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num.mokpo.ac.kr/kangbr/영산강유역사.htm

제2절 榮山江流域의 古代社會

1. 영산강유역 '지석묘사회(支石墓社會)'의 특징

영산강유역의 고대사회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전남의 서부지역과 동부지역의 자연환경적 조건의 차이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문화적 차이에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부지역은 영산강의 동맥과 그에서 갈라져 나오는 실핏줄과도 같은 수많은 지류가 자양분을 공급하는 넓고 저평한 평야 혹은 완만한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반면에, 동부지역은 소백산맥의 영향권에 속하는 산악지대로서 남북으로 관통하는 보성강 연변에 소규모의 산곡간(山谷間) 분지들이 형성되어 있어, 자연환경에서 두 지역이 판이하다. 이러한 자연환경의 차이는 멀리 떨어진 시대일수록 인간의 주거 조건을 더욱 강하게 규정하여, 결국 지역 간 문화적 비중이나 개성의 차이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대의 전남 서부지역과 동부지역의 문화적 비중 혹은 개성의 차이를 대비시키면서, 지석묘로 대변되는 영산강유역의 초기 고대사회, 즉 '지석묘사회'의 특징을 부각시켜 보기로 하자.

전남지방에서 현재 확인된 지석묘는 19,000여기에 달하고 있어, 우리나라 지석묘의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다. 그 밀집도에서 가히 세계적이라 할 만하다. 이는 곧 지석묘 축조 시기에 전남지방이 전국 최고의 인구 밀집 지역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고, 더나아가 당시 전남지방의 생산력 수준이 이처럼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높았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전남지방의 지석묘사회는 각처에서 크고 작은 개별적인 읍락(邑落) 집단을 형성하여 서로 간에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전남지방의 지석묘는 서부지역과 동부지역에서 각기 다른 개성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양 지역 지석묘의 차이는 부장품과 매장 주체시설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즉, 동부지역 지석묘의 경우는 주로 석곽형(石槨形)의 매장주체시설을 취하면서 초기 청동기 유물을 중심으로 하여 후장(厚葬)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반해, 서부 영산강유역 지석묘의 경우는 석관형(石棺形) 매장주체시설을 취하면서 후기 청동기유물을 주로 부장하되 박장(薄葬)의 경향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곧 전남지방의 초기 고대사회가 지석묘를 공통분모로 하면서도 그 문화적 비중과 개성에서 서부와 동부지역 간에 일정한 차별성을 드러내면서 전개되어 갔음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이런 견지에서 이러한 차이점을 통해 다음의 두 가지의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겠다.

첫째, 전남 고대사회에서 문화적 무게 중심은 동부지역에서 점차 서부지역으로 이동했으리라는 점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력한 유물로서 동검을 들 수 있다. 동검은 흔히 초기의 비파형동검에서 후기의 세형동검으로 발전했다는 통설적 견해에 따라, 청동기시대 시기구분의 주요 지표로 활용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현재 고고학적 발굴의 한계는 있지만, 동부지역의 지석묘에서는 비파형동검만 나오고 서부지역의 지석묘에서는 세형동검만이 나오고 있다는 것은 일단 주목되어 좋으리라고 본다.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사례로는 보성군 문덕면 덕치리(1개), 승주군 송광면 우산리 내우(2개),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1개), 여천시 봉계동(1개), 여천시 적량동(7개), 여천시 평여동(1개), 여수시 오림동(2개)의 지석묘에서 총 15개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동부지역 지석묘에서 출토되었다. 반면 세형동검은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의 지석묘와 장천리 주거지, 그리고 함평 초포리 및 화순 대곡리의 석관묘 계통의 석곽묘 등에서 출토되고 있어, 예외없이 전남 서부의 영산강유역에서만 출토되었다.

그렇다면 청동기시대 초기에는 동부지역의 문화적 비중이 더 높았으나 후기로 가면서 점차 그 무게 중심이 서부의 영산강유역으로 옮겨갔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산곡간에 소규모 분지를 이루고 있는 동부지역은 청동기시대 초기 단계까지는 인간에게 무리가 적은 거주 여건을 제공해 주어 자연히 당시인의 거주 공간으로서 더 선호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반면 대하천과 넒은 평야를 형성하고 있는 영산강유역은 청동기시대 후기로 가면서 이러한 자연환경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배양되면서 점차 문화적 중심지로 각광받게 되었을 것이고, 이후 철기시대에 들어서면서 문화적*정치적 중심지로 확고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둘째, 동부지역과 서부 영산강유역 간에 장례 문화의 차이[개성]을 엿볼 수 있겠다는 점이다. 동부지역의 지석묘는 석곽형 매장주체시설을 취하면서 후장의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서부 영산강유역의 지석묘는 석관형 매장주체시설을 취하면서 박장(薄葬)의 경향성을 띠고 있다는 앞서의 지적은 양 지역의 장례 문화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바라 하겠다. 더구나 영산강유역의 박장의 경향성은 이후의 묘제인 토광묘나 옹관묘 및 옹관고분 단계까지 이어져 나타나고 있는 바여서, 이 지역의 문화적 개성으로 파악될 여지는 더욱 크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에 나타나는 박장의 경향성을 동시기 타지역의 고분에서 나타나는 후장의 경향성과 비교하면서,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후진성을 주장하는 논거로 삼으려는 의견들은 재고될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2. 3-4세기 '옹관고분사회(甕棺古墳社會)'의 대두

1) 옹관고분사회의 대두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문화적 중심지로 떠오른 영산강유역은 철기문화가 보급됨에 따라 지석묘사회 단계 이래 유지해온 높은 생산력과 인구밀도를 바탕으로 해서 서서히 정치적 결집력을 키워 가더니 마침내 하나의 정치권(政治圈)으로 묶여지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습을 단적으로 반영하는 지표로서 영산강유역의 옹관묘와 옹관고분을 들 수 있다.

옹관묘는 토광묘와 함께 우리나라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 묘제이며, 이는 영산강유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타지역에서는 토광묘가 철기시대 지배층의 주된 묘제로 활용되고 옹관묘는 부차적인 묘제로 쓰였던 반면에, 영산강유역에서는 토광묘 보다는 오히려 옹관묘가 주요 묘제로 쓰였고 급기야는 대형 옹관고분으로까지 발전되어 간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매우 독특한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철기시대에 들어 타지역에서 진행되어 간 묘제의 보편적인 흐름과 확연히 다른 독특한 움직임이 영산강유역에서 일어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해명은 곧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성격을 파악하데 관건이 된다고 하겠다.

영산강유역의 옹관묘 및 옹관고분에 대한 기왕의 견해는 전파론적 시각이 우세하다. 그러나 그 전개상은 타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현상이므로 이러한 시각은 일단 설득력이 약한 것으로 사료되며, 오히려 자체 발생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이런 점에서 영산강유역이 선사시대 이래 토기제작의 일대 중심지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옹관묘 및 옹관고분이 영산강유역에서 유행하게 된 이유를 찾으려 한 견해는 주목되는 바이다. 이미 광주시 신창동에서 서력 기원 전후에 소아용으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소형 옹관이 50여기나 집단적으로 발굴된 바 있는데, 이와 같은 집단적 옹관묘지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바로서 이후 영산강유역에서 옹관고분이 유행하게 되는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전남지방의 옹관묘 및 옹관고분의 분포는 나주와 영암을 위시로 하여 무안*함평*영광*광주*해남*강진*화순*담양 등지에까지 미치고 있어, 대체로 영산강유역 및 서남해안 일대에 한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영산강의 지류인 삼포강 연변에 연접해 있는 영암군 시종면과 나주군 반남면 일대는 그 최고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이 일대는 옹관고분이 최고 밀집군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봉분의 규모도 최대형이고, 또한 그 대부분이 대형 U자형 전용 옹관을 쓴 것으로 나타나 있다. 대규모 봉분과 U자형 전용 옹관의 사용은 옹관고분 최고 단계의 지표가 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 위의 중심지역 뿐 아니라 해남 지역에서도 U자형 전용 옹관의 사용 예가 여럿 확인되었고, 그밖에 무안군*함평군*영광군*광주 및 화순군 일대에서도 1-2기의 예가 확인되고 있어, 최고 수준의 옹관고분이 영산강유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대규모 봉분과 U자형 전용 옹관을 특징으로 하는 옹관고분이 영산강유역 지배층의 공통적 묘제로서 쓰여졌다고 한다면, 이들 간에는 문화적 동질성을 뛰어 넘는 정치적 공감대가 상당히 강인하게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옹관고분이 분포하는 영산강유역 및 서남해안 일대의 고대사회를 단일의 정치권(政治圈)으로 상정하여, 이를 '옹관고분사회'라 불러서 좋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이처럼 독특한 묘제를 공유하는 옹관고분사회가 영산강유역에 대두된 시기는 언제쯤부터였으며, 이후 어떻게 전개되어 갔을까? 이 문제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구명하는데 있어서 핵심적 사항이 되겠는데, 이 문제에 대한 접근은 역시 옹관고분에 대한 편년작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간 옹관 형식과 출토 유물 등의 분석을 통해서 옹관고분의 편년에 관한 여러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이들 간에 다소간의 견해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에 따라 옹관고분사회의 대체적인 추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겠다. 첫째, 옹관고분사회는 늦어도 3세기 후반으로부터 6세기 전반 경까지, 대체로 250년 내지 300여년간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둘째,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지는, 초기에는 영암군 시종면 일대였다가 5세기 후반 이후엔 나주군 반남면 방면으로 이동해 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시종면과 반남면은 동떨어진 별개의 지역이라기 보다는 삼포강 연변에 연이어 있는 인접 지역이므로, 옹관고분사회는 결국 같은 지역 내에서 중심지 이동이 이루어진 셈이다.

먼저 시종면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초기 옹관고분사회[3-4세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시종면 일대에는 늦어도 3세기 후반 경으로 편년될 수 있는 대형 옹관고분군이 밀집해 있고, 이 고분군 근처의 나즈막한 산의 정상에 성틀봉토성이 축조되어 있다. 고분군은 삼포강 하류의 연변을 따라 내동리*와우리*옥야리*신연리*금지리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중 내동리 고분군이 규모와 밀집도에서 단연 두드러진다. 성틀봉토성은 내동리 고분군에서 지근한 거리에 있는 나즈막한 산의 정상 주위를 돌아가면서 테를 두른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정상부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기 위함인지 둘레를 수직으로 깎아 내려 몇개의 단층를 이루게 한 계단식의 형태로 축조되어 있다. 대형 옹관고분의 축조 의도가 죽은 이의 권위를 강조하여 살아있는 지배충의 권위를 과시하려는 데에 있었다고 한다면, 토성의 축조 의도는 지배층이 조직력을 유지*강화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분군과 축성의 존재는 고대 정치조직체의 존재를 반영하는 유력한 지표로 볼 수 있다.

삼포강 하류에 위치한 시종면 일대에는 내동리를 중심으로 완만한 구릉평야가 발달되어 있는데, 이러한 평야의 존재는 국가체를 유지하는 데 있어 경제적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고분군 및 축성의 존재와 더불어 주목되는 바이다. 시종면 일대에는, 이 3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는 점에서, 3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에 국가체를 이끌어간 정치세력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옹관고분의 밀집도와 규모로 볼 때, 이러한 정치세력은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세력으로서 그들을 아울러서 동일한 고분문화를 바탕으로 한 단일의 정치권(政治圈)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 소절에서 이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

2) '신미제국(新彌諸國)'과 그 실체

{진서(晋書)} 장화열전(張華列傳)에 나오는 다음의 '신미제국' 관련 기사를 통해서 영산강유역의 초기 옹관고분사회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에 장화(張華)를 '지절 도독유주제군사 영호오환교위 안북장군'(持節 都督幽州諸軍事 領護烏桓校尉 安北將軍)으로 삼아 전출하였다. 신구(新舊)의 세력을 무마하여 받아들이니 오랑케와 중국이 그를 따랐다.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은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띠고 있었으며 유주(幽州)와의 거리가 4천여리였는데, 역대로 내부(來附)하지 않던 20여국이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쳐왔다. 이에 먼 오랑케가 감복해 와서 사방 경계가 근심이 없어지고 매해 풍년이 들어 사마(士馬)가 강성해졌다.

중국 진대(晋代)의 명제상 장화가 유주자사로 좌천되어 변방정책을 혁신적으로 추진하자, 이제까지 내부하지 않던 '동이 마한의 신미제국' 20여국이 282년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해서 조공을 바쳐오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신미제국'은 그 앞에 마한이 관칭(冠稱)되어 있고,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지리적 여건을 감안한다면 서남 해안을 끼고 노령*소백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남지방, 그중에서 특히 영산강유역을 지칭할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먼저 마한이 관칭된 것으로 보아 신미제국은 일단 마한 지역 안에 있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진서} 동이열전(東夷列傳)의 마한조(馬韓條)에 의하면, 277년, 278년, 280년, 281년, 286년, 287년, 289년, 290년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 위의 장화열전에서 장화의 업적으로 치켜 세운 282년 신미제국의 사신 파견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윗 기사에서 신미제국이 282년에 '처음' 사신을 파견했다고 하나, 마한조에 의하면 마한은 이미 277년 이래 사신을 파견하고 있어 역시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신미제국에 관칭된 '마한'과 동이열전 마한조의 '마한'이 별개의 대상을 지칭하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앞의 마한은 막연한 지역에 대한 범칭(광의의 마한)이고, 뒤의 마한은 목지국을 중심으로 충청지역에 형성되었던 실체를 가진 정치권(政治圈)을 지칭하는 것(협의의 마한)으로 볼 것이다. 그렇다면 20여국이 집단적으로 진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신미제국은, 목지국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된 협의의 마한 정치권의 일부가 아니라, 광의의 마한 지역의 일부인 영산강유역에 성립한 단일 정치권(政治圈)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다시 말해 신미제국이란 '신미의 여러 나라'란 의미로서, 신미국(新彌國)을 중심으로 20여국이 단일 정치권으로 결집되어진 형태를 지칭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미제국은 바로 그 즈음에 대두된 것으로 파악되는 옹관고분사회에 대응되는 바라 할 것이고, 이 정치권을 영도한 중심 세력, 즉 신미국은 바로 시종면 일대에 옹관고분군과 토성을 축조한 세력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3-4세기 단계의 영산강유역의 고대사회는 대체로 이러한 모습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3. 5-6세기 옹관고분사회의 발전과 외세(外勢)의 침투

1) 옹관고분사회의 발전

영산강유역 및 서남해안 일대의 옹관고분사회는, 3-4세기 경에는 영암군 시종면이 그 중심지를 이루다가, 5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 무게 중심이 점차 삼포강을 따라 상류 쪽으로 이동하여 급기야 나주군 반남면을 최종적 중심지로 하여 6세기 전반까지 유지되어 갔다.

반남면 일대에는 중앙에 위치한 자미산을 중심으로 그 동쪽에 신촌리와 덕산리 고분군이, 그 서쪽에 대안리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들은 시종면의 그것에 비해 규모가 커지고 그 부장품도 화려해지는 양상을 보여준다. 자미산에는 정상을 중심으로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토성의 흔적이 역력히 확인된다. 토성의 축조 기법은 정상부를 중심으로 그 주위를 수직으로 깎아 내려 계단을 이루게 한 전형적인 테뫼식토성으로서, 마치 시종면 내동리에 있는 성틀봉토성의 확대판과 같은 인상을 준다.

자미산은 해발 50여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이에 오르면 주위가 대형 돔 구장을 연상시키듯 넓은 반남평야가 사방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남쪽에는 멀리 구릉 평야가 다하는 곳에 월출산이 솟아있고, 동쪽과 북쪽에는 삼포강이 북상하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반남평야를 감싸고 있다. 시종면 방면으로 흘러가 영산강 본류로 합류하는 이 강은 반남평야의 농업생산력을 보장하는 농업용수로서 뿐 아니라, 영산강으로 이어지는 수로(水路)로서의 기능도 다했을 것이다.

이처럼 반남면 일대는 고분군과 토성이 세트를 이루고 있다는 점과 주위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는 점에서 시종면 일대의 정황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다만 몇가지의 고고학적 지표를 통해서 볼 때 이러한 요소들의 규모가 시종면의 그것에 비해 월등히 커졌다는 점이 눈에 띠는 변화상이라 할 수 있다. 즉, 자미산에 대규모의 토성을 구축하여 난공불락의 방어망을 구축하고, 그 주변에 초대형의 옹관고분을 축조하여 화려한 부장품을 껴묻기 시작함으로써, 이제까지 영산강유역에서 유지해 왔던 박장(薄葬)의 풍속에서 탈피하여 이 지역 장례 문화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가 반영하는 바는 대개 다음의 두 관점에서 살펴질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간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세력이 성장해온 결과로 볼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즉, 3세기 후반 이후 시종평야에 자리했던 중심세력은 이후 성장을 거듭하더니, 5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시종평야의 경제적 토대로서는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장하게 되자 급기야 보다 넓은 평야를 띠고 있는 반남면 일대로 서서히 중심지를 옮겨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반남 지역에 정착한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세력은 더욱 강력한 정치 권력을 구축했을 것이고, 또한 당연히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에 대한 영도력을 더욱 강화해 가려 했을 것이 예상되는 바이다.

둘째, 외부세력의 침투 위협에 대해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세력이 대응한 결과로 볼 수도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이와 비슷한 시기인 5세시 후반 경에 백제계통의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과 왜 계통의 전방후원형고분(前方後圓形古墳)이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볼 수 있겠다. 중심부인 반남 지역에서 최고 수준의 옹관고분문화가 구축되는 바로 그 시점에 그 주변부에서는 이와 같은 이질적인 고분문화가 출현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주변부에 대한 외세의 침투 현상과 이에 대한 중심부의 대응 현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5세기 후반에 반남 지역에 나타나는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음 소절에서는 이 문제를 주로 외래 고분문화의 출현과 관련하여 후자의 관점에서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2) 외래 고분문화의 출현과 외세의 침투

옹관고분사회가 최고 전성기에 이르는 5세기 후반의 바로 그 시점에 횡혈식석실분과 전방후원형고분이라는 외래의 고분문화가 나타난 것은 확실히 주목되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은, 먼저 백제 및 왜와의 적극적인 문화 교류의 흔적으로 일단 이해해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에서도 이를 적극 수용했을 터이므로, 시종 및 반남 지역에서도 이러한 외래의 고분이 나타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들 외래 고분들은 중심부를 피해 주로 주변부에서만 나타나고 있어, 이러한 이해는 적절치 않다고 본다. 더구나 그 규모가 토착 옹관고분의 그것과 상당하는 것이어서, 단순한 문화요소의 유입 정도로 판단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렇다면 이 현상은 외세가 주변부에서부터 옹관고분사회에 조심스럽게 침투해 들어오는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즉, 영산강유역에 외래의 고분문화가 유입됨과 함께 외세의 침투가 동반되었을 것으로 보면 어떨까 한다. 이런 관점에서 횡혈식석실분과 전방후원형고분의 출현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횡혈식석실분의 경우를 먼저 살펴 보기로 하자. 영산강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횡혈식석실분은 그 축조기법 상에서 보아 크게 전기와 후기의 것으로 구분될 수 있다. 전기의 것은 대체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중반의 것으로 편년되고 있는데, 축조기법 상에서 토착의 옹관고분의 아이디어가 크게 반영되어 있어, 백제의 그것과 확연히 구분되고 있다. 이에 반해 후기의 것은 대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중반까지로 편년되는 것으로서, 전형적인 백제식[부여식]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후기 횡혈식석실분은 전형적인 백제 양식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분포지가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에까지 미치고 있어서, 영산강유역이 이미 문화적 정치적으로 백제의 완전 지배 하에 들어간 단계에 축조된 것으로 보아서 무리가 없다. 반면 전기 횡혈식석실분의 경우는 백제의 횡혈식석실의 형식은 채용하되 축조기법 상에서는 옹관고분의 아이디어를 기본으로 견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를 피해 주변부에서만 축조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그 성격이 다를 수 있다.

전기 횡혈식석실분은 광주 운림동과 각화동, 담양 제월리, 함평 월계리 석계(4-6호분), 해남 월송리, 장성 영천리, 신안 읍동리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옹관고분의 중심지인 시종면과 반남면에서 비교적 거리가 있는 주변부에만 산재해 있는 것이다. 만약 옹관고분사회에서 횡혈실석실분을 평화적이고도 능동적으로 수용했다고 한다면 그 중심부에서도 자연스럽게 수용되었을 것이나, 중심부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볼 때 중심부에서는 이의 수용을 배제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겠다. 그런데 주변부에서 확인되는 전기 횡혈식석실분들은 석실의 축조와 배치에서 옹관고분의 아이디어를 상당 부문 유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그 지역 출신자가 이를 능동적으로 수용하여 축조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5세기 후반에 횡혈식석실분의 수용을 둘러싸고 중심부와 주변부에서 취한 태도의 차이는 곧 양 세력 간의 문화적*정치적 인식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는데, 이는 곧 당시 주변부부터 침투해 들어오는 백제세력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실제 백제는 5세기 후반에 들면서 영산강유역에 대한 침투를 본격 시도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 옹관고분사회의 구성집단들은 일사불란하게 대처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집단의 이해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반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그 중심세력은 옹관고분사회의 영도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에 적극 대처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즉, 중심세력이 그 중심지를 시종 지역에서 보다 넓은 반남 지역으로 옮겨서 세력기반을 확대하고 권력구조를 강화하는 한편, 영산강유역에 대한 영도권을 다지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바이다. 반면 주변부의 반응은 중심세력의 영도권 하에 더욱 강하게 결속해간 경우와 그 영도권에서 이탈해간 경우의 두 갈레로 나타났을 것이 예상된다. 이 중 후자의 경우는 침투해 오는 백제와 제휴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백제 역시 영상강유역에 대한 효과적인 침투를 위해서 우선 이들과 제휴할 필요가 있었을 터이다. 그렇다면 전기 횡혈식석실분이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에서 출현하는 현상은, 이처럼 정치적 이해가 합치된 두 집단 간에 행해진 문화적 교류의 결과였던 셈이겠다. 이는 백제의 입장에서 볼 때 영산강유역을 정복해 가는 하나의 예비적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 되겠으며, 옹관고분사회의 입장에서 볼 때 주변부에서 친백제 세력이 대두하여 중심세력의 영도권에에서 이탈해 가는 조짐으로 볼 수 있겠다.

이제 전방후원형고분(前方後圓形古墳)의 경우를 살펴볼 차례이다. 분구의 앞 부분이 방형이고 뒷 부분이 원형인 형태를 취하는 일본의 전형적인 고대 묘제를 흔히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 칭한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분구 형태를 취한 전방후원형고분이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영산강유역에서만 확인되고 있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먼저 학계로부터 전방후원형고분으로 공인받은 것만을 보면, 영암 시종면 태간리 고분[자라봉고분]를 위시로 하여, 해남 삼산면 용두리 고분, 해남 북일면 방산리 고분[장고봉고분], 함평 월야면 예덕리 고분[신덕고분], 함평 손불면 죽암리 고분[장고산고분], 영광 월계리 고분[장고분], 광주 월계동 고분(2기), 광주 명화동 고분 등 9기에 이르고 있다.

이들 9기의 전방후원형고분에서 먼저 주목을 끄는 것은 자라봉고분의 예외성이다. 우선 그 위치에서 보면 대부분이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에서 벗어난 주변부에 산재해 있는 반면에 자라봉고분만이 그 중심지에 있고, 편년에 있어서도 대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으로 편년되고 있는 반면에, 자라봉고분만이 4세기대로 편년되고 있다. 고분 내부의 매장주체시설 역시 자라봉고분은 예외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발굴 조사된 광주의 3기와 영암 자라봉고분 및 함평 신덕고분의 경우를 비교해 볼 때, 자라봉고분만이 원형부 분구의 정상에 수혈식석실의 매장주체시설을 축조한 것으로 되어 있는 반면에, 나머지 4기는 모두 원형부의 측면에 횡혈식석실의 매장주체시설을 축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자라봉고분의 예외성을 염두에 둔다면, 전방후원형고분에 대한 문제는 다음의 두 단계로 나누어 살펴질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자라봉고분으로 대표되는 전방후원형고분이 4세기 경에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에서 수용될 수 있었던 배경의 문제이다. 자라봉고분은 단순히 분구 형태만을 새로 취한 것이 아니라 매장주체시설도 토착의 옹관을 쓰지 않고 이질적인 수혈식석실을 취한 것으로 보아, 완전히 새로운 체계의 고분분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전방후원형의 분구를 만들고 그 원형부의 정상에서 수혈식설실을 축조해 들어가는 이러한 기법은 일본 고대 초기의 전방후원분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자라봉고분은 이러한 초기 왜계 전방후원분이 4세기 경에 시종 지역에 이식 흔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자라봉고분을 왜계의 전방후원형고분의 이식으로 볼 수 있다면, 이에 대한 의미가 천착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시종 지역의 세력집단과 왜의 특정 세력집단 간에 무언가 적극적인 교류관계가 있었음을 상정할 수 있을 터인데, 이와 관련하여 자라봉고분의 입지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자라봉고분은 시종의 옹관고분 밀집구역에서 외떨어진 태간리의 저습한 평지 위에 하나의 섬처럼 외따로 서 있다. 이처럼 고립적인 위치에 단 1기만이 서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여기에 묻힌 주인공은 뭔가 특별하고 예외적인 일에 종사한 왜인(倭人)일 것이라는 생각이 우선 들며, 이런 관점에서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양 세력집단 간의 교류에 관련된 일을 담당하면서 이 지역에 호의를 가지고 있던 한 왜인이 죽자, 양 지역의 세력집단은 서로의 우호적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가기 위한 상징적 기념 행위로서 왜계의 장례 절차에 따라서 그를 옹관고분의 묘역과 구분되는 별도 구역에 묻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자라봉고분은 4세기 단계에 옹관고분사회의 맹주세력집단과 왜의 특정 세력집단 간에 적극적 교류가 행해졌음을 보여주는 주요 지표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시종 지역의 전방후원형고분이 단 1기에 그치고 있다는 것은, 양 집단 간의 우호관계를 함축하는 고분의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교류가 오래가지 못했던 데에도 원인이 있었을 듯 싶다. 다음 절에서 살펴보겠지만, 백제와 왜는 4세기 후반에 제휴하여 신라를 견제하면서 가야지역에 대한 교역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 여세를 몰아 남해를 따라 서진(西進)하여 오늘날의 해남 지역을 공격하여 여기에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던것이며, 이에 따라 왜와 시종 지역 세력집단 간의 우호적 교류 관계는 단절되고 점차 적대적 관계로 전환해 갔을 것이다.

둘째, 5세기 후반에 이르러 횡혈식석실의 매장주체시설을 취한 전방후원형고분들이 주로 주변부에서 대두하게 된 배경의 문제이다.

5세기에 들어 고구려의 남진책으로 백제가 475년에 한성을 함락당하고 웅진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에 몰리면서, 백제와 왜 연합세력은 옹관고분사회에 대해 신경쓸 여유를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5세기 후반에 고구려의 남진이 주춤해지면서, 백제와 왜는 다시 영산강유역에 대한 세력 침투를 경쟁적으로 재개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시기에 영산강유역 주변부에서 출현하는 전기 횡혈식설실분이 백제 세력 침투의 추세를 반영한다고 한다면, 전방후원형고분은 왜 세력 침투의 추세를 반영한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이들 전방후원형고분은 대개 횡혈식석실의 매장주체시설을 갖추고 있고, 이에서 출토된 유물들 중에는 왜계 유물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이러한 추리는 사실에 가까우리라고 본다. 이의 성격에 대한 해명은 앞으로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엄밀한 비교 분석을 거친 연후에야 가능할 것이지만, 필자는 전기 횡혈식설실분의 경우에 준하여, 옹관고분사회 주변부의 토착세력이 또 하나의 침투 세력인 왜와 제휴하여 새로운 고분문화로서 전방후원형고분을 수용한 것으로 일단 이해해 두고자 한다.

이상의 논의에 따른다면, 5세기 후반에 옹관고분사회는 반남에 자리한 중심세력과 외세인 백제 및 왜의 3자 간에 심각한 주도권 다툼의 장으로 되어간 것으로 파악될 수 있겠다. 즉, 그 주변부에 대한 백제와 왜의 세력침투가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그 중심세력은 이에 대응하여 기왕의 영도권을 지키고 강화하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간 것으로 이해된다. 중심지를 시종 지역에서 보다 넓은 반남 지역으로 옮겨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고, 대규모의 자미산성을 축조하여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는 한편, 초대형의 옹관고분을 축조하고, 기왕의 장례문화를 탈피하여 여기에 화려한 부장품을 부장하였던 것 등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옹관고분사회는 그 주변부로부터 해체되어 갔다. 이에 따라 백제와 왜 세력은 옹관고분사회에 대한 주도권 장악을 둘러싸고 더욱 격렬한 경쟁을 전개해 갔을 것이 예상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생생한 모습을 전하는 구체적인 기록과 유물*유적을 찾아볼 수 없어 유감이다. 다만 고고학적 추세를 볼 때, 6세기 중반 이후에는 토착의 옹관고분은 물론이고 전기 횡혈식석실분과 전방후원형고분이 모두 소멸되어 가고, 그 대신에 6세기 중반 이후의 것으로 편년되는 전형적인 백제식의 후기 횡혈식설실분이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는 물론이고 그 중심지인 시종*반남 지역에서까지 새로이 대두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영산강유역에 대한 최후의 승리자는 역시 백제였겠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후기 횡혈식석실분으로 분류될 수 있는 몇몇 사례로, 무안 인평리 고분, 나주 흥덕리 및 대안리 고분, 영암 봉소리 고분, 고흥 복룡리 고분, 신안 도창리 고분 등을 들 수 있겠는데, 이들은 옹관고분사회의 핵심부를 비롯하여 전략상의 요지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봉소리 고분은 초기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지인 시종면에 있고 흥덕리와 대안리 고분은 후기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지인 반남면에 있으며, 도창리 고분은 영산강 하구에서 진도의 울돌목을 거쳐 해남반도로 가는 해로의 주요 길목이 되는 장산도에 있다. 이런 분포상에서 볼 때, 후기 횡혈식석실분은 6세기 중*후반 이후 백제의 중앙인이 영산강유역을 지배하기 위해 주요 거점 지역에 파견되어 와서 묻힌 무덤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상의 논의를 염두에 두면서 백제의 영산강유역 진출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4. 백제의 영산강유역 진출과 편제

1) 영산강유역 진출과정

백제가 영산강유역에 대한 진출을 처음 시도했던 것은 4세기 후반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사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다음의 기사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신공) 49년 3월에 황전별(荒田別)과 녹아별(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久?)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卓淳國)에 이르러 장차 신라를 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사가 적어 신라를 깨뜨릴 수 없다는 의견이 있어, 사백(沙白)과 개로(蓋盧)를 보내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니, 즉시 목라근자(木羅近資)와 사사노궤(沙沙奴?)에게 명하여 정예군을 거느리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모두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 깨뜨렸으니, 이로 인해 비자발*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 등의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하여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고해진(古奚津)을 돌아 남만(南蠻)인 침미다례(?彌多禮)를 도륙(屠戮)하고 이를 백제에게 주었다.

왜군이 369년에 신라를 격파하고 가야의 7개국을 평정한 여세를 몰아 서쪽으로 고해진[강진 지역으로 비정됨]을 거쳐 침미다례[해남 지역으로 비정됨]를 약탈하고 이를 백제에게 주었다는 내용이다. 마치 왜군이 주체가 된 침략 행위로 되어 있으나, 이는 {일본서기}에서 의도적으로 왜곡한 바이고, 실제로는 백제가 왜와 함께 가야 지역에 대해 군사적 위협을 가하여 '백제-가야-왜'로 연결되는 교역권(交易圈)을 확보하고, 그 여세를 몰아 남해안을 따라 해남 지역을 공격*점령하여 영산강유역에 대한 경제적*정치적 침투를 위한 거점을 확보했던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로 이것이 또한 백제의 영산강유역 진출의 첫 시도였던 것이다.

4세기 후반에 백제가 처음 점령한 해남 지역은, 4세기 초까지 활발히 진행되고 있던 낙랑*대방군과 가야 및 왜 사이의 바다를 통한 교역에서 주요 중간 기착지로서 성황을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해남의 백포만 일대는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굴곡 지점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일대에서 풍부한 선사 및 고대 유물*유적들이 확인되고 있어 이러한 중간 기착지로서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손꼽힌다. 이 일대의 대표적 유물*유적으로서 군곡리의 대규모 패총 단지를 우선 들 수 있겠는데, 여기에서 중국 화폐인 화천(貨泉)을 위시로 하여 토기류*철기류*골각기류*곡옥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된 바 있어, 백포만 일대가 교역로의 중간 기착지로서 한 때 크게 성행했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또한 군곡리의 군안골에서 대형 합구옹관(合口甕棺)과 수개의 원형 봉토가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의 세력집단 역시 옹관고분사회의 일원이었음을 알겠다.

그런데 4세기 초에 낙랑*대방군이 축출되면서 백포만 일대는 교역로의 중간 기착지로서의 의미가 감퇴되어 성장세가 주춤해 졌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 백제가 왜와 제휴하여 가야에 압력을 가해 '백제-가야-왜'의 교역권을 복원하고, 급기야는 백포만 일대에 진출하여 영산강유역에 대한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을 것으로 보인다. 백포만 일대에는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뚜렷한 고고학적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 먼저 현산면 고현리 주변에서 전형적인 백제식 토기와 가야식 토기가 다수 수습되었다. 영산강유역의 여타 지역에서는 이러한 백제식 및 가야식토기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토기가 다수 수습된 고현리 주변은 확실히 고립된 섬과도 같은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이는 백제가 '백제-가야-왜'의 교역권을 주도하고 그 영향력을 옹관고분사회에까지 확대해 가려는 과정에서 백포만 일대에 하나의 거점을 확보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지 않을까 한다.

백제가 이처럼 백포만 일대에 거점을 확보했다고 한다면, 그 시기는 윗 기사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대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에 걸친 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현리 주변에서 수습된 토기들의 편년이 대개 5세기 초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견해가 참고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현리에는 5세기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죽금성]이 있는데, 백제는 이를 거점 성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후 5세기에 들어 국제 정세는 크게 변하였다. 고구려가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남하정책을 본격화해 가더니, 475년에는 급기야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키기에 이른다. 이에 백제는 한성을 버리고 웅진으로 천도해 내려간 이후 당분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치적 안정을 찾지 못하였으니, 이런 상황에서 옹관고분사회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백제의 움직임은 자연 둔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이후 5세기 말에 백제의 동성왕(東城王)은 신라와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493년)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고 정치적 안정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자, 옹관고분사회에 대한 진출을 재삼 시도하였다. 이는 다음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동성)왕은 탐라(탐羅)가 공납을 바치지 않는다 하여 친히 정벌하여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렀다.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비는지라 이에 그만두었다.

498년에 탐라[현 제주도]가 공납을 바치지 않는다 하여 동성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무진주[현 광주]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백제와 탐라의 관계를 염두에 둘 때 이 때의 탐라 정벌은 다분히 명목적인 표방에 불과한 것으로 보여지고, 그 주목적은 역시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사회에 대한 무력 시위에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동성왕이 이끄는 군대가 영산강유역의 북변인 광주 지역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당시의 대내외적 정세에 비추어 볼 때, 백제가 옹관고분사회를 무력으로 일시에 제압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먼저 501년에는 동성왕이 피살되고 마는데, 이는 백제 정정의 불안정성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라 할 것이다. 또한 백제와 왜는 고구려의 남하에 공동 대처하면서도, 남해안의 교역권에 대한 주도권을 둘러싸고 점차 경쟁 관계에 돌입하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5세기 후반부터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에서 전기 횡혈식석실분과 전방후원형고분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이러한 경쟁의 양상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지표가 될 수 있겠다.

6세기에 들어 안정을 되찾은 백제는 무령(武寧)*성왕(聖王) 대에 신라와 왜의 비협조를 무릅쓰면서 다시 '백제-가야-왜'의 교역권[동맹체제]을 복원하여 그 주도권을 확립하는데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두어 갔다. 이어서 백제는 사비로 천도하고(538년) 담로제를 실시하여 전북 지역까지 지방제로 완전 편제하는 한편, 그 여세를 몰아 영산강유역으로 진출하여 급기야 반남 지역의 맹주 세력집단을 굴복시키고 이 지역을 5방(方)의 지방제 하에 편제하여 지배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시기가 전형적인 백제식의 후기 횡혈식석실분이 옹관고분사회에서 대두되는 6세기 후반의 시점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추론은 큰 무리가 없으리라 본다.

이제 백제가 영산강유역을 지방제로 편제하여 지배해간 과정과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2) 영산강유역 편제

{양서(梁書)}에는 6세기 전반 경의 백제 지방제도에 관한 기사가 실려있다. 22담로가 그것이다. 그런데 담로는 후대의 군(郡)에 해당하는 행정단위로 이해되고 있으므로, 6세기 전반에 22개가 있었다고 한 {양서}의 기록을 근거로 해서 당시 백제의 대체적인 편제 범위를 설정해 볼 수 있다.

6세기 전반이란 시점은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을 뺏기고 웅진으로 천도한(475년) 이후 이므로, 그 당시 백제의 편제 대상지역은 일단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이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이 지역들을 통일신라의 9주(州)에 비추어 보면, 충청도 지역은 웅주(熊州)에, 전북 지역은 전주(全州)에, 전남 지역은 무주(武州)에 각각 대응되는데, 통일신라의 지방제도에 의하면 웅주는 13군, 전주는 10군, 그리고 무주는 13군으로 각각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중 웅주와 전주만 합해도 23군이 되어, 22담로의 수와 비슷해 진다. 이는 결국 6세기 전반에 백제가 22담로로서 편제*지배한 지방의 범위는 충청도와 전북 지역을 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전남 지역은 당시 백제의 편제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던 셈이 된다.

그 이후 언젠가 전남 지역도 백제의 지방제도로 편제되어 그 지배 하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멸망시 백제의 영역이 '37군'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의 웅주와 전주와 무주의 군들을 합한 36군과 근사한 것이어서, 늦어도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는 전남 지역까지 편제하여 완전 지배 하에 두었다는 것을 할 수 있다. 그 시점은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에서 전형적인 백제식 횡혈식석실분이 축조되기 시작하는 6세기 중*후반 경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6세기 중*후반이란 시기는 백제가 사비[부여]로 천도한 538년 이후의 이른바 '사비시대'로서, 이 시기에 백제는 5방제(方制)라는 지방제도를 새로이 정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방제란 전국을 중방과 동방*서방*남방*북방의 5방으로 5대분하고, 그 각 방을 다시 수개의 군으로 나누어 편제한 지방제도를 말하는데, 이러한 5방제의 성립은 전남 지역에 대한 편제를 완료한 시점에 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중방은 전북 지역을, 북방은 부여 이북의 충청도 지역을, 남방은 전남 지역을, 서방은 서해안 지역을, 동방은 부여 이동의 충청도 지역을 대상으로 편제한 광역 행정단위였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전남 지역은 6세기 중*후반 경에 남방으로 편제되어, 그의 완전한 지배 하에 들어갔던 것이다.

4. 통일신라의 영산강유역 편제

6세기 중*후반 경에 5방제를 정비하면서 시작된 영산강유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는, 백제가 660년에 신라에게 망함으로써 약 1세기만에 종지부를 찍고 만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확대된 영토를 9주(州)로 나누어 새로이 편제하였으니, 이 때 백제의 5방제를 폐지하고 대신 3개의 주(州)를 두었던 것이다. 전남 지역의 경우 남방(南方)을 폐지함에 대신하여 오늘의 나주 지역에 발라주(發羅州)를 두어 편제하더니, 신문왕 6년에 발라주를 발라군으로 강등시키고 대신 광주 지역의 무진군(武珍郡)을 무진주로 승격시켜서 전남 지역 편제의 중심지[州治]로 삼았다. 무진주의 관할 주군현(州郡縣)은 모두 1주 15군 43현이었는데, 이중 영산강유역을 배경으로 설치된 군현이 7-80%에 달하고 있어, 무진주의 편제 중심은 역시 영산강유역이었음을 알겠다.

지방 편제의 주목적은 재지세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면서 국가적 수세원(收稅源)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는 우선 재지세력의 발호를 통제하고 지방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국의 요지에 10정(停)의 지방 군단을 상주시켰는데, 무진주에는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을 설치하였다. 미다부리정이 설치된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은 무진주 직속의 영현(領縣)으로서 영산강유역의 요충지인 오늘날의 남평 지역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무진주 영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였던 것이다.

군현을 편제하는데 있어서도, 통일신라는 기본적으로 백제의 옛 군현 편성체계를 바탕으로 하되, 영산강유역 재지세력의 영향력을 충분히 고려하고 이 지역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십분 감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군현 편성체계에서 현(縣)이었던 것이 통일신라 때에 군(郡)으로 승격된 다음의 사례들을 통해서 이러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가) 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반남군(潘南郡)[오늘날의 나주군 반남면]

나) 고시이현(古尸伊縣)->갑성군(岬城郡)[오늘날의 장성]

다) 도산현(徒山縣)->뇌산군(牢山郡)[오늘날의 진도]

라) 아차산현(阿次山縣)->압해군(壓海郡)[오늘날의 신안군 압해도]

먼저 반남군의 경우는 왕년에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지역으로서 재지세력의 영향력이 비교적 강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백제가 이 지역을 현으로 편제했던 것은 이 지역의 재지세력을 억누를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통일신라가 이를 군으로 승격시켰던 것은 이 지역 재지세력의 현실적 영향력을 다시 공인해준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다음에 갑성군이 군으로 승격된 것은 노령산맥을 경계로 하고 있는 무진주와 완산주(完山州)[전북 지역]를 연결해주는 요충지라는 점이 고려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뇌산군과 압해군이 군으로 승격된 것은 통일신라가 서남해안의 도서 지역을 중시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는데, 이는 당시 대중국 교류에 있어 서남해안 도서지역의 증대된 역할이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편제 방향은 통일신라의 제사체계에도 잘 나타나 있다. 통일신라의 제사체계는 전국의 산천신을 대상으로 하여 그 중요도에 따라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의 체계로 정비되어 있었다. 무진주의 경우는 청해진(淸海鎭)[오늘의 완도]이 중사로, 월나산(月奈山)[오늘의 영암 월출산]과 무진악(武珍岳)[오늘의 광주 무등산]이 소사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중 무진악은 주치[州治]에 있는 영산(靈山)이고 월나산은 영산강유역 남단에 있는 보기 드문 영산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들을 신라 국가의 제사체계 안에 편성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청해진이 소사도 아닌 중사의 제사체계로 편성된 배경이 문제이겠는데, 이는 뇌산군과 압해군이 군으로 승격된 것과 마찬가지로 대외 교류의 거점으로서 서남해안의 도서 지역이 중시된 결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월나산이 신라의 제사체계 안에 편성된 데에는, 역시 대외교류의 거점으로서 영암 지역이 중시되었던 점도 고려되었을 터이다.

이처럼 통일신라가 대외교류의 측면에서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 지역을 중시하였다고 한다면, 무진주 지역 재지세력의 동향에 대해서도 당연히 각별한 관심을 가졌을 터이다. 예를 들어 통일 직후에 문무왕의 서제(庶弟)인 차득공(車得公)이 재상에 취임하기 전에 무진주에 민정 시찰하여 무진주의 향리(鄕吏)인 안길(安吉)과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이 재지세력에 대한 통제책으로 알려진 상수리제도(上守里制度)의 기원 설화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이후 국가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던 이 지역의 재지세력은 9세기에 들어 청해진(淸海鎭)이 설치되면서, 청해진 대사(大使) 장보고(張保皐)에 의해 조직화되어 한*중*일 간의 국제 해상교역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그 일부세력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중앙 정치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고, 급기야 왕위쟁탈전에까지 관여하게 되어 비극적 최후를 맞기에 이르렀다.(姜鳳龍)

(게재 : {영산강유역사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