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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단지 근교 관광 및 역사자료)

 

 

우리는 흔히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불리우는 일본과 옛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동안 이웃하며 살고 있습 니다.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관계로 인하여 양국은 다른 어느나라보다 인적, 문화적으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져 왔으며 우리의 문물은 직간접적으로 일본의 고대문화 형성에 기여하여 왔습니다.

특히 백제문화권에 속해 있는 공주, 부여, 익산 그리고 영암 등지에 산재해 있는 문화유적, 유물들은 일본문화의 원류에 영 향을 미쳤고 그들의 문화가 우리의 숨결과 손길에 의해 다듬어졌다는 것을 史實로서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우리 공사에서 이번에 발간한 "백제의 숨결, 일본문화의 원류를 찾아서"는 고대 일본문화에 영향을 끼친 여러지역 가운데 백제문화권을 중심으로 한 한, 일간의 역사, 문화적 연관성을 바탕으로 한, 일간의 관광교류 활성화를 유도하기 위한 작 은 시도입니다.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느끼게" 해주는 문화관광은 오랜 역사의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형태의 관광패턴이라고 할 때, 이 책이 우리국민들에게 우리 것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 각하게 하고 일본인들에게는 그들의 고대문화의 흐름과 맥을 더듬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아울러 이를 기초로 한 문화 관광상품 개발에 많은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1995. 12.

한국관광공사 사장 김태연
 
 



1. 日本이 숨쉬는 곳 - 백제

부여에서 외국인이 묵어갈만한 숙소는 부여 유스호스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부여는 오래 전부터 일본인 관광객이 끊임 없이 찾아오는 곳이다. 부여 유스호스텔 계단과 복도에는 여기를 다녀간 수학여행단의 단체기념사진이 죽 걸려 있는데 그들은 무 엇 때문에 불편한 교통과 숙박시설을 마다 않고 부여를 찾아오는 것일까?
그것은 일본인들이 그들 문화의 원료(源流)로서 백제문화라는 역사적 향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고대사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은 한국사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그것에 비교될 만큼 크고 막중하다. 지금 많 은 학자들이 저마다 다른 견해를 갖고 있고 심지어는 민족적 대립감정과 결합하여 거의 허구적인 이론까지 제시되기도 하지만 일 본인들이 '교과서적인 지식'으로 결코 부인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백제문화인 것이다.

2. 日本 古代文明의 탄생

우리나라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의 신석기시대인 죠몽시대(BC4세기이전)는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청동기인들의 청동기 문화전래로 야요이시대(BC4세기-AD4세기초)를 열게 하면서 마감되었다. 4세기 초에는 역시 우리나라에서 철기문화가 전래되어 일 본 사회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편시켜 이른바 고분시대(4세기초-7세기 중엽)를 맞이하게 된다. 고분시대에는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 해 주는 전방후원(前方 後圓)의 큰 무덤이 조성되고, 신라, 가야토기와 같은 질을 지닌 수에키(須惠器)가 나타나 4세기 후반이 되면 야마도(大和)정권이 일본 국내를 통일해 간다.
고분시대의 후반인 6세기 초부터 7세기 중엽까지는 아스카(飛鳥)시대라고 해서 일본 역사의 무대는 규슈(九州)지방에서 긴기 (近畿)지방으로 옮겨지며 쇼도쿠(聖德)태자 시절에는 체제와 면모를 갖춘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문명의 개화에 백제의 신세를 단단히 지게 된다. 일찌기 왕인(王仁)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 주었고 (285년), 4세기 중엽 근초고왕때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백제는 일본에 도기, 직조, 그림 등의 기술을 전래하였으며, 무령왕이 오경박사 단양이(段陽爾)와 고안무(高安戊)를 파견하고 성왕이 552년에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를 보내 처음으로 불경과 금동석가여래상을 전래한 것은 일본 아스카문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고대국가 문명의 탄생과 전개과정에서 백제를 비롯한 삼국이 끼친 영향은 단순히 외교적인 문화교류에서만 이 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반도로부터 끊임없이 이주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들이 가져간 문화의 내용들이 일본 고대국가 문화 창조의 힘이 되었으며 바로 그 이유로 아스카문화의 원류는 백제에서 찾아지게 되는 것이다.

3. 韓民族의 日本移住

한민족의 일본에로의 집단이주에 대하여는 일본의 세계적인 고고학자인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가 1959년 '기마민족 도래설 '을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학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에가미가 주장한 내용은 "일본의 고분시대는 전기인 4세기와 후기인 5-7세기로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데, 고분출토 유 물에 마구와 갑옷 등 기마민족 유물들이 대량으로 출토되는 것에 주목하여 북방 기마민족의 정복왕조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 이것이 우리나라 일부 학자와 소설가들이 만들어 내는 가야왕조 일본정복설과 비류백제 이주설 등이다. 그러나 이것을 일본의 대부분 학자들은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온 도래인(渡來人), 일본말로 '도라이진'이 가져온 문화로 이해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대 부분의 일본 역사, 문화사 책들은 다음과 같은 맥락으로 설명하고 있다.
4세기 후반부터 시작되는 고구려의 남하(南下)는 동아시아 세계를 커다란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집어넣었다. 조선반도 남부 의 백제, 신라, 가야 등은 직접 고구려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또 철 지원을 가야에 의존했던 왜(倭) 또한 고구려와의 싸움에 휘 말리게 되었다.
강력한 고구려 기마군단과의 접촉은 기마전법이나 승마의 풍습을 일본인들이 배울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5세기 이후 일본고분에 마구(馬具)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 전란이 계속되면서 일본으로 건너오는 도래인들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파도처 럼 일어나게 되고 일본열도에는 왜인(倭人)들의 생활자체가 큰 변화를 이루게 되었다.
확실히 5세기는 일본 고대에 있어서 문명개화의 시대이며 왜국이 문명사회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달한 때이며, 이 문명개화의 주역이야말로 '도래인'이었다.
그 도래인 중에서 수에키(須惠器)라는 토기문화를 일으켜 준 이는 가야인들이며, 불교미술문화를 일으켜 준 이는 백제인들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4. 불교의 傳來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552년이지만 최초의 절인 아스카지(飛鳥寺)를 짓기 위하여 백제에서는 588년에 승려 6명과 조사 공(造寺工), 와박사(瓦博士), 화사(畵師) 등 6명의 전문가들을 나라에 파견했다. 지금은 형편없이 퇴락한 절로 남아있는 아스카 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발굴조사되었는데 그 가람배치는 삼국시대에 유행하던 '1탑3금당'식이었고, 와당들은 백제의 것과 거의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처럼 백제로부터 전수받은 아스카시대의 불교미술은 백제문화의 영향에 놓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아스카시대의 초기 불상들은 보통 '도라이요시키(渡來樣式)', 즉 해외양식이라는 뜻으로 결국 백제양식이라는 의미의 도래양식이다.
나라(奈良)에 있는 호류지(法隆寺)의 속칭 구다라 관음(百濟觀音)으로 불려지는 목조관음보살입상과 교토(京都)의 코류지(廣 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일본의 구국보 제1호)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코류지는 옛날 한반도에서 도래한 귀화인의 자 손인 하다노 가와가츠(秦河勝)가 세웠다고 전해지며 '일본서기'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호류지의 백제관음', '코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으로 대표되는 아스카 시대의 도래불상의 형식은 말할 것도 없이 백제양식 을 띠고 있으며, 부여박물관을 찾아 온 일본인 관광객들은 여기에 진열된 작은 금동불상, 이를테면 규암리 출토 금동보살입상이 나 삼산관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보면서 일본문화의 원류로서 백제문화를 확인하는 것이다.
도래인에 의하여 개창된 아스카시대의 불교문화는 점차 일본사회에서 토착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 결정적인 계기는 호류 지의 금당에 모셔진 동조(銅造)석가삼존상에서 찾고 있다. 625년에 주조된 이 불상은 도래양식에서 훨씬 벗어난 일본화의 분위기 를 띠고 있는데 이 불상을 제작한 불사(佛師)의 이름이 도리(止利)이므로 흔히 '도리양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도리불사는 도래인 제3세이며,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은팔찌 제작자 이름이 다리(多利)인 것과 연관되는 점이 있다.

5. 백제의 문화유적

이와 아울러 일본인 관광객들이 부여와 공주를 답사하면서 느끼는 공통된 감상은 그 주변의 자연 풍광이 일본의 지형 중에서 도 아스카, 나라지역과 아주 흡사하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 땅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그네들의 고향과 비슷한 곳에 정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한다.
부여의 백제문화 유적을 찾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볼때마다 내 머리에 스치는 두가지 의문은 아직껏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 한 채로 남아 있다. 하나는 일본문화의 원류로서 백제문화를 확인한 일본인의 가슴속에 일어나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신기함, 고마움, 동질감, 아니면 냉랭한 역사의 확인, 또 하나는 아스카와 교토와 나라지역에 남아 있는 우리의 선조인 그곳의 도래인들 의 유적을 음미하며 더듬는 한국인은 과연 얼마나 되며, 거기서 무엇을 느낄까?
이것은 그저 물음일 뿐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유홍준 글에서 발췌)


 

1. 백제의 신화

'三國遺事'권 제1紀異 제2에 의하면, 왕검조선(王儉朝鮮)은 상제(上帝)인 桓因의 서자인 桓雄이 지상(신단수아래 神市)에 내 려와 3.7일을 굴에서 지낸 후 여자가 된 熊女와 결혼해서 난 檀君王儉이 阿斯達에서 나라를 엶으로써 생겨난다. 그 해가 堯帝 즉 위후 50년 庚寅년(실제는 丁巳)으로 기원전 2333년(東國統監에 의해 唐高 戊辰年)에 해당한다. 그는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 선이라 일컫고 이어서 백악산 아사달로 옮겨 1천5백년을 다스리다가, 周成王(虎王)기묘년(紀元前 1122년)에 기자조선이 들어서매 藏唐京으로 옮기고 후일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다. 그의 나이는 1천9백8세였다 한다. 최근 그의 무덤(소위 단군릉)이 평양 근교 江東군 大朴山기슭에서 발굴되었다고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으나 무덤의 위치, 연대, 묘의 구조와 출토유물 등에 서 여러가지 모순점을 보인다.
北夫餘의 경우 解慕漱가 하늘에서 다섯마리의 용을 타고 내려옴으로써 나라가 이루어진다. 그 해가 前漢 宣帝 神爵3년으로 기원전 59년에 해당한다. 그의 가계는 解扶婁(迦葉原으로 도읍을 옮겨 동부여라 함) - 金蛙(하늘이 점지한 개구리 같은 어린일, 해부루의 수양아들이며 태자임) - 帶素에게로 세습된다. 삼국유사 권1 동부여조에 의하면 이 나라는 王莽15년, 기원후 22년(고구 려 3대 大武神王 5년)에 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부여는 346년 燕王 모용왕에게 망하고, 실제 고구려에 투항하는 494년까 지 지속되고 있었다.
고구려의 건국자인 東明王(朱蒙, 성은 高)의 개국설화에는 대개 세가지가 전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 다. 그는 북부여의 건국자인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와 용왕의 딸인 河伯女(柳花) 사이에 알로서 태어났는데(卵生), 그 해가 漢 新 爵4년, 기원전 58년이다. 그리고 그는 해모수의 아들인 해부루와는 異母兄弟가 된다. 그가 금와의 태자인 대소와 사이가 좋지 않 아 卒本州(졸본부여, 忽本 骨城)로 가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다.

건국자는 주몽의 세째 아들인 온조(溫祚)(BC18-AD28년)이다. 그는 아버지인 주몽을 찾아 부여에서 내려온 유리왕자(고구려 의 제2대왕)존재에 신분의 위협을 느껴 형인 불류와 함께 남하하여 하북 위례성(현 중랑천 근처이며 온조왕 14년, 기원전 5년에 옮긴 하남 위례성은 강동구에 위치한 몽촌토성으로 추정됨)에 도읍을 정하고, 형인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인천)에 근거를 삼는 다.
이들 형제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의 아들로 되어 있으나, 三國史記 百濟本紀 별전(권23)에는 북부여의 둘째왕인 해부루의 서자인 優台의 아들로 나와 있다. 이는 그의 어머니인 西召奴가 처음 우태의 부인이었다가 나중 주몽에게 개 가하기 때문이다.
백제의 건국자인 온조는 천손(天孫)인 해모수, 용왕의 딸인 하백녀(유화)의 신화적인 요소와, 알에서 태어난 주몽의 탄생과 같은 난생설화가 없이 처음부터 주몽-서소노-우태라는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인물들 사이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백제에는 부여나 고구려같은 건국신화나 시조신화가 없다. 백제는 신화나 설화의 자료가 사실상 희박하다. 특히 건국신화는 없다. 우리 신화의 원전격이라 할 수 있는 '三國遺事'의 경우 고구려, 신라, 가락의 건국 신화만을 다루었다. 그러면서 신라중심의 호국(護國), 인문신화(人文神話)에 치중한 경향을 보 이고 있다.
건국 신화 말고는 武王(?-641년)과 관련한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용이 등장하는 설화다. 그 어머니가 서울 남쪽 못가 에다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한 이후에 낳은 아들이 武王이라는 것이다. 용을 모티브로 한 숱한 '삼국유사' 기록 가운데 하나인 이 武王과 용에 대한 대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용은 대체로 호교(護敎)의 상징 내지는 호국(護國)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을 상기하면 武王은 호교와 호국 두 요 소에 바로 연결된다. 전북 익산 금마에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했고 부소산성(扶蘇山城)과 마주하는 백마강(白馬江) 건너 울성산 성(蔚城山城)근처에 호국사찰 왕흥사(王興寺)를 완공시켰다. 그는 금강 언덕의 바위에서 예불한 다음 배를 타고 건너가 법회에 친히 참석했다고 한다.
그는 추풍령을 넘어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 신라를 위협했다.
사비성(泗批城)으로 천도한 이후 가장 막강한 군주로 문화를 꽃피우는 가운데 영토를 관리하는 데도 주력했다. 이렇게 보면 위대하고 훌륭한 존재와 비교되는 용은 왕권이나 왕위를 상징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삼국유사'에 나오는 용과 무왕의 연관은 우 연이 아닐 것이다.
사비시대 백제의 고토인 夫餘 능산리 출토품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의 용은 왕권을 상징한 것으로 풀이된 다.

2. 한성시대(漢城時代) BC18-AD475

온조(溫祚)가 서기전 18년에 하남위례성에 작은 부족국가인 백제를 세웠다. 백제 초기의 지배계급은 북에서 남하(南下)한 유 이민(流移民)의 집단이 한강 유역에 정착한 사람들이므로 고구려계임을 알 수 있다.
초기 백제의 도읍지는 한강 유역인 바 서울 풍납동 토성내(風納洞 土城內)는 소위 김해식(金海式)토기와 기와집을 짓고 살았 던 유적층이 조사 확인되었다. 백제가 마한(馬韓)의 여러 부족국가를 통합하여 강성하게 되는 것은 고이왕(古爾王, 234-285)때부 터로 보인다.
백제가 마한을 전부 정벌하여 고대국가로 등장하는 것은 근초고왕(近肖古王)(346-374)대이다. 근초고왕이 전남 일대까지를 백제 영토로 하는 것은 369년경으로 보인다. 근초고왕 26년(371)겨울에는 왕이 태자와 함께 정병(精兵)3만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 양성을 쳐들어가서 고국원왕(古國原王)을 전사케 한다.
이로 인하여 백제는 경기, 충청, 전라도와 강원, 황해도의 일부까지 영토로 하고, 고구려로 하여금 평양성(平壤城)에서 다시 국내성(國內城)으로 퇴진하게 한다.
이러한 백제의 강성한 힘은 근초고왕대를 이은 근구수왕(近仇首王)대인 377년에 다시 고구려 평양성을 공침하고, 이어 중국 대륙을 정벌하여 요서(遼西)와 북경지방을 쳐서 요서(遼西), 진평(晋平)의 두 군(郡)을 설치하고 녹산(鹿山) 지방까지 백제의 힘 이 미쳤다 한다. (梁書, 宋書, 資治通監에 기록)
이같이 백제가 강성해진 근초고왕대는 문화적인 치적도 컸던 것이니, 375년에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백제서기(百濟書 記)(국사)를 편찬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는 외교적인 교류도 활발히 전개하였고 특히 일본에 대하여는 각별한 선린관계를 맺었던 것인데 삼국사기 의 기록에는 빠져 있지만 일본서기(日本書紀)등에는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3. 웅진시대(熊津時代)475-538

문주왕(文周王)이 475년에 즉위하면서 그해 10월에 熊津城(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백제는 고구려의 예봉을 피하기 위하여 금강(錦江)이 북(北)을 막아 흐르는 천험의 요새인 웅진성(현 공산성)으로 옮겼으나 병권을 잡고 있던 해수(解仇)에게 477년에 문주왕은 죽임을 당하였다. 탐라가 최초로 백제와 통교한 것은 문주왕2년(476)의 일이다.
뒤를 이어 즉위한 삼근왕(三斤王)은 겨우 13세의 나이로 부왕을 죽인 해수에게 모든 국권(國權)을 맡기었으나 左平眞南과 德 率眞老의 군에 격살되는 등 나라가 어지러웠다.
동성왕(東城王)(478-501)이 즉위하면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으며, 신라 소지왕(炤知王)에게 혼인을 청하여 왕족 伊飡 比智의 딸을 보냈음으로 신라왕실과 통혼을 하고 동맹하여 고구려의 힘을 막았다.
그러나 동성왕(東城王)은 22년(500)에 궁성내에 임루각(臨樓閣)을 짓고 원지(苑池)를 파고 진귀한 짐승을 기르는 등 사치한 생활을 즐기고 방탕하여졌다. 동성왕은 23년(501) 衛士佐平博 加가 보낸 자객에게 사냥 나갔다가 살해되고, 뒤를 이어 즉위한 왕 이 무령왕(武寧王)(501-522)이다.
무령왕은 佐平 加가 있는 가림성(성흥산성)을 쳐서 加를 죽이고 여러 성을 다시 쌓았으며, 고구려군과 싸워 백제의 옛땅 일 부를 되찾기도 하였다.
특히 남조의 梁과 교류를 활발히 하여 양서에 '更爲强國'이라고까지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이때 왜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 지하였으며, 일본서기 繼體 7년(513)조에 보면 백제에서 오경박사(五經博士) 단양이(段陽爾)를 보냈고, 516년에는 오경박사 고안 무(高安茂)를 보내면서 먼저 가 있는 단양이와 교대시켰다. 오경박사는 역(易), 시(時), 서(書), 예(禮), 춘추(春秋) 등에 통달 한 박사를 말한 것이다. 의학(醫學), 역상(曆象), 복서(卜筮), 노반( 盤), 와(瓦)에도 박사(博士)호가 있었다.
1971년, 무령왕릉(武寧王陵)이 발견되어 당시의 백제문화를 자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출토된 매지권(買地卷)을 보면, 무령왕은 개로왕(蓋鹵王)8년(462)에 출생하여 백제가 웅진성으로 도읍을 옮길 때 14세이며, 왕위에 즉위할 때 40세가 되고 , 죽을 때가 62세였다. 백제의 가장 어려운 시대를 체험하면서 자랐으며 백제의 재기를 도모했던 왕이었다.
무령왕대는 중국 남조(南朝)의 문화와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져 백제에는 전축분(전축분)이 조성되고, 무령왕릉출토 유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중국문물의 유입이 많았다.
이러한 국력의 뒷받침을 받아 즉위한 성왕(聖王)은 527년에 웅진에 대통사(大通寺)를 세우고 주위에도 많은 불사(佛寺)를 이 룩하였다. 527년에 백제를 다녀간 양의 사신이 보고한 양서 백제조(梁書 百濟條)를 보면 중국의 군현과 같은 읍을 담노라 하는데 , 22개처가 있고, 이 담노(擔魯)에는 왕의 자제와 종족이 모두 웅거한다 하였다.

李丙燾박사는 이 담로를 백제어의 '다라'를 사음(寫音)한 것이며, 일본서기의 '구다라'와도 같은 뜻으로 대읍성(大邑城)이 란 말이라고 함.

4. 사비시대(泗 時代) 538-660

백제가 웅진의 협소한 지역에서 넓게 트인 사비성(泗 城)으로 왕도를 옮긴 것이 성왕 16년(538)의 일이다. 성왕은 사비성으 로 왕도를 옮긴 2년 후인 541년에 梁에 사신을 보내어 시경 박사(詩經 博士)와 열반(涅槃) 등의 경의(經義) 및 공장 화사(工匠 畵師) 등을 초청해 왔는데, 당시 불교문화가 꽃피었던 남조(南朝)의 문화를 직수입하였다. 특히 공장(工匠)과 화사(畵師)는 새로 조영되는 사비(泗 )의 왕도를 건립하는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이 성왕대에는 백제승(百濟僧) 겸익(謙益)이 인도에까지 가서 범어(梵語)를 연구하고 오부율(五部律)의 범어 경(梵語 經)을 가지고 와서 번역하여 율부(律部)72권을 펴내고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가 되기도 하였다.
성왕대는 백제문화의 전성기를 이루는 시대로서 일본 고대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일본서기 欽明6년 (545)조에 백제 로부터 불교의 문물 및 그 사상이 전래하였다 하고 동 13년(522) 10월에는 백제 성왕이 西部 姬氏와 達率 怒唎斯致契 등을 일본 에 보내면서 금동석가불(金銅釋迦佛) 1구와 경론(經論) 등을 보냈다 한다. 이는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되는 역사적 사실이 다.
欽明 15年(554), 백제는 장군 三貴와 奈率物部烏, 德率東城子莫古를 보내면서 전에 가 있던 東城子言과 五經博士 柳貴 등을 교대시켰다. 또 승 담혜(曇惠) 등 9인을 일본에 보내어, 먼저 가 있는 승 도심(道深) 등 7인과 교대시켰다. 당시 백제는 군사적 요청을 일본에 하면서 많은 문화적 혜택을 주고 있는데 일본은 당시 경이적인 백제문화를 수입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성왕대의 군사적 측면을 보면 동왕(同王) 2년(524) 신라와 사신을 교환하고 북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구축하였으며, 529년에는 안장왕(安藏王)이 백제의 북변을 침략하자 백제는 3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싸웠으나 대패하여 2천여의 전사자를 내는 등 위급하였다. 이렇듯 고구려의 침략이 계속되자 백제는 신라에 구원병을 청하고 드디어 성왕 29년(551)에 백제 와 신라의 연합군이 북진하여 백제는 한강 하류의 한성지역을 회복하고, 신라는 죽령(竹嶺)이북 철령(鐵嶺)이남의 한강 상류지역 의 고구려 십군(十郡)의 땅을 얻었다. 그러나 성왕 31년(553) 신라는 돌변하여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한성지역을 공취하여 신라 의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신라와의 적대관계가 형성되어 554년 성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신라의 관산성(管山城) (옥천)을 공격하다가 성왕은 전사하고 좌평(佐平)4인과 29,600인이 참살되었다 하니 삼국사기의 표현이 과장된 듯하나 참혹한 패 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관산성 싸움 이후 백제와 신라는 120년간 계속된 동맹관계가 깨어지고 백제가 망하는 그날까지 돌이 킬 수 없는 원수가 되었다.
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위덕왕(威德王)은 554년 왕위에 오르자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진성(珍城)(경남단성)을 쳐서 남녀 39,000인과 말 8,000필을 빼앗아 오기도 했다. 이때 고구려의 남침도 계속되어 백제로서는 고립상태에 빠지게 되자 중국의 진( 陳)이나 북제(北齊) 북주(北周) 및 수(隨)가 번번이 사신을 보내서 외교적 수단으로 난국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면서 문화적 교류 도 활발히 하였다.
위덕왕(威德王)때의 일본과의 관계를 보면, 557년 11월에 백제에 왔다 돌아가는 왜사(倭使)편에 경론(經論)과 율사(律師), 선사(禪師), 비구니(比丘尼), 조불공(造佛工), 조사공(造寺工), 주금사(呪禁師) 등 6인을 보냈으며(日本書紀 敏遠紀 6年11月條), 584년에는 왜사(倭師) 鹿深臣이 백제에서 미륵석상 1구와 불상 1구를 가져갔다(日本書紀 敏遠紀 13年 9月條). 588년에는 백제가 일본에 사신과 승 혜총(惠摠), 令斤, 惠寔 등을 보내면서 불사리(佛舍利)를 전하고, 또 승 惠宿, 惠衆 등과 사공(寺工), 노반박 사( 盤博士), 와박사(瓦博士), 화공(畵工) 등을 보냈다.
이 해에 일본에서는 善信尼와 禪藏尼, 惠善尼가 백제에 와서 유학을 하고 590년에 돌아가기도 했다. 595년에는 백제승 惠聰 이 일본에 가서 그해 귀화한 고구려 승 慧慈와 더불어 일본 불교의 중추적 인물이 되었다(日本書紀 推古紀 3年條).
이 당시 일본은 聖德太子 섭정초기로서 성덕태자는 고구려 승 慧慈에게 불교를 2년간 배웠으며, 백제인 博士覺 에 유교를 배 웠는데, 백제승 惠聽도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597년에는 위덕왕의 왕자 아좌(阿佐)가 일본에 와서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고 성덕태자의 상을 그렸다 한다(日本書 紀 推古期 5年 4月條).
武王代에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으며, 고구려와 신라와의 공방전은 계속되었다. 백제는 隨와 내통하여 고구려를 칠 약속을 하였으나 사실은 고구려와도 내통하여 양단책(兩端策)을 썼으며, 612년 수의 대군이 요하(遼河)를 건너 고구려 정벌에 임 했을 때 백제는 호응하지 않았다. 수는 遼東을 출발할 때 30만 5천인이었는데 살수(薩水)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의 고구려군에 게 대패하여 살아 돌아간 자가 2천 7백인이었던 것이다.
백제는 또 수(隨)를 이은 당(唐)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무왕때 당에 보내는 예물로 명광개(明光鎧)(626년 ), 주갑 및 금갑(金甲)과 조부(雕斧)(639년)를 보내는 바 중국황제가 보고 탐낼 만큼 잘 만들어진 갑옷들이었다.
백제의 갑옷과 무기 만드는 기술이 대단히 발달되어 있었던 것이다. 명광개(明光鎧)는 갑옷 위에 황칠(黃漆)을 발라서 사람 의 눈이 부시게 만든 것이었다. 武王은 634년 백마강이 임한 곳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배를 타고 드나들었는데, 이 절은 채식(彩飾)이 장려하였다. 이 해에 또 관성(官城)남쪽에 큰 원지(苑池)를 파고 20여리에서 물을 끌어들여 물속에 방장선산(方丈 仙山)을 모방한 섬을 만들고 못가에 버들을 심어 왕궁의 원유(苑 )를 크게 가꾸기도 하였다.
의자왕(義慈王)(641-660)은 초기에는 용감하고 결단성이 강한 왕이었다.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642년 7월에는 왕이 친히 군 사를 지휘하여 신라의 서성 40여성을 함락시키고, 또 8월에는 장군 윤충(允忠)에게 1만군을 주어서 신라의 대야성을 쳤다. 이때 대야성(大耶城) 성주가 金春秋 武烈王의 사위인 품석(品釋)으로 처자 모두가 잡히어 죽었고 竹竹, 龍石 등이 전사했다.
백제는 의자왕 3년(643)에 고구려와 和親을 맺어 오랜만의 원한을 풀고 동맹관계에 들어갔다. 이는 612년 무왕이 수(隨)의 고구려 침략을 거부하고 오히려 고구려에 미리 내통하는 등 친고구려정책을 쓰기 시작한 결과이기도 했다. 의자왕5년(645),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신라 군사를 동원한다는 말을 듣고 백제는 그 틈을 타서 신라의 일곱성을 쳐서 빼앗았으며, 동왕 8년 3월 에 장군 義直이 신라 서변의 腰車(尙州) 등 10성을 쳐 빼앗고, 동왕 9년 8월에 왕이 左將(身+殷)相에게 精兵 7천을 주어 신라의 일곱성을 쳐 빼앗았다. 651년 신라의 사신 金法敏(후에 文武王이 됨)이 唐 高宗에게 올린 글에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동맹하여 신라의 大城과 重鎭이 모두 백제에 병합된 바 강토는 날로 줄어 들고 위력이 쇠하였다 하면서 백제에 詔書를 내려 침략한 성을 돌려주게 애원하고 있다.
백제는 신라를 능가하는 군사력을 가지게 되자 의자왕은 656년 이후부터 궁인과 더불어 荒淫에 빠져 成忠 興首 같은 충신을 제거하고 간신의 무리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자 인심은 흉흉하고 나라의 기강이 날로 문란해져 갔다. 그리하여 의자왕 20년(6 60) 蘇定方이 거느린 13만 唐軍과 김유신(金庾信)이 거느린 5만 신라군이 백제를 공격함에 계백(階伯)의 5천 결사대는 黃山(連山 )에서 신라군을 막았으나 패하고 660년 7월 13일 사비성이 함락되었다. 이어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던 의자왕이 7월 18일 항복하니 백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당시 백제는 5部 37郡 2百城 76萬戶였다 한다. 당장(唐將)소정방(蘇定方)은 의자왕을 위시하여 왕 자, 大臣, 將士 88명과 백성 12,807명을 唐의 서울 長安으로 데리고 갔다.
백제의 都城은 함락되었으나 수많은 백제의 지방성이 남아 있었던 것이기에 백제가 멸망한 후 각지에서 치열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왕족 福信과 僧 道(王+深)이 주류성(韓山)에 웅거하고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지수신(遲受信)과 사택상여는 任存城(大 興山城)에 웅거하여 3萬餘衆을 모아 소정방의 군을 깨뜨리고 백제의 2백여城을 회복하였다.
이들도 일본에 가 있는 왕자 豊을 맞아다가 왕을 삼고 사비성 웅진성을 포위하여 당군은 식량이 궁핍하게 되어 여러번 위기 에 몰리기도 하였다. 나(羅), 당(唐) 연합군은 부흥군과 싸우기만 하면 패하기도 하였다. 풍왕은 고구려와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군을 청하여 당군을 막기도 했으나 부흥군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나서 福信이 道(王+深)을 죽이고 풍왕이 또 복신을 죽였다.
마침내 나당(羅唐)연합군은 이 기회를 포착하여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유성을 공합하니 부흥군은 663년에 항복하였다.



 

고구려는 북방에 위치하여 광활한 대륙과 차가운 기후와 강력한 한족의 세력 속에서 끊임없이 투쟁하고 한족(漢族)의 선진문 화를 접촉하여 수용하면서 억세고 활달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백제는 한반도의 중부지역에서 북으로 강세한 고구려의 힘을 차갑게 받으면서 동의 신라와 협동하기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하면서 반도 서남의 기름진 땅과 온화한 기후 속에서 남조문화(南朝文化)의 진취적 수용으로 조화적이고 낭만적인 문화를 창조하 였다.
신라는 반도의 동남에 위치하여 중국 선진문화와의 접촉을 억제당하면서 고구려, 백제의 문화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여 토착적 인 후진의 신라문화를 발전시켜 삼국문화의 융합을 이룩하였다. 백제는 반도의 서남 바다를 끼고 남중국의 문화적 심장부에 뛰어 들어 외교적 수단을 발휘하여 진취적으로 수용하고 창조적으로 융화하는 입장에 있었다.
삼국문화의 선후를 따진다면 고구려가 가장 선진에 있고, 다음이 백제요, 가장 후진적인 것이 신라라 하겠다.

1. 백제어

백제는 고대 한반도의 중부지역인 위례홀'慰禮忽'에서 건국하였다. 그리고 꽤 오랜 기간을 마한과 공존하다가 거의 중기에 이르러서야 마한을 통합했다.
현재 서울 안의 어느 한 지역이었을 백제 시조 온조의 도읍지는 「위례홀」이었다. 여기서 강조되는 핵심은 지명어미 ' - 忽 '이다. 이 ' - 홀'은 온조의 형인 비류가 건국한 현재의 인천, 즉 '미추홀(彌鄒忽)'의 ' - 홀'과 더불어 부여계어의 특징을 극명 하게 나타내준다.
백제어는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도록 독특하게 형성, 발달하였다. 백제 전기어는 고이왕때(AD260년)까지의 언어를 가리킨다. 아직 부족국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언어 또한 이전상태가 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전기 백제어의 특징은 하나의 부족국가에 의하여 부여계어가 사용된 단일 언어사회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백제 중기어는 고이왕 28년(AD 261)부터 개로왕 20년(AD474)까지의 언어를 말한다. 이 시기는 이른바 부족국가의 체제가 중 앙집권의 국가체제를 갖춘 연맹체로 변모한 만큼 언어사적인 면에서도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믿게 한다.
이 시기는 또 오늘날과는 다른 수사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기본 수사 중에서 '밀(密=三)', '우츠(于次=五)', '나는(難隱=七) ', '덕(德=十)' 등이 지명어 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 수사체계는 고대 일본어에 수축되어 'mi(三)', 'itsu(五)', 'nana( 七)', 'towo(十)'등으로 쓰였음이 확인된다.
백제 후기어는 고구려의 남침으로 북부지역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문주왕 초년(AD 475)부터 멸망하던 해(AD660) 까지의 언어를 말한다. 백제어사 7세기에서 이 시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시기는 삼국사기의 1백40여 지명을 비롯하여 인명, 관직명 등의 언어자료를 국내외의 고문헌에 남겨 두고 있어 백제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가 오늘날 확보한 백 제어 단어의 대부분은 이 후기 백제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2. 사상과 종교

3. 백제의 토목기술

 

4. 백제의 병기

백제는 일찍부터 철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사신에게 철제 40장을 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현재 일본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이 신물(神物)로 여기는 가운데 소장하고 있는 칠지도(七支刀) 역시 백제가 일본에 준 단철(鍛鐵)의 칼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역시 근초고왕때 일이다.
그리고 漢城시대(? - ?년) 백제 유적인 서울 성동구 구의동 고분출토 쇠도끼와 철촉을 분석한 결과 실제 高炭素鋼으로 밝혀 졌다. 이렇듯 백제는 漢城시대에 이미 철기문화를 꽃피웠다.

철기문화는 동서나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융성을 좌우한다. 정복국가에서 무기는 철기문화의 꽃이기도 하다.
사비성(泗 城)옛터인 충남 부여읍 부소산성(扶蘇山城)에서 얼핏 불가사리처럼 보이는 철기가 출토되었는데 그 철기는 마름쇠 (鐵 藜)라는 일종의 방어용 무기였다. 4개의 가시로 이뤄진 마름쇠는 어느 방향으로 놓아도 첨예한 가시 하나가 위쪽을 향해 세 워지도록 고안되었다. 그 중에 가장 큰 가시 하나에 구멍이 뚫려 여러개의 마름쇠를 끈으로 연결할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도 이 마름쇠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기막힌 방어용 무기다. 마름쇠를 끈으로 연결, 성밖에 둘러놓으면 가시덩굴 역할을 하는 동 시에 성벽 위에서 던지면 적을 살상하거나 쫓아버리는 무기 구실을 한다"(삼국사기). 마름쇠는 부소산성 출토품이 유일한 실물이다. 활과 화살, 쇠뇌(弩)는 공격용 무기이자 원거리 무기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 유물로 전남 나주 신촌리 9호고분 출토품이 있다.

칼자루 뒤끝의 둥근 고리 안에 장식무늬가 있는 환두대도 중 나주 신촌리 9호고분에서 나온 삼엽문 환두대도는 특히 유명 하다. 철지에 금판을 씌운 타원형 병두고리의 중심 장식이 금동삼엽형으로 되어 있다. 손잡이에는 고기비늘무늬를 돋친 은판으로 감았다. 또 칼자루 끝 고리에 타출문의 돋친 은판을 씌우고 고리 안에는 봉황의 머리를 장식한 고리칼(단봉환두대도 : 單鳳環頭 大刀) 역시 이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이밖에 무령왕릉 출토품이 있다. 타원형 고리표면에다 용을 새기고 고리안에서 여의주를 입 에 문 용머리를 장식한 고리칼(금동장환두대도 : 金銅裝環頭大刀)이다.

갑옷이라고 하면 흔히 쇠를 연상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백제인들은 쇠가 아닌 동물의 뼈를 갈아서도 갑옷을 만들었다. 몽 촌토성출토품 뼈비늘갑옷 골제찰갑(骨製札甲)이 그것이다. 이렇듯 백제인들이 입었던 갑옷의 윤곽은 밝혀지고 있으나, 투구와 방 패가 발견되지 않았다. 본래 갑옷(甲)과 투구(胄)는 일습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두가지를 붙여 갑주(甲胄)라는 말을 쓰고 있다 .
'삼국사기'는 갑옷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금갑을 비롯해 금휴개(金 鎧), 명광개(明光鎧)라는 갑옷 이름이 기록되었다. 이들 갑옷은 신라 고분인 금관총(金冠塚)에서 나온 금동갑옷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한다.

5. 백제의 예술


 

일본을 건국한 민족은 어떤 민족일까. 일본인들은 그들을 천손족(天孫族)이라고 부른다. 일본의 건국설화인 '천손족강림설화 (天孫族降臨說話)'는 선진 문명권에서 바다를 건너온 이주민족이 왜열도를 개척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 바다를 건넌 사람들

육로로 연결되어 있었던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오늘날과 같은 해협으로 갈라진 것은 약 1만 5천년전부터 1만년 전 사이의 일 이다. 그 이후로 한반도와 일본은 배라는 교통수단에 의하여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위험한 바닷길을 건너서 일본열도로 이 동한 한반도인들은 초기 일본인, 일본문화의 형성으로부터 고대국가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일본에서는 이를 도래인(渡來人)으로 부르는데, 한반도 도래인들의 활약은 일본 고대국가 형성과정 그 자체라는 평가까지 있 다. 그렇다면 그 시기의 한반도인들은 어떻게 건너갔으며 어떻게 일본에 영향을 끼쳤을까?

오늘날 일본해안에는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부유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현재의 조류 흐름과 부유물 표착지는 선사, 고대시기 선박을 이용한 해상이동의 경로를 가늠케 한다. 고대인들은 조류의 흐름에 의지하여 일본열도로 이동하였으며, 이동에 사용된 배는 원시적인 통나무배로부터 시작하여 준구조선(準構造船)에 이르기까지 점차 발달하였다.
이러한 고대의 배는 우리나라에서는 안압지출토선, 일본에서는 큐호지(久寶寺)출토선 등이 남아있으며, 그 이전 시기는 암각 화, 상형토기 등에 나타난 배 모양으로 그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야요이(彌生)시대 중기에 제작된 동탁(銅鐸)에 새겨진 배의 모양이 시대가 앞서는 우리나라 반구대 암각화와 유사성을 보 여 흥미를 끈다. 규슈(九州)후쿠오카(福岡)현 와카미야(若宮)에 있는 다케하라(竹原)고분벽화는 직경 18미터, 높이 5미터의 원형분묘다. 석 실은 횡혈식 석실로 내부에는 선명한 색깔로 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상단에는 신라 천마총 등에서 보이는 천마(天馬)의 모습이 보이며, 하단에는 배 위에서 해변으로 말을 끌어 내리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코벨(Covell)박사에 따르면 이 벽화는 한반 도의 기마민족이 규슈지역에 상륙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이 벽화를 통해 당시 바다를 건너서 일본열도로 진출하는 한반도인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2. 한반도인의 일본 진출

한반도인들의 일본열도로의 진출은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가 있었다. 1단계는 신석기 시대로 BC5000년경 의 오산리의 융기문토기가 부산 동삼을 거쳐 쓰시마와 규슈로 연결되고 있다. 2단계는 BC4-5세기 죠몽시대 후기부터 야요이(彌生 )시대에 이르러 영농기술이 전래되었으며, 청동기와 고인돌 문화가 시작되었다. 3단계는 삼한시대로서 발달된 철기문화와 잠상( 蠶桑), 면포 등 새로운 문화의 전파가 있었으며, 4단계는 3국 및 가야시대로서 불교, 유교 등 종교와 정치제도, 율령의 전파라고 본다. 3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영향은 아스카(飛鳥)문화나 하쿠호문화의 성립뿐 아니라, 쇼토쿠(聖德)태자, 백제의 유교, 고구려 인 혜자(불교), 그리고 신라인 주하승(정치)이 같이 있었다는데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다이카개신이 한창일 때 김춘추의 도일(64 7)은 중앙집권화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3. 백제문화의 일본전파

우리 한민족은 동아시아 대륙 끝 한반도에 터를 잡아 단군성조(檀君聖祖)의 심오한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널리 인간세계를 이(利)롭게 한다는 인류행복과 인간사랑의 정신을 일찌기 표방하고 5천년의 장구(長久)한 세월동안 이 땅에서 조상 대대로 상경하애(上敬下愛)하며 살아왔다. 뿐만 아니라 대륙으로부터 들어온 각종 문화유산을 승화, 발전시키며 바다건너 일본에 도 이를 이전(移轉)시켜 그들 문화의 원류(源流)가 되어왔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즉 그들의 정신적, 문화적 원류라 할 수 있는 천자문과 논어, 그리고 불교를 전해주었고, 또 여러가지 생활의 지혜도 가르쳐 주었다.
한반도에 삼국이 정립(鼎立)했을 때 일본열도는 야요이(彌生)시대였다. 한반도로부터 이나사쿠(稻作), 즉 벼농사 재배기술이 일본에 전래되기 전까지는 그들은 산야초(山野草)나 열매를 따먹고 살았으며, 직포문화(織布文化)가 전래되기 전에는 옷마저 변 변치 못했고 이엉으로 이은 띳집에서 살았으니 그때가 바로 야요이 시대의 말기인 AD100년 경이었다. 대륙의 문화이전이 이 무렵 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사가(史家)들은 한반도의 발달된 대륙문명이 일본으로 전래된 시기를 기원전 2세기경, 야요이(彌生)시대로 보고 있다. 즉 한 반도에 삼국이 정립하기 이전부터 문화이전은 시작되었으며 그 후에도 계속적인 문화이전은 일본문화를 꽃피우는데 크게 기여하 였다.

4. 일본 천손족의 이동경로

'日本書紀'에 기록된 천손 니니기(瓊瓊杵)의 강림과정은 '이상(二上)의 천부교(天浮橋)로부터 浮渚있는 平處에 내리셔'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천부교는 하늘의 무지개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것은 천손이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려왔다는 것에 맞추기 위한 과장이다. 천손으로 불리는 이주민족이 실제로는 대마도쪽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수평으로 이동해 왔으므로 바다를 건너게 해준 '뜬다리' 역할을 해준 대형선박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손은 바로 한반도로부터 대마도를 지나 현해탄에 여러개의 점처럼 흩어져 있는 沖島, 大島, 田島 등을 거쳐 오늘 날 九州 북단에 당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육지에 상륙한 천손족의 이동경로는, 字佐, 日向, 笠沙를 지나 九州지역 전체 에 이르고 있다는 것도 확인된다.
'日本書紀' 주석본에는 니니기의 강림경상로와 관련, '日本書紀'에 海北의 島中이란 말이 있다. 한국과의 海路途上이란 뜻일 것이다. 沖津宮이 있는 沖島는 下關, 對馬北端, 한국의 부산을 잇는 거의 일직선에 있다.
'성씨록'에는 백제 근초고왕을 시조로 하는 물부씨(物部氏)계가 고대 왜열도에서 가장 큰 씨족집단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씨족에서 나온 석상씨(石上氏)는 백제에서 왜로 전해졌다고 하는 그 유명한 칠지도(七支刀)가 보관된 석상신궁( 石上神宮)을 관장하는 집안이다.
아지왕(阿知王 또는 阿直岐)은 백제 아신왕(阿莘王, 392-404년)을 말한다. 왕인을 '古事記'에서는 和邇吉師라 하였으므로 이 화이(和邇=와니)씨를 '성씨록'에서 보면 황족(皇族)으로 분류돼 있고, 근초고왕을 시조로 하는 물부(物部)씨와도 혈족으로 연결 돼 있다. 일본서기의 신무기(神武紀)에서는 요속일명(饒速日命)을 물부씨의 시조라 하였으며 여기서의 '요(饒)'는 백제왕성 '여( 餘)'이고, 속일은 근초고왕 즉 속고(速古)대왕과 동일인물이다. '속기(續紀)'라는 사서도 백제 구소왕(久素王)이 '구'(구=근초고 왕의 이름 구의 잘못)의 손자 왕인(王仁)을 왜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백제왕족이 왜의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던 판에 성조(聖朝)가 어떻고, 응신(應神)이란 천왕이 따로 있었다고 '일본서기'가 주장하고 있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하여튼 백제에 가서 왕인을 불러왔다고 하는 황전별(黃田別), 무별(武別)이란 사람도 있으므로 이들의 신분을 밝혀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성씨록'에 따르면 '무부숙녜(巫部神니)'가 '신요속일명(神饒速日命)'의 후손으로 나와있다. '무부(巫部)'씨는 물론 무별(武 別)을 말하는데 요속일을 시조로 하므로 왜인이 아니라 백제왕족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므로 후세에 한반도와 왜열도가 분리되자 부랴부랴 백제사를 개작하여 '일본서기'등의 사서를 왜사로 위장하면서 직필을 하지 못하고 매양 소설풍으로 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은 그들 선조의 역사를 알고 싶어서 '성씨록'을 마련했다.
만약 이 '성씨록'이 없었다면 백제인에 의한 왜지개척을 밝혀내지도 못할 뿐 아니라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경영론 앞에서 우 리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5. 아라사등 설화

아라사등(阿羅斯等)의 설화에는 황소(黃牛), 백석(百石), 부인, 처녀 등 상징적인 용어가 등장한다. 먼저 황소부터 살펴보면 , 힘센 황소는 국력(國力)을 상징한다고 보인다. 설화에서 대가라국(大加羅國)이 갑자기 황소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많은 한인들 이 신천지개척을 위해 왜도로 건너가면서 국가 전체가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이렇게 되자 한(韓)에서도 이주현상을 방치할 수 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왕자 아라사등이 왜로 가서 지금의 돈하(敦賀= 쓰루가)에 거점을 두고 왜지를 통치하게 된다. 이를 두고 설화에서는 황소 대신에 백석(옥 또는 왕권을 상징하는 신령스러운 보 물)을 얻었다고 표현했다. 이 백석이 처녀로 변해 왕자와 혼인하고, 첩이 되었다는 것은 한반도와 왜열도를 통합한 왕국이 이룩 됐음을 말해준다. 이래서 지나(支那=중국)측 기록도 당시 백제의 영역이 남쪽으로는 바다 건너 왜지(倭地)까지라고 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세오녀(延嗚郞-細嗚女)설화가 아라사등의 설화와 유사하다. 이 설화도 백제가 황무지나 다름없 던 왜열도를 개척한 4세기 후반의 상황을 연상해보면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부터 동해바닷가에 살던 사람들 은 바다 건너에 있는 왜지(倭地)를 '월지(越地)'라고 부르면서 자유로이 왕래했다. 그들이 타고 다닌 배(船)를 바위(磐)라 하였 다. 이것을 '일본서기'는 천반선(天磐船) 또는 천반좌(天磐坐)라고 표기하고 있다.
특히 천손 '니니기'도 현해탄을 건너면서 천반좌를 탔다고 하는 것이다. 이 반선(磐船)은 큰 파도에도 견딜 수 있도록 만든 선박을 말한다. 이로 보아 당시 한반도가 조선술(造船術)에 있어서 선진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6. 백제의 일본집권 과정

천손 니니기의 천강로(天降路)는 현해탄을 건너 九州를 동남쪽으로 휘돌아 서남단에 있는 입협(笠挾=가가사)에서 일단 끝을 맺고 있다. 그곳이 야간(野間=노마)반도인데, 그 끝에는 조그마한 연못인 야간지(野間池)가 있고, 그 위로는 아구근시(阿久根市) 가 있다.
'옛날 신라국(新羅國)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을 천지일모(天至日矛=아메로 히호고)라 하였다. 이 사람이 바다를 건너왔다' 는 설화가 있다.
이 설화에 나오는 천지일모는 '일본서기'의 '수인기'에 나오는 '신라 왕자 천일창이 내귀하였다'의 천일창이다. 설화는 그가 도왜한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면서, 천일창에 의한 왜지개척자를 담고 있다.
오늘날 일본왕실에서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삼대신물(三大神物)은 팔척경구옥(八尺瓊勾玉), 팔지경(八咫鏡), 천총운검(天叢 雲劍)이다. 이것들은 각각 구슬(玉), 거울(鏡), 칼(劍)이므로, 설화에서 신라왕자가 구슬을 빼앗은 것은 원주민에 대해 왕권을 행사했다는 뜻이 된다.
여기에서 분명히 해둘것은 '고사기' 등 일본 사서의 초기기록에 나오는 '신라'라는 말이 그 당시 왜지에서는 경주를 중심으 로 한 신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한인이 개척한 왜지의 신토(新土)를 두루 포괄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7.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

백제의 일본과의 관계를 규명함에 있어서는 한국의 역사기록으로는 별반 나타난 것이 없고 일본서기나 고사기 같은 일본측 기록을 조사해 보아야 한다. 日本書紀는 720년에 편찬된 일본의 정사에 해당하는 책이고, 古事記는 712년경에 편찬된 책이다.

이 책은 한국의 삼국사기와 연대를 비교하면 맞지 않는다. 日本書紀가 三國遺事와 연대가 맞아 떨어지는 시기는 백제 개로왕 (蓋鹵王)21년(서기 475년)부터이다. 475년 이전의 기록은 120년씩 차이가 나는 것이 가장 많다. 대개 옛날에는 간지(干支)로 기 록되는 경우가 많은데 간지의 기록을 日本書紀를 편찬할 때 二週甲씩 올려서 기록한 결과이다.

최초로 백제에 온 倭使는 근초고왕(近肖古王)21년(366년)에 사마숙미(斯摩宿彌 = しまのすくね)일행이다. 斯摩宿彌는 卓淳國 (지금의 東來에 있던 고대 부족국가)에 와서 從人으로 데리고 온 爾波移(にはや)로 하여금 卓淳國 사람 過古(わこ)등과 함께 백 제에 보냈던 바 近肖古王은 오색의 비단 각각 한필과 角弓箭(뼈로 만든 활과 화살)와 鐵鋌(철정이란 길쭉하고 납작한 쇠덩이인데 창이나 칼, 낫등을 만들수 있는 철의 원자재이고 화폐로도 통용되었다 함)40매를 주고, 이외에 진기한 것이 백제에는 풍부하다 고 일러 주었다는 것이다.(日本書記 神功紀46年,47年,48年條) 이에 백제는 367년에 久氏(くてい),彌州流(みつる),莫古(まくこ)등을 倭國에 보내어 通交를 개시하였다. 369년에는 倭師 千熊長彦(ちくまなかひこ)등이 彌多禮(전남 강진)에 상륙하여 그때 마침 馬韓의 殘邑을 소탕하고 있던 肖古 王(近肖古王)과 太子貴須(近仇首)를 반갑게 맞이하여 회담하고 함께 북상하여 수도 한성에 이르러 왕의 예우를 받고 머물다가 백 제인 久 와 동반하여 돌아갔다.

 이 근초고왕때는 백제가 강성하여 반도의 서남을 전부 영토로 한 시대다. 이어서 371년(神功51년)백제의 근초고왕은 久 를 倭國에 보내어 禮物을 전하였는데 당시 倭王은 백제와 친교를 가진것은 하늘의 소치(所致)라고 극찬했다. 이를 보면 왜국이 문명 국인 백제와 通交한 것이 얼마나 큰 다행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고 久 가 가져간 진귀한 물건을 보고는 옛날에는 없었던 물건이 라고 감탄하였다.

 이 해에 倭王은 千熊長彦(ちくまなかひこ)을 久 등과 함께 다시 백제에 가게 하였다. 이는 백제왕에게 답례로 보낸 것이다. 372년 壬申(神功52년)에 天熊長彦(ちくまなかひこ)이 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백제에서는 久 를 같이 가게 하였으며, 이때 예물 로 七支刀 한 자루와 七子鏡 거울 하나와 여러가지 귀중한 보물들을 보냈다. 바로 이 七支刀가 지금 일본 天理市에 있는 石王神 宮에 보존된 그 칠지도며, 그때의 거울, 곡옥(曲玉) 등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칠지도의 모조품이 지금 부여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음).

 儒學과 漢文은 書記 應神紀 15年에 백제의 왕이 阿直岐를 일본에 보내면서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는데 왜왕(倭王)응신(應神) 이 阿直岐로 하여금 그 말을 사육하도록 맡겼다. 그런데 이 阿直岐가 능히 유교의 經典을 해독함으로 그를 太子 道稚郞子(うちの わきいらつこ)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때 왜왕이 아직기에게 백제에는 너보다 나은 博士가 있느냐 물으니 王仁(わに)이라는 사람 이 가장 우수하다고 말하였다. 왜왕은 黃田別(あらたわけ), 巫別(かむなきわけ)을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초청해 갔다(應神16년). 이 王仁이 太子의 스승이 되어 經籍을 학습시켰는데 王仁은 통달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한다. 이 王仁은 후일 書首란 文人職 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이 해가 乙巳年으로 백제의 阿花王(阿莘王)이 돌아 갔으므로 王子直支( 支)가 귀국하여 왕이 되었다 한 다(405年).

 그런데 古事記란 책에는 좀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시대는 應神朝의 사실이라 하면서 百濟照古王이 말 두필을 阿知吉師(あち きし)에게 부치어 보내면서 橫刀와 大鏡을 보냈고 또 賢人을 보내달라고 백제에 요청하니까 和邇吉師란 사람이 論語10권과 千字 文 한권을 가지고 왔으며 卓素라는 治工(쇠붙이를 만드는 대장장이)과 옷감을 짜는 吳服師로 西素라는 사람과 仁番이란 釀酒者 주자를 보내왔다 한다.

 여기서 照古王은 근초고왕을 지칭하는 것이며, 阿知吉師와 和邇吉師는 書記의 阿直岐와 王仁에 해당한다. 吉師(きし)백제에서 왕을 吉支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大人이란 존칭 말이며 신라의 十四官等의 吉士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이외의 일본의 여러 기록 이 모두 연대에 대해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대체로 이는 근초고왕때부터 아신왕까지 (346-405)사이의 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일본 최초의 철공 기술자는 백제인 卓素요, 옷감을 짜는 기술의 시조는 西素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직물을 '吳服'이라 하는 데 이때부터 연유된 이름이다. 일본 술 제조기술의 시조는 仁番이 된 것이다.

 이 仁番의 또하나의 이름이 須須許理인데 술을 빚어 왜왕에게 올리니 왜왕이 이를 마시고 취해서 '수수고리가 빚은 美酒에 나는 취했다'는 노래까지 지어졌다.

그리고 403년(應神 14年) 백제왕이 縫衣工女 眞毛津(まけつ)을 일본에 보내어 옷 만드는 것을 가르쳤는데 이가 일본 衣縫의 시조가 되어 있다.

의학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인으로 백제에 귀화하였다가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이 있었고 倭王允恭(いんきよう)이 그의 3년에 병을 치료하였던 바 완치되어 상을 주었는데 이 의사가 金波鎭漢紀였다 한다(古事記). 이 允恭倭王이 81세로 죽었을 때 신라에서 는 80인의 樂人을 조문사절로 보내 왔다고 한다. 지금 일본 奈良의 正倉院에는 新羅琴이 보존되어 있다. 繼體(けいたい)紀 7년(5 13)에는 백제에서 五經博士 段楊爾가 일본에 왔고, 516년 백제 무령왕 16년에는 오경박사 고안무를 왜에 보내어 단양이와 교대시 켰다. 여기서 五經이라 하는 것은 易, 詩, 書, 藝, 春秋를 말한다.

 일본에 불교를 전한 것은 欽明(きんめい)紀 6年 545年에 백제에서 불교의 문물과 사상이 전래되었다고 하였는데, 欽明紀 13 年(552)10월에 백제의 聖明王이 西部의 姬氏와 達率(2等官等) 怒唎斯致契(ねにしちけい) 등을 일본에 보내어 금동 석가불 1구와 經論을 전하였다 한다. 545년의 불교전래는 私傳으로 볼 수 있고, 552년 사실을 公傳으로 볼 수 있다. 이어 553년에는 倭王이 醫 , 曆, 易 박사의 교대를 요청하고 점치는 책과 달력 및 藥材를 요청하였다. 554년 2월에는, 百濟는 下部(五部中 下部) 杆率(五等 官等)인 장군 三貴와 上部의 奈率(六部官等)인 物部烏等을 倭에 보내어 救援兵을 請하면서 同時에 德率寺等인 東城子莫古를 보내 어 전에 倭에 건너가 있는 東城子言과 교대케 하고, 五經博士 柳貴로 하여금 전에 가 있는 固德(九等) 馬丁安과 교대시켰다.

 그리고 승려 曇惠 등 九人으로 하여금 이미 倭에 가 있는 승려 道深等 七人과 교대시켰다. 또 倭의 요청에 따라 易博士 施德 (8等) 王道良, 曆博士 固德(9等) 王保孫, 醫博士 奈率 王有( +俊)陀採藥師 施德 潘良豊 固德 丁有陀藥人 施德 三斤 季德(10等) 己麻次進奴 對德(11等) 進陀를 보내어 왜에 가 있는 사람들과 교대시켰다. 百濟 554年은 聖王이 新羅軍에게 전사를 당하는 위급 한 때이므로 555年에도 倭에 원군을 요청하고 있으며, 많은 百濟人이 倭에 상주하여 계속 교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倭에 건너간 백제의 음악가들이 橫笛 玄琴 莫目(管樂器(マクモ)의 일종), 춤 등을 가르쳤던 것이다.

 百濟 威德王 때인 577년 11월에는 百濟에 왔다 돌아가는 倭使편에 經綸과 律師, 禪師, 比丘尼 등 승려가 따라갔고, 불상을 만드는 기술자와 절을 건립하는 기술자 및 呪禁師(주문을 외어서 악귀를 물리치고 의료에 종사하는 사람) 등 6人을 딸려 보냈다.

584年에는 백제에 왔던 倭師 鹿深臣(かふかのぉみ)이 百濟의 彌勒石像 一軀와 佛像 一軀를 가져갔으며, 588年 백제 威德王은 왜에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승려 惠摠과 令斤 및 惠寔 등을 함께 가게 하고 佛舍利를 보내었다.

 또 승려 惠宿, 惠衆 등을 보내면서 탑의 相輪部를 만드는 기술자인 將德(7等) 白昧淳과 기와굽는 기술의 대가인 瓦博士 麻奈 父奴 陽貴文陸貴文 昔麻帝彌등과 화가인 白加를 같이 보내었다.

 이해(588년)에는 倭에서 최초의 유학생인 善信尼와 禪藏尼 및 惠善尼의 여승이 백제에 와서 佛敎를 배우고 590년에 돌아갔다 .

 592년에는 百濟의 승려 惠聰이 일본에 가서 그해 귀화한 高句麗 승려 慧慈와 더불어 日本佛敎의 중추적 人物이 되었는데, 당 시 倭는 推古時代로서 聖德太子 섭정초기에 해당한다.

 聖德太子는 고구려의 승려 惠慈에게 佛敎를 二年間 배우고 百濟人 博士覺 에게 儒敎를 배웠으며, 百濟승려 惠聰도 太子의 스 승이 되었던 것이다.

 이 聖德太子는 日本飛鳥文化의 황금시대를 열고 倭를 帝國으로 승격시킨 君主로서 推古女帝의 太子가 되어 모든 정치를 독단 하였다. 그는 中國皇帝에게 보낸 칙서 가운데 해 돋는 나라의 天皇이 해지는 나라의 皇帝에게 칙서를 보낸다는 대담한 위엄을 보 였던 사람이며, 일본 古代의 神人개념에 의한 佛이면서 現世를 통치하는 治者이기도 했다.

 聖德太子는 574年에 나서 621年에 죽었는데 594年에 太子로 책봉되었다.

 그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曆을 制定公布하고 冠位을 제정하였으며, 憲法(17개조항)을 제정공포하고 많은 불사를 창건하여 위 대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이 聖德太子가 百濟人과 高句麗人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일들을 수행할 수 있었다. 지금 日本 奈良顯 生駒郡 法隆寺 聖靈院에 聖德太子의 像과 함께 惠慈法師의 像이 모셔져 있다.

 593년에 일본에 法興寺와 四天王寺가 建立되었는데 飛鳥址에 법흥사(現 飛鳥寺址)가 기공되는 날 왜의 대신들 백여명이 모두 百濟의 옷을 입고 이 행사를 치뤘으니 이 절들이 百濟人이 만든 절이었던 것이다. 이 法興寺에는 백제의 중 惠聰과 고구려의 중 惠慈가 있었는데 惠慈는 615年에 고구려로 돌아갔다 한다. 이 惠慈는 621년에 聖德太子가 죽었다는 소리를 전해 듣고 淨土에서 서로 만나자는 언약을 하고 헤어졌던 약속을 생각하며 이를 지키기 위해 622년에 죽었다 한다. 百濟 威德王의 왕자이면서 화가이 던 阿佐太子는 597년 일본에 가서 聖德太子의 상을 그려주고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推古紀 5年 4月條).

 602년(推古 十年)에는 百濟의 승려 觀勒이 曆本과 天文地理書와 遁甲方術書를 가지고 일본에 가서 전하였는데, 聖德太子가 曆日을 공포한 것이 604년(推古 十二年) 1月이었던 것이니 관륵이 가져간 元嘉曆이었다.

元嘉曆이란 宋나라의 何承天 등이 만든 曆을 宋文帝가 元嘉二十年(443年)에 사용하였는데 그때의 연호가 元嘉였으므로 元嘉 曆이라 하게 되었다. 百濟 武寧王陵에서 出土된 買地의 誌石기록이 元嘉曆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525年 이전에 이미 百濟는 元 嘉曆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日本은 604年에 元嘉曆을 공포한 것이다.

612年(推古二十年)에는 百濟人 路子工이 皇宮 南庭에 정원을 만들었는데 須彌山과 吳橋를 設置하였다. 이 수미산은 큰 바위 에 생긴 정원석의 일종인데 飛鳥宮址에서 발굴되어서 현재 국립 東京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이 路子工은 日本 庭園文化의 始祖가 되었다. 이보다 2年 앞선 610年(推古 18年)에는 고구려의 승려 曇徵이 五經과 彩色과 종이와 먹과 년애( : 맷돌)등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왔으며, 담징은 그림도 잘 그리는 화가여서 法隆寺의 金堂에 觀音像을 그렸다. 특히 일본의 맷돌은 이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한다. 664년(天智 四年)의 기록으로 이는 이미 百濟가 망하였지만 百濟의 達率 答 春初로 하여금 일본 長門國에 城을 쌓았고, 또 達率 憶禮福留達率 四比福夫로 하여금 紫國에 大野城과 椽城을 쌓았다. 이는 이미 日本에 건너가 있던 百濟 達率인지 또는 百濟가 망하고 난 후 망명한 사람들인지 모르지만 百濟人이 城을 축 조하는 기술로 뛰어났기 때문에 築城工事를 시킨 것이었다.

 百濟가 망하는 과정에 많은 百濟人이 당시 百濟의 우방국인 日本에 건너갔을 것만은 사실이다. 이들이 日本文化에 기여한 공 로도 컸던 것이다.

日本이 倭란 명칭에서 日本으로 칭한 것은 三國史記에 文武王 10年 670年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日本과 百濟는 오랫동안 선린관계를 유지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으며, 百濟의 王家가 日本에 거주한 일들 이 오래되는 과정에서 日本 王室에 시집간 百濟王族이 더러 생겼다.

 그리하여 日本 皇族 속에는 百濟의 피가 섞었으니 仁德, 欽明, 敏達, 用明, 崇峻, 推古, 欽明 등은 百濟王室의 外孫들이다. 이뿐 아니라, 日本書紀 新撰姓氏錄에는 수많은 百濟계의 성씨가 수록되어 있다.

 日本 최고의 역사책이요 日本人이 聖書처럼 여기는 日本書紀의 편찬에도 百濟人의 참여가 곳곳에 보이며, 984年에 편찬한 의 학서적인 醫心方三十券에 百濟新集方과 新羅法師方의 의학서적들의 내용이 인용되고 있으니 백제 의학은 대단히 높았던 것이다.

百濟는 日本이 자랑하는 飛鳥時代(538-645)文化를 낳게 한 어머니였다. 日本 飛鳥文化는 百濟文化의 移植이며 모방이었다.

아스카 시대인 624년(推古 32年) 기록에 의하면 寺院이 46개소 승려가 816人 비구니가 569人이나 되었다 하며 이 이후 日本 은 오늘까지 東洋의 최고 불교국가가 되어 있다. 근년에 593년에 건립하였던 飛鳥寺址가 발굴되었는데 百濟의 蓮花紋 막새와 똑 같은 기와가 출토되었다. 지금 法隆寺 夢殿에 봉안되어 있는 觀音菩薩像, 大寶藏殿에 있는 百濟觀音像과 廣隆寺에 있는 半跏思惟 像, 中宮寺에 있는 半跏思惟像, 法隆寺의 玉筮廚子 등 日本 國寶의 最高의 文化財가 모두 百濟人이 만든 것이니 百濟文化가 어느 정도였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660년 7월 그날의 戰禍 속에 이땅의 百濟文化는 한 줌의 재로 화하였던 것이니 夫餘, 熊津, 그 찬란한 文化의 中心地 가 폐허로 남아 다만 옛 일을 생각케 할 따름이다.

 


1.불교전래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보다 12년이 뒤져 384년인 침류왕원년 東晋으로부터 마라난타에 의해서였다. 불교가 전 래된 이듬해 漢山(서울지역)에 佛寺를 조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서울 근방에서 백제의 사찰터가 확인된 바는 아직 없 다. 백제의 사찰이름이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도읍을 공주로 옮긴 후부터다. 즉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大通寺라든가 水 源寺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백제의 사찰유적이 본격적으로 밝혀지는 것은 聖王代 이후인 6세기 초 부여시대(사비시대)에서부터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는 절 이름의 기록이 나타나는 것만도 王興寺를 비롯하여 虎巖寺, 漆岳寺, 鳥含寺, 道讓寺, 資福寺, 帝釋寺, 五金寺, 普光寺, 彌 勒寺, 師子寺, 北部修德寺 등이다. 이중에서 도양사, 자복사, 보광사 등의 위치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그외에는 대체로 위치가 밝혀져 있다.
백제는 538년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고 아울러 경전과 불상은 물론 造佛, 造寺工을 보내어 불사를 조영하는데 기술적으로 큰 몫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아스카지(飛鳥寺)를 비롯하여 四天王寺, 法隆寺 등 飛鳥時代(552-645년)와 奈良時代 초기의 불사건축들 의 대부분은 백제의 기술에 의존하여 세워졌다고 믿어진다.

 2.장신구의 특징

지난 1971년 무령왕능(武寧王陵) 발굴당시 참으로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웅진시대(AD475-538년) 공예미술의 극치를 보 여준 무령왕릉은 가히 백제문화의 寶庫였다. 무령왕이 세상을 뜬 것은 AD 522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16년 뒤에 도읍을 사비로 옮 겨 사비시대(AD538-660년)를 개막했던 것이다.

백제의 유물로 남은 장신구는 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다. 특히 사비시대가 비명으로 막을 내렸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럴 수 밖에 없다. 가장 신분을 뚜렷이 나타내는 금동관의 경우 도성유적에서 출토된 완형은 전해지지 않는다.
도성유적 출토품이라야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中上塚에서 나온 금동관의 솟을장식(笠節)만이 겨우 전해질 뿐이다. U자형 금 동관에 봉황과 흘러가는 구름문양을 맞새김한 이 솟을장식의 꼭대기는 산모양을 이루었다.
그러나 사비시대 금동관모는 대단히 훌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사비도성 먼 변방에서 해당하는 전남 나주군 반남 면 신촌리 9호분에서도 멋들어진 금동관이 출토되었다는데 있다. 신촌리 출토 금동관은 아주 얇은 금동판을 구부려 만든 타원형 관띠의 정면과 좌우에 맞새김 초화문 솟을장식을 올렸다. 그리고 솟을장식과 관띠에 작고 둥근 달개를 담았고 장식 끝부분마다 파란색 구슬로 마감했다.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내관도 갖추고 있다. 내관으로서 이 관모(冠帽)는 반타원형으로 오린 2장의 금동판을 붙이고, 그 맞붙 인 부분을 다시 금동판을 구부려 감쌌다. 관모의 양쪽판은 두들겨 만들어낸 점선이 연결되어 물결문양을 이루었다. 그 사이사이 에는 당초문과 인등꽃문양이 끼어있다. 기본적으로 고깔과 흡사한 관모라 할 수 있다.
이같은 금동관모는 부여에서 그리 멀지않은 전북 익산군 웅포면 입점리 고분에서도 출토되었다. 입점리 고분에서 나온 관모 에는 다만 S자형 장식이 달렸다. 입점리 출토품 형식과 꼭 맞아 떨어지는 관모가 일본 구마모또현(熊本顯) 후나야마(船山) 고분 유적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사비시대의 고예술이 일본으로 건너간 뚜렷한 사실을 입증하는 유물이기도 하다.

백제의 여인들은 머리를 가꾸는데 비녀를 사용한 모양이다. 조선의 여인들처럼 비녀를 가지고 쪽을 쪘는지는 알 수 없으나 , 어떻든 백제여인들도 비녀를 사용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함양리 고분에서 출토된 비녀 1점이 유일하게 현 재 전해진다. 이 비녀는 길이 10.1cm로 머리부분에는 다섯꽃술의 꽃문양을 조각한 금제장식이 달렸다. 그리고 은제 몸뚱이에는 작은 동그라미와 대나무잎새를 점선으로 조각했다. 금두은잠(金頭銀簪)인 것이다. 우아하기 그지없는 장신구로 평가된다.
충남 부여군 장암면 하황리 고분에서 출토된 앙증스러운 유물은 아직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작은 유리공에 네 잎새모 양의 은관과 꼭지를 붙이고 꼭지에 은봉을 꼬인 이 유물의 용도는 도대체 무엇일까. 꼭지쪽에 꼬인 은봉 부분에는 방울까지 달아 매 더욱 앙증스럽다. 학자들이 오래 논의한 끝에 장신구라는 결론을 얻었다. 장신구중에서도 여자들이 머리를 묶어 장식하는 결 발구(結髮具)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금제 목걸이에서는 백제인들의 독창적 공예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고리가 달린 여러 개의 금막대를 연결한 목걸이가 그 좋은 예가 되고 있다. 무령왕릉에서 7마디짜리와 8마디짜리 금목걸이가 출토되었다. 백제쪽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유물이다. 武 寧王陵에서는 왕의 유품이 분명한 금제 귀고리가 나왔다.
백제쪽에서는 반지가 그리 흔히 발견되지는 않고 있으나 무령왕릉 출토 왕비의 은반지는 유명하다. 안에는 '경자년에 다리라 는 장인이 왕비를 위해 만들었다'(庚子年 二月 多利作大夫人分二百州主耳)는 새김글씨가 들어있고 밖에는 혀를 내민 용이 조각되 었다.
띠꾸미개(帶金具)와 띠드리개(腰佩) 역시 무령왕릉 출토유물의 명품이다. 이밖에 충남 공주시 송산리 고분 출토 짐승머리모 양 띠꾸미개( 帶)는 그 형식이 일본 長野顯 須坂市 요로이츠키(鎧)고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3. 제사(祭祀) 유적

우리 민족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제천의식(祭天儀式)을 베풀었다. 옛 기록에 나오는 부여(夫餘)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濊)의 무천(舞天) 등이 모두 제천의식이다. 특히 국가형태가 완전히 갖추어지면서 국가경 영과 관련이 있는 제례가 제도화하는 가운데 사직(社稷)이나 종묘(宗廟)와 같은 제사유적이 생겨났다. 이와 더불어 여느 민간사 회에는 마을 주민들의 무병안녕(無病安寧), 다산(多産)과 풍요(豊饒), 풍어(豊魚) 등을 기원하는 제사터가 마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백제강역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제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을 대하기는 쉽지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가 출토된 바 있는 충남 부여 능산리 유적이 제사터였다는 국립부여박물관의 발굴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 능산(陵山)리 유적은 충남 공주 송산리 개로왕의 가묘(1988년 문화재연구소 발굴), 전북 부안 변산반도( 邊山半島)의 죽막동 유적(1994년 국립전주박물관 발굴)과 함께 몇 안되는 백제 제사유적으로 떠올랐다.

백제의 제사유적 중 전북 부안군 죽막동 제사유적은 변산반도 해안절벽에 자리잡고 있다. 국립전주박물관이 발굴한 이 유 적에서는 구멍이 뚫린 원판(有孔原板)과 구리거울(銅鏡), 활석으로 모방한 갑옷, 굽은 옥(曲玉), 쇠칼, 동물을 형상화한 토제품 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을 발굴한 국립전주박물관은 죽막동 제사유적은 AD5세기를 전후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 죽막동 제사유적은 일본 오키노시마(沖島)노천유적과 거의 비슷한 조건을 갖추어 주목을 끈다. 부안 죽막동은 섬은 아니 지만, 해안가 절벽에 위치했다는 입지가 우선 비슷한 것이다. 유적 형성시기는 부안 죽막동 유적에 비해 훨씬 늦은 AD7-8세기경 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출토유물 성격도 비슷한 내용을 보여 백제의 영향을 받은 유적으로 보고 있다.

오키노시마(沖島)는 일본 규슈(九州)와 한반도 사이의 현해탄 망망대해 속의 섬이다. 둘레는 약 4Km이고 해발 2백43m의 산 이 우뚝 서 있다. 절해고도인데다 지형마저 험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상주하지는 않지만 여러 시대의 제사유적이 분포되어 있다. 야요이(彌生) 시대로부터 고훈(古墳)시대를 거쳐 나라(奈良)시대에 이르는 제사유적이 밀집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오키노시마를 '바다의 정창원(正倉院)'이니 '섬으로 된 정창원(正倉院)' 따위의 호칭을 붙였다.
이 섬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근대화 이전의 에도(江戶)시대부터다. 그러나 본격적인 고고학 조사는 지난 1953년부 터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23개소의 유적이 조사되었다. 오키노시마 출토유물로는 굽은 옥, 철제무기류, 토기, 활석 제사용품 등 이 있다. 이들 유물은 거의가 바위 끝자락에 만들어 놓은 제사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오키노시마 제사유적은 일본에서 가장 일찍 나타나는 제사유적인 동시에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데 자리잡았다. 더 설명을 곁 들이자면, 오키노시마 유적은 우리 부안의 죽막동 유적을 원형으로 삼아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의 유물을 수용했다는 사실도 포함 될 것이다.
어떻든 한반도계의 유물이 오키노시마에서 나오는 것은 이른바 도래인(渡來人)과도 결부시켜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고, 더 흥미로운 것은 고대인의 정신세계마저도 정확하게 반영시켰다는 점이다. 갑옷을 모방한 활석제 제사용품이 부안 죽막동 유적 출 토품과 같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지만, 오키노시마 출토의 금동제용두(金銅製龍頭)도 경북 풍기와 강원도 양양 출토품 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가야(伽倻)고토의 여러 고분에서 흔히 출토되는 말띠드리개가 오키노시마에서도 나오고 있다. 오키노시마가 극히 좁은 섬이라는 현실을 고려하면 실제 말을 타는 기마용(騎馬用) 말갖춤(馬具)의 일부라기 보다는 제의용으로 쓰였을 것이다 . 말갖춤 장식에 불과한 말갖춤까지도 신성시한 당시 오키노시마의 풍속을 엿보는 듯하다. 이렇듯 한반도의 문화는 현해탄 가운 데 섬들을 징검다리로 삼아 일본열도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몇몇 백제의 제사유적을 살펴보았다. 현재 뚜렷하게 나타난 유적이 3개소에 불과하지만, 더 발견되 수도 있 다. 이와 더불어 유적연구가 진전된다면 유적의 성격은 물론 백제인들의 기층심성에 갈린 제례의식이 어떠했는가를 어느 정도 규 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국가의 사직이나 종묘와 같은 제사유적이 민족의 정신적 구심력을 형성하는데 공헌한 역할론도 제 기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4. 백제의 음악

충남 부여읍 능산리에서 발굴된 百濟시대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의 상단부에 조각된 5명의 秦樂像은 백제 음악사연구에 결정적인 사료라고 할 수 있다.

5명의 秦樂人이 연주한 악기는 비파(琵琶)와 피리, 북, 현금소,(玄琴簫)로 발표되었다. 이 가운데 琵琶로 본 현악기는 阮 咸이 분명하다. 琵琶와 완함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몸통과 목부분에서 발견된다. 비파는 물방울 모양의 몸통과 짧은 목을 지녔 지만 완함은 보름달처럼 둥근 몸통과 긴 목을 가지고 있다. 이런 모양의 완함은 조선조에 씌어진 악학궤범'樂學軌範'에서는 월금 (月琴)으로 소개되고 있다.
완함의 연주모습을 보여주는 고고학자료는 安岳3號墳 壁畵(357년)를 시작으로 通溝三室塚(4-5세기) 및 江西大墓(7세기경)등 주로 고구려벽화에서 나타난다. 三室분의 완함은 4줄짜리지만 나머지 줄이 몇개인지 불분명하다. 완벽한 실물이 전하는 日本 正 倉院의 완함 역시 4줄이다. 그러나 금동향로의 백제 완함은 3줄짜리라는 저에서 독특하다. 둥근 몸통을 가슴부분에 밀착시킨 가 운데 왼손으로 목부분을 잡고 오른손으로 줄을 퉁겨 소리를 낸다는 공통점을 지녔기 때문이다. 백제가 중국의 北朝가 아닌 南朝 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볼 수 있다. 또 '日本後記'권 17에 의하면 橫笛, 군후, 莫目 등 3종의 백제악기가 일본궁중에 소개되었다 . 이 악기들이 '北史'나 '隨書'의 백제악기보다는 '일본후기'의 백제악기와 밀접하게 관련됐다고 보는 것이 무방할 듯 싶다. 이 는 특히 이 향로가 전래품이 아니라 백제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음악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횡적은 비암사(碑巖寺)의 삼존석불(三尊石佛)에서도 발견됨으로써 백제악기임이 더욱 분명해진다. 또 백제향로에 나타난 거문고는 군후이고 막목은 장적의 일종일지도 모른다. 만약 군후와 막목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면 백제향로의 주악상에 나타난 악기들은 '北史'나 '隨書'의 백제악기보다는 '日本後記'의 백제악기와 밀접하게 관련됐다고 보는 것이 무방할 듯 싶다. 이는 특 히 이 향로가 전래품이 아니라 백제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음악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4세기 고(鼓)와 각(角) 등 타악기와 관악기 위주였던 백제음악이 남조음악의 유입으로 6세기즈음에는 새로운 양상으로 발 전해갔다. 이렇게 형성된 백제음악은 일본의 欽明天皇5年에 해당하는 554년 음악인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삼국 중 일본의 음 악문화 발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5. 백제가 아스카문화에 끼친 영향

일본 사학계에서는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승되자 그 영향하에 일본문화가 꽃핀 6-7세기를 '飛鳥-아스카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에도 백제문화가 큰 영향을 미쳤지만, 飛鳥(아스카)라는 말을 이해하고 보면 그보다 훨씬 이전인 4세기 무렵부터 백제인에 의해 飛鳥시대가 열린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비조, 즉 나르는 새인데, 이를 일본에서는 아스카로 읽는다. 왜 그렇게 읽어야 하느냐고 일본인들에게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한다. 다만 '일본서기' 등에 그렇게 읽도록 쓰여 있다고 한다.

 아스카를 살펴보면 이 말도 우리 말임에 틀림없다. 奈良顯에는 백제인들이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며 살았다는 明日香村이 있 다. 이 명일향을 '아스카'로 읽을 뿐 아니라 그곳에는 '아스카(飛鳥)'신사(神社), '아스카(飛鳥)'궁적(宮跡) 등 '아스카'란 이름 이 붙은 유적이 적지 않다. 여기 아스카에 '명일(明日=아스)'이란 한자가 쓰여지고 있는 것을 보면 깜깜한 밤과 암흑시대에 갑자 기 외래 선진문화의 충격을 받아 원시 왜인사회가 '오랫동안의 잠에서 깨어나 새가 아침에 비상하듯이 명일을 맞이했다'는 뜻으 로 썼고, 그 시대를 바로 '아스카시대'라고 했음에 틀림없다.

 그렇게 보는 것은 우리 말에 처음을 뜻하는 '아시'가 있고, 동녘에 해가 솟을 무렵을 '아침', '아적'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사'(朝), '아사개'(朝明)가 됐다. 그리고 동쪽을 '아쓰마'라고 한다. '아사히'(朝日)는 우리말 '아시해' 가 건너간 것이듯이 '아스카'는 '아시께', '아적'에서 간 말이다. 따라서 飛鳥시대는 명일시대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일본서기'와 '고서기'의 기록을 봐도 4세기(근초고왕시대)무렵부터 백제로부터 운송과 교통을 위한 종마(種馬)가 들어갔는 가 하면, 글이 없던 왜인사회에서 왕인(王仁)박사에 의해 학당이 설립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칼, 거울 등 문물은 물론 제철 기술자와 대장장이, 술을 빚는 기술자, 옷감짜는 여자 등 선진기술 보유자들이 한반도로부터 쏟아져 들어감과 동시에 여기저기에 한인농업기술자에 의해 한인지(韓人池)가 구축되면서 쓸모없던 왜지의 황무지가 기름진 논밭으로 변해갔다. 특히 칠지도와 함께 고도로 발전한 제철기술이 들어가서 1천6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존이 가능한 최상품질의 철제품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혁명 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한인의 왜열도 개척은 그 이후에도 더욱 가속화 되었다.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시대부터 시작해서 7세기 백제가 한반도에서 사라질 때까지 무려 3백년 동안 왜열도를 개척, 통치하며 , 원시 왜인사회를 문명국가로 성장시켰다. 百家濟海(백가제해)의 국력으로 중국 일부와 왜열도를 장악했던 백제를 본국으로 삼 은 한왜통합국가가 신천지였던 열도에 존재했던 것이다.

 일본왕실과 지배층의 계보를 정리한 '신찬성씨록'을 분석하면 고대 왜열도역사의 실체가 밝혀진다. 역사의 주인공들을 추적 하면 바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한인들이었으며 백제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찬성씨록'은 한반도에서 건너 간 지배자들의 실체를 정리한 것이며, '일본서기'는 본국(백제)와 왜열도에서 전개된 개척-통치사를 담고 있는 것이다.

 천손이 무지개같은 다리(天浮橋)를 타고 내려왔다는 설화적 장면은 한반도 남쪽에서 대마도를 거쳐 여러 개의 작은 섬들을 지나 왜열도에 상륙한 한인들의 이주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왕인박사의 문명전파도 왜열도에 정착한 백제계의 후손들이 본국의 문화를 수입하기 위해 왕인박사를 모셔갔으며, 이런 사실은 '일본서기'와 '신찬성씨록'에서 확인된다.

 '신찬성씨록'을 통해 그 당시 아신왕 옹립을 위해 바다를 건너온 한인들의 성씨를 추적한 결과 그들의 시조가 모두 백제왕실 이나 귀족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됐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應神이나 國神들도 그 뿌리는 백제계에 두고 있으며, 고대 왜 열도에서의 왕권교체란 백제계 이주민 집단 사이의 권력재편 과정에 불과하다. '신찬성씨록'을 보면 '일본서기'에 천왕으로 등재 된 인물들이 물부계(物部系)와 대반계(大伴系)로 크게 나뉜다. 물부계로서 '일본서기'에 복중(復中)이나 인현(仁賢)으로 기록된 인물은 바로 백제의 근초고왕이며, 근구수왕은 수인(垂仁), 경행(景行) 등의 인물로 분화되어 있다. 이처럼 한 인물이 여러 한자 로 표기된것은 백제사를 억지로 왜사로 변형시키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위장한 수법이다.그러나 물부계의 가계도표를 따라가면 근 초고왕에서부터 시작해서 침류왕을 거쳐 의자왕까지 연결된다. 그 사이로 아신왕 옹립을 위해 신묘년 바다를 건너온 무내숙니(武 內宿彌)라는 백제계집안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천무(天武)의 선조가 된다.

 이와 함께 백제가 3백년 동안 왜열도를 통치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유물이 현재 일본 석상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七支刀) 등 상당수에 이른다. 그들 스스로 만든 문헌자료와 땅속 깊이 묻혀있던 유물들이 이런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 이다.

 6. 금당벽화

일본 미술의 최고의 정점인 호류지(法隆寺)는 쇼토쿠 태자의 지시에 의하여 삼국의 조불사(造佛寺)들이 건립한, 세계에서 가 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이 호류지의 금당(金堂)에는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한 고구려인 담징을 위시한 한반도계 화공집단에 의하여 그려진 12면 벽화가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계적 문화재인 이 금당벽화는 1949년 1월 내부보수공사 도중에 전기취급 부주의로 화재가 일어나서 소 실되고 말았다.
현재 호류지 금당에 있는 12면 벽화는 소실 이후에 일본인 화가들에 의해서 복원 제작된 것이다. 일본은 이 사건을 대단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서 '문화재 보존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우리 한반도 미술문화의 정수이기도 한 금당벽화는 그 어디에서도 확인할 길이 없게 되었다. 실로 우리에게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7. 일본에 있는 주요 한국문화재

고대의 국적이 불분명한 문화재를 제외하고라도 일본에 있는 한국문화재는 문화재관리국조사만으로도 2만 6천여 점에 이르고 있으며, 아직 조사가 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어느 누구도 그 숫자를 명확히 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 중에는 한일관계의 역사에서 선린외교의 일환으로 일본측의 요청으로 건너간 것도 있지만, 상당량은 임진왜란과 일제시 기의 조직적인 약탈, 그 이후 방치된 문화재의 도굴, 도난 등으로 인해 불법적으로 반출되었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주로 서적, 불화 등의 약탈이 자행되어 후지미테이(富土見亭)문고, 스루가(駿河)문고 등에 고려사절요(高 麗史節要) 등 우리나라에도 남아있는 것이 없는 방대한 양의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고 일본 각지의 사원 및 박물관 등에는 80여점 의 고려불화, 200여점의 조선불화 등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50여 점의 종(鐘), 일일이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도자기, 조선시대의 회화 등을 비롯하여 아직 조사가 수행되지 않은 방대한 양의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있다.

한일고대사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물의 하나가 현재 일본 나라현(奈良顯) 천리시 석상신궁(石上神宮)에 있는 한자루 의 칼이다. 이 칼의 이름은 칠지도(七支刀)이고, 그 형상은 오랜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상징한다.

 칠지도는 날 길이 74.8cm, 꽂이 9.1cm에 가지가 6개 있고, 앞에 있는 창끝같은 날까지 모두 7가지가 되는데, 철제로써 글씨 를 금으로 상감(象嵌)하였다. 이 칼에 대하여 신공기(神功紀) 52년 9월조에 '백제사자저구저등 소헌칠지도(百濟使者久 等 所獻七 支刀)'라 기록되어 있다. 이 칠지도에 대한 기록을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 찾아보면 '신공(神功)52년 백제의 구저(久 )가 칠 지도와 칠자경(七子鏡)을 비롯하여 각종의 귀한 보물(重寶)을 가져왔다' 하였고, 또한 '應神記'에도 '백제국주(百濟國主) 조고왕 (照古王)이 횡도(橫刀) 및 대경(大鏡)을 보냈다' 하여 백제 근초고왕때 이 칠지도가 왜에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1천6백년 동안 석상신궁에서 신물(神物)로 보존되어온 칠지도가 만들어진 4세기 후반 백제의 국력을 살펴보면 지나대륙(中國 )쪽으로는 요서(遼西)부터 양자강을 거쳐 유성(오늘의 廣西자치구 柳州의 柳城)까지 장악하고 있었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왜열도 는 백제왕족을 비롯한 백제인들이 대거 쇄도하고 있었다.

 백제에서 만든 칠지도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앞면 : '泰和四年 九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練鐵七支刀, ()僻百兵, 宜供供候王, ()()()()作,
뒷면 :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이 명문에서 '泰和四年'의 태화는 지나(중국)의 동진연호(東晋年號)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로 돼있지만, 이때 대륙까지 석권 하고 있던 백제가 하필 동진의 연호를 빌러썼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태화'4년(369)은 근초고왕24년, 백제가 사방을 크 게 아우르던 시기이다.

 다음 '()벽백병(()僻百兵)'에서 ()부분에는 희미하게 글씨가 보이는데, '출(出)'또는 '생(生)'과 닮은 글자로 보인다고 한다 . 그렇다면 문맥으로 보아 '개(豈)'로 읽음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리고 '벽(僻)'도 자전에서 보면 '피(避)'와 함께 통용할 수 있 는 글자이므로 이 명문을 '개피백병(豈避百兵)'으로 읽으면 '백병을 어찌 피하겠느냐'는 뜻이 된다. 이는 곧 백제의 군사적 위력 을 크게 과시하는 것이다.

 공공(供供)의 '공(供)'을 자전에서 찾으면 '급(給)'의 뜻과 함께 '봉(奉)'(받들음)의 뜻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공 공(供供)'은 '받들고 받들라'는 뜻이다. 그 다음 '()()()()작(()()()()作)'은 어떤 글자가 빠졌는지를 짐작할 수가 없지만, '백 제()세()(百濟()世())'는 '백제왕세자(百濟王世子)'로 읽는데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기생성음(奇生聖音)'은 '신령스럽게 태어난 샌님'이라는 뜻인데, 여기서의 '샌님'은 지금도 쓰지만 고대국가에서는 더 올린 경칭으로 사용됐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을 검토해서 다시 칠지도의 명문을 풀어 읽으면, '태화사년오월십일일병오정양'에 백번(百番) 이나 쇠붙이를 단야(鍛冶)하여 이 칠지도를 만들었다. 어찌 '백병'을 피하겠느냐. 마땅히 '후왕'을 받들고 받들라. 선사이래로 이와 같은 칼은 아직 없었다. 백제왕세자는 신령스럽게 태어난 샌님이다. 그래서 왜왕이 되는 것이고 그런 취지에서 이 칼을 만 들었다.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하라.

 이 칼을 1천6백여년동안 잘 보존해오고 있는 石上神宮은 백제근초고왕을 시조로 하는 물부수(物部首)로부터 연원이 시작한다 . 이 신궁은 물부씨(氏) 그 후손들인 삼(森=모리)씨들이 명치유신이후 일제시대를 빼고는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궁사로 신물인 칠지도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8. 문명의 전파

벼농사는 '문화의 영향'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벼농사에 익숙한 사람들의 직접적인 이주의 결과물이다. 벼농사의 일 본열도로의 전래에는 여러 설(說)이 있으나, 고대미(古代米)의 종류가 양쪽 모두 단립형(單立形)의 자포니카종이며, 농경과 관련 된 토기, 농기구 등이 한반도 남부 출토물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한반도 남부로부터 전파되었다는 설이 정설(定說)이다.

시가(滋賀)현 穴太유적에서는 오늘날 일본에서 사용하지 않는 7세기경의 온돌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의 온돌 사용자 는 물론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으로 추정된다.

나라(奈良)현 다카마쓰(高松) 고분벽화 중 동측북벽의 여자군상은 고구려 쌍영총, 수산리벽화 등에서 표현된 여인들의 복 식이나 그 표현수법과 흡사하다. 당시 동북아시아 지배계층의 의복문화를 엿볼 수 있으며, 일본 고대복식에 끼친 한반도의 영향 을 느끼게 한다.

1972년 3월 나라(奈良)현 아스카(飛鳥)촌에서 발굴된 수장급 고분인 다카마쓰(高松)총에서는 극채색의 벽화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발굴 조사단은 황급히 발굴을 중단하고 그 실체의 공개를 한사코 거부하다가 슬그머니 발굴을 진행하였다. 이렇게 일본 인들이 발굴을 중단하도록 만든 원인은 이 고분의 벽화가 고구려 벽화와 양식과 내용이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점 때문이다. 피장 자의 신분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40대 텐무(天武)천황인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하고 있으며, 이는 일본 황실과 고 구려와의 관계에 대한 여러가지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일본에서 글자가 사용된 것은 공식적으로는 4세기 후반에 건너간 백제인(百濟人) 왕인(王仁)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준 것 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글자를 사용한 예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금석문이나 토기 등에 새겨진 것들에서인데, 여기에서 소개되는 칠지도(七支 刀), 이나리야마고분(稻荷山古墳)출토 쇠칼, 스다하치만신궁(隅田入幡神宮), 구리거울 등은 대표적인 고시대 글자사용의 예이다.
그런데 이 고대의 유물들은 모두 백제에서 만들어져 일본에 건너갔거나 일본 거주 백제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 다.
또한 이 유물들은 제작연대에 대한 해석 등 학자들간의 논란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칠지도(七支刀)는 거기에 새겨진 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가 좌지우지될 정도로 중요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메리카로 이주한 유럽인들이 자기 고향과 유사한 지명을 신대륙에 명명(命名)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으로 건너간 고대 한반도인들은 자신이 개척하거나 정착한 곳에 모국어로 된 지명을 붙였다. 이러한 지명은 고등안 많이 개칭되고 변하였지만 아직 도 일본 각지에는 한반도와 연관된 지명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지명은 그 땅 역사의 화석'이라 한다.
고려천(考慮川), 백제역(百濟驛)과 같이 삼국의 국가명칭이 오늘날까지 일본지명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 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도쿄(東京)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사이타마(埼玉)현, 히다카(日北)시에는 고구려 마을인 고마노사토(考慮鄕)가 있다 .

 이 마을은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의하면 716년 고마오잣코(高麗王若王)가 고마군(高麗郡)을 설치하고 황야를 개척하고 산업 을 일으키는 등의 치적을 쌓은데서 유래한다. 이 마을에는 고구려인들을 모신 사원인 쇼텐원(聖天院), 고마신사(高麗神社) 등이 있으며, 특히 고마역(考慮驛)앞의 장승은 이곳의 명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을 일군 고마(高麗)씨 일가는 간토(關東)무사들을 배출한 명가로서 오늘날까지 고구려인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계보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만주를 호령하던 고구려인의 후손이 이국(異國)일본에서 그 맥을 유지하며 일본 속의 또다른 한국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미야자키(宮崎)현 휴가(日向)시에서 서쪽으로 40Km지점에 백제마을 난고촌이 자리잡고 있다. 백제인의 흔적은 일본 고대사 의 중심지인 나라(奈良), 아스카(飛鳥)지역에 집중되어있지만, 백제멸망과 함께 건너간 백제왕족의 한 집단(禎嘉王)이 이곳 규슈 지역에 정착하여 오늘날까지 백제인으로서의 일체감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된 것이다.

9. 삼국계 고분과 유물

일본역사에서 고훈시대(古墳時代)로 분류되는 시기는 우리 역사에서 삼국시대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 삼국간의 치열한 항쟁 은 일본으로의 이주를 촉진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그 결과 선진문물의 전파를 가져오게 되었다.
일본 각지에서 발견되는 고분의 양식과 부장품들의 상당수가 당시 한반도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데, 이는 그 고분에 묻힌 사 람과 한반도 이주민과의 밀접한 관계, 혹은 그 피장자가 한반도인 그 자체임을 반증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니쟈와센총(新澤千塚) 126호분과 후지노키(藤ノ木)고분은 출토품들이 삼국의 그것과 확실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를 통해 고대 한일교류의 구체적 근거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1962년 발굴 조사된 니쟈와센총은 한반도계통의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으며, 고대 삼국과 관련이 깊은 나라(奈良)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 집단의 무덤군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기관인 가시하라 고고학연구소는 특히 126호분 에서 신라, 가야, 백제계의 특성을 띠고 있는 유리공예품 등의 유물이 출토된 점에 미루어 이 고분을 5세기 후반 삼국출신 귀족 의 무덤으로 분류하고 있다.

나라현 이카루가(班鳩)에 있는 후지노키((藤ノ木)고분은 1985년 최초 발굴 당시부터 한, 일 양국 학자간에 이 고분의 성격 을 둘러싸고 활발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 후 총 3차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안장가리개나 관장식 등의 부장품 이 삼국계통의 유물이 확인되어, 피장자가 삼국계통이주민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에서 출토되는 고대 유물은 그것의 원류를 추적하면 삼국과 가야에까지 이른다.
5세기를 전후로 하는 시기에 일본에서 발견된 금속제 유물은 한반도에서 직접 건너간 경우가 대부분이고, 후에 일본에서 금 속생산이 시작되면서 한반도 기술의 영향하에 제작된 것이 또한 대부분이다.
특히 일본에서의 마구(馬具)의 출현은 그 자체가 한반도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물새모양 토기 등과 같은 토기(土器), 관(冠 ), 갑주(甲胄) 등 거의 대부분의 고대 유물의 양식이 당시 한반도 출토유물과 유사성을 띤다.
당시의 교통이나 여러가지 여건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고도의 기술은 간단히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유물과 함께 묻힌 이의 신분은 적어도 한 집단의 우두머리 격이라고 한다면 고대의 한일관계에서 선진기술 전파의 주인공 또는 일본 상층계 급의 집단이 어떤 인물들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철기(鐵器) 및 금동제품(金銅製品)의 생산기술은 한반도 이주민들의 새로운 기술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당시 금(金)이 일본에서 생산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 볼 때, 귀걸이 등의 금제품은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것을 가져온 경우 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마구(馬具)의 등장은 말을 타던 한반도 이주민들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우리나라 가야지방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 교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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