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num.mokpo.ac.kr/kangbr/백제마한.htm

百濟의 馬韓 幷呑에 대한 新考察

1. 머리말

2. 馬韓 幷呑의 시기

3. 馬韓의 세력 범위

4. 맺음말

1. 머리말

그간 백제와 마한의 관계는 {三國史記} 百濟本紀 溫祚王條(이하에서는 '溫祚紀'라 약칭함)에 전하는 관련 기사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는데, 각 논자들 간에는 현저한 견해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는 우선 그 관련 기사를 전개 과정의 순서에 따라 크게 3단계의 群으로 나누어 인용하고, 이를 중심으로 기왕의 논의에 나타난 문제점을 점검해 보기로 한다.

가-1) 10년 7월에 (온조)왕이 사냥을 나가서 神鹿을 잡아 馬韓에 보냈다.

2) 13년 8월에 馬韓에 사신을 보내 遷都할 것임을 고하고 마침내 강역을 획정하였으니, 북으로 浿河에 이르고, 남으로 熊川에 이르고, 서로 바다에 접했으며, 동으로 走壤에 이르렀다.

3) 18년 10월에 말갈이 갑자기 이르자 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七重河에서 맞받아 쳐서 酋長 素牟를 붙잡아 마한에 보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묻어 버렸다.

나-1) 24년 7월에 왕이 熊津柵을 만들자 馬韓王이 사신을 보내 꾸짖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와서 발디딜 곳 하나 마련하지 못해서 내가 동북의 1백리 땅을 떼어주어 편안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두터웠다 할 것이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이 있어야 할 것이어늘, 이제 나라가 온전해지고 인민들이 모여들어 대적할 상대가 없다 생각하고서 城池를 크게 설치하고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어찌 의롭다 하겠는가"라 하였다. 이에 왕이 부끄러이 여겨 그 柵을 허물었다.

2) 25년 2월에 왕궁의 우물이 솟아오르고 漢城 인가의 말이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소를 낳았다. 日官이 말하기를 "우물물이 솟아오른 것은 대왕께서 발흥할 조짐이고 소의 머리가 하나이고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병합할 조짐입니다"라 하니, 왕이 이를 듣고 기뻐하면서 마침내 마한을 병탄할 마음을 굳혔다.

3) 26년 7월에 왕이 말하기를 "마한이 점차 약해지고 위아래에서 인심이 이반하니 그 세력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혹시 다른 세력이 이를 차지하면 우리까지 위태로와지니 후회해도 소용없다. 남보다 먼저 취하여 후환을 면하는 것이 좋겠다"라 하였다. 10월에 왕이 사냥을 하는 채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그 國邑을 병합하였는데, 오직 圓山과 錦峴의 2성만이 굳게 지켜서 함락되지 않았다.

4) 27년 4월에 2성이 항복하여 그 인민을 한산의 북쪽에 옮기니, 마한이 마침내 멸망했다. 7월에 大豆山城을 쌓았다.

다-1) 34년 10월에 마한의 舊將인 周勤이 牛谷城에 근거하여 叛하였다. 왕이 병사 5천을 거느리고 치니, 주근은 스스로 목베어 죽었다.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 처자도 목베었다.

2) 36년 7월에 湯井城을 쌓고 大豆城의 民戶를 나누어 옮겨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과 금현의 2성을 修葺하고 古沙夫利城을 쌓았다.

먼저 백제와 마한 관계의 제1단계는 마한이 백제보다 우위에 있던 단계이다. 가) 기사에 의하면, 백제는 마한에게 神鹿을 바치는가 하면[가-1 기사], 천도할 것임을 고하기도 하고[가-2 기사], 침입해온 말갈 추장을 사로잡아 바치는[가-3 기사] 등, 마한에 대해 복속의례를 다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는, 원래 백제가 마한으로부터 그 동북쪽 1백여리를 할양받아 정착한, 마한의 영도를 받는 외곽 세력에 불과했기 때문일 것이다[나-1 기사].

다음에 2단계는 백제가 마한과 대등한 관계로 성장하더니 급기야 그를 攻滅하게 되는 단계이다. 나) 기사에 의하면, 백제는 마한과의 경계를 획정하여 그와의 대등한 관계를 정립하고[나-1 기사], 그 이후 일정한 준비과정을 거친 다음에[나-2 기사], 마한의 國邑을 급습해서 이를 아우르고[나-3 기사], 끝까지 저항하는 마한의 圓山城과 金峴城의 항복까지 받아냄으로써[나-4 기사] 마한의 병탄을 완료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다음에 3단계는 마한 병탄에 이어 사후 수습 조치를 취하는 단계이다. 다) 기사에 의하면, 백제는 병탄에 반발하여 일어난 마한 장수 周勤의 반란을 진압하는 한편[다-1 기사], 점령지 마한의 성곽을 수리함으로써[다-2 기사] 불안정한 마한의 정세를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처럼 溫祚紀에 전하는 윗 기사들은 백제와 마한 관계의 전과정을 구체적으로 전해주고 있어 초기 백제사와 마한사 그리고 그 관계사의 연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기사는 치명적인 문제점도 안고 있어 주의를 요한다. 그 紀年의 문제가 그것이다.

{三國史記}의 기년을 그대로 따를 경우, 윗 기사에 나타난 사건들은 B.C.9년(온조왕 10)에서 A.D.18년(온조왕 36) 사이에 일어난 것이 되는데, 이는 납득하기 어렵다. 마한에 복속의례를 다하면서 그의 영도를 받고 있던 백제가 불과 몇 년만에 그 마한을 완전 정복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수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三國志} 魏書 東夷傳에 의하면, 마한은 3세기 단계까지도 최고의 위상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백제와 마한 관계의 전과정이 {三國史記}에 전하는 것처럼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완료되었다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일찍부터 인지되어, 溫祚紀에 나오는 마한 병탄의 시기를 재조정하려는 몇몇 시도가 있어왔다.

첫째, 마한 병탄 시기를 백제 近肖古王代(346∼374)의 사실로 본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日本書紀} 神功紀 49年條에 나오는 일련의 정복기사를 백제가 마한을 병탄한 사실의 반영으로 보고, 그 시기를 근초고왕 24년(369)의 일로 파악한 것이다. 이 논자는 溫祚紀에서 원산과 금현의 2성이 투항한 것으로 기록된 온조왕 27년[나-4 기사]과 근초고왕 24년의 干支가 '己巳'로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그의 논지를 보완하였다.

둘째, 백제 比流王代(304∼343)의 사실로 본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마한이 晋 왕조에 대하여 277년부터 290년 사이에 8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했다고 하는 {晋書} 東夷列傳 馬韓條 기사에 주목하면서, 마한의 진에 대한 사신 파견이 단절되는 291년 이후의 어느 가까운 시기에 마한이 멸망했을 것으로 상정하여, 그 시기를 비류왕 5년(309)으로 본 것이다. 이 논자는 溫祚紀에서 마한의 국읍을 병탄했다고 한 온조왕 26년과 비류왕 5년의 干支가 '戊辰'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역시 그의 논지를 보완하였다.

세째, 백제가 마한을 병탄한 시기를 막연히 4세기 전반경으로 본 견해도 있다. 이 견해는 마한의 맹주국인 目支國의 위치를 오늘날의 천안 일원으로 보고, 4세기 대에 이르러 이 지역에 서울 지역의 백제와 동일한 문화적 양상이 나타난다는 고고학적 성과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 견해는 접근 방법은 다르지만, 마한 병탄 시기를 둘째 견해와 비슷하게 보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백제의 마한 병탄 시기에 대한 견해는 이처럼 다양하게 제기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견해의 논자들은, {日本書紀} 神功紀 49年條 기사를 위시로 하여 {晋書} 東夷列傳 馬韓條의 사신 파견 기사, 그리고 고고학적 성과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전거를 제시하면서 마한 병탄 시기를 판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가 제시한 기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더욱 문제인 것은 각 논자들이 溫祚紀에 나오는 마한의 세력 범위를 각기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결국 그간의 논의는 각 논자들이 저마다 세력 범위를 달리 생각하는 마한에 대해서 그 멸망 시점을 논의한 셈이 되어,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들을 상호 비교*검토하는 것만으로는, 마한 병탄 시기에 대한 합리적인 의견을 이끌어 내기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문제점을 염두에 둘 때, 그간에 백제와 마한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더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고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본고에서는 溫祚紀에 나오는 백제의 마한 병탄 시기와 그 마한의 세력범위를, 상호 관련성을 염두에 두면서 새로이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백제와 마한의 관계가 새롭게 이해될 수 있는 계기기 되기를 기대해 본다.

3. 馬韓 幷呑의 시기

위에서 溫祚紀에 나오는 백제와 마한의 관계에 대한 기사와 이를 둘러싼 여러 견해를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각 논자들은, 溫祚紀의 마한 병탄 기사를 온조왕 때의 사실로 볼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면서도, 그 병탄의 시기에 대해서는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日本書紀}의 神功紀 49年條 기사와 {晋書} 東夷列傳 馬韓條에 나오는 馬韓의 晋에 대한 遣使 기사, 더 나아가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를 각기 그 유력한 전거로 제시하고 있는데, 백제의 마한 병탄 시기를 검토하기 위해서 이미 제시된 이러한 전거들에 대한 면밀한 재검토가 필요하리라 본다. 필자는 이중에서 {晋書} 東夷列傳 馬韓條에 나오는, 馬韓의 晋 왕조에 대한 사신 파견 기사에 특히 주목하고자 한다.

라) 武帝 太康 元年과 2년에 그 主가 자주 사신을 보내 方物을 바쳤다. 7년과 8년과 10년에도 자주 이르렀다. 太熙 元年에 東夷校尉인 何龕에게 와서 獻上하였다. 咸寧 3년에 다시 오고 그 이듬해에도 內附하기를 청하였다.

윗 기사에서 마한이 晋에 사신을 파견했다고 한 武帝 太康 元年과 2년·7년·8년·10년은 각각 무제의 치세인 280년과 281년·286년·287년·289년이고, 東夷校尉 何龕에게 사신을 보냈다는 太熙 元年은 290년으로 무제의 말년이다. 또한 기록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긴 하지만 역시 사신을 보냈다는 咸寧 3년과 4년은 각각 277년과 278년이다. 이에 의한다면 마한은 277년에서 290년까지 8차례에 걸쳐 武帝 치하의 晋 왕조 혹은 동부도위에 직간접적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윗 기사에 나오는 마한에 대하여, 기사 그대로 마한으로 보지 않고 백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하려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으므로, 우선 이에 대한 검토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견해의 논지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중국 군현을 통한 간접적 교섭 형태에서 벗어나 중국 진 왕조와 직접적 원거리 교역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정치권력의 집중화'가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점을 전제하고, 대개 3세기 중후반 이후에 백제가 마한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리는 점을 지적하면서, 당시 백제만이 진 왕조와 직접적 원거리 교역을 할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몽촌토성에서 3세기 말경으로 추정되는 西晋의 灰釉 錢文陶器片이 출토된 것을 백제와 서진 사이의 직접적인 문물교류의 유력한 물증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논지에 따라 百濟가 {晋書} 東夷列傳에 입록되지 않았을 리 없었을 것으로 보고, 馬韓을 백제의 異稱으로 간주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견해에서 3세기 중후반 경에 백제의 주도권 장악을 전제한 것은 막연히 대세론적으로 파악했다는 감이 다분하다. 또한 물증으로 제시한 몽촌토성 출토의 西晋系 陶器片은 낙랑군과 대방군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유입될 수도 있는 것이어서, 반드시 백제와 진 왕조 간에 공식적 외교 사절의 교류가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도 의문이다. 여기에서 {진서}의 관련 기사를 보다 엄밀히 재검토해 볼 필요를 느끼는 바이다.

{진서} 동이열전에 의하면 동이의 모든 국가가 揭載된 것이 아니라, 夫餘國·馬韓·辰韓·肅愼氏·倭人·裨離等十國 등만이 차례로 入錄되어 있다. 여기에는 백제 뿐만이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의 이름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주목된다. 신라의 경우는 몰라도 고구려의 경우는 '정치권력의 집중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백제보다 월등히 앞섰을 것이므로, {진서}에 고구려의 사신 파견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백제의 경우보다 더욱 의외의 일로 생각될 수도 있다. 이런 견지에서, 마한을 백제의 異稱으로 간주했듯이 夫餘國을 고구려의 이칭으로 보는 것 역시 대세론적으로 용인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이 용인될 수 없는 무리한 추론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 하겠다. 따라서 '정치권력의 집중화'의 정도는 {진서} 동이열전에 입록되는 필요 조건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충분 조건은 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晋 왕조와 통교관계가 성립되었는가의 여부가 그의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라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진서} 동이열전에 입록되지 않은 것을 굳이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결국 새로운 유력한 근거가 나타나지 않는 한 {진서}에 나오는 마한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진서} 동이열전에 의하면 마한은 동이제국 중에서 부여국에 이어 두번째로 입록되어 있다. 이는 곧 진 왕조가 부여국과 마한을 외교적으로 가장 중시하고 있었고, 부여와 마한 역시 진 왕조와의 공식적 통교관계를 적극적으로 전개해 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먼저 부여의 경우를 보면 285년에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일시 망국의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晋 왕조의 도움으로 復國된 바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진 왕조에 대한 부여의 정치외교적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는 바이다.

마한의 경우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본다. 그럴 경우, {진서}에서 특히 마한이 가장 빈번하게 진 왕조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그만큼 진 왕조에 대한 마한의 통교의 필요성이 절실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그 통교의 필요성이란, 溫祚紀에 나오는 백제와 마한의 관계 기사-마한의 영도를 받던 백제가 위협적 세력으로 성장하더니 급기야는 마한을 멸망시켰다는 기사-에서 시사받을 수 있듯이, 백제의 위협에 대해 외교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견지에서 {진서} 동이열전에 백제가 입록되지 않고 마한이 부여국에 이어 두번째로 입록된 사실은 그대로 인정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이를 인정할 수 있다면, {진서} 동이열전에서 마한의 사신 파견 기사의 단절 시점과 관련하여 마한의 멸망 시기를 찾으려한 견해는 긍정적으로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진 왕조에 대한 마한의 사신 파견이 단절되는 291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마한이 멸망했을 것으로 보고, 그 구체적인 멸망의 시점으로 比流王 5년(309)을 지목하였다. 필자는, 마한의 사신 파견이 단절되는 시점과 마한의 멸망 시점을 연관시켜 파악한 점은 기본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마한 멸망의 시점으로 비류왕 5년(309)을 지목한 것은 그 이유가 애매하여 재검토될 여지가 있다고 본다.

마한의 멸망 시점의 문제는 결국 溫祚紀에 나오는 백제의 마한 병탄 기사의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런데 누구나 인정하듯이 溫祚紀의 마한 병탄 기사는 후대의 사실을 溫祚紀에 소급 기록한 것이라 하겠으므로, 이 기사가 원래 있었을 합당한 시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서는 {三國史記} 기사의 형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으로 나누어 그 시점을 추적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삼국사기} 기사의 형식적 측면에서 살펴 보자. 溫祚紀의 마한 병탄 관련 기사들이 후대 사실을 溫祚紀에 집단적으로 소급·기록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병탄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던 바로 그 시점의 기사는 {삼국사기}에서 집단적으로 누락된 채로 처리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291년에 가까운 시점의 {三國史記} 百濟本紀의 기사를 살펴볼 때, 責稽王條(이하에서는 이를 '責稽紀'라 약칭하기로 함)의 기사가 우선 눈에 띤다. 責稽紀(286-297년)에 의하면 책계왕 卽位年條과 2年條와 13年條의 기사만이 있고, 3년-12年 사이의 기사가 집단적으로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기사의 형식적 측면에서 볼 때, 責稽王代가 실제의 마한 병탄 시기와 관련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가능성을 그 내용적 측면에서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의 責稽紀 기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1) 왕이 丁夫를 징발하여 慰禮城을 修葺하였다. 고구려가 帶方을 치니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의 王女 寶菓를 취하여 부인으로 삼았으므로, 이로 인해 말하기를, "대방은 우리의 舅甥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侵寇를 두려워하여 阿旦城과 蛇城을 수리하여 대비하였다[卽位年條].

2) 東明廟에 拜謁하였다[2年 正月條].

3) 漢이 貊人과 함께 쳐들어 오므로 왕이 나아가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갔다[13年 9月條].

마-1)에 보이는 帶方은 중국 군현의 하나인 帶方郡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帶方王'이란 '帶方郡太守'를 지칭한다 할 것이다. 그리고 마-3)에 나오는 漢 역시 중국 군현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責稽紀의 기사는, 백제의 역대왕이 통상적으로 즉위 2년에 행하는 동명묘 배알 의식[마-2 기사]을 제외한다면, 중국 군현과 관계한 기사가 내용의 전부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에 의하면 책계왕은 즉위 전후 시기에는 대방군과 혼인을 통해 우호관계를 맺고서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대방군을 구원해 주기도 하면서 그 관계를 더욱 강화해 갔던 것으로 되어 있는 반면, 그 말년인 13년에는 중국 군현의 침입을 받아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어, 즉위년의 기사와 13년의 기사 사이에 중국 군현과의 관계에 대한 상반된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責稽紀의 기사에 따른다면 책계왕 3년에서 12년 사이에 백제와 중국 군현과의 관계가 우호관계에서 적대관계로 일변되는 사태가 있었음직 한데, 그 기간 중의 기사가 집단적으로 누락되어 있어서 어떤 사태가 일어났는 지를 알기 어렵다. 그런데 여기에서 溫祚紀에 전하는 백제·마한 관계의 제2단계 기사[나 기사]와 3단계 기사[다 기사]를 責稽王 3년∼12년 사이의 누락된 기사로 본다면 그 전후의 사건 전개가 순조롭게 설명될 수 있어, 주목을 끈다. 즉, 溫祚紀에 나오는 마한 병탄 관련 기사들[나·다 기사]을 責稽紀의 3년-12년의 사이의 누락된 기사로 볼 경우, 책계왕 때 백제의 중국 및 마한과의 관계는 대개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전개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제1단계 : 백제가 마한을 병탄하기 위해서 우선 북쪽의 대방군과 우호관계를 구축한 단계이다[責稽紀의 卽位年條 기사]. 책계왕은 즉위년 전후 시기에 혼인 관계와 군사적 지원을 통해서 대방군과의 우호관계를 어느 정도 구축할 수 있었다. 책계왕 즉위년에 慰禮城과 阿旦城과 蛇城 등을 축성한 것 역시 북변의 군사적 안정을 기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마-1 기사].

제2단계 : 이를 바탕으로 하여 백제가 마한을 병탄·지배해 간 단계이다[溫祚紀의 나·다 기사]. 먼저 熊川柵을 만들어 마한의 반응을 떠보고[나-1 기사], 마한 병탄을 위해 일정한 준비를 거친 다음에[나-2 기사] 마한의 국읍을 병합하고[나-3 기사], 마한 잔여 세력의 투항을 받아들임으로써[나-4 기사] 마한 병탄을 완료했으며, 이어 백제에 叛하는 마한 토착세력을 진압하고 마한의 옛 영역에 축성을 행하여[다 기사] 이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였다.

제3단계 : 중국 군현이 백제를 적극 견제한 단계이다[責稽王 13年條(마-3 기사)와 汾西王 7年條 기사]. 책계왕 대의 마한 병탄으로 백제의 국력이 급격히 신장되자, 당시 북쪽의 고구려로부터 남침 위협을 받고 있던 중국 군현세력으로서는 남쪽의 백제 역시 새로운 위협 세력으로 비춰졌음직하다. 이런 면에서 중국 군현 세력이 貊人과 함께 백제를 공격하여 책계왕을 전사시켰던 것은[마-3 기사] 백제에 대한 견제책의 극단적 발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책계왕의 뒤를 이은 汾西王은 중국 군현에 대한 적극 공세로 맞서서 동왕 7년(304)에 낙랑의 西縣을 攻取하기도 했으나, 결국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그 역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곧 마한 병탄 이후에 백제와 중국 군현 간에 치열한 군사적 공방전이 야기되었음을 알겠다.

이렇게 본다면 責稽紀에서 백제와 중국 군현과의 관계가 책계왕의 즉위 초년기와 말년기 사이에 우호관계에서 대립관계로 변한 이유가 설명될 수 있겠는데, 그것은 바로 백제의 마한 병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것이다. 즉, 백제의 책계왕은 마한 병탄을 노려 대방군과 정책적으로 우호관계를 맺고 이를 강화해 갔던 것인데, 결국 백제가 전격적으로 마한을 병탄하자 허를 찔린 중국 군현은 백제에 대해 강경한 견제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추리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내용적 측면에 있어서도 온조기에 나오는 마한 병탄의 사건은 원래 責稽王 연간에 일어났던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상에서 {三國史記} 百濟本紀의 형식적·내용적 측면에서의 검토를 통해서, 溫祚紀에 나오는 백제의 마한 병탄 기사[온조왕 24년-27년 사이의 기사]의 원위치가 責稽紀의 3년-12년(288-297) 사이일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는 바, 이제 이를 적극 수용하여 溫祚紀와 責稽紀의 대응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 1> 溫祚紀와 責稽紀의 대응표
온조기
책계기
주요 내용
온조왕 24년조
책계왕 3년(288)
熊津柵 설치
온조왕 25년조
책계왕 4년(289)
백제왕, 마한 병탄 결심
온조왕 26년조
책계왕 5년(290)
마한 국읍 병합
온조왕 27년조
책계왕 6년(291)
마한 병탄 완료(圓山*金峴城 항복)
 
 

<표 1>에 의하면 溫祚紀에서 온조왕 26년조에 나오는 마한 국읍 병합 사건은 책계왕 5년(290)에 일어난 것이 되고, 溫祚紀의 온조왕 27년조에서 圓山城과 錦峴城의 항복을 받아 마한을 완전히 병탄했다고 한 사건은 책계왕 6년(291)에 일어난 것이 된다. 그런데 <표 1>은 溫祚紀의 마한 병탄 관련 기사를 責稽紀에 최대한 앞당겨서 대응시켜 본 것이므로, 좀 늦춰서 대응시킨다면 마한 병탄 시기가 이보다 몇년 정도는 내려갈 수도 있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마한은 적어도 290년 이전에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 되고, 291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멸망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은 {진서} 동이열전에서 마한의 사신 파견이 단절되는 시점과 정확히 일치되는 바여서, 마한의 사신 파견 단절 시점을 마한의 멸망 시점으로 본 견해와 관련하여 그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고 볼 것이다.

그렇다면 {진서} 동이열전에 나오듯이 277년에서 290년에 걸쳐 마한이 晋 왕조에 자주 사신을 파견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더욱이 {진서} 동이열전에 의하면 입록된 동이제국 중에서 마한이 가장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나타나 있고 또한 부여국에 이어 마한을 두번째로 입록하고 있어, 마한의 사신 파견이 갖는 의미가 자못 궁금해진다. 이는 291년 경에 백제가 마한을 병탄한 것으로 파악한 앞에서의 논지와 관련지워 다음과 같이 추론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백제가 291년 경에 마한을 병탄하기 전에 일정 기간의 준비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백제의 위협에 대한 마한의 대응책의 하나가 바로 晋 왕조에 대한 사신 파견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이제 이 가능성을 보강하기 위해서, 마한 병탄을 완료한 책계왕 직전의 시기에 利害 當事勢力인 백제와 마한과 중국 군현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어 갔을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점 책계왕의 父王인 古爾王代의 사정이 우선 검토되어야 하리라 본다.

고이왕대는 안으로 백제의 국가체제가 크게 정비되어 제2의 건국기로 평가되고 있고, 이에 상응하여 밖으로도 그 국력이 일정하게 발산되었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고이왕대의 대외관계 기사는 대부분 신라와 공방전을 벌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외에도 靺鞨의 長인 羅渴이 良馬 10필을 바쳐온 기사와 중국 군현과의 관계를 전하는 기사가 각각 1건씩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고이왕대에 중국 군현과 관계한 {三國史記}의 기사와, 이와 관련된 {三國志} 소재의 몇몇 기사를 비교 검토해 보면서, 고이왕대의 백제와 마한과 중국 군현의 관계가 전개되어 간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바-1) 魏의 幽州刺史 毋丘儉이 樂浪太守 劉茂와 帶方太守 弓遵과 함께 고구려를 치므로 왕은 그틈을 타서 左將 眞忠을 보내어 낙랑을 쳐서 邊民을 빼앗았다. 劉茂가 듣고 노하매 왕이 侵討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民口를 돌려주었다.

2) 部從事 吳林은 낙랑이 본래 韓國을 통치했다는 이유로 辰韓의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한 부분이 있어, 臣智가 韓을 격분시켜 帶方郡의 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태수 弓遵과 낙랑태수 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그를 쳤는데, 弓遵은 전사하였지만 2郡이 결국 韓을 멸하였다.

3) 2월에 幽州刺史 毋丘儉이 고구려를 쳤다. 5월에 濊貊을 쳐서 깨뜨리니 韓那濊 등 수십국이 각각 種落을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나오는 바-1) 기사는 백제가 고이왕 13년(246)에 낙랑군을 쳐서 변민을 노획했다가 그 보복이 두려워 되돌려 주었다는 내용이고, {三國志} 東夷傳에 나오는 바-2) 기사는 이와 비슷한 시기에 韓과 낙랑*대방군 간에 충돌이 일어났던 사건을 전하고 있으며, {三國志} 帝紀에 나오는 바-3) 기사는 위의 幽州刺史 毋丘儉의 고구려 침략으로 야기된 사건을 전하고 있다. 그간 이 세 기사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몇가지 논의가 있어 왔으므로, 본고의 효율적인 논지 전개를 위해서는 우선 이를 검토해 둘 필요가 있다.

첫째, 바-2) 기사가 반영하는 시기의 문제이다. 그간의 논의를 살펴보면 바-2) 기사를 바-3) 기사와 동일시하여, 그 반영 시기를 正始 7년(246)의 일로 보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왔다. 이는 바-3) 기사의 '韓那濊'에 관칭된 '韓'을 바-2) 기사의 韓과 동일시하고, 바-3)에 나오는 '韓那濊 등 수십국이 (毋丘儉 軍에) 투항했다'는 기록을 바-2)의 '2郡이 한을 멸하였다'는 기록과 동일시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3) 기사는 魏의 幽州刺史 毋丘儉이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고구려 東川王이 남옥저로 피난하여 그 戰線이 멀리 동해안까지 확대되면서 촉발되어진 사건이라 하겠으므로, 韓那濊 등 수십국이란 그 전선에 연접한 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바-3)의 韓那濊는 바-2)의 韓와 동일시될 수 없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바-3) 기사는 바-2) 기사 보다는 오히려 바-1) 기사의 사건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즉, 바-1) 기사에 전하는 바는 246년에 魏가 毋丘儉과 낙랑*대방군의 태수들을 총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는 틈을 타서 백제가 낙랑을 공격한 사건으로서, 이 사건의 발단이 바-3) 기사의 그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바-2)의 사건은 吳林이 韓의 8개 소국에 대한 간접적 지배권을 樂浪郡에 귀속시키려 한 것에 대한 韓 소국들의 집단적 반발 사태로 볼 것이므로, 사건의 발단 자체에서 바-1)이나 바-3)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또한 바-2) 기사에 의하면 韓과 낙랑·대방군의 충돌로 대방태수 弓遵이 전사했다고 하므로, 이 기사에 전하는 사건은 弓遵이 살아서 참전했다고 하는 바-1) 기사의 반영 시기[246년] 보다 다소 늦은 시기에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둘째, 바-2)에서 낙랑·대방군과의 전쟁에서 韓 소국들의 투쟁을 촉발시킨 존재로 거론된 臣智의 정체에 대한 문제이다. 그간의 논의를 보면, 이 臣智를 백제 고이왕으로 보려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는 바-2) 기사와 바-1) 기사를 동일시한 데에서 귀결되어진 바였다. 그러나 위에서 살폈듯이 두 기사는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없다 하겠으므로, 臣智를 백제 고이왕으로 본 견해 역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 바-1) 기사에 나오는 고이왕은 낙랑의 변민을 약취하였으나 곧 되돌려 줌으로써 중국 군현과 곧 타협해 버리고 말았던 반면에, 바-2) 기사에 나오는 臣智는 한의 소국들을 격분시켜 대방군의 崎離營을 공격하여 그 태수 弓遵을 전사시킬 정도로 치열한 전쟁을 벌여나갔고 그 결과 '2郡이 마침내 韓을 멸했다'고 표현될 정도로 막대한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어, 양 기사에 나타난 고이왕과 신지의 전쟁 전개 양상이 판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2) 기사에 나오는 臣智는 백제 고이왕과는 별개의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이며, 굳이 그 실체를 든다면 290년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마한의 왕 이외에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해야겠다.

바)의 기사를 이상과 같이 볼 경우, 3세기 중엽경의 고이왕대에 백제와 마한 사이에 역관계의 역전 현상이 일어났으리라는 점을 부수적으로 간취할 수 있다. 즉, 백제는 고이왕 13년(246)에 고구려 공격에 여념이 없던 낙랑군을 단독으로 공격하여 그 邊民을 약취하였다가 이에 대한 낙랑의 항의를 받자 그 보복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약취한 변민을 되돌려 주는 양면 작전을 구사함으로써, 중군 군현의 예봉을 피하면서 국력의 신장을 과시하는 실리를 챙겼다고 할 수 있다[바-1 기사]. 반면 臣智를 칭한 馬韓王은 246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낙랑군이 韓 소국의 일부에 대한 영도권을 주장하자, 이에 반발하여 그의 영도 하에 있던 韓 소국들을 분발시켜 대방군의 崎離營을 공격하고 대방태수를 전사시키는 큰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일관한 결과 '2郡이 마침내 韓을 멸했다'고 칭해질 정도의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바-2 기사].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백제는 고이왕대에 국력을 급신장해 갔던 반면에 마한은 그의 영도권을 급속히 상실하는 대조적인 추세로 나아가, 급기야 백제와 마한 사이에 역관계의 역전 현상이 나타나고 심화되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마한은 점차 백제의 병탄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당시 낙랑군과 대방군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晋 왕조에 직접 사신을 파견하여 이들 중국 군현으로 하여금 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게 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晋書} 東夷列傳에서 馬韓이 277년부터 290년까지 진 왕조에 빈번히 사신을 파견했다고 한 것[라 기사]이 그 구체적 증거이겠다. 진 왕조로서도 급성장한 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기 위해서 馬韓을 중시해야 했을 것인 바, {晋書} 東夷列傳에서 馬韓을 夫餘國에 이어 두번째로 入錄한 것이 그 반영이라 여겨진다.

진 왕조와 마한이 밀착되어 감에 따라, 백제는 중국 군현의 견제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들에 대한 적극적인 친교정책을 펼쳤을 것이 예상된다. 책계왕이 즉위 전후 시기에 대방군과 혼인관계를 맺고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대방군을 지원했던 것[마-1 기사]이야말로 그 구체적인 예증인 것이다. 이러한 친교정책은 고이왕 대에 필요에 따라 중국 군현에 대해 취했던 타협정책을 계승*재현한 것으로서, 마한 병탄을 위한 임시적 방편이었던 것임은 물론이다.

백제와 마한과 중국 군현 사이의 관계는 이처럼 새로이 재정립되어 갔던 것이다. 새로이 정립된 세 세력 간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이미 인용한 바 있는 다음의 기사를 재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26년 7월에 왕이 말하기를 "마한이 점차 약해지고 위아래에서 인심이 이반하니 그 세력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혹시 다른 세력이 이를 차지하면 우리까지 위태로와지니 후회해도 소용없다. 남보다 먼저 취하여 후환을 면하는 것이 좋겠다"라 하였다. 10월에 왕이 사냥을 하는 채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그 國邑을 병합하였는데, 오직 圓山과 錦峴의 2성만이 굳게 지켜서 함락되지 않았다[나-3 기사의 재인용].

이 기사는 溫祚紀의 26年條에 나오고 있으나, 앞에서 살폈듯이 責稽王 5년(290) 경의 사실로 볼 것이다. 이 기사에서 '위아래의 인심이 이반한다'는 구절은 마한이 낙랑*대방군과의 격렬한 전쟁을 치러 큰 타격을 입은 이래 韓 소국들에 대한 영도권을 급속히 상실해 간 간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라 한다면, 마한을 선점할지 모르겠다고 우려한 '다른 세력'이란 '진한 8국'에 대한 영도권의 귀속을 노린 바 있는[바-2 기사] 중국 군현 세력을 지칭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윗 기사는, 백제의 책계왕이 마한의 영도권이 크게 약화된 것을 보고, 이에 대한 중국 군현 세력의 선점[영향력 확대] 가능성을 염려하다가, 중국 군현에 친교정책을 써서 그들을 잠시 방심시켜 놓고서 290년 경에 전격적으로 마한을 쳐서 병탄한 것을 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백제는 중국 군현의 공격을 받아 책계왕과 분서왕이 앗따라 전사 혹은 피살되는 시련을 겪에 되었음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이다.

3. 馬韓의 세력 범위

이상에서 백제의 마한 병탄 시점을 290년 경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판단하였는데, 그렇다면 백제에게 병탄된 마한의 세력 범위는 어느 정도였을까? 그간 이에 대해서, 충청도와 전라남북도를 포괄하는 지역을 대상 범위로 본 견해와 충청도와 전북 지역을 대상 범위로 본 견해, 그리고 충청도 지역만을 대상 범위로 본 견해 등으로 나뉘어 있어, 논자들 간에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에 여기에서는 백제에게 병탄된 마한의 세력 범위를 새로이 추적해 보기로 한다. 이에 대한 논의 역시 溫祚紀의 관련 기사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사-1) 10월에 왕이 사냥을 하는 채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그 國邑을 병합하였는데, 오직 圓山과 錦峴의 두 성만이 굳게 지켜서 함락되지 않았다[溫祚紀 26年條 ; 나-3 기사에서 재인용].

2) 4월에 2城[圓山과 金峴城]이 항복하여 그 인민을 한산의 북쪽에 옮기니 마한이 마침내 망하였다. 7월에 大豆山城을 쌓았다[溫祚紀 27年條 ; 나-4 기사에서 재인용].

3) 7월에 湯井城을 쌓고 大豆城의 民戶를 나누어 옮겨 살게 하였다. 8월에 圓山과 錦峴의 2성을 修葺하고 古沙夫利城을 쌓았다[溫祚紀 36年條 ; 다-2 기사에서 재인용].

사-1)·2)·3) 기사는 각각 溫祚紀 26년조와 27년조, 그리고 36년조에 나오는 기사로서, 이들은 앞의 <표 1>에서 제시한 기준에 따라 기년을 재조성하여 각각 290년(責稽王 5년)과 291년(責稽王 6년)과 300년(汾西王 3년) 경의 사실로 볼 것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백제는 먼저 290년 경에 마한의 國邑을 병합하고 291년 경에 마지막까지 항거하는 圓山과 金峴城의 투항을 받아들여 마한을 완전 병탄한 연후에, 마한의 요충지에 大豆山城을 쌓고, 300년 경에는 湯井城을 쌓아 마한의 민호를 分居시키고, 원산성과 금현성을 修築하는 한편, 古沙夫利城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이는 곧 백제가 마한을 병탄한 후에 기왕의 성을 修築하거나 새로운 城을 築造한 사실을 전한 것이다. 따라서 백제에게 병탄된 마한의 세력 범위를 살피기 위해서는, 마한의 國邑과 백제에 마지막까지 항거한 圓山·錦峴의 두 성과 백제가 마한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축성한 것으로 보이는 大豆山城과 湯井城, 그리고 더나아가 古沙夫利城의 위치를 그 단서로서 살필 필요가 있다.

먼저 첫번째로 마한의 國邑에 대해서 살펴보자. 마한의 국읍은 그간 {三國志}와 {後漢書}에 나오는 目支國의 국읍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왔으며, 이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목지국의 위치 이에 대한 기왕의 견해를 보면, ① 익산설, ② 공주설, ③ 직산설, ④ 인천설, ⑤ 익산 부근설, ⑥ 영산강유역설, ⑦ 예산설, ⑧ 천안 청당동 일대설 등 매우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따라서 목지국의 위치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에 대한 교통 정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기왕의 견해들을 일별해 볼 때 우선 우선 눈에 띠는 것은 각 논자들이 다양한 기준에 의거하여 목지국의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중 먼저 문헌고증의 입장에서 각 논자들이 목지국 위치 비정의 기준으로 거론한 것을 보면, 準王의 南來 지점[①]과 백제와 접경한 지점[②·③], 그리고 비류가 도읍했다는 미추홀[④] 등을 들 수 있다. 다음에 고고학적 고찰에 의거하여 목지국 위치 비정의 주요 근거로 제시한 것을 보면, 청동기유물 혹은 지석묘가 집중 분포한 지점[⑤·⑥-1·⑦]과 옹관고분 혹은 토광묘와 철기유물이 집중 분포한 지점[⑥-2·⑧]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각 논자들은, 문헌고증의 입장에서든 고고학적 고찰의 입장에서든, 제각각의 근거·기준에 따라 목지국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논자의 경우 목지국의 위치를 논고에 따라 수시로 바꾸어 비정하기도 한 것을 보면, 목지국의 위치 비정 문제가 얼마나 혼란스러운 문제인가가 극명해진다고 하겠다. 따라서 목지국의 위치 비정에 대한 논의는, 우선 그 비정의 기준을 검토하여 대체적인 위치를 파악하고, 문헌 자료와 구비 전승 자료, 더나아가 고고학적 자료 등을 면밀히 비교·검토하는 보완 절차를 거쳐야 하리라고 본다.

먼저 문헌 고증의 입장에서 목지국 위치 비정의 기준을 모색해 보기로 하겠는데, 목지국이 백제에게 병탄된 마한의 국읍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준왕의 남래 지점이나 비류의 도읍지인 미추홀 보다는 백제와 접경했을 충청도 일대에서 그 위치를 찾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기왕의 견해들 중에서 공주설[②]과 직산설[③]만이 남게 되는데, 이중 막연한 추측에 의한 공주설 보다는 문헌과 구비 전승 자료를 면밀히 비교·검토한 직산설이 일단 설득력을 갖는다고 본다.

다음에 고고학적 고찰을 통해서 이를 검증해 보기로 하자. 기왕의 고고학적 고찰에 의하면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지와 철기시대의 유물*유적지를 각각 위치 비정의 유력한 근거로 삼는 두 갈래의 견해가 제시되었는데, 목지국이 3세기 말 경에 백제에 병탄되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후자에 근거한 견해가 타당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옹관묘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것을 주목한 영산강유역설[⑥-2]과 토광묘에서 초기철기시대 및 삼국시대의 유물이 다량 출토된 점을 중시한 천안 청당동 일대설[⑧]이 우선 후보지로 압축될 수 있겠다. 그런데 천안 청당동 일대는, 앞에서 목지국의 유력한 후보지로 주목한 직산과는 지근한 거리에 있어 동일한 고대문화권으로 파악될 수 있겠으므로, 천안*직산 일대가 목지국의 위치로서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다음에 두번째로 백제에 마지막까지 항거한 圓山과 錦峴의 두 성의 위치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이 두 성이 백제에 마지막까지 항거했다는 점에서, 마한의 요충지였을 가능성이 있고, 또한 지리적으로 백제와 멀리 떨어져 있을 가능성이 있겠다는 점을 우선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원산과 금현과 관련된 다음의 기사를 검토해 보면서 그 위치를 주적해 보기로 하자.

아-1) 백제가 신라 서쪽 경계의 圓山鄕을 습격하고 나아가 缶谷城을 포위하니 仇道가 정예의 기병 5백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쳤다. 백제병이 거짓 달아나는 것을 구도가 추격하다가, 蛙山에 이르러서 백제에게 패하였다. 왕이 구도의 실책으로 인해 벼슬을 떨어뜨려 缶谷城主로 삼고 薛支로 대신 左軍主로 삼았다.

2)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道薩城을 빼앗고,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金峴城을 함락시키니, 왕은 두 나라 군사의 피로한 틈을 타서 伊? 異斯夫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쳐 두 성을 빼앗고 성을 증축하여 무사 2천을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아-1) 기사는 벌휴니사금 7년(190)에 圓山鄕과 缶谷城과 蛙山에서 신라와 백제가 전투를 벌였다는 내용이고, 아-2) 기사는 고구려와 백제가 공방을 벌이던 道薩城과 金峴城을 신라가 모두 탈취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나오는 圓山鄕과 金峴城은 백제에 마지막까지 항거했다는 마한의 두 성, 곧 圓山城과 金峴城을[사-1·2 기사] 지칭하는 것으로 볼 것이다. 이를 통해서 두 성의 대체적인 위치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圓山鄕을 보자. 아-1)에 나타난 백제군의 행군로를 보면 신라 서쪽 경계에 있는 圓山鄕을 습격하고, 缶谷城으로 전진하더니 신라군의 저항을 받아 蛙山으로 퇴각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원산향은 蛙山[오늘날의 報恩]을 거쳐야 이를 수 있는 신라 서쪽 경계의 교통로 상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현재 그 구체적인 지점을 지적하기는 어렵겠으나, 그 대체적인 위치는 보은에서 멀지 않은 소백산맥 연변에 해당하는 지역 일대에 해당되지 않을까 한다.

다음에 金峴城을 보자. 아-2) 기사에 의하면 550년에 도살성은 고구려의 땅으로서 백제에게 탈취당했고, 금현성은 백제의 땅으로서 고구려에게 탈취당했다가, 결국은 모두 신라의 차지로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들의 위치는 6세기 중반에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가 접전을 벌였음직한 곳에서 찾아져야 하겠다. 그러한 곳으로는 竹嶺을 끼고 있는 소백산맥 연변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三國史記} 地理志에 의하면, 영풍군과 안동군을 위시한 이 지역 일대는 원래 고구려의 군현으로 편제된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백제의 진출 흔적도 보여지고 있어, 비교적 늦은 시기까지 삼국 간의 군사적 접전이 행해졌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죽령 방면에 대한 신라의 군사적 진출상을 보면, 진흥왕 6년 경에 죽령으로 통하는 요충지인 赤城을 점령한 흔적이 丹陽新羅赤城碑를 통해서 확인되고는 있지만, 당시 신라의 대외 팽창 추세에 비추어 볼 때 죽령 이북으로의 진출은 매우 미미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곧 이 방면에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력이 비교적 강하게 미치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사료된다. 신라가 죽령 이북 방면으로 본격 진출한 것은 다음 기사에 나타나듯이 진흥왕 12년(551)의 일이었다.

자) (진흥왕) 12년 辛未에 왕이 居柒夫를 비롯하여 仇珍大角?·比臺角?·耽知??·非西??·奴夫波珍?·西力夫波珍?·比次夫大阿?·未珍大阿?의 8將軍에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다. 백제인이 먼저 平壤을 공파하니, 居柒夫 등이 그 승리를 틈타 竹嶺 이외 高峴이내의 10郡을 취하였다.

진흥왕 12년에 신라는 백제와 제휴하여 두 방면에서 고구려를 공략했으니, 백제는 평양[오늘의 서울 지역을 지칭함] 쪽으로, 신라는 竹嶺과 高峴[오늘의 철령] 쪽으로 각각 진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령 이북과 고현 이남의 땅은 이 때까지도 고구려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스러운 점은, 신라가 백제와 제휴하여 고현까지 진출했던 시기가 고구려와 백제가 공방을 벌이는 틈을 타서 도살성과 금현성을 탈취한 그 이듬 해였다는 점이다. 이는 곧 신라와 백제 간에 모종의 담판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즉, 신라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점령하자 백제가 이를 용인하면서 획기적인 내용의 타협안을 제시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경우 그 타협안의 내용이란 자) 기사에 나타나듯이 백제와 신라가 제휴하여 각각 한강하류 방면과 죽령 이북 방면으로 진군하자는 것이었음은 물론이겠다. 백제의 경우 고구려에게 빼앗긴 그의 古都인 한강하류지역을 되찾는 것이 급선무였을 터이고, 신라 역시 가장 진출이 부진했던 강원도 내륙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이 실리에 부합했을 터이므로 양국 간에 담판은 무난히 수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감안할 때, 도살성과 금현성을 죽령 이북의 지역에 비정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우리라 본다. 왜냐하면 신라가 이 두 요충지를 발판으로 삼아 高峴에 이르는 10군을 취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金峴城의 위치는 구체적으로 어디에 비정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 그 구체적 위치를 비정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다만 금현성이 원래 백제의 성이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원래 고구려의 성이었던 도살성 보다는 서쪽 지역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 대체적인 위치는 충주와 제천과 단양 사이 정도로 비정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제 세번째로 大豆山城과 湯井城의 위치를 살펴보자. 이중 탕정성은 오늘날의 온양지역으로 비정하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고, 필자 역시 이에 대해 이견이 없다. 그런데 대두산성의 경우 그간 ① 燕岐說, ② 公州 부근설, ③ 牙山 水漢山城說, ④ 牙山 靈仁山城說 등의 다양한 견해가 제기된 바 있으므로, 우선 이들 견해들을 관련 기사와 대조하면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음은 {三國史記}에 나오는 대두산성 관련 기사 중에서 사-2)·3) 기사를 제외한 것이다.

차-1) 大豆城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의 민호를 이주시켰다.

2) 佐平 解仇가 恩率 燕信과 함께 무리를 모아 大豆城에 據하여 叛하였다.

3) 大豆城을 斗谷으로 옮기었다.

대두산성의 위치에 대한 기왕의 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차) 기사에 의거하여 위치를 비정한 경우이다. 즉, '豆仍只'라는 지명을 가진 燕岐 지방이 차-3) 기사에 보이는 斗谷과 음상사하므로 대두산성으로 비정될 수 있을 것으로 본 것[①]과, 차-2) 기사에 의거하여 대두산성을 연씨의 근거지로 보고 웅진시대에 연씨가 크게 대두한 것을 염두에 두어 공주 근처로 비정한 것[②] 등이 그것이다. 다음에 사) 기사에 의거하여 위치를 비정한 경우이다. 이는 사) 기사에서 대두산성이 탕정성 보다 먼저 축조되었다고 한 것을 근거로 하여, 대두산성이 탕정성 보다는 더 북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고 아산지역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③·④].

필자는 이중 후자의 견해가 타당한 것으로 보고자 하며, 그중에서도 오늘날 온양의 靈仁山城으로 비정한 ④의 견해가 가장 사실에 가깝다고 본다. 영인산은 해발 363.9m에 달하는 주변 최고의 산으로서 성곽의 흔적이 확인된다고 하며, 또한 그 위치가 아산만에 인접한 인주면과 영인면과 염치면의 3개 면이 만나는 곳에 있어, 당시 천안 지역에 위치한 마한 중심세력에게 이곳은 아산만으로 통할 수 있는 전략상 최고 요충지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백제가 마한을 멸한 이후에 이곳에 대두산성을 축조했던 것이나[사-2 기사] 고구려에 ?겨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한강 이북의 민호를 이곳으로 이주시켰던 것[차-1 기사] 등은 대두산성의 이러한 전략적 위치가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299년 경에 원산성과 금현성을 수축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새로이 쌓았다는 古沙夫利城의 위치를 살펴보자. {三國史記} 地理志에 의하면 全州 古阜郡의 백제 때 지명이 古沙夫里郡이었다고 밝히고 있으므로, 이를 근거로 하여 고사부리성을 고부로 보는데 이제까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백제가 고부 지역에까지 진출하여 거점 성을 쌓았다고 보기는 어려우리라 보며, 오히려 충남 및 전북의 경계지역에서 찾아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북 김제군 진봉면의 '고사'라는 지명이 우선 눈에 띤다. 진봉면의 고사는 만경강과 동진강이 서해에서 합류하면서 串과 같은 지형을 형성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바다와 강을 연결하는 교통 및 전략상의 요충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72.2m의 진봉산과 60.9m의 니성산이 있는데 동으로 만경 평야로 연결되고 삼면으로 망망대해와 연접해 있어서, 이 산들은 비록 나즈막하긴 하나 전략상 매우 중요한 요충지에 해당한다. 실제 조선시대에는 고사의 만경강 對岸 지역인 옥구 임피 지역이 古沙浦로 불리지기도 한 것을 보면, '고사'라는 명칭이 만경강 하구 일대에서 흔히 쓰이고 있었다는 점과 만강강 하구가 일찍이 중요한 포구로 활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로 미루어 볼 때, 백제는 마한을 병탄한 후에 고사의 진봉산이나 니성산에 성을 쌓음으로써, 이를 서해바다와 만경강, 그리고 동진강을 통해 전북 지역으로 진출해 가는 거점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2) 기사에 나오는 古沙夫利城을 바로 이곳에 비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마한의 國邑인 目支國을 위시로 하여 圓山城과 錦峴城, 大豆山城과 湯井城, 그리고 古沙夫利城의 위치를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291년 경에 백제에 완전 병탄된 마한의 세력 범위는, 천안*직산 일대의 목지국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으로 아산만[大豆山城], 동남쪽으로 소백산맥 연변[圓山城과 金峴城], 북으로 안성천, 그리고 남으로 금강선에까지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마한의 범위는 한백겸 이래 경기*충청*전라 지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파악되어온 마한의 통념적 범위와는 큰 차이가 있게 되어, 다시금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는 마한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명되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로 여기지는 바, 이에 대한 해명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 두기로 한다.

4. 맺음말

이상에서 백제의 마한 병탄시기와 마한의 세력범위를 살펴보았다. 이에 대한 기왕의 연구에서는 각 논자들이 마한의 세력범위를 각기 다르게 파악하면서 백제의 마한 병탄시기를 논하였기 때문에 논의 자체가 성립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고, 본고에서는 백제의 마한 병탄시기와 마한의 세력범위를 상호 관련성 속에서 추적해 본 것이다.

먼저 백제의 마한 병탄시기를 세 측면에서 추적하였다. 첫째, {晋書} 東夷列傳에 나오는 馬韓이 277년부터 290년까지 8차례에 걸쳐 晋 왕조에 사신을 파견했다고 한 사실을 주목하고, 이를 통해서 마한이 3세기 말까지 존속했다는 점과 290년 이후의 가까운 시점에 멸망했으리는 점을 제기하였다. 둘째, {三國史記} 溫祚紀에 나오는 마한 병탄기사의 실제적 반영 시점을 責稽王代(286∼297)로 보았다. 책계왕대는 290년에서 가장 가까운 시점일 뿐만 아니라, 실제 {三國史記} 責稽紀 기사를 형식적·내용적 측면에서 분석해본 결과 그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째, 290년 직후의 시점에 백제가 마한을 병탄할 수 있게 된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원래 마한의 영도를 받아오던 백제가 마한을 압도할 수 있을 정도로 국력을 급신장시킬 수 있었던 원인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살펴져야 하겠지만, 본고에서는 그 가장 가까운 원인으로서 중국 군현과의 관계를 주목하였다. 즉, 백제는 3세기 후반의 고이왕대와 책계왕 초반에 중국 군현에 대하여 실리외교를 전개해 갔던데 반해, 마한은 비타협적인 강경노선을 견지하여 중국 군현과의 무리한 전쟁으로 일관해서 일대 타격을 자초함으로써, 3세기 후반부터 백제와 마한 간의 역관계는 역전되고 더욱 심화되어 간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 결과 마한은 백제의 침략 위협에 직면하게 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277년부터 중국 군현에 대한 지도권을 행사하고 있던 진 왕조에 빈번히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백제의 책계왕은 대방군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중국 군현의 견제를 완화시키고 마한을 전격적으로 병탄했던 것으로 보았다. 이에 허를 찔린 중국 군현은 백제에 대해 강경책을 쓰게 되어 무력 공격을 감행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다음에 백제의 병탄대상이 된 마한의 세력범위를 살펴보았다. 溫祚紀의 마한 병탄기사에 나오는 마한의 國邑과 백제에게 마지막까지 항거했다는 圓山城과 錦峴城, 그리고 마한을 병탄한 이후에 백제가 옛 마한의 요지에 축조했다는 湯井城과 大豆山城 등의 위치 비정을 통해서 마한의 대체적인 세력범위를 추정해 보았다. 그 결과 마한의 세력범위는 천안·직산 일대의 목지국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으로 아산만, 동남쪽으로 소백산맥 연변, 북으로 안성천, 그리고 남으로 금강선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마한의 세력범위는 한백겸 이래 경기·충청·전라 지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파악되어온 마한의 통념적 범위와는 큰 차이가 있게 되는데, 이 문제는 추후의 과제로 미루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