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num.mokpo.ac.kr/kangbr/www/탐진댐역사유적.htm
장흥군 탐진댐 수몰지역 문화유적지표조사

-역사유적 분야-

Ⅰ. 조사 개요

본 조사는 탐진댐 건설로 수몰될 예정 지역으로 설정된 장흥군 유치면 일대의 역사유적을 대상으로 하였다.

지금까지 소개된 장흥군 유치면 소재의 역사유적의 일반현황은 다음과 같다. 關防遺蹟으로는 修仁山城과 修仁山烽燧址가 있으며, 儒敎遺蹟으로는 [江城書院](勒龍里)을 비롯하여 [烈女安東權氏之閭}(五福里), [孝子文就光命旌之閭](朝陽里) 등의 旌閭가 있고 樓亭으로는 [永歸亭](丹山里), [望華亭](雲月里), [蓮堂](新豊里), [梧崗亭](朝陽里) 등이 있다. 陶窯址로는 龍門里 옹골에 가마터 2기가 있다. 그리고 碑閣으로 [雙孝碑閣](德山里)이, 금석문으로는 강성서원 내 [楓菴文緯世神道碑] 등이 있다.

이 중 탐진댐 건설로 수몰예정지역에 포함되어 있는 역사유적은 유교유적으로 [江城書院], [永歸亭], [雙孝碑閣] 등 3곳과 [楓菴文緯世神道碑]가 있다. 龍門里 陶窯址도 수몰대상에 해당한다. 그밖에 기왕의 보고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魏啓性施惠碑閣](丹山里)과 雙孝碑閣 周邊의 [文桂泰施惠碑]와 [文五潤遺墟碑](德山里)를 추가할 수 있다. 한편, 五福里 소재의 [烈女安東權氏之閭]는 원래의 위치로 볼 때는 수몰대상이나 이미 90년대초반에 有治面 冠洞里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보고대상에서 제외하였다.

1. 조사 기간 : 1998. 2월∼8월

2. 조사 책임자 : 高錫圭(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姜鳳龍(목포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3. 조사 및 보고서 작성과정

1) 기왕의 조사보고서인 {長興郡의 文化遺蹟}(목포대학교 박물관, 1989)과 {有治面誌}(장흥문화원, 1992)에 정리된 내용을 우선 참고하고, 다음에 지리지류와 읍지류의 검토를 통해서 유치면 관내의 역사유적의 목록을 작성하고, 이중 수몰지역의 역사유적을 선별하였다.

2) 해당 지역에 대한 전면 답사와 부분 답사 조사를 10여차례 실시하여 유적의 현황을 파악하고 사진을 촬영하였다.

3) 유적은 서원·누정·도요지·비각 및 비문의 순서로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조사자 의견으로 수몰에 따라 보존이 필요한 유적에 대한 대책을 간략히 제시하였다.

Ⅱ. 書院

1. 江城書院

· 위치 : 有治面 勒龍里 月川 2구 655번지

· 연혁

서원 사우 중 국가로부터 사액을 받은 사액서원은 전남 광주지역에 모두 33개소가 있다. 그 중 장흥에는 장흥읍의 淵谷書院(1772년 사액), 蓉山面의 忠烈祠(1798년 사액)와 더불어 유치면의 江城書院(1785년 사액) 등 3개소가 있다. 3개 사액서원 중 하나인 강성서원은 그만큼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크다.

江城書院은 임란 때 倡義한 장흥출신 士林 楓菴 文緯世의 학문과 절의를 기리고 그를 享祀하기 위해 1644년(仁祖 22)에 月川 마을에 세운 月川祠에서 연원한다. 1702년(숙종 28)에는 太學章甫의 상소로 국가에서 인정하는 祠宇로서의 건립절차와 규모를 새롭게 마련하였으며, 1729년(정조 5)에는 풍암의 神道碑가 勒龍里에 처음 세워졌다.

그후 1734년(영조 10년)에는 월천사에 풍암의 9대조인 三憂堂 文益漸을 合享하면서, 삼우당을 主壁으로 하고 풍암을 配享하게 되었다. 이어서 1785년(정조 9)에는 전라도 유생 600여인이 삼우당 문익점의 공덕을 흠모하여 賜額할 것을 청하는 請額疏를 올리자,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삼우당의 출생지인 晋州 江城(오늘날의 경남 산청)의 이름을 따서 江城書院이라는 額號를 지어 내리고, 鄭啓忠을 禮官으로 내려보내 致祭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 공인 서원으로서 면모를 일신하였으며, 1812년(순조 12)에는 풍암 문위세의 신도비를 서원의 사당과 강당 사이로 옮겨왔다.

그러나 1868년(고종 5년)에 조정의 대대적인 서원철폐책에 따라 강성서원도 훼철되고 말았으며, 서원 소속 전답들은 모두 養士齋에 귀속되었다. 그후 1894년에 후손인 貞源·郁浩 등이 소속 전답의 일부(7斗落)를 환속시키고, 제단을 설하여 享祀를 재개하였다.

서원의 중건은 1905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장흥군수 李章鎔이 앞장서서 향교유생들의 협조를 얻어 迦智山의 소나무와 修仁山의 잣나무를 써서 강당을 重建하였으며, 1933년에는 사당인 崇德祠를 마저 중건하였다. 그리고 1975년에 다시 한 차례 重修를 거쳤으며, 1984년 2월 29일에 전남 문화재자료 제71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다 상세한 설명은 {有治面誌}(1992, 장흥문화원) 중 제8장 [有治사람들의 삶의 흔적] 제4절 [儒敎遺蹟] 중 [江城書院] 부분이 도움된다.

· 참고문헌 : {文獻備考}, {江城祠圖記}(姜世晃 撰), {新增東國與地勝覽}, {書院可攷}, {江城書院誌}, {江城祠重修記}, {正祖實錄}, {冠山誌}

· 유적 현황

1) 講堂 :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립이후에 여러차례 개보수하여 현존 상태는 양호하다. 중앙의 정면 3칸, 측면 2칸에는 우물마루를 깐 대청을 드리고 양측 夾間으로는 모두 온돌방으로 평면을 계획하였다. 구조는 40cm 높이의 원형 초석 위에 원통형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를 昌枋으로 결구한 소로수장집이며, 架構는 大梁 위에 童子柱를 세워 宋梁을 얹힌 5량 형식이다.

외부 처마밑에는 '江城書院'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江城院讚詩](李晩燾, 1785년), [江城院址壇所事蹟](文桂泰, 1916), [江城書院講堂重建上梁文](文桂泰, 1906년), [講堂重建有司錄](1905), [祠堂重建有司錄](1929년) 등 10매의 현판이 걸려 있다.

2) 祠堂 :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 형식으로 쌓았고 그 상면은 시멘트로 마감하였고, 전면에는 중앙칸에까지 3곳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초석은 막돌 주초를 사용하였으나 나머지는 方柱이며 기둥머리에는 ?包構成 없이 昌枋으로만 결구하였다. 창방 위로는 기둥 사이마다 화반을 배치하였다. 架構는 1高柱 5梁架로 자연스럽게 휜 비교적 큰 대들보가 특이하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로 처리하였다.

외부 처마 밑에는 崇德祠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삼우당과 풍암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3) 外三門 : 서원의 정문.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 솟을 대문이다. 구조는 막돌 초석위에 方柱를 세우고 납도리로 결구한 3梁 집이다. 3칸 모두에 쌍여닫이 板長門을 달았으며 중앙칸 위로는 홍살을 꽂았다.

4) 內三門 : 강당과 사당을 연결하는 문.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 솟을 대문이다. 3칸 모두에 쌍여닫이 판장문을 설치하였는데 양 夾間에 설치한 굵직한 문지방이 특히 눈에 띤다. 구조는 막돌 초석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모접은 납도리로 결구한 3량 구조이다.

5) 楓菴文緯世神道碑 : 黃景源撰, 柳運濟書, 높이 210cm, 넓이 84cm, 두께 22cm. (비각 및 비문에서 별도 정리)

6) 그밖에 1982년 12월 3일자에 보호수로 지정된(고유번호 10-16-34) 은행나무 2그루가 있다. 숙종대 문익점의 13대 손인 문천무가 관의 뜻을 받들어 제자들에게 예문을 익히게 하기 위해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전한다. 수령은 350년.

Ⅲ. 樓亭

1. 永歸亭

· 위치 : 有治面 丹山里

· 연혁 및 유적 현황

1923년에 復齋 魏啓玟이 세운 정자이다. 다른 정자와는 달리 마을과는 꽤 떨어져 탐진강을 건너 오르는 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바로 아래 탐진강이 굽어 보이고 강 너머로 단산마을이 보인다. 동백과 노송 등이 정자의 주변을 잘 꾸며주고 있어 경관의 측면에서는 손꼽을 만큼 빼어나다. 건립연대는 1923년으로 비록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그 구조 및 양식 등 전체적으로 전통 정자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집이다. 평면구성은 중앙으로 전후면 退間 사이에 방 1간을 두고 남측으로는 대청을, 북측으로는 윗쪽에 다시 방 1간을 배치하고 앞쪽으로는 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설치하였다. 막돌로 쌓은 2자 높이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圓柱를 세웠으며 그 위로는 창방을 걸고 小累를 배치하였다. 架構는 8角道里를 걸은 7樑架이며 양 측면의 중심기둥 위로는 大樑 위로 충량을 걸었다. 창호는 대청쪽으로는 4분합 들어열개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Ⅳ. 陶窯址

1. 龍門里 陶窯址

· 위치 : 有治面 龍門里 옹골

· 유적 현황

용문리 公首平橋를 지나 보림사로 향하는 일반국도를 따라 약 500미터 정도 가면 우측에 노리목 마을로 들어가는 小路가 있다. 이 소로로 들어가 마을을 지나 약 100미터 가량 가면 窯址가 있는 옹골이 보인다. 옹골에는 2기의 가마터가 심하게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1호는 옹골로 통하는 소로 좌측 산사면에 위치해 있으며, 여기에서 소로를 따라 150미터가량 올라가면 좌측 산사면에 새로 개간된 밭 뒷편에 2호 가마터가 있다. 가마터에는 현재 窯壁片은 일부 남아 있을 뿐이고, 陶片과 陶枕 등은 주위에 아직 많이 산포해 있다. {有治面誌}(1992, 장흥문화원)에 따르면 당시 조사할 때 수습된 유물들이 대개 盞 鉢 접시류 등이며 器種은 口緣이 外反된 것과 直立인 것 등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 또 굽다리에 모래비짐을 놓고 포개어 소성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 胎土비짐눈이 있는 것 등이 일부 남아 있다. 한편 {고즐고을 장흥}에 의하면 발견 당시 3기의 가마가 확인되었으나 龍門堤 공사로 1기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Ⅴ. 碑閣 및 碑文

1. 魏啓性施惠碑閣 및 碑文

· 위치 : 有治面 丹山里 단산마을 23번 국도 옆

· 연혁

1913년(계축) 3월 15일에 제작된 [通政大夫前參奉魏公啓性賑恤不忘碑]란 제목의 현판이 비각의 뒷내면 벽에 걸려 있다. 또 비각 안에 1916년(병진년)에 姜義馨이 짓고 1924년(갑자년)에 柳珏羲가 쓴 [施惠碑序]와 魏啓性의 三從弟 魏啓玟이 1923년(계해년)에 짓고 1924년(갑자년)에 藥圃 魏世良이 쓴 [通政大夫前參奉魏公啓性施惠碑閣上樑文]이 아래 위로 나란히 현판으로 걸려 있다. 위계민은 영귀정을 세운 인물이다.

'시혜비서]에 따르면 冠山巨族 魏德의 후예인 위계성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70餘家의 烟賦月稅를 대신 내주고 진휼도 해주자 마을 사람들이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碑를 鑄造하여 세워 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通政大夫前參奉魏公啓性施惠碑]는 철비로 되어 있고, 1916년에 세워졌다. 위계성의 진휼 행위는 1913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각은 1923년에 세워졌다. 철비 옆에는 또하나의 석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1925년에 만들어진 [淑夫人淸州金氏彰善碑]이다.

· 유적현황

비각의 현액은 [施惠閣]이고 정면 측면 각 1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시혜각에 들어가는 문의 이름은 [永敬門]이다. 아담하고 운치있게 꾸며진 보기좋은 비각이다.

철비(높이 147㎝, 가로폭 30㎝, 세로폭 4㎝)의 앞면에는 "通政大夫前參奉魏公啓性施惠不忘碑"라 써있고 그 좌우에 "斂而不給 飢而不食 減睹助之 出粟賑之"를 두줄로 나누어 썼다. 뒷면에는 "丙辰(1916년) 五月 日 有治丹山村 竪"라고 되어 있다.

석비(높이 137㎝, 가로폭 42.5㎝, 세로폭 12.5㎝)의 앞면에는 "淑夫人淸州金氏彰善碑"라는 제호를 중앙에 두고 좌우에 역시 두줄로 "克紹夫德 万口同休 捐金補戶 一片堪語"라 되어 있고 뒷면에는 "乙丑(1925년) 六月 日 有治面立"이라 되어 있다.

2. 雙孝碑閣 및 碑文

· 위치 : 有治面 德山里 덕산마을 입구 삼거리 23번 국도 옆

· 연혁

건물의 정면에는 [雙孝碑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그 옆에 [賑濟碑閣]이란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通政大夫 中樞院議官 文桂泰가 쓴 [雙孝碑閣上樑文]에 따르면 1918년(무오)에 상량한 것으로 되어 있다. 楓菴 文緯世의 8세손 錫璉(字는 器重)이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뒤, 홀로 남은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고 아내 盧氏 역시 몸을 아끼지 않고 노고를 다해 섬겼다. 어느날 어머니가 쓰러지자 석련은 손가락을 잘라 피를 주었고(斷指注血), 아내는 넓적다리 살을 잘라(割股) 드시게 하여 병을 구완하였다. 마침내 돌아가심에 棺을 일일이 檢攝하고 날마다 울며 侍墓의 정성을 다하였다. 이런 두분의 효성을 기념하는 뜻으로 1916년(병진)에 李晩?가 비문을 짓고 1918년(무오) 4월에 후손 五潤이 세웠다. 석련의 아들로는 孟潤, 五潤, 重潤, 季潤이 있다. 상량문을 짓고 비각을 세우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桂泰는 석련의 孫이다.

한편 그후 文桂泰, 桂洪, 禹烈 등이 진휼한 덕을 기리기 위한 비들이 함께 세워지면서 [賑濟碑閣]이란 현판을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 유적현황

좌우 1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건물로 돌담으로 둘러 싸여 있다. 덕산리 문씨집안의 근대사 내력을 금새라도 말해주려는 듯 많은 사연들로 젖어 있는 듯하다.

6개의 비가 세개씩 두줄로 세워져 있다. 좁은 비각 내에 이렇듯 많은 비가 서 있어 비각 내가 비의 숲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전면 우측에서 시계방향으로 각 비의 제목 및 관련사항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斗峯文公禹烈施惠紀念碑(높이 117㎝, 가로폭 42㎝, 세로폭 13.5㎝)

1934년 5월에 세웠다. 가을 추수시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고 각종 부담을 가볍게 해 준 은혜를 기념하기 위한 비다.

② 通政大夫中樞院議官文公桂泰施惠不忘碑(157㎝, 47㎝, 13㎝)

민호의 부담을 덜어주고 배고픈 자들을 진휼해 준(擔戶?飢)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세운 비이다. [通政大夫前議官文公桂泰施惠碑]라는 이름의 비문이 쌍효비각 뒷편 산록에도 있다(별도 정리).

③ 有治面長文公桂洪淸德紀念碑(147㎝, 49㎝, 18.5㎝),

주머니를 털어 빈민을 구제하고(捐?補戶) 글방을 세워 유풍을 장려한(設塾奬儒) 문계홍의 덕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문계홍은 1916년 3월부터 1925년 3월까지 유치면장을 지냈다.

④ 孝子贈嘉善大夫戶曹參判文公諱錫璉孝婦贈貞夫人光山盧氏之碑(162㎝, 45㎝, 13㎝),

쌍효비각의 주인격에 해당하는 비로 문석련과 그의 아내 노씨의 효행을 기록한 비이다. 1916년(병진)에 李晩?가 비문을 짓고 1918년(무오) 4월에 후손 五潤이 세웠다. 봉사는 계홍의 몫으로 되어 있다.

⑤ 有治面長文公桂洪淸德紀念碑(132㎝, 41㎝, 9㎝),

내용은 ③과 같다. 1930년에 중수한 비다.

⑥ 淑夫人東萊鄭氏彰善碑(190㎝, 49.5㎝, 18㎝)

3. 楓菴文緯世神道碑

· 위치 : 有治面 勒龍里 月川 2구 655번지

· 연혁

강성서원 내에 소재하는 이 신도비는 1729년(정조 5) 勒龍里 마을 입구에 세워졌던 李玄逸 撰의 신도비를 改竪한 것이다. 강성서원이 사액을 받은 후 얼마 지난 1812년(순조 12)에 지금의 위치인 강당과 사당 사이에 다시 세워졌다. 문중에 전해지는 바로는 李玄逸(1627∼1704) 撰의 묘갈명은 남인들의 정치적 파란과 연관되어 매몰되었다고 한다. 연대는 분명치 않다. 이현일은 眉水 許穆의 추천으로 예조참판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과거제의 개혁을 상소하기도 한 인물이다. 현재의 신도비는 黃景源이 撰하고 柳運濟가 書한 것이다.

비문에는 문위세의 행적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그의 의병활동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비문은 "有明朝鮮國 贈嘉善大夫兵曹參判行坡州牧使楓菴文先生神道碑"로 시작하고 있다. 문위세의 일대기는 다음과 같다.

문위세는 字가 叔章이고 號가 楓庵이다. 忠宣公 益漸의 9세손으로 중종 29년(1534)에 태어났다. 9세 때 외숙인 橘亭에게서 受業하고 귤정의 천거로 13세 때에 退溪 李滉의 문하에 執贄하여 수년간 왕래하여 많은 감화를 받았으나 母夫人이 연로하여 선생을 오래 모시지는 못하였다. 25세 때 퇴계 선생이 鳴玉臺記를 지으면서 공에게 이를 집필하게 하였다. 27세 때 퇴계 선생이 八陳圖說을 공에게 내주면서 格物致知의 一端이니 여가에 궁구하도록 하였다. 이는 후일 임진왜란을 맞아 대공을 세우게 되는 근원이 되었다.

명종 22년(1557)에 모친의 명으로 진사시에 응하여 登第하었으나, 곧 科業을 폐하고 迦智山에 들어가 산수와 벗삼으면서 白茅 雲菴을 세워 주위에 梅竹을 심고 단정히 않아 주야로 聖賢書를 읽었으며 제자들에게는 부지런히 공부하도록 권하였다. 당대 명유인 月川 趙穆, 鶴峯 金誠一, 西崖 柳成龍, 栗谷 李珥, 寒岡 鄭述, 艮齊 李德弘, 高峰 奇大升 등과 道義交를 맺고 학구에 전념하여 학덕이 날로 높아갔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공은 任啓英, 朴光前, 鄭思悌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공이 어려 읍의 수령들을 설득하여 兵糧 募穀을 원할히 하여, 巡察使 權慄將軍의 馳啓로 行在所에서 戰功을 논의하여 공을 으뜸으로 삼았으며, 朴光前의 上啓로 東宮에서도 공의 전공을 으뜸으로 삼았다. 이로써 龍潭縣令을 특별 제수받아 부임하여 백성을 크게 교화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에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자 縣民들이 號哭하면서 그 은혜를 기리는 비를 세웠다.

선조가 공의 治積을 찬하여 파주목사에 제수하였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龍門山 아래의 月川에서 琴書를 즐기다가 선조 33년(1600) 3월 14일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조 22년(1798)에 三道 유생들의 상소(疏頭 任五源)로 병조참판을 특별 추증받았다.

· 유적현황

碑身의 높이는 210㎝, 가로폭 84㎝ 세로폭 22㎝, 총높이는 260㎝이며 글씨의 크기는 2.5㎝이며 총 21행으로 각 행마다 72자로 되어 있다. 행서체로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4. 文桂泰施惠碑

· 위치 : 有治面 德山里 덕산마을 입구 삼거리 23번 국도 옆 쌍효비각 뒤

· 유적현황

쌍효비각 뒤 우측 산사면의 바위 사이에 석비를 끼워 넣은 특이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비명은 "通政大夫前議官文公桂泰施惠碑"라 되어 있고 그 비명의 양 옆에 두줄로 나뉘어 "尊信師道 兩世施義 夷淸惠和 范麥華禾"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비를 세울 때의 有司는 韓時浩, 李春根, 文景烈 등 3인으로 비의 우측 하단에 쓰여 있다. 비의 좌우측과 뒷면이 콘크리트에 묻혀 바위틈에 들어가 있어 건립연도는 확인할 수 없었다. 이 비의 상태는 매우 양호하여 멀리서도 글자가 뚜렷이 보인다.

5. 文五潤遺墟碑

· 위치 : 有治面 德山里 덕산마을 입구 삼거리 23번 국도 옆 쌍효비각 뒤

· 유적현황

文桂泰施惠碑와 같은 모습으로 나란히 세워져 있다. 비명은 "故同知稼圃文公五潤遺墟碑"로 되어 있다. 五潤은 [쌍효비각]의 주인공인 문석련의 둘째 아들이다. 따라서 계태보다는 한 항렬 위이다. 이로 볼 때 19세기 후반경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오윤의 이름이 새겨진 부분이 마모되어 글자가 분명치 않다.

Ⅵ. 역사유적에 대한 조사자 의견

1. 江城書院은, 장흥지방의 학문과 절의를 상징하는 楓菴 文緯世와 그의 9대조로서 고려말 목화씨를 원으로부터 처음 들여와 보급한 三憂堂 文益漸을 合享한 서원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다. 따라서 移建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되는데, 이건 지역을 선정할 경우 다음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유치면 수몰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을 선정하여 이건함으로써 수몰지구의 정신문화유산을 보존·계승하는 중심지로 활용한다. 둘째, 이 지역사회에 위치한 대학 중에서 대학 구내에 적당한 공간이 확보될 수만 있다면 이를 대학 안으로 이건하여 풍암과 삼우당의 학덕을 기리고 교육하는 전통문화의 교육공간으로 활용하는 것도 가하다고 본다. 다만 현재 강성서원이 남평문씨의 종중 성역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그 이건 지역 선정 문제는 문씨 종중의 의견을 고려함이 필요하다.

2. 永歸亭은 제대로된 전통 정자의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고 현 건물 상태도 양호하다. 그대로 수몰시키기엔 아까운 역사유적이다. 따라서 위씨문중에서 원하는 장소로 이건시켜 주어 보존시키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위씨문중에서도 이건을 바라고 있다. 영귀정의 관리자는 위대원(장흥의료조합부장) 위성수(☎862-2063)이며, 위성수씨가 건물의 현판을 보관하고 있다.

3. 용문리 도요지는 조선시대 생활도기를 생산하던 요지로서, 조선시대 생활도기의 생산방식과 양식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중요 유적지이다. 이 점에서 이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4. 魏啓性施惠碑閣은 전체 모습이 단아하며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고, 특히 비각 안에 안치되어 있는 鐵碑는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당시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각 전체를 이전하여 보존할 필요가 있으며 관리인 위춘호씨(☎862-2707)도 이를 원하고 있다.

5. 楓庵文緯世神道碑는 마땅히 江上書院과 함께 이전되어야 할 것이고, 그밖에 유치면 수몰지구에 산재해 있는 비각과 비들은 한 군데로 이전·보존하여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필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