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 문화는 중국의 전국 시대 ( B.C. 4세기경 )에 한반도로 이주해 온 유이민에 의해서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고조선의 멸망 ( B.C. 108 )으로 우리 나라 자체의 이주민

파동이 일어나면서 남부 지방에까지 철기 문화가 보급되었다.

철제 농구에 의한 농경의 발달로 경제 기반이 확대되고, 목축과 어로 활

동도 활발하여 양산·김해·웅천 등지에 조개더미를 남겼다. 이 무렵에 씨

족 공동체가 친족 공동체로 바뀌었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철기 문화에 기반을 둔 새로운 국가들이 성장하

였다. 북쪽에서는 부여·고구려·옥저·동예가 일어나고, 남쪽에서는 마한

·진한·변한 등의 삼한이 일어났다.

 

 

 

부여

부여의 흥망을 살펴본다면 만주의 송화강 유역에서 고조선 다음으로 성립된 나

라로, 고구려와 백제도 여기서 갈라져 나왔다. 반농 반목 ( 半農 半牧 )의 경제 단

계에 머물러 있어서 고대 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5세기말 고구려

에 통합되었다 ( 494 ).

부여의 정치·사회·경제면을 보면 왕 아래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우가·저

가·구가와 대사자·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제가들은 사출도 ( 四出道 )를 다

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다스리는 중앙과 합하여 5부제를 이루었다. 아래로는

하호 ( 下戶 )가 있어 생산을 담당하였다. 또한 순장의 풍속이 있었으며, 은력 (

殷曆 )이라는 달력을 사용하고, 정월 ( 현재의 12월 )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하늘에 제사지내고 가무를 즐기며 죄수를 풀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1책 12

법이라는 처벌성 배상법도 있었다.

 

 

고구려

부여족의 일파가 압록강 중류의 졸본에서 일어나 뒤에 교통의 요지인 통구로

옮기면서 강성해져서 5부족 ( 순노부·소노부·관노부·절노부·계루부 )이 연맹

하는 사회로 성장하였다. 2세기초인 태조왕 때 고대 왕국의 기반이 성립되어 만

주 지방에 세력을 넓히고, 부전 고원을 넘어 옥저를 정복하였으며, 낙랑군을 자주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정치·사회·경제면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소노부의 족장을 왕으로 선

출하였으나 후에는 계루부에서 세습하였다. 왕 아래 상가·고추가·대대로·패자

·사자·조의·선인 등이 있었으며, 각 부족장들도 각기 사자·조의·선인 등을

거느렸다. 지배 계층은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작은 창고를 두어 곡식을 저장하였

다. 부경의 이웃의 부족들을 격파하여 얻은 획득물을 보관하는 약탈 경제의 상징

이었다. 혼인은 데릴사위 풍속( 예서제 )이 있었으며, 10월에는 시조신을 모시는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어 부족의 결속을 강화하였다. 그들의 매장 풍습은 후

장이었다.

 

 

옥저

옥저는 함흥 평야에 자리잡은 작은 국가로 삼로 ( 三老 )라는 족장들이 있어

자기의 부락을 다스렸다. 그러나 아직 이들을 통솔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인 연맹

장은 없었다.

경제·사회면에서는 민며느리 제도 ( 예부제)라는 일종의 매매혼이 유행하였으

며 골장제인 가족 공동 묘제가 있었다. 그리고 어물과 소금이 풍부하였고 5곡이

잘 되었으나, 고구려에 공납을 바쳤다. 그들의 언어는 고구려계 였다고 한다.

 

 

동예

정치적인 면에서 동예는 영흥·덕원·안변 등지를 중심으로 삼로나 읍군·후

등이 다스렸으며, 후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그들의 경제·사회적인 면은 농경·어로·수렵 등으로 경제 생활이 윤택하였

다. 특히 명주 ( 산누에 ), 삼베 등 직조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특산물로는 단궁 (

활 ), 과하마 ( 조랑말 ), 해표피 ( 바다표범 가죽 ) 등이 유명하여 중국에도 수출

되었다. 씨족 사회의 전통이 이 때까지 남아 있어서 책화 ( 배상법 ) 및 족외혼이

지켜졌으며, 매년 10월에는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가 베풀어졌다.

 

 

삼한

삼한의 성립과 발전을 살펴보면 한강 유역 이남에도 지석묘 사회를 중심으로

정치 세력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는데, 고조선이 망할 무렵부터 북방에서 내려온

이주민들과 연합하여 마한·진한·변한이 성립되었다. 이 중에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그 중의 하나인 목지국 ( 직산 지방 )이 남방의 영도 세력이 되었다.

삼한의 정치는 토착 족장은 세력이 약화되어 제사를 맡은 천군이 됨으로써 제

정이 분리되었다. 저수지를 축조하여 물의 관리권을 가지게 된 신지·견지 등 대

족장과 읍차·부례라는 소족장 들의 지배권이 강화되었다. 천군이 다스리는 소도

는 신성 지역으로서 신·구 세력의 갈등을 완화하는 완충 지대의 성격을 띠었다.

다음으로 삼한의 경제를 살펴 본다면 밭갈이에 가축을 이용하였고, 수전 경작

( 논농사 )을 위해 벽골제와 같은 많은 같은 저수지가 만들어 졌다.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화폐처럼 사용하였고, 낙랑·대방·일본까지 수출하였다. 당

시의 야철지로는 마산의 성산동이 유명하다.

삼한의 사회는 5월의 수릿날 ( 단오 )과 10월 계절제 ( 상달 고사 풍속 )가 있

었다. 움집이나 귀틀집이었으나 오늘날 초가와 비슷한 집도 만들어 졌다고 한다.

적석총·석관묘·옹관묘가 유행하였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점은 당시의 예술 활동이 종교와 밀착되어 발달하였다는 것

이다. 울주의 반구대 암각화는 사냥 및 고기잡이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어, 활기

있는 생활상을 보여 주고 있다. 고령의 암각화는 원이나 삼각형 등 기하 무늬가

새겨져 있다. 동심원은 태양을 뜻하는 것으로 풍요를 기원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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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고 문 헌 ▷

 

- 한국사 연구입문, 한국사 연구회, 지식 산업사, 1992

 

- 한국사, 이윤채·서경원, 한유 출판사, 1990

 

- 한국사 연표, 이만렬, 역민사,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