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num.mokpo.ac.kr/kangbr/나주고대사1.htm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와 나주
姜鳳龍(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조교수)

1. 머리말

2. 나주지역 고대사회의 고고학적 양상

3.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지와 반남면세력

4. '옹관고분사회'의 대외관계와 나주

1) '東夷馬韓新彌諸國'의 실체

2) '옹관고분사회'의 대외관계와 해체

5. 맺음말

1. 머리말

나주지역은 지리적으로 영산강유역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대표적 지표라 할 옹관고분이 가장 밀집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더욱이 나주지역에 분포하는 옹관고분은 그 규모 면에서도 최대급으로 알려지고 있어서, 나주지역이 고대 영산강유역의 중심지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실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나주지역 고대사회를 우선적으로 복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나주지역 고대사회를 복원하는 데에는 몇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첫째, 나주의 古代史像은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전체적 맥락 속에서 파악되어야만이 제대로 밝혀질 수 있다는 점이다. 고대 나주의 위상에 비추어 볼 때, 나주지역 고대사는 나주에만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 영산강유역 전체와 관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복원하기 위한 문헌 자료가 매우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점 때문에 그간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복원하려는 고대사학계의 노력이 별로 기울어지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만약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복원하려 한다면, 그것은 대부분 고고학 자료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다행히 최근 영산강유역 고대 유적지들에 대한 고고학계의 발굴 조사의 성과가 상당히 축적되어 왔다. 이제 고고학계에서 캐낸 이러한 소중한 성과의 구슬들을 재료로 하여 역사적 맥락에서 이를 꿰어 보려는 시도를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고학계의 성과조차 없었다고 한다면 이 지역의 고대사 연구는 여전히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분야로 남아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본고는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그간의 고고학계의 성과물과 얼마 되지 않는 문헌 자료를 적절히 활용하여 나주지역 고대사회의 큰 맥락을 세워보려는 하나의 시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고고학적 자료가 더 보태어짐에 따라서 본고의 논지는 더욱 보강되고 혹은 수정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리라 본다. 고대사학계와 고고학계의 관심있는 연구자들의 질정을 바란다.

2. 나주지역의 고대사회의 고고학적 양상

문헌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지역의 고대사회를 복원하는 데에는, 주로 고고학적 자료가 활용될 수밖에 없다. 특히 고대사회에서 고분은 죽은 이의 권위를 강조하여 살아있는 지배층의 권위를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성곽은 외부 세력에 대응하여 정치세력집단의 기득권을 지키고 강화하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고분과 성곽은 고대 정치세력집단의 윤곽을 그리는데 없어서는 안될 자료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어 나주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옹관고분과 성곽의 흔적을 우선적으로 주목하면서, 나주지역 고대사회의 복원을 시도하려 한다.

그간 나주지역의 옹관고분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높은 편이었으며, 이에 대한 고고학계의 조사와 연구성과도 상당히 축적되고 있다. 반면 이 지역의 고대 성곽에 대한 관심은 매우 미미한 형편이다. 여기에서는 그간 고고학계에서 축적해온 고분에 대한 연구성과와 최근 발표자가 나주지역 지표조사에서 확인한 고대 성곽자료를 중심 자료로 활용하면서 나주지역 고대사회의 대체적인 윤곽을 그려보기로 한다.

먼저 나주지역 옹관고분의 분포상을 보면, 반남면이 최고의 밀집도를 보여주고 있는 가운데, 다시면·동강면·공산면 일대가 그에 버금가는 밀집도를 보여주고 있고, 그밖에 밀집도에서 현저하게 떨어지긴 하지만 나주시 관내의 여타 지역에서도 대부분 옹관고분의 흔적들이 찾아지고 있다. 이러한 분포상을 일별해 볼 때 나주지역의 옹관고분은 영산강본류의 중류역과 영산강의 지류인 삼포강 일대에 집중적으로 밀집해 있다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고대 성곽의 분포를 보면, 반남면의 자미산성을 위시로 하여 다시면의 회진토성, 나주시의 영산창성지, 노안면의 학산리토성지가 눈에 띠고, 그밖에 흔적이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공산면의 화성리토성지 등을 들 수 있다. 고대 성곽 역시 영산강본류의 중류역과 삼포강 일대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 <지도 1>과 같다(논문 뒤 첨부).

이제 <지도 1>을 중심으로 하여 옹관고분 및 고대 성곽의 주요 분포 지역을 면 단위별로 고찰해 보고, 이를 통해 나주지역 고대 정치세력집단의 존재양상을 가늠해 보기로 한다.

먼저 옹과고분의 최고 밀집지인 반남면 일대를 살펴보기로 하자. 반남면 일대의 자연환경을 보면, 영산강의 큰 지류인 삼포강의 상류가 관통하는 가운데 완만한 구릉상의 넓은 평야지대가 형성되어 있고, 그 평야의 중앙에 해발 90여m의 자미산이 솟아있다. 이 자미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신촌리와 덕산리에 영산강유역 최대규모의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고, 서쪽의 대안리에도 이에 못지 않은 규모의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이 고분들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진 못했으나, 현재 조사된 바에 따르면 옹관고분이 주를 이루고 있고, 그 대부분이 5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 초반에 걸쳐 집중 조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미산에는 독특한 '계단식' 성곽[자미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자미산성은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를 둘러서 수직으로 깎아내리고 다시 3∼5m 정도 되는 평탄면을 조성한 '계단식' 축조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정상부의 평탄면까지 포함하여 3단 정도를 이루게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자미산성에 대한 본격 학술 조사가 이루어지 못한 현 단계에서 그 성격과 초축 시기를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뒤에서 살펴보듯이 영산강유역에서 흔히 확인되는 고졸한 계단식의 축조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그 첫 축조 시기는 아마도 먼 고대의 시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주변의 옹관고분이 축조된 시기에 함께 초축된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성곽과 고분이 유력한 고대 정치세력집단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유력한 지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반남면 일대는 적어도 5∼6세기 경에는 영산강유역에서 단연 최강의 세력집단이 군림했던 곳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반남 일대에 펼쳐져 있는 넓은 구릉성 평야지대가 강력한 정치집단을 뒷받침할 수 있는 농업생산력 창출의 토대로서 손색이 없었으리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하리라고 본다. 실제 반남고분군의 신촌리 9호분에서 금동관·금동신발·환두대도 등의 유의할만한 위세품들이 출토된 바 있어, 이곳에 군림하고 있었을 정치세력의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반남의 정치세력은 영산강의 水路와 서남해의 해로를 통해서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 일대에 정치 문화적 영향력을 확산시켜 갔을 것이고, 급기야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맹주적 지위를 확립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에 다시면 일대를 보자. 다시면은 남동 방향으로 영산강 본류가 흐르고 있고, 영산강의 소지류인 문평천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본류와 합류하면서 다시면을 동서로 구분하고 있는 가운데, 그 연변에 많은 고분군들이 산재해 있다. 먼저 문평천 동쪽에는 현재 한창 발굴조사가 진행 중에 있는 복암리 고분군이 있고, 문평천 서쪽의 영동리 영촌마을과 초동마을 등지에도 상당한 규모의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다.

이 중 특히 복암리 고분군은 그 규모가 최대급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최근 3호분에 대한 정밀 발굴 조사가 진척되어감에 따라 그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어,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진척된 조사 상황을 보면, 3호분은 옹관과 석실·석곽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석실과 옹관을 결합한 형식에 이르기까지 39개에 달하는 다양한 매장주체시설을 단일 분구에 조영한 방대형의 고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호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보고서가 정리된 연후에야 판단할 수 있겠지만, 현재의 진척 상황에 비추어서 몇가지 사실은 단편적으로나마 추정해볼 수 있다. 첫째, 분구의 축조 시기는 6세기 초반 경으로 추정된다. 이 때 4개의 옹관이 陪葬된 1호 석실이 조성되고, 그 비슷한 시기에 여러 개의 석실과 옹관이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1호 석실은 백제의 그것과는 판이한 영산강유역의 변형 양식으로 조성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둘째, 이후에도 석실과 석곽, 그리고 옹관의 매장주체시설이 분구 중에 추가로 조성되어 간 것으로 추정된다. 추가로 조성된 매장주체시설 중에는 백제말 부여식의 횡혈식석실 양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도 있어서, 매장주체시설의 추가 조성은 7세기 때까지도 지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圭頭大刀 등 일본열도에서만 나오는 유물도 수습되고 있어, 다시면 일대의 세력집단이 백제 뿐만 아니라 일본열도의 왜 세력과도 교류 관계를 맺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토기의 개배 상에 朱漆로 쓰여진 '卍'자의 反射字體가 확인되고 있어, 혹시 불교의 전래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의심되기도 한다.

이러한 추정들을 인정할 수 있다면, 3호분은 다시면의 유력 세력집단이 6세기에서 7세기까지 약 1세기 동안에 걸쳐 활용한 분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시기 별로 석실의 양식 변화가 비교적 잘 나타나고 있어서 이 지역 세력집단과 백제와의 관계를 추적할 중요한 단서를 잡을 수 있다고 본다. 이 세력집단은 6세기 초부터 비록 변형 양식으로나마 횡혈식석실분을 채용했다는 점에서 일찍이 친백제적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러면서도 왜와의 교류 흔적도 엿보이고 있고 또한 옹관을 쓰는 토착의 전통을 늦은 시기까지 유지해 갔던 것 등으로 보아, 개방성과 토착성을 겸유하는 성향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복암리 고분군의 북동쪽에 연접해 있는 자메산 바로 너머의 회진마을에 회진토성이 있는데, 이 토성은 복암리 고분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회진마을은 서쪽과 북쪽과 동쪽의 3면이 나즈막한 산으로 둘러쌓여 있고 영산강 본류를 향해 있는 남쪽만이 트여 있는데, 회진토성은 트여 있는 남쪽방면을 동서의 산록으로 연결하여 包谷式으로 축조한 것이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흙을 판축하여 쌓은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 성벽의 기저부 넓이는 6m 정도, 높이는 약 4.6m 정도에 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동쪽 산의 반대 경사면에서 '계단식'으로 축조한 듯한 토성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만일 이것이 사실로 판명된다면 회진토성은 원래 자미산성과 같은 '계단식'으로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다시면 일대에서 확인되는 고분과 토성의 분포상으로 볼 때, 이 일대에는 6세기 전반경에 반남면세력에 버금가는 유력한 세력집단이 군림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심세력은 회진토성을 중심 근거지로 하여, 복암리 고분군 축조 세력과 문평천 서쪽 편에서 별도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을 영촌 및 초동 고분군 축조세력을 영도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반남면과 다시면 일대 이외의 지역에서도 고분과 성곽의 흔적이 찾아지고 있다. 먼저 나주시 榮江洞 澤村 마을의 얕으막한 뒷산에 있는 이른바 榮山倉城址를 들 수 있다. 이 성지는 고려말에 漕倉으로 사용되기 시작된 이후 조선 중기까지 운영되다가 1512년에 폐창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 발표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남쪽 사면은 영산강 본류와 바로 연접하여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자연 성곽과 같은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에, 그 동북쪽 사면에는 4단 정도로 축조된 '계단식' 토성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계단식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영산창성지의 초축 시기는 멀리 고대의 시기에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본다.

다음에 노안면 학산리 토성지를 들수 있다. 학산리 토성지는 영산강이 지석강과 합류하는 지점 부근의 야트막한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 그 야산의 남동쪽 사면에 급경사를 이루면서 바로 영산강과 연접하고 있는 점이나 그 동쪽 사면에 4단 정도로 축조된 계단식 토성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에서 영산창성지와 동일한 형식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역시 고대 성곽으로 볼 것이다.

그런데 영산창성지나 학산리 토성지의 주변 일대에는 대규모의 고분군이 눈에 띠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에 강력한 고대 정치세력이 군림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이 지역들은 반남면세력이나 다시면세력이 영산강의 수로를 통해 영산강유역 세력집단을 연결하는 거점으로 활용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하다.

한편 발표자는 최근 삼포강의 북쪽 건너편에 위치한 공산면 화성리에서 애매하긴 하나 토성인듯한 흔적을 확인하였다. 완만한 구릉으로 둘러싸인 자연적인 골짜기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축조된 이 토성지는 남쪽으로 삼포강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런데 공산면과 그에 인접한 동강면 일대에는 상당한 규모의 옹관고분이 다수 분포되어 있어, 삼포강의 북쪽 연변에도 토성과 고분을 축조한 정치세력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다만 이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 세력의 실체를 속단하기는 어렵다.

이상에서 나주시 관내의 고대 성곽과 옹관고분군의 분포를 주로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면 단위 별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나주지역 고대사회의 특징을 몇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먼저 이 지역 고대사회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옹관고분과 고대 성곽이 주로 영산강 본류와 삼포강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이 지역에 살았던 고대인들이 영산강을 그들의 생존과 번영의 수단으로 삼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구둑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영산강은 밀물 때를 맞으면 바닷물이 멀리 영산포 이북에까지 역류하여 풍부한 수량을 보유하게 하여 천혜의 수로 교통로를 제공하였는가 하면, 썰물 때에는 바닷물이 빠져나가 민물을 회복함으로써 풍부한 농업용수를 제공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둘 때, 이 지역의 고대인들은 영산강에 의지하여 높은 수준의 농업생산력을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그 수로를 이용한 상호 교류를 통해서 문화적·정치적 동질의식을 확보해 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밖에 반남면 일대와 다시면 일대가 나주지역 고대사회의 양대 중심지였다는 점, 영산강과 그 지류의 수로를 통해서 나주지역 고대사회의 제세력이 서로 정치 문화적 연관성을 맺고 있었으리라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연관성은 단순히 나주지역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으며,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지역의 전역에 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지역의 고대사회라는 큰 맥락 속에서 나주지역 고대사회의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3.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지와 반남면 세력

나주지역의 특징적인 고대 유적으로 든 옹관고분과 계단식 토성은 나주지역에서만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옹관고분의 분포지를 보면, 나주를 위시로 하여 영암·무안·함평·영광·광주·해남·강진·화순·담양 등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지역의 전역에 걸쳐 있고, 계단식 토성도 필자가 확인한 것만 하여도 나주의 자미산성·회진토성·영산창성지·학산리토성 이외에도, 영암 시종면 내동리의 성틀봉토성과 해남읍 남연리의 옥녀봉토성, 그리고 해남 현산면 일평리의 속칭 죽금성 등이 있다. 고대 성곽에 대한 관심과 조사가 아직 미미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계단식 토성 역시 옹관고분 분포지의 전역에서 찾아질 가능성은 그만큼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옹관고분과 계단식 토성의 분포로 보건데,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지역에는 옹관고분과 계단식 토성으로 특징지워지는 단일의 고대 정치문화권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옹관고분은 영산강유역 및 서남해안지역의 고대 지배층들이 공통으로 썼던 독특한 묘제였다는 점에서, 이 권역 내의 제세력집단들은 문화적 동질성을 뛰어넘어 정치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정치적 연맹을 맺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옹관고분을 공통의 묘제로 공유하고 있던 영산강유역 및 서남해안지역의 고대사회를 '옹관고분사회'라 불러 무방하리라고 본다. 그런데 옹관고분의 존속기간이 3세기에서 6세기 전반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이 기간을 '옹관고분사회'의 시간적 범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지역을 공간적 범위로 하고 3∼6세기를 시간적 범위로 하여 정치적 연맹관계를 유지해간 '옹관고분사회'의 맹주세력집단은 어디에 자리하고 있었을까? 그 후보지로는 우선 나주의 반남면과 다시면 일대, 그리고 영암군 시종면 일대를 꼽을 수 있겠다. 먼저 반남면과 다시면 일대에 자미산성 및 회진토성과 함께 초대형 옹관고분들이 세트를 이루며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이에 못지않게 시종면 일대에도 계단식의 성틀봉토성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주위에 초대형 옹관고분들이 밀집되어 있어 이 일대를 또 하나의 후보지로 들 수 있을 것이다(<지도 1> 참조). 그런데 옹관고분의 규모나 밀집도로 볼 때, 다시면세력은 반남면과 시종면세력에 비해 한 단계 격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되며, 이런 면에서 '옹관고분사회'의 핵심 영도세력은 역시 삼포강 연변의 시종면과 반남면 일대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밖의 후보지로 옥녀봉토성과 몇몇 고분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는 해남읍 및 삼산면 일대, 그리고 죽금성과 군곡리패총과 함께 고분들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는 해남 현산면 일대 등도 유의해볼 만한 곳이다. 이들 지역은 앞으로 면밀할 조사가 진행되면 그 세력집단의 위상이 드러나리라 기대되는 바이나, 현재의 조사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삼포강 연변의 세력집단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반남면과 시종면은 삼포강의 南岸을 따라 상류에서 하류에 걸쳐 서로 連接해 있어, 비록 현재는 두 지역이 市郡을 달리하고 있지만, 적어도 먼 고대의 시대엔 하나의 생활문화권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지도 1> 참조). 따라서 삼포강의 南岸, 즉 시종면과 반남면 일에 고분사회'의 중심부가 있었을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옹관고분의 조성 시기를 비교해 보면, 시기에 따른 변화가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즉 시종면 일대의 옹관고분들의 조성 시기는 3∼4세기 대의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반면에 반남면 일대의 옹관고분들은 5세기 중반 이후의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옹관고분사회'의 영도세력이 5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하여 그 입지처를 삼포강 하류의 시종면 일대에서 상류의 반남면 쪽으로 옮겨 갔을 것으로 추정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중심지 이동 가능성을 사실로 인정하여, 시종면 일대를 '옹관고분사회'의 전기 중심지로, 반남면 일대를 후기 중심지로 구분하여 파악하고자 한다.

그런데 '옹관고분사회'의 영도세력이 삼포강 하류의 시종면 일대에서 상류의 반남면 일대로 옮겨간 이유는 무엇일까? 문자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영도세력의 중심지 이동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이동을 전후한 시기의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시종면 일대와 반남면 일대 사이의 고고학적 지표의 차이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의 문제가 우선 짚어져야 하겠다.

반남면 일대의 옹관고분은 시종면 일대의 그것에 비해 규모가 초대형화되고 부장품도 薄葬의 경향에서 화려한 厚葬의 경향을 띠게 되고, 성곽의 경우도 반남의 자미산성이 시종의 성틀봉토성에 비해 규모가 월등히 커지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와 함께 반남면 일대가 시종면 일대에 비해 월등히 넓은 평야를 띠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본다면, '옹관고분사회'의 맹주세력이 보다 넓은 삼포강 상류쪽으로 옮겨감으로써 그의 영도권을 더욱 강화해 가려 했던 것을 엿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렇듯 맹주세력이 5세기 중반 경을 기점으로 하여 중심지의 이동을 통해서 영도권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까? 그러한 필요성이 있었다면 그 계기는 무엇일까? 이 문제 역시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를 통해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고고학적 지표는, 중심지가 반남으로 이동해간 5세기 중후반 경의 바로 그 시점에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에서는 백제계통의 횡혈식석실분과 왜 계통의 전방후원형고분과 같은 外來的 고분들이 새로이 조영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들 외래 고분들은 백제와 왜 세력이 5세기 중후반부터 영산강유역에 경쟁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남긴 흔적이라 여겨진다. '옹관고분사회'의 영도세력은 이러한 외세의 접근을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이에 대한 대응으로 영도권을 시급하게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던 둣하다. 이것이 영도세력으로 하여금 삼포강의 보다 상류 쪽으로 중심지를 옮겨가서 영도권을 더욱 강화하지 않으면 안되게 했던 외부적 요인이지 않을까 한다.

이제 '옹관고분사회'의 대외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어 갔는가를 추적함으로써, 이러한 추정이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4. '옹관고분사회'의 대외 관계와 나주

1) '東夷馬韓新彌諸國'의 실체

이제 몇몇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 '옹관고분사회'의 대외관계를 살펴보고, 그 관계 속에서 전개된 '옹관고분사회'의 대응양태를 추적해 보기로 하자. 먼저 다음의 {晋書} 卷36 列傳6 張華條(이하 '張華條'라 약칭함)에 나오는 '東夷馬韓新彌諸國'의 晋에 대한 '遣使朝獻' 기사의 분석을 통해서 '馬韓' 문제와 3세기 후반 '옹관고분사회'의 대중국 교류의 실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가) 이에 張華를 '持節 都督幽州諸軍事 領護烏桓校尉 安北將軍'으로 삼아 전출하였다. 新舊의 세력을 무마하여 받아들이니 오랑케와 중국이 그를 따랐다. '東夷馬韓新彌諸國'은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띠고 있었으며 幽州와의 거리가 4천여리였는데, 역대로 來附하지 않던 20여국이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쳐왔다. 이에 먼 오랑케가 감복해 와서 사방 경계가 근심이 없어지고 매해 풍년이 들어 士馬가 강성해졌다.

張華는 晋代의 유명한 詩人이자 名宰相으로서 내외의 신망을 한몸에 받았으나,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참소로 좌천되어 유주 도독으로 전출되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유주 도독으로 전출된 이후에 그는 변방 정책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호평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윗 기사에 의하면 장화가 幽州의 도독으로 전출된 이후에 수행했던 변방 정책의 최대의 성공 사례로서 이제까지 來附해 오지 않던 '東夷馬韓新彌諸國' 20여국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쳐오게 된 것을 특기하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외교적 쾌거를 성취할 수 있었던 이유로 '撫納新舊 戎夏懷之'하는 그의 포용력있는 정치력을 들고 있다. 윗 기사에서 이 20여국이 조공을 바쳐온 사건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가는, 이들이 조공을 바쳐옴으로써 '사방 경계의 근심이 없어지고 매년 풍년이 들어 士馬가 강성해졌다'라는 코멘트를 붙이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동이마한신미제국' 20여국이 '遣使朝獻'해온 사실은 다음의 {晋書} 卷3 帝紀3 武帝 太康 3年條(이하 '帝紀'라 약칭함)에서도 확인된다.

나-1) 춘정월 … 甲午日에 尙書 張華를 都督諸軍事로 삼았다.

2) 9월에 東夷 29국이 歸化하여 方物을 바쳐왔다.

태강 3년(282) 정월에 장화를 도독제군사로 삼았고, 9월에 동이 29국이 방물을 바쳐왔다는 것이다. 나-1) 기사의 도독제군사란 가) 기사에 나오는 '도독유주제군사'를 지칭하는 것이고, 나-2) 기사의 '동이 29국이 귀화하여 방물을 바쳐왔다'는 것은 가) 기사의 '동이마한신미제국' 20여국의 '遣使朝獻' 사실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晋書}의 '張華條' 기사(가 기사)와 '帝紀'의 기사(나 기사)를 비교해 보면, '동이마한신미제국' 20여국(29국)이 282년에 처음으로 진에 '견사조헌'(귀화하여 방물을 바침)했으며, 이것이 또한 당시 진의 변방정책에서 매우 중요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동이마한신미제국'의 실체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이를 당연히 '馬韓'의 일원일 것으로 파악해 왔으므로, '동이마한신미제국'과 '마한'의 관계를 먼저 검토해 둘 필요가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의 {晋書} 卷97 列傳67 東夷列傳 馬韓條(이하 '東夷列傳 馬韓條'라 약칭함)에 나오는 마한의 晋에 대한 遣使 기사는 좋은 비교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 武帝 太康 원년(280)과 2년(281)에 그들의 임금이 자주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조공하였고, 7년(286)·8년(287)·10년(289)에도 자주 왔다. 太熙 원년(290)에는 東夷校尉 何龕에게 와서 조공을 바쳤다. 咸寧 3년(277)에 다시 사신이 왔으며, 이듬해(278)에 또 內附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의하면 마한이 진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277년·278년·280년·281년·286년·287년·289년·290년의 여덟 차례가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는 '張華條'(가 가사)와 '帝紀'(나 기사)에서 '동이마한신미제국'이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나오는 282년의 사례가 보이지 않고 있어 의외이다. '동이마한신미제국'이 마한의 일원이었다고 한다면, '장화조'와 '제기'에서 확인되고 있는 '동이마한신미제국'의 282년 遣使 사실이 '동이열전 마한조'에 당연히 나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동이마한신미제국'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가장 일차적으로 착수해야 할 일은 '장화조'·'제기'의 기사와 '동이열전 마한조' 기사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을 해명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마한이 282년에 견사한 사실이 '동이열전 마한조'에서 단순 누락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마한의 견사 사실이 '동이열전 마한조'에 모두 게재되어 있어야 할 보장은 없는 것이므로, 누락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가능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이전에 그 여부를 충분히 따져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 먼저 검토해야 할 일은 {晋書}의 '帝紀'에 나오는 東夷諸國의 견사 기사와 '東夷列傳'에 나오는 東夷諸國의 견사 기사를 비교하여, '帝紀'에는 나오면서 東夷列傳에는 보이지 않는 사례가 282년 건 외에도 또 있는가를 확인해 보는 일이다. 만약 이러한 사례가 빈번한 것으로 확인된다면, 282년의 견사 사실이 '동이열전 마한조'에 보이지 않는 것 역시, 단순한 기사의 누락 현상일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고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277년에서 290년대까지의 기간 동안에 '帝紀'에 나오는 동이제국의 견사 기사와 '東夷列傳'에 나오는 동이제국의 견사 기사를 대비해 보면 다음 <표 1>과 같다.

<표 1> {晋書} '帝紀'와 東夷列傳에 나오는 東夷諸國의 遣使 기사 비교
연도
'帝紀'에 나오는 東夷諸國의 遣使記事 
'東夷列傳'의 遣使記事
277년 

278년 

280년 

281년 

282년 

286년 

287년 

289년 

290년

東夷三國 前後 十餘輩 各帥種人部落 內附 

東夷六國來獻(3월), 東夷九國內附(是歲) 

東夷十國歸化(6월), 東夷二十國朝獻(7월) 

東夷五國朝獻(3월), 東夷五國內附(6월) 

東夷二十九國歸化 獻其方物(9월, 나-2 기사) 

東夷十一國內附(8월), 馬韓等十一國遣使來獻(是歲) 

東夷二國內附(6월) 

東夷十一國內附(5월), 

東夷絶遠三十餘國 西南夷二十餘國來獻(是歲) 

東夷七國朝貢(2월) 

馬韓의 遣使 

馬韓의 遣使 

辰韓의 遣使 

馬韓과 辰韓의 遣使 

(견사 기사 없음) 

馬韓과 辰韓의 遣使 

馬韓의 遣使 

馬韓의 遣使 

馬韓의 遣使

 
 

위의 표를 보면, {晋書}의 '帝紀'와 '東夷列傳'에 각기 나오는 동이제국의 견사 기사는 282년의 경우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치하고 있다. 유독 282년의 견사 기사만이 '帝紀'에만 나오고 '東夷列傳'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앞에서 살폈듯이 282년의 견사 기사는 '제기'에서 뿐만 아니라 '장화조'에서도 '동이마한신미제국' 20여국이 견사한 사실로 확인되고 있으며, 특히 '장화조'에서는 이들의 견사 사실을 장화가 추진한 변방정책의 대표적 성공 사례로 들어 대서특필하면서 크게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다른 것도 아닌 282년의 견사 사실이 '동이열전 마한조'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코 가벼운 일로 치부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장화조'에서는 '동이마한신미제국'이 282년에 '처음' 견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동이열전 마한조'의 마한은 다) 기사에 나타나 있듯이 277년에서 290년에 걸쳐 8차례 견사한 것으로 되어 있어, 두 기사에 나타난 견사 시기는 완전히 어긋난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런 면들을 고려하면, '동이열전 마한조'에 282년의 견사 기사가 보이지 않는 것은 기사의 단순 누락 때문이라기 보다는 또 다른 심각한 이유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여기에서 기사의 누락이라는 이유 대신에 또 다른 이유를 들어야 한다면, '장화조'에 나오는 '동이마한신미제국'의 마한과 '동이열전 마한조'에 나오는 마한이 각기 다른 것을 지칭할 수도 있겠다는 점을 우선 떠올릴 수 있다. 실제 '동이열전 마한조'의 마한을 진짜 마한으로 보지 않고 백제로 보려는 견해가 유력시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이는 그럴 듯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동이열전 마한조'의 마한을 백제로 보는 이 견해를 사실로 인정한다면, 282년의 마한 견사 사실이 '동이열전 마한조'에 나오지 않는다 하여 이를 이상하게 여길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다른 논고에서 '동이열전 마한조'의 마한을 백제로 볼 수 없으며, 기록에 나와 있는 그대로 마한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점을 논증한 바 있으므로, 이 견해를 취하지 않는다. 이런 입장에서 필자는 '마한'의 용례 검토를 통해서 이 문제에 접근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먼저 '동이열전 마한조'에 나오는 馬韓의 용례를 보자.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마한은 目支國을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의 세력집단들이 결성한 연맹체(마한연맹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한연맹체가 3세기 후반까지 존속하고 있었다는 것은, {三國史記}의 온조왕조에 나오는 마한 관련 기사에 대한 편년 재조정 작업을 통해서 논증될 수 있다. 또한 {晋書}의 동이열전에 의하면 동이제국 중에서 마한이 晋에 대한 遣使를 가장 활발히 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고, 특히 277년에서 290년 사이에 견사 기사가 집중되고 있는데, 이는 당시 한강 하류역에서 흥기한 伯濟國의 도전을 받아 위기 상황에 몰리고 있던 마한연맹체가 晋과의 적극적 외교관계를 통해 이를 타개하려 했던 외교적 대응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동이열전 마한조'에 290년 이후의 견사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마한연맹체가 백제국에게 완전 궤멸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동이열전 마한조'의 '마한'은 목지국을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의 세력집단을 정치적으로 연대한 연맹체의 조직망을 갖추고 3세기 말까지 존속하였던 실체적인 정치세력을 지칭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화조'에 나오는 '東夷馬韓新彌諸國'의 馬韓은 무엇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것인가?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동이'와 '마한'과 '신미제국'을 각각 떼어서 따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동이'란 중국인이 중국 동방의 제종족을 지칭했던, 막연한 종족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실제 {진서} 동이열전을 보면 夫餘國·馬韓·辰韓·肅愼氏·倭人·裨離等十國 등의 제국을 열거하고 있어, {진서}에서도 동이란 용례를 여러 국가 및 種族群을 포괄하는 막연한 종족 개념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이란 어떤 특정의 실체적 정치세력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는 아닌 것이다.

다음에 '마한'의 용례에 대한 검토는 잠시 뒤로 미루어 두기로 하고, '신미제국'의 실체를 먼저 추적해 보기로 하자. 가) 기사('장화조')에 의하면, 新彌諸國은 '依山帶海'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고 幽州에서 4천여리 떨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볼 때 그 실체는 서남해안을 끼고 노령·소백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남지방, 그 중에서도 특히 옹관고분을 공통분모로 하여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지역 일대에서 하나의 政治 勢力圈을 이루고 있던 '옹관고분사회'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지리적 조건에서 부합되고 '옹관고분사회'의 존재가 뚜렷이 확인되는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지역을 '장화조'에 나오는 '신미제국'의 터전으로 보아 무리가 없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동이마한신미제국'의 마한이란 무엇일까? 위에서 살핀 대로 '신미제국'을 영산강유역 및 서남해안지방의 '옹관고분사회'와 대응되는 것으로 볼 경우, '신미제국'을 수식하는 위치에 있는 '마한'이란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지역을 포괄하는 용례로 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마한 용례는, 한백겸이 고증한 이래 경기에서 전남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파악되어온 마한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용례는, 앞에서 충청도 일대에 존재했던 실체적 정치세력집단('마한연맹체')으로 파악한 바 있는 '동이열전 마한조'의 마한 용례와는 지칭하는 대상이 다르다.

그렇다면 마한이란 용례는 크게 두가지 종류로 쓰였다고 할 수 있겠다. 즉 충청권의 실체적 정치세력집단('마한연맹체')을 지칭하는 용례와 경기에서 전남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쓰인 용례가 그것이다. 후자의 마한 용례는 그 넓은 지역 범위안의 정치세력들이 연대하여 단일의 政治 勢力圈을 이루고 있었던 것을 지칭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막연한 '지역적 개념'으로 쓰였을 뿐인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晋書}에 나타난 마한 용례에 대해서 이상에서 살핀 바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동이열전 마한조'의 마한은 목지국을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의 세력집단을 정치적으로 연대한 일종의 연맹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쓰였음에 반해, '장화조'에 나오는 '동이마한신미제국'의 마한은 경기도에서 전남에 이르는 광역을 지칭하는 막연한 '지역적 개념'으로 쓰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자의 마한은 '광의의 마한', 후자의 마한은 '협의의 마한'으로로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동이마한신미제국'의 표현에서 '동이'란 중국 동방의 종족 국가들을 지칭하는 막연한 종족적 개념이고, '마한'이란 경기에서 전남에 이르는 지역을 지칭하는 막연한 지역적 개념이라고 한다면, '동이마한신미제국'의 실체는 '옹관고분사회'에 대응되는 '신미제국'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新彌諸國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하나의 國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표현 그대로 '新彌의 여러 나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가) 기사에서 282년에 처음으로 20여국(29국)이 함께 집단적으로 晋에 '견사조헌'했다는 것을 볼 때, 新彌諸國은 20여국(29국) 정도로 하나의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었던 실체적 정치세력집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연맹체를 상정할 수 있다면 이를 무어라 부르는 것이 가장 타당할까? 필자는 이를 일단 '옹관고분사회' 연맹체라 부르려 한다.

'옹관고분사회' 연맹체을 구성하는 정치집단들은 수량이 풍부한 영산강의 水路와 서남해안의 海路를 통해서 서로 간에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더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유대관계('연맹체관계')를 강화해 갔을 것으로 보인다. 그 정치적 유대관계의 실상을 전해 주는 고고학적 지표로는 말할 것도 없이 각 집단의 지배층들의 공통적 묘제로 사용한 옹관고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옹관고분들이 주로 영산강변과 서남해의 바다가에 조성되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수로와 해로가 '옹관고분사회' 연맹체 결성의 통로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 '옹관고분사회'의 대외관계와 해체

영산강의 수로와 서남해의 해로는 '옹관고분사회' 연맹체 내부의 상호 교류와 정치적 연대를 촉진시키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옹관고분사회' 연맹체가 대외 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해 가는 통로로서 기능하기도 했다. 그 단적인 사례로는 가)·나) 기사에 나타나 있듯이 282년에 '동이마한신미제국' 20여국이 집단적으로 멀리 晋 왕조에까지 遣使朝獻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한반도 서남해의 해로를 통한 '옹관고분사회'의 대외 교류는 이미 3세기 이전부터 적극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서남해안의 해로가 중국 대륙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교류의 주요 통로로 활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다음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라) 군으로부터 왜에 이르는 경로는 다음과 같다. 군에서 해안을 따라 가다가 한국을 거쳐 다시 남쪽과 동쪽으로 잠시 가다 보면 그 북쪽 해안에 있는 구야한국에 도달하게 되는데 여기까지 거리가 7천여리이다. 여기에서 처음 바다를 건너 1천여리 가면 대마도에 이르게 된다.

이 기사에 의하면 당시 낙랑·대방군으로부터 왜에 이르는 해상 루트는 '군→서해안 해로(南行)→韓國→서해안 해로(南行)→남해안 해로(東行)→狗耶韓國→남해 바다(南行)→대마도→왜'로 통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韓國이란 목지국을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의 세력집단이 결성한 마한연맹체(이른바 '협의의 마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그 구체적 지점은 마한연맹체의 外港에 해당하는 아산만 일대로 비정할 수 있겠다. 그리고 狗耶韓國은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오늘날의 김해지역으로 보는데 이론이 없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라) 자료에 적시된 서해안의 韓國과 남동해안의 狗耶韓國 이외에도, 연안 해로가 남에서 동으로 꺾여지는 위치에 있는 서남해안지역이 당시의 국제 교류 상에서 가지는 위치를 재인식해야겠다는 점이다. 실제로 고고학계의 조사에 의해서 서해안에서 남해안으로 해로가 꺾여지는 해남군 백포만 일대에서 1∼3세기대의 국제 교류 흔적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송지면 군곡리 패총에서 그 대표적 흔적이 찾아진바 있다.

이처럼 서남해안지역은 일찍부터 낙랑군에서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치고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로 통하는 海路 교통 상의 요충지로 활용되어 왔으며, 이러한 경험이 가) 기사에 나타나 있듯이 3세기 후반 경에 '옹관고분사회'와 진 왕조 사이의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해로를 통해 국제 교역을 주도하려는 세력에게는 서남해안지역은 주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낙랑·대방군이 한반도에서 완전 축출되는 4세기 이후에 이러한 해로를 통해 '중국 남조-백제-가야-왜'로 통하는 국제 교역권을 실질적으로 주도해간 나라는 백제였다. 백제는 이러한 국제 교역권을 주도해 가기 위해서 해로 교통상의 요지인 서남해안지역에 거점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 4세기 후반에 가서야 조그만 결실을 맺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사정은 다음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마) 神功 49년 3월에 荒田別과 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久?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卓淳國에 이르러 장차 신라를 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사가 적어 신라를 깨뜨릴 수 없다는 의견이 있어, 沙白과 蓋盧를 보내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니, 즉시 木羅近資와 沙沙奴?에게 명하여 정예군을 거느리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모두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 깨뜨렸으니, 이로 인해 비자발·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 등의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하여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古奚津을 돌아 南蠻인 ?彌多禮를 屠戮하고 이를 백제에게 주었다.

왜군이 369년에 신라를 격파하고 가야의 7개국을 평정한 여세를 몰아 서쪽으로 古奚津[강진 지역으로 비정됨]을 거쳐 ?彌多禮[해남 지역으로 비정됨]를 약탈하고 이를 백제에게 넘겨 주었다는 내용이다. 마치 왜군이 주체가 된 침략 행위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으나, 이는 {日本書紀}에서 의도적으로 왜곡한 바이고, 실제로는 백제가 주도한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찍이 이 기사를 전거로 하여 4세기 후반에 백제가 전남지방 전역을 점령·지배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이 견해는 그간 별다른 이의 없이 통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계의 성과가 축적되면서, 4세기 후반 이후에 영산강유역 전역에서 독자적 세력집단이 오히려 강한 성장의 추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 견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4세기 후반 이후에도 영산강유역에서 독자적 세력집단의 성장이 지속되고 있었다고 한다면, 윗 기사는 기왕의 견해와는 다른 의미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필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려 한다. 4세기 후반에 백제가 왜와 함께 가야 지역에 대해 군사적 위협을 가하여 '백제-가야-왜'로 연결되는 국제 交易網을 결성하고, 그 여세를 몰아 남해안을 따라 西進하여 강진을 거쳐 해남 지역을 공격·점령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연안 해로를 통한 국제 교역에서 그간 주요 중간 기착지로 성황을 누리던 해남 반도의 어느 한 지점을, 4세기 후반에 백제가 교역의 거점으로 확보하게 된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이후 백제는 해남지역을 해로 상의 거점으로 활용하면서 국제 교역에 대한 주도권을 선점하는 한편, 점차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사회'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병행해 갔을 것이 예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5세기에 들어 고구려의 강력한 남하정책의 벽에 부딪히게 되어 백제의 이러한 시도는 제동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 광개토왕은 4세기 말부터 백제와 왜에 대한 대대적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이어 장수왕은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남하정책을 본격 추진해 가더니, 475년에는 급기야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 직면한 백제가 '옹관고분사회'로 영향력을 확대해 간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분간 백제는 신라와 가야와 왜 등과 동맹을 결성하여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5세기 후반 경에 이르러 국제정세의 안정을 일단 되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백제는 다시금 국제 교역의 주도권을 회복하려 했고, 이를 위해서라도 교역로의 요충지인 서남해안지역, 더나아가 영산강유역에 대한 진출을 꾀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는, 아직 내부적으로 政情의 불안정성을 완전히 불식시키지 못한 상태였으며, 외부적으로는 그 사이에 급성장한 倭가 국제 교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백제의 경쟁 상대로 나서게 되자, 더 이상 국제 교역을 그의 의도대로 주도해 갈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된 국제 관계 속에서 영산강유역 및 서남해안지역의 '옹관고분사회'는 백제와 왜의 영향력 침투의 각축장으로 되어 갔을 것이다. 백제와 왜 세력이 '옹관고분사회'에 경쟁적으로 영향력 침투를 시도해 왔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흔적으로는, 백제계의 횡혈식석실분과 왜계의 전방후원형고분이 5세기 중후반부터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지역에 새로이 나타나게 된 현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외세의 영향력 침투 시도에 대한 '옹관고분사회'의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반남면 일대를 중심으로 군림하고 있던 '옹관고분사회'의 영도세력은 그의 영도권을 강화하여 백제와 왜 세력을 단호히 배격하려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앞에서 살폈듯이 5세기 중반 이후에 옹관고분의 중심지가 시종면 일대에서 반남면 일대로 옮겨가면서, 성곽(자미산성)과 옹관고분의 규모가 더욱 커졌을 뿐만 아니라 옹관고분의 껴묻거리도 화려한 위세품 위주로 부장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는 '옹관고분사회'의 영도세력이 그 중심지를 반남면 일대로 옮겨 '옹관고분사회'에 대한 영도력을 더욱 강화하려했던 흔적으로 이해된다. 이 시기에 시종과 반남 지역에는 외래의 고분이 배제되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영도세력이 외세 배척의 강렬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연히 백제와 왜 세력의 영향력 침투는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를 피해 주변부로부터 조심스럽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외래 고분이 주로 해남·함평·영광·광주 등지의 주변부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은 그 반영으로 볼 것이다. 그리하여 주변부의 제세력집단 중에는 혹은 친백제, 혹은 친왜의 성향을 띤 부류들이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며, 이들은 이러한 성향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백제계의 횡혈석실분이나 왜계의 전방후원형고분 등의 외래 고분을 수용하여 조영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다시면세력은, 앞서 살펴본 복암리 3호분의 실태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이, 친백제적 성향을 띤 부류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중심부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고 또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다시면세력이 중심 영도세력인 반남면세력과 대비되는 처신을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옹관고분사회'에 대한 영도권을 둘러싸고 독주하려는 반남면세력에 제동을 걸면서 자기 지분을 보다 많이 확보하기 위한 경쟁적 의도에서 그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옹관고분사회'의 제세력의 동향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어렵긴 하지만, 이상에서 추정한 바에 미루어 볼 때, '옹관고분사회'는 5세기 후반경부터 서서히 해체의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5세기 말에 백제의 동성왕은 '옹관고분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고 왜 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군사적 시위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정은 다음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바) 東城王은 耽羅가 공납을 바치지 않는다 하여 친히 정벌하여 武珍州에 이르렀다.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비는지라 이에 그만두었다.

498년에 탐라가 공납을 바치지 않는다 하여 동성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武珍州[현 광주]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백제와 탐라(제주도)의 관계를 염두에 둘 때 이 때의 탐라 정벌은 다분히 명목적인 표방에 불과한 것으로 보여지고, 그 주목적은 역시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사회'에 대한 무력 시위에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백제는 점차 '옹관고분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갔던 것이고, 이를 기반으로 6세기에 들어 신라와 왜의 비협조를 무릅쓰면서 다시 '백제-가야-왜'로 연결되는 국제적 교역망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를 이어서 백제는 성왕 대에 사비로 천도하고(538년) 담로제를 실시하여 전북 지역까지 지방제로 완전 편제하더니, 그 여세를 몰아 영산강유역으로 진출하여 급기야 반남 지역의 맹주 세력집단을 굴복시키고 이 지역을 5방(方)의 지방제 하에 편제하여 지배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6세기 중반 이후에 토착의 옹관고분과 왜계의 전방후원형고분이 완전 소멸하고, 오직 전형적인 백제식의 후기 횡혈식석실분만이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와 주변부의 전역에서 남게된 고고학적 추세와도 일치되는 것이다.

4. 맺음말 -요약과 전망-

이상에서 영산강유역 및 서남해안지역 고대사회의 특징을 대변하는 양대 지표로서 옹관고분과 계단식 토성을 주목하고, 이를 중심으로 나주지역의 고대사회를 재구성해 보고, 그 대외관계를 살펴보았다.

먼저 옹관고분과 계단식 토성을 중심으로 하여 살펴볼 때, 나주지역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지역은 역시 반남면과 다시면 일대가 주목되었다. 또한 영산창성지나 학산리 토성 등을 검토한 결과, 이들 토성들이 영산강 본류나 지류에 연접해 있다는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어, 영산강의 수로를 통해서 나주지역의 제세력집단이 서로 빈번한 교류를 가졌을 것이고, 이를 통해서 정치적 연맹의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도 있으리라 여겨졌다.

그런데 옹관고분과 계단식 토성은 나주지역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고,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지역의 전역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하여, 교류와 정치적 연맹의 관계는 나주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지역에 적용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지역 일대에 옹관고분을 대표적 지표로 하는 단일한 고대 정치세력집단의 圈域이 성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를 '옹관고분사회'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옹관고분사회'의 공간적 범위는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지역을 포괄하고, 그 시간적 범위는 3세기∼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었다. 이러한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지로는 단연 삼포강 연변의 영암 시종면과 나주 반남면을 꼽을 수 있겠는데, 그 중심 영도세력은 3∼4세기의 전기에는 하류의 시종면일대에 있다가 5세기 중반 이후의 후기에는 상류의 반남면 일대로 옮겨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중심지 이동은 내부적으로는 '옹관고분사회'에 대한 영도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외에도 외세의 영향력 침투라는 외부적 요인도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런 면에 주목하여 '옹관고분사회'의 대외관계를 살펴하였다.

'옹관고분사회'는 3세기 후반에 중국 晋 왕조와 교류한 적이 있음을 살펴보았는데, 이는 그 이전 단계부터 국제 교역망의 요충지로 활용되어온 서남해안지역의 경험이 주요 배경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았다. 이처럼 국제 교역로 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관계로 백제는 '중국 남조-백제-가야-왜'로 연결되는 국제 교역권을 주도하기 위해서 서남해안지역을 중시하게 되었고, 급기야 4세기 후반에 이르러 해남 백포만 일대에 교역의 거점을 확보하게 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5세기에 들어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백제가 국가적 위기를 맞게 되자, 이 틈을 타고 왜 세력이 크게 성장하여 국제 관계에서 새로운 변수로 등장하였으며, 5세기 후반부터는 백제와 왜 세력이 국제 교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여 나간 것으로 보았다. 이 두 세력은 자연히 국제 교역망의 요충지인 서남해안 및 영상강유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경쟁적으로 꾀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5세기 중후반 경부터 이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백제계의 횡혈식석실분과 왜계의 전방후원형고분을 그 지표로 세시하였다.

이러한 외세의 영향력 침투에 대한 '옹관고분사회' 제세력집단의 대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를 고고학적 지표의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본 결과, 삼포강 연변의 '옹관고분사회'의 중심 맹주세력은 그 중심지를 상류로 옮겨가면서 영도권을 강화하는 한편, 외세의 침투를 단호히 배격하려 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반면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 세력집단 중에는 혹은 친백제, 혹은 친왜를 표방하는 부류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리고 예외적으로 중심부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다시면세력도 친백제의 성향을 강하게 띤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옹관고분사회'에 대한 반남면세력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처럼 제세력집단이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야말로 그만큼 '옹관고분사회'가 결집력을 잃고 서서히 해체되어가는 징후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았다. 5세기 말부터 백제는 왜 세력을 물리치고 해체 국면에 접어든 '옹관고분사회'를 영역화시키는 작업을 본격 추진하였으며, 6세기 중엽 경에 이르러서는 5방제의 정비를 통해서 백제의 영역으로 편제하는 작업을 일단락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후 나주지역은 그의 독자성을 상실하고, 일개 지방세력으로서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먼저 백제는 '옹관고분사회'의 중심지였던 반남면 일대를 半奈夫里縣이라는 일개 현으로 편제하여 그 위상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는 백제가 유력한 반남 토착세력을 억누르면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효과적으로 관철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후 통일신라가 백제로부터 이 지역을 접수하면서 나주지역은 다시 중시되었다. 먼저 반나부리현을 반남군으로 승격시켜, 반남지역 토착세력의 현실적 위상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 주었다. 이와 함께 나주지역을 發羅州로 승격시켜 전남지방에 대한 治所로 삼았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곧이어 발라주를 發羅郡으로 강등시키고, 光州 지역의 武珍郡을 武珍州로 승격시켜 치소를 이곳으로 옮겨감으로써, 나주 보다는 광주를 중시하는 정책을 폈다.

다음에 고려시대에는 나주가 羅州牧으로 편제되어 다시 전남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이러한 구도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1896년에 단행된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전라도가 전북과 전남으로 分道되고 광주가 전남의 도청 소재지로 정해짐으로써, 나주는 그 행정적 중심지의 지위를 광주에 넘겨주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볼 때 나주의 행정적 정치적 위상은 시대의 필요에 따라서 굴절을 겪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나주의 역사적 위상은 전남지방에서 항상 그 자리를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면모야말로 앞으로 나주의 미래를 설계하는데 있어 항상 염두에 두어져야 할 중요한 유산인 것이다.

<지도 1> 나주지역 옹관고분 및 고대 성곽의 분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