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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역사
제2장 고 대

제1절 원삼국(마한)시대의 청주 지역

1. 금속기의 사용과 마한 소국의 성립

한반도의 북부 지방에 고조선이 왕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연(燕)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을 즈음, 한반도의 중부 이남 지역은 진국(辰國)의 여러 세력이 있었다. 이들 초기의 진(辰)은 청동기를 기본으로 한 문화를 성숙시키면서 차츰 철기를 받아들이고, 이러한 금속 문화의 바탕 위에 독특한 청동기의 제작 기술을 발전시켜 최고 수준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서력 기원전 194년에 중국의 연(燕)에서 위만(衛滿)이 고조선(古朝鮮)의 준왕(準王)에게 망명하였다가 급기야 왕위를 빼앗아 스스로 왕이 되는 정치적 변동이 생기었다. 이러한 변동기에 준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철기 문화가 보다 확산되었다. 서력 기원전 108년에는 진국이 한(漢)과 교통하고자 함을 방해하던 위만조선이 한(漢)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서기전 2세기에는 북쪽으로부터의 금속 문화의 유입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 삼국지(三國志)에 인용된 위략(魏略)의 기사가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위만조선 때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란 인물이 왕을 간(諫)하다가 용납되지 않자 동쪽의 진국으로 갔는데, 이때 백성 2000여 호가 따라갔다고 하였다.

이러한 변동기는 세형동검(細形銅劍)과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을 표지로 하는 청동기 문화에 서기전 2세기에 급격히 철기가 유입되는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청동기를 기본으로 하는 문화 시기에는 아직 거대한 세속적 권위를 뜻하는 정치적 통합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철제의 농기구와 공구를 사용하게 되면서는 생산력의 뚜렷한 증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 상황의 변화는 사회 상황을 변화시키기에도 충분하였다. 농업과 양잠을 기반으로 한 진국(辰國) 사회는 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많은 생산을 이룩하여 축적된 경제력을 가진 유력한 세력들이 나타나, 스스로의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고,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에 수십 개의 국읍(國邑)을 성립시켰다.

국읍들은 여러개의 읍락(邑落) 가운데서 지역을 대표하는 것으로,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아닌 상태에서의 인구와 노동력, 경제적 여건, 종교적인 권위, 정치적 수완과 기술 수준의 차이가 생기면서 우열(優劣)의 격차가 생기고 이중 가장 우세한 읍락이 대표성을 가지면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였다고 믿어지고 있다. 읍락마다의 거수(渠帥)들 가운데 가장 중심되는 읍락의 거수는 주수(主帥)가 되었을 것이지만, 국읍의 우두머리인 이들은 차츰 성장하여 지역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점차 격을 달리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소규모의 취락과 대규모의 취락, 몇 개의 취락이 하나의 단위를 이루어 중심과 이웃의 읍락을 구성하고, 이러한 읍락 가운데서도 가장 유력한 읍락이 국읍을 이루었다는 누층적인 사회 구성을 전제로 하면 이미 이들 국읍단계는 지연 공동체로서 상당한 자치력을 가진 정치체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동기문화의 기반에 서 있었던 제의(祭儀)의 종교적 권위가 아직도 존재하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니, 국읍에는 별읍(別邑)이 있어서 따로 천군(天君)이 있었다는 기록은 이러한 상황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알려 준다. 한편으로 이러한 현상은 마한 지역에서 청동기 문화의 전통이 지속되면서, 철기문화의 영향으로 종교적 제의가 가지던 권위에 대신하여 세속적 권력이 성장하면서 새로운 사회 구성의 양상이 전개되어 갔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청주지역에 있어서의 청동기 문화의 중요한 유적은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에서 출토된 청동기 일괄 유물이 있다. 이를 통하여 청주지역에서도 청동기를 소유한 세력 집단이 있었고, 이러한 문화의 뒤에 철기 문화로 전환되어 계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던 물질적 증거가 충분하지는 않으나 존재하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이러한 국읍들은 서기 3세기까지도 존재하였다. 국읍의 이름과 그때의 생활상에 대하여는 중국 진(晉)나라 사람 진수(陳壽)가 지은 역사책 삼국지(三國志)의 위서(魏書) 한(韓)에서 비교적 자세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은 후한서(後漢書)가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시기를 전통적으로는 삼한(三韓)이라 하였으나, 이때 이미 삼국의 토대가 되는 국읍들이 성립되어 주변을 아우르고 있었던 상황을 역사 발전의 측면에서 다시 해석하여 원삼국(原三國) 시기라고도 부르고 있다. 청주 지역은 진국의 발전에 따라 형성된 삼한 가운데 한반도의 중서부 지역의 연맹체를 형성했던 마한(馬韓)의 문화권에 가까우므로 여기서는 마한 시기로 설정하였다.

마한에는 54개의 국읍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 국읍은 작은 정치체의 점진적 통합을 거쳐서 일정한 정치적 성장 단계에 있었던 것들로서, 목지국(目支國)이 그 구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 마한의 여러 국읍들은 고조선의 옛땅에 있었던 한(漢)이 설치한 낙랑군(樂浪郡), 진번군(眞番郡) 등의 세력과 교섭하였다. 그러나, B. C. 82년에 진번군이 폐지되고, 낙랑군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남쪽의 한(韓)은 이 낙랑군과 대립 교섭하게 되었다. 삼국지 동이전은 위략(魏略)을 인용하여 B.C. 20년경에 있었던 염사치(廉斯齒)의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이에 의하면 당시 삼한의 정치적 지배자들은 낙랑의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힘쓰고, 한편으로는 경제적 약탈을 하는 낙랑인을 포로로 하여 사역시키고 있었다. 삼한의 정치적 지배자들은 낙랑으로부터 관책(冠?)을 받거나 인수(印綬)를 받음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권위를 세우면서 보다 발전된 중국계의 문화에 접하고 있었다.

2. 청주 지역 정치 사회 세력의 성장

마한의 여러 정치 사회 세력들은 토착의 청동기 문화의 바탕 위에 새로이 철기 문화의 영향을 받기도 하면서 지리적으로 유리한 지역을 중심으로 토착적인 정치 단위로 성장하였다. 이때의 지리적인 유리함은 낙랑군과 교역을 하기 좋은 곳과 같은 상업 교역적 위치도 중요하였으나, 당시 산업의 기본인 농업에 유리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한 집단이 더욱 유리하였다. 이미 벼농사는 청동기시대 이후 점차 중요시되어 벼농사에 적합한 충적평야가 개척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농경 도구가 따비와 반달 모양의 돌칼, 그리고 마제석기로 만든 홈자귀 등으로 대표되었다면, 이제는 철제의 따비와 보습, 괭이나 낫 등으로 농기구가 바뀌면서 생산력의 증대와 노동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오고 있었다. 적당한 강우는 농업에서 가장 중요하였다.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는 역시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제방을 만들어 농업용수를 제때에 공급할 수 있는 일과 같이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성장이 있게 되자, 농업과 양잠 등 생산의 증대를 꾀하는 국읍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에서 종래의 주술(呪術)에 의한 권위보다는 이제 세속적인 권한을 가진 정치 지배자가 보다 우월한 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는 고고학상으로는 초기 철기시대에서 원삼국 시기로 이행되는 단계에 해당하는 유물과 유적을 통하여 설명된다. 철기의 시작은 무덤으로서의 토광목관묘에서 토광목곽묘로 발전되고, 토기에 있어서는 화분형 토기와 회색타날문토기(灰色打捺文土器)의 조합이 눈에 띠게 나타난다. 이러한 문화의 수용은 충청도 지역에 있어서는 청동기 문화의 전통이 강하였던 관계로 다소 늦게 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마한시대의 중요한 유적은 청주시 송절동(松節洞)의 대규모 토광묘군(土壙墓群)이 대표적으로 조사된 것이다. 이 유적은 인근 지역의 유적인 천안시 청당동, 진천군 덕산면 산수리 유적과 함께 청주 지역에서의 마한시대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이 유적은 마한 시대의 분묘 유적으로서 청주시의 송절동, 화계동, 내곡동, 상신동, 원평동, 문암동으로 이어지는 낮은 구릉성 산지에 위치하고 있다. 일부는 1980년대의 청주 공업단지 조성으로 조사되지 못하고 파괴되었다. 해발 100m 이하의 낮은 구릉들의 전체가 유적이며 이 가운데 조사된 지역이 송절동의 무터골∼건너 신정 마을 부근 일대의 일부이다. 1992년의 1차 조사와 1993년의 2·3차 조사를 통하여 모두 16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이중 3기의 무덤은 합장한 것이므로 실제는 18기이다. 이들 무덤은 목관묘와 목곽묘로 크게 구분되며, 묘의 외부 구성으로는 무덤의 위쪽에 홈을 파 돌린 주구(周溝)가 있는 것과 주구가 없는 것으로 구분되는데 주구묘가 3기이다.

토광 목관묘는 목관을 묘광 전체로 한 것과 목관의 한쪽을 칸막이하거나, 목관의 한쪽에 별도의 유물을 넣기 위한 작은 곽(槨)을 만든 것 등 세가지의 구분이 가능하다. 목곽묘는 목관의 주위에 다시 곽을 만든 것으로 목관과 목곽 사이의 공간에 유물이 부장 되었다. 이들 무덤에서는 많은 토기류가 출토되고, 이밖에 철기와 구슬, 그리고 칠기(漆器)가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둥근 바닥의 목짧은 항아리(圓底短頸壺)가 가장 많고, 깊은 바리(深鉢形土器), 옹(甕)이 나왔으며, 철기로는 무기류인 쇠화살촉과 철모(鐵?), 농공용(農工用)의 쇠끌(鐵鑿), 쇠칼(小形鐵刀子), 쇠낫(鐵鎌)이 나왔다. 흙구슬 및 유리구슬과 주칠을 한 그릇의 흔적이 있어서 당시의 문화상을 잘 엿볼 수 있다.

주구가 있는 토광묘는 최근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송절동의 경우에는 경사진 지형에서 경사 방향을 따라 만든 것으로 배수와 묘역의 구획을 위한 시설이다. 송절동의 무덤에서 합장 무덤은 그 기원이 우리 나라 서북부 지역의 것이라서 주목되며, 특히 93B-4호 대형 무덤은 귀틀 무덤의 형태에 해당된다. 송절동 무덤의 절대연대는 방사선 탄소 연대가 서기 50∼250년, 200∼420년으로 나타났다. 이 연대의 교차되는 연대가 서기 200∼250년에 해당되므로 대략 그 중심 연대는 서기 3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가 된다. 이 시기 청주 지역은 한반도 서북부에 있었던 낙랑문화의 영향을 일부 받으면서 토착의 세력 집단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는 무덤의 규모가 93B-4호의 경우 바닥의 길이가 6m 84cm나 되고 너비가 3m 53cm나 되는 거대한 것임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무덤의 규모가 거대하게 된 것은 세력의 크기가 차등이 생기고, 그에 따라 더욱 큰 세력이 우두머리가 되어 국읍의 큰 우두머리가 신지(臣智)나 읍차(邑次) 등의 칭호로 불렸다는 기록을 신빙케 한다.

이 시기 청주 지역의 곳곳과 주변 지역에 정치 세력이 형성되어 갔음을 알려주는 유적은 청원 상평리(上坪里)와 진천 송두리(松斗里) 유적 등이 있다. 이들도 모두 마한과 관련된 유적이며 이 시기 미호천 유역의 농업 경제를 기반으로 국읍이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마한의 영역은 대체로 한강 이남 경기·충청·전라 지역에 해당되었다. 마한의 중심지는 충청 지역이 청동기 시대의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시기 이래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3세기 중엽 경에도 주구를 갖추고 청동 대구(帶鉤)를 부장한 토광묘가 천안과 청주 지역에 있다는 점은 이 시기까지도 마한의 중심부를 이룬 세력이 이 지역이었음을 시사한다. 서울의 한강 유역에서 남으로 금강 유역과 전라 지역의 영산강 유역으로 마한은 그 중심이 충청 지역에 있었다가 후에 이동되었다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해하고 있다. 한강 유역은 이제 새로이 고구려계의 유이민(流移民)이 백제를 건국함으로써, 이 시기부터 마한은 그 중심을 충청 지역에 두고 있다가, 차츰 백제의 성장에 따라 종국에는 영산강 유역으로 옮겨갔다고 할 수 있다. 백제가 건국되어 성장하면서 3세기 중엽 경에 이르러 충청 지역의 마한의 세력을 공략하면서 이제 청주의 토착 세력은 백제의 세력권에 들게 되었다.


청주시 / '97 / 체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