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num.mokpo.ac.kr/kangbr/www/나주관방.htm
羅州市의 關防遺蹟

Ⅰ. 조사개요

본 관방유적편의 조사대상은 城郭·烽燧·鎭·堡·戰迹地 등에 걸쳐 있지만, 진·보·전적지 등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 제외하고, 대신 驛址·戰船所터 등을 조사대상에 추가하였다. 본 조사에서는 기왕에 알려지지 않은 신유적을 새로이 조사함은 물론이고 기왕에 알려진 유적들을 망라하여 나주시 관방유적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그간의 조사과정을 간략히 정리해 두기로 한다.

1. 조사기간 : 1997. 5. ∼ 1998. 9.

2. 조사책임자 : 姜鳳龍(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 조사보조원 : 송태갑(목포대 사학과 조교), 이재근(목포대 사학과 대학원 2년)

3. 조사 및 보고서 작성 과정

1) 기왕의 조사보고서인 {羅州郡文化遺蹟地表調査報告書}(全南大 湖南文化硏究所, 1985) {羅州市의 文化遺蹟}(木浦大博物館·羅州市, 1989)에 정리된 내용을 우선 참고하고, 다음에 地理志類·邑誌類 등의 검토를 통해서 나주시 관내 관방유적의 목록을 1차 작성하였으며, 그밖에 지명사전을 통해서 성곽과 관련된 지명을 섭렵하고 현지 마을 주민들의 제보를 받아 유적의 목록을 보완하였다.

2) 문헌을 통해 유적의 연혁을 정리하고 현지 답사를 통해 유적현황을 파악·정리하는 작업을 병행함으로써, 가능한한 역사적 맥락과 현재의 보존 상황을 유기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3) 지명사전과 주민의 제보를 통해서 새로이 확인한 유적에 대해서는 현지 답사에서 견문한 유적의 현황만을 소개하였다.

4) 유적 정리는 성곽유적·봉수유적·기타 유적(역지·전선소터)의 순서로 하되, 문헌과 마을 주민의 전승은 있지만 현장 답사에서는 확실히 확인하지 못한 유적에 대해서는 '불확실 혹은 미확인 유적'으로 분류하여 첨기하여 두었다.

4. 참고문헌

1) 지리지류 : 三國史記地理志, 高麗史地理志, 世宗實錄地理志, 新增東國輿地勝覽, 東國輿地志, 輿地圖書, 靑丘圖, 大東輿地圖, 大東地志 등

2) 읍지류 및 지명자료 : 羅州邑誌(1871), 羅州邑誌(1895), 錦城邑誌, 湖南誌, 增補文獻備考, 韓國地名沿革考, 韓國地名辭典, 한국지명총람 전남편, 문화유적총람, 全羅南道誌

3) 지표조사보고서

- 全南大 湖南文化硏究所·羅州郡 編, {羅州郡文化遺蹟地表調査報告書}, 1985

- 木浦大 博物館·羅州市 編, {羅州市의 文化遺蹟}, 1989

4) 논저

- 반영환, {한국의 성곽},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8

- 井上秀雄, [朝鮮城郭一覽] {朝鮮學報}107, 1983

- 井上秀雄, [現存遺蹟からみた朝鮮城郭小史] {村上四男博士退官記念論文集}, 1982

- 孫永植, {한국성곽의 연구},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87

- 車勇杰, {고려초·조선전기 대왜관방사연구}, 충남대 박사학위논문, 1988

- 丁潤國, {羅州牧誌}, 1989

-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편, {한국의 성곽과 봉수}(中), 1989

- 鄭勝元, [紫彌山城考] {全南文化}4, 1991

- 林永珍·趙鎭先, {회진토성}, 백제문화개발연구원·전남대박물관, 1995.

5) 기타

- 나주군편찬위원회 편, {내고장전통가꾸기}, 1981

- 동강면 편, 1988, {曲豆愛鄕史誌}.

Ⅱ. 성곽유적

1. 錦城山城址

소재지 : 羅州市 大湖洞·景賢洞 일대.

축조 시기 : 고려시대 이전

- 연혁 : 금성산성의 초축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고려시대부터 존속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歷代年表}의 기록을 인용한 體察使 李恒福의 啓文에 의하면 "거란의 내침시에 (고려의) 현종이 남순하여 이곳(금성산성)에 주둔하였다"({增補文獻備考}27, 輿地考15 關防3 城郭3)라고 한 것으로 보아, 늦어도 현종 2년(1011)에는 금성산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高麗史} 卷13 列傳16 金應德傳에 전하는 다음의 기사 역시 1270년 당시에 금성산성이 존재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元宗 11년(1270)에 羅州司祿이 되었는데, 이 때 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에 웅거하여 세력이 매우 성하였다. 州郡이 풍문을 듣고 맞이하여 항복하거나 혹은 진도에 가서 賊將을 알현하니 羅州府使 朴? 등도 눈치를 보느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上戶長 鄭之呂가 개연히 말하기를 "진실로 능히 성에 올라 고수하지 못할 것 같으면 차라리 산곡으로 달아나 피할 것이지 주의 수령이 되어 무슨 면목으로 나라를 배반하고 적을 추종하리오"하였다. 應德이 그 말을 듣고 곧 성을 지킬 것을 결의하였다. 州와 영내의 諸縣에 이첩하여 금성산에 入保하게 하고 가시나무를 세워 柵을 만들고 士卒을 격려하였다. 적이 이르러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니 사졸이 모두 상처를 싸매고 성을 死守하였다. 적이 성을 7晝夜 동안 공격하였으나 끝내 나주를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진도에 입거하고 있던 삼별초가 전라도 일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떨치고 있던 당시에 나주만은 官民이 금성산성에 입보하여 삼별초의 공격을 퇴치했다는 것이다. 금성산성에 의거하여 삼별초군을 퇴치한 이 사건은, 현종이 거란의 침임으로 개경이 함락당했을 때 나주로 몽진하여 금성산성에 의지하여 무사했던 사건과 더불어, 금성산성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주는 이미 태조 왕건 때부터 고려 왕실의 굳건한 정치적 토대였으며, 금성산신이 태조에 의해 護國伯으로 피봉된 바 있었으니, 이후 고려 왕실은 금성산신에 대한 신뢰를 더욱 높여갔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新增東國輿地勝覽 에 의하면

충령왕 3년(1277)에 山祠의 귀신이 무녀에게 내려서 말하기를 "진도와 탐라에 있던 삼별초군을 토벌할 때 내 신통력이 크게 도움을 주었는데 장병들만 상을 주고 나를 빼놓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내개 定寧公의 봉작을 주어야 한다. 만일 내말을 거역하면 큰 재앙을 내릴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나주 사람 보문각 대제 鄭可臣이 왕에게 건의하여 정녕공의 작호를 내리고 나주 祿米 중에서 매년 5석을 사당에 주었고, 또 봄·가을에 왕이 香과 祝文과 돈·비단을 내려 제사 지내게 햇고, 조성왕조에 와서도 전례에 따라 향과 축문을 춘추로 내리었다.

고 하여 충령왕 대에 금성산신에게 정녕공의 봉작을 내리고 후대했다는 것이다.

13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고려 왕조는 산성을 수축하여 주민들을 산성에 입보시킬 필요성을 절감하여 일련의 산성 수축 명령을 하달하였다. 우왕 3년(1377)에 沿海州郡에 산성을 축조하게 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각도의 수령들에게 농한기를 이용해 산성을 수축하도록 하였으며, 그 결과 우왕 8년(1382)에는 산성이 전국적 차원에서 축조되었다. 이 때 금성산성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고 있지는 않지만, 1270년 당시에 가시나무를 세워 책을 만든 수준에 불과했던 금성산성 역시 이 단계에 이르러 정비된 石城의 모습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왜구의 준동이 끊이지 않자, 태종 대에 산성과 읍성에 대한 축성론이 대두되었고, 태종 10년(1410) 경부터는 전라·충청·전라의 하삼도 연해지역에 대한 축성을 본격 거행하기에 이르렀으니, 금성산성도 이 때에 다시 수축을 보게 된다.

조선시대 금성산의 石城에 대한 기록은 {世宗實錄} 卷157 地理志 羅州牧 城郭條에 다음과 같이 처음 보이고 있다.

錦城山石城은 둘레 1,095步로서 샘 5개가 있는데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 또 연못과 軍倉이 있다.

그리고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5 羅州牧 古跡條에 의하면,

金城山古城은 石築하였는데, 주위가 2,946尺이고 높이가 12尺이며 삼면이 험준하다. 이전에는 軍倉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라 되어 있다. 단종 2년(1454)에 간행된 {세종실록}에는 금성산성의 규모가 주위 1,095步이고 軍倉이 있다고 씌어 있는 것에 반해,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주위 2,946척, 높이 12척이고 군창이 폐지된 것으로 씌어 있다. 이 두 기록을 비교해볼 때, 먼저 성의 규모에서는 {세종실록}의 步 단위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尺 단위로 환산한 것일 뿐 변화를 볼 수 없다(1보는 약 2.7척). 그러나 {세종실록} 단계까지는 산성으로서의 명목을 유지하고 있었던 반면에 {신증동국여지승람} 단계에서는 산성으로서의 기능이 사실상 소멸되어 고적조에 실리게 된 변화상은 살필 수 있다. 沿海 지역이 점차 안정되어가는 조선 세종대부터 산성을 혁파하고 대신 읍성을 중시해 갔던 추세를 염두에 둘 때,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에 금성산성이 폐지되었을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이후의 기록들은 대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그대로 轉寫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1656年刊 {東國輿地志}, 1759年刊 {輿地圖書}, 1864年刊 {大東地志}, 1871年刊 {羅州邑志}, 1908年刊 {東國文獻備考} 등).

{東國文獻備考} 卷27 輿地考15 關防3 城郭3에는 금성산성에 대한 體察使 李恒福의 회고조 傳言이 다음과 같이 비교적 상세히 전한다.

體察使 李恒福 "나주의 금성산성은 서·남·북 삼면은 지세가 험준하고 동문 밖의 일면만은 넓고 평형하여 적의 공격을 받는 곳입니다. 성중에 우물이 다성이 있는데, 동문과 대곡에 있는 두 우물이 가장 큽니다. 또 봉우리 4개가 있는데 북쪽은 定寧, 남쪽은 多福, 서쪽은 悟道, 동쪽은 露積峰입니다. 정녕봉이 주봉이고 동·서·남의 세 봉우리가 앞에서 손을 잡고 가리키고 돌아보며 서로 상응하고 있는 듯하고 말소리가 서로 통하는 듯합니다. 동쪽과 북쪽 두 봉우리의 줄기가 둥그렇게 둘러쌓여서 골을 이루는데 이곳에 군병을 숨겨둘 만합니다. 어떤 이는 셈과 우물이 보곡하다고 하나, 축성 시에 인부 5천이 동문에 있는 우물 한 곳을 마시었는데도 마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밖에 {新增東國輿地勝覽} 羅州牧 祠廟條에는 금성산신을 모시는 5개의 사당이 금성산에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上室祠·中室祠·下室祠·國祭祠·彌祖堂이 그것이다. 이중 상실사·중실사·하실사의 세 사당은 금성산성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현황 : 금성산성이 일찍이 철폐되어 방치와 왔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 군사기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훼손되었던 까닭에 현재 유적의 흔적은 잘 남아 있지는 않다. 다만 금성산 동쪽의 太平寺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군사도로를 따라 성벽의 흔적이 일부 확인되었다. 이 군사도로는, 산성의 성벽으로 추정되는데, 장원봉 아래의 '새절골'이라 부르는 골짜기의 능선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금성산성은 새절골의 골짜기를 활용하는 包谷式山城일 가능성이 크다. 새절골의 중턱 부근에 있는 우물지와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상당한 분량의 토기편 등이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 또한 {增補文獻備考}에 실려 있는 체찰사 李恒福의 전언에서, "금성산성은 서·남·북 삼면은 지세가 험준하고 東門 밖의 일면만은 넓고 평평하여 적의 공격을 받는 곳이다"라 한 것이나 "금성산의 동쪽과 북쪽의 두 봉우리가 둥그렇게 둘러쌓여서 軍兵을 숨겨둘 만하다"고 한 것, 그리고 "성을 쌓을 때 인부 5천명이 동문에 있는 우물 한 곳의 물을 마셨는데도 끝내 물이 마르지 않았다 한다"고 묘사했던 것과도 부합된다. 한편 우물지가 있는 곳에서 정상부 쪽으로 20여m 떨어진 곳에 최근까지 당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혹 상실사가 있었던 곳이 아닐까 추정된다.

2. 羅州邑城

소재지 : 나주시 성북동·교동 일대

축조 시기 : 고려시대 이전

- 연혁 : 나주는 백제시대에 發羅郡이었고, 통일기에 發羅州로 승격되어 잠시 오늘날 전남 일대의 치소로 편제되기도 하였으나, 신문왕 6년에 다시 發羅郡으로 강등되었고 경덕왕 대에는 錦山郡으로 개칭되는 과정을 거쳤다. 나주가 역사의 전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나주 땅은 왕건이 즉위 전 서남해안 일대에 진출할 때부터 중심 기지로 활용하였고, 그 과정에서 왕건은 나주의 호족 녀 吳氏를 아내로 맞이하여 후에 莊和王后로 삼았으며, 뒷날 그 소생을 자신의 뒤를 이어 제2대 惠宗으로 즉위하도록 하였으니, 고려 왕조에서 나주의 위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羅州로 승격된 것은 태조 23년(940)의 일이었으며, 顯宗 1년(1010)에 거란의 2차 침입으로 수도 개경이 함락당하자 현종이 나주로 몽진해와서 9일동안 머물렀던 것 등이 인연이 되어, 현종 9년(1018) 행정 개편 때에 羅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이로써 나주는 全州와 더불어 전라도의 명실상부한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러한 나주의 역사적 내력을 상고해 볼 때, 나주 읍성은 늦어도 고려시대에는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羅州邑城의 흔적이 문헌에서 처음 확인되는 것은, {高麗史} 卷103 列傳16 金慶孫傳의 다음 기사에 전해지듯이, 고려 고종 24년(1237)의 일이다.

(김경손은) 고종 24년(1237)에 全羅道 指揮使가 되었다. 이 때 草賊 李延年형제가 原栗·潭陽 등 諸郡의 무뢰배들을 불러 모아 海洋 등 州縣을 치며 내려오다가 경손이 나주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羅)州城을 포위하는데 적의 무리가 매우 많았다. 경손이 城門에 올라 바라보고 말하기를 "적이 비록 많으나 짚신을 신은 촌 백성일 뿐이다"라 하고 즉시 別抄가 될만한 사람 30여명을 모았다. … 경손이 또 꾸짖어 물리치고 드디어 문을 열고 나가니 懸門이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문지기를 불러 목을 베고 곧 懸門을 내렸다.

여기에 나오는 '州城'이 나주읍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고, '城門', '懸門' 등은 나주읍성의 성문을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 따라서 나주읍성은 늦어도 1237년 이전에는 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윗 기사의 내용 중에서 올리면 닫치고 내리면 열리는 개폐방식을 채택한 懸門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 그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고려말기에 나주읍성에 문루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음은 鄭道傳이 쓴 다음의 [登羅州東樓諭父老書]( {三峰集} 卷3)에 나타나 있다.

나 道傳이 言事로 재상에게 거슬려서 會津縣으로 추방되어 왔는데 회진현은 나주의 속현이다. 회진현에 이르는 길이 나주를 거치게 되어 東樓에 올라 배회하며 바라보니 산천의 아름다움과 인물의 번성함이 남방의 일대 巨鎭이다. … 이 고을은 바닷가의 지극히 먼 변방이어서 근심되는 것이 왜구이다. 연해의 다른 州郡들은 혹은 사로잡히고 혹은 이사를 해가서 소연히 사람이 없으므로 토지를 지키고 貢賦를 바치지 못한다. … 그러나 나주는 그 중에 끼어 있으면서도 번성하기가 거의 평일과 같아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어 즐거움을 누린다.

삼봉 정도전은 고려말 우왕 원년(1375) 재상에게 직언하다가 미움을 사서 회진으로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는데, 윗 글은 그때 회진현으로 내려가는 길에 잠시 나주성의 東樓에 올라 나주의 부로들을 효유하며 쓴 글의 일부이다. '東樓'의 용례가 보임에서 당시 나주읍성의 사방에 문루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주위의 다른 주군들은 왜구로부터 극심한 피해를 보고 있었음에 반해 나주만은 평일과 같은 평화로움을 누린 것으로 묘사한 것은 읍성이 왜구를 방비하는데 큰 효능이 있었음을 시사한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삼봉의 견문은 조선을 개창한 이후에 하삼도에 대대적인 읍성 수축을 추진케 한 전거가 되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우리나라의 외적 방비체제는 삼국시대 이래 山城을 축성하여 이에 入保하는 방식을 취해왔던 것에서, 조선시대에 들어 주요 도시의 전체를 에워싸는 邑城을 쌓아 군사적 방비와 행정적 기능을 겸유케 하는 방식으로 점차 바뀌어 갔다. 산성으로 입보하는 기왕의 방어체제는 일시적이나마 생업을 완전 포기하는 엄청난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데 반해, 읍성을 통한 방어체제는 생업과 방어를 병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방어체제였음을 인식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초부터 沿海 군현에 대한 邑城築造論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으니, 태종 7년(1407)에 영의정부사 成石璘이 [시무 12조]를 올려 농한기에 산성과 함께 읍성을 축조해야함을 역설한 것이 읍성축조론의 시발점이 되었다.

나주읍성은 보성읍성과 함께 읍성축조론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태종 4년(1404)에 긴급 修築되었다. 이는 동년 7월에 왜선 33척이 전라도로 침입해 오자 수군지휘관인 金英烈을 보내 격퇴한 뒤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서 불과 3개월만인 동년 10월에 완성을 보았다. 따라서 이 때의 나주읍성 수축은 계획적인 읍성 축조였다기 보다는 기왕의 土築 부분을 石築化하는 정도에 만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이후에도 나주읍성에 대한 본격적인 수축 논의는 계속되었다. 그 논의에 관한 몇몇 사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나주 읍성에 대한 대대적인 개축 논의는 문종대에 제기되었다. 문종이 즉위한 그 해에 下三道 邑城들에 대한 전면적인 기초 조사를 지시함에 따라 下三道都觀察使인 鄭?이 이를 착수하여 그 이듬해(1451)에 그 결과를 보고하였는 바, 그중 나주읍성에 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쌓은지가 이미 오래되어 모두 쓸모가 없어서 일찍이 그 官의 군인들을 시켜서 처음 北面으로부터 600尺을 개축했습니다. 그러나 그 地台 및 內面에 채워넣은 흙이 모두 법대로 쌓아지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 읍내의 민호수가 많으므로 그 城基를 다시 7,000척으로 정했습니다({文宗實錄} 卷9 元年 8月條).

1404년 10월에 긴급 수축된 것이 너무 오래되어 그 후에 언제인가 다시 군인들을 시켜 북면의 600척을 개축한 바 있으나 이 역시 축성법에 어긋나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당시 나주 민호의 수에 비추어 城基를 7,000척으로 정하여 근본적인 개축을 해야할 것임을 보고·건의한 것이다. 그러나 나주읍성의 개축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한 듯하다. 이는 세조 3년(1457) 정월에 연해 지역 읍성 축조를 위해 파견했던 下三道都巡察使 朴薑과 副使 具致寬 등이 올린 다음과 계문에 잘 나타나 있다.

나주는 읍성이 좁아서 이미 넓혀 쌓도록 명령하였으나 지금까지 완성치 못하였습니다. 근래 해마다 흉년이 들어 갑자기 역을 일으키기는 어렵겠으니 풍년을 기다렸다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世祖實錄} 卷6, 3年 正月條).

이후 조정대신들 사이에 나주읍성 개축을 둘러싼 의견이 분분하다가, 한명회 등의 강력한 주장으로 개축작업이 실행에 옮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新增東國輿地勝覽} 羅州牧누정조에서

東樓는 즉 성의 동문루이다. 목사 金係熙가 읍성을 넓혀 쌓을 때 重修한 것이다. 옛 터는 성안에 있다.

라고 밝히고 있듯이 나주읍성에 대한 개축 작업은 金係熙가 나주목사로 재임했을 때(1457년 8월 11일∼1459년 11월 21일) 완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주읍성의 규모에 대한 기록은 다음 <표 1>에 나타나 있듯이 3가지 종류로 나타나고 있어, 이에 대한 대대적인 중수가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음을 시사받을 수 있다.

<표 1> 나주읍성의 규모와 부속시설
地 志 名
간 행
규 모 
부 속 시 설
둘레
높이
성문
雉堞
포루
小溪
세종실록지리지
1454년
1,162步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
3,126尺
9尺
20
12
1
동국여지지
1656년
5,320尺
4개
20
12
1
여지도서
1759년
3,126尺
9尺
4개
2,513
3
12
12
대동지지
1864년
9,966尺
4개
20
12
1
1
나주읍지
1871년
9,966尺
9尺
2,412
20
12
1
2
금성읍지
1897년
3,126尺
9尺
20
12
1
증보문헌비고
1908년
9,966尺
9尺
4개
2,412
12
12
1
2
 
 

<표 1>에 나타난 나주읍성의 규모에 대한 기록은 1,162보, 3,126척, 5,320척, 9,966척의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으나, 이중 1,162보와 3,126척은 동일 규모의 것을 步 단위에서 尺 단위로 환산한 것에 불과한 것이므로(1보는 약 2.7척), 세 가지인 셈이다. 그렇다면 태종 4년(1404)에 1,162步(3,126尺)로 1차 증축된 나주읍성은, {동국여지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중간 단계에 김계희 목사에 의해서 5,320척으로 또 한 체례 증축되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동지지} 간행 이전에 9,966척으로 다시 한 차례 증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지도서}·{금성읍지}에서 3,126척이라 한 것은 간행 당시의 규모를 표시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단순 轉寫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들어 세차례에 걸쳐 증·개축이 이루어진 나주읍성은 한말에까지 그 골격을 유지해 오다가, 1910년∼1920년 사이에 일제에 의해 4대문과 성벽에 대한 훼철 작업이 빠른 속도로 행해졌고, 그 읍성터는 식민통치건물지, 일반 대지, 혹은 도로망 등으로 전용되었다. 해방 이후 나주의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훼손이 더욱 격심해져셔 오늘에 이르렀다.

- 유적 현황 : 나주읍성은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한 남북장축의 平地城으로서, 전형적인 조선시대 읍성 양식을 취하고 있다. 총 길이 3,300여m에 달하는 성벽유구는 현재 대부분 훼손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서벽이 부분적으로나마 형태가 남아 있다. 강남수씨댁(교동 26), 장성수씨댁(교동 42번지), 박남수씨댁(교동 67번지), 김천석씨댁(교동 67-2) 등은 서벽을 담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의 높이는 90∼240cm이고, 축성은 1m 이상되는 대형 석재와 중형 및 소형 석재를 섞어 '잔돌끼움쌓기' 방식에 의해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서벽열을 따라서 양쪽에 민가가 들어서 있어서 서벽 상단면은 자연스럽게 민가 사이의 골목길을 이루고 있다. 동·남·북벽은 거의가 훼손되어 버렸으나, 남벽의 경우 성벽열을 따라서 민가가 조성되었기 남벽열의 윤곽이 일부 파악될 수 있으며, 최규채씨댁(금성동 3303) 담장과 이종묵씨댁 담장에 성돌이 남아 있어 흔적이 겨우 확인된다. 동벽은 거의 없어졌고 극히 일부만이 민가의 담장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북벽의 경우 역시 대부분 훼손되었으며, 다만 이하연씨댁(산정동 1-5)에 길이 15m의 석열 1단이 확인되고 있고, 이로부터 북문지를 경유하여 나주국민학교 뒷편까지 길이 50m에 걸쳐 성돌이 산재되어 있다.

읍성 4대문의 문지는 대부분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일부 유구가 확인된 남문지만이 복원되었다(南顧門). 1990년에 복원을 위해 행한 남문지 조사에서, 문지의 지표에 門樓로 여겨지는 圓形礎石 4기와 陸築 부분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基礎石, 그리고 다양한 크기의 角形石材 등의 흔적들이 확인되었다. 나머지 3대문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고, 다만 그 위치만을 대체적으로 비정할 수 있을 뿐이다(<표 2> 참조).

<표 2> 4대문지의 위치
구 분
성문 이름
위 치
비 고
東 門
東 漸 門
성북동 8-28 현존유구 없음
西 門
西 城 門
서내동 108 현존유구 없음
南 門
南 顧 門
남내동 36-1 복원
北 門
北 望 門
향교동과 대호동의 경계부근 현존유구 없음
 
 

그밖에 읍성에는 2개의 水口門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금성산에서 발원한 나주천이 읍성의 서쪽으로 흘러들어와 동쪽의 관탄으로 빠져 나가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西水口址는 현재 나주중학교 앞에 있는 나주천 다리 부근에 있었으며, 東水口址는 죽림동 128번지 부근에 있었다. 주민들은 수구문을 흔히 [尸口門]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이곳을 통해서 성안의 시체를 성밖으로 빼낸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나주 읍성 안에는 관아·객사·누정 등의 건축물이 있는 바, 그 연혁과 현황에 대해서는 [유교유적] 및 [전통건축]편을 참조하기 바란다.

3. 榮山倉城址

소재지 : 나주시 三榮洞 澤村 마을

축조 시기 : 고대 혹은 고려(추정)

- 연혁 : 영산창은 고려말 공양왕 2년(1390)에 창성을 쌓아 漕倉으로 운영되다가 조선 중종 7년(1512)에 廢倉되었다. 權近이 쓴 [龍安城漕轉記]({陽村集} 卷에11 記類)에는 1390년에 행해진 龍安倉城과 榮山倉城 축조의 동기와 그 입지조건, 축성 기간과 축성 방법, 그리고 축성 감역자와 동원한 읍민 등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漕轉은 큰일이니 국가의 경비와 公私의 풍요·결핍이 이에 달려 있다. 남쪽지방에서 漕轉해서 들여오는 것은 오직 전라도가 가장 멀어서 바다로 수송한 뒤에야 서울에 도달하였던 것인데, 왜가 일어나면서부터는 조세를 받는 곳을 海口에 두지 않고 산에 있는 諸城에 두게 되니, 조세를 바치는 백성들이 소와 말에 싣고 험하고 어려운 것을 넘고 빙판과 눈길을 오르내려 三冬이 지나서야 겨우 끈난다. 봄이 되어 조운할 때가 되면 또 바다로 수송하게 되는데 그 길이 멀어서 며칠이고 숙박해야 도달하니, 농사일도 하지 못하고 여름이 되어야 끝마친다. 겨울에는 얼고 굶주리며 봄에는 주리고 지쳐 사람과 가축 죽은 것이이 길에 즐비하다. 또 그 말(斗)이 모자라 斗量할 때마다 줄어들어 반드시 조세를 더 내어 보충해야 하고, 심지어는 남에게 빌어다 채우게 되니 백성의 병폐가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都觀察使 盧公 嵩이 이 곳을 맡아 내려온 이래로 민생의 이득과 병폐를 빠짐없이 따져서 계획을 세우되 조운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이에 조은 계책을 세워 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해 바다를 따라 그 지형을 관찰하여 전주의 경계에서는 鎭浦의 龍安을 얻고, 나주의 경계에서는 木布의 榮山을 얻으니 모두 물가의 언덕이 활처럼 구부정하게 둘러있고 또 바다가 활짝 트였다. 노공이 이에 여러 사람과 상의 하기를 "여기에 성을 쌓고 조세를 거둔다면 백성이 실어오는 일을 한번에 다 마칠 것이요, 바다로 운반하는 데도 배를 성 밑에 대고 져다가 실을 수 있으며 도적이 오더라도 굳게 지키고 이 성을 울타리로 삼는다면 깊이 들어와 도둑질할 수 없을 것이니 백성에게 편리하고 국가에도 이로운 것인데 어찌 성을 쌓지 않겠는가" 하니 여러 사람이 기꺼이 명령을 들었다. 廟堂의 공론 역시 그러하여 통첩을 돌려 알리었다. 8월이 되어 농사일이 한가해지자 知古阜郡事 鄭渾·전 광주목사 黃居中·전 판사 盧元明·전 古阜郡事 鄭士雲에게 명하여 容顔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고, 나주판관 尹義·전 개성부윤 金中光과 鄭允孚·전 판사 羅璡에게 명하여 榮山의 공사를 감독하게 하고 각각 관할하는 모든 고을의 백성들에게 그 뒤를 일으키게 하니, 백성들이 모두 즐거이 따라 나와서 북치는 것이 감당하지 못하였다. 이에 가래질하고 다지기도 하며 흙을 파 올려서 쌓으니 높으면서도 두툼하고 깍듯하면서도 견고하다. 여장을 두르고 담장으로써 굳게하니 바라보면 날아 올라가는 듯하고 대하면 우뚝하다. 영원히 전할 업적을 한 달만에 끝마치니 촌부들이 그 병폐가 없어지게 된 것을 기뻐하여 서로 집에서 경축하고 길에서 노래하였다.

왜구가 창궐하여 조창을 海口가 아닌 山城에 두니, 稅穀을 조창으로 나르고 또 이를 조창에서 서울로 漕轉하는 데 백성들의 노역이 너무 고달프게 된 사정을 감안하여, 전주의 경계에는 용안창을 나주의 경계에는 영산창을 축성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두 창성의 입지는 수로와 해로를 통해서 漕轉하기에 용이하면서도 왜구의 침탈을 방비하기에 적합한 지점이 선정되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고려말에 조창제가 재정비되기 이전의 고려시대 전라도지역 조창으로는 羅州 海陵倉, 靈光 芙蓉倉, 靈巖 長興倉, 昇州 海龍倉, 臨陂 鎭城倉 등이 있었는데, 재정비된 이후 조선전기의 전라도지역 조창으로는 羅州 榮山倉, 靈光 法聖倉, 龍安 得安倉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영산창은 중종 7년(1512)에 수로가 험하여 많은 배가 전복되어 손실이 많다는 이유로 폐창되어, 영산창에서 수납되던 官田稅은 영광 법성창으로 이관되고, 법성창에서 수납하던 官田稅는 군산창으로 이관되었다. 이로써 조선후기의 전라도 지역의 조창은 영광 법성창, 옥구 군산창, 咸悅 聖堂倉으로 재정비되고, 영산창의 기능은 소멸되었던 것이다.

- 유적 현황 : 영산창성지는 택촌 마을 뒤의 얕으막한 야산에 위치한다. 그 남쪽 사면은 영산강 본류와 연접해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자연 성곽을 이루고 있는 반면에, 동쪽과 북쪽 사면에는 4단 정도로 축조된 '계단식' 토성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이 토성지는 북쪽의 노출된 단면에서 지름 3cm 이하의 잔자갈과 흙을 섞어 쌓은 판축기법이 보이고 있다. 계단식 토성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나주 노안면의 학산리토성과 흡사하며, 이 점에서 고대 성곽의 냄새가 나기도 한다. 만약 그렇다면 폐지된 고대 토성터에 고려말 영산창성을 새로이 건설한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 이 점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정밀 조사가 요청된다.

정상부의 북쪽에 치우쳐 직경 20m 정도의 웅덩이가 패여 있고, 정상부의 중앙에는 화원사가 자리하고 있으나 현재는 폐사되었다. 현재 이 사찰의 대웅전 앞 뜰과 요사채 뒤 밭에는 대형 주?돌 9개가 남아 있는데 이 곳은 과거에 수원정이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창성과는 무관한 것으로 판단된다.

4. 會津土城

소재지 : 羅州市 多侍面 會津里

축조 시기 : 고대

- 연혁 : 회진리는 백제시대에 豆?縣이 설치되었고, 신라 경덕왕때 회진현으로 개명한 이래 그 이름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삼면이 산줄기로 둘러쌓여 있고, 남쪽만이 영산강본류를 향해 개방되어 있어, 영산강 수로 변의 천혜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백제 이전부터 이미 성곽시설이 있었던 것을 백제가 두힐현의 縣治로 편제하면서 다시 토성으로 축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남아 있는 회진토성은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 유적 현황 : 회진마을의 서·북·동 3면은 나즈막한 산으로 둘러쌓여 있고 남쪽만이 영산강 본류를 향해 개방되어 있는데, 회진토성은 개방된 남쪽 방면을 방어하기 위해서 동서의 산록을 연결하여 축조한 일종의 包谷式 토성이라 할 수 있다. 회진토성은 흙을 판축하여 쌓은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 성벽의 기저부 넓이는 6m 정도, 높이는 약 4.6m 정도에 달한다. 이 외에도 영산강 본류와 접해 있는 동쪽 산의 반대 사면에서 계단식 토성인 듯한 흔적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만약 이것이 확인된다면 백제 이전의 토성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5. 城德山城

소재지 : 羅州市 細知面 城山里

축조 시기 : 미상

- 개요 : 세지면 성산리에 해발 171m의 城德山이 있는데, 그 정상부에서 산성의 흔적이 있다. 성덕산의 정상부에 성돌과 토기편이 산재해 있다. 남쪽에는 금천이 흐르고, 동쪽에는 남북으로 장흥과 나주로 통하는 국도 23번이 지나고 있어, 전략상의 요지에 해당한다.

6. 乾之山城

소재지 : 羅州市 鳳凰面 松峴里

축조 시기 : 미상

- 개요 : 건지산의 정상부에 3천여평의 산성 흔적이 있고, 산성지 안에 집터의 흔적과 龍泉이라 불리는 샘이 있다. 백제때 實於山縣과 관련된 山城이라 전해져 오고 있으며, 건지산 아래 마을의 주민인 홍범희 옹(75)의 전언에 의하면 일제시 격전지였다고 한다.

7. 鶴山里土城

소재지 : 羅州市 老安面 鶴山里

축조 시기 : 고대

- 개요 : 학산리 토성지는 영산강이 지석강과 합류하기 직전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 남동쪽 사면에 급경사를 이루면서 바로 영산강과 연접하고 있는 점이나 그 동쪽 사면에 4단 정도로 축조된 계단식 토성의 흔적이 뚜렷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영산창성지와 동일한 형식이다. 단의 높이는 2∼3m 정도, 넓이는 좁은 곳은 3m, 넓은 곳은 15m 정도에 달한다. 정상부에는 직경 10m 정도의 웅덩이가 있다.

8. 越峴臺城址

소재지 : 羅州市 南平邑 校村里

축조 시기 : 미상

- 개요 : 남평초등학교 앞 산(해발 141m)의 정상부에 둘레 500m 가량의 방형으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이다. 지석강이 내려다 보이는 동북사면은 급한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고, 서남사면은 계단식 토성인 듯한 흔적도 보이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정상부는 직경 50m 정도의 평탄면을 이루고 있다. 일명 月延臺城이라고도 부른다.

9. 紫彌山城

소재지 :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신촌리·덕산리

축조 시기 : 고대(추정)

- 연혁 : 반남면은 백제의 영산강유역 진출 이전에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반남일대에 영산강유역 특유의 옹관고분이 最大·最密의 분포상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중앙에 위치한 자미산에 대형 산성(자미산성)이 축조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이다. 즉 자미산성은 백제 이전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영산강유역을 영역으로 삼은 이후에 영산강유역 토착세력의 중심지인 이곳을 半奈夫里縣이라는 일개 현으로 편제하여, 짐짓 이 지역을 무시하는 정책을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통일신라는 이곳을 반남군으로 승격시켜 주었지만, 영산강유역의 최고 중심지로까지는 떠오르지 못했다. 후삼국시대에 이르러 자미산성에 견훤군이 주둔하여 나주의 왕건군과 대항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 때문인지 고려의 천하가 되면서 반남군은 다시 반남현으로 강등되었다. 고려 말에는 자미산성이 삼별초 군대의 거점으로 활용되기도 했다는 전승이 전한다.

- 우적 현황 : 자미산성은 영산강의 대지류인 삼포강이 에워싸고 완만한 구릉성 평지가 펼쳐져 있는 반남면 평야지대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자미산에 축조되었다. 이 곳은 영산강과 바다의 수로에 접해 있어서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지역으로 통하는 요지에 해당한다. 자미산은 두 봉우리로 이루어진 누에고추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산성은 자미산의 두 봉우리를 포함한 전체 산의 둘레를 3단으로 둘러 축조한 계단식·태뫼식 산성이다. 계단식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榮山倉城址나 鶴山里土城址 처럼 고대에 축조된 성곽으로 여겨진다. 정상에는 직경 60여m에 달하는 평탄면이 있는데, 헬기장으로 쓰이고 있다. 산성 주위에서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10. 鳳山城址

소재지 : 羅州市 洞江面 인동리 兵班 마을

축조 시기 : 미상

- 개요 : 인동리 병반 마을의 뒷산인 성메산에 위치한다. 성메산의 북사면에 성돌이 산재해 있어 테뫼식 산성으로 추정된다. 남 사면은 현재 경지정리 중이어서 심하게 훼손되어 가고 있다. 능선에는 석축의 흔적이 있고, 정상에는 현재 헬기장으로 쓰이는 60m 정도의 평탄면이 있다.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하기도 하고, 또한 왕건이 견훤을 공격할 때 쌓았다고 전하기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봉수유적

11. 鳳儀山 봉수

소재지 : 羅州市 旺谷面

축조 시기 : 조선시대

- 연혁 : 총 5炬로 되어 있는 조선시대 봉수체제에서, 현 여수의 돌산도에서 서울에 이르는 제5거에 속했다. 봉의산 봉수는 直烽은 아니고 현 무안군 삼향면 群山에 있던 直烽인 三鄕烽燧에 딸린 나주 間烽이다. 봉의산 아래에 烽火軍들이 살았던 봉화촌이 있었다고 하며, 봉의산의 본 이름도 烽火山이었다는 설이 있다.

- 유적 현황 : 현재 봉의산 정상에는 특별한 시설물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정상에 자연적으로 모여 있는 여러 개의 바위들이 있는데, 이것이 봉수시설로 활용되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봉의산 정상에 오르는 중간 지점에 최근 봉연사라는 절이 들어서 있다.

12. 德龍山 봉수

소재지 : 羅州市 鳳凰面 鐵川里 철애 마을

축조 시기 : 조선시대

- 개요 : 현 무안 삼향면 群山에 있던 三鄕烽燧에 딸린 나주 間烽이다. 현재 시설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자연석을 활용한 축대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마을 주민인 徐相晩 옹(75세)에 의하면 산 정상에서 祈雨祭를 지내기도 했다고 하며, 정유재란 때 왜군과 전투가 벌여지기도 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고 한다.

Ⅲ. 기타 유적

13. 靑巖驛址

소재지 : 羅州市 靑洞里 역몰 마을

축조 시기 : 조선 成宗年間.

- 연혁 : 驛制란 도로(驛路)의 요충지에 驛을 설치하여 公用 使行이 공무를 수행하는데 쓰는 말(驛馬)을 관리하도록 한 제도를 말한다. 使行이 역마를 쓰기 위해서는 馬牌라는 증명패가 있어야 했는데, 이는 兵曹에서 발급된 馬文에 따라 尙瑞院에서 발급해 주었고, 外方에서는 監事와 兵水使가 발급해 주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역제는 고려 成宗年間(982∼997)에 22道驛 525驛로 정비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羅州 靑巖驛도 이 때 22도역 중의 하나로 처음 설치되었으며, 이후 조선시대에까지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그후 조선 중기에 이르러 나주 청암역은 屬驛으로 전락하고, 長城 靑巖驛이 대신 道驛으로 승격되는 변화를 겪었으며, 1985년에 郵遞司가 설치되면서 역제 자체가 철폐되면서 청암역도 폐지되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전라도를 경유하는 驛路는 6路와 7路가 있었는데, 청암역은 7로에 있었다.

- 유적 현황 : 우물 2개소와 石槽 1개가 남아 있다. 우물은 김윤태씨 댁에 1개, 도로변에 1개가 있다. 석조는 조양곤씨댁 헛간에 방치되어 있다.

14. 濟民倉址

소재지 : 羅州市 安倉洞 410·411번지

축조 시기 : 영조 34년(1763)

- 연혁 : 濟民倉은 춘궁기에 농민들에게 곡식을 대여해 주었다가 추수기에 수납하는 구제사업용 곡물을 본관하던 창고로서, 영조 34년(1763)에 좌의정 洪鳳漢의 건의에 의해 설치되었다. 제민창을 설치하게 된 동기는 1763년에 흉년이 들자 그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에 앞서 함경도 덕원에 설치하여 함경도지방의 빈민구제에 효과를 보았던 交濟倉의 선례에 따라 삼남지방에 설치한 것이다. 삼남에 설치된 제민창으로는 영남의 泗川倉, 호서의 庇仁倉, 順天左倉, 羅州右倉의 4개가 설치되었다. 비축미는 사천창에는 6만석, 그리고 나머지 제민창에는 각각 3만석씩 두었으며, 이중 매년 1/3씩을 대여해 주고, 3년에 한번씩 舊穀을 교체하였다. 호남좌창은 순천·광양·낙안·구례·동복·곡성·보성·흥양·장흥 등지를 관할하였고, 호남우창은 나주·남평·영암·무안·광주·함평 등지를 관할하였다.

나주 제민창을 일명 [羅里?倉]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본래 숙종 46년(1786)에 賑恤廳에서 충남 공주와 연기의 접경 강변지역에 설치했던 나리포창을 이곳 나주우창으로 옮겨 合設한 것에서 연유한다. 원래 나리포창은 제주도의 흉년에 대비하여 설치한 창고로 제주에 흉년이 들면 나리포에 보관하던 곡물을 보내 진휼하고, 대신 제주도의 특산물로 회계하여 이를 육지에서 판매하여 그 대금으로 다시 곡물을 사서 보관하던 창고였다. 그러던 것이 경종 2년(1722)에는 제주에 보다 가까운 臨陂로 이설하고 別將을 두었다가, 영조 14년(1738)에 별장을 혁파하고 군산첨사에 소속시켰다. 그후 1749년에 임피로 다시 환원시켜 관리케 하였으나 미수금이 누적되어 재정이 악화되자, 1758년에는 節目을 만들어 진휼청에서 직접 관리하다가, 정조 10년(1786)에 七山海路(영광)을 왕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나주 제민창으로 합설한 것이다.

- 유적 현황 : 영산포-다시간 도로변에 있는 眉泉書院 근처에 위치한다. 현재 몇 개의 주춧돌과 와편만이 제민창지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제민창의 원 위치로 추정되는 진복술씨댁(410번지)에는 3기의 주춧돌이 있고, 그밖에 신영옥씨댁(411번지)에 장독대로 쓰이고 있는 것을 포함해 5기의 주춧돌이 있으며, 김철준씨 집(483번지)에 2기의 주춧돌이 있다. 그리고 마을 입구의 고목나무 주위에 5기의 주춧돌이 모아져 있다. 이들 주춧돌들은 모두 1m 내외의 대형 석재들로서 당시 제민창의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15. 戰船所터

소재지 : 羅州市 多侍面 竹山里 화동 마을

축조 시기 : 조선시대

- 개요 : 戰船과 수군 병기를 제작하고 감추어 두었던 곳이다. 화동 마을의 石浦山 기슭에 전선소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유성식씨 댁이 자리하고 있어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마을 주민인 柳仁明씨와 柳熙重씨 등의 증언에 의하면 영산강의 흐름을 마을로 끌어들여 전선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운하와 같은 시설이 있었고, 그것을 連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연동의 흔적은 조그만 수로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마을에는 길이 2m 정도의 石製 배말뚝 2개가 藏春亭 앞에 방치되어 있다.

Ⅳ. 불확실 혹은 미확인 유적

16. 花城里土城址

소재지 : 羅州市 公山面 花城里 성터골

축조 시기 : 고대

- 개요 : 지명이 성터골이라 되어 있어 현지 조사를 해본 결과 뚜렷한 토성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성터골을 동쪽으로 끼고 남북으로 나있는 지방도 자리가 토성지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몇가지의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토성지일 가능성은 크다고 본다. 첫째, 이 주변의 공산면 및 동강면 일대에 상당수의 옹관고분이 분포되어 있고, 또한 몰무덤이라 부르는 1변 15m 정도의 방대형 고분이 바로 인접해 있다는 점이다. 둘째, 남으로 삼포강과 접하고 있는데, 삼포강 건너편의 시종면과 반남면 일대에 옹관고분이 가장 밀집되어 있고 성틀봉토성과 자미산성과 같은 고대 성곽지가 있다는 점이다.

17. 南平縣城址

소재지 : 羅州市 南平邑 東舍里

축조 시기 : 미상

- 개요 : {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현의 남쪽 1리에 古城이 있었다 하나, 현재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남평현의 동헌터가 있었다는 남평 초등학교 자리가 현성터로 추정된다.

18. 新道里城址

소재지 : 羅州市 山浦面 新道里 성터골

축조 시기 :

- 개요 : 토성의 흔적은 찾기 어려우나, 성터골이라는 이름으로 보아 옛 성터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신도 2리에 계단식 토성의 모양을 갖춘 지형이 눈에 띠었는데, 이것을 토성지의 흔적으로 의심해 보았다.

19. 雲谷里城址

소재지 : 羅州市 鳳凰面 雲谷里

축조 시기 : 미상

- 개요 : 운곡리를 에워싸고 있는 龍提山의 병풍바위 뒤에 석축의 흔적이 있다고 하나, 확인하지 못했다. 마을 주민 김옥규씨에 의하면 한말에 신남일 의병장군의 활동 근거지였다 하며, 장수굴, 장수 발자국, 말발굽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20. 內城마을 土城

소재지 : 羅州市 細知面 城山里 內城 마을

축조 시기 : 고대(추정)

- 개요 : 내성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대나무 밭이 토성지로 추정된다. 마을 주민 곽만석씨(66세)에 의하면 옛날 村長이 살던 곳이라는 전승이 있다 하고, 마을 입구에 오래된 우물터가 있으며, 마을 이름이 內城인 것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토성일 가능성이 있다.

21. 鐵川里 內洞 土城

소재지 : 羅州市 鳳凰面 鐵川里 內洞 마을

축조 시기 : 고대(추정)

- 개요 : 내동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대나무 밭과 둔덕이 토성지로 추정된다. 우물터가 마을 입구와 둔덕 밑에 있으며, 연못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