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embers.iWorld.net/hahngoon/
 
 
 영광의 역사, 고대사(古代史) 
 
 
 
우리 고대사는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했던 장대한 시기이다. 자랑스러운 역사요, 영광과 승리의 시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운명을 개척해 나가고 있는가? 미래는 오늘에 대한 해답으로 그려지기 마련이다. 바로 우리 손에 의해. 
 

고대사란 신화시대부터 비롯하여 조선의 개국, 전국시대(부여·고구려·예맥·옥저·삼한·가야 등이 정립하던 시절.), 삼국시대, 남북국시대를 거쳐 고려의 통일(936년)로 마감되기까지 장구한 시대의 역사를 말한다. 

------ 통사(通史) 

1. 삼국 이전시대 

한임(桓因(환인). 우주와 세계를 다스리는 주인. 한의 본원이며 근본, 기원전 7199년부터 3899년까지 7대 3300여 년에 이름.)은 하늘과 땅을 열면서 빛으로 온누리를 밝히고 한밝산(백두산)을 중심으로 '한국'을 세워 세상을 밝게 다스리고(광명이세), 사람을 널리 이롭게 했다(홍익인간). 

한임은 다시 한웅(桓雄(환웅). 기원전 3898년부터 2333년까지 18대 약 1565년에 이름.)으로 하여금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한웅은 '배달(배달국, 단국.)'을 세우면서 신시대를 열었다. 

천부인(天符印)으로 신을 거느리고, 신시에서 온누리(한울)에 신정(神政)을 펼쳐 사람이 살도록 했다. 이후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는 곧이어 개국한 조선은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시대정신이자 통치철학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한웅 천황을 도와, 치우는 군사를 다스리고, 고시는 농사와 불을, 신지는 글자를, 주인은 남녀 결혼의 법을 만들고 관장하였다. 

이후, 한웅이 천지에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자 비로소 한국시대, 신시시대로 이어져 오던 신(神)의 시대는 마무리되고 사람에 의한 역사가 시작되었으니, 이때가 단군시대이다. 단군(한군, 한검, 선군, 배달임금, 단군왕검.)은 기원전 2333년부터 238년에 이르기까지 47대에 걸쳐 2096년 동안 직접 다스렸다. 단기 23년에 국호를 '조선'으로 하고 홍범(洪範)(천하를 다스리는 대법.)을 내려 법에 의한 통치를 실현하였으며 토지, 세, 군(軍), 통치조직 등을 갖추면서 점차로 나라의 골격을 형성해 나갔다. 이 시절에는 천하를 조선의 울타리 안에 두고 하늘의 뜻에 따라 홍범9조로 세상을 다스렸으며 그 영역이 '서쪽은 패수(살수, 요수, 난하, 한수.), 북쪽은 흑수(흑룡강, 아무르강.), 남쪽은 북한강(갑비고차.), 동은 바다'에 접하는 광대한 것이었다. 

중국과는 신화시대인 기원전 2700여 년경에 14대 한웅인 자오지 한웅(치우천황)이 헌원(중국 사람의 시조.)과 전쟁을 치르면서 관계가 시작되었다. 역사시대에 이르러 최초의 공식 접촉은 단기 67년 부루(기원전 2240-2206. 1세 단군의 아들이자 2세 단군.)가 단군 성조의 명을 받아 중국 하나라를 세운 임금 하우와 도산(중국 절강성 소흥현 서북쪽.)에서 만나 동맹을 맺으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하나라가 홍수를 겪게 되어 치수(治水)를 모르던 한족(漢族)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이에 따라 열린 도산회의를 통해 조선에서 치수법을 가르쳐 주는(五行治水法) 대신 유수, 영주 등을 넘겨 받으면서 새로이 국경을 정했던 것이다. 곧이어 가륵단군(기원전 2205-2154. 3대 단군.)대에는 하왕태강이 덕을 잃어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빼앗으려 군사를 일으키자, 식달로 하여금 남국과 진번의 군사를 이끌고 이를 치게 하여, 나라의 위세를 더욱 높이기도 했다. 

이후 조선은 하, 상, 주, 연, 한 등과도 계속 관계를 이어간다. 그러다가 조선이 기력을 다하자 중앙정부의 약화를 틈타 한대륙 북부에 부여가 건국된다. 그러나, 부여가 강력한 지도력을 확보하지 못하자, 동남지역에 예맥, 동북지역에 숙신, 중부지역에 고구려가 들어서고 한반도에는 옥저·동예·삼한 등이 흥기하여 자신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해 혼전을 거듭해, 이른바 오랜 혼돈의 시대를 겪는다. 그후 부여, 고구려 등이 저마다 조선의 정통으로 자처하면서 자웅을 겨루게 되었고, 삼한·옥저·동예 등은 군소국가로 약화되어 갔다. 당시에 이미 강력한 고대국가는 형성되었다. 이들 나라는 내정에서의 안정된 치세를 위한 노력도 기울였지만, 주로 영토 확장과 노예 확보를 위한 외치에 주력했다. 그만큼 군사력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던 시절이었고, 서로간에 사소한 무력충돌과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혼란스럽던 전국시대는 고구려·백제 등에 의해 정리되기 시작한다. 

고구려는 백두산을 차지하고 조선의 정통을 흡수하면서 부여·옥저·동예 등을 통합함으로써 한대륙의 거의 전 지역을 차지하고 흰눈이 덮인 추운 북쪽으로도 강역을 넓혀 나갔다. 백제는 이에 맞서 '한반도 서남 지역, 양자강에서 패수에 이르는 대륙 해안지역, 일본에 걸치는' 해양제국을 건설한다. 여기에 후발국 신라가 가야·우산국 등을 합병하면서 3국 시대를 연 것이다. 

2. 고구려 

고구려인은 중국과의 전쟁을 수차례에 걸쳐 치르면서 국가 발전과 번영을 구가해 나간, 용사의 민족이다. 동명성왕(고주몽. 고구려의 시조.)은 연호를 다물(多勿. 구려(句麗)·되물림과 같은 뜻으로, 되물림의 한자식(漢字式) 표기임. 조선의 땅을 되찾아 온전히 한다는 취지로 고구려가 내건 국가 기본정책이자 시대사상.)로 하면서 이를 자신의 정통이자 신조로 삼은 후, 되물림 정신을 국가 이념으로 삼고 끊임없는 정복을 벌여 나가면서 영광의 역사를 꽃피웠다. 이후에도 화려한 외정을 통해 대무신왕(?-44), 태조왕(47-165), 광개토대제, 을지문덕(명장. 지략·시문·무용에 뛰어남.), 양만춘(명장. 안시성주.), 연개소문 등 불세출의 영웅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되물림 정신'은 고려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국가 목표로서 변함없는 국시(國是)가 되었으며, 이후 고려의 북진책, 조선의 북벌 노력에서도 정당한 명분이자 전략목표가 되기도 했다. 

태조왕은 한대륙을 전략지역으로 삼으면서, 수성(태조왕의 동생이며 7대 임금인 차대왕.)을 시켜 중요한 국경지역에 성을 쌓아, 이 성들을 중심으로 통치와 국방에 주력하는 방식을 중시하였다. 그럼으로써 고구려는 외치의 성공과 세력상의 확고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광개토대제에 의해 결실을 맺게 되어 조선과 부여의 영토 거의 전부는 물론이고, 변방을 끊임없이 늘려나가 이후 2백년 동안 평화를 구가할 수 있는 기틀을 다져 놓았다. 

이후로도, 고구려는 '남수서진(南守西進)()남수북벌(南守北伐)이라고도 함' 전략에 입각하여 반도 등 남쪽지역은 현상을 유지하는 한편, 서쪽·북쪽지역으로 힘을 모아 정벌에 나서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특히, 고구려는 패수지역(고려벌, 요동.)을 가장 중시하여 국가전략과 군사행동 및 외정의 거점지역으로 삼는 한편, 이 지역에서 확고한 패권을 유지하여 한족 등 여타 민족을 제압함은 물론 한대륙과 한반도에서의 안정된 체제를 구축했다. 또한, 보호막이 되는 주변 울타리를 확보해 국가안전을 꾀하기 위해, 예맥·거란·말갈·부여 등을 복속하고, 돌궐 등과는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제국의 패권과 안전을 공고히 하여 고구려는 대제국의 영광을 실현했다. 3. 백제 나무와 기와의 나라 백제는 부여의 후예들이 마한으로 들어온 후 강력한 무기를 보유한 수사(싸울아비. 무사집단. 조선의 국선·고구려의 선인·신라의 화랑에 해당.)를 앞세워 지배세력을 형성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백제는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나라였으며, 바다를 가로질러 광대한 해양제국을 건설하였다. 특히, 전쟁을 불사하면서 무력 수단을 주로 사용했던 고구려와는 달리, 외치에서 문화와 미소를 앞세우는 독특한 국제 감각으로 실리지향의 외교, 식민지 경영 등의 전략을 구사하는 뛰어난 면모를 보인 나라였다. 

고이왕(?-286. 8대 임금.)대에 나라의 기틀을 다진 후, 초고왕(?-375. 13대 임금. 정복 군주.)이 대대적인 정벌에 나서 백제의 세력 발판을 본격적으로 대륙으로 넓혀 나갔고, 일본원정을 통해 직접통치를 강화하였다. 

구수왕(?-384. 14대 임금)대에 구수왕의 동생 여광이 해군을 주력군으로 하여 직접 출정한 후, 한대륙 남부 및 대륙 해안 지역을 정복하고 요서군과 진평군을 설치하여 대륙 치소로 삼는 한편, 이후 본국왕에 오른 진사왕(?-392. 16대 임금. 뛰어난 영주.)의 이름과 위세를 등에 업고 대륙지역을 관장하는 왕위에 오르면서 이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백제는 이어 녹산(하얼빈)을 쳐 부여의 서울까지 점령하였고, 연, 진 등과 이 지역의 패권을 놓고 일전을 불사하여 승리하면서 '진세(晋世. 317-420)'라 불리는 태평시절을 구가하였다. 이후로도 활발한 정복을 계속하여 양자강에서 패수에 이르는 대륙 해안지역으로 식민지를 확장해 나갔다. 

동성왕(?-501. 24대 임금.)대에는 위의 동맹요구를 묵살하고 위와의 488년, 490년 2차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강력한 해양제국의 구도를 더욱 확고하게 확립했다. 특히, 새로운 영토가 된 대륙지역을 7주로 나누어 백제의 장군을 총독으로 삼고, 팔왕, 육후, 칠태수, 삼팔사를 두어 통치하면서 대륙을 경영해 나갔다(당시 백제의 대륙영토는 한반도의 2배가 넘는 크기였다.). 이때, 비로소 제국은 '동으로는 신라에, 북으로는 고구려에 접하고, 서로는 양자강 하구지역 일대인 월주에서 패수로 이어지는 대륙 해안지역에 이르고, 남으로는 일본에 걸쳐' 건설되었던 것이다. 

백제는 이후 본국을 중심으로 대륙지역은 '서조(西朝)', 일본은 '동조(東朝)'라 하여 직접통치하는 구도를 통치구조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러나, 위덕왕(?-578. 27대 임금.)대에 이르러 본국과 대륙 세력간에 분열이 생기고 대립이 심화되었다. 이때,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 저항세력을 제압하려 했으나 동맹에 실패했고, 그후 수의 군사에 의해 참패하면서 대륙 영토를 상실하였다. 이때 해군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었으며, 이후 신라의 공세로 본국조차 멸망했다. 이와 함께, 대륙에 있던 백제 유민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백제의 패망 이후 왕족들과 8씨 귀족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열도에 있던 왜국을 접수하고(당시 일본의 통치자는 제명여왕으로, 그녀는 무왕의 딸이자 의자왕의 누이이다.), 663년 의자왕의 혈통인 중대형이 일본왕(천지 천황)으로 등극하였고, 668년에 국호를 일본으로 정하고 천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본격적으로 출범시켰다. 

이후 일본을 세운 백제의 유민들은 본토로 재진출하려 했으나 신라에 의해 제압되어 좌절되었다. 백제의 후손들은 원하지 않았던 결과지만, 일본에 눌러 앉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결국 철저한 일본화를 추구하면서 한겨레의 역사에서 분리되었다. 

4. 신라 

신라는 고구려·백제와는 달리 토착민들이 주체가 되어 국가를 건설하고 발전에 성공한 나라다. 처음에는 소국으로 출발했지만 지증왕(437-514. 22대 임금. 503년 국호를 신라로 함.)이 '덕업일신(德業一新)(온 국민의 마음을 통일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방향으로 하자.)'과 '사방망라(四方網羅)(통일하여 조선의 땅을 되물림하자.)'를 국시로 삼으면서 열심히 국력을 키웠다. 그 결과, 진흥왕 대에 이르러 강력한 통일 기반이 마련된다. 

가야·우산국 등을 차례로 복속시키고 7세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와 백제가 쇠락함에 따라 신라의 힘과 세력은 상대적으로 강력하게 신장했다. 결국, 신라는 김춘추(604-661. 태종무열왕.), 김유신(595-673. 흥무대왕. 장군, 정치가.), 김인(신라군 총사령관. 명장.) 등이 앞장서서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기에 이르렀다. 

5. 남북국 시대와 그 이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동맹국이었던 당과 패권을 놓고 대립하게 됨에 따라, 또다시 전면전을 벌여야 했다. 신라는 당의 영향력을 일체 배제하면서 고구려의 영토까지 모두 되찾고자 했고, 당은 신라의 기세를 방치할 경우 연개소문처럼 신라도 다시 당의 서울인 장안을 점령하러 오지 않을까 두려워했으며, 이 기회에 한대륙에도 진출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져 격돌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당 양측 모두 확고한 우위를 잡지 못하면서 장기전으로 이어져 국력이 소진되었고, 이로 인해 한대륙에는 힘의 공백이 초래되었다. 

이 와중에서 끈질긴 복고(復高)투쟁을 벌인 고구려 유민들이 다시 세력을 결집하면서, 지도자인 대조영(? -719)이 발해(699-926)를 세운다. 이로써 한대륙과 한반도에서는 발해와 신라가 양립하게 되는 남북국시대가 열렸고, 한겨레의 영토와 문화도 온전히 이어졌다. 

특히, 한반도 북부와 대륙을 강역으로 한 발해는 고구려의 정통임을 내세우면서 그 계승을 위해 대륙 경영에 열중하였다. 발해는 세력을 계속 확장하여 구다, 흑수 등지의 나라들을 복속하면서 영토를 광활하게 개척해 나갔다. 또한 '근공원교(近攻遠交)(멀리 있는 나라들과 친교하여 가까운 최대의 적국 당을 제압한다.)'의 전략을 세워 돌궐(몽골 고원에서 세력을 누린 터키계의 유목민족.)·진 등과 동맹을 맺어 당을 둘러싸는 포석을 놓는 외교를 펼침으로써, 당을 짓누르는 형세를 유지하면서 대륙의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887년 진성여왕(?-897. 신라의 51대 여왕.)의 집권 이후 국세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급기야 전국이 혼란에 빠졌고, 숱한 영주와 성주·군벌이 난립하다가 결국,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 이 틈을 타 918년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 936년에 이르러 후삼국의 난세를 완전히 평정함으로서, 길고 긴 고대사를 마무리짓고 고려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고려는 926년 발해가 멸망하면서 찾아온 발해 유민도 받아들임으로써 비교적 대단위의 통일을 이룬다. 그러나, 발해의 강역이었던 한대륙을 통치권에 넣지 못하고 공백상태로 남겨 둠으로써 통일국가의 영토가 축소되고 만다. 다만, 고구려의 시대정신, 한겨레의 역사와 문화의 정통성을 계승한 본류가 되고자 노력했고, 완전한 통일 완수를 위해 북진정책을 국시로 삼고 끊임없이 추구함으로써 그 결함을 메우고자 했다. 

------ 고(考) 

조선·고구려·백제·발해 등은 자기들 특유의 국가전략과 시대정신을 정립한 굳건한 주체였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유력한 힘과 전략을 보유하고 있었다. 자신의 입장에 맞거나 장래를 내다보아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거침없이 행동했고, 외세와의 대립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이를 피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의지를 관철한 시대였다. 이들 나라는 한족과 수없이 줄다리기를 벌이면서도 내몽고, 사백력(시베리아), 패수지역에 걸쳐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고 여러 민족들을 적절히 통치했다. 

조선·고구려·발해 등 한대륙을 제패한 나라는 예외없이 선진 강대국으로 행세했다. 이 지역이 천혜의 요새인데다 병장기의 주재료인 철광석의 생산지이자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이곳을 품는 나라는 곧 강국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 조상이 어느 시절을 막론하고 한대륙을 그토록 중히 여긴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현재 반도에 국한되어 있는 우리의 지정학적인 불리함에 비추어 볼 때 적극적인 사고와 외치전략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날의 한대륙 경영사는 발전 한계론(한반도에서는 발전의 한계가 있고, 강대국이 되지 못한다는 논리.)의 극복 필요성과 가능성을 제시하여 우리에게 적극적인 진취성을 북돋워 준다. 

아울러, 장보고가 당과 일본을 제압하여 해상권을 장악하고 해상왕국을 건설한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그 힘의 배경에 선진기술로 이루어진 조선술, 대선단 운용술, 본영(청해진. 지금의 완도지역임.)과 지역거점의 관리 등이 있었음을 배울 수 있다. 해양국가로써 웅지를 키울 수도 있고, 교역권과 해상권의 장악과 경영을 둘러싼 산지식과 심리적인 체험을 얻을 수도 있다. 

이처럼 힘이 넘치는 고대사는, 시대경영의 주체로서 강국으로 변신하려는 오늘의 우리가 익힐 만한 매우 값진 부분이다. 이 시대는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특징, 주변국의 시선과 그들과의 관계, 강대국 관리방법 등에 관한 방법론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미래개척에 소중한 지침이 된다. 우리는 그 경륜과 지혜를 배우고 오늘의 우리 것으로서 흡수해야 한다. 우리에게 소용되는 유리한 근거를 무더기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격변의 시대를 헤쳐나가면서 영광의 시대를 운영했던 탁월한 전략과 외교술을 되살려, 오늘의 우리에 맞게 활용함으로써 평화를 얻고 번영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사가 남겨 놓은 많은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선례와 기득권으로서 유익한 유산이며, 협상이나 대외활동에서 유리한 저변이 되어 준다. 즉, 간도 반환, 독도 영유권 주장, 연해주 자치공화국 설립추진 등에있어서 우리의 국가전략이, 지난 역사를 토대로 하여 운영할 때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선점권과 심리적인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