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주차-1 [발제 1][발제 2]


고대사회인들의 삶

1. 음식

옛날로 갈수록 식량 획득은 쉽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농경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원시인들은 채집이나 사냥을 통해 식량을 얻었다.이러한 원시인들의 생활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낭만적 일지도 모르지만 필요한 식량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식량 확보문제는 당시의 인간들을 짓누르는 짐이었을 것이다. 고대사회에 이르러 농업이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였던 것이 사실이지만 식량 확보는 대다수 일반민들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과제였다. 그럼 이제부터 인간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식생활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고대사회의 실상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우리나라의 고대인들 즉 우리 먼 조상들의 음식생활은 어떠하였을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고 있는 쌀을 고조선이나 삼국시대의 사람들은 쉽게 대할 수 없었다. 벼 는 한강유역에서는 이미 기원전에 재배되었고 금강유역, 낙동강유역 등 남부지방에서도 일찍 부터 재배되고 있었다. 하지만 삼국시대까지도 쌀은 일반민들이 흔하게 먹을 수 있는 곡식이 아니었다.고구려지역에서는 쌀이 더욱 귀하였고 백제나 신라에서는 벼 재배를 국가에서 적극 권장하고 있었지만, 쌀은 왕이나 귀족들이 먹는 귀한 곡물이었고, 일반민들은 보리와 콩, 조, 밀을 주식으로 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곡식들은 숱한 개량과 변화를 거친 오늘날의 곡식과 같 이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2) 반찬은 어떠했을까?

가장 궁금한 문제의 하나는 과연 그때에도 김치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김치는 고조선이나 삼국시대에도 있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식탁에서 대하는 김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고추는 조선시대 때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는만큼, 오늘날 먹고 있는 김치의 담 금 방식은 조선시대에 확립된 것이다. 고대사회에는 배추가 널리 재배되지 않았다. 따라서 배추김치가 김치의 주종을 이루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김치를 담글 때 없어서는 안되는 양 념인 마늘도 그때는 널리 재배되지 않았다. 우리가 먹는 마늘은 한(漢)대 이래 서역과 교류 를 가지면서 중국에 들여와 보급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우리의 경우는 그보다 더 늦은 시기 에 들어왔을 것이다. 김치 외에도 각종 이 담가져 양념으로 혹은 반찬으로 사용되었다. 채소류 이외의 반찬 재료로는 물고기나 각종 짐승이 있었다. 조개류는 식용으로 널리 이용되 었는데, 김해나 백령도 등에서 보이는 패총(貝塚)은 조갯살을 먹고 버린 껍질이 쌓인 것으로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식용으로 널리 이용된 가축으로는 돼지와 닭이 있다. 돼지는 고구려 건국신화에 등장하고 닭은 신라 김씨의 시조설화에도 나올 만큼 친근한 가축이었다. 특히 돼지는 고구려의 경우 국가 제사의 제물로 사용되고 있었다.

3) 음식상이나 식탁은 있었을까?

삼국시대까지도 일반민들 대다수는 잘 다듬어진 평평한 온돌방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지 않 았기 때문에, 주거조건에서부터 일률적이고 안정된 상차림 양식이 존재했다고는 추정하기 어 렵다. 물론 귀족이나 부자들은 좋은 집에서 식탁이나 밥상을 갖추어 식사하였다. 그리고 신 라나 가야 등에서는 높은 식탁이 사용되지 않았다. 이 나라들이 있던 지역의 유적에서는 높 이가 수십 센티미터 되는 그릇이 받침대가 흔히 출토되고 있어 각 그릇들이 받침대에 의하여 개별적으로 세워져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같은 토기들은 제사용이 나 부장용이었을 것인 만큼 실제 생활에서는 이와 달리 식탁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물론 오늘날에도 가정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것과 유사한 키가 낮은 작은 밥상 도 사용되었다.

cf) 귀족들과 일반민들의 식탁이나 밥상에 차려진 음식의 차이

* 일반민 : 대다수는 일상적으로 보리밥이나 조밥 또는 콩 등이 섞인 잡곡밥을 주식으로 하 고 장국이나 소금으로 간을 하여 끓인 채소국에 김치류 약간으로 식사를 하였을 것이다. 생선이나 민물고기류 그리고 사냥한 산짐승 고기가 드물게 식탁에 오르 기도 하였다.
* 부자나 귀족 : 쌀밥을 주식으로 하고 잡곡밥 등이 가끔 오르고 김치류와 젓갈, 각종 지짐 이나 부침 그리고 돼지나 닭, 사냥한 산짐승류들이 반찬에 올랐다.

2. 옷

1) 시대에 따른 의복의 양상

? 구석기시대 : 구석기인들의 경우 옷감을 짜서 입는다기보다는 자연산 가죽 등을 옷으로 걸 치고 다녔다.
? 신석기시대 : 신석기시대 이후에는 실을 잣는 방추사라는 도구로 섬유를 이용하여 베를 짜 서 입었다.
? 청동기시대 : 권력과 경제력을 크게 확보할 수 있었던 족장과 그의 가족들은 의관(衣冠)을 갖추는 형편에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 철기시대 : 철기시대가 도래하여 국가가 성립되는 단계에는, 지역, 종족의 문화발전 수준, 기후, 생태계에 따라 차이는 있었겠지만, 일반민들도 위아래 의복을 갖춰 입는 정도에 이르렀다.
? 삼국시대 중.후반 : 삼을 길러 삼베를 짜는 일이 일반적인 상황이 되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누에를 쳐서 명주 옷을 만들기도 했다. 국가적으로는 비단을 짜는 수준 에까지 직조술이 발전하였는데, 이러한 비단은 왕실과 일부 귀족 그리 고 중국 등 다른 나라와의 무역에 이용되었다.

2) 삼국시대 의복의 복식형태

? 고구려 : 남자 -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저고리와 바지를 겉옷의 기본 복식으로 하고 저고리는 남자들의 양복 웃저고리 정도의 길이까지 내려오는 긴 저고리이다. 바지의 폭은 약간 헐렁할 정도로 활동에 자유스러웠으며 바지끝은 잘룩하게 좁혀 놓아서 발목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매어지는 양식을 취했다.
여자 - 시중드는 종들이나 무희, 귀족 부인들은 옷감의 질이나 색상 등에는 차이 가 있었지만, 속바지를 받쳐입은 위에 주름치마를 입었고 그 위에 허리띠 를 맨 두루마기를 입었다. 그러나, 일반 평민 여인들은 남자들과 유사하게 긴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를 보았을 때 남녀를 불문하고 고구려 일반민들의 기본복식은 활동하기에 편한 의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3. 집

1) 시대에 따른 집의 양상

? 구석기시대 : 동굴과 같은 자연을 이용하여 거처를 마련했다.
? 신석기시대 : 동굴주거는 사라져가고 움집을 지어 살았다. 이 시대의 움집은 구릉지대에 위 치 했으며 10호 미만의 움집들로 취락(聚落)을 이루고 살았다. 그리고 움집 의 크기는 보통 약 10평 내외였다.
? 청동기시대 : 여전히 움집에서 살았지만 이 시기의 움집은 신석기시대에 비하여 집의 모양 이나 구조, 크기 등이 바뀌었다. 집의 규모 뿐만 아니라 한 마을을 이루는 집들의 숫자도 크게 증가했는데 이는 정치적인 지배, 피지배 관계의 성립과 국가가 등장할 기반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 철기시대 : 종래의 움집에 벽채가 보강되고 지붕이 지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계 층이 구분됨에 따라 지배층은 완전한 지상가옥을 짓고 살게 되었다. 고대국가가 성립되는 시기에 지배층은 주로 수도에 모여 살면서 철기 문화와 농업의 발달로 혜택을 입으며 넉넉하게 살았다.
? 삼국시대 : 왕실을 위시하여 수도에 거주하는 지배층들은 일반적으로 지상가옥에서 살았다 고 보이며, 이러한 상황은 지방의 유력가나 부자들 나아가 일반민들에게까지도 점차 확산되어가는 추세였다. 또한 이 시기에 온돌(溫突)이 등장한다.

4. 생업

? 어업 : 고기잡이 도구로 사용한 낚시바늘과 돌이나 철기를 나무 끝에 매어서 쓴 작살과 그물 을 보았을 때 어업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개도 많이 잡았는데 조갯살을 먹고 버린 조개껍질의 무더기들이 강의 하구나 해안, 섬 등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 농업 : 고대사회가 지속되어갈수록 농업이 생업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고대사회의 농작물 중에서 오히려 벼는 부분적으로 재배되다가 점차 확산되어 가는 추세였으며 보리나 콩, 조 등의 농사가 먼저 성행했다.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신라보 다 앞서 철로 된 쟁기 보습이 농경에 사용되었고 소가 농사에 이용되었다고 보인다. 신라의 경우에도 6세기 초에 이르면 지증왕의 명령으로 소를 이용한 논밭갈이가 보급 되었다. 삼국시대 중, 후반에는 삼국의 각 나라에서 농업이 국가적으로 크게 권장되 었다. 많은 저수지가 마련되어 벼농사가 크게 보급되었으며 지금도 농촌에서 사용되 고 있는 쇠로 된 낫이나 삽, 괭이, 호미 같은 전통적인 농기구가 만들어져 농사에 거 의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 상업 : 사료에 의하면 상인으로서 구체적 모습을 가진 이로는 <삼국사기> 중 미천왕본기에 나오는 소금장수 을불이 있다. 또한 선화공주와 결혼한 맛동의 이야기에서도 마를 팔 러다니던 장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소금이나 마른 생선, 그리고 기타 식 품이나 바늘등 간단한 소비재를 팔러 다니는 소상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업 을 통하여 그 이윤으로 살아가는 자는 극소수였으며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주민들이 한 곳에 정착하여 농업에 전념하는 것이 국가재정을 위해서나 인력동원, 주민통제 등 에 유리했기 때문에 상인은 농민에 비하여 국가로부터 천시를 받았다.
? 수공업 : 수공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왕실이나 귀족 및 관리들의 생활을 위하여 각종 소비재 를 생산하고 무기나 농기구, 종이 그리고 기타 생필품 등을 생산하였다. 수공업자 들의 대다수는 그들이 만드는 특산물의 원료가 풍부한 지역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면 서 일반 농민들과 달리 보다 강력한 국가의 통제 속에서 대대로 같은 업종에 종사 하여야 했을 것이다. 이들이 사는 곳을 부곡(部曲)이나 소(所)라고 한다.
? 연예인이나 예술가 :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는 이, 이외에 왕의 무덤에 벽화를 그리거나 절을 장식하는 데 동원되던 화가나 조각가, 건축가들 은 국가에 소속되어 있었다.

5. 세금

1) 고대사회의 세금

? 고조선 : 고조선 말기에 이르러 고대국가가 성립된 상태에서는 범금8조(犯禁8條)를 보면 세 금의 존재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 삼국시대 초반 : 왕이 국가를 지배하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나 집단을 위하여 세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공동의 부담을 지는 경우가 없지 않았 다. 이때에는 생산력이 아직 크게 발전하지 않아 주민간의 빈부차이가 크 지 않았으며, 주민들은 균등한 액수를 부담하게 되었을 것이다. 세금은 권 력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수취되는 재화나 재물이기 때문에 고대국가가 성 립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군사, 경찰력이 마련되어 각종 경제적 부담을 강제적으로 그 주민들에게 집행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서 그 존재가 드러 나는데 이는 길쌈시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 삼국시대 중반 : 왕의 권력이 강화되고 지방에도 서서히 관료가 파견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이로인해 종래 족장이나 이에 준하는 자들이 주민들을 통치하고 세금을 거 두어 집단별로 국가에 세금을 내는 일에 변화가 있게 되었다. 관료들은 지 방에도 일부 파견되어 이제는 종래의 토착적 지배체제를 국가의 통치체제와 병존케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주민들은 왕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들어 가게 되었다. 이때까지도 여전히 집집마다 같은 양의 세금을 내었다
? 삼국시대 후반 : 이 시기에 이르면 농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세금제도도 체계화되어 갔다. 즉 농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의 발전이 가속되고 결과 빈부의 차이가 생기게 되 고 이에 따라 세금의 양은 차이를 두게 된다.

6. 군역과 부역

1) 군역

고대국가 초기에는 지배층의 남성들만이 병사로서 싸울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국가건설의 주 축이 되는 부족이나 집단의 장정들이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을 자신들의 명예로 여겼기 때문 이다. 고대국가가 성립한 후에는 국가체제가 갖추어지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제는 단 순한 혈연이나 지연적인 차이에 의해 주민간에 차별이 있었던 전 단계의 상황이 극복되어갔 다. 한편 수탈전쟁이 증가함에 따라 군대 보강의 필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이에 5부민이나 6 부민 같은 王京民뿐만 아니라 지방민들도 군인이 되어야했다. 대체로 15세 이상의 남자들은 신체상 크게 이상이 없는 한 군대에 갔다. 이렇게 일반민들이 전쟁의 주담당자로 등장한 사실 은 여러 면에서 역사적인 동기를 살펴 볼 만한데 이같은 일이 지배층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 만큼 피지배층 일반의 입장에 대하여 고찰해보면 처음에는 대부분의 피지배층은 전쟁을 피하 고 싶어했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점차 공동운명체로서의 인식 이 자라고 따라서, 생명 이외에 또 다른 지킬 것을 갖게 된 民은 이제 국가를 함께 지키는 일 에 일괄의 자발성 조차 보이게 되었다. 신라의 화랑도, 고구려의 경당에서 글과 무술을 닦는 청소년들, 그리고 계백 5천결사대 모두 이같은 맥락에서 국가를 공동운명체로서 인식하였기에 국가를 수호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2) 부역 : 무상의 국가적 노역

* 부역의 대상 : 15세에서 60세 까지의 남정들은 부역에 동원되었다.
* 인력동원 : 고조선이나 삼국시대 초까지만 해도 일이 있으면 해당지역에 사는 15세 이상의 장정들이 모두 동원되어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일하였다. 하지만, 삼국시대 후반 에 가서 많은 공사를 수행했던 경험과 행정경험이 축적되어 어떤 일에는 얼마만 한 인원이 며칠간 일하면 되는지 알 수 있게 된 것만큼 이제는 15세이상의 남정 을 모두 동원하여 기약없이 일하는 단계는 벗어나게 되었다. 법정부역기간을 고 려하여 소용되는 인원만을 정확하게 공사에 동원했다.
* 실시 시기 : 봄(음력 1-3월)과 가을(음력 7-9월)에 실시되었다. 음력 2월은 땅이 풀리고 아직 농사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에는 이른 시기였고, 7월은 일년 농사에서 힘든 일 이 일단 끝나고 추수를 기다리던 농한기였기 때문에 인력동원이 용이했다.
* 봄 : 무너지거나 패인 저수지의 둑을 손질하여 시작될 농사에 대비하였다.
가을 : 추수 후에 들이닥칠 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성을 손질하였다.

7. 즐거움

1) 생의 즐거움

왕과 귀족, 관리들은 일반민에 비하여 더 많은 육체적, 물질적 즐거움을 부와 권력을 통해 얻 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 중의 경건한 자들은 학문이나 예술 등을 통해 보다 고상한 정신적 즐거움을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자식이 잘 자라주고, 부부간에 금술 이 좋은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또 배불리 먹는 것, 평화롭게 사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이었다.

2) 축제

* 부여의 영고 : 은나라 달력으로 정월(지금의 12월에 해당)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연일 먹 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 큰 모임이었다.
* 고구려의 동맹 : 나라 안의 동쪽에 있는 구멍(?굴)에서 신을 모시고 와 제사를 지냈다. 부여 국의 경우와 같이 먹고 즐기는 일은 역시 있었을 것이다.
* 동예의 무천 : 10월에 행해지는 제천행사였다.
* 삼한 : 5월에 파종을 마친 후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떼로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며 주 야로 술마시기를 계속하였고 10월에 농사를 마친 후에도 이같이 하였다.
* 고대축제의 특징
? 제사와 잔치로 이루어졌다.
? 잔치를 통하여 음식을 나누고 같이 춤추고 노래하는 데서 성원들의 일체감이 한층 고양되었 다.
* 축제의 변화 : 고대국가가 성립됨에 따라 지방족장 등이 중앙귀족으로 편제되어 수도를 이전 하거나 지방에서 지배력을 상실케 되면서부터 지방민들은 지방관의 통치를 받 는 입장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지방민들은 과거에 그 지방의 읍락국가를 건설 하면서 천신족으로 짐짓 행세하던 지배층이 주도하여 지낼 수 있었던 天에 대 한 제사는 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축제의 규모도 촌단위의 축제로 작 아지고 주민들은 그들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의식을 행하게 되었을 것이다.

제2장 결혼

1. 성장

어린이는 동서양을 막론한 고대나 중세사회에서 어른의 소유물과 같은 존재였다. 고대사회에서도 이같은 사항은 마찬가지 였다. 따라서 어린이의 성장사를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나 어린이가 주인공으로 되어 있는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기는 어디에서 낳았을까? 평범한 사람들의 아기는 난방시설도 잘 되어 있지 않은 움집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 결혼한 부부는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부인의 집에서 살았다. 따라서 이 경우 아이는 외가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고구려 이외의 나라들의 경우에는 어떠하였는지 알수 없는데 민간에서는 이같은 일이 흔히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이 붙여졌다. 조상들 누구와 닮았다 하여 그 조상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름은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물이나 조상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후반에 오면 일부 사람들은 중국의 역사나 불교설화 등에 나오는 사람의 이름을 본따서 이름을 짓거나 뜻을 생각하여 짓기도 하였다.
평범한 농민의 자녀들은 대부분 성장하여 결혼을 하기 전까지 움집이나 초가에서 부모나 조부모와 한방에 살았다. 당시의 경제력과 기술수준에 따른 취약한 주택구조나 난방능력 등으로 보아 아이들이 자신들만의 방에서 거주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들은 많은 시간을 노인들과 함께 보냈을 것이다. 청장년들은 농사나 사냥, 열매 채취나 국가의 부역 등에 나가는 시간이 많았던 만큼 아이들은 조부모 등의 보호를 받고 자라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성장하여 노동능력이 생겼을 경우 아이들은 부모를 도우면서 농사일을 익혀갔다.
아이들은 자라는 도중에 비슷한 나이 또래끼리 잘 어울렸다. 또래끼리 모여 사냥을 하기도 하고 무예를 닦기도 하였다. 이것을 사회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고 조직화했던 것이 화랑도인 것이다.

2. 사랑

우리의 고대사회에도 가슴이 불타오르는 청춘 남녀들이 있었다. 또 우리의 고대사회에서도 결혼의 전단계로서 당사자간의 사랑에 의한 자유연애는 있었다. 그러면 고대사회에서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자유연애가 일반적이었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결혼에서 자녀들은 부모와 큰 갈등을 겪었다. 고구려의 경우도 부모나 양쪽 집안끼리의 약속 위에서 결혼이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결혼에서 부모나 집안의 의사가 우선시되었다.
그러나 청춘남녀간의 교재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막혀 있었던 것이 아니며, 당시의 사회에서 상당수 실재하였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남녀간의 구분을 강조하던 유교사상이 유입된 지도 얼마되지 않았고 실생활에서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던 만큼 남녀간의 교재는 사회적으로 큰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3. 결혼

15세가 지나면 성인으로 간주되었다. 결혼 적령기는 15세에서 20세를 전후한 시기였다고 여겨진다.
이때가 되면 부모나 양가에서는 자신들의 신분을 고려하여 자녀의 결혼을 약속하고 결혼을 추진하게 되었다. 부모나 양가가 결혼을 목적으로 배필을 찾는 과정에서 당사자들의 견해가 어느 정도 참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남녀간의 교제가 많지 않았을 당시 형편으로 보아 결혼에서 당사자간의 의사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결혼을 해본 사람은 다 아는 일이지만, 청춘남녀간의 사랑과 결혼이란 주위에서 성립되는 쪽으로 몰고갈 경우 대개 당사자들은 이를 즐거운 일로서 받아들이곤 한다. 따라서 결혼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당사자와 부모의 영향이 서로 달라 충돌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대사회에도 근친혼을 피하고자 한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근친혼을 했던 경우도 보인다. 이는 자신들의 혈통을 보존하고 또 혈통의 우월성을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좀 색다른 결합관계도 있다. 그것은 형이 죽은 경우에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것이다. 이러한 풍속은 고구려 초기까지 시행되었다. 이러한 풍속은 남편의 사별에 따른 미망인의 분립이나 친정집으로의 재산 및 아이들과 더불은 귀속을 막는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결혼과정이 『삼국지』동이전에 전해지고 있다. 우선은 부모나 양가의 약속(약혼)이 먼저 있었다. 약혼이 성립되면 신부집에서는 본채 뒤에 작은 사위집을 지어 두고 기다린다. 결혼날이 되면 저녁에 신랑은 신부 집 문 앞에 이르러 자기 이름을 대고 절을 한 후 신부와 더불어 들어가 잠자리를 하게 해달라고 재삼 조른다. 이와 같이 두세 번 조르게 되면 신부 부모는 신랑의 요청을 허락하고 마침내 신랑은 신부 집에서 마련해둔 서옥에 들어가 신부와 첫날밤을 지내게 되었다.
결혼한 부부는 이 서옥에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다 자란 후에야 함께 남편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같이 결혼한 후에 신부가 자신의 집에서 살면서 아이를 낳고 기르도록 한 것은 남자에 비해 결혼 후 변화에 따른 충격이 더 큰 여자에 대한 깊은 배려가 깔려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결혼 후 신부 집게 기거하는 것은 중국과는 달리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도 지속된 관습이었다.

앞에서 고구려 초기에는 신랑 신부를 마주 대하게 하여 치르는 결혼식이 행해지지 않은 듯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료의 형편상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아야겠다. 적어도 삼국시대 후반에는 우리가 상상할수 있는 신랑과 신부를 주인공으로 한 결혼식이 있었던 것 같다.
결혼식은 신부 집에서 거행되었다. 신랑이 신부 집에 찾아가서 이름을 외치던 고구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신라의 경우에서도 확인된다. 백제의 경우도 풍속이나 법도가 고구려와 유사하였던 만큼 세 나라의 형편이 거의 같았다고 보인다.
이같은 결혼방식이나 여자의 집에서 거주하는 주거 풍속이 우리의 고대에 있었던 모든 나라나 지역들에서 두루 시행된 것은 아니다. 나라마다 그리고 시기마다 그리고 지방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이 있었던 것이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지금의 함경남도 지방에 있었던 고구려와 유사한 종족으로 구성된 동옥저라는 종족에서는 일종의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전통적인 풍속을 유지하고 있는 세계 여러 지역의 종족들에서는 흔히 결혼시에 신부값을 신부 집에서 받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신랑 집에서 신부의 지참금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결혼에 패물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에는 신랑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신부 집에 보내고 별도의 패물은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같이 결혼에서 재물이나 예물이 오가지 않는 상황은 신라나 백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같은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고대의 우리조상들은 지역과 종족에 따라서 일부에서 신부값을 지불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오늘날 일부의 남자 집에서 행하는바 과도한 예단이나 지참금을 요구하는 사실은 없었던 것이다. 동옥저에서 시행되었던 신부값 지급의 풍속조차도 삼국시대의 후반에 가면 비루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재물보다는 정성스런 음식물을 오히려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보내는 낭만적이고 순박한 결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결혼 후의 가정생활은 우리가 접해볼 수도 있는 전통적인 농가의 생활 모습을 상상하면 되겠다. 신랑과 신부는 고구려와 같이 신부 집에서 상당기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나라나 지역에 따라서는 곧바로 신랑 집이나 그옆에 움집이나 초가집을 짓고 살았을 것이다.
부인네들은 서로를 부를 때 지방이나 가정에 따라서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 친정집이 있는 지방명을 붙여 그 호칭으로 하였다. '김포댁', '안성댁'하는 등의 호칭법과 유사하였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댁'이라는 용어가 그때도 사용되었다고 확신할수 없지만 사용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여겨진다.

부부간의 결혼생활을 지탱케 한 원동력은 강조할 필요없이 부부애에 있었다. 그러나 인간들의 사회인 이상 부부간에도 갈등은 있었다. 첩을 얻은 남편에게 투기하다 처형되는 가련한 여인도 있었으며, 어떤 이유에서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다가 사람들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여인들도 있었다. 부여나 고구려의 관습법은 여인의 투기나 간음에 대하여 실로 엄격하였다. 지금의 만주 송화강 유역에 있었던 우리 조상의 나라 중 하나였던 부여국에서는 간음한 남녀나 투기하는 여인을 모두 죽였다. 특히 투기를 엄격히 다스렸는데 투기한 여인은 죽인 후 시체를 산 위에 매달아놓았다.
그런데 대다수 평범한 여인들에게는 이같이 여성을 차별하고 있는 공포스러운 법이 집행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 상황이 발생할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훨씬 적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농민들의 대다수는 둘 이상의 처를 부양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의 평범한 조상들은 진솔한 사랑을 나누며 살았다. 사심없고 질박한 조상들의 부부애는 고대사회를 지탱하고 우리에게까지 핏줄을 전하는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제3장 죽음

1. 수령

고대인들은 평균수명이 오늘날보다 훨씬 짧았을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유아사망률이 높았을 것이며 부족한 영양상태도 사람들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빈번한 전쟁도 위협적 요소였다. 그러나 일단 유아기나 아동기를 무사히 지나면 장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다수의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가난과 질병 그리고 노동에 크게 시달려 쉽게 노쇠해갔던 것이다. 대게 15세이상 60세 정도까지를 장정이라하여 나라의 부역이나 군역에 동원하였지만 통일신라의 자료인 촌락문서로 불 때 노인의 비중은 작았다.

2. 사후관

사후세계에 대한 고대인의 관념이 어떠하였나를 살펴보면 이들은 이 세상과 사후의 세상이 단절되었다고 보기보다는 지속된다고 여겼다. 다시말하면 사후 세상이 이 세상에 이어지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이같은 사후관에서 무덤은 집으로 여겨져, 왕이나 귀족들의 무덤에는 방이 설치되고 그곳에 시신을 두었던 것이다. 무덤 안에는 각종 곡식이나 보화, 그릇등 생시의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나 재산이 되었던 물건들이 함께 묻혀 있는데 이러한 사실도 고대인들의 사후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대인들은 이같이 이승과 저승이 계속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만큼 자연히 죽은 후에도 살았을때와 같은 가족관계가 지속된다고 보았다. 동옥저에서는 온 가족을 큰 곽 하나에 묻었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이나 귀족들의 무덤에서는 부부를 합장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고대인들은 저승에서도 가족관계가 지속된다는 관념을 가졌던 만큼, 사후에는 당연히 이미 죽은 조상들과 다시 만나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죽은 조상들 특히 위대한 이들은 자연히 살아 있는 후손들과 연결될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어 후손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있는 신앙의 대상이되어 신으로 추앙을 받은 것이다.

고대인들은 저승이 어디에 어떻게 있다고 생각하였을까? 자료의 형편성 짐작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저승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인 체계를 가진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사후 세계는 이승의 연장이라고 보았던 관념은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서서히 변해갔다. 불교가 신앙시 되면서는 종래의 사후관에 윤회사상이라는 보다 조직적인 관념체제가 가미되어갔다.

죽으면 자연히 가게 되어 조상들과 만나게 되는 이승의 연속으로서의 저승이 아니라, 이제는 살아서 선한 일을 많이 하여 다음 세상에서는 보다 더 좋은 신분이나 처지로 태어나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우리의 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미 죽은 조상들의 세계 그리고 자기가 옮겨갈 세계로서의 저승은 이승의 연속이라고 생각했던 만큼, 저승에 있는 죽은 자들과 이승에 살아있는 자들은 특별한 경우 연락을 취하고 살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무시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꿈이나 무당을 통하여 저승에 있는 선조들의 전달을 들었던 것이다. 후손이 위기에 처하거나 사회적으로 큰 변화나 갈등이 있을 때, 저승인들은 조상으로서의 권위로 후손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들의 뜻을 전했다.
이것은 오늘날과도 같이 무당들이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기능을 하였음을 보이는 동시에 저승의 일도 마치 이승의 일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던 당시인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3. 상례

사후 세계에 대한 고대인들의 관념이 공포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고 하여도, 호흡이 중단되고 몸이 썩어가며 살아있는 자들과 결별하는 죽음은 당사자는 물론 산자들에게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슬픈 인간사였다.
이같이 죽음은 슬픈 일이었기에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도 그를 곧바로 매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죽은 자를 언제까지나 산자들 가운데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에 상례가 형성되어 죽은 자를 매장하고 그의 죽음에 대하여 일정기간 상복을 입어 애도하게 되었다.
부여국의 경우 적어도 귀족들은 사망후 5개월이 지나야 매장하였다. 부여국에서는 겨울에 채취하여 지하시설이나 굴 속에 보관해두었던 얼음을 이용하여 여름철에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5개월동안 남녀 모두 흰 옷을 입었으며 부인들은 포로 얼굴을 가리고 패물 등은 패용하지 않았다 한다.
고구려의 경우 죽은 후 3년간 집안에 관을 두었다. 그후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냈다. 부모나 남편의 상에는 3년간 상복을 입었으며 형제의 경우 3개월간 복을 입었다 한다. 백제의 경우도 유사하여 시신을 3년정도 두었다가 매장하고 부모나 남편의 상에는 역시 3년간 상복을 입었으며 여타 친척의 상에는 장례를 마치면 곧 벗었다고 한다. 신라의 경우는 왕이나 부모, 처자의 상에 모두 1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는 사실이 전한다.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신라는 상례에 있어서 보다 전통적인 면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가난한 일반 백성들은 이같은 상례를 지킬수 없었다. 따라서 가난한 백성들은 훨신 간소하게 그리고 짧은 기간안에 장사를 마쳤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이외에 우리 고대인들의 장례 풍속에서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를 지적한다면 장례를 후하게 치렀다는 것이다. 마한의 경우는 소와 말을 장사지내는데 제물로 쓴 듯하며, 부여나 고구려의 경우도 금, 은과 패물들을 부장하였다고 한다.
죽은 이에게 너그럽게 대하는 풍속은 고대사회 이래 지금까지도 우리역사에 면면히 존속하고 있다.

고대 영남지방의 순장

머리말

순장이란 죽은 사람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죽여서 함께 매장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이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강한 지배 예속 관계를 보여 준다.
순장이 실시된 지역은 광범위하다. 이집트와 근동 지방, 스키타이, 가까이 에서는 중국에서 순장이 실시되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三國志]에 부여의 순장 사실이 [三國史記]에 신라의 순장이 금지에 관한 기사가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문헌에는 없지만 伽倻地城의 고분 발굴 과정에서 많은 순장의 예가 확인되고 있다고 한다.

一.순장의 개관

1.순장의 필요조건

매장유구를 순장묘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우선 동시성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이는 主被葬者와 被殉葬者는 동시에 매장되어야 한다. 다음 조건은 강제성이다. 被殉葬者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로 죽임을 당하고 순장 당하여야 한다. 물론, 자발적으로 殉死, 혹은 殉葬당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은 순장의 본래적인 형태가 아니고, 殉死, 殉葬을 당연시, 미덕 시하는 사회적 관습의 지속적인 세뇌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로 판단된다. 강제적인 순장을 진정한 순장이라고 간주하고 자발적인 순사도 이들의 사회적 처지는 主被葬者에게 강하게 예속되어 있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종속성을 들 수 있다. 被殉葬者는 主被葬者에게 종속되어야 한다.

2.殉葬과 奴隸制社會論

신라와 가야의 순장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신라와 가야에 선행하였던 고조선과 부여, 병행하였던 고구려와 백제의 순장 실시 가능성, 그리고 이를 둘러싼 논의를 정리하면서 신라와 가야에 대한 분석의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

가)고조선

고조선의 순장 사실을 알려주는 문헌 기록은 없다. 하지만 순장이 실시되었을 개연성은 있다. 근본적으로 [漢書] 地理志의 범금팔조에 보이는 사유 재선의 존재, 보호와 더불어 노예제도가 있었는데 이 노예가 바로 순장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는 집단이다. 이로 볼 때 고조선 사회에서 순장이 실시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나)부여

부여의 경우는 순장이 실시되었다는 자료가 있다.

基死 夏月皆用氷 殺人殉葬 多者百數 厚葬 有槨無棺 <三國志>

死者以生人殉葬 有槨無棺 <晉書>

첫 번째 자료는 부여 사회 전체의 기사가 아니고 일부 귀족층에 관한 기사로 보인다. 두 번째 자료는 순장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다.

다)고구려

고구려에는 순장 사실을 전해 주는 문헌 자료는 없다. 순사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순장과 순사는 엄밀히 구분되나 그 의미는 일맥상통할 것이므로 순사가 있었으므로 순장에 대한 약간의 유추는 가능할 것이다.

라)백제

백제의 경우도 문헌상의 자료는 없다. 다만 고고학 자료 중 순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약간의 실례가 있다. 서울 석촌동 3호분 동쪽에서 조사된 대형토곽묘에 8기의 목관이 발견되었는데 피장자문제는 쉽게 단정하기 곤란하지만 순장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만을 제시하고자 한다.

二. 신라와 가야의 순장

1.신라

신라의 경우 문헌적 기록으로 三國史記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三年 春三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 男女各五人 至是禁焉
이로써 6C 이전단계에 新羅王室에서는 순장이 공식적으로 행하여 졌으며 순장 당하는 사람은 남녀 각 5인, 즉 10인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6C이전 신라 왕실의 主墓制는 積石木槨墳이므로 순장의 사실도 여기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고고학적 자료로 먼저 순장의 실시가 확인된 것으로는 皇南大塚 南墳을 들 수 있다. 木槨내에서 발견된 60세 전후의 남성인골과 15세 전후의 여성인골은 전자가 主被葬者이고 후자가 被殉葬者일 가능성이 크다. 부장품의 질과 량으로 볼 때 남분의 주인공은 왕족일 가능성이 크고 북분의 주인공은 그의 부인으로 정실부인이 아닌 첩일 가능성이 높다.
慶州 月城路 古墳의 가-13호분에는 내부에 5인이 매장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목관이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 고분의 피장자인 5인은 내부 구조상 동시에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의 대도와 금제장신구로 보아 높은 신분의 무사 계급으로 보여진다. 이들이 동시에 매장된 이유는 우선 전쟁에서 동시에 사망했을 가능성과 순장의 가능성이다. 이 고분에서 직접적인 인골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사인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유구의 구조를 완전히 파악하기 곤란하고 주변의 다른유구와의 관계도 불분명하다는 단점을 안고 있어 위의 두 가지 가능성중 어느 것이 사실에 가까운지 속단할 수 없다. 다만 가-13호분 자체가 다른 고분에 대한 순장묘로 간주하고 이 고분의 피장자 5인을 모두 피순장자로 본다면 三國史記의 앞에서 말한바 있는 남녀각오인을 순장하였다는 자료와 일단 수적으로 일부 부합된다. 그럴 경우 이들은 무사적 신분으로 주인공을 호위하던 상당히 높은 신분의 자들로 규정할 수 있다. 여성들도 신분적으로 이와 큰 차이가 없을 것이며 직능면에서 주인공을 시종 하던 자들로 볼 수 있다. 이 묘를 순장묘로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만약 그렇다면 被殉葬者의 신분 규명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신라 중심부에서 벗어났지만 영덕 영해면 귀시동에서도 순장의 실시가 확인됐다. 主槨은 남북 장축을 띄고 있고, 北槨에는 다수의 부장품과 被葬者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南槨의 경우도 북곽의 경우와 유사하다. 남·북곽은 순장곽으로 추정되고 신라의 순장이 중앙에서만 국환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경산 임상동, 조영동고분군은 넓은 의미에서 신라권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많은 유구가 발굴 조사되었으며 그중 정식 보고서가 발간된 것은 조영동1A지역뿐이다. 순장의 분명한 흔적이 확인된 19호분의 구조는 主室과 副槨을 융벽으로 구분한 장방형의 木槨墓이다. 주실에는 목곽 내에서 3구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주피장자로 생각되는 1인과 그의 발쪽의 2인이 頭向을 함께 하고 안치된 형태이다. 부장품은 주피장자에 착용되어 있고 피순장자는 유물이 없이 안치되어 있다.

이 외에도 순장과 관련된 대략적인 상황을 추측할 수 있는데 피순장자의 수는 2-3인 정도이고 이들의 신분은 인골출토상황, 주피장자나 부장품과의 배치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주실에 함께 묻힌 피순장자의 경우 두향을 주피장자와 반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간에 차등을 두려 했던 의도를 느낄 수 있으며 주실에 주피장자와 함께 묻힌 피순장자들과 부곽에 묻힌 피순장자들간의 차이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피순장자들이 가지고 있는 장신구의 수준으로 그들의 신분을 규명에 기준을 둘 수 있다. 부곽에 묻힌 피순장자들은 부곽에 있는 물건들과 동일한 취급을 받았거나 이를 관리하는 입장의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피순장자는 수적인 면에서 三國史記에 명시된 10인에는 훨씬 못 미치지만 이는 경주의 것과 비교했을 때 부장품의 질적차와 마찬가지로 보인다. 피순장자들은 아무 부장품이 없이 무친 경우 노예로 볼 수 있고 나머지 경우 보호, 호위, 시종 하던 자로 여겨진다.

횡구식석실분인 부부총에서는 시상위에 부부1쌍이 시상 아래에는 3인이 두향을 달리하고 안치되어 있다. 부부의 경우 남편이 먼저 매장되고, 부인이 후에 추가장되었으며 아래 3인은 부부와 두향을 다르고 부장품의 량과 질 차이도 현격한 차가 난다. 따라서 3인은 부부보다 훨씬 낮은 자로서 피순장자일 가능성이 크다. 황구식석실분의 경우 추가장을 염두에 둔 구조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묘제의 등장 이후 순장과 추가장을 판별하기가 곤란함은 사실이다. 하지만 추가장이 나타나면서 바로 순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양자는 일정기간동안 공존했을 것이다. 부부총의 경우 시상 바깥쪽의 3인은 시상위의 부부와 부장품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시상위의 인골을 밀쳐 내지 못하고 현실 바닥에 그대로 놓여 있다는 점등을 고려할 때 순장일 가능성이 높다.

小結

신라에서의 순장은 중앙과 지방 모두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시기적으로는 5C∼6C, 묘제상으로는 적석목각분과 목곽묘, 그리고 횡구식석실분에서 발견되고 있다. 신라에서의 피순장자의 수는 문헌상으로는 10인, 고고학적 자료상으로는 5인 이하이다. 고대보다 수적인 감소와 함께 피순장자의 신분면에서도 중대한 차이가 추출된다. 노예에서 주피장자의 근시적 존재로 바뀌어 갔다. 경산의 임당지성고분군의 피순장자들은 부장품을 소지한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으로 양분되는데 후자는 전자보다 열등한 지위에 해당되는 자들, 나아가서는 노예적 처지의 인물들로 볼 수 있다. 횡구실석실분의 경우는 추가장을 염두에 둔 묘지이기 때문에 순장여부를 속단할 수 없는 경우도 있으나 정황상 순장의 농후한 것들만 적출한 것이며 이 역시 앞으로의 자료의 증가를 기대한다. 공식적으로 순장이 금지되는 시기와 추가장의 실시 시간이 시간적으로 괴리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중앙에서의 순장 금지령이 지방까지 신속하게 파급되지는 못하였을 것이고, 6C 이후에도 일정 기간 순장은 지방 사회에서 잔존하였을 것이다.

2. 가야

가야의 순장에 대한 문헌자료는 없지만 고고학적 실례들은 아주 풍부하다.

實例

금관가야의 중심고분군인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는 순장묘가 확인되고 있는데, 순장이 확인된 것은 목곽묘이다. 부산시 동래구 복선동고분군에서도 순장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합천 옥전고분군에서는 사슴뿔이 나온 것으로 보아 사슴을 순장한 흔적으로 이해된다. 고령은 대가야의 본거지로 지산동고분군은 대가야 최고층의 묘역이다. 시기적으로 5C 후반에서 6C 전반에 걸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중 44호분은 지산동고분군중 대형급에 속하고 여기에는 30인 내외의 사람이 순장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석곽사이에 말의 치아가 있는 것으로보아 말의 순장사실도 확인된다.

小結

가야의 순장예는 4C∼6C전반에 걸쳐 있으며 墓制上으로는 木槨墓, 竪穴式石室墳, 橫口式石室墳에서 발견되고 있다. 가야의 거의 전역에서 순장이 확인되고 있는데 대개 가야 소국의 최고지배층이 순장 시행의 주된 집단으로 보인다. 왕족 외에도 순장을 행하였고 정치, 경제적 서열에 따라 피순장자의 수와 대상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순장의 유형은 주피장자와 같이 매장된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로 구분한다. 전자의 경우는 주피장자와 두향을 달리하거나 발쪽에 위치해 양자 사이에 차등을 두고 있다. 후자의 경우는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자신만을 위한 매장 시설을 갖춘 경우는 비록 순장을 당하기는 했지만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의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이다. 토기 물품과 함께 묻힌 경우는 물품 관리자이거나 물품과 같이 취급된 경우로 보아진다. 가야의 경우는 피순장자가 대개 5인을 초가 하지 않는다. 신라 지역과 공통적으로 피순장자의 수가 줄어들고 그들의 신분의 상대적 상승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이는 대규모 자원이 순장으로 소모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 된 사회적 변화에 기인할 것이며 이는 기본적으로 생산력의 발달에 의하여 인적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三. 순장의 소멸과 토용의 등장

1. 토용의 등장

1)土偶와 土俑

俑은 본래 순장의 대체물로써의 성격이 명확한 용어이고 偶는 일반적인 의미의 인형이나 허수아비의 의미를 갖고 있다. 토용의 정의는 흙으로 만든 塑造物로 사람을 형상화하여 무덤에 부장하는 일종의 明器라고 할 수 있다. 토우는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이해된다.

2)토용 예

장산 토우총, 황성동 석실분, 용동강 석실분 등에서 토용이 나타나고 있고 이들의 공통점은 슬픈 표정을 짓거나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고 행위면 에서는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무릎을 꿇고 절하고 있다. 이런 행위는 주피장자에 대한 정중함과 애도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2.순장의 대체물로서의 토용

토용의 등장배경은 순장의 소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토용의 등장은 출토지가 분명한 대부분의 경우가 통일 신라 시기이다. 반면 순장이 신라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이 智證王 3년이다. 이사이의 공백은 출토지가 불분명한 토용들이 메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순장을 대신해 토용이 사용된 동기은 무엇일까? 순장의 시행을 해당 사회의 성격으로 본다면 삼국은 장기간의 항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경제 기반을 튼튼히 하여야 했고 이를 위해 호민·가계층과 노비·하호층사이의 노예제적인 관계가 조정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후자의 지위가 향상되면서 순장제가 점차 약화, 폐기되었다. 또 다른 측면으로 순장 실시를 전쟁의 격화에 따른 노예 공급의 원활화와 人身共犧思想의 유행으로 보면 순장의 폐지는 노예의 감소와 人身供犧思想의 쇠퇴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맺음말

신라와 가야를 중심으로 순장의 실시와 토용의 등장 배경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국 고대사에서 순장의 의미는 주피장자와 피순장자간의 지배 예속 관계를 극명하게 나타내기 때문에 순장 실시 여부가 해당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원시사회부터 통일 신라까지의 순장이라는 틀로 단계 지워 본다면 순장이 행해지지 않던 단계, 고조선에서 부여에 이르기까지 순장이 대규모로 행해지던 단계, 신라, 가야의 6C 초인 순장 규모 축소와 대상이 바뀌는 단계, 신라 智證王3년에 순장이 금지되면서 용이 이를 대체하는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footleft.gif (3017 bytes)

메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