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num.mokpo.ac.kr/kangbr/lecture/성.htm
한국 고대사회의 性 文化
강봉룡(목포대 역사문화학부)

머리말

성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 중에서 가장 충동적인 분야에 속한다. 이런 까닭에 흔히 성적 문란은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요소로 인식되었고 그만큼 경계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사실 사회적 질서 유지를 위해 성적 충동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를 통제하는데 모든 사회, 모든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확고한 도덕적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성 문화는 동서고금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런 면에서 성이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개성을 나타내 주는 문화현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 나타난 성 풍속과 성에 대한 관념 및 이에 대한 규제의 방식 역시 시대 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면에서 우선 우리의 먼 고대사회에서 성 문화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탐색해 보는 것은 자못 흥미로운 주제라 할 수 있다.

1. '음란'한 성 문화

한국 고대사회 성 문화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당시 중국인의 시각은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중국인의 눈에 비친 고구려인들의 성 문화를 보면, 한마디로 '음란'하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중국 사서에서 고구려의 성 문화를 다루고 있는 몇몇 사례를 들어보자.

가) 그 나라의 풍속은 음란하여 남녀가 서로 야합하는 경우가 많다.

나) 풍속이 음란하고 노래와 춤을 즐겨 밤에 남녀가 떼지어 어울려 노는데, 귀천의 구별이 없다.

다) 속임수가 많은 편이고 말은 속되고 야하다.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고 한 냇물에서 목욕하고 같은 방에서 잠잔다. 풍속이 음란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유녀(遊女)가 있는데, 그녀에게는 정해진 남편이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고구려의 성 문화를 '음란'하다고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들의 이러한 시각은 정당한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중국인의 이러한 평가가 정당한 것인가를 따지기 보다는 왜 이러한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문제에 우선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고구려의 성 문화가 중국과는 크게 달랐으리라는 점이다. 즉 당시 중국 사가들은 엄격한 남녀관계를 중시하는 유교적 도덕주의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판이한 고구려의 성 문화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자연히 이를 '음란'한 것으로 신랄하게 비난하였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위의 인용문은 상당 부분 고구려 성 문화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 기사에서 '노래와 춤을 즐겨 밤에 남녀가 떼지어 놀았다'고 한 것은 고구려사회에서 노래와 춤을 매개로 하여 남녀가 자유로이 교제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축제의 장이 매일 밤마다 무절제하게 마련되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터이고, 특별한 국가적 행사일을 전후하여 일년에 한두번 정도 허용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특별한 국가적 행사일로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우선 떠오르는 것이 동맹제(東盟祭)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고구려의 동맹제는 시조인 주몽과 시조모인 유화부인을 추앙하여 거국적으로 행한 제천행사였다. 이 동맹제의 기간 동안에 고구려인들은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흥겨운 축제의 장을 연출하고, 이를 통해서 청춘 남녀 간의 교제도 자연스럽게 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동맹제과 유사한 축제가 당시 동이족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중국인의 눈에 비친 몇가지의 사례를 보자. 먼저 부여의 영고제(迎鼓祭)에서는 '마시고 먹고 노래부르고 춤추었다'고 하고, 동예의 무천제(舞天祭)에서는 '밤낮으로 술마시고 노래부르고 춤추었다'고 하였다. 또한 삼한사회의 계절제에서는 5월 파종을 마친 후에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고 술 마시고 노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서, 며칠동안 계속되는 정열적인 축제가 동이족사회에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동이족 젊은이들은 이러한 축제의 장을 통하여 그들의 정열을 발산하였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남녀 간의 교제는 물론 간혹 성적 교섭에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 예상되는 바이다. 이와 관련해서 {삼국유사}에 전하는 다음의 이야기를 음미해 보자.

신라 풍속에 매년 2월을 당하면 8일부터 15일까지 서울의 남녀가 다투어 흥륜사의 전탑(殿塔)을 도는 복회(福會)를 행하였다. 원성왕대에 낭군 김현이 밤이 깊도록 홀로 돌면서 쉬지 않았다. 한 처녀가 또한 염불을 하면서 따라 돌았으므로 서로 정이 움직여 눈길을 주었다. 돌기를 마치자 으슥한 곳으로 이끌고 가서 정을 통하였다.

때는 통일신라 원성왕대(785∼798). 매년 2월에 행해지고 있던 탑돌이 행사에서 두 남녀가 눈이 맞아 은밀히 정을 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탑돌이 행사는 이전의 동이족사회에서 유행하던 거국적 축제의 장이 불교의 수용 및 정착 과정에서 불교식 축제의 모습으로 변모·정착된 바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위의 기록은 통일신라 때까지도 젊은이들이 불교식 축제의 장을 통해 남녀 간의 교제와 성적 교섭을 자연스럽게 행했던 사례가 될 수 있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중국 사서에서 '음란'하다고 전하는 고구려사회의 남녀 관계의 풍속은 고구려 뿐만 아니라 동이족 전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고, 또한 적어도 통일신라 때까지 지속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유분방한 남녀 관계의 풍속은 유교적 성 문화에 익숙해져 있던 중국인에게 매우 당혹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중국 사서에서 이를 '음란'하다고 내리쳤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남녀의 '야합'

앞의 인용문에 나타나 있듯이, 중국인은 고구려인의 남녀관계에 대하여 '음란'이라는 말 과 함께 '야합'이라는 말을 써서 곱지 않은 그들의 시각을 숨기지 않았다. 이 경우 '야합'이란 표현은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남녀가 성적으로 교섭한 경우를 비하하여 쓴 말이라 여겨진다. 요즘 말로 이른바 '혼외 정사' 혹은 '혼전 섹스'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중매인을 통해서 남녀 관계가 연결되고 결혼이라는 소정의 의식 절차를 거친 연후에야 비로소 성적 교합이 허용되는 것을 미풍양속으로 간주하고 있던 당시 중국인의 견지에서 볼 때, 자유분방한 한국 고대인의 성 풍속은 확실히 '야합'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중국인들은 이러한 성 풍속을 야만적이라고 생각했음직 하다.

그렇지만 정작 당사자인 한국 고대인들은 '야합'을 결코 야만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연스런 성 풍속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듯하다. 이는 '야합'의 사례가 우리측 사서에서도 허다하게 찾아지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멀리 고구려 시조 주몽이 해모수와 유화의 야합으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김유신이 서현과 만명의 야합으로 태어났다는 이야기, 그리고 문무왕 법민이 김춘추와 문희의 야합으로 태어났다는 이야기 등이 우리측 사서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서에서 고구려 건국시조인 주몽을 위시하여 삼국통일의 두 영웅인 김유신과 문무왕을 모두 야합의 소생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니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야합으로 설총을 낳았다는 이야기, 통일기의 대문장가인 강수가 대장장이의 딸과 야합했다는 이야기, 백제의 서동이와 신라의 선화공주가 야합했다는 이야기, 고구려의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이 야합했다는 이야기 등이 우리 사서에 버젓이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들이 대부분 비난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로맨스로 묘사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인들에게 야합이 비난의 대상이 되는 비도덕적인 것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한국 고대사회에서 결혼 전의 성적 교섭, 즉 '혼전 섹스'가 비교적 관대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 사서에서 고구려의 성 문화에 대해서 '음란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거나 '정해진 남편이 없는 유녀(遊女)가 있다'고 썼던 것은, 중국과 달리 '혼전 섹스'가 용인되고 있는 고구려사회의 성 문화를 비하하여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한국 고대인의 성 모랄이 당시 중국인의 그것과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국 고대사회의 성 모랄의 개성은 어땠을까? 먼저 남녀 당사자 간의 '서로 좋아함'[상열(相悅)]에 기초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이와 관련해서 중국 사서에서 전하는 고구려의 결혼풍속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시집 장가드는데 남녀가 서로 좋아[相悅]하면 그것으로 혼인이 성사되었다. 남자의 집에서는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재물을 보내는 예는 없다. 만약 재물을 받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수치로 여긴다.

이 기록은 고구려사회에서 결혼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재산의 다과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남녀 당사자의 '상열'에 있었음을 분명히 전하고 있다.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그것으로 혼인이 성사되었다'고 한 것은 곧 남녀 간의 '상열'이 '야합'의 전제가 되고 더나아가 결혼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야합'이 반드시 결혼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하여도, 일반적으로는 연결되는 경향이 강했다고 보아야겠다. 이는 위에서 인용한, 우리 사서에 나오는 '야합'의 사례들이 대부분 결혼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는 바이다.

남녀 당사자의 '상열'에 기초한 야합과 결혼의 풍속이 성행했다는 것은 곧 남녀관계의 당사자주의가 선호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당사자주의는 당시 중국사회에서 미풍양속으로 선호되던 혼전 순결의 강요와 중매혼의 행태와는 색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3. 성에 대한 규제

남녀 당사자의 '상열'에 기초한 자유로운 남녀 교제와 야합의 성행, 이것이 한국 고대사회 성 문화의 외양을 특징지우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성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전혀 없었다거나 성적 방종이 무한정 허용되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 고대사회에서 성에 대한 규제는 주로 혼인 이후에 집중되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혼전 섹스'는 당사자주의에 충실하여 비교적 관대하게 취급되고 있었음에 반해, 일단 혼인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정절을 상당히 엄격하게 규제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 사서에 전하는 부여사회의 풍속을 먼저 음미해 보기로 하자.

남녀가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인다. 투기하는 것을 더욱 미워하여 죽이고 나서 그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 위에 버린다. 시체가 썩은 다음에 여자집에서 그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내어준다.

부여사회에서 '남녀가 음란한 짓을 하면 죽인다'고 한 것은, 미혼 남녀의 '음란'이 용인되고 있던 고구려사회와는 너무나 이질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 문화의 이질성은, 부여와 고구려가 비슷한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잘 이해되지 않는 바가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 나타난 것은, 미혼 남녀의 문제라기 보다는, 결혼한 남녀가 성적 외도를 하는 경우를 징벌하기 위해 마련한 법적 규제장치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말하자면 부부의 정절 유지를 위해 마련한 법적 규제장치였던 셈이다. 그런데 여자의 경우에는 투기만 해도 죽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결혼한 여자에 대한 법적 규제는 남자에 비해 더욱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 규제 장치는 지나치게 가혹한 것으로서, 그 이후에 점차 순화되어 사회적 도덕적 규범으로 바뀌어 갔을 것이다. 역사 기록에 나타난 사례들을 보면, 결혼한 여자가 지아비에 대해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규범과 외간 남자가 결혼한 여자를 침범해서는 안된다는 규범들이 종종 눈에 띤다. 몇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이러한 규범의 실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신라의 진지왕(576∼578)과 유부녀인 도화녀에 관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진지왕이 도화녀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궁중에 불러들여 상관하려 하였으나 도화녀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 거부하였다. 여자가 지켜야 할 바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이니 왕의 위엄으로도 이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이 거부의 이유였다. 이 이야기는, 남편이 있는 여자는 정절을 지켜야 하고 그 정절은 비록 왕이라도 빼았을 수 없다는 관념이 당시의 사회적 도덕적 규범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남편이 없으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고 왕이 물었을 때 도화녀가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한 것을 보면, 남편과 사별한 과부의 경우 남자 관계가 비교적 관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것을 아울러 알 수 있다.

다음에 백제의 개루왕과 도미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개루왕이 도미 부인의 미모에 반하여 그녀에게 수청들게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자, 왕이 그녀의 남편인 도미의 눈동자를 빼고 배를 태워 멀리 추방하였는데, 이를 눈치챈 도미 부인은 끝내 왕의 요구를 물리치고 남편을 찾아 떠났다고 한다. 이는 유부녀가 권력을 앞세운 왕의 강요에 맞서 자신의 정절을 지켰다는 일화로서, 이 역시 부인의 정절이 사회적으로 중시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겠다.

이처럼 당시에 결혼한 여자의 정절이 사회적으로 중시되었다고 하여, 부인들의 부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와 관련하여 처용 부인의 부정 이야기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신라 헌강왕(875∼885) 때였다. 처용의 부인은 절세미인이었다. 처용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역신(疫神)이 그녀를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신하여 그녀와 동침하였다. 그 동침의 현장을 목격한 처용은 분노를 표하는 대신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다. 처용의 넓은 도량에 감복한 역신은 처용의 앞에 굻어 앉고서 잘못을 빌면서 이후로 처용의 모습이 있는 곳에는 절대 나타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처용이 불렀다는 노래는 저 유명한 '처용가'라는 향가이다.

이 이야기에서 자신의 아내를 범한 역신에 대한 분노를 노래와 춤으로 삭이고 용서해준 처용의 처신을 있기 어려운 대범한 행동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유부녀의 부정이 당시에 얼마나 용서될 수 없는 행위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가를 역설적으로 암시받을 수 있다. 또한 처용의 부인을 범한 자를 역신으로 수식하는 등 설화적 형식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그가 처용의 관용에 대해서 감복하고 앞으로 처용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를 용서받은 것에 대해 끝없는 경외심을 나타낸 것이라 여겨질 만하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정절 유지를 위한 사회적 규범은 주로 여성을 규제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혼한 남자의 외도를 규제하는 사회적 규범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는 바이지만, 부여의 풍속에 비추어 볼 때 어느 정도는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 고대사회의 성 문화의 개성은 보다 분명해진다. 즉 결혼 전에는 당사자주의에 따라 자유로운 남녀의 성 관계가 관대하게 용인되고 있었던 반면에, 일단 결혼한 이후에는 부부의 정절을 중시하여 이의 유지를 위한 사회적 규제가 강력하게 가해지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4. 성에 대한 관념과 사회사적 의미

한국 고대사회에 이상과 같은 성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에 대한 사회사적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당시 사람들이 성에 대해서 어떠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먼저 음미해 보기로 하자.

흔히 원시 및 고대사회에서 성은 숭배의 대상이자 일상적 표현의 대상으로 관념되어졌다. 이는 인간을 재생산하는 성의 일차적 기능을 우선적으로 중시한데서 비롯한 관념이라 여겨진다. 생산력이 지극히 미약하던 역사의 여명기에, 인간은 척박한 자연을 개척하여 자원을 산출하는 가장 중요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서, 그리고 보다 풍부한 삶의 영위를 위해서 후손를 번창시키는 일이야말로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였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가진 성이야말로 그들의 생존과 풍요를 보장해주는 신성한 상징적 대상으로 인식되고 숭배되었음직하다.

한국 고대사회에서도 성은 금기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다산(多産)과 풍요를 담보해주는 숭배의 대상으로 생각되었던 듯하다.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상징물로서 성을 표현한 사례로는 멀리 청동기시대에 그려진 울주 반구대의 바위그림[암각화]에 처음 엿보인다. 이 바위그림에는 여러 종류의 물고기 및 짐승 등과 함께 최상단에 남성의 성기를 강조한 인간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자연으로부터 보다 많은 사냥거리를 얻기를 바라는 염원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남성의 성기는 이러한 염원을 상징하는 신앙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성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신라의 토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신라의 토기를 보면, 남성과 여성이 성기를 드러내놓고 노골적으로 교접하는 장면을 토우(土偶)로 만들어 붙여놓은 것이 적지않게 눈에 띤다. 오늘날의 관념으로 볼 때 외설적이기 그지 없는 이러한 성교의 장면을, 일상용구인 토기에 아무렇지 않게 표현했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성을 꺼리기 보다는 일상생활에 가까이 두고 표현함으로써 다산과 풍요를 보장받으려 한 당시인들의 신심(信心)이 잘 나타난 바로서, 그만큼 성에 대한 관념이 오늘날과 크게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을 둘러싼 이러한 신심은 세계 도처에서 확인되는 보편적 현상으로서, 흔히 성기숭배신앙[Phallicism]이라 칭해지고 있다. 우리의 민속신앙을 보면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닮은 바위 앞에서 무언가의 소원을 비는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성기숭배신앙의 유습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소원의 내용을 보면 대부분 득남(得男)을 기원하는 이른바 기자(祈子)에 모아지고 있고, 그 바위의 이름이 흔히 기자암(祈子巖)이라 불리고 있는 것을 볼 때, 오늘날에는 풍요를 기원하는 원래의 신심은 이미 사라지고 그 대신 득남을 기원하는 신심으로 바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득남을 최고의 선으로 간주하는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성기숭배신앙의 내용이 이처럼 바뀌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이를 통해서, 일상에서 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함으로써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성기숭배신앙이 한국 고대사회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기숭배신앙이 크게 유행하는 사회일수록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행위가 더욱 신성시되었을 것이고, 그만큼 잉태와 출산의 주체인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높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잉태와 출산의 행위가 사회적으로 중시되는 이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미혼 남녀의 성적 관계는 비교적 관대하게 용인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고대사회에서 '음란'과 '야합'으로 표현되는 자유분방한 남녀관계가 전개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사회적 조건의 소산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맺음말

오늘날의 문명사회에서도 축제의 장이나 무도회 등을 통해서 남녀 교제와 성적 교섭이 자련스럽게 이루어지는 모습은 간혹 볼 수 있는 바로서, 이를 동이족사회에만 존재한 독특한 문화현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또한 당시 중국인들이 자신의 성 문화와 견주어 이를 '음란'이나 '야합'이라는 말로 비평했던 것 처럼, 우리 역시 오늘날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이를 백안시하거나 외면할 필요는 더욱 없다고 본다. 오히려 그러한 성 문화의 전통이 우리의 먼 고대사회에 있었음을 확인하고 그 사회사적 의미를 살펴보는 한편, 그것이 어떠한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사라지고 금기시되었는가를 탐색해 보는 것이 보다 온당한 태도가 아닐까 한다.

이런 면에서 이 글이 이 문제에 대한 사학계의 관심을 조금이나마 환기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게재 : {박물관연보}6, 목포대 박물관,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