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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과 結婚의 풍속
강봉룡(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조교수)

* 이 강의안은 한국역사연구회 주최 제19회 한국사특강(1997. 7. 13. 대우재단빌딩 3층 강의실)을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1. 性 풍속

1) 중국사서에 나타난 한국 고대인의 성 풍속

?. '음란'하고 '야합'을 좋아한다고 비난

- "그 나라 풍속은 음란하여 남녀가 서로 야합하는 경우가 많다"({梁書} 고구려조)

- "풍혹이 음란하고 노래와 춤을 즐겨 밤에 남녀가 떼지어 어울려 노는데 귀천의 구분이 없다."({魏書} 고구려조)

- "속임수가 많은 편이고 말은 속되고 야하다. 친소를 가리지 않고 한 냇물에서 목욕하고 같은 방에서 잠잔다. 풍속이 음란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유녀가 있는데, 그녀에게는 정해진 남편이 없다."({周書} 고려조)

?. 남녀 교제의 장 : 축제(정열의 발산, 남녀 교제, 성적 교섭)

- 고구려 東盟祭, 부여의 迎鼓祭, 동예의 舞天祭, 삼한의 계절제 등

- 영고제 : "마시고 먹고 노래부르고 춤추었다."

- 무천제 : "밤낮으로 술마시고 노래부르고 춤추었다."

- 계절제 : "파종을 마친후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고 술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 중국인들이 비난한 이유

- 고구려와 중국의 성 문화 차이

- 유교적 도적주의에 따른 성 문화 : 남녀의 자연스런 교제와 성적 교섭이 허용되는 성문화 --- 야만적인 것으로 비난.

2) 우리 사서에 나타난 성 풍속의 실상

?. 축제와 자유분방한 성 풍속의 관계

- "신라 풍속에 매년 2월을 당하면 8일부터 15일까지 서울의 남녀가 다투어 흥륜사의 殿塔을 도는 福會를 행하였다. 원성왕대에 낭군 김현이 밤이 깊도록 홀로 돌면서 쉬지 않았다. 한 처녀가 또한 염불을 하면서 따라 돌았으므로 서로 정이 움직여 눈길을 주었다. 돌기를 마치자 으슥한 곳으로 가서 정을 통하였다."({삼국유사} 김현감호)

- 탑돌이의 의미 : 전통적 축제가 불교 수용·정착 후에 불교식 축제의 모습으로 변모·정착된 것. 축제와 성 풍속의 관계가 통일신라까지 지속됨.

?. '야합' : 일종의 '혼전 섹스' <참고 자료 1, 2>

- 사례 : 해모수와 유화의 야합(주몽), 서현과 만명의 야합(김유신), 김춘추와 문희의 야합(문무왕), 원효와 요석공주(설총), 강수와 대장장이 딸, 서동과 선화공주,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등의 야합 이야기.

- 야합을 비난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로맨스로 묘사 : 야합을 비난의 대상, 비도덕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 분위기. '혼전 섹스'에 대해 관대한 사회 분위기.

3) 성 모랄

?. 배우자 선택의 당사자주의

- 相悅이 야합의 전제가 됨.

"장가드는데 남녀가 서로 좋아[相悅]하면 그것으로 혼인이 성사되었다. 남자의 집에서는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재물을 보내는 예는 없다. 만약 재물을 받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수치로 여긴다."({수서} 고려조)

- '야합'은 대체로 결혼으로 연결되는 경향.

?. 결혼 후의 '혼외 정사'에 대한 규제

- 고대 초기 : 죽임으로 다스림

"남녀가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인다."({삼국지} 부여조)

-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 - 점차 순화되어 감(사회적 성 모랄)

- 사회적 성 모랄 : 결혼한 여자가 지아비에 대한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규범, 외간 남자가 결혼한 여자를 침범해서는 안된다는 규범

- 사례 : 신라의 진지왕과 유부녀인 도화녀에 관한 이야기<참고자료 3>, 백제의 개루왕과 도미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 처용의 부인과 역신의 부정 이야기<참고자료 4> 등.

2. 성에 대한 관념

1) 성기 숭배신앙(Phallicism) - 전세계적 현상(구체적 사례는 {삼국사대…} 참조)

?. 다산과 풍요의 기원

- 인간의 다산 : 원시 고대사회에서 풍요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인간

- 세쌍둥이 네쌍둥이에 대한 국가적 포상, 이삭이 2개-3개 달린 벼 혹은 보리 줄기를 신성시함

- 사회적 정치적 지위와 세력의 상징 : 지증왕과 선덕여왕의 사례

?. 고대 성 풍속과의 관계(사회사적 의미)

- 성 표현과 행위가 자유로움

- 출산을 담당하는 여성의 지위 비교적 높음(모계제사회)

- 모계제사회 : 母族, 상속, 계승

2) 성기 숭배신앙의 굴절

?. 해신당의 사례

- 성기 숭배신앙의 유제

- 유래담의 加飾

?. 祈子癌

- 조선시대 남아선호사상의 일반화에 따른 굴절 현상(性穴)

- 여성은 아들낳는 수단으로.

3) 성 관념의 변화

?. 성의 속성

- 본능적 속성 : 쾌락 - 성적 충동

- 기능적 속성 : 생식 - 번식(다산)

?. 고대인의 성기 숭배신앙

- 성의 기능적 속성에 대한 염원

- 다산과 풍요의 기원

- 자연스러운 성적 교섭

?. 조선시대

- 아들 엄기만을 선택적으로 기원함(성기 숭배신앙의 굴절)

- 성의 본능적 속성이 중시됨(목적시)

?. 근래

- 산아제한 : 성의 기능적 속성을 통제

- 성의 본능적 속성을 목적시하고 이를 조절함 : 무절제한 성 문화, 비아그라

* 성 문화의 바람직한 방향은?

3. 결혼 풍속 - 당시 選好된 결혼의 형태

1) ?屋制

?. 기록 : "풍속에 혼인의 언약이 정해지면 여자 집에서 大屋 뒤에 小屋을 짓는데, 이를 ?屋이라 했다. / 사위가 저녁에 여자 집의 문밖에 이르러 자기 이름을 대며 ?拜하면서 여자와 같이 자기를 재삼 애원하면, 여자의 부모가 이를 들어 소옥에 자도록 하였다. 그 곁에는 錢帛이 놓여 있다. / 아들을 낳아 장대해지면 부인을 데리고 집에 돌아온다."

?. 혼인 절차

- 혼인의 언약 - 서옥을 지음 - 궤배의식 - 동숙

- 혼인의 언약은 당사자 주의("남녀가 상열하면 그것으로 혼인이 성사되었다.")

- 錢帛의 의미 : 新婦貸가 아니라 잘 살기를 기원하는 종교의식("재물을 받는 경우 사람들이 모두 스치스럽게 여겼다.")

?. 率?婚

- 여성의 지위 비교적 높음(모계제)

- 이러한 결풍 풍속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 지속됨(男歸女家婚 혹은 ?留婦家婚이라 부름)

- 조선전기에 중국적 혼인제인 親迎制와의 마찰 속에서도 계속 유지되다가 조선후기 이후에 급속히 무너짐.

- 유제 : "장가간다", "사위도 자식이다"는 말. 여성이 결혼 후에도 자기의 姓을 유지함.

2) 娶嫂婚

?. 세계적 현상

- levirate : junior levirate, senior levirat - cf. sororate

- 烏丸 : "娶繼母", 흉노 : "娶後母·伯叔母"

- 신약성서 마태복음 22장 : 사두개인이 예수께 묻기를 "7형제가 있어 맏형의 처를 차례로 취하게 되면 사후 부활할 때 그녀는 누구의 처가 됩니까?" 예수 답하기를 ...

- 죽으면 그 처는 누구에게 귀속될까? 烏丸의 사례 ...

?. 우리나라의 사례

- 신라 {화랑세기} : 龍樹와 龍春은 형제지간.

"용수가 죽을 때 부인(天明夫人 : 진평왕의 딸)과 아들(김춘추)을 용춘에게 부탁하였다. 용춘공은 천명부인을 아내로 삼고 태종을 아들로 삼았다. 태종이 즉위하자 용춘을 갈문왕으로 추존하였다."

- 고구려 : 故國川王 사후 그 동생 연우가 왕비 우씨를 부인으로 삼고 왕위에 오름(山上王) - 전통적 취수혼과 중국적 도덕관념의 갈등상이 나타남.<참고자료 5>

?. 사회적 의미

- 집단과 집단 사이의 연맹 관계를 영속화 시킴

- 왕위의 계승 : 유력한 두 집단의 대표 남녀가 결혼함으로써 두 집단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계승함. 예) 신라의 3성 교립(외손, 사위의 왕위계승)

- 부계 뿐만 아니라 모계, 처계 집단의 영향력이 한 인간의 정치사회적 지위를 규정함

* 서옥제는 일반인이 선호한 혼인형태, 취수혼은 지배층이 선호한 혼인형태?

3) 近親婚

?. 근친혼의 사례

- "兄弟女, 姑, 姨, 從姉妹와 모두 결혼할 수 있다"({당서} 신라조)

- 사례 : 용수(용춘)와 천명부인(사촌인 진평왕의 딸)의 결혼(조카뻘). 김춘추와 김유신 妹 문희 사이의 딸과 김유신 결혼(외조카).

- 고려시대에도 극단적인 왕실 근친혼은 계속됨(이복 남매 간의 결혼 사례도 있음).

- 유학자 김부식의 근친혼 인식<참고자료 6> : 근친혼은 잘못된 것이나, 중국의 예로 신라의 예를 나무라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 근친혼의 지양

- 고려 문종 대(11세기 중반)부터 근친혼에 대한 금지 조치 : "仕路를 금함" - 금지와 허통의 반복.

- 조선시대에 들어 법제화 - 형률로 다스림

- 조선후기에 同性同本禁婚으로 경사(또 하나의 극단)

4) 기타

?. 族外婚

- 동예의 혼인 : "同姓不婚"({삼국지} 동예조)

- 姓의 의미 : 부계 계승률의 지표?, 모계를 기준으로 한 집단?

- 오스트라일리아의 半族婚과 四半族婚의 사례

?. 豫婦制

- 옥저의 혼인 : "여자가 10세가 되면 서로 허락하여 사위집에서 그를 맞아 그를 맞아 길러 婦로 삼는다. 성인이 되어 여가에 다시 돌아오면 여가에서는 責錢을 하는데 , 지불이 다 끝나면 다시 사위에게로 돌려보낸다."({삼국지 옥저조)

- 일종의 매매혼. 한반도 동북 일대에서 행해진 예외적 혼인 형태.

?. 貸妻의 유습<참고자료 7> : 문무왕 庶弟 車得公과 武州 鄕吏 安吉의 처

<참고 자료>

1. 처음 舒玄이 길에서 입종의 아들인 肅訖宗의 딸 萬明을 보고 마음에 기뻐하여 눈짓으로 꾀어서 중매도 없이 결합하였다. 서현이 萬弩郡 태수가 되어 만명과 함께 떠나고자 하니 숙흘종이 그제서야 딸이 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고 미워해서 딴 집에 가두어 두고 사람을 시켜 지켰는데, 갑자기 벼락이 그 문간을 때리어 지키는 사람이 놀라 어지러뜨리자 만명이 들창문으로 빠져나와 드디어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

2. 원효성사는 어느날 常例에서 벗어나게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으련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 때 태종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께서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그보다 더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이 때 요석궁에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宮吏를 시켜 원효를 찾아 맞아들이게 했다. 궁리가 칙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려 하는데, 벌써 남산으로부터 내려와 蚊川橋를 지나오므로 만나게 되었다. 원효는 일부러 물속에 떨어져 옷을 적시었다. 긍리는 성사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하니 그 곳에서 머물러 있게 되었다.({삼국유사} 원효불기조)

3. 사량부 민가의 여인이 얼굴이 아름다웠으므로 그 때 사람들이 桃花娘이라 했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와서 관계하려고 하니 여인이 아뢰었다. "여자가 지킬 일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감은 비록 제왕의 위엄으로써도 그 정조를 강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차라리 죽음을 당할지라도 다른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그러면 될 수 있습니다." 왕은 그를 놓아 보내었다. 이 해에 왕은 폐위되어 세상을 떠났는데 그 후 2년만에 그 남편도 또한 죽었다. 10일만에 홀연히 밤중에 왕은 평상시처럼 여인의 방에 왔다. "네가 예전에 허락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 여인은 가벼이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고하니 부모는 "임금의 명령을 어찌 거절하겠느냐"하고 그 딸을 방에 들여보냈다.({삼국유사} 도화녀비형랑조)

4. 헌강왕은 미녀를 처용에게 아내로 주어 그의 생각을 잡아두게 하고, 또한 급간이란 벼슬을 주었다. 그의 아내가 너무나 아름다웠으므로 疫神이 그녀를 흠모하여 사람으로 모습을 바꾸어 밤에 그 집에 가서 몰래 그녀와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누웠음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 나왔다. … 그 때에 역신이 형체를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꿇어 앉았다. "제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그녀와 관계했는데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시니 감격하여 칭송하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 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조)

5. 고국천왕이 돌아갔을 때 왕후 于氏는 이를 비밀에 부치고 밤에 왕의 아우인 發岐의 집에 가서 "왕이 후사가 없으니 그대가 계승하라" 하였다. 발기는 왕이 죽은 줄 모르고 대답하기를 "천운은 따로 돌아가는 데가 있으니 가벼이 말할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부녀자가 밤에 나다니니 어찌 예라 하겠습니까"라 하였다. 왕후는 부끄러러이 여겨 곧 그 아우 延優의 집으로 갔다. 연우는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문에서 맞이하여 자리에 들어와 주연을 베풀었다. 왕후가 말하기를 "대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어른이 되어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할 터인데 도리어 나에게 異心이 있다고 하여 무례하게 굴므로 지금 숙을 보러 온 것입니다."라 하였다. 연우는 예를 더하여 친히 칼을 잡고 고기를 베다가 잘못 그의 손가락을 다치었다. 왕후가 허리띠를 풀어 그의 다친 손을 싸매 주었다. 왕후가 환궁하려 하여 연우에게 "밤이 깊어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그대는 나를 궁에까지 바래다 달라"라 하였다. 연우가 그리하였더니 왕후가 그의 손을 잡고 궁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새벽에 거짓으로 선왕의 遺命이라 하여 群臣으로 하여금 연우를 세워 왕을 삼게 하였다. 발기는 듣고 크게 노하여 군사로 왕궁을 에워싸며 부르짖었다.… 연우는 3일 동안이나 궁문을 닫으니 나라 사람들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 왕은 우씨로 인하여 왕위를 얻게 되었으므로 다시 장가를 들지 않고 우씨를 세워 왕후로 삼았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조)

6. 처를 취하는데 同姓으로 하지 않는 것은 부부의 유별을 두텁게 하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노공이 동성인 오에 장가든 것이나 진후가 동성의 사희를 둔 것을 진의 사패와 정의 자산이 깊이 나무랐다. 그런데 신라와 같은 경우는 동성을 취할 뿐만 아니라 형제의 자나 姑, 姨, 종자매를 다 맞아 처로 삼기도 하였다. 비록 외국이 각기 풍속이 다르다 하나, 중국의 예로 이를 나무라면 크게 잘못이다. 흉노와 같이 母를 烝하고 子를 報하는 것은 이보다 심한 것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니사금조)

7. (문무왕의 庶弟) 車得公은 승복을 입고 비파를 들고 거사의 모양으로 서울을 떠나 … 武珍州에 이르렀다. 촌락을 돌아다니니 무진주의 향리 安吉은 그를 비범한 인물인 줄 알아보고 자기 집으로 맞아들여 성심껏 대접했다. 그 날 밤에 안길은 妻妾 세사람을 불러 말했다. "오늘 밤에 거사 손님을 모시고 자는 사람은 나와 한평생을 같이 할 것이요." 두 아내는 말했다. "차라리 당신과 같이 살지 못할지언정 어찌 남과 동침할 수 있습니까?" 그 한 아내가 말했다. "당신이 만약 종신토록 함깨 살기로 한다면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그녀는 그대로 시행하였다.({삼국유사} 문호왕법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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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강봉룡, 전호태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