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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백제 - 해양제국의 건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 역사에서 백제는 소홀히 다루어지거나 그냥 방치되고 있었다. 그나마 1,300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야 놀라운 역사적 사실과 함께 사라진 백제가 다시 나타나고 있다. 특히 523년 5월 무녕왕(武寧王)이 죽자 만들어진 무녕왕릉이 1971년 발견됨과 함께 백제의 실체가 비로소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하나하나 밝혀지는 백제사를 통해 우리 정신의 지평을 넓히고 활발한 개척정신과 해양민족의 면모를 가다듬자.

1. 백제는 '해양제국'이었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백가제해(百家濟海) 즉, 만국과 해양은 제패한다'는 뜻을 담아 백제라 하였고 국가가 존속하는 내내 바다를 따라 뱃길을 따라 해외영토를 개척한 나라였다. 그리스·마케도니아 등 해양을 제패했던 지중해 국가들이나 영국과 네덜란드를 보라. 본국의 영토는 작았지만 짧게는 1세기에서 수 세기에 걸쳐 해상권을 장악하고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이렇듯 백제의 활동공간도 상식을 뛰어 넘는다.

해양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항해술과 조선술은 기본이다. 항로를 알고서야 바다로 나설 수 있으며 해도(海圖)나 바다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한다. 또한 먼거리도 갈 수 있는 원양선·무역선이 있어야 한다. 한국배의 원형으로 손꼽히고 있는 백제선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250m의 길이에 150명이 승선할 수 있는 규모의 배가 나온다. 이만한 실력이라면 동남아는 물론 인도양까지도 능히 갈 수 있는 것이다.

2. 백제는 본국의 임금(王)을 정점으로, 담로를 통해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담로란 말은 '다물 즉 옛 영토를 되찾는다'는 말에서 나와 담장을 뜻하는 '담'자와 나라를 뜻하는 '라'자를 합성한 담라로 변했고 이를 다시 한자로 적으면서 담로로 바뀐 듯하다. 그래서 '담을 두른 영지', '새로 개척한 영토(정복지)'를 뜻하는 말로 쓰였는데 해양국가 백제가 다스리던 영토를 왕족이 직접 지배하는 지방 지배체제였다.

 이제 우리가 22담로의 영토와 역사를 다시 찾고자 한다면 그 소리(발음)가 남아있는 흔적을 따라가야 한다. 뜻은 소리에 담겨있는 채 이두식 표기로 한자를 통해 전해왔기 때문이다. 한반도에는 대문리(다문리, 다물리)·대수리(수=물)·다문리·탐라·대마도, 일본에는 다마다(玉名, 남나·탐나), 중국남부에는 담수만·담수도·담수갱, 대만에는 담수행·담수사 등지가 담로가 다스린 지역으로 밝혀졌으며 필리핀·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지에까지 넓게 펴져 있다.

3. 백제인의 활약상이 일본 역사의 기원 및 초반부에 대한 진정한 모습에 다름 아니다. 일본서기는 신화의 형식을 빌어 음(陰)과 양(陽) 두 신 사이에서 인간이 나고 천지창조가 이루어졌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그 인간이 담로(淡路)다. 즉 백제의 담로는 일본의 지도자이자 개척자이자 정복자였던 것이다. 실제로 큐슈에는 4 내지 7C에 걸쳐 청동거울이 33개가 나왔다. 이는 백제 왕급 담로의 무덤에서 나오는 지위 및 신분의 상징인 만큼 백제의 세습적 지배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왕급 지배자에 의해 다스려진 증거인 것이다. 일본서기에 최초로 등장한 나라 「日向の國」도 일본열도 최고(最古)의 흔적이자 최초의 국가로서 백제계의 소국이었다.

이후로도 큐슈·오사카·나라 등지로 이어지는 백제의 일본경영사는 계속된다. 아스카 조상신으로 추앙하는 인물도 5C에 활약했던 실존 인물로서 백제의 곤지왕(백제 개로왕의 동생. 아스카베 신사의 주인)이다. 아스카를 일으킨 담로로서 훗날 백제의 24대 동성왕, 25대 무령왕이 각각 그의 둘째, 첫째 아들이다. 당시 백제 본국은 고구려에 패퇴하여 개로왕이 참수되고 문주왕은 웅진(熊津. 곰나루) 천도를 단행한다. 그리고 문주왕은 곤지왕과 연합했으나 결국 귀족에 피살당하고 이어 임금에 오른 동성왕도 피살되면서 곤지왕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형인 사마왕(斯麻王. 무녕왕)이 본국왕인 백제왕에 오르면서 정국은 안정된다. 이처럼 당시 일본열도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백제의 영토이자 일부였던 것이다.

큐슈 다마나시에 있는 6 또는 7C 경 일본 최고·최대 유물인 후나야마 고분에서도 횡혈식 석실고분 형식에다가 백제계 유물인 금동신발과 금동관이 나왔다.

전방후원식 고분은 앞은 긴 사각형으로 네모지고 뒤는 둥근 형으로써 하늘에서 보면 열쇠모양 비슷하다. 이 양식은 세계에서 백제에만 보인다. 전남 영암 등 옛 백제지역에서 가장 원형적인 형식이 나오면서 큐슈→아스카 지역으로 옮아 갔다. 즉 오사카·나라 일대까지 퍼져나간 것이다. 특히 미네가즈카 고분은 백제인 고분 중에서도 일왕가(천왕가) 못지않은 위세를 자랑한다. 물론 그 무덤의 주인은 일왕 못지않은 세도를 누린 백제계 인물일 것이다. 또한 아스카 천총이라 불리는 1천여기의 고분도 횡혈식으로써 백제 것이다.

훗날 백제멸망 후에는 큐슈 미야자키현 난고촌에 정가왕(미카도 신사에 모셔진 백제왕) 일족이 도착했고 기조정에는 그의 맏아들 복지왕이 자리잡는다. 그러나 신라군과 신라계 추격군이 오자, 이에 저항하던 정가왕과 복지왕은 결국 전사한다. 지금도 다노정(쎈켄 신사에 모셔진 백제왕) 등 큐슈 여러 곳에 백제왕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얼마전에 정창원(正倉院)을 재건축하고 스스로 백제마을이라고 부르고도 있는 등 백제에 관한 여러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당시 백제인들이 단순히 교역하고 체류하던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 곳을 정복하고 지배한 지배자였고 주인이었다.

4. 백제가 다스린 대륙지역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백제는 중국 대륙에도 영토를 개척했으며 요서와 진평을 대륙치소로 삼았다. 요서는 유성(柳成. 요령성 조양시)과 북평(北平. 하북성 노령시)사이의 영토였다. 동성왕대에는 위의 동맹요구를 묵살하고 위와의 488년, 490년 2차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대륙에서도 확고한 기반을 구축했다. 진평은 광서장족 자치구 일대인데 지금도 백제향(百濟鄕. 남녕[南寧]지역)과 백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실 장족은 한족도 동남아족도 아니다. 우리와 너무 비슷하다.특히 사람모습은 구분할 수 없게 같다. 부뚜막, 맷돌(그중에서도 아래로 즙이나 물이 흐르도록 홈을 파놓은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고, 특히 백제지역에 많음), 외다리방아(전라도·일본 등 백제권에만 나옴)가 있다. 그들도 그들 조상이 아주 먼 옛날 장사하러 또는 전쟁 때문에 산동지방에서 왔다고 한다. 산동지역이 어딘가. 당시 이 일대 해안 지역은 백제인들을 비롯한 다수의 우리 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던 지역이 아닌가.

또한 백제는 요서와 진평 사이에 있던 지역도 대륙해안을 따라 점령하였으며 광양·광릉·청하·성양·동청주 태수 등이 다스렸다.

그리고 우현왕·좌현왕 등 숱한 백제왕이 등장하는데 다들 대륙지역을 다스리던 담로다. 백제는 이후 본국을 중심으로 대륙지역은 '서조(西朝)', 일본은 '동조(東朝)'라 하여 직접 통치하는 구도를 통치구조의 근간으로 삼았다.

5. 남방지역으로도 백제인의 발길은 이어졌다. 뱃길이 가는 데로 어디까지든 갔던 것이다. 본국이 멸망하자 백제의 부흥운동을 일으킨 흑치상지(黑齒常之)는 원래 부여씨였지만 남방지역의 왕(담로)으로 봉해지면서 흑치로 그 성씨를 바꾼 것이다. 또한 554년 부남(캄보디아)의 노예를 일본에 선물을 주고, 565년 탑등(북인도 지방 양탄자) 선물, 641년 곤륜(인도차이나 일대) 관련 기록이 나오는 등 남방 지역에서도 백제인의 해상활동은 눈부시다.

6. 그러나 663년 백제가 주유성(州柔)마저 함락당하자 완전 멸망했고 대륙지역에 있던 백제인들은 돌궐·말갈지역으로 흩어져 갔고 백제왕의 적통이었던 부여숭(崇)도 본국에 돌아가지 못했다. 일본은 670년 국호마저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새출발을 하기 시작했고 광서지역·동남아 지역의 백제인들도 망국의 한을 가슴에 품은 채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300년도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우리의 소중한 역사를 가벼이 할 수는 없다. 더욱이 너무나 위대했던 해양제국 백제라면 다시금 바로 세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백제의 담로 위치도, 일본에서의 백제 관련행사 일정표 등을 작성하여 해양국가 백제의 역사를 우리 생활의 일부로 소중히 삼아야 한다. 항해를 꿈꾸는 대학생이라면 그 길을 따라 가보기 바란다.

'역사는 전설과 신화의 파편으로 흩어지고 남는다.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진실을 파헤쳐 가노라면 역사와 만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