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num.mokpo.ac.kr/kangbr/옹관해체.htm

5∼6세기 영산강유역 '甕棺古墳社會'의 해체

姜 鳳 龍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1. 머리말

2.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

1) 변화의 내용

2) 전기 횡혈식석실분과 전방후원형고분

3) 후기 횡혈식석실분

3. 문헌 자료의 재검토

1) 5세기의 국제 정세와 영산강유역

2) 백제의 영산강유역 진출과 편제

4. 맺음말

 

1. 머리말

이제까지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에 대한 논의는, 이 지역 자체의 역사 전개 과정은 간과한 채 이에 대한 백제의 지배 관철 여부에만 주로 관심을 보여 왔다. 이는 영산강유역이 최종적으로 백제에 귀속되어 그 지방제로 편제되었다는 결과론적 사실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인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그간 가장 유력하게 제기되고 수용되어 온 견해는, 4세기 후반에 백제가 영산강유역을 완전 병탄했다는 주장을 골자로 한 견해일 것이다(이하 편의상 '통설'이라 칭함). 이는 {日本書紀} 神功紀 49년조에 나오는 백제의 '睏彌多禮' 공략 기사(이하 '신공기 기사'로 약칭함)를, 369년에 백제가 전남지역을 완전 병탄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이에 대한 반론이 고대사학계에서는 물론이고 고고학계에서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먼저 '통설'의 논거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견해가 고고학계와 고대사학계에서 제기되었다. 즉 고고학계에서 영산강유역 특유의 옹관고분의 존재에 주목하여 영산강유역에 백제와 구분되는 독자적 정치체가 5세기 후반 내지 6세기 전반까지 존재했으라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고대사학계에서는 '신공기 기사'에 나오는 백제의 침미다례 공략 기사를, 5세기 중엽 혹은 5세기 후반의 사실을 각색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다음에 '통설'을 비판하면서 제한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는 다시 다음의 두 가지 견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백제가 4세기 후반에 영산강유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것은 사실이나 이를 직접 지배하지는 못하고 일정한 영향력만을 행사하는 데 그치고 있었다고 본 견해와 4세기 후반에 백제가 영산강유역 전역을 군사 점령한 것으로 보지 않고 강진·해남지역에 해양 교역루트의 개설을 위한 거점을 확보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본 견해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5세기 후반이나 6세기 전반에 이르러서 백제가 영산강유역을 완전 영역화해서 직접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한편 최근에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와 倭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해 보려는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이른바 '慕韓論'이 그것이다. 이에 의하면 5세기 단계까지 영산강유역에 독자적 정치체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그 정치체의 실체를 5세기 말의 이른바 '五王時代' 倭 정권의 영향력 하에 있던 '慕韓'으로 보고 있다. 이는 영산강유역에서 확인되는 전방후원형고분을 전거로 하여 영산강유역과 왜와의 관련성을 설정하고, 이를 慕韓으로 간주한 것이었다. 논거 자체는 문제가 있지만,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백제와의 관계에만 한정하지 않고 왜와의 관계에서도 살피려 했다는 점에서 일단 유의할 필요는 있다.

이상에서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둘러싼 기왕의 의견들을 비판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는데, 대부분은 백제의 지배 여부에 한정해서, 그리고 일부는 왜의 영향력 관철 여부에 주목해서 각자의 주장을 개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견해에서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 자체의 실상에 대한 배려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고고학계 일각에서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을 주목하여 이를 마한사의 일환으로 파악하려는 시도가 있긴 하지만,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마한사의 일환으로 단정해 버린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 이러한 문제점들을 염두에 두면서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에 대한 본고의 접근 시각을 제시해 보기로 한다.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영산강유역 고대사회가 '발생·성립-성장·발전-해체·소멸'이라는 자기 전개과정을 밟았으리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3세기 단계부터 영산강유역 지배계층이 타지역과 확연히 구분되는 옹관고분이라는 묘제를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4세기 말에 백제에 완전 병탄되었다고 보든, 혹은 5세기 단계에 왜의 영향권 하에 들어간 것으로 보든, 혹은 6세기 중반 이후에 백제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 것으로 보든, 길고 짧은 기간의 차이는 있겠으나, 분명히 자기 전개 과정이 있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더욱이 최근 논의의 추세에서 5세기 후반 내지 6세기 전반까지 영산강유역 고대사회가 나름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자기 전개 과정에 대한 논의의 필요성은 그만큼 크다.

다음에 이런 관점을 인정한다면, 영산강유역 고대사회가 그 자체의 생존을 위해 다양한 대외관계를 펼쳤으리라는 점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백제와의 관계에만 머물러 백제의 지배 여부만을 따진다거나 왜와의 관계에만 머물러 왜의 영향력 관철 여부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모두 문제를 지나치게 단선화시키고 사실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따라서 영산강유역 고대사회가 백제와 왜와는 물론이고 멀리 중국의 군현 혹은 왕조와도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어 나갔을 것으로 보고, 이러한 다원적 국제 관계 속에서 그의 생존과 소멸의 과정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본고는 이러한 관점에서 옹관고분을 지표로 하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일단 '옹관고분사회'라 칭하고, 고고 자료 및 문헌 자료를 비교 검토하면서 이의 해체와 백제로의 편입 과정을 중심으로 정리하려 한다. 본고에서 '옹관고분사회'의 해체와 백제로의 편입 과정에 관한 문제에만 논의를 한정한 것은 '백제의 지방통치'라는 전체 주제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옹관고분사회'의 성립과 발전에 관한 문제는 다른 지면을 통해서 발표할 것을 기약하고, 여기에서는 필요한 범위 내에서 언급하는 것에 그치기로 한다.

2.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

1) 변화의 내용

옹관고분은 타지역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영산강유역 특유의 묘제로 알려지고 있다. 옹관고분의 분포 범위는 영산강의 중심지인 나주·영암을 위시로 하여 그 유역권에 해당하는 함평·무안·담양·화순·광주, 그리고 바닷길로 영산강유역과 통하는 서남해안의 해남·강진·영광에까지 미치고 있고, 그 축조 시기는 대체로 3세기대에서 6세기 전반에 걸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로써 옹관고분이라는 지배층 묘제를 공유하는 단일 政治勢力圈[연맹체]으로서의 '옹관고분사회'의 공간적 범위를 영산강유역으로, 그리고 시간적 범위를 3세기대에서 6세기 전반까지로 일단 설정해볼 수 있겠다.

이러한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지는 영산강의 큰 지류인 삼포강을 따라 연접해 있는 영암 시종면 일대와 나주 반남면 일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에는 최대급의 옹관고분이 최고의 밀집도를 보이며 분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종면에 성틀봉토성, 반남면에 자미산성 등과 같은 성곽시설까지 확인되고 있어서, '옹관고분사회'의 중심 맹주세력의 입지처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종면 일대의 옹관고분은 대체로 3세기대∼5세기 전반에 조영된 것으로 편년되고 있는 반면에, 반남면 일대의 그것은 대개 5세기대∼6세기 전반에 조영된 것으로 편년되고 있어, 5세기 중반을 분기점으로 하여 '옹관고분사회'의 맹주세력이 그 중심지를 삼포강 하류의 시종면 일대에서 상류의 반남면 일대로 옮겨갔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여기에서는 시종면 일대를 '옹관고분사회'의 전기 중심지로, 반남면 일대를 후기 중심지로 구분해 두기로 한다[지도 1 참조].

그런데 이처럼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지가 옮겨감과 함께, 후기 중심지에서 몇가지 중요한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어서 주목된다. 먼저 옹관고분의 규모가 더욱 대형화되었고 그 부장품도 薄葬의 경향을 탈피하여 화려한 厚葬의 경향성을 띠어 갔으며, 성곽도 시종의 성틀봉토성에 비해 반남의 자미산성의 규모가 훨씬 커졌던 것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와 함께 반남면 일대가 시종면 일대에 비해 월등히 넓은 평야를 갖고 있다는 점을 아울러 생각한다면, '옹관고분사회'의 맹주세력이 5세기 중반 이후에 그들의 기지를 보다 넓은 삼포강 상류쪽의 반남면 일대로 옮겨 감으로써, 내실을 더욱 다지는 한편 '옹관고분사회'에 대한 영도권을 더욱 강화하려 했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5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맹주세력의 영도권 강화의 필요성이 갑자기 대두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영산강유역에서 확인되는 또 다른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즉 5세기 중·후반의 바로 그 시점에 백제 계통의 횡혈식석실분과 왜 계통의 전방후원형고분이라는 외래의 고분이 주로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매우 주목되는 현상으로서,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지 이동 현상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다각도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2) 전기 횡혈식석실분과 전방후원형고분

지금까지 전남지방에서 확인된 석실분 유적은 약 160여개소에 달하고 석실분의 수는 500여기를 상회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중 영산강유역(전남 서부지역)에 절대 다수인 120여개소의 석실분 유적이 밀집 분포하고 있다. 이중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10여개소에 불과한 상태라서 영산강유역 횡혈식설실분의 역사적 의미를 추적한다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는 지금까지의 발굴 조사나 지표 조사를 통해서 확인된 영산강유역 횡혈식석실분 자료들과 이의 성격을 추적한 몇몇 논문을 참고로 하여 시론적 차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추적해 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영산강유역 횡혈식석실분에 대한 연구에서 필자가 제일 먼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축조기법을 기준으로 하여 횡혈식석실분을 크게 전기와 후기의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서는, 전기횡혈식석실분과 후기 횡혈식석실분의 세부적인 차이점으로, 석실의 평면형태 및 천정의 결구방식, 그리고 석실의 장축방향, 출토 유물 등을 지적하기도 하였지다. 그렇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전기 횡혈식석실분[5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 전·중반으로 편년함]이 옹관고분의 전통을 상당 부분 견지하고 있음에 반해, 후기 횡혈식석실분[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중반까지로 편년함]은 그 형식과 내용에서 전형적인 백제식[부여식]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전기 횡혈식석실분에 견지되어 있는 옹관고분의 전통으로는 석실을 지상의 봉분 속에 설치했다는 점이 가장 중시될 수 있을 것인데, 이는 옹관을 지상의 대형 봉분 속에 심는 방식으로 매장했던 옹관고분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은 지하 혹은 반지하에 석실을 설치했던 전형적인 백제 후기 부여 양식의 이식 형태를 띤 후기 횡혈식석실분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6세기 중·후반에나 나타나는 후기 횡혈식석실분에 대한 논의는 뒤로 미루어 두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5세기 중·후반경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전기 횡혈식석실분과 전방후원형고분만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출현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영산강유역의 횡혈식석실분 중에서 조사된 사례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점은 앞에서 밝인 바 있는데, 그 중에서나마 지상의 봉분 가운데에 석실을 설치한 전기 횡혈식석실분의 특징이 나타나 있는 사례를 찾아 보면, 해남 월송리, 장성 영천리, 광주 각화동, 함평 예덕리 신덕, 광주 쌍암동 등지에서 조사된 5기 정도를 들 수 있겠다. 그리고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형고분은 영광 월산리 월계, 광주 월계동(2기), 광주 명화동, 함평 죽암리, 함평 예덕리 신덕, 해남 용두리, 해남 방산리, 영암 태간리 등지에서 9기가 확인되었다.

여기에서 제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태간리 전방후원형고분(일명 '자라봉고분')의 예외성이다. 먼저 그 위치를 보면, 모든 전기 횡혈식석실분과 대부분의 전방후원형고분들은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에서 벗어난 주변부에 산재해 있는 반면에, 오직 자라봉고분만은 그 중심지인 시종면에 자리하고 있다[지도 2 참조]. 다음에 고분 내부의 매장주체시설을 보면, 이미 발굴 조사된 광주의 전방후원형 고분 3기와 함평 신덕의 전방후원형고분의 경우는 모두 원형부의 측면에 횡혈식석실의 매장주체시설을 축조한 것으로 되어 있는 반면에, 오직 자라봉고분만은 분구 원형부의 정상에 수혈식석실의 매장주체시설을 축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분구 형태를 보면, 다른 전방후원형고분의 경우는 방형부가 발달된 단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에 반해, 자라봉고분만은 방형부가 왜소하고 미발달한 단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을 일본열도의 전방후원분과 비교해 보면, 다른 전방후원형고분들은 일본의 중·후기 전방후원분의 요소를 강하게 띠고 있어 5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편년될 수 있음에 반해, 자라봉고분만은 일본 전방후원분의 초기적 요소가 주로 나타나고 있어 그 축조 시기를 4세대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4세기대의 전방후원형고분인 자라봉고분이 왜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지에서만 나타나는 것일까 우선 4세기 경에 '옹관고분사회' 전기 중심지의 세력집단과 일본 전기 고분시대의 특정 지역의 왜 세력집단 사이에 모종의 적극적 교류 관계가 있었음을 반영하는 흔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이런 관점에 서서 자라봉고분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추론을 시도해 보기로 한다.

자라봉고분은 단순히 분구 형태만을 새로 취한 것이 아니라 매장주체시설에서도 토착의 옹관을 쓰지 않고 일본열도의 전기 전방후원분에 주로 설치한 수혈식석실을 취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일본의 전기 전방후원분의 전체계가 이식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라봉고분이 시종의 옹관고분 밀집구역에서 다소 외떨어진 태간리의 저습한 평지 위에 단 1기만이 하나의 고립된 섬처럼 서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에 묻힌 피장자는 뭔가 특별하고 예외적인 일에 종사한 倭人일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감안하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리라 본다. 즉 양 지역 간의 교류에 관련된 일을 담당하면서 이 지역에 호의를 가지고 있던 한 왜인이 죽자, 양 지역의 세력집단은 서로의 우호적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가기 위한 상징적 기념 행위로서 왜계의 장례 절차에 따라서 그를 옹관고분의 묘역과 구분되는 별도의 구역에 묻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자라봉고분은 4세기 단계에 '옹관고분사회'의 맹주세력집단과 왜의 특정 세력집단 간에 적극적 교류가 행해졌음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는 셈이다.

여기에서 추론을 더 진전시켜 보기로 하자. 그렇다면 4세기대의 전방후원분이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옹관고분사회'의 전기 중심지인 시종면에서만 찾아지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는 4세기대 '옹관고분사회'의 중심 맹주세력인 시종면 일대의 세력집단이 대왜 교류를 독점 혹은 주도하였던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단 1기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양 집단 간의 우호관계를 함축하는 고분의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교류가 오래가지 못했던 데에도 원인이 있었던 듯 싶다. 이는 이후에 왜가 '옹관고분사회'의 맹주세력을 통하지 않고 주변부 세력과의 독자적 교류를 추진해 가려 함에 따라 왜와 시종 지역의 세력집단 간의 우호적 교류관계가 점차 소원해지고 급기야는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게 된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상에서 추론에 추론을 거듭하면서, 4세기대의 전방후원형고분인 자라봉고분이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에만 있게 된 현상에 대한 의미 부여를 시도해 보았다. 불안한 추론이긴 하지만 이를 일단 가능성으로 남겨 두고, 이제 5세기 중·후반부터 주로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에 나타나기 시작한 전기 횡혈식석실분과 전방후원형고분의 본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기로 하자.

앞에서 지적했듯이 전기 횡혈식석실분은 백제 횡혈식석실분의 영향을 받되 토착 옹관고분의 전통을 견지한 특징을 들 수 있겠고, 전방후원형고분은 왜의 중·후기 전방후원분의 영향을 받아 축조된 특징을 들 수 있겠다. 그런데 이들 외래 고분이 주로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점이,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지 이동 현상이 나타난 시점과 일치하는 5세기 중·후반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전기 횡혈식석실분과 전방후원형고분의 출현을 '옹관고분사회'가 백제 및 왜와 적극적인 문화 교류를 전개했던 흔적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일단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를 '옹관고분사회'의 맹주세력이 중심이 되어 일사불란하게 대외교류를 전개해 간 흔적으로 간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만약 그리했다면 맹주세력의 입지처인 시종과 반남 지역에서 대외 교류의 흔적이라 할 외래 고분의 자취가 먼저 확인되어야 할 것이나,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들 외래 고분들은 중심부를 피해 주로 주변부에서 나타나고 있는 반면에 중심부에서는 토착 묘제인 옹관고분이 더욱 강화 발전되어 갔고 외래 고분은 배제되어간 듯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래 고분의 출현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이를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 세력이 중심 영도세력의 영도권으로부터 이탈해가려 한 조짐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즉 5세기 중·후반 경 주변의 국제 정세를 볼 때, 백제와 왜가 국제 해상 교역의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해상 교통의 요충지인 영산강유역에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갔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 세력은 이러한 국제 정세에 편승하여 백제나 왜와의 독자적 교류를 진전시켜 감으로써 맹주세력으로부터 점차 이탈해 가려 했을 거라는 심증이 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백제나 왜의 영산강유역에 대한 접근 의도와 '옹관고분사회' 주변부 세력의 독자적 대외교류의 의도 사이에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에 대해 중심 맹주세력은 자신의 영도권에 심대한 위협이 미쳐오는 것으로 간주했을 것이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영도권의 재강화를 위한 모종의 준비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앞에서 필자가 5세기 중반이라는 바로 이 시점에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에 나타난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 현상을, 맹주세력의 영도권 재강화 시도의 산물로 간주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판단한 것이었다.

이제 이런 관점에 서서 전기 횡혈식석실분과 전방후원형고분이 5세기 중·후반에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에 나타나기 시작한 현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기로 하자. 분석의 대상은 앞에서 열거한 5기의 전기 횡혈식석실분, 그리고 자라봉고분을 제외한 8기의 전방후원형고분에 한정하기로 한다[지도 2 참조].

먼저 이들 고분들의 입지를 보면 대개 하천이나 바다로 통할 수 있는 구릉상에 단독으로 위치해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두 종류의 고분이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우도 있다. 즉 함평 월계리 신덕의 전방후원형고분과 그로부터 북방 17m의 거리에 있는 횡형식석실분의 경우가 그렇고, 광주 월계동에 나란히 위치한 전방후원형고분 2기와 이로부터 북동북 방향으로 300여m 떨어져 있는 쌍암동 횡혈식석실분의 경우가 그렇다. 그런데 함평 신덕은 영산강의 큰 지류인 고막원천의 중상류에 위치하고 있고, 광주의 월계동과 쌍암동은 영산강 본류의 하나인 극락강 변에 서로 인접해 있어서, 비록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지로부터는 거리가 떨어져 있긴 하나 영산강 수로 교통의 요지라 할만한 곳이다. 특히 신덕 지역은 주위에 만가촌의 옹관고분군과 석계의 횡혈식석실분군을 위시로 하여 많은 고분군들이 밀집되어 있고 고대 성곽의 흔적도 있어서 토착세력의 주요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역에서 전기 횡혈식석실분과 전방후원형고분이 지근한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이 지역의 토착세력이 접근해 오는 백제 및 왜 세력과 적극 교류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의 묘제 문화를 수용한 것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해남 지역의 토착세력은 이와는 약간 다른 양상을 보여 주었던 것 같다. 해남 반도의 자연 지형을 보면, 두륜산 줄기와 달마산 줄기가 서로 남북으로 연결되면서 반도를 동부와 서부로 구분하고, 두륜산 자락이 서쪽으로 삐져 나오면서 서부 지역을 다시 남·북으로 구분하고 있어, 크게 북일면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 권역, 삼산면을 중심으로 한 서부의 북쪽 권역, 현산면을 중심으로 한 서부의 남쪽 권역의 3개 권역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3개 권역은 해남 반도의 고대 문화권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주목되는 바가 있다. 즉 현산면 월송리에 전개 횡혈식석실분 1기가 있고, 북일면 방산리와 삼산면 용두리에 횡혈식석실분이 각각 1기씩 있다[지도 3 참조]. 또한 이 3개 권역은 토착세력의 현황을 나타내 주는 옹관고분의 밀집 지역일 뿐만 아니라 주요 성곽의 분포지이기도 하여, 각 권역별로 토착세력이 독자적 세력집단을 구성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해남 반도의 세력 판도를 염두에 둘 때, 전기 횡혈식석실분이 있는 현산면 권역의 세력집단은 주로 백제와의 교류에 관심을 기울였을 것으로, 그리고 전방후원형고분이 있는 삼산면과 북일면 권역에서는 왜와의 교류에 관심을 기울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해남 반도는 한반도의 서해와 남해가 교차하는 꼭지점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연안 해로를 주로 활용하는 고대 해양 교역 단계에서 매우 중시될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바로 이러한 조건 때문에 해남 반도는 '옹관고분사회'의 외항적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또 이 때문에 해양 교역을 주도하려는 외세에게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해남반도의 전기 횡혈식석실분과 전방후원형고분은, 백제와 왜가 해남 반도에 거점을 확보하려 한 경쟁심과 해남 반도 토착세력의 대외 교류의 의지가 맞아 떨어져서 수용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월송리의 전기 횡혈식석실분('조산고분'이라 칭함)은 白浦灣으로 흘러드는 조산천 변에 위치하고 있고, 용두리 전방후원형고분 역시 某灣으로 흘러드는 삼산천 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방산리 전방후원형고분은 강진만 입구의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각 권역 단위의 토착세력이 바다를 통해 대외 교류를 전개해 갔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제 남은 사례들을 마저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함평 죽암리 전방후원형고분은 함평만 앞바다를 바라다 보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입지상 해남 방산리 전방후원형고분과 흡사하다 하겠고, 장성 영천리 횡혈식석실분은 영산강 본류의 하나인 황룡강 변에 위치하고 있어 광주 쌍암동 횡혈식석실분의 입지와 흡사하다. 그리고 광주 명화동 전방후원형고분은 황룡강에 합류되는 小支流 변에 위치하고 있고, 광주 북동부의 각화동은 무등산에서 내려오는 산줄기가 평지와 만나는 능선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입지로 볼 때, 각화동의 경우만 제외하고 강과 바다에 연접해 있어 수로나 해로의 요로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지역의 토착 세력집단은 백제와 왜 세력의 접근에 호응하여 그들과 선별적인 교류를 전개해 갔다고 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 세력집단은 5세기 중·후반 경부터 백제나 왜와 독자적인 교류 관계를 추진해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4세기대에 '옹관고분사회'의 중심 맹주세력이 대외교류를 주도했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서, 곧 '옹관고분사회'의 연맹체가 주변부로부터 점차 해체되어 간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3) 후기 횡혈식석실분

6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영산강유역에는 고고학적 지표에 또 다시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토착의 옹관고분과 5세기 중·후반부터 대두해온 전방후원형고분 및 전기 횡혈식석실분 등이 모두 소멸되고, 그 대신 전형적인 백제 후기 양식[부여식]을 띠는 후기 횡혈식석실분이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는 물론이고 그 중심지인 시종·반남 지역을 포함한 영산강유역 전지역에서 나타나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5세기 중·후반 이래 영산강유역에 대한 거점 확보를 둘러싸고 토착 맹주세력과 백제 및 왜 세력 사이에 전개되어온 경쟁에서 백제가 마지막 승리자로 귀결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몇몇 사례를 통해서 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영산강유역의 고분 중에서 후기 횡혈식석실분으로 분류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나주 흥덕리 및 대안리 4호분, 영암 봉소리 고분, 신안 장산도의 도창리 고분, 함평 월계리 석계 고분 등을 들 수 있겠는데, 이들은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는 물론 핵심부를 비롯하여 전략상의 요지에까지 두루 분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봉소리 고분은 '옹관고분사회'의 전기 중심지인 시종면에 있고 흥덕리와 대안리 고분은 후기 중심지인 반남면에 있으며, 도창리 고분이 있는 장산도는 영산강 하구에서 진도의 울돌목을 거쳐 해남 반도에 이르는 해로의 주요 길목에 해당한다. 그리고 함평 석계는 옹관고분이 밀집된 만가촌과 전방후원형고분 및 전기 횡혈식석실분이 있는 신덕과 지근한 거리에 있다. 이외에도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횡혈식석실분들이 영산강유역 도처에 분포하고 있어[지도 2 참조], 후기 횡혈식석실분이 이 지역 지배층 고분 문화의 대세로 떠오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나주 다시면 복암리 3호분의 문제를 잠시 덧붙여 놓고 싶다. 복암리 일대에는 현재 4기의 대형 고분이 모여 있는데, 이곳 주민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경지 정리의 과정에서 고분 몇 기가 소실되었다고 하므로 원래는 이보다 더 많은 고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고분들 중 3호분은 현재 발굴 진행 중에 있어서 그 독특한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현재 진척된 바에 의하면, 3호분은 옹관과 석실·석곽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석실과 옹관을 결합한 형식에 이르기까지 40개에 가까운 다양한 매장주체시설을 방대형의 단일 분구 중에 조영한 매우 특이한 고분인 것으로 밝혀졌다.

3호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보고서가 정리된 연후에야 알 수 있겠지만, 현재의 진척 상황에 비추어서 몇가지 사항을 추정해 보는 것으로 한다. 첫째, 분구의 축조 시기는 6세기 초반 경으로 추정되는데, 이 때 4개의 옹관이 들어있는 1호 석실을 비롯하여 몇몇 석실과 옹관이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1호 석실은 석실과 옹관이 결합되었을 뿐 아니라 석실 자체도 백제의 그것과는 판이한 영산강유역의 변형 양식으로 축조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둘째, 분구를 축조한 이후에도 석실과 석곽, 그리고 옹관 등의 매장주체시설을 같은 분구 중에 추가로 조성해 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추가로 조성된 매장주체시설 중에는 백제말 부여식의 횡혈식석실 양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도 있어서, 매장주체시설의 추가 조성은 7세기 때까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圭頭大刀 등 일본열도에서만 나오는 유물도 수습되고 있어, 다시면 일대의 세력집단이 백제 뿐만 아니라 일본열도의 왜 세력과도 교류 관계를 맺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토기의 개배 상에 朱漆로 쓰여진 '卍'자의 反射字體가 확인되고 있어, 혹시 불교의 전래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의심되기도 한다.

이러한 추정 사항들을 인정할 수 있다면, 3호분은 다시면의 유력 세력집단이 6세기에서 7세기까지 약 1세기 동안에 걸쳐 활용한 고분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각 시기 별로 석실의 양식 변화가 비교적 잘 나타나고 있어서 3호분을 통해서 이 지역 토착세력과 백제와의 관계를 추적할 중요한 단서를 포착할 수 있다. 즉 다시면의 토착 세력집단은 6세기 초부터 전기 횡혈식석실을 채용했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친백제적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왜와의 교류 흔적이 엿보이고 있고 또한 옹관을 쓰는 토착 묘제의 전통을 늦은 시기까지 유지해 갔던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개방성과 토착성을 겸유하는 성향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7세기를 전후한 늦은 시기에는 전형적인 백제말 부여식의 횡혈식석실이 집중적으로 조영되었다는 점에서, 이 지역의 세력집단은 7세기 단계 이전에 이미 백제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 수 있을 것이다. 영산강유역의 후기 횡혈식석실분의 일부는 백제의 중앙인이 영산강유역의 주요 거점 지역에 파견되어 와서 이식한 것으로 볼 수 있겠고, 또 일부는 토착 지배층이 백제화되면서 기왕의 옹관고분을 포기하고 백제식 횡혈식석실분의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조영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6세기 중·후반 이후에 후기 횡혈식석실분이 출현함과 동시에 토착의 옹관고분과 전기 횡혈식석실분 및 전방후원형고분이 소멸해간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는, 6세기 중·후반 이후에 백제가 영산강유역의 토착세력을 복속시켜 지방제의 체제 하에 완전 편제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3. 문헌 자료의 재검토

이상에서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상을 검토하여,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의 해체와 백제로의 편입 과정을 일단 파악해 보았다. 이는, 5세기 중반 경부터 '옹관고분사회'의 일부 주변부 세력집단이 백제 혹은 왜와 독자적 교류를 전개해 가면서 '옹관고분사회'의 연맹체가 해체되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6세기 중반 이후에는 '옹관고분사회'가 백제의 완전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고고 자료를 통해 파악한 이러한 추세는 문헌 자료를 통해서 검증될 수 있을 때 더욱 신뢰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여기에서는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 하여 5세기 국제 정세 속에서의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의 처지와 6세기 중반 이후에 백제의 일개 지방으로 편제되어간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1) 5세기의 국제 정세와 영산강유역

4세기 중후반의 근초고·근구수왕 대에 백제는, 해상 교역로의 요충지였던 해남 반도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여 교역의 거점으로 활용하면서 처음으로 영산강유역의 세력집단과 접촉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듯하다. 이는 백제가 왜와 제휴하여 라이벌인 고구려를 수세로 내몰고 신라를 압박하여 한 때나마 '중국-백제-가야-왜'로 연결되는 해양 교역을 주도적으로 운영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음 자료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神功 49년 3월에 荒田別과 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久灓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卓淳國에 이르러 장차 신라를 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사가 적어 신라를 깨뜨릴 수 없다는 의견이 있어, 沙白과 蓋盧를 보내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니, 즉시 木羅近資와 沙沙奴墦에게 명하여 정예군을 거느리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모두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 깨뜨렸으니, 이로 인해 비자발·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 등의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하여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古奚津을 돌아 南蠻인 睏彌多禮를 屠戮하고 이를 백제에게 주었다.

왜군이 369년에 신라를 격파하고 가야의 7개국을 평정한 여세를 몰아 서쪽으로 古奚津[강진 지역으로 비정됨]을 거쳐 睏彌多禮[해남 지역으로 비정됨]를 약탈하고 이를 백제에게 넘겨 주었다는 내용이다. 글의 내용을 보면 마치 왜군이 주체가 된 침략 행위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으나, 이는 {日本書紀}에서 의도적으로 왜곡한 바이고, 실제로는 백제가 주도한 일로 볼 것이다.

그런데 일찍이 이 기사를 전거로 하여 4세기 후반에 백제가 전남지방 전역을 점령·지배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으며, 이는 그간 별다른 이의 없이 통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계의 성과가 축적되면서, 4세기 후반 이후에 영산강유역 전역에서 토착세력이 오히려 강한 성장의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주장이 제시되기도 하여, 통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고고학계의 주장 처럼 4세기 후반 이후에도 이 지역 토착세력의 독자적 성장이 지속되고 있었다면, 윗 기사는 기왕의 견해와는 다른 의미로 재해석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를 감안하여 필자는 윗 기사를, 4세기 후반에 백제가 왜와 함께 가야 지역에 대해 군사적 위협을 가하여 '백제-가야-왜'로 연결되는 국제 交易網을 결성하고, 그 여세를 몰아 남해안을 따라 西進하여 강진을 거쳐 해남 지역을 공격·점령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 즉 한반도의 연안 해로를 통한 국제 교역에서 그간 주요 중간 기착지로 성황을 누리던 해남 반도의 어느 한 지점을, 4세기 후반에 백제가 교역의 거점으로 확보하게 된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이 때 백제가 거점으로 확보한 지역으로는 백포만으로 통하는 현산면 일대가 유력하다. 백포만으로 바로 연결되는 현산면 고현리 주변에서는 영산강유역의 다른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4세기 말∼5세기 초로 편년되는 백제식 및 가야식 토기가 다수 수습된 바 있고 竹禁城이라 불리는 고대 성곽시설도 있어, 이 일대가 4세기 후반 이후 당분간 백제의 교역 거점으로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여겨진다. 백포만 일대는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굴곡 지점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일대에서 풍부한 선사 및 고대 유적·유물이 확인되고 있다. 특히 군곡리 패총에서 국제 교역의 지표라 할 중국 화폐[貨泉]를 위시로 하여 1∼3세기대의 풍부한 유물이 수습된 바도 있어, 일찍부터 백포만 일대가, 낙랑군과 대방군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서남해안을 따라 왜에까지 이르는 교역로의 요지로서 성황을 누렸음을 시사받을 수 있다. 또한 인근의 월송리에 전기 횡혈식석실분인 조산고분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6세기 전반에 이 지역 일대의 토착 세력집단이 친백제적 성향을 강하게 띠었을 것으로 본 앞에서의 추론도 고현리 일대가 4세기 후반에 백제 교류의 거점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더해 준다.

그렇다면 이후 백제는 해남지역을 해로 상의 거점으로 활용하면서 국제 교역에 대한 주도권을 선점하려 하는 한편, 점차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사회'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병행해 갔을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의 이러한 시도는 4세기 말부터 고구려의 강력한 남하정책에 직면하여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광개토왕과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4세기 말∼5세기 전반에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오자, 백제는 다시금 수세에 몰리면서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세기 말 경만 하더라도 백제는 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기도 하고 고구려의 남단을 공격하기도 하여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적극 저지하려 하기도 하였으나, 번번히 고구려에게 패퇴당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백제와 왜의 침탈에 시달리던 신라가 활로를 찾아 고구려의 군사적 보호를 자청하게 되자, 백제는 속수무책의 위기 상황에 내몰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구나 장수왕이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남하정책을 본격 추진하였고, 475년에는 급기야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키기에 이르자, 백제의 위기 상황은 극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가 영산강유역 세력집단과의 관계를 지속시키고 그에 영향력을 확대시켜갈 여유는 사실상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때까지 '옹관고분사회'는 국제 관계의 휘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연맹체의 틀을 유지해 갔을 것으로 보인다.

한성이 함락되어 웅진으로 쫓겨 南遷한 백제에게는 이제 생존 자체가 최대의 현안이었으며, 이를 위한 새로운 전략이 모색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세력과도 제휴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왜는 물론이고 가야, 심지어는 적대국이던 신라까지도 백제의 제휴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러던 중 신라 역시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끼게 되어, 결국 백제와 신라 사이에 군사 동맹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리하여 5세기 중반 경에는 '백제-신라-왜-가야'로 연결되는 대고구려 방어망이 구축되기에 이르렀고, 자연히 국제관계는 당분간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제 각국은 다음 단계에 국제 관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암중모색기에 접어들었다.

바로 이 시기에 백제는 다시금 해상 교역권을 복구하여 그 주도권을 장악하는 일에 매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간 사정이 달라져 있었다. 즉 4세기 중·후반의 근초고·근구수왕 때에는 백제가 큰 걸림돌 없이 해상 교역권을 주도했었던 것에 반해, 1세기가 경과한 5세기 중·후반의 시점에서는 왜가 백제를 통하지 않고 중국과 직교역을 할 정도로 성장하여, 해상 교역에서 백제의 유력한 경쟁자로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백제와 왜가 중국 남조의 제왕조에 대해 경쟁적으로 왕의 爵號 除授를 요청했던 기사들[<표 1> 참조]을통해서 두 나라의 이러한 경쟁 관계의 단면을 엿보기로 하자.

<표 1> 중국 남조 제국의 백제왕·왜왕에 대한 작호 제수 비교표
세기
백제
왕명
연대
授爵 內容(출전)
왕명
연대
授爵 內容(출전)
4세기
余句 

余暉 

晉372 

386 

鎭東將軍 領樂浪太守({晋書}紀) 

使持節 都督 鎭東將軍 百濟王(上同)

5세기
余映 

余毗 

余慶 

牟都 

牟大 

 

 

 

 

 

 

 

 

 

 

 

 

 

416 

宋420 

430 

457 

齊480 

490 
 
 
 
 
 
 
 
 
 
 
 
 
 

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 鎭東將軍 百濟王({宋書}傳) 

鎭東大將軍(上同) 

映의 爵號를 제수함(上同) 

鎭東大將軍(上同) 

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冊府元龜}外臣部封冊) 

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 鎭東大將軍 百濟王({南齊書}傳) 
 
 
 
 
 
 
 
 
 
 
 

倭讚 

 

 

 

倭濟 

 

 

 

 

 

 

 

 

 

 

 

宋421 

438 

438 

443 

451 

451 

462 

478 
 

478 

齊479 

[冊封]除授를 賜함({宋書}傳) 

[自稱]使持節 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上同) 

[冊封]安東將軍 倭國王(上同) 

[冊封]安東將軍 倭國王(上同) 

[加號]使持節 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上同) 

[進號]安東大將軍({宋書}紀) 

[冊封]安東將軍 倭國王({宋書}傳) 

[自稱]使持節 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 安東大將軍 開府儀同三司 倭國王(上同) 

[冊封]使持節 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王(上同) 

[進號]鎭東大將軍({南齊書}傳)

6세기
牟大 

余隆 

余明 

梁502 

521 

524 

征東大將軍({梁書}紀) 

使持節 都督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 百濟王({梁書}傳) 

持節 都督百濟諸軍事 綬東將軍 百濟王(上同)

 
 
 
梁502 
 
 
[進號]征東將軍({梁書}傳 

·紀) 
 

 
 

<표 1>을 보면 4세기 단계에는 왜가 晋으로부터 授爵한 흔적이 보이지 않음에 반해 백제의 경우는 晋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授爵한 것으로 되어 있어, 그만큼 국제적 위상에서 백제가 왜보다 월등히 앞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위에서 살폈듯이 4세기 단계에 백제가 왜와 가야 등을 지도하는 위치에서 중국 남조로부터 백제-가야-왜로 연결되는 국제 교역권을 주도해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420년 이전까지는 계속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송으로부터 '使持節 督百濟諸軍事 鎭東將軍 百濟王'이나 '鎭東大將軍'의 작호를 제수받고 있음에 반해 왜는 아직까지 이렇다할 대송 외교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420년을 넘어서면서 이른바 '倭 五王'이 중국 남조로부터 작호를 제수받기 위해 집요한 외교적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 눈에 띤다. 421년에 왜왕 讚이 송으로부터 모종의 작호를 제수받았던 것으로 나타나 있고, 438년에는 珍이 '使持節 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의 작호를 自稱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都督○○諸軍事'란 ○○에 대한 군사적 통솔권을 포함하는 爵號이으므로, 珍이 이러한 작호를 자칭했다는 것은 곧 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의 6국에 대한 군사적 통솔권을 자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겠다. 그러나 이에는 秦韓이나 慕韓과 같이 다른 사서에서는 용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공의 국명이 있는가 하면, 백제나 신라나 임나 처럼 결코 왜의 군사적 통솔을 받는 위치에 있지 않았을 국명도 열거되어 있어, 이 작호는 실제적 군사 통수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국제적 위상 제고라는 왜의 조급한 희망 사항이 이처럼 조작된 작호의 자칭으로 표출되었다고 해야겠다.

왜가 이런 식으로 희망 사항을 표출한 것은 이제까지 국제적 교역을 주도하고 있던 백제를 겨냥한 것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즉 왜는,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직면해서 최악의 국면에 내몰리고 있던 백제 대신에, '중국 남조-한반도 서남해-왜'로 연결되는 국제 교역망을 주도적으로 운영해 보겠다는 야심을 드러낸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은 왜에게 '使持節 都督…六國諸軍事'의 작호를 추인해주지 않았고, '安東大將軍'도 '安東將軍'으로 낮추어 '安東將軍 倭國王'이라는 작호를 제수해주는 것에 그침으로써, 이미 '鎭東大將軍'의 작호를 제수해 준 백제보다 하위에 있음을 공표하였다. 그러나 그후 왜는 濟가 珍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대송 외교를 더욱 집요하게 진행해 나갔고, 이에 송이 움직여서 결국 451년에 '使持節 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의 작호를 더해주고, 軍號를 鎭東將軍에서 鎭東大將軍으로 진급시켜 주었다. 430년에 자칭했던 것과 비교해 보면 百濟가 빠지고 加羅가 첨가된 차이가 있다.

이를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송이 이러한 '都督…六國諸軍事'의 작호를 왜에 제수해 주었던 것은 왜의 요청을 무심히 묵인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즉 송은 당시 송과 외교 관계를 맺지 않고 있던 新羅·任那·加羅와 같은 현존 국가나 秦韓·慕韓과 같은 가공의 국가 이름을 나열한 작호의 사용에 대해서는 현실 관계를 따지지 않고 왜의 요청대로 묵인해 주되, 정식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백제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세력 관계를 분명히 따져서 단호하게 제외시켰던 것이다.

왜왕 興의 단계를 거쳐 武의 치세에 이르자 왜는 478년에 6국 이외에 백제를 포함한 '都督…七國諸軍事'를 자칭하고 다시금 송에게 이에 대한 除正을 요청하였다. 여기에서 현실적 세력 관계와 관계 없이 백제가 자신의 휘하에 있는 나라임을 송으로부터 가상적으로나마 공인받고자 했던 왜의 집요한 외교 공세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때 역시 송은 자신과 외교 관계가 없는 국가나 가공의 국가 이름을 열거한 것에 대해서는 묵인해 주되, 외교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백제를 포함시킨다는 것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해 보면, 왜는 백제가 고구려의 공세를 받아 흔들리고 있을 즈음인 421년 이후에, 중국 남조에 대한 외교를 본격적으로 전개하여 5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송과의 독자적인 교류의 발판을 마련하더니, 한 술 더떠서 백제 보다도 우위에 있음을 공인받으려는 욕심을 노골적으로 내비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는 곧 백제를 대신하여 국제 교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왜의 외교 노력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5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가까스로 저지하고 다시금 국제 교역을 주도해 가려 했던 백제에게 왜는 유력한 경쟁자로 부상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백제와 왜의 관계를 염두에 둘 때, 그간 해상 교역망의 주요 거점지로서 각광받아왔던 영산강유역이 5세기 중·후반 이후에 다시금 백제와 왜의 영향력 확대 경쟁의 우선적 대상지로서 부상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5세기 중·후반부터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에서 백제 계통의 전기 횡혈식석실분과 왜 계통의 전방후원형고분이 나타나게 된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를, 영산강유역에 백제와 왜가 경쟁적으로 접근해 온 추세를 반영하는 것으로 본 앞서 필자의 판단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2) 백제의 영산강유역 진출과 편제

해상 교역의 주도권을 둘러싼 백제와 왜의 경쟁은 점차 백제의 우위로 판가름났던 것으로 보인다. 즉 479년에 宋이 망하고 齊로 왕조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420년대 이후에 새로이 조성되었던 백제와 왜의 남조 왕조에 대한 외교적 균형이 깨지게 되었던 것이다. [표 1]를 참조하면서 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왜는 479년부터 곧바로 신왕조인 齊에 대한 적극적 외교 공세 취하여 자신이 희망하는 작호를 공인받고 싶어했던 듯하나, 齊는 왜에 대해서 단순히 鎭東大將軍이라는 장군호의 제수에 그침으로써 왜에 외교적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그 반면 백제에 대해서는 480년과 490년의 두 차례에 걸쳐 기왕의 작호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502년에 齊가 망하고 梁이 들어서면서, 梁 왕조는 백제왕에게는 征東大將軍을 왜에 대해서는 征東將軍을 제수해 줌으로써 백제와 왜 사이의 국제적 위상의 차이를 분명히 해 주었다. 이후 梁은 백제에 대해서는 작호의 제수를 끊이지 않았던 반면에 왜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작호 제수를 해주지 않았다. 이는 6세기에 들어 백제가 다시금 양 왕조의 공식적 교역 파트너로 부상하여 신라·가야·왜 등을 연결해 주는 국제 교역망을 주도적으로 운영해 갔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국제 교역망의 주도는 국내 정세를 추스리고 중흥의 기반을 닦은 武寧王 혹은 聖王 대에나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이러한 맥락에서 백제가 영산강유역으로 진출하여 '옹관고분사회'를 완전 해체하고 지방제로써 이를 편제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백제에게 文周王·三斤王·東城王 대는 한성 함락과 웅진 천도의 충격을 추스리는 시기였다. 대외적으로 남조의 宋과 齊에 대한 외교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유지해 가는 한편, 적성국이던 신라와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그러는 사이에 백제 왕실은 안으로 귀족세력의 발호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였고 밖으로는 왜 세력의 부상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耽羅'의 歸服은 백제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 주었을 것이다.

가) 耽羅國이 方物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여 使者에게 恩率을 拜하였다.

나) 동성왕은 耽羅가 貢賦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친히 정벌하여 武珍州에 이르렀다.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비는지라 이에 그만두었다.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던 백제로서는 탐라국이 480년에 백제에 방물을 바쳐왔으니 이보다 더 기쁜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그 기쁨의 정도는, 사자에게 백제의 제3위에 해당하는 고위의 관등인 恩率을 拜하여 최고 대우를 해 주었다는 것에 잘 나타나 있다[가 기사]. 그런데 그런 탐라가 498년에 이르러 백제에 등을 돌리고 공납을 바치지 않게 되어, 백제의 무력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나 기사].

{日本書紀}에도 백제와 탐라의 관계 기사가 나오고 있는데, 탐라가 백제와 처음 통교했던 시점이 위의 {삼국사기} 기사와는 달리 나타나고 있다.

다) 南海 가운데의 耽羅人이 처음으로 백제국과 통교하였다.

는 것이 그것이인데, 508년(백제 무령왕 8년)에 처음 백제와 통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두 사서의 차이데 대해서 이제까지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다) 기사를 두찬으로 간주해 버림으로써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으나, 최근에 이를 부정하려는 견해가 속속 제기되고 있다. 먼저 고고학적 견지에서 5세기 후반에 백제와 탐라의 관계를 가) 기사 처럼 설정하는 것을 의심하기도 하였고, 또한 가)·나) 기사에 나오는 탐라와 다) 기사에 나오는 탐라를 별개의 것으로 보아서 위의 세 기사를 모두 인정하면서 이를 합리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신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신설에 의하면 다) 기사에 나오는 탐라는 남해 가운데 있다고 하므로 오늘날 제주도로 보아 무리가 없다고 보고, 가)와 나) 기사의 탐라는 제주도가 아닌 강진·해남에 대한 이칭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필자는 이 신설에 주목하고자 한다.

신설에서 비정한 해남·강진 지역은, 필자의 논지대로라면 4세기 후반 단계에 백제의 해상 교역의 거점으로 활용한 적이 있었던 곳이며, 또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에는 해남 반도에 전기 횡혈식석실분과 전방후원형고분이 같이 대두한 곳이기도 하다. 이를 염두에 둘 때, 먼저 480년에 이 지역의 토착세력이 막 南遷한 백제에 대해서 공물을 바쳐왔다고 한다면, 백제계의 전기 횡혈식석실분을 축조한 현산면 월송리의 세력집단을 문득 떠올릴 수 있다. 이 횡혈식석실분에서 백제 특유의 토기를 비롯하여 196점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유물이 수습되었다는 것은 백제와 이 지역 세력집단과의 관계를 나타내 주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5세기 후반에 倭도 백제를 대신하여 해상 교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해남 반도를 중시하였을 것이니, 실제 전방후원형고분이 두 군데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이 지역 세력집단이 일시적으로나마 백제에 등을 돌리고 왜 세력에 동조하려는 조짐을 드러내 보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상정될 수 있다. 나) 기사는 이런 상황을 묘사한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해상 교역의 주도권 회복을 벼르고 있던 백제로서는 이를 무심히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동성왕이 친히 군대를 일으켜 武珍州에 이르렀던 것이고, 결국 다시금 해남 지역 탐라의 귀복을 맹세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나 기사].

이렇게 본다면, 498년의 군사 작전은 백제의 영산강유역 진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탐라'의 귀복 맹세를 받아내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옹관고분사회' 주변부에 확산되어 가고 있던 친왜적 성향의 세력집단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즉 백제의 군사 작전은, <표 1>을 통해서 살폈듯이, 5세기 말에 백제가 왜에 대해서 국제적 위상을 급속히 회복해 가고 있던 추세와 맞물리면서, 영산강유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을 급속히 신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나) 기사에 나오는 백제의 '탐라' 정벌 시도는 다분히 명목적인 표방에 가까운 것이라 할 것이고, 그 주목적은 역시 '옹관고분사회'의 맹주세력과 반백제세력, 그리고 이에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던 왜 세력에게 무력 시위를 한 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내외적 정세에 비추어 볼 때, 백제가 '옹관고분사회'를 무력으로 일시에 제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먼저 웅진 천도 후 백제 정정의 불안정성은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니, 문주왕 피살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동성왕의 피살 사건이 이어졌던 것은 그 좋은 예증이다. 또한 백제에 대한 고구려의 위협이 여전히 상존해 있는 상태에서 신라와 왜의 견제 내지 비협조 역시 백제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백제가 영산강유역에 본격 진출하여 이를 제압했던 것은, 동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무령왕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 않았을까 한다.

주지하듯이 무령왕은 내부의 반란세력을 제압하고 밖으로 고구려의 남침을 효과적으로 퇴치하는 한편, 남조의 양 왕조와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왜와의 관계도 어느 정도 개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국력을 회복한 백제는 武寧·聖王 대에 다시금 '백제-가야-왜'로 연결되는 해상 교역권[동맹체제]을 복원하여 그 주도권을 확립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앞에서 후기 횡혈식석실분과 <표 1>에 대한 분석을 통해 내린 결론과 일치하는 바이다. 이어서 백제는 사비로 천도하여(538년) 전북 지역까지를 지방제로 완전 편제·지배하는 한편, 그 여세를 몰아 영산강유역으로 진출하여 급기야 반남 지역의 '옹관고분사회' 맹주세력을 굴복시키고 영산강유역 역시 지방제로 편제·지배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백제가 영산강유역을 지방제로 편제하였다는 것이야말로 백제가 이 지역을 완전 지배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가장 유력한 기준이라 하겠으므로, 여기에서 백제의 지방제 문제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백제의 지방제로는 {梁書}에 전하는 22擔魯와 {周書} 등에 보이는 5方을 들 수 있다. 먼저 22담로에 대한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治所의 城을 固麻라 했다. 邑을 擔魯라 하였는데 중국의 郡縣이란 말과 같다. 그 나라에는 22개의 담로가 있는데, 모두 자제 종족을 분거시켰다.

윗 기사는 521년에 백제 사신이 양 왕조에 傳言한 바에 의거하여 정리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런데 담로는 후대의 郡에 해당하는 행정 단위로 이해되고 있으므로, 521년 당시에 22개의 담로가 있었다고 한 윗 기사를 근거로 해서 당시 백제의 대체적인 편제 범위를 설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6세기 전반이란 시점은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을 뺏기고 웅진으로 천도한(475년) 이후 이므로, 그 당시 백제의 편제 대상지역은 일단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이 지역들을 통일신라의 9州에 대비시켜 보면, 충청도 지역은 熊州에, 전북 지역은 全州에, 전남 지역은 武州에 각각 대응되는데, 통일신라의 지방제도에 의하면 웅주는 13군, 전주는 10군, 그리고 무주는 13군으로 각각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중 웅주와 전주의 군들만 합해도 23군이 되어, 22담로의 수와 비슷해 진다. 이는 결국 6세기 전반에 백제가 22담로로써 편제·지배한 지방의 범위는 충청도와 전북 지역을 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남 지역은 521년 당시까지 백제의 지방제로 편제된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던 셈이 된다.

그렇다면 백제가 전남 지역까지 지방제로 편제한 시기는 언제쯤이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멸망시 백제의 영역이 '37군'이었다는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37군이란 통일신라시대의 웅주와 전주와 무주의 군들을 합한 36군과 근사하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늦어도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 전남 지역까지 지방제로 편제하여 완전 지배했던 것만큼은 틀림없은 사실이다. 필자는 그렇게 된 시점을, 옹관고분과 전기 횡혈식석실분, 그리고 전방후원형고분 등이 모두 소멸되고, 전형적인 백제식 후기 횡혈식석실분이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와 주변부에서 두루 축조되기 시작하는 6세기 중반 경, 즉 聖王 대로 일단 보고자 한다.

6세기 중반에 백제는 5方制라는 지방제도를 새로이 정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5방제란 전국을 중방과 동방·서방·남방·북방의 5방으로 5대분하고, 그 각 방을 다시 수개의 군으로 나누어 편제한 지방제도를 말하는데, 이러한 5방제의 성립은 전남 지역에 대한 편제를 완료한 시점에 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중방은 전북 지역을, 북방은 부여 이북의 충청도 지역을, 남방은 전남 지역을, 서방은 서해안 지역을, 동방은 부여 이동의 충청도 지역을 대상으로 편제한 광역 행정단위였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전남 지역은 6세기 중반 경에 남방으로 편제되어, 백제의 완전한 영토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4. 맺음말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옹관고분사회'라 칭하기로 하고, 그의 해체와 백제로의 편입 과정을 고고 및 문헌 자료의 비교·검토를 통해서 살펴보았다.

먼저 5세기 중·후반부터 영산강유역에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가 타나남을 주목해 보았다. 그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란, 첫째, '옹관고분사회'의 중심 맹주세력이 자리한 반남 지역에서 고분과 성곽 등이 양과 질의 면에서 크게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 둘째, 백제 계통의 전기 횡혈식석실분과 왜 계통의 전방후원형고분이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바로 이러한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에 대하여, 백제와 왜 세력이 '옹관고분사회'에 경쟁적으로 접근해 오고, 그 중심 맹주세력이 이를 저지하여 기왕의 영도권을 유지 강화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어서 6세기 중반 이후에 옹관고분을 위시하여 전기 횡혈식석길분과 전방후원형고분이 모두 소멸하고, 대신 전형적인 백제 양식의 후기 횡혈식설실분이 '옹관고분사회'의 전지역에 새로이 나타나는 현상을 주목하고, 이를 백제의 영산강유역 완전 영역화의 지표로 이해하였다.

다음에 문헌 자료의 검토를 통해 5세기 중·후반에 백제와 왜가 중국 남조 왕조를 주요 파트너로 하는 해양 교역권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경쟁관계로 떠올랐던 점을 주목하고, 해양 교역로의 요충지인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에 백제계의 전기 횡혈식석실분과 왜계의 전방후원형고분이 5세기 중·후반경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점과 관련된 사실로 이해해 보았다. 이어서 백제가 점차 해양 교역권의 주도권을 확보해 간 것을 주목하고, 이와 관련하여 백제의 영산강유역 진출과 편제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백제는 6세기 중반경에 5방제를 실시하면서 영산강유역을 남방의 관할 하에 두어 완전 지배하게 되었음을 살폈는데, 그 시기가 영산강유역 고분이 후기 횡혈식석실분으로 단일화되는 시점과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본고에서는 '옹관고분사회'의 해체의 문제 초점을 맞추었으므로 '옹관고분사회' 자체의 성립과 발전의 과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거론을 최소화하였다. 이 문제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 둔다.

(게재 : 근간 {백제의 지방지배}, 한국상고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