으나 山馬場과 牛場을 따로 두어 열네 소장이 되었으며, 監牧官을 따로 두어 목마를 관리하게 하였는데, 처음에는 판관으로 하여금 감목관을 겸하게 하였으나, 효종 9년인 1658년에 이르러 목사 이회의 장계에 따라, 그전에 김만일이 말 오백 마리를 나라에 바쳤고, 그 아들 김대길이 이백 마리를 바쳤으므로 그들의 후손으로 하여금 감목관 자리를 세습케 하였다.

제주의 말은 질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고려때에도 조정에 헌상하였으며, 원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명나라가 말을 바치라고 해서 목호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조선왕조에 이르러 貢馬제도를 만들고 해마다 백 마리씩 바치게 하였는데, 후기에 와서는 5백마리씩 바치게 하였다.

8. 貢物과 조세수취

제주도는 현무암과 화산재로 뒤덮인 척박한 땅이다. 비가 내려도 땅속으로 스며들어 해안에 가서야 솟아나오기 때문에 地表水를 보기 어렵다. 따라서 논농사는 말할 것도 없고 밭농사 마져도 힘든 곳이었다. 주작물은 보리..메밀...밭벼.고구마 등이었는데, 보리밭이고 조밭이고 간에 7-8차를 갈아서 파종하고, 파종후에도 마소를 끌고가 4-5차 두루 밟아 주어야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토성이 메말라서 싹이 튼 후에 말라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힘든 농사가 제주도민의 생업의 기반이었다. 대개 바닷가 사람들은 농업 반, 어업 반으로 살아 갔고, 산골의 사람들은 농업 반, 목축 반으로 살아 갔다. 그리고 갓양태와 말총물의 제작도 제주도민의 중요 생업이었다.

제주도가 육지에 來朝한 것은 신라 때였다. 그 이후로 제주도민은 막중한 진상물.공물을 중앙정부에 바쳐 왔다. 제주도민이 중앙에 내는 조세는 쌀도 布도 아닌 바로 특산물이었다. 이 진상.공물은 말을 비롯한 목축물, 미역.전복 등 해산물, 표고.약재 등 임산물, 감귤.동정귤 등 과실이었다. 이 특산물을 조달하고 운반하기 위해 말을 지키는 牧者, 바다에 들어가 전복.미역을 따오는 鮑作, 潛女, 과원을 지키는 과원지기(果園直), 배를 몰아 공물을 바다 건너 육지로 옮기는 船格을 정해 놓았다. 이들에다가 官畓을 경작하는 畓漢을 합쳐서 6苦役이라 불렀다. 이들 고역 담당자 외에도, 그 奴婢貢으로 서울의 각 아문에 보내는 공물을 마련하는 시노비(寺奴婢)가 존재하였다. 1652년의 <<탐라지>>에 의하면 제주목에만도 1만 4천여 명의 시노비가 있었다. 주로 시노비공에 의하여 마련하는 공물은 제주목.대정현.정의현 3읍이 각각 책임을 졌고, 그외의 대부분의 공물은 목사가 직접 관장하여 3읍에 배정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고역을 담당했던 특정인의 부담이 제주도 男丁 일반의 부담으로 바뀌어 갔다. 또 1801년 시노비가 혁파됨으로써 그 부담도 일반 남정에게 전가되었다. 처음에는 일반 남정에게서 平役米를 거두어 고역을 진 사람들의 물품 마련을 보조하였다. 그러나 점차 관이 직접 진상물품을 마련하고 뱃사공도 고용하여 쓰게 되었다.

농민항쟁이 일어났던 1862년 당시에도 제주도의 평민.천민 남정들은 봄 가을에 3두씩 1년에 6두의 평역미를 내고 있었다. 이처럼 중앙정부에 바치는 진상.공물(그외에 중앙정부에 바치는 다른 조세는 없었다)이 전적으로 人丁에 부과되고 있었다는 점이 제주도 조세구조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반면에 토지세는 국가에 바치는 정규조세가 아니라 제주도 내의 관아재정에 충당되었고 그 액수도 극히 적었다. 제주도에는 토지대장에 등록된 토지 자체가 매우 적었다. 정조 초년에 만들어진 <<제주읍지>>를 보면, 제주의 경우 밭이 3,991결 92부 9속이었으나 조세가 부과되는 實結數는 24결 69부 8속이고, 논은 305결 83부 9속인데 그 가운데서 조세를 부과하는 民畓은 29부 1속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畓漢을 따로 정해 농사를 짓는 官畓이었다. 대정의 경우도 밭의 실결수는 21결 5부 6속이고 논은 민답.관답을 합쳐 93결 45부 2속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정의의 사정도 마찬가지여서 밭의 실결수가 28결 24부 8속, 논은 5결 46부뿐이었다. 이런 형편이었기 때문에 정조 17년의 <<제주.대정.정의읍지>>는 토지의 조세가, 제주는 아예 풍작에는 쌀로 쳐서 25석, 평년에는 12석, 흉년에는 1석 3두, 대정은 각각 50석.32석.15석, 정의는 31석.19석.7석으로 고정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무리 제주도의 땅이 척박하다고는 하지만 겨우 이정도의 땅만이 경작되고 있었을까? <<朝鮮水産誌>> 제주도조에 따르면 1908년 현재 제주도 총면적 약 189,710정보중 삼림지 15,550정보, 無木地 31,100정보, 경지 139,950정보, 기타 약 3,100정보로 경지면적이 73% 정도 차지하고 있었다. 생산량은 보리가 28만석, 조 20만석, 메밀 2만 3천석, 피 8천석, 콩 6천석, 밭벼 6천석 등이었다. 17세기에 이원진은 <<탐라지>>에서, 제주도에 토지가 적은 것은 정말 경작토지가 적기 때문이 아니라 토지를 광점하고 있는 토호들이 토지가 파악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므로 양전을 통해서 그 토지들을 파악하여 조세를 보과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주도에서는, 본래 토지에 부과되어야 할 대동세마저 전결이 적다는 이유로 인정에 부과되었다. 바닷가 마을의 남정에게서 참깨 8홉, 산촌의 남정에게는 들깨 한 되, 그리고 모든 남정에게 菜種 한 되를 징수하였다.

大同法은 人丁..土地 등에 잡다하게 부과되던 각종 진상과 지방관아의 잡세의 주요부분을 토지에 대한 부과로 일원화한 것으로서 조선국가의 조세수취 체계의 중요한 진보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16세기 이래로 농민층분해가 격화되면서 농민들의 조세부담 능력에는 현격한 차이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농민들의 조세부담 능력이 대강 비슷한 것을 전제로 하면서 신분에 따라 특혜가 주어졌던 남정.호에 대한 조세부과는 점차 빈부의 차이를 반영하는 토지세로 옮아갔다. 군역세나 환곡세, 일반잡세가 토지에 전가됨으로써 토지세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반적 경향과는 달리 제주도는 토지세의 비중이 매우 낮고 男丁.戶에 부과되는 세부담이 높은, 육지에 비해 현저히 뒤떨어진 조세수취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이같은 제주도의 독특한 조세수취 구조는 1862년 제주도 농민항쟁의 요구조건을 통해서 드러나며 봉기조직에도 반영되었다.

** 참고문헌 **

1. 홍순만, 제주도의 역사1. 신화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발견 - 제주도->>, 1987년도판

2. 망원한국사연구실 19세기농민항쟁연구분과, <<1862년 농민항쟁>>, 동녘,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