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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지역의 옹관묘 
 
-대형옹관고분 변천과 그 의미에 대한 시론-
1. 머리말

    영산강유역의 대형옹관고분은 기존의 옹관매장풍습이 변화·발전된 독특한 구조 때문에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야 비로소 대형옹관고분에서 보이는 발전과정에 대해 설명되고 있고, 나아가 옹관고분세력과 백제와의 관계에 대한 설명도 제시되고 있으며 발표자도 이 두가지 부분에 관심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의 설명은 대체로 옹관고분세력이 독자적인 정치체를 이루고 있었으며 백제와 대등한 관계에서 존속하였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러나 토착사회가 사용하는 독자적인 묘제임은 인정되나 이것을 독자적인 정치체임를 설명을 위한 충분조건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검토해야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백제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백제와는 별개의 발전과정, 또는 대등한 정치체라는 점이 강조되는 것도 역시 검토의 여지가 남아있다. 따라서 이번 발표에서는 이 두가지 문제의식을 간략히 정리해 보고자한다.

2. 대형옹관고분의 변천

    옹관에 대해서는 이미 7개의 형식을 분류, 시간적인 흐름에 따른 옹관형식의 변화를 추정한 바 있다(서성훈·성낙준 1986:pp.98-110, 서성훈 1987:pp.501-524). 그러나 이 글의 전개를 위해 세부적인 분류를 피하고 옹관의 변화, 옹관매장형태, 분구의 형태 등을 종합하여 크게 제1기, 제2기, 제3기로 분류한다. 시기적인 변천방향은 대체로 서성훈,성낙준 案과 동일한 변화방향이다.

1) 제1기 옹관고분의 특징

    제1기의 옹관은 기형전체가 U자형에 가까워지나 옹관몸체와 목의 구분이 확연하고 저부에 원형돌기가 있는 것이다. 또한 분구는 너비 10m 전후의 원형분을 이루고 있다. 그 예로서 영암 수산리·신산리·옥야리 14호분 옹관을 들 수 있다. 그 중 분구전체가 조사된 옥야리 14호분은 너비 11m의 원형분으로 중앙에 1기의 옹관을 안치하였다. 또한 분구 주위를 돌아가는 도랑을 설치하였다. 송산리 옹관고분도 규모가 너비 12m의 원형분이다. 그렇지만 뚜렷한 분구를 갖지 못하고 고분 자락이나 주변에 별도로 안치된 경우도 있는데 옥야리 14호분 2호, 3호옹관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함평 만가촌고분에서는 분구가 사다리꼴을 이루는 독특한 형태가 확인된 바 있다. 만가촌고분의 옹관 형태는 비교적 고식이지만 선황리 등과 같은 초기형태의 옹관보다는 발전된 것으로 보여 제1기 옹관고분으로 분류하고자 한다.

2) 제2기 옹관고분의 특징

    제2기의 옹관은 기형전체가 U자형에 가까워지며 저부의 돌기는 없어지고 원형 음각이 새겨지거나 민바탕이다. 분구는 너비 약 10∼50m로서 규모차가 크며 형태도 소규모의 경우 원형에 가깝고 대규모인 경우 장타원형을 이룬다. 분구 주변에는 도랑을 설치하였으며 분구의 장축을 따라 수 기의 옹관이 배열되어 있다. 영암 초분골 1호분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매장주체부를 다수 안치하고 있는 점이다. 제1기의 옹관인 영암 송산 옹관고분, 함평 만가촌고분 등 다장성이 의심되는 곳도 있으나 적어도 2기 이상의 매장주체부가 확인되지는 않았다. 반면 제2기인 초분골 1호분의 경우 길이 33m에 이르는 큰 규모의 장타원형 고분으로서 옹관 5기와 토광 1기가 묘역의 구분없이 분구 정상부의 능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옥야리 6호분도 길이 30m, 너비 23.5m로 대형에 속하는 장타원형 고분인데 분구의 정상은 물론 분구의 북서쪽 자락부분까지 옹관을 배치하고 있다. 매장주체부가 옹관이 아닌 토광을 위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초분골 2호분은 길이 16.5m, 너비 15m의 방형분으로 추정되며 토광묘가 분구의 정상을 따라 분포하고 전형옹관은 그 주변에 배치되었다. 신연리 9호분은 길이 16∼19m, 높이 0.75m∼2m의 방대형 고분이다. 모두 7기의 매장주체부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 분구의 중앙에는 토광묘가 자리잡고 있으며 옹관은 중앙에서 비켜난 주변부에 위치한다. 옹관과 토광이 주도적인 매장주체부를 달리하는 것이 무엇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분구내에 다수의 매장주체부를 안치하는 현상은 동일하다. 제2기 옹관고분의 특징은 이러한 다장성이 두드러지면서 분구의 규모도 대형화하는 점이다.

    한편 분구의 축조는 매장주체부를 추가하여 안치하면서 점차 확장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옥야리 6호분에서는 중심주체부가 제2기의 옹관으로 판정되는데, 제3기의 옹관이 분구 장축의 가장자리에서 확인된 바, 추가증축을 생각할 수 있는 유적이다. 또한 초분골고분도 층위상으로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으나 옹관이 추가로 안치되면서 분구가 증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최근 발굴조사된 나주 복암리고분에서도 확인되는데, 제1기의 늦은시기나 제2기로 추정되는 옹관이 확대,증축되면서 제3기 옹관, 석실분이 축조된 예이다(문화재연구소, 1996). 이러한 확대,증축은 신촌리 6호분과 같은 제3기 옹관고분까지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3) 제3기 옹관고분의 특징

    제3기에는 기형전체가 전용옹관으로서 완성되어 거의 U자형을 이루나 일부 제2기에 해당하는 옹관형태가 계승되기도 한다. 분구는 20∼40m로서 규모의 차이는 크나 장,단축의 너비가 거의 상관분포를 보이고 있다. 분구의 형태는 제2기와 동일한 장타원형, 방형, 방대형, 원형 등이 있다. 분구주변에는 도랑을 설치하였으며, 나주 신촌리 9호분 등과 같이 옹관을 분구의 중앙에 집중하여 안치하는 경우, 그리고 신촌리 6호분처럼 분구중심축을 따라 배치하는 경우가 있다.

    신촌리 9호분은 길이 30.28∼34.85m, 높이 4.62∼5.46m인 대형의 방대형분구이며 11∼12기의 옹관이 고분의 정상부에 집중적으로 안치되었다. 각종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금동관, 금동신발 등과 함께 환두대도 등 철기류가 있다. 또한 대안리 9호분도 길이 34.94∼44.3m, 높이 8.41m의 대형분구로서 9기의 옹관을 분구정상에 집중적으로 안치하였으며 금동제품과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그 중 금동관이나 금동신발 등은 5세기중엽∼말의 익산 입점리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계통으로서 유력지배층의 부장품으로 볼 수 있다. 이 유물들은 백제와 관련된 것으로(김기웅 1988:pp.218-224) 여타의 금동제품이나 철제 의기류, 무기류 등과 함께 옹관고분에서는 보이지 않던 이질적인 요소이다.

    입점리 1호분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금동제품은 백제세력에 의해 제작,수입된 다음 각 지방으로 분배된 것이다. 또한 분배는 새로 편입된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하고 백제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권오영 1988:pp.3-28). 중국계의 도자기나 백제계의 유물은 일본 古墳時代의 三角緣神獸鏡 분배(小林行雄 1957)와 같은 정치적 성격을 지닌 威勢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이 시기가 되면 고분 부장유물이 후장화된다. 부장유물의 추이를 간단히 살펴보면 <표1>과 같다. 제2기 고분은 부장유물이 평균 3.3개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대략 2∼2.5개 정도에서 머문 반면 제3기고분의 부장토기는 신촌리 9호분이 평균 6개를 부장하였고 대안리 9호분은 평균 2.6개를 부장하였다. 제2기보다 제3기에 와서 토기부장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인다. <표 2>는 토기의 부장차이를 보다 세부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표 1> 제3기 고분의 부장토기수 및 평균치
 
유구
부장토기
평균
비고
내동리1호분
1
0
0
내동리2호분
1
2
2
내동리3호분
1
3
3
내동리4호분
1
1
2
내동리5호분
4
9
2.3
내동리6호분
5
8
1.6
만수리2호분
4
7
1.8
초분골1호분
8
10
1.3
옹관+토광
초분골2호분
2
3
1.5
신연리9호분
4
13
3.3
옹관+토광
 
<표 2> 제3기 고분의 부장토기수 및 평균치
(총평균 : 신촌리 6개, 대안리 : 2.6개)
분류
유구
부장토기
평균
신촌리9호(위세품부장)
6
40
6.7
신촌리9호(위세품없음)
4
20
5
대안리9호(위세품부장)
4
17
4.3
대안리9호(위세품없음)
5
7
1.4
 

    위세품이 부장된 것은 신촌리 9호분이 6.7개, 대안리 9호분이 4.3개이며 부장하지 않은 것이 신촌리 9호분 5개, 대안리9호분 1.4개의 평균치를 보였다. 위세품의 부장유무에 따라 차이가 분명히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특히 신촌리 9호분 乙棺의 경우 금동관, 관모, 환두대도 등 가장 많고 화려한 위세품이 부장되어 있는데, 부장토기도 총 10개로서 가장 많고 그 중 7개가 옹관의 소옹을 에워싸듯이 밀집부장하고 있다. 이 고분은 출토된 위세품으로 보아 백제와의 관련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분구의 확대,증축이 이루어진 신촌리 6호분에서는 대도가 출토되는 등 이질적인 요소가 나타나기도 한다. 신촌리 6호분은 신촌리 9호분이나 대안리 9호분 등에 비해 정형화, 규격화되지 못하여 그 완성도가 떨어지는 고분이라는 점에서 이들보다 하위의 고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보다 하위의 고분에서도 상기의 의례적인 행위가 확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복암리 3호분에서는 옹관고분을 확대,증축하여 석실분을 축조하였고 동일 분구내에서 석실분의 영향을 받은 돌막음을 한 옹관이 출토되어 옹관의 이러한 전통이 계승된 좋은 예이다.

3. 대형옹관고분 변천의 의미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은 제1기부터 분구가 축조되었고 전용의 옹관이 제작되며 분구의 중앙에 옹관을 안치하는 단독장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미 고분을 사용할 수 있는 지배세력이 각지에 형성되었는데 이른 시기의 옹관묘가 확인되는 함평·해남·영암 등이 그 지역이다. 그런데 제2기 이후의 특징인 대형분구를 갖춘 고분은 영암 시종·나주 반남 등을 중심으로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또한 다장화도 두드러진다. 일반적인 원칙, 즉 '다장→단독장'이라는 등식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내적인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마한이라는 공통된 문화적 배경을 기반으로 고대국가체제를 이룬 백제지역을 주목해 볼 수 있다. 한강유역에서는 이미 3세기대부터 토광묘가 분포하나 유이민계인 적석총이 등장하면서 이와 결합된 복합적인 묘제가 출현한다. 그 중 내부구조가 확인된 석촌동 1호분은 토광묘를 주체로 하는 북분과 적석총계의 남분이 합쳐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토착세력과 지배세력이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한다.(임영진 1995:pp.123-125). 그 관계가 혼인이든 어떤 다른 형태였든 간에 양자 사이에는 묘역을 공유할 만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분묘 및 묘역의 공유는 매장자, 또는 매장자의 안치를 주도하는 세력들 사이에 있어서 상호 동질성, 일체감을 갖게 됨을 의미한다. 즉 한 분구내에 매장자를 안치함으로서 동일분구, 동일한 매장의례, 동일한 제사라는 일련의 과정을 공유할 수 있다. 이는 매장자 상호의 동질성·일체감을 극대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상호관계를 유지·보장하고 재생산하는 방법으로서 적절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같은 맥락에서 옹관고분이 다장성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다장성은 혈연을 기반으로 하며 이는 국가형성과정중에 있던 토착지배세력이 국가라는 문턱에 진입하는데 있어서 오히려 장애가 되는 요인이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위와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다장성이 오히려 국가형성과정에서 나타나는 제속성중 하나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옹관고분단계에서는 국가형성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유력자 개인의 고분이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개인의 단독분이 완성되는 단계는 후대인 석실분 축조단계에 이르러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석실분도 초기의 것들은 나주 반남지역과 가까운 곳에 나타나고 있기는 하나 이내 전 지역으로 확산되어 버린다. 따라서 이 시기가 되면 반남일대의 세력축이 급격히 위축되거나 소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 지역의 토착세력이 국가형성과정의 어느 시점에서 정치체의 독자성을 상실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으며 그 시기는 위세품의 등장을 전후한 시기라고 생각된다.

    제3기가 되면 옹관고분에서는 금동제품 등 이질적인 위세품들이 다수 부장된다. 이들 유물로서 독자적인 지배계층의 성장정도를 가늠하는 인식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들 위세품이 지닌 상징적인 가치를 엄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위세품들은 대부분 백제로부터 유입된 것이 확실하며, 그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백제와의 관계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당시는 이미 지역에 따라 정치체가 상당히 성장한 시기였고, 따라서 어떠한 형태로든 상호 대립과 긴장이 지속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정치체간의 평등한 상호 호혜적인 교환체계는 인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 시기는 상징적이든 실체적이든 간에 불평등을 전제로 한 교환체계가 활발하던 때이다. 그 가까운 예가 백제왕이 중국의 책봉을 받는 것이다. 결국 백제왕은 중국의 책봉을 받음으로써 왕권의 정당성을 보장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에게도 실체적이든 상징적이든 이에 응당하는 보답이 주는 것이 통례이다. 이러한 정황과 더불어 들 수 있는 예가 입점리 1호분일 것이다. 신촌리 9호분에 버금가는 유물을 부장한 입점리고분도 역시 상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독자적인 정치체의 증거가 된다. 또한 유사한 유물을 출토한 일본 熊本縣 船山古墳 등도 독자적인 정치체로 귀결되고 만다. 그러나 두 지역 모두 토착지배세력은 있었으나 독자적인 정치체로 발전한 단계였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신촌리 9호분도 토착세력의 위상을 가늠하기에는 충분한 것이지만 백제를 배제한 독자성은 아직 납득하기 어렵다. 이들 유물이 일과성에 그치지 않고 석실분 축조 이후까지 지속되는 점은 오히려 영산강유역과 백제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밀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금동관 등을 필두로 한 각종 유물들은 백제를 중심축으로 영산강유역, 일본지역 등이 위계적으로 결속된 관계에서 이루어진 위세품의 분배에 따른 결과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즉 이 지역이 이미 백제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라는 질서를 수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며 그 시기는 적어도 5세기 이전이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토착지배세력에게는 이러한 결속관계(분배관계)에 합류하는 것이 내적으로 사회구성원에 대한 지배의 정당성·차별성을 강조하고 재생산하는 사회전략으로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영산강유역의 지배세력은 대내외적인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안으로서 백제왕의 권위를 연결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신촌리 6호분 등과 같이 중소형급의 고분에서도 대형급고분이 점유하던 요소가 채용될 경우, 사회전략적 상징성을 부여했던 것들의 가치가 상실되고 새로운 것에서 가치를 창출하려는 노력이 시도된다. 이른바 경쟁과정(emulation process)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행위가 반복된 것이다. 복암리고분에서 나타나는 제1∼2기에 해당하는 옹관과 이것이 확대,증축된 석실분의 형성과정, 그리고 영산강유역 전체에 파급된 석실분의 축조가 백제의 요소를 큰 마찰없이 받아들인 결과물로 이해하는 부분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임영진, 1990,1992). 그러나 토착지배세력의 이러한 적극적인 행위는 오히려 독자성을 상실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었다. 석실분 등장 이후 백제의 실질지배, 그리고 토착지배세력의 해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도 이에 기인한 것이라고 본다.

4. 맺음말

    고고학적인 자료는 그 존재 자체가 당시 사회를 반영하는 상징물이다. 따라서 고고학자료에서 보이는 제요소는 그 자료를 제작한-또는 축조한- 인간의 행위를 통해 당시 사회의 제요소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중 고분은 매장자와 사회구성원간의 차별성을 강조함으로서 지배력을 유지하는 정치적인 성격이 강한 상징물이다. 그래서 고분의 크고작은 변화는 당시 사회내외적인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영산강유역의 고분은 외적인 자극에 의한 변질이라기 보다는, 토착지배력의 유지,재생산을 위한 대내적 욕구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러한 일련의 행위에 따른 결과물로서 고분의 변화, 위세품의 등장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은 제2기 이후에 나타나는 다장성은 주변지역과의 통합을 위한 전략행위라는 측면에서 검토해볼 수 있다. 제3기가 되어 백제계의 위세품을 부장하고 고분이 후장성을 띠게 된 것은 백제왕실의 권위를 계승하여 지배권력의 정당화하고 사회구성원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후 등장하는 석실분도 동일하 맥락에서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토착세력은 이미 제3기에는 백제왕을 정점으로 하는 사회질서 속에 편입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5세기 이전에는 이미 백제라는 고대국가의 영역권안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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