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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역사
제2장 고대
제2절 백제의 청주 지역 진출과 그 경영

1. 백제의 성장과 청주 지역 진출

초기의 백제(百濟)는 마한의 54개 국읍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초기 백제의 건국에 앞선 이 지역의 문화 기반은 한강 이남 지역에 적석무덤(積石塚)이 나타나기 이전의 무덤 양식인 토광묘로 대표되는 세력이었다. 이 세력의 성격은 분명하지 않으나, 마한의 다른 지역과 청주 지역의 마한시대 기본적인 무덤 양식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므로 마한의 54개나 되는 국읍들은 이미 낙랑 방면의 철기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급속한 사회적 변화에 직면하여 있었다고 이해된다. 이 중 백제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미 마한의 세력과 낙랑의 세력이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는 고구려계의 유이민이 자리잡아 새로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는 오늘날의 황해도 지역과 충청도 지역에 각각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낙랑과 마한의 완충 지대가 이 두 가지 문화를 복합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을 말한다. 서기 3세기에 이르러 낙랑의 남쪽, 거의 공터로 되어 있던 황해도 남부 지역에 새로이 대방군(帶方郡)이 설치되자 백제는 낙랑과 마한의 사이에서 대립하다가 일시 대방과 친선을 맺고 보다 세력의 확장이 쉬운 동남쪽으로 영향력을 확대시키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초기 백제의 세력은 마한의 왕에게서 마한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얻어서 건국하였다고 하였고, 온조왕(溫祚王) 10년에 사냥하여 얻은 신록(神鹿)을 마한에 바치고, 13년에는 천도(遷都)를 마한에 알리었다. 또 24년에는 웅천책(熊川柵)을 만들었으나 마한 왕의 요청으로 허물기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초기 백제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백제가 마한 54개의 국읍으로서 출발하여 한동안 마한왕의 통제 아래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후 백제는 마한왕의 통제 아래 있던 같은 국읍들 가운데서 다른 국읍이 먼저 마한을 점령하기 전에 기회를 엿보아 마한을 격파하고 세력을 키워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왕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마한 전체의 백제화(百濟化)가 아니라 백제에 비교적 인접하였던 지역의 마한 세력이 백제에게 흡수되고 나머지 세력이 보다 남쪽으로 중심적 세력의 이동을 하였다고 해석되고 있다. 백제는 세력의 확대를 계속하여 다루왕(多婁王) 36년에 영토를 낭자곡성(娘子谷城)에까지 확장하고 신라에 사신을 보내 만날 것을 요청하였으나, 신라는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었다. 서기 63년에 이처럼 일찍 백제가 낭자곡성 방면에 진출한 것을 대략 오늘날의 청주 지역에 이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처럼 일찍 백제가 청주 지역을 영향권에 넣었는지, 시기 문제는 별개로 하더라도, 백제가 이곳 청주 지역을 거쳐서 신라 방면으로 진출을 계속하였던 사정은,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에 의하여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 기록으로 여겨진다. 백제와 신라의 교쟁(交爭)은 이후 와산성(蝸山城)에서 지속되고 있다. 이어 괴곡성(槐谷城)에서의 신라와의 교쟁이 고이왕(古爾王) 45년인 278년에 기록된 것을 보면, 오늘날의 보은과 괴산 지역에서 일단 신라의 세력과 교착되었다고 여겨진다. 서기 3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의 백제가 청주 지역을 발판으로, 더욱 동남으로 진출을 기도하였던 상황은, 당초 마한의 국읍들을 세력권 아래 넣어가는 과정을 나타낸다고 여겨진다. 이 시기 백제는 한강 유역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여 경기·충청 지역을 영향권에 넣고 북쪽의 낙랑, 대방과 세력을 겨루고, 남동쪽으로는 신라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동북으로부터는 동예(東濊)의 세력이 약탈하는 것을 막아내고 있었다. 거의 반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 성장한 청주 지역의 세력은 백제의 남방 진출에서 중요한 지리적 위치였으므로 일면으로는 자치적이고 토착적인 지배권을 유지하였을 것이나, 차츰 백제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사정은 청주시 송절동의 마한 시기 유적과 그에 뒤이은 청주시 신봉동(新鳳洞)의 백제 시기 유적의 교대 관계에 의하여 그 대략의 양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송절동의 유적 연대가 서기 3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임에 비하여, 신봉동의 유적은 송절동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요소가 많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토광묘의 전통은 고수되어 유지되었다. 그러나 유물의 양상에서는 차츰 철기류가 많아지고, 급기야는 말을 부리는데 사용된 유물이 등장하고, 토기에 있어서도 훨씬 단단하게 구운 것이 많아지며, 서울의 한강 남쪽 지역에서 발견되는 백제 초기 토기류가 이 지역의 전통적인 그릇을 대신하여 증가되고 있다. 엄청난 생산의 기초가 되는 철기류 뿐만이 아니라 환두대도(環頭大刀)가 나타남은 이 지역의 정치 세력들이 이제는 말을 타고 환두대도를 휘두르며, 창과 활을 쏘는 무사로 되어 갔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마한에 대한 설명에서 나타나는 "소나 말을 탈줄 모르기 때문에 소나 말은 모두 장례용으로 써 버린다" 라는 것과는 크게 달라졌음을 알려준다.

2. 청주 지역 백제계 유적과 그 성격

청주 지역에 있어서의 초기 국가의 성립과 발전에서 백제의 세력이 커져서 이 지역을 영토화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앞서 언급한 송절동 유적과 신봉동 유적은 서로 밀접히 관련되면서도 서로 시기를 달리하기 때문에 이들 유적을 중심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 밖에는 그 시기와 관련된다고 믿어지는 성터들이 있는데 청주시 상당구 정북동(井北洞)의 토성(土城)과 우암산의 산성, 그리고 청주시 흥덕구의 부모산성(父母山城)을 비롯한 청원군 지역의 여러 성터들이 그것이다. 이들 성터들은 마한 시기와 백제 시기의 청주 지역 역사를 간직한 가장 중요한 유적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고고학적 조사는 지표조사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지금으로서는 이렇다 할 정보를 이용하기 어렵다.

청주에 있어서 한성(漢城)시기 백제의 영향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은 흥덕구 신봉동의 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은 1982년도에 알려져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발굴을 통하여 백제의 중요한 유적임이 알려졌다. 고분군은 무심천 서쪽의 야산 기슭에 있으며, 토광목관묘(土壙木棺墓),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 그리고 화장묘(火葬墓)로 여겨지는 소형토광묘(小形土壙墓) 등이 분포되어 있다. 이들은 대체로 분포의 위치가 다르게 나타났다. 산자락의 아래쪽에서 작은 화장묘가 조사되고 그 위로 토광목관묘와 대형의 토광목곽묘가 분포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토광목곽묘는 규모가 크고 위치가 산의 능선부를 점유하고 있다. 산의 정상부를 위주로 횡혈식석실분이 분포되어 있다.

무덤의 종류에 따라 출토 유물에도 차이가 있다. 토광목관묘의 경우 규모가 큰 경우 마구와 무기류가 나오고 있고, 보다 큰 목곽묘의 경우 철제의 갑옷이 출토되므로서 토착의 지방 세력이 어느 시기에 이르러서는 말을 타고 무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활과 창과 칼을 비롯하여 도끼와 낫, 그리고 작은 손칼이나 삼을 다듬는 칼 등이 출토되는 것은 이들이 농업에 있어서 유력한 농공구를 소유한 집단임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유리 구슬이나 옥구슬을 함께 부장한 무덤들은 이 무덤의 주인공들이 일반 농민층보다 신분이 높은 부유한 지역 지배 집단의 구성원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마구가 나오지 않는 무덤은 여자의 무덤이거나, 지배적인 계층보다 아래의 신분에 속하는 인물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들 무덤들은 기본적으로 마한 의 것이라 여겨지는 송절동 고분군에서 보는 속성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 즉, 무덤은 산의 경사면에 직교하여 만들어지고, 풍화 암반을 비교적 깊이 굴착하였다. 부장품에도 그것을 부장한 위치가 목관의 가장자리이거나 위였을 것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 출토되는 유물에서는 월등하게 수량과 종류가 다양해지되 일정한 정형성을 가지고 있다. 유물의 조합 양상은 크고 작은 토기류와 철기류, 그리고 장신구류로 크게 구분된다. 토기류에 있어서는 마한 시기라기보다는 한성 시기 백제의 중심부이던 서울 지역에서 나타나는 타날문이 시문된 둥근 바닥의 목짧은 항아리, 옹, 넓고 긴 아가리와 목을 가진 광구 원저호의 출현, 납작 바닥의 손잡이가 달린 잔, 개배(蓋杯), 깊은 바리 등과 일부는 삼족기(三足器)가 나오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그릇 종류의 출현은 청주 지역의 토착 세력이 백제 중심부의 영향을 받으면서 새로이 독특한 지역색을 가지는 문화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시사한다. 백제의 중심부와의 관계는 철제 무기류의 증가 단계를 거쳐, 급기야는 말을 이용한 기마전사의 등장을 가져오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현상은 토착 사회의 지배자들이 백제의 세력에 편입되면서 새로이 백제의 사회 조직 속에 편성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을 반영한다고 여겨진다. 토착 세력은 아마도 한동안 그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이후 점차 백제적인 요소를 수용하여 백제의 한 중요한 구성원이 되었을 것이다. 토착적 지배자 집단은 그들이 생전에 누렸던 생활의 모습을 무덤 속에 넣음으로써 그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신봉동의 유물들 가운데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특이한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토기에 있어서 신봉동식배(新鳳洞式杯)라 이름하는 커다란 손잡이 달린 잔이 유난히 보편적인 것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토기의 무늬에서 새발자국과 같이 생긴 무늬가 특징적으로 사용된 점이다. 이 무늬의 토기는 종래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甕棺墓)에서 그 출토 예가 알려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 조족문(鳥足紋)이 찍힌 토기들이 오히려 신봉동에서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 무늬의 토기는 청주를 중심으로 동으로는 충주에까지, 서쪽으로는 서해안인 홍성군 결성의 신금성(神襟城)에서도 나오고 있으며 이후 갑자기 나주 평야에 나타나고 이것이 일본에까지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4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청주 지역은 아주 특징적인 문화의 요소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다음으로는 토광묘에서 출토되는 많은 양의 마구류(馬具類)이다. 말의 입에 물리어 부리기 위한 각종 모양의 재갈(鐵?, 銜)과, 말을 타고 균형을 유지하는 발걸이(?子)는 이제까지 백제 지역에서 나온 것을 모두 합쳐도 신봉동 출토품보다 적다. 이처럼 토광묘에서 출토되는 많은 마구들은 토착적 지배 세력이 일찍부터 백제의 기마(騎馬) 요소를 일찍 수용하고, 백제의 주요한 구성 세력으로 변화하여 갔음을 알려준다.

토광묘의 보다 위쪽에 있는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들은 이제까지 3기(基)가 조사되었다. 석실분은 마한 시기에서는 보지 못하던 새로운 묘제이다. 돌로 만든 방과 입구는 토광묘와는 달리 이제 그 무덤의 방향이 산비탈과 같은 방향으로 된 것이다. 석실분의 등장은 토착 지배자들이 이 새로운 묘제를 받아들여서 종래의 전통을 버리고 새로운 무덤으로 바꾸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석실분의 등장은 새로운 묘제를 사용하는 지배자가 청주 지역에 와서 살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 여겨진다. 새로운 지배 세력의 등장은 청주 지역의 토착 세력을 그대로 편입하였던 종래의 백제 통치 방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제는 지방의 토착 세력들을 백제의 중앙에서 파견된 새로운 문화의 소유자가 압도하여 집권적인 고대 국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시기는 대체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대에 걸치는 기간에 해당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청주 지역의 경우 마한 시기에 성립한 정치 세력은 그 실상이 분명하지 않으나, 청주 송절동 고분군에서 보듯이 이 지역의 토착적인 지배 집단을 형성하여 마한의 중요한 국읍을 이루었다고 여겨진다. 이들 청주의 세력은 백제의 영향을 받아 오히려 독특한 문화를 가진 커다란 세력으로 발전하였고 이후 백제의 중앙 집권적 통치가 강화됨에 따라 신봉동의 석실분을 만든 새로운 지배 세력의 지배하에 편입되어 갔다고 여겨진다.

이 시기의 백제는 한성을 도읍으로 하여 북쪽의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었다. 4세기 후반에 백제는 고구려를 공략하여 맹위(猛威)를 떨치고, 한반도 중서부지역의 패자(覇者)로 군림하였고, 비로소 중국의 진(晉)나라와 국제 관계를 개시하였다.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이러한 시기에 마한의 세력을 아우르고 가야(伽倻)지역으로 세력을 팽창하였다. 이때부터 5세기 후반에 고구려의 세력에 밀려 웅진(熊津)으로 천도하는 시기까지 백제는 고구려와 대치하면서 유지되었다. 신봉동의 고분군은 이러한 시기 청주 지역에 있어서의 토착 세력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 4세기 후반에 이르러 청주 지역의 토광묘를 전통으로 하였던 지배 세력은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문화 복합을 실현하였다. 그러나, 이어 백제의 통치를 받으면서는 당시의 군사적 긴장 관계를 알려주듯이 토광묘를 전통으로한 집단이 무장을 하고, 급기야 기마병으로 활동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세력은 토착인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석실분의 무덤 전통을 가진 세력이 이 지역에 등장함으로써 지방 지배의 최고 실력자의 지위를 이들에게 내어주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청주의 가장 오래된 옛이름인 상당(上黨)이란 이름이 아마도 이즈음 백제가 청주 지역에 대해 붙인 칭호일 것이라 여겨진다.


청주시 / '97 / 체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