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주차-2 [발제 1][발제 2]


고대사회의 이데올로기

1. 이데올로기와 신화

신화의 발생과 기능

사회가 여러 계급으로 나뉘면서 집단과 집단 또는 집단 내의 가부장적 대가족 사이에는 경제적 우열의 차이가 발생하였다. 이는 사회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정치적 권력의 등장으로 이어졌고, 집단간의 통합을 거쳐 국가가 성립하면서 그러한 불평등은 제도화하였다. 크고 작은 집단이 세력의 위계적 질서에 따라 편제 되면서 위계적인 사회질서가 수립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정치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사회질서는 지배층이 만들어내고 유포시킨 신화에 의해 이념적으로 뒷받침되었다.

지배층은 자신들의 지배가 필연적이고 영속적인 것임을 알리기 위하여 지배층 중심의 이념을 만들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신화였다. 자신들의 시조신(始祖神)에 대한 신앙을 모든 피지배층에게 유포함으로써 이것을 지배이데올로기화하였다. 세력권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여러 세력 집단의 신화가 그 하위 체계에 편입되어 섞이면서, 시조신이나 영웅에 대한 신앙은 보다 풍부한 내용과 복잡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한국 고대사회의 신화는 대부분 '신조신화' 혹은 '건국신화'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지배 세력의 성격과 이념적 지향을 비교적 잘 담고 있다. 신화에 근거할 때 단군이나 해모수. 주몽. 박혁거세.김수로 등은 하늘 혹은 천제의 권위를 현실의 인간 사회에서 대행하는 신적인 존재인 셈이다.

지배층의 중심을 이룬 세력 집단의 시조나 영웅이 신적인 존재로 나타났다면, 주변 군소 세력의 시조는 이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존재로 바뀌어 건국신화 체계에 편입되었다.

신의 권위를 대행하는 존재로 행세하였던 고대사회의 지배자들은 또한 신비스런 능력을 가진 자로 인식되었다. 고대사회에서는 지배자가 지닌 신비스런 능력의 정도가 국가의 안위와 직결되는 것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지배자의 신비스런 능력이 지나치게 약하거나 없는 것이 증명될 경우, 그의 권위는 물론 지배자로서의 지위마저 박탈당하였다.

지배자가 신비스런 능력을 갖춘 존재라는 인식은 곧 그들이 천제의 자손이라는 인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시조신이나 천신을 모시는 국가적 제의를 주관하는 제사장이기도 하였다.

국왕은 건국시조의 직계 자손이며 천신의 혈통을 계승한 자로서 이들 여러 세력 집단을 하나로 묶는 행사인 제의를 주관하였다.

신화적 권위에 바탕을 둔 지배 이데올로기는 사회제도적으로는 혈연에 근거한 폐쇄적 신분의 형성과 계승을 뒷받침하였다. 국왕의 지위를 차지한 중심 세력 집단은 천손족으로 행세하였으며, 그 밖의 지배 세력은 지신이나 선인의 자손으로 자처하였다.

계급 관계를 기초로 한 신분 차별이 제도화 된 흔적은 여러 유적과 유물에서도 잘 드러난다. 초기에는 신화적 이념에 근거하여 현실의 계급적 신분적 차이가 죽은 후에도 현세 재생을 통하여 지속되는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죽은 자의 안식처인 무덤의 규모와 내부 시설, 부장품의 질과 양이 계급과 신분에 따라 크게 달랐다.

고대사회의 제도화된 신분 차별의 모습은 무덤 벽화에 그려진 인물의 크기와 복장의 차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신화적 이념의 변화

신화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고대사회의 지배 권위는 사회제도의 분화와 조직화가 진전 될 수록 지배층 내에서도 특정 집단에게 집중되어 갔다. 지배층 전체가 공유하였던 신화적 이념이 이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왕족에게 독점되기 시작하였으며, 나아가 국왕은 다시 다른 왕족과도 구별되는 존재로 인식되어 갔다. 이후 지배층 대부분이 신화적 권위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고 더욱이 생산력의 발전은 사회분화를 심화시켰다. 이로써 새로이 분화된 여러 세력간의 갈등이 커져갔다. 이에 국왕은 신화적 권위에 의한 지배보다는 여러 세력간의 갈 등을 조절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을 갖추어야 만 했다.

정복 전쟁을 일으키거나 내부 정치세력간의 갈등을 조절하는 등 국가의 중대사에서 국왕은 무(巫)의 조언을 받지만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판단하여 결정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태조왕 때부터 이러한 경향이 이전에 비해 뚜렷해지기 시작하였으며 5세기 초 광개토왕 장수왕대에 이르러서는 대왕 의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단계에 이르면 고대국가의 지배층은 자신들의 조상이 건국시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건국 과정에 깊이 참여하였다는 내용을 자기 가문의 전승에 포함시켜 지배층의 일원으로서의 당위성과 권위를 인정받으려고 하였다. 고구려의 모두루묘지에는 모두루의 조상이 시조 주몽을 도와 나라를 세운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음이 좋은 예이다. 대왕 의식은 삼국이 집권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다만 신라에서 나타나는 대왕 의식은 불교라는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의 수용 및 확산과 관련을 맺고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시조 신앙을 불교 이상으로 중시하였던 고구려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앞 시기에 비해 강화된 왕권 의식은 건국시조 이래의 역대 왕의 업적과 권위를 강조하는 역사 편찬 작업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신화적 이념이 비중이 점차 약화되어 가면서 현세 재생에 대한 믿음도 퇴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집권 체제를 성립시키지 못한 가야에서는 여전히 신화를 지배 이념으로 삼았으며, 현세 재생에 대한 신앙이 강하여 무덤에 실물 부장품을 대량으로 껴묻기를 계속하였다.

2. 삼국 시기의 불교

불교의 수용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개별 가호의 경제적 자립도가 높아지면서 인간 개개인의 인격적 자립과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또 읍락 사회의 동요와 함께 지배체제의 변화가 진행되면서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신화적 세계관이 한계를 드러냈다. 따라서 이전에 비해 분화되고 복잡해진 사회를 포괄하는 한 차원 높은 규범과 이를 뒷받침하는 지배 이념이 요구되었다. 새로운 사회규범은 율령 반포로 지배 이념의 변화는 보편 종교로서의 불교 수용으로 나타났다.

불교는 새로운 인간관, 종교관, 세계관을 바탕으로 주변 종교의 다양하고 이질적인 신앙 체계와 의식을 흡수하여 보다 풍부한 제의 체계와 포용성 있는 관념체계를 갖춘 종교로 성립하였다.

삼국의 지배층도 변화해가는 사회를 재조직하고 운영하는 이념으로 불교를 주목하였다. 이미 도교가 유입되어 있었으나. 신화적 관념과 무교적 제의 체계를 대체할 만한 이념성을 지니지 않았고, 오히려 그와 유사한 부분이 많았다. 따라서 삼국의 지배층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불교를 수용하고 이의 전파에 힘쓰게 되었다.

삼국 사회에 불교가 수용되는 과정은 똑같지 않았으며, 정착된 불교의 내용도 달랐다. 중국과 오랜 정치적 문화적 접촉이 있었던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불교의 수용이 비교적 이른 식에 커다란 갈등을 겪지 않고 수월하게 이루어진 데 비해 신라는 그렇지 않았다. 신라에서 불교 공인은 지배층 내에서 새로운 지배 이념으로서 불교의 효용성이 인정되고, 기존의 무격신앙과 일정한 타협이 이루어진 6세기 전반 법흥왕 때에 비로소 이루어 졌다.

삼국 불교의 성격

삼국에 수용된 불교는 현실세계의 여러 질서를 성립시킨 근본 요인을 인간 개개인의 인격적인 삶, 개인 또는 사회에 대한 공헌도에서 찾음으로써 현실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던 사회변동과 지배 질서의 재편에 새로운 이념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불교는 이념적으로나마 만인은 근본적으로 평등하다고 주장하여 계급간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실사회의 차별성은 전생에서 불교적 공덕을 쌓은 정도의 차이에 기인하는 필연적인 결과라는 논리를 그 안에 갖추고 있었다.

현실세계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의 차이는 이미 전생부터 예정된 것, 즉 필연적인 것임을 주장할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논리가 삼국의 지배계급에게 주목되어, 불교를 새로운 지배질서 수립의 유용한 지배이념으로 적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불교 수용방식은 초기에는 신화적인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진종설과 같은 이론은 혈연적인 차별을 인정치 않는 불교의 근본이념과는 배치되는 논리이며, 신화의 세계속에 보이는 신성족 관념에 불교적 외피를 입힌 신화적 사고의 산물이었다.

이미 사회적인 중요성을 잃고 신분적으로 천시되어 가던 무격층을 대신하여 신분적 차별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승려계층이 출현함으로써, 이들 새로운 지식층을 포함하는 보다 확대된 지배층의 성립이 가능하였다.

신라의 경우 새로운 지식층을 이룬 승려의 대부분이 진골 출신이었으며, 6두품 출신은 교단 내의 위계상승에서 한계가 있었다.

불교의 사회적 역할이 증대하는 과정은 율령제의 기능이 확대되는 것과 궤를 같이하였다. 율령은 원칙적으로는 영역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주민의 동질성을 전제하면서도 실제로는 민의 신분적 차별을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인간 개개인에 대하여 엄격한 신분적 차등을 적용시킴으로써 율령 역시 사회적 제도적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불교와 같았다.

새로운 지배 이념으로서 불교의 수용에 따라 기존의 제의 체계와 신앙 활동 등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신라의 경우 과거 무교적 신앙 의례가 행해지던 신성한 장소에 사찰을 세워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존의 제의(祭儀) 는 얼마간 불교 신앙과 병립하다가 이내 불교 신앙에 융합되어 그 형태와 내용을 잃어버리거나 불교적(佛敎的) 제의체계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민간신앙 속에 퇴화된 형태로 남게 되었다. 전통적인 일월신앙(日月信仰)은 불교의 제신체계(諸神體系)의 일부를 이루고 있던 일월천신신앙(日月天神信央)으로 대체되었고, 각지 산천의 산신(山神)이나 수신(水神)에게는 각기 부처나 보살의 이름이 붙여졌다. 삼한의 10월제와 같은 전통적인 제천의식은 팔관회와 같은 불교적 의식에 흡수되었다. 현세의 복을 빌거나 질병을 치료하는 등 과거 무격이 담당하였던 기능도 불승(佛僧)이 대신하게 되었다. 본래는 무를 가리키는 신라말 인 차차웅에서 나온 중은 점차 불교 승려를 의미하는 말로만 쓰이게 되었다. 이제 巫敎의 여러 행사는 민간신앙 속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5세기 고구려(高句麗) 고분벽화(古墳壁畵)에 나타난
불교적(佛敎的) 내세관(來世觀)


머리말

고구려문화에 대한 연구는 다른 분야에 비해 소홀한 편이다. 이같은 경향은 기존의 고구려관계문헌 및 금석문자료가 극히 소력한데 기인함이 크다. 그러나 현재 약80기 가량 발견된 고구려 고분벽화는 이같은 문제의 극복을 위한 좋은 자료이다. 고분벽화에는 문헌사료로 전해지지 않는 당대인의 종교인식이나 내세관 등이 뚜렷이 드러나 있어 이같은 내용을 분석 및 이해를 위해 고분벽화는 더 없이 유용한 자료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고구려고분벽화를 살펴볼 때 우선 주목되는 것은 기원357년경 제작된 안악 3호분 이래 두드러지는 불교문화적 요소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불교문화적 요소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떠한 인식 아래 고분안에 그려지게 되었는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고분벽화내 종교적 요소의 변화가 당대인의 사후세계에 대한 종교적 관념의 변화임을 고려할 때, 본고가 고구려에서의 불교적 내세관의 성립과정 및 그 성격을 파악하는 작업이 될 것임을 의미한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고분벽화내 재래종교적 요소와 불교적 요소 상호간의 영향관계가 뚜렷이 나타나는 5세기 편년 고구려 고분벽화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아 논의를 진행시키고자 한다.

一.고분벽화(古墳壁畵)에 나타난 연화화생(蓮華化生)

1. 연화화생(蓮華化生)의 의미

불교에서 연화는 흔히 불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아집(我執)·유견(謬見)·번뇌(煩惱)·업(業)으로 인한 윤회전생(輪回轉生)의 세계에서 벗어나 각(覺)한 상태를 진흙못에서 피어난 연화에 비유한다고 한다. 때문에 불경(佛經) 가운데에는 연화에 대한 언급이나 연화를 비유한 설법이 자주 눈에 뜨인다. 정토(淨土)의 불(佛),보살(菩薩),천인(天人),수행자(修行者),조수(鳥獸)등 모든 존재는 이 천연(天蓮)에서 태어난다고 하는데 이는 연화를 생명의 원천으로 보는 데에서 도출된 관념이다.
불교에서 언급하는 연화는 생명의 원천인 동시에 빛의 상징인데 연화의 생명 근원성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불교에서의 화생이라는 관념이다. 화생이란 석가불이 말한 사생 가운데 하나로 화생은 현생이 아닌 내세에서의 초현실적 탄생방법이다. 내세의 육도 및 정토에서는 모든 존재가 화생이라는 방법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앞에서 본 연화에서 대한 관념과 화생이라는 초현실적 관념을 결합시켜 정토연화화생(淨土蓮華化生)이라는 새로운 관념을 형성시킨 것이다. 불언자에게 연화화생이란 극락왕생함을 의미 하였으므로 현세구복(現世求福)과 함께 내세연화화생(來世蓮華化生)을 희구하는 모습이 보임은 당연하였다. 이를 불교미술에 반영하여 연화화생상을 표현하게 하였다.
연화화생상의 존재는 그 사회에서 불교를 수용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내세를 믿었음을 의미하며 역(逆)으로 불교의 내세론을 받아 들인 곳에서 정토세계의 생명원리인 연화화생론도 수용되었음을 뜻한다. 고대한국과 한국의 영향을 받은 일본에도 연화화생이라는 정토탄생법이 알려지고 희구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위의 연화화생이 이해되고 희구되었음이 유적, 유물을 통해 확인되는데 한국의 경우 고구려 고분벽화가 그 것이며 일본은 622년경 그려진 거승로 알려진 '천수국수장(天壽國繡帳)[그림1],이라는 유물을 남기고 있다. 그러면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어떤 형태의 연화화생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일까?

2. 고분벽화의 연화화생표현(蓮華化生表現)

1)삼실총벽화(三室塚壁畵)

삼실총은 세 개의 단실이 이어져 하나의 무덤이 된 특이한 묘실구조와 제 2실 및 제 3실 주벽에 묘사된 인왕형 역사(仁王型 力士)로 잘 알려진 통구지역 고분의 하나이다. 제 2실의 연화화생동자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제 2실, 제 3실 천장부의 연화표현이다. 제 2실과 제 3실 천장부 평행고임 제 1층에는 사신을 한쌍씩 차례로 배치하였는데, 주작과 현무는 세 줄기 연꽃을 가운데 두고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제 2층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연화의 측면을 표현하였다. 연화는 꽃받침과 받침줄기를 지녔으며 받침줄기는 양 밑이 갈고리모양으로 갈라졌다. 이 갈고리 모양 받침줄기가 달린 연화는 무용총 및 장천 1호분 벽화에도 나타난다. 평행고임 제 3층은 돌기달린 운문문양대로 장식되었으며 제 4층에는 갖가지 길상동물이 그려졌다. 삼각고임인 천장부 제5층과 제 6층은 여러 가지 길상동물과 정광(頂光)을 갖춘 천인(天人)들 및 일월성수(日月星宿)로 채워져 있다. 천장부 제 4층 이상의 이들 길상동물, 천인, 별자리 사이에는 연봉오리와 줄기를 갖춘 연화 및 제 2층에서와 같은 측면연화가 배치되었으며, 제 5층·6층의 삼각고임 밑면 역시 이같은 연화로 장식되었다.
이같은 삼실총 제 2실과 제 3실 주벽상단 및 전장부벽화의 연화표현을 잘 살펴보면 상당히 체계적인 배열임을 느낄 수 있다. 즉 주변의 인왕형 역사에 의해 받쳐지는 창방(昌方) 위 천상세계(天上世界)는 평행고임 제 1층의 사신에 의해 수호되고 있으며, 천장부 제 4층 이상의 모든 존재는 제 2층의 연화에서 화생한 상태이다. 이것은 삼실총벽화의 제작자와 삼실총의 피장자 및 그 일족이 연화화생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피장자의 정토왕생을 희고하였음을 뜻한다. 삼실총과 같이 연화화생을 표현한 다른 고분벽화로는 성총벽화(星塚壁畵)가 있다.

2)성총벽화(星塚壁畵)

성총은 평남 용강부 신녕면 신덕리 소재 10여기 고분 가운데 하나로 단실분이며 천정구조는 평행삼각고임이다. 현실(玄室)의 벽화는 회벽(灰壁) 위에 그려졌으며 네 벽 모서리에는 문양으로 장식된 주색(朱色) 기둥을 표현하였다.주벽벽화는 거의 탈락되었으나 사신이 그려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성총벽화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현실주벽(玄室主壁) 상부에 남아 있는 연화의 연화화생상이다. 이 네 벽의 벽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右)·전(前)·좌(左)·후(後)의 순서로 벽화 표현이 차례지워져 있다는 점이다. 우·전·좌의 삼벽에는 각기 다른 형태의 연화를 표현하였고 후벽에는 연화에서 상체를 드러낸 한 인물을 그렸다.
성총 현실 후벽은 재래풍속을 즐겨 묘사한 많은 벽화고분에서 피장자부부나 피장자만의 정면좌상이 자리잡던 곳으로 각저총, 복사리벽화분, 통구 12호분, 안악 1호분과 2호분이 그 예이다. 따라서 성총 현실후벽의 이 연화화생인물은 내세에서의 삶의 형태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있다. 그렇다면 이 성총의 피장자 역시 정토왕생을 구하며 정토에서의 연화화생을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우·전·좌·후로 이어지는 체계적인 연화화생표현은 묘주인을 비롯한 이 성총과 관계된 인물들의 정토화생신앙이 매우 적극적이고 깊었음을 보여준다.

3)장천(長川)1호분(號墳)벽화(壁畵)

장천 1호분은 장천 2호분과 함께 통구평야의 북부지역에 위치한 장천고분군의 일부로 서향의 이실벽화분(二室壁畵墳)이며 장천고분군 가운데 최대규모의 고분이다.
장천 1호분의 연화화생상은 앞에서 본 삼실총 및 성총의 경우와 달리 전실주벽과 천장부 여러 곳에 묘사되었으며 화생인물이 모두 2인씩 되어 있다. 연화화생은 모두 12군데에 표현 되어 있다. 이 장천 1호분의 2인연화화생상은 고구려 이외의 다른 지역의 유적, 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특이한 표현으로 연화화생에 대한 고구려적인 이해방식의 한 형태를 반영한 듯하다.
이제 부터는 이 2인연화화생은 무엇을 표현하였는지 알아 보겠다.
현실에 두 개의 관대(棺臺)가 놓여 있고 전실좌벽에는 가무를 관람하는 묘주인부부를 그린 것으로 보아 이 고분은 부부합장분이다.
그러나 장천 1호분에서 희구된 이 부부정토연화화생은 화생에 관한 여러 불경의 언급 가운데에는 보이지 않는 상당히 비불교적(非佛敎的)인 관념이다.이같은 사고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을 바탕으로 고구려의 재래내세관의 한 변형이며 불교에 의해 재래신앙이 변용·섭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二. 재래(在來)내세관(來世觀)의 불교적(佛敎的) 변화(變化)

1. 고구려인의 재래(在來)내세관(來世觀)

고구려인의 재래내세관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전하는 문헌 기록은 매우 빈약하며 그나마 단편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재래내세관의 기반이 현세(現世)와 내세(來世)를 본질적으로 동일한 세계로 보는 계세사상이라는 지적은 이미 여러번 있었다. 실제 고구려의 장송의례(葬送義禮) 및 재래신앙에 관한 국내사서(國內史書)와 중국정사(中國正史)의 단편적 기사 가운데는 계세사상과 관련하여 재해석될 수 있는 내용이 자주 눈에 띈다. 또한 몇몇 기록 및 관계자들에는 고구려와 인접한 제북방민족의 계세적 내세관과는 구별되는 요소들도 있어 계세사상에 입각한 내세관도 시대와 민족에 따라 구체적 내용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인의 재래내세관과 관계하여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인의 후장풍속이다.
후장의 풍습과 함께 주의 끄는 것은 고구려인이 보여주는 묘지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자의 묘실 축조에 기울인 정성이다. 그리고 고구려인은 장지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데 이러한 관심은 나아가 묘실의 축조와 장식에 대한 정성으로 구체화 된다. 그것을 보여주는 예가 통구 및 평야일대의 대규모의 고분이다. 여기에서 보이는 것은 고구려인들은 재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사자(死者)의 묘실을 꾸몄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고구려인이 후장을 좋아하고 묘지선정에 관심을 기울이며 묘실축조에 정성을 쏟은 것은 이들이 영혼의 불멸을 믿었기 때문이다. 후장을 하여 금은폐물과 의복거기(衣服居器)를 껴묻는 것도 이같은 믿음 때문이며 묘실내부를 생전의 저택과 같은 구조로 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묘실축조가 중요시 되는 것은 묘실이 사자(死者)의 사후주거(死後住居)라는 믿음에 기인한다. 하지만 고구려 인의 이러한 내세관은 북방민족의 그것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인이나 이들 북방민족들의 내세관이 계세사상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는 점은 같다. 장송시에 보이는 여러 가지 의식들은 이들외에도 고대북방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 왜(倭)에서도 보이며 이것은 현세와 내세를 명백히 분리되는 세계로 보지 않고, 장의(葬儀)를 영혼을 전송하는 절차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의 개마총 벽화의 개마는 인도동물의 설정인데 이는 제민족에게 동일하게 나타난다. 개 이외에도 여러 가지 동물들이 사서에서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영혼주처(靈魂主處)를 묘실로 보는 관념이 고구려인의 순수한 재래관념이 아닐 가능성도 있으며 적어도 일부에서는 사후귀생처(事後歸生處)를 성스러운 어떤 곳으로 상정하는 관념도 지녔으리라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고구려인 재래의 내세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갔으리라 생각되는데, 이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이 불교의 전래이다. 당시의 불교전래란 종교로서의 불료전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불교에 수반되는 제문화요소의 전래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국가에 의해 불교가 수용되고 장려될 경우 그 영향은 사회 전반에 미치게 되며, 일정한 기간이 지나게 되면 한 사회의 가장 보수적인 내세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렇다면 고구려에서도 불교가 재래 내세관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을까? 미치게 되었다면 어느정도를 미치게 되었을까?

2. 5세기 고분벽화(古墳壁畵)에 나타난 내세관(來世觀)

1) 5세기 전반의 고분벽화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5세기경의 작품으로 편년될 수 있는 것은 약 30기 가량이나 이들 가운데 벽화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전체적 내용의 파악이 가능한 것은 약 20기 정도이다. 이 20기에는 재래신앙요소를 비롯하여 불교·도교 등 제종교신앙요소가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상호간의 비중도 일정치 않다. 이 가운데 벽화에 재래신앙과 불교적 요소의 대비가 비교적 뚜렷한 것이 15기 가량인데 여기에서는 이들 중 묘실주벽 및 천장부 벽화 모두 잘 남아 있는 벽화고분 6기를 중심으로 알아보자.
5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고분벽화로 들 수 있는 것은 통구의 무용총, 평양에 인접한 대안의 덕흥리벽화분, 안악지방의 안악 1호분의 작품들이 있다.<표 1>

(1)덕흥리 고분

전실천장부에 쓰인 묘지명에 의해 기원 408년 사망한 前幽州刺史鎭(전유주자사진)의 무덤으로 밝혀졌으며 벽화의 보존상태가 매우 좋다. 이 덕흥리 벽화분의 전실벽화는 안악 3호분 및 약수리고분 등에서와 같은 대규모 의장행렬과 후벽의 묘주인을 향한 幽州13郡太守의 배례도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연도와 전실 천장부벽화이다. 연도좌·우벽에는 쌍창을 든 괴물수문장과 한 인물, 사람보다 큰 연화를 묘사했다.<그림 11> 전실천장부는 60개에 달하는 별자리, 견우와 직녀를 비롯한 별자리전설을 표현하였으며 '千秋', '萬歲(만세)', '吉利(길리)', '富貴' 등 富貴長生不仕와 관계된 전설사의 존재들을 그려 넣었고<그림 12>천정석에는 커다란 연화를 배치하였다. 이것은 鎭과 그를 중심으로한 집단의 천상계인 식이 장생불사관념과 불교신앙의 혼합상태임을 반영한다. 장생불사라 하여도 현세가 아닌 내세의 영생을 뜻함은 확실하나 천정중심에 그려진 대형연화와의 관계는 일견 매우 불투명하다. 이것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현실벽화내용을 살펴보자.
현실벽화는 後壁(후벽)의 主人坐像(주인좌상)은 커다란 연화가 피어오르는 연못과 묘주인의 칠보고양장면<그림 13> 석벽은 馬射戱(마사희)를 즐기는 모습과 누각·高床倉庫(고상창고) 표현으로 채워져 있으며, 통로로 이어지는 전벽좌우에는 각각 연못과 마굿간·외양간을 그렸다.<그림 14> 또한 현실천장부에는 화염문, 운문, 연화문 등을 그려 넣고 천정석은 커단란 연화로 장식하였다. 이와 같은 현실벽화에서 눈에 두드러지는 것은 馬射戱와 같은 현세에서의 행사장면과 함께 佛事의 하나인 칠보고양행사가 묘사되었으며 마굿간이나 외양간 같은 일상의 생활공간 옆에 대형연화와 연못이 시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幽室(유실)에 그려진 것은 이같은 행사가 현세구복 뿐 아니라 내세생과의 관련 아래 행해졌음을 뜻한다. 전실 북면 천장부銘文(명문)에도 표현되었듯이 피장자 '鎭'은 釋加文佛弟子(석가문불제자)이며 鎭의 일족은 '良葬送(양사송)' 하였으니 七世孫(칠세손)에 이르기까지 부귀를 누리고 고인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기를 기원하고 있다. 즉 鎭과 일족은 鎭이 佛徒(불도)임을 밝히고 현실에 鎭의 현세에서의 불사장면을 재현하고 곳곳에 연못에서 피어나는 데 형연화를 묘사함으로써 망자의 극락왕생과 자손의 복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2) 무용총벽화

전실벽화의 좌벽은 이웃각저총과 유사한 적갈색의 나무 한그루로 채워졌으며, 우벽에는 벽에 걸린 커다란 두 개의 말안장 옆으로 탁자 앞에 마주 앉은 두 인물과 대화를 나누는 두 인물이 그려져 있다. 후벽우측에는 지붕 끝에 寶珠形(보주형)장식이 있는 기와집 한채와 배경에 좌벽과 같은 적갈색 나무를 그렸다. 전벽과 천장부벽화는 박락되었다.
무용총 현실벽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좌벽과 후벽 및 천장부벽화이다. 좌벽벽화는 부엌으로 보이는 기와집에서 시녀들이 음식상을 내오는 모습, 한 기마인물의 앞에서 14명의 남녀가 춤추고 노래부르는 장면으로 구성되었으며 기마인물의 옆에는 한 마리의 개와 시종 1인이 그려졌다. 전벽에는 커다란 적갈색나무가, 우벽에는 적갈색나무, 수렵도, 牛轎車(우교차) 등이 묘사되었다. 유실후벽에는 묘주인이 앉아 있는데 다른 고분벽화와 달리 여기서는 의자에 앉았으며 2인의 승려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머리를 삭발한 3인의 승려는 주인과 동일한 크기로 그려졌으며 앞의 승려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동안 주인은 두손을 모은 채 이것을 경청하고 있다. 아마 승려들은 주인에게 불교원리에 대한 설법을 하는 듯 하다.
천장부는 3단의 평행고임과 5단의 평행삼각고임으로 이루어져 묘실에서 쳐다보면 아득한 천상계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평행고임 1층에는 삼각화염문을, 2층에는 연화와 연봉오리를 교차 배열하였으며 제 3층에는 四神의 일부와 선인들을 그렸고 사이사이에 연화를 배치하였다. 평행삼각고임에 의해 팔각면으로 나타나는 제 4층 이상에는 여러 가지 상서동물과 奏樂天等(주락천등) 천인들, 日·月像 및 별자리를 표현하였으며 사이사이에 연화와 연봉오리를 그려넣었다. 천정석에 가까운 제7층, 제8층은 별자리와 연화로만 구성되었으며, 각층 삼각고임 밑면에는 봉오리 달린 세 줄기 연화를 그렸고 천정석에는 대형연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같은 무용총 현실벽화의 내용에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현실좌벽벽화이다. 좌벽의 가무장면은 고구려 장송의례의 재현이라고 지적되고 있으며 윗편의 음식공양장면을 함께 고려할 때 일상생활의 한 모습이자 장의의 한 과정이라 생각된다. 우벽의 수렵도 역시 고구려의 정통제의와 관련있는 장면이다. 즉 현실좌벽과 우벽의 벽화는 고구려의 재래신앙의 단면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후벽 및 천장부벽화는 이와 대비되는 내용으로 짜여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후벽은 주인이 승려를 초빙하여 불법은 들으며 음식을 공양하는 장면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묘주인이 불도이며 승려를 공양함을 중히하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천장부벽화는 앞의 덕흥리고분벽화의 것에서 한 걸음 나아가 제길상동물과 별자리, 천인들의 실제적인 배경이 연화가 되도록 하였다.

(3) 안악 1호분

현실좌벽 및 전벽은 의장행렬로 기수, 고취악대, 牛轎車(우교차) 등이 그려졌으며 우벽에는 수렵장면을 보는 처첩과 시녀들을, 후벽에는 조감법을 이용한 전각의 모습을 그렸다.<그림 15> 천장부는 3단의 평행고임과 2단의 삼각고임으로 짜여졌는데 평행고임에는 화염문, 보륜문 등 각종 문양과 여러 가지 길상동물을 그렸으며 삼각고임에는 봉황, 천인 및 牧牛座(목우좌)등 별자리를 묘사했다. 고임밑면에는 日像, 月像 외에는 모두 대형연화문을 그렸으며 천정석의 대형연화문은 그 일부만 남아 있다.
이처럼 안악 1호분 현실주벽은 행렬·전각등 묘주인 생시의 부와 권세를 과시하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으며 불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천장부는 각종 연화문으로 장식되어 있고 무용총 등 벽화분 현실의 천장부는 묘주인과 그 일족이 상상하고 믿는 천상계의 모습임을 고려할 때 안악 1호분 역시 그러하리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안악 1호분 현실천장부에 그려진 상서동물·천인·별자리 또한 천상계의 한 형태이며 일상· 월상과 함께 배치된 각종 연화문도 무의미한 장식문양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안악 1호분에서도 현실주벽에 불교적 요소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천상계는 불교와 관련하여 인식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4)덕흥리 벽화고분, 무용총, 안악 1호분의 벽화내용의 내세관(來世觀)

첫째, 현실내에 불사장면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덕흥리벽화고분의 현실좌벽과 전벽에는 연못과 칠보고양행사가 표현되고 있으며 무용총 현실후벽에는 주인이 승려를 모시고 불법을 듣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둘째, 천상계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는 묘실천장부벽화가 연화문을 중심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이다. 3기의 벽화분 모두 현실천정석을 연화로 장식하였고, 천장부벽화의 배경이 연화가 될 정도로 길상동물이나 천인들 사이사이에 갖가지 형태의 연화가 묘사되었다. 이것은 천상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셋째, 묘실내에 재래신앙적 요소가 높은 비중으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덕흥리벽화고분과 무용총의 경우 전실은 천정석 외에는 불교적 요소가 보이지 않으며 행렬도를 비록하여 수렵도, 적갈색나무,日月星宿등 현세의 생활 및 제의, 재래신앙과 관계되는 요소로만 채워졌다. 그리고 현실의 경우에는 음식고양, 가무, 馬射戱 장면 등이 불사를 묘사한 벽화와 함께 그려져 있다. 안악 1호분의 경우 현실주벽은 위와 같은 재래생활도로만 구성되었다. 이것은 적어도 5세기 전반까지는 묘실내에 반영되는 내세관의 기반이 고구려인의 재래신앙이었음을 뜻한다.
이처럼 5세기 전반의 고분벽화는 계세적인 재래내세관을 근간으로 하면서 동시에 불교문화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내세관이 변화하는 과도기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2) 5세기 후반의 고분벽화

5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고구려 고분벽화로는 통구지방에 속하는 장천의 장천 1호분, 평양권인 용강의 쌍영총, 안악의 안악 2호분을 들 수 있다.<표 2>

(1)장천 1호분

전실의 좌벽에는 정자에 앉아 음식공양을 받으며 가무를 관람하는 묘주인부부를 그렸고 우벽에는 큰 나무 아래 앉은 주인과 손님을 중심으로 한 百戱伎樂場面(백희기락장면)을 상부에, 집단수렵장면을 하부에 그렸다. 후벽에는 현실로의 안내자격인 실물크기의 관리풍의 문지기 2인을 그렸으며 <그림 17> 현실로의 통로 좌·우에는 큰 부채의 대인 듯한 긴 자루를 든 시녀 2인을 역시 실물크기로 묘사하였다.
전실천장부벽화의 천장부 우측<그림 18>과 좌측벽화<그림 19>는 제1층에 청룡과 백호를, 2·3층에는 각 4인의 협시보살과 양 모서리에 2인 연화화생상을 배치하였으며, 4·5층 및 6층에는 飛天(비천)과 기악천을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천공을 떠오르는 연봉오리와 연화를 묘사하였다. 주벽과 천장부는 벽화내용에 의해 뚜렷이 구분되는데, 주벽벽화는 현세의 일상생활 및 의례와 관련된 내용을 묘사하고 있으며 천장부벽화는 피장자의 천계인식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동측천장부의 佛을 중심으로 상하, 좌우가 질서와 체계가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단계에서의 불법신봉의 깊이와 수준을 반영한다. 즉 이 장천 1호분 단계에 이르면 불교는 현세구복의 종교일 뿐 아니라 내세왕생의 진리를 가르치며 이것이 숭신되고 희구되는 위치를 점한 종교가 되었음을 뜻한다.
현실은 연화 일색이며, 이것은 현실의 피장자 부부의 내세를 극락으로 상정하거나 이것을 희구하는 데에 기인하는 표현이다. 즉 전실천장부에 표현된 부부연화화생의 바램이 현실에서는 현실전체를 연화세계로 꾸밈으로써 좀더 적극적이며 강렬한 형태로 정토왕생이 기원되고 있는 것이다.

(2) 쌍영총

전·현실 사이의 통로에 세워진 두 개의 팔각석주로 많이 알려진 벽화 고분이다. 전실벽화는 후벽을 비롯하여 상당부분이 박락되었고 현실 역시 전벽과 우벽 등의 박락이 심한 편이다. 연도 좌·우벽은 각 30명 이상의 남녀와 牛轎車, 鎧馬甲胄武士(개마갑주무사) 등으로 구성된 행렬이 그려졌으며 전실의 좌·우벽에는 각각 청룡과 백호를 그렸다.그리고 통로를 향한 후벽 좌우에는 고구려 특유의 小點紋 바지·저고리를 입은 문지기 2인을 배치하였다. 천장부는 평행고임인 하부에는 당초문, 운문 등의 문양과 봉황을 여러 마리 그렸으며 삼각고임인 상부에는 화염문 형태의 변형운문과 연봉오리문양을 묘사하였고 천정석에는 꽃잎 끝이 날카로운 대형의 고구려식 연화를 표현하였다.
현실로 통하는 통로에 세워진 2개의 팔각석조는 여러마리의 용으로 감겨 있으며 기둥머리는 연화문으로 장식되었다. 주의를 끄는 것은 현실의 좌벽인데, 좌벽상부에는 머리에 향로를 인 시녀를 선두로 하여 화려한 옷의 부인이 지팡이를 짚은 승려의 인도를 받으며 佛事를 행하러 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위와 같이 구성된 쌍영총벽화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은 묘실수호에 대한 관심이다. 무용총이나 삼실총 단계에서는 현실천장부의 하단인 평행고임 1∼3층에 다른 길상동물의 일부 혹은 雙四神(쌍사신)의 형태로 표현되던 四神이 쌍영총단계에 이르면 전실주벽으로 내려와 묘실수호자로서의 위치를 뚜렷이 하고 있다. 이것은 방위신인 사신의 힘을 빌어 묘실수호를 기도하게된 당대의 인식을 반영하며, 실제로는 피장자의 안전한 내세생을 위한 전제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된다.

(3) 안악 2 호분

단실분인 안악 2 호분의 벽화는 단실이라는 구조적 특성으로 인해 전체내용의 짜임새가 2실분의 그것보다 좀 더 정제되어 있으며 따라서 여기에 반영된 피장자의 내세인식은 보다 간결하고 명확히 드러난다.
현실전벽 묘실입구 좌·우에는 장창과 환두대도를 든 갑주무사 2인이 문을 향해 마주 보고 있으며 문 위, 창방 아래로는 연화반을 받쳐든 비천이 날고 있다. 현실좌벽벽화는 오른편 일부만 남아 있는데 위에는 蓮華盤(연화반)을 들고 산화공덕을 행하는 비천 2인이, 아래로는 연화반이나 연화, 연봉오리를 든 세 여인의 후벽을 향한 행렬이 그려져 있다.<그림 22>
단실분 특유의 짜임새를 보이는 이 안악2호분의 벽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현실주벽에 묘사된 散華飛天(산화비천)의 존재이다. 이 안악 2호분에서는 비천이 현실주벽으로 내려와 후벽에 존재하는 부부좌상을 향해 날면서 이들을 위해 산화공덕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내세정토왕생의 희구와 의지의 표현이며, 일체의 비불교적 요소를 배제하려한 천장부벽화<그림 23>는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표현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현실내에는 앞시기에 보이던 재래내세관과 관련된 표현이 사라지는 데 이는 이제 망자의 내세는 생전의 부와 권세가 재현되거나 그의 신분 및 지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의 善業의 정도와 宿世로부터의 공덕에 의한 인연이 주요소로 작용하여 결정되는 세계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4) 5세기 전반과 관련된 후반의 고분벽화의 변화

첫째,재래내세관과 관련표현의 후퇴이다. 5세기 전반의 고분벽화의 경우 현실의 일부 불교 관계표현에도 불구하고 현실주벽의 대부분은 현세의 부 및 의례장면을 재현하는데에 할애되었으며 전실주벽은 주로 행렬도나 생활도로 채워졌다. 반면에 후반에는 현실 전체를 연화로 장식하거나 불사장면으로 구성하였고 전실의 경우도 장천 1 호분단계에는 주벽 일부에 가무, 수렵, 음식 공양 등의 장면이 묘사되나 쌍영총에서는 청룡·백호 등 묘실수호신의 일부가 이들을 대신하고 전통적 소재였던 행렬도를 연도좌·우에만 축약되어 표현되고 있다.
둘째,묘실내 불사장면의 비중이 높아지며 불교관계표현이 다양해진다는 점이다. 안악 2호분의 경우 현실은 사실상 후벽의 묘주인을 위한 산화공덕의 행렬로 구성되었으며, 쌍영총 역시 후벽을 향한 공양행렬이 중심주제이다. 그리고, 장천 1 호분은 현실 자체를 연화세계로 꾸미고 있다. 또 연화의 표현도 매우 다양해져 정교한 문양으로 형식화의 단계를 밟는 것도 보이며 보살과 불상, 五體投地의 예불장면까지 등장하여 묘실안의 불교관계표현은 매우 다양해진다.
셋째, 연화를 중심으로한 천장부벽화의 재구성이 보다 진전되어 내용의 정리와 체계화가 뚜렷해진다는 점이다. 장천 1호분 전실천장부의 경우 제 1층의 四神, 제 2, 3층의 예불도와 협시보살도 및 모서리의 2인연화화생 제 4, 5층의 여러 비천, 제 6층의 기악천, 천정석의 연화라는 체계화된 천상계인식을 보여주며, 현실천장부는 연화와 일월성수로 구성되었다. 또 쌍영총의 전·현실천장부는 각종 문양과 연화문 및 최소한도로 축약된 일월성수로 구성되었으며, 안악 2호분 현실천장부는 일체의 별자리마저 생략된 채 보륜, 화염보주, 연염당초문등 불교적 요소로만 채워졌다. 즉 이제 5세기 후반에 이르면 천계로 구체화되는 내세는 불법에 의해 운행되는 세계로 인식되며 따라서 고구려인의 내세는 전적으로 佛에의 귀의와 이에 따르는 佛事 등의 선업에 달려 있게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불교 교리에 바탕을 둔 새로운 내세관 속에는 여전히 재래적인 요소가 강하게 잔존하고 있어 주목된다. 쌍영총의 전·현실에는 묘실수호신인 四神이 나뉘어 배치되었는데, 이것은 영혼의 사후주처를 묘실로 보는 재래신앙에 따른 관념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이 같은 계세관념의 지속은 상당한 진통은 거친 뒤 불교를 공인한 신라에 중대이후 왕의 시신을 화장하는 경우가 보이며 경주일대에서 다수의 골호가 사용되기 까지의 기간 조차 1세기 이상이 걸렸음을 고려할 때, 내세관이 지닌 강한 보수성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三. 佛敎的(불교적) 來世觀(내세관)의 性格(성격)

1. 불교 수용과 王權

기록상 고구려의 불교공인은 기원 372년이다.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은 북중국을 통일한 직후 고구려의 승려 順道와 불상 경문등을 보낸다. 고구려가 불법의 전래를 환영하는데 외교적 반응이라는 측면과 함께 고구려 자신의 필요성이라는 측면이 있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소수림왕 통치 초기 국가 체제의 재정비가 있었는데 여기서 제도적 측면 뿐 아니라 사회전반의 정신적 통합을 가능케하는 보편적 관념체제의 수립이 필요했다. 즉 고구려의 공식적인 불교수용에는 국가 권력의 필요라는 측면이 깊이 작용했음을 알수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경우 불교전래를 둘러 싼 재래신앙이나 기존 보수세력과의 갈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아 주목된다. 이것은 적어도 소수림왕의 통치 이전 단계에서 재래신앙과 불교와의 갈등이 어느정도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불교의 실제적인 전래가 소수림왕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전제로 하는데 이와 관련된 기록과 정황적 측면을 살펴보자.
기록면에서 자주 제시되는 기록으로는 《梁高僧傳(양고승전)》에 전해지는 支遁道林(지둔도림)이 고구려 도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내용은 支遁이 4세기 전반에 고구려 도인에게 竺法深(축법심)의 덕을 칭찬하며 소개하는 것이다. 다른 기록에는 《三國史記》 高句麗本紀(고구려 본기)에 15대 美川王이 後趙王石勒(후조왕석륵)에게 글을 보냈다는 기사인데, 이것은 《資治通鑑(자치통감)》의 후조가 고구려와의 연합을 제의하는 기사와 함께 주목된다. 당시 후조는 불교국이라 할 정도로 불교가 흥륭하였으며 화북지역의 불교화에 힘쓴 나라였다. 이런 과정에서 불교전래의 가능성은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절교환 과정의 일부로 불교의 실전이 이루어졌을 가능성과 함께 고려할 것은 북중국의 혼란으로 인한 유민의 발생과 이들의 고구려에의 유입이다. 즉 중국에 유행하던 불교역시 이들 유민의 유입과 같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와 함께 또 하나 고려할 것이 한 이래에 중국의 강한 영향 아래에 있던 평양일대를 중심으로 한 낙랑의 존재이다. 4세기 초 미천왕에 의해 낙랑, 대방이 멸망하기까지 한, 위, 진등 역대 중국 왕조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서 정치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다. 따라서 위, 진대에 유행하다 중국 불교가 낙랑에 곧바로 진해졌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실제 이같은 가능성은 기원 357년경 제작된 안악 3호분 벽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고구려의 영역 내에 편입되기 전 대방군의 일부였던 재령평야가 바라보이는 구릉지대에 축조된 안악3호분은 묘실의 대규모 행렬도로 특히 유명하다. 전실북벽부분의 8각석주의 주두 및 양측실정면묘주인좌상이 위치한 帳房(장방) 위 양 모서리와 가운데에 각기 측면연화문이 그려졌으며, 현실천정에는 일ㆍ월상과 함께 활짝 핀 연화가 묘사되었다. 이것은 벽화가 幽界美術(유계미술) 임을 고려할 때 이미 4세기 중엽 이전에 안악을 포함한 이 일대에 불교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이 있었음을 반영한다. 왜냐하면 불교문화적 요소가 내세관의 표현인 묘실벽화의 일부로 표현되기 위해서는 이전의 현세에서의 불교와의 접촉이 상당한 기간동안 이루어 지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양 및 안악을 포한한 舊漢郡縣地域(구한군현지역)에의 불교 전래 및 수용이 4세기 전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소수림왕대 전부터 불교와의 비공식적이고 개별적인 접촉과 불교에 대한 일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교에 대한 국가권력의 이해는 어떠한 것이며 소수림왕 이후 보이는 국가의 적극적인 불교장려정책의 의미는 무엇일까. 또 이들의 사회적 영향은 어떠하였으며 새로운 불교적 내세관의 확립과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소수림왕을 이은 고국양왕, 광개토왕, 장수왕대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는 일련의 영토확장정책과 불교 장려 정책을 병행한다. 이는 당대 고구려 국가권력의 불교에 대한 이해방식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4세기말 이후 고구려의 급속한 대외팽창으로 이질적인 여러 형태의 사회를 포함시켜 이들 사회가 보이는 분산성과 지역성은 고구려에 새로운 과제를 제기하였다. 지역이나 종족간의 문화, 사회적 이질성의 통합과 왕을 정점으로 한 피라밋적 신분질서의 유지에는 강한 종교성에 기반을 둔 관념체제가 요구되었다. 이같은 과제에 직면한 국가권력에 의해 주목된 것이 불교의 논리이다. 불교는 인간의 근본적인 평등을 주장하지만 동시에 三世因錄說(삼세인녹설)을 통해 속세의 인연에 의해 현세가, 현세의 업과 속세로부터 인연에 의해 내세의 삶이 결정된다는 합리적인 논리로 세계를 설명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역으로 차별적 사회질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논리적 근거로 제시될 수 있다. 고구려 국가권력의 관심은 바로 이러한 부분에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에 의한 불교장려가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으로서의 권력집중 및 왕권강화로 상징되는 국가권력의 증대 시도와 밀접한 관계에 대한 의문에 앞서 5세기 고구려의 사회적 과제에 대한 국가적 대응 방식이 먼저 주목된다. 5세기 고구려에서는 천하사상의 기반인 天孫意識(천손의식)과 불교의 교리체계가 동시에 추구되고 있다. 이것은 왕권의 신성성과 佛(불)의 권위가 함꼐 수용되었음을 의미하며, 나아가 왕권이 불교교리에 의해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음을 뜻한다. 즉 이것은 현세의 왕권은 宿歲因錄 (숙세인록)의 果報(과보)로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왕권은 佛力(불력)에 의해 뒷받침됨을 의미한다. 이같은 논리가 한단계 더 진전될 경우 왕은 '佛(불)의 절대적 권위를 현세에서 구현하는 존재'로 인식ㆍ주장될 수도 있다. 실제 천하사상을 바탕으로 왕권의 절대화를 추구하던 5세기의 고구려에서 이러한 논리가 주장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왕권의 불교와의 관계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사실은 평양 9사의 창건과 평양천도이다. 평양 9사의 창건 후 장수왕에 의한 평양천도는 여타의 정치ㆍ경제적 목적외에 佛寺로 둘러싸여 佛力(불력)의 보호를 받는 새로운 왕도로의 천도라는 의미도 함축한 행위로 보인다. 불교교리의 원용을 통해 강화된 왕자의 권위, 동명신화 및 천하사상에 의해 획득한 왕권의 신성성이 받아들여지는 새로운 사회가 전개되는 것이다.
고구려에 수용된 불교는 불교교리가 지니는 합리적이면서 이원적인 측면으로 인해 처음부터 국가권력의 주목을 받았으며 왕을 정점으로한 국가지배 질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이용되었다. 이같은 흐름을 배경으로 한 고구려인의 불교적 내세관은 어떠한 성격을 지니는가, 전대의 계세적 재래내세관과 새로운 불교적 내세관의 질적이고 구조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2. 轉生的(전생적) 來世觀(내세관)의 확립

당대 고구려의 사회적 과제와 밀접한 관련을 보이며 홍보되고 장려된 불교의영향은 5세기의 고구려 고분벽화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불교로 인해 일어난 내세에의 관심은 기존의 계세적 재래내세관의 내적 변화를 자극하였으며 나아가 새로운 형태의 내세관인 불교적 내세관이 고구려인 가운데 자리 잡았다. 그러면 5세기 고분벽화에서 나타난 불교적 내세관은 과연 어떠한 성격을 보여주는지 살펴보자.
먼저 주목되는 것은 현세와 구분되는 내세관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내세란 인간자신이 지은 업에의해 결정되는 결국 자기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선택적 세계이다. 때문에 현재의 신분과 사회적 위치가 내세에 그대로 재현된다고 믿는 계세적 사고는 수정될 수 밖에 없으며 내세는 일단 가변적인 세계로 인식되게 된다. 이것은 동시에 전생을 바탕으로 한 내세관으로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같은 현세와 내세외 구분에 이어 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내세의 개방성이다. 현세의 선업에 의해 내세에는 현재의 신분적인 혹은 사회적인 제약의 극복도 가능한 셈이다. 이런한 사고는 불자들로 하여금 현세의 공덕을 중요시 하도록 유도한다. 시대가 흐를수록 중대한 불사장면의 표현은 이같은 흐름을 잘 반영한다. 덕흥리벽화고분의 칠보공양, 무용총의 승려 설법과 음식공양, 쌍영총의 공양행렬, 안악 2호분의 비천에 의한 산화공덕장면 등은 위와 같은 사고의 구체적 표현이다. 새로운 내세관의 중심에는 불(佛)이 존재하는데 佛은 현세 구복을 위한 신앙을 대상으로 먼저 인식되어 왔고 왕권의 절대성을 뒷받침하는 존재로 인식되기도 했음을 앞에서도 언급하였다.
그런데 5세기 고구려에서 수용된 이같이 새로운 형태의 내세관 내에는 여전히 고구려의 재래내세관적 요소가 뚜렷이 남아있다. 이것은 장천 1호분 전실주벽에 표현된 고구려의 전통적 장의 장면과 천왕지신총의 장생불사와 관련된 길상동물이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주의를 끄는 문제는 고구려인이 왕생을 희구하는 정토에 대한 고구려인 자신의 이해수준이다. 고분벽화에 표현된 벽화내용을 기초로 볼 때 실제 정토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불교의 쟁투생을 희구하는 불도의 입장이란 '내세에 佛이 있다는 정토라는 곳에 화생하기를 바랄 뿐' 이지 불교의 정토세계에 대한 복잡한 교리적 설명을 염두에 둘 필요는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정토인식의 모호성과 함꼐 짚어볼 것은 정토가 아닌 六道 특히 阿修羅(아수라)이하의 세계에 대한 고구려인의 인식이다. 화면이 제한된 고분벽화의 경우 화가는 망자가 희구하는 최선의 내세만을 표현하도록 요구받기 때문에 초복적 차원의 내세관에서 정토 이외의 세계는 일단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5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불교적 내세관이란 재래내세관적 요소의 잔존, 정토인식의 모호성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인 재래의 계세적 내세관과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5세기의 고구려인은 내세를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던 차원에서 벗어나 현세와 내세를 인과로 이어지면서도 뚜렷이 구분되는 다른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고구려인이 재래내세관을 대신하여 불교적 내세관을 자신들의 내세관으로 받아들이기 까지는 무려 1세기 이상이 소요되었는데 이것은 재래내세관의 강인한 보수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불교의 끈질긴 종교적 침투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맺음말

고구려 벽화의 내용 분석을 통해 사회적 과제와 맞물린 국가에 의한 대(對) 불교정책이 주요한 역사적 배경이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벽화고분에 표현된 내세관은 벽화분을 축조할 수 있는 집단에 한정되어 믿어지는 것일 뿐 고구려인 전체의 일반적이며 보편적인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래도 5세기 고구려의 적극적이며 지속적인 불교장려정책은 불교에 의한 내세의 개방을 염두해 둘 때, 불교적 내세관의 보편성 여부에 대해 어느 정도 긍정적 평가도 가능할 듯하다.
불교적 내세관의 보편성 여부와 함께 주목되어야 할 것은 5세기 고구려에 존재하던 다른 내세관과 불교적 내세관의 상호관계이다. 왜냐하면 5세기 일부 고분 벽화 가운데에는 도교 계통의 신선으로 추정되는 존재들이 여럿 등장하며 불교적 요소가 현저한 고분벽화 중에도 재래내세관적 요소와 거리가 있는 표현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끝으로 내세관 분석의 주요한 실마리를 제공한 연화는 佛의 광연을 상징하고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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