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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제주도 세화리 해녀 투쟁



+----------------- <목 차> ----------------------+

| 1. 머리글 |

| 2. 배경 |

| 3. 운동의 전개 |

| 4. 해녀 투쟁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

| 5. 맺음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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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 리 글

조선반도의 남쪽 해상에 위치한 제주도는 옛날에는 탐라국이라는 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다.그후 고려왕조의 정복을 당하여 고려의 일부로 편입되었으나 지금도 본토와는 다른 독자적인 풍속.관습이 남아있으며 주민은 특색있는 방언을 사용한다. 근래에 들어와서 제주도에도 역사에 기록되 어야 할 민중봉기가 빈번히 일어나고있다.1880년대 일본과 외교문제로 발전했던 일본인 출가어업(出稼漁業) 반대투쟁, 1901년의 [이재수亂]은 관리의 가렴주구와 그 앞잡이가 된 천주교도의 횡포에 대한 민란이었다. 특히 남북분단의 기정사실화를 기도한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대한 1948년의 [4.3]봉기는 이승만 정권의 허구성을 폭로한 치열한 무력항쟁이었고 이후 7여년에 걸쳐서 전개된 빨치산 투쟁과 함께 미국의 세계전략 = 냉전체제에 대한 반역의 봉화로서 세계사적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본고에서 다루고 있는 1932년의 [해녀투쟁]도 이들과 함께 제주도는 말할 것도 없이 조선 민족운동사상 중요한위치를 차지하는 민중 항쟁이었다.이 싸움은 투쟁의 주체가 해녀라는 독특함과 함께 제주도로서는 식민지시대 최대의 민중 운동이었다는 점,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는 최대규모의 어민쟁의였다는 점, 또 공산주의자가 이 싸움을 주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는 점 등을 주목하여야만 할 것이다. 운동의 발발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야 그 의미를 다시 묻게 되는 1932년의 해녀투쟁은 도대체 어떠한 것이었는가! 해녀투쟁이 전개되었던 직후인 1932년 3월에 제주도에서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관계자가 대량검거되었는데 이것을 <제주도 야체이카 사건>이라 부르겠다.

2. 배 경

1932년은 1월의 `세화리 해녀 항일투쟁`은 잔악한 일본인들의 수탈행위와 인권침해에 대한 자위투쟁이요,생존투쟁이었으며,반제국주의 민중투쟁이었다. 육지부와는 달리 제주도는 땅이 척박함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침체와 주곡(쌀)생산이 부실했다는 점에서 농업부문에 대한 수탈이 가중되었다.이러한 연유로 제주도에 있어서는 일제하의 민중들의 생존문제와 관련된 경제투쟁이 해녀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이다.

제주도 해녀들은 일제치하에서도 더 더욱 수탈당하기만 했다.그것은 여러형태로 나타났지만,특히 19세기말부터 해녀들이 본토 동해안을 비롯한 각 연안에 출가(出稼)하기 시작함으로써,그에 대한 권익침해는 상당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다. 제주도 해녀들은 1890년대 초 경상남도에 출어하기 시작하여 점차 다도해로부터 경상북도,강원도,황해도,함경도에까지 이르렀고 드디어는 한국 연안에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으며, 멀리 일본, 러시아, 중국산동성 연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부산, 동래, 울산 일대에 나가게 된 제주도 해녀들은 대체로 일본 해조업자의 모집에 응하고 있었다. 매년 음력 1-3월경 부산 해조상인들로부터 자금의 공급을 받고 제주도에 들어와 출가해녀들을 모집하는데 응모자에게는 채취물을 유상으로 사들인다는 약속 밑에 출어 준비자금으로써 전도금을 지급하고 식량,필수품등을 대부하면서 인솔해 갔었다.모집경과만 보더라도 남편 몰래 유부녀를 데려가거나 처녀들일 경우 거의 유괴에 가까운 수단을 취했던 것도 문제려니와 해녀들에게 지급한 전도금에 대해서는 고리(高利)를 가했고 공급품에 대해서는 이자를 붙였다. 또한 채취물의 근량을속이는가 하면 어기 종료시에야 청산을 하기 때문에 그 사이 쌓인 전도금 식비등에 복리를 붙혀 징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갖은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며 외채상환자금으로도 부족해서 드디어는 부채를 짊어져 귀향조차 할 수 없는 해녀들이 늘어나기에 이르렀다. 제주도민들은 이러한 실정을 좌시할 수 없었다. 제주도내 영세해녀들 및 출가해녀들의 구제 보호 및 복리증진을 위해 1920년 제주도 해녀 어업조합을 설립하기에 이르었다.

제주도 해녀 어업조합의 모체인 제주도 어업조합이 탄생한 것은 1912년 2월이었다.이른바 어업조합규칙에 의거해 조직된 제주도 어업조합은 도일원을 관할구역으로 하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해녀 및 어선을 가지고 있는 어부들이 그 구성원이 되었다. 제주 도청구내에 사무실을 둔 제주어업조합은 그 확장과 관리를 위하여 각면에 지부를 설치하는 한편 외부에 출어하는 조합원을 감독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각면에 부산 목포 여수 등지에 출장소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것은 명목일 뿐 해녀들을 수탈하기 위한 하나의 조직에 불과했다. 그러나 해녀의 활동이 인정되고 연안어업의 발달로 조합원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독자적인 해녀조합 창설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해녀조합이 태동된 것은 1920년 4월 16일이었다. 구좌면을 중심으로 발족을 서둔 해녀조합은 처음 제주면에 설립을 본 후 1925년 8월에는 서귀포일원이 중심이 된 서귀포 해녀조합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해녀조합의 이러한 구성은 어업조합의 팽창을 견제한 대신 대립과 분쟁이 씨앗을 안겨주었다. 도사가 조합장을 겸하는 가운데 일인들의 착취는 가중되어 갔고, 자립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해녀들의 권익투쟁은 날로 그 열기를 더해 갔다.

이 해녀어업조합이 1936년 일반 어업조합과 병합될 때까지 해녀들의 풍기개선 권익옹호 해조류의 번식보호에 이바지한 바가 지대했고, 특히 19세기 말이래 한반도 연안에 출가하는 해녀들의 구제보호와 수익활동에 끼친 공로는 지대했다. 그러나 문제는 수탈당하기만 하는 해녀들을 적극 옹호했어야 할 조합장을 도사가 겸임한다는 데 있었다. 그러기에 해녀의 권익은 일체 묵살당했고 목숨을 걸고 채취한 채취물을 공동판매하여야 함에도 특정 일본 상인이 독점하도록 했으며 조합과 결탁한 갖은 명목의 잡세징수 등으로 영세해녀들을 괴롭혔던 것이다. 출가금고부비란 명목으로 막대한 돈을 출가해녀 개개인 들에게서 거두어 들이는 한편 채취물의 가격을 정당히 지불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3. 운동의 전개

이들의 비행에 대해 해녀 대표자들은 수차에 걸쳐 구두로 주재원들에게 부당성을 지적하며 시정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시정은 커녕 그 수탈상은 더욱 가중되어가고 있었다.

구좌면 하도리 해녀대표 부춘화(당시 22세), 김옥연이 중심이 되어 1931년 5월 9일 조합장(도사)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기까지에는 조합의 횡포에 더 이상 견디지 못했던 저간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우선 당시 島司에게 건의된 9개조항의 진정서를 보기로 하자.

도사에게 고함

1) 미성년 출가문제 및 노인들에게는 출가?증명서르 발부하지 말고 그대로 출가 시켜라.

2) 일본인 상인에게 상권을 주지말 것.

3) 제주도 책임자 도사는 조합장직을 겸직하지 말고 즉시 사표를 내라.

4) 물품은 등급재로 하지말고 지정된 가격을 지불해라.

5) 일기불순 여부를 막론하고 물품을 매입하라.

6) 허위계약을 발부한 책임을 지고 물품대중 차액을 즉시 지불하라.

7) 주재원 제도를 철수하라.

8) 조합비를 받으면서 해녀들을 괴롭히지 말 것.

9) 물품은 반드시 경쟁입찰에 부쳐서 처리하라.

위에서 보듯 이는 해녀들의 마지막 자구지책을 강구하기 위한 뼈에 사무치는 간절한 호소였다. 그러나 이 애절하고 정당한 건의가 식민지 착취자들에게 받아들여질 리가 만무했다. 관제조합으로 타락한 해녀조합의 운영를 개선하고 그 앞잡이인 주재원의 횡포를 막기위해서는 무엇보다 조합장인 도사의 마음을 움직여 요구조건의 일부라도 관철해야 한다는 것이 해녀들의 한결같은 의사였다. 부춘화, 김옥연은 초지를 굽히지 않은 채 부덕량, 고순효 등 동료들의 격려를 구하고 김순종 김시곤 채재오 등 지방유지들에게까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에 이르러 사태는 의외의 방향으로 급진전하게 되었다.

구좌면에서 일어났던 해녀들의 권익투쟁은 일본상인들의 횡포와 수탈을 막아 인간다운 생활을 누리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결국 투쟁의 규모는 확대되었고, 그 성격 역시 단순한 권익 투쟁의 한계를 벗어나 항일투쟁으로 까지 승화변모되었다. 진정서 제출을 고비로 해녀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가중되었고, 그 틈에 이모(李某) 같이 권력에 기생하는 친일파가 판치기 시작했다. 해녀들의 분노는 충천했고 결국은 온건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권익을 찾기란 힘들다는 여론이 팽배해졌다.

1932년 1월 24일

이날 다나까 島司 일행이 신작로을 따라 동회로로 세화리를 지나간다는 것을 알게 된 혁우 동맹 화원들과 부춘화 등은 이웃마을까지 전하여 마침 장날인 24일 아침 지정된 장소에 비창 호미 등 잠수구를 들고 집합하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촉구했다.

24일 아침 하도리 세화리 월정리 종달리 소섬 등에서 모인 1천여 해녀들은 양손에 비창 호미를 들고 머리에는 흰수건을 동여매고 집결했다. 그 때 누군가의 선창으로 당시 유행가 곡조에 맞춰 해녀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엾은 해녀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운 날 무더운 날 비가 오는 날

저- 바다 물결 위에 시달리는 몸

2. 아침일찍 집을 떠나 황혼되면 돌아와

어린 아기 젖먹이며 저녁밥 진다.

하루종일 해왔으나 번 것은 없어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못 이룬다.

3. 이른 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하고

온 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고

파도 세고 무서운 바당으로 돈벌이 간다.

4. 배운 것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기관 설치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해 간다.

가이없는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10시가 지나가자 도사일행은 인파로 메워진 도로에 나타났고 곧 1천여 군중에 휩싸여졌다. 곧 함성이 터져 나왔다.

- 우리가 제출한 진정서에는 왜 회신이 없소.

- 우리를 착취하는 일본상인을 몰아내고 우리의 권익을 보장하시오.

결국 도사의 승용차는 투석에 박살이 났고 세화 주재소로 대피한 도사일행은 상급기관인 전라남도에 경찰병력의 지원을 무전으로 요구하는 한편 발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공포가 아닌 실탄발포로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선의의 요구사항을 무력으로 짓밟았던 식민지 정책의 단면이 여실히 드런난 사태였다. 그러나 잡초처럼 짓밟히기만 하던 해녀들은 이 정도 발포에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고 하루해가 저물어 이튿날이 되어도 군중의 포위망은 풀리지를 않았다. 1백여명의 경찰진압대가 현지에 긴급출동한 것은 만 하루가 지난 25일 하오였다. 경비정 무등산환(無等山丸)에 탑승하고 제주에 도착한 즉시 제주경찰과 합세하여 진압에 나섰던 것이다. 긴장과 초조속에서 만 하루를 뜬눈으로 지샌 해녀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경찰 진압대는 평화적인 시위에 다시 발포는 하지 않았으나, 연약한 부녀자들을 마구 짓밟고 체포했다. 주모자를 색출하기 위한 검거선풍은 만 이틀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들은 소요에 앞장섰던 사람들을 식별하기 위해 흰 저고리에 잉크 도장을 찍었고, 사람이 많이 몰로는 곳에는 고무호스로 붉은 물을 뿌려 표식이 남도록 했다.

이 사건으로 검거된자는 최종적으로 남자 43명, 여자 35명이었다. 해녀투쟁관련 검거자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제주도에서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노출되고, 관계자가 차례로 체포되었던 것이다. 3월 1일 모슬포에서 데모를 하다가 검거된 오대진 일행도 당재건운동과의 관련이 밝혀졌다. 이들을 일괄하여 <제주도 야체이카사건>이라고 하는 것이지만 이후 사건의 촛점은 해녀 시위운동으로부터 좌익활동으로 바뀌고 사태는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요컨대 해녀투쟁에 참가한것을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은자는 없었고 모두 공산당 재건운동에 관여 하였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그리고 해녀의 중심인물의 한사람인 부춘화씨는 해녀가 요구했던 12항목중 9개가 당국에의해 받아들여 졌다고 회상했다. 제주도가 일본의 자본주의 경제권에 편입되고 해녀들이 출가를 떠나지 않을수 없었다면 그곳에는 엄연한 차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조선 본토에서조차 출가해녀들이 <제주년>,<보작이년>이라고 멸시당했고, 제주도 출신이라는것 때문에 또 살갗을 드러내어 일하는 여성이라는것 때문에 차별을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수탈과 차별이 일본 식민지지배가 낳은 제 모순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제주도 해녀들은 식민지 사회속에서 가장 억압받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모순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권력의 횡포를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4. 해녀투쟁과 조선 공산당 재건운동

(1) 해녀와 좌익 청년들

해녀투쟁은 좌익에서 지도했다고 이전부터 자주 지적되어 왔다. 실제로 해녀와 청년들은 어떠한 관계에 있었던가, 얼마간의 상황증거로 보아서 청년들이 해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많다. 우선 도사가 시찰하러 올 무렵을 노려 시위 행동을 전개하는등 효과적인 대중운동의 전술을 터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청년들의 주도로 해녀가 동원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해녀의 힘만으로 운동이 전개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는없다. 요구조건등에도 쟁의의 경험이 모자란 해녀들이 독자적인 힘으로 작성한 것은 아닐것이다. 해녀와 청년들은 어떻게 해서 서로 결속하고 있었던 것일까. 물론 양자는 같은 지역에 살고 일상 생활에서 서로 얼굴을 대하며 살아왔을 터이지만 보다 밀접한 관계를 이룰만한 어떤 계기는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에관해 힌트를 보여주는 것이 마당극 <잠녀풀이>의 야학장면 - <혁우동맹>이 야학에서 해녀들을가르쳤다 - 이다. 1920년대의 야학운동은 일반적으로 진보적 의식을 가진 청년들을 담당자로 하고 있고,특히 후반기에는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농후해진다. 특히 신좌면 조천리의 여자 야학회는 제주도 야체이카사건에서 검거되었던 김유환을 강사로 영입하고 있다. 다만 해녀의 주동자 부춘화씨는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증언당시의 한국의 상황에서 공산주의자와의 관계를 긍정한다는것이 가능했을까 라고 생각할때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2) 혁우동맹

해녀와 청년들이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면 당시 제주도에서의 좌익의 동향을 살필필요가 있다. 이 조직은 1930년 3월 1일 세화리의 문도배의 집에서 ?공산주의 선전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한편 이무렵 전당적 좌익 조직을 결성하려는 움직임도 발견된다. 그리고 혁우동맹은 1930년 9월 20일 농촌청년, 해녀의 획득과 해녀 본위의 조합설립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해녀와의 관계수립을 목표로 한 방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혁우동맹은 동년 10월 성산포 분쟁에 격문을 살포하며 해녀쪽에 접근해 갔다. 그런데 새해들어 1931년 1월 하순에는 목적수행상의 효과가 적었고 또 발각의 두려움이 있다느 이유로 갑자기 해체가 협의되었다. 이것은 당시 전도적으로 공산당 재건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혁우동맹은 결국 <조선 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가 결성된 후 얼마되지 않아 해산된다. 혁우동맹은 이리하여 해산되었지만 전도적인 조직에 앞서 구좌면에서 좌익청년들의 결사가 존재하고 있었고 혁우동맹의 활동은 그대로 구좌면을 중심으로 한지역에서의 당 재건운동으로 인계되고 있다. 청년들의 조직화가 급진전 되고있던 지역에서 해녀투쟁이 전개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역시 양자의 인과관계를 살필 수 있다.

(3)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

제주도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시작된 것은 1931년 초, 당원 강창보가 제주도로 귀환하였을 때부터였다. 제4차 조선공산당 검거에서 1928년 8월 24일에 체포된 강창보는 1930년 12월22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징역 2년(집행유예 5년)의 확정판결을 받고 명년 1931년 1월 4일 귀향했던 것이다. 1931년 음력 정월 초순 제주읍의 부춘화씨 집에서 강창보는 신재홍,김순종,김류환 등 다섯명과 <제주도 사회운동자 비밀간담회>를 열고, 조선 청년총동맹 해산, 신간회 해산 등을 협의하고 도내 청년의 조직화를 향하며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동년 5월 16일, 신우면 애월리의 김원희의 집에서 강창보, 이익우, 오대진, 김한정, 신재홍 등 5명이 모였다. 강창보는 이곳에서 <조선공산당제주도 야체이카>의 결성을 제안하고, 다른 4인은 이에 찬성하였다.제주도 야체이카조직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장래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야 할 것을 기대하며, 그런날이 오면 그것에 합류한다. 또 재건방법으로서는 하부구조로부터 상부구조로 확대 합류하여야 한다는 의도를 바탕으로 하여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며, 제국일본의 통치권을 부인하며,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그리고 그들 각자 담당할 지역을 협의하고, 책임자가 된 강창보가 제주읍과 신좌면, 이익우는 신우면과 구우면, 오대진은 대정면과 우면, 김한정은 좌면과 중면, 신재홍은 구좌면과 정의면, 서중면, 동중면을 맡기로 하였다. 그들은 이 분담을 맡은 것을 토대로 각 지역에서 조직활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관심의 촛점이 되는 것은 혁우동맹의 중심 멤버이며 1930년 9월의 <제주도사회운동자 간담회>에서는 섬 동부의 책임자로 선출된, 그때까지 해녀투쟁의 무대인 구좌면, 정의면을 포함한 지역의 담당자였던 당원 신재홍의 활동이다. 그는 우선 세화리 방면에서 1931년 7월 초순, 역시 혁우동맹의 멤버였던 오문규, 문도배와 회합하고, 그들을 <당외 기관분자>로 삼아 ?조선공산당을 재건할 때에는 구좌 야체이카를 조직할 생각으로 그 훈련을 위하여 야체이카와 유사한 것을 결성?하여, 그후 4회의 회합을 가졌다. 또 연평리(우도) 방면에서도 동년 7월 상순 무렵, 그 혁우동맹의 강관순과 김청오를 <당외 기관분자>로 만들었다. 둘이는 7월 중에 동지 3명과 비밀결사 <적>을 결성함으로써 연평리 제단체로의 세력침투를 기도하였다. 또 31년 11월에 하도리에서 조합에 대한 해녀들의 분노가 폭발 직전에 이르렀을때 제주도 야체이카는 강창보의 집에서 두번째의 회합을 가졌다. 이익우씨의 증언에서는 그곳에서 해녀운동지원 방침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강창보는 제주도 야체이카 사건으로 일단 검거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그후 대부분 일본에서 활동한다. 그는 1934년에 검거되어 45년 1월, 오오사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한다.

(4) 대판과의 관계

제주도와 대판에서의 운동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고 자주 이야기된다. 확실히 대판 조선노동조합의 간부였던 김문준을 비롯하여 대판의 조선인지도자들은 제주도 출신이 많았다. 그러나 조직적으로 양자가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운동을 전개했는지, 어떠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가 않다. 해녀투쟁에 관여했다고 하는 <대판구좌청년연합회>의 실태에 대해서도 어느 하나 확실하지가 않다. 여기서 해녀투쟁에 관한 양자의 관계를 살필수 있는 자료로는 운동의 일단락되었던 시점에서 나타나는 다음의 신문보도이다. 제주도는 대판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이들 선동자의 대부분은 거의 대판 방면으로 출가중, 노동운동에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이번의 전술도 내지로부터 직수입한 지극히 교묘한 것이다. 청년들의 대판에서의 노동운동의 경험을 살려서 이번의 운동을 지도했다고 하는 것이다. 1930년 전후에는 매년마다 약 4만인의 도민이 대판, 제주도 사이를 왕래하고 있었으니 그런 가능성도 충분히 짐작되는 바다. 특히 제주도 야체이카의 결성은 대판으로부터의 지시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많다. 1931년 2월 ?대판에 거주하는 김달준 등은 제주도에 있는 강창보 등과 제휴하여 제주농민 요구투쟁 동맹의 조직을 계획하고 그 지도부로서의 대판지방 서기국을 설치하여 테제를 발표?했다. 여기서 말하는 [테제]란 동년 4월 20일부터 발표된 [제주도농민요구투쟁동맹에 관한 테제]라는 것이다.

강창보는 우[전게테제]작성일부<1931년 4월 20일> 후 잠시동안 우[테제]를 입수하게 된 것이라 생각되어 우양호증[전게테제]의 기재에 의하면 공산주의 목적아래 농민동맹의 결성을 종용, 하부조직으로부터 상부조직으로 도달해야 할 지도정신에 관한 기재가 있다. 이들에서 강창보가 시사를 받고, 전술한 바와 같은 제주도 야체이카를 결성해야 한다고 제기했던 것이라고 있정할수 있다.여기서는 강창보가 테제에서 시사를 받고 제주도 야체이카 결성을 제의하였다 하고 있다. ?하부조직으로부터 상부조직으로 도달?한다고 하는 방침은 바로 제주도 야체이카 결성시의 ?하부구조로부터 상부구조로 확대 합류?한다고 하는 재건방법과 같은 발상에서였다. 그리고 이는 [12월테제]에 의거하여 전개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일반적 조직 방식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강창보와 그의 주변에 있던 청년들이 대판에서 발송된 테제에 따라서 제주도야체이카를 조직했다면, 양자는 역시 밀접한 관게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테제는 <관제조합 분쇄를 위한 투쟁>이라는 문맥 가운데서 해녀조합의 폐지를 주장한것 뿐이고 해녀의 획득을 주요한 목표로서 제시하지는 않았다. 이상 열거한 세가지 측면 -<대판구좌청년연합회>의 존재, 청년들의 대판에서의 노동운동의 경험, 테제가 제주도 야체이카결성에 미친 영향-을 종합하면 제주도의 좌익청년들은 대판과 연락을 취하면서 활동했을 공산이 많다. 해녀투쟁은 청년들을 매개로 하여 작은 접선이기는 하지만 대판의 운동과도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5. 맺 음 말

20세기 초두, 해산물의 판로확대, 출가, 신식 잠수기구의 보급등의 요인에 의하여, 현금수입원으로서의 그들의 중요성이 한층 높아졌던 해녀노동은, 제주도를 일본 자본주의 경제권에 편입시키는데 매개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원래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던 해녀의 출가 노동은 일본인 상인, 객주의 중간착취와 출신지, 성, 직업에 대한 차별때문에 더욱 가혹한 것이 되었다. 해녀 어업조합의 성립으로 중간착취는 해소될 것 같이 보였으나, 조합의 어용화는 오히려 범위를 확대한 형태로 -출가지는 물론 제주도내에 있어서도- 중간착취를 부활시켰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조선지배는 해녀를 착취하고 차별하는 이중의 억압에 직면하게 하였던 것이다. 1932년 해녀 투쟁은 이렇게 해서 발생한 것이다.

해녀투쟁의 제1의 목표는 조합의 부정에 반대하고, 그들의 생활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녀 행동의 저변에 흐르는 차별에 대한 분노를 인정한다면 ,이 투쟁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32년 해녀투쟁은 말하자면 <생존을 위한 싸움>이었다. 한편 이 운동에는 공산당재건을 노리는 좌익청년들이 관련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또 그들을 매개로 하여 대판의 활동과의 관계도 무시할수 없다. 그렇다면 이 운동은 전위와 대중이 무리없이 만날수 있었던 지역투쟁이었다고 평가할수도 있다. 해녀들의 행동에는 제주도와 관련된 여러가지 민족해방운동의 흐름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코민테른의 지령을 계속 받고 있던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동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렇지만 이 투쟁의 본질이 해녀들 자신의 생활에 뿌리박은 투쟁이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것이다. 일상 생활 가운데서 민중은 어떻게 해서사회의 모순에 눈을 돌리게 되는가? 전위는 어떠한 형태로 민중을 향하여 뜻을 모아 나가야 하는가? 이것은 여러가지 사회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데 있어서 고전적인 과제이다.

** 참고자료 **

1. 김창후, 1983, <세화리 해녀 항일투쟁(1932년)의 역사적 배경>

2. 염인호, 1990, <일제하 제주지방의 사회주의운동의 방향전환과 ?제주야체이카?사건>, <<한국사연구>> 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