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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백제(百濟)

 

1. 개설

 

 

백제는 비류(沸流), 온조(溫祚), 구태(九台)가 건국한 나라의 이름이다.

비류는 어머니 소서노(召西努)와 같이 전에 고구려(高九黎)의 수도이던 골본(忽本:심양)에서 살다가 B.C 42년에 혼하.태자하 하류에 위치한 패(浿).대(帶) 지역으로 이동하여 그 곳에서 많은 재물을 모은 후 재물로 고주몽의 입국(立國)을 도왔다. 그러나 고주몽이 비록 적자는 아니지만 맏이(伯)인 비류를 태자로 삼지 않고 전에 골본(忽本)에 있을 때 예씨(禮氏)와의 사이에 낳은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자 비류는 이에 불복하여 고주몽이 죽은 B.C 19년에 패(浿).대(帶) 지역에서 스스로 임금의 위(位)에 올랐다.

이때 비류는 유리가 천제(天帝)의 아들을 상징하는 글자로 고(高)자를 사용하자 비류는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伯)인 자기에게 있다는 뜻으로 백(伯)자를 사용하였고, 임금의 명칭으로 유리가 제(帝)자를 사용하자 비류도 역시 제(帝)자를 사용하였다. 즉 비류가 스스로 제왕(帝王)의 위(位)에 오른 후 칭한 원래 명칭은 백제(伯帝)였다. 그러나 아무도 비류를 따르지 않아 비류는 유리와의 정통성 싸움에서 패하였다. 그 결과 고주몽고구려 지역 대부분은 유리가 장악하였고, 비류는 근거지인 패.대 지역만 장악하였다.

온조는 비류가 B.C 19년에 패.대 지역에서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랐을 때, 아무도 비류를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후환을 걱정하여 B.C 18년에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한반도로 남하하여 한수(漢水) 북쪽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온조(溫祚)로, 수도 명칭을 위례성(尉禮城)이라 불렀다.

고대말 온(百)은 단순히 100이라는 뜻이 아니고 아주 많다는 뜻이고, 조(祚)는 천자(天子)의 자리를 뜻하므로, 온조는 온(百)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帝)이라는 뜻이다. 즉 온조(溫祚)는 백제(百帝)와 같은 뜻이다. 또 위(尉=하늘에 있는 해 지칭)는 천제(天帝)를 뜻하고 례(禮)는 무리를 뜻한다. 즉 위례성은 천제의 아들 무리가 살고 있는 성이라는 뜻이다. (참고:원래 무리라는 뜻으로 사용된 한자는 "黎" "與"자였으나, 때로는 "離" "禮"자도 무리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 高離.高禮.高黎=高麗).

이때 온조가 백제(百帝)라 칭하지 않고 온조라 칭한 것은 형 비류가 칭한 백제(伯帝)와 같은 발음을 피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온조국(溫祚國)은 B.C 6년에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가 보낸 5무리의 기마부대(五虎)에게 위례성이 점령당함으로써 궤멸되었다.

위례성이 점령당하자 온조는 온조국의 유민들을 데리고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다급한 처지에 빠진 온조는 한수 이남을 다스리고 있던 홍성 금마 마한(馬韓)을 찾아가 마한으로부터 마한의 동북 땅 1백 리를 할양 받아 금마산에서 마한의 후국(侯國)인 십제(十濟)를 건국하였다.

이 십제라는 말은 10명이 한강을 건너와서 세운 나라라는 뜻이 아니고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이 한강을 건너와서 세운 나라라는 뜻이다. 그 뒤 온조는 힘을 길러 홍성 금마 마한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후부터 다시 위례(尉禮)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비류백제가 멸망하자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에서 백제(百帝)로 바꾸었다.

그 후 A.D 205년에 장춘 방면의 부여왕 위구태(尉九台)가 대방군(지금의 황해도: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대방고지로 적혀 있다.)으로 이동하여 나라를 세운 후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하였는데, 이 나라 이름은 부여 무리들이 세운 나라라는 뜻인 이국(利國), 또는 남쪽으로 이동한 부여 무리라는 뜻인 남부여(南夫餘), 많은 사람들이 건너와 세운 나라라는 뜻인 백제(百濟)였다(참고:광개토왕비문에는 구태백제가 "利殘國" 또는 "倭"로 적혀 있고, 환단고기에는 구태백제와 대화왜가 모두 "利國"으로 적혀 있다).

이때 위구태가 나라 이름을 백제(百帝)라 부르지 않고 백제(百濟)라 부른 것은, 위구태의 입국(立國)을 도와준 공손씨(公孫氏)를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온조백제는 백제(百濟)의 1개 후국(侯國)으로 변하여 백제(百帝)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였다.

본서는 백제 명칭의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일반 교과서에 적혀 있는 대로 백제(百濟)로 적는다.

 

 

2, 건국시조

 

 

삼국유사에는 백제(百濟)의 시조가 온조(溫祚) 1명으로 적혀 있고, 환단고기에는 비류(沸流), 온조(溫祚) 2명으로 적혀 있으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류(沸流), 온조(溫祚), 구태(九台) 3명으로 적혀 있으나, 저자인 김부식(金富軾)님도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적혀 있다.

 

 

가. 비류백제

 

비류왕

 

나. 온조백제

 

온조왕-다루왕-기루왕-개루왕-?

 

구태백제의 후왕인 온조백제왕

 

초고왕-구수왕-고이왕-책계왕-분서왕-비류왕-계왕-근초고왕-근구수왕-침류왕-진사왕-아신왕-전지왕

-구이신왕

 

다. 구태백제

 

구태-불명-여구-여휘-여영-비유왕-개로왕-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성왕-위덕왕-혜왕-법왕-무왕

-의자왕

 

 

3. 비류백제

 

 

1). 건국지 및 수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류(沸流)가 패(浿).대(帶) 2강을 건너 미추골(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고 적혀 있다. 이 미추골의 미(彌)는 용(龍)을 뜻하는 말로서 용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뜻한다. 그리고 추(鄒)는 조(祖) 또는 고(古)와 같은 뜻이고, 골(忽)은 고을을 가리킨다. 따라서 미추골(彌鄒忽) 또는 미달(彌達)은 특정한 지명이 아니고 천제의 아들을 칭한 사람이 있는 곳 즉 수도라는 뜻이다.

비류와 소서노(召西努)는 소서노의 부(父) 연타발(延타勃)과 같이 전에 고구려(高九黎)의 수도이던 골본(忽本:일명 고구려, 현재의 심양)에서 살다가 B.C 42년에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심양 옆을 흐르는 혼하를 따라 하류로 내려와 바다와 가까운 패.대 지역에 터를 잡고 많은 재물을 모아 고주몽의 입국을 도우다가 고주몽이 고주몽고구려의 대통을 맏이인 자기에게 주지 않고 유리에게 주자 고주몽이 죽었을 때 패.대 지역에서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랐다.

위 패(浿).대(帶) 지역은 패수(浿水)와 대수(帶水)가 인접해서 흐른 태자하(太子河)와 혼하(渾河) 하류이다. 따라서 비류백제의 미추골(수도)은 태자하(패).혼하(대) 하류에 있었다.

일부 사학자들은 비류백제가 건국된 패.대 지역은 요서(遼西)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구태백제가 A.D 313-316년경에 요서와 중국동해안으로 진출하여 그 곳에 분국을 둠으로써 중국의 사서에 요서에 백제가 있었다고 적혀 있자 백제가 처음부터 요서에서 건국된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또다른 일부 사학자들은 비류백제가 건국된 패.대 지역은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라고 주장하였다. 전한서(前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패수, 대수는 나라군(樂浪郡) 지역을 흐르는 강이다. 그러나 한반도에 나라군의 속현이 처음 설치된 시기는 A.D 44년이므로, 비류백제가 건국된 B.C 19년에는 한반도에 나라군의 속현이 없었다. 따라서 비류백제가 건국된 패.대 지역은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 지역이 아니다.

위 비류(沸流)라는 명칭은 [물+불]+ [흐른다]는 뜻이 합쳐진 것으로, 물은 혼하를 뜻하고, 불은 자신을 천제의 아들이라 칭한 것이며, "流"는 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 왔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하늘에 있는 해를 불이라 불렀는데, 하늘에 있는 불은 하늘나라 임금(천제)을 뜻하였고, 지상에 있는 불은 천제의 아들을 뜻하였다. 즉 비류는 물 옆에 살던 천제의 아들이 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는 뜻이다.

사서에는 비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나와 있지 않으므로, 비류가 고구려(북부여) 6대 고무서 단제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비류가 고구려(북부여)의 임금을 뜻하는 "弗(불)"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沸流"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진짜든 가짜든 간에 비류가 고구려(북부여) 6세 고무서 단제를 승계하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비류가 고주몽의 적자가 아니라서 고주몽으로부터 고주몽고구려의 대통을 이어받지 못하자 단지 맏이라는 이유 만으로는 유리와의 정통성 싸움에서 이기기 어렵다고 보고 고구려의 정통성까지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비류는 "伯帝"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자기가 맏이(伯)이기 때문에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덧붙여 "沸流"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고구려(북부여)의 정통성까지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2). 건국 경위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서 비류백제의 건국 경위를 살펴본다.

 

「연타발(延타勃)은 졸본(卒本)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曷思)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富)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서 창업입도(創業立都)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高朱蒙) 성제(聖帝)가 북옥저(北沃沮)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訥見)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流亡民)을 초무(招撫)하고 왕사(王事)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坐原)에 봉받았다.

기묘년(B.C 42년) 3월에 (비류와 소서노는)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辰).번(番)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帶水)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於瑕羅)에 책봉했다. 고주몽이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琉璃)가 오면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는 장차 두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다.

(어하라) 13년(B.C 19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자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후략」

 

위 환단고기 고구려본기 문구에 의하면 비류와 소서노는 연타발과 같이 골본(忽本)에서 살다가 B.C 42년에 패.대 지역으로 이동하여 B.C 32년경에 많은 재물을 모은 후 재물로 고주몽을 섬겼다. 그 공으로 소서노는 고주몽으로주터 패.대 지역을 다스리는 어하라(於瑕羅:백제 왕 칭호 어라하의 오기?)에 책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주몽은 비류를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이는 고구려의 정통성 때문이다.

고주몽은 B.C 59년에 고구려 6세 고무서단제의 딸과 결혼하고 다음해 B.C 58년 10월에 고무서단제가 죽을 때 유언에 의하여 사위 자격으로 고구려의 대통(大統)을 이었으나, 골본(忽本)에 있던 무리들이 고주몽을 죽이려 하므로 고주몽은 이들을 피하여 비류수상류로 도망가서 고주몽고구려를 세웠다.

고주몽은 비류수상류로 도망가서 고주몽고구려를 세운 후, 분열된 고구려 무리들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고주몽고구려왕이 고구려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보고, 소서노의 몸에서 난 비류를 태자로 삼지 않고 고무서단제의 딸 예씨(禮氏)의 몸에서 난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비류는 고주몽의 이러한 조치가 고주몽을 도와 준 자기들을 배신한 것이라 생각하고, 고주몽이 죽었을 때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인 자기에게 있다며 비류의 근거지인 패.대 지역에서 스스로 고주몽고구려의 제위(帝位)에 올랐다. 그러나 아무도 비류를 따르지 않아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은 유리가 차지하였고, 비류의 통치력이 미친 범위는 비류의 근거지인 패.대 지역에 국한되었다.

 

 

3). 비류백제 역사

 

 

환단고기나 삼국사기에는 비류백제의 건국경위만 간략히 적혀 있을 뿐 비류백제의 역사나 멸망시기는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는 비류백제의 멸망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다.

 

「온조왕 37년(A.D 19년) 한수(漢水)의 동북 부락이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주몽)고구려로 도망해 가고 패(浿).대(帶) 사이는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대무신왕 2년 봄 정월 백제민 1천여 호가 와서 항복하였다.」

 

위 문구는 비류백제가 멸망한 것을 적은 내용이다.

 

A.D 19년경은 고주몽고구려가 A.D 14년에 태자하(太子河) 중.상류에 거주한 양맥(梁貊)과 심양(沈陽)에 설치된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점령한 후 요동반도 전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할 때이다. 이때 패.대 지역에 살고 있던 비류백제 무리들은 고주몽고구려가 점령한 태자하 중.상류 지역으로 도망가서 고주몽고구려에게 항복하였다.

비류백제가 멸망하자 비류는 남은 유민들을 데리고 바다를 통하여 마한(馬韓)의 미추골(彌鄒忽)로 이동하였다. 이 미추골은 홍성(洪城) 금마(金馬)와 가까운 아산만 연안에 위치한 아산군 인주면이다. 그러나 이 시기는 홍성 금마 마한이 멸망한 후라서 비류는 땅을 할양받지 못하였다. 이에 비류는 온조의 도읍지가 자리잡히고 백성들이 안락한 것을 보고 뉘우침 끝에 죽고 그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가서 온조에게 귀순하였다.

[참고: 일부 사학자들은 비류가 죽었을 때 비류백제가 멸망하지 않고 비류의 후손들이 온조백제 남쪽에 비류백제를 세웠고, 이 비류백제는 요서와 일본열도로 진출하는 등 강국이 되었다가 광개토왕에게 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여 응신조를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사서의 문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으로, 구태개제와 비류백제를 혼동한 것이다.]

 

 

4. 온조백제

 

 

1). 건국지 및 수도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백제의 건국지가 금마산, 위례성, 하남위례성 등으로 적혀 있다.

 

「옛날에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居世)가 발흥하고 이에 백제(百濟)가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다.」三國遺事

「고전기(古典記)를 상고하면 이렇다.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前漢) 홍가(鴻嘉) 3년(B.C 18년)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컬었다. 온조왕 14년 병진(B.C 5년)에 한산(漢山)으로 도읍을 옮겨 389년을 지나 13대 근초고왕 함안(咸安) 원년(A.D 371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취하고 북한성(北漢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또 105년을 지나 22대 문주왕 즉위 원휘(元徽) 3년(A.D 475년) 을묘에 이르러 웅천(熊川)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 했다.」三國遺事

「미추골(彌鄒忽)은 인주(仁州)이고, 위례성(尉禮城)은 지금의 직산이다.」三國遺事

「전략.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를 띠고 동으로 높은 산을 의거하고 남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로 큰 바다가 막혔으니 얻어 보기 어려운 천험 지리의 형세인지라 여기에 도읍을 마련하면 좋지 않습니까..중략..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尉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보필을 삼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는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B.C 18년)이었다.」三國史記 百濟本紀

 

삼국사기 백제본기와 환단고기 고구려본기를 분석하면 온조가 온조국의 처음 수도로 사용한 위례성은 한강 북쪽에 있던 성이고, 그 뒤 온조가 홍성 금마 마한으로부터 마한의 제후로 봉 받은 후 십제국의 임시 수도로 사용한 성궐은 홍성 금마와 가까운 곳(?)에 있던 성이고, 그 다음 해에 에 옮긴 하남위례성은 지금의 경기도 광주나 하남시 부근에 있던 성이다.

 

 

2). 건국경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적혀 있는 온조백제의 건국경위는 아래와 같다.

 

「백제 시조는 온조왕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이라 한다. 북부여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로 왔다. 부여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서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다. 얼마 안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요 다음은 온조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적에 낳은 아들이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오간, 마려 등 열 사람의 신하와 더불어 남으로 떠나니 그를 따르는 백성이 많아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로 거처를 정하려고 하니 열 사람의 신하가 간하는 말이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으로 한수(漢水)를 띠고 동으로 높은 산을 의거하고 남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로 큰 바다가 막혔으니 얻어 보기 어려운 천험.지리의 형세인지라 여기에 도읍을 마련함이 좋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고 그 백성을 나눠 가지고 미추골(彌鄒忽)로 가서 사니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보필을 삼고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때는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B.C 18년)이었다. 비류는 미추골이 토지가 습하고 물맛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어 돌아와 위례성(尉禮城)을 보니 도읍이 자리잡히고 백성이 안락하므로 드디어 뉘우침 끝에 죽으니 그 백성이 다 위례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온조가 처음 올 때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로 성씨를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가 한강 북쪽에 온조국을 세웠다가 B.C 6년에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여 십제국(十濟國)을 세운 과정 중 일부가 생략되어 있다.

 

 

3). 온조백제 역사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가 한반도로 온 경로가 적혀 있지 않으나,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배를 타고 마한으로 왔다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기(溫祚紀) 중 1년조부터 13년 7월조까지는 온조가 한강 북쪽 어느 지점에 있을 때 역사이다. 이때 비류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 시기 비류는 패.대 지역에서 비류백제를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가 한강 북쪽에 세운 온조국(溫祚國)의 역사와 한강 남쪽에 세운 십제국(十濟國)의 역사 및 그 뒤 개명한 백제국(百帝國)의 역사가 함께 적혀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적혀 있는 온조백제의 역사를 살펴본다

 

「원년(B.C 18년) 여름 5월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2년(B.C 17년) 봄 정월 왕은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말갈이 우리 북쪽 경계와 연접하여 그 사람들이 날래고 간사하니 마땅히 무기를 수선하고 군량을 저축하여 막고 지킬 계책을 마련하라"고 하였다. 3월 왕은 족숙(族叔)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다 하여 우보(右補)의 직을 제수하고 병마를 위촉하였다.」

「3년(B.C 16년)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였다.」

「4년(B.C 15년) 나라(樂浪)에 사신을 보내어 인사를 닦다.」

 

온조기(溫祚紀) 4년조에 나오는 나라(樂浪)는 그 뒤에 "동으로 나라(樂浪)가 있고..후략"라는 문구로 볼 때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이고, 말갈은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에 거주한 기마족이다.

 

「8년(B.C 11년) 2월 말갈적(靺鞨賊) 3천명이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온조왕 4년(B.C 15년)에 온조가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에 사신을 보내어 인사를 닦은 후 한동안 말갈의 공격이 없다가 온조왕 8년(B.C 11년)에 다시 말갈(靺鞨)의 대부대가 온조국(溫祚國)을 공격하였다. 이는 온조가 성(城)을 만들고 그 성의 이름을 위례성(尉禮城)으로, 임금의 명칭을 온조(溫祚)로 부른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8년 7월 마수성(馬首城)을 쌓고 병산책(甁山柵)을 세웠다. 나라태수(樂浪太守)가 사람을 보내 "지난날에 서로 오가며 우호를 맺었는데, 갑자기 우리 땅에 가까이 와서 성.책을 세우니 혹시 침략의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며 항의하였다.」

 

위 문구는 온조국이 말갈의 공격을 막기위하여 나라(樂浪)와의 접경지대에 성.책을 쌓으니, 나라태수가 이를 보고 항의하였다는 내용이다. 위 나라(樂浪)는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이다.

 

「10년(B.C 9년) 사냥을 나가 사슴을 잡아 마한(馬韓)에게 보내었다. 말갈이 북침하였다.」

 

온조왕 10년에 온조가 마한(馬韓)에게 사슴을 준 것을 보면, 온조는 당시 한수 남쪽을 다스리고 있던 마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위 말갈은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에 거주한 기마족이다.

 

「11년(B.C 8년) 나라(樂浪)가 말갈을 시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였다. 7월 독산(禿山), 구천(狗川) 두 책을 신설하여 나라(樂浪)의 통로를 막았다.」

 

위 문구는 강원도 지방 나라왕(樂浪王)이 나라(樂浪)에 거주한 기마족을 보내어 온조국(溫祚國)을 자주 습격하므로 책(柵)을 신설하여 나라(樂浪)가 공격해 오는 통로를 막았다는 내용이다.

 

「13년(B.C 6년) 2월 서울에서 할멈이 사내로 변하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안에 들어왔다. 왕모(王母)가 돌아가니 나이 61세였다.」

 

위 문구는 할멈으로 지칭된 여인이 임금 행세를 함으로써 온조국의 조정이 시끄러워 졌을 때, 강원도 지방 나라왕(樂浪王)이 이를 틈타 5 기마부대를 보내어 위례성을 점령하였다는 내용이다.

 

「여름 13년 5월에 왕은 신하더러 이르기를 "국가가 동으로는 나라(樂浪)가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 강토를 침략하여 편할 날이 없는데, 하물며 궂은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아무래도 편안하지 아니할 것 같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한강의 남쪽을 순시한바 토지가 매우 기름지다. 거기에 도읍 하여 장구의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가을 13년 7월 한산 아래에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기었다.」

 

위 문구는 위례성(尉禮城)을 빼앗긴 온조(溫祚)가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였다는 내용이다.

 

「13년 8월 사신(使臣)을 마한(馬韓)에 보내어 천도(遷都)한 것을 알리고 드디어 경계를 그어 정하되 북으로 패하(浿河), 남으로 웅천(熊川), 서로 대해(大海), 동으로 주양(走壤)을 한계로 하였다.」

 

위 문구에는 사신을 마한에 보냈다고 적혀 있으나, 온조는 금마산(金馬山)에서 마한(馬韓)으로부터 마한의 동북 땅 100리를 할양 받아 마한의 후국(侯國)인 십제(十濟)를 세웠으므로, 사신 외에 온조 자신도 마한을 만나러 갔을 것이다.

온조기(溫祚紀) 13년조에 적혀 있는 십제국의 영역은 마한(馬韓)이 온조에게 봉해 준 마한의 동북 땅 100리보다 훨씬 넓은 영역이다. 따라서 이는 온조왕 13년 8월경의 십제국 영역이 아니고 뒤에 온조백제가 평안도 지방 나라(樂浪)와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의 영역을 꾸준히 점령하여 온조왕 38년(A.D 20년) 2월에 동으로 주양(走壤), 북으로 패하(浿河)까지 진출하였을 때의 영역을 소급해 적어 놓은 것이다.

 

「13년 9월 성궐(城闕)을 지었다.」

 

이때는 마한이 온조를 홍성 금마 부근에 붙들어 두고 있을 때이므로, 성궐의 위치는 홍성 금마와 아주 가까운 곳일 것이다. 그리고 온조가 거처한 곳을 위례성(尉禮城)이라 부르지 못하고 성궐(城闕)이라 부른 것은, 당시 온조가 마한에게 복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제(天帝)의 아들을 뜻하는 위(尉)자를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4년(B.C 5년) 도읍을 옮기었다.」

「15년(B.C 4년) 새로 궁궐을 지었다」

 

위 문구는 온조가 홍성 금마 부근에서 경기도 광주로 거처를 옮기고 그 곳에 궁궐을 지었다는 내용이다.

 

「17년(B.C 2년) 나라(樂浪)가 침략해 위례성(尉禮城)을 불살랐다.」

 

온조기 17년조부터 다시 위례(尉禮)라는 용어가 나온다. 위 위례(尉禮)의 위(尉)는 해님과 달님을, 예(禮)는 부여 무리(黎)를 뜻하는 글자이다. 고대에 복속국은 천제의 아들을 뜻하는 옥(玉), 일(日), 백(白), 환(桓), 불(不.弗.火), 위(尉.魏), 고(高.古), 해(解.奚) 등이 들어가는 명칭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였는데, 이때 온조가 위례(尉禮)라는 명칭을 다시 사용하였다는 것은 온조가 더 이상 마한을 종주국(宗主國)으로 섬기지 않겠다는 뜻이다.

 

「18년(B.C 1년) 말갈이 침입했으므로 왕이 칠중하(七重河)에서 무찌르고 그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마한왕에게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생매장해 버렸다.」

「22년(A.D 4년) 석두(石頭), 고목(高木) 2성을 쌓았다. 부현(斧峴)의 동쪽에서 사냥하다가 말갈적(靺鞨賊)을 만나 싸워 이겼다.」

 

위 문구를 보면 십제국은 말갈에 대하여 아주 강한 적대감을 보이고 있다. 이는 말갈이 강원도 지방 나라왕의 사주를 받아 십제국을 계속 공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24년(A.D 6년) 왕이 웅천(熊川)에 책을 만드니 마한이 사자를 보내 책망하되, "왕이 당초 강을 건너 왔을 적에 발을 들여놓을 곳이 없으므로, 내가 동북의 1백 리 땅을 갈라 주어 안정케 하였으니, 왕에 대한 대접이 후하지 아니함이 아니니 마땅히 보답할 바를 생각해야 할 터인데, 지금 나라가 완전하고 백성이 안정되어 나와 더불어 당적(當敵)할 이 없다고 여겨 성지를 크게 만들고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그러고도 의리가 있다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은 부끄럽게 여겨 그 책(柵)을 헐어 버렸다.」

 

위 문구는 십제국이 안성천 부근에 책을 쌓자 마한이 사신을 보내어 온조왕에게 항의하였다는 내용이다.

 

「25년(A.D 7년) 봄 2월 대궐 안에 있는 우물물이 갑자기 넘치고 서울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이었다. 해석자가 말하기를 "우물물이 갑자기 넘는 것은 대왕이 발흥할 징조요 소가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인 까닭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합병할 응보이십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진한, 마한을 합병할 마음이 있었다. 王宮井水暴溢 漢城人家馬生牛 一首二身 日者曰 井水暴溢者大王勃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幷인國之應也 王聞之喜 遂有幷呑辰.馬之心」

 

고대 우리민족은 바다, 강, 우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를 해님의 아들인 용왕(龍王)이나 하백신(河伯神)이 다스린다고 믿었다. 따라서 앞에 나온 우물(井)은 수신(水神)이 관장하는 수군(水軍)을 의미하고, 우물물이 갑자기 넘쳤다는 것은 십제국의 수군이 갑자기 강해졌다는 뜻이다.

백제본기에는 이외에도 비류왕기(比流王紀) 13년조에 수신(水神)을 상징하는 글자로 우물정(井)자를 사용하였고, 신라본기에도 강이나 바다를 근거지로 한 세력을 표현함에 있어 우물정(井)자를 사용하였다. 또 고주몽고구려도 수군을 이용한 상륙작전이 본격화된 광개토왕 때부터 하백신(河伯神)을 수호신(守護神)으로 삼고 우물정(井)자를 문양으로 사용하였다.

온조왕 25년에 십제국이 갑자기 수군(水軍)을 강화한 것은 십제국이 마한(馬韓)을 공격하기 위하여 육로(陸路)로 홍성 금마까지 가려면 중간에 마한의 여러 후국(侯國)들을 거쳐야 되므로, 십제국의 수군이 한강과 서해를 통하여 바로 아산만까지 가서 홍성 금마 마한을 기습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온조왕기 25년조 문구 중 말(馬)은 마한(馬韓)을 가리키고, 소(牛)는 소마리에서 한반도로 이동해 온 온조(溫祚) 무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말이 소를 낳았다는 것은 마한 지역에서 십제국(十濟國)이 건국되었다는 뜻이고, 소머리가 하나라는 것은 한수 이남 전지역을 온조의 관경으로 본 것이며, 몸뚱이가 둘이라는 것은 한수 이남 전지역을 십제국과 십제국 이외 지역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26년(A.D 8년) 가을 7월 왕은 말하기를 "마한이 차차 약해 가고 상하가 마음이 이탈되니 그 형세가 오래가지 못하겠다. 혹시 다른 자에게 병합된다면 마치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차다는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한들 뭐하겠느냐 남을 앞서 빼앗아 뒤 곤란을 면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라고 하였다.」

「26년 겨울 10월 왕이 군사를 출동하여 표면으로는 사냥한다 핑계하고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 금현(錦峴) 두 성(城)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온조왕 26년에 십제국의 기마부대는 표면으로는 사냥한다 핑계하고 홍성 금마로 향하였고, 수군(水軍)은 아산만에 기습 상륙하여 홍성 금마를 점령하였다.

 

「27년(A.D 9년) 4월에 원산, 금현 2성이 항복하므로 백성들을 한산의 북쪽에 옮기니 마한이 드디어 망하였다.」

 

위에서 마한이 망했다는 것은 홍성 금마 마한이 멸망하였다는 뜻이다.

십제국은 홍성 금마 마한을 멸망시키고도 홍성 금마 마한의 영역을 전부 십제국에 병합하지 못하였다. 이는 A.D 9년에 홍성 금마 마한이 멸망한 후 금강 이남 지방에 있던 소국(小國)들이 뭉쳐 금강 이남에 새로운 마한연맹을 만들었고, 보은과 청주 방면의 소국들도 온조 27년에서 다루왕 37년 사이에 신라의 세력권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34년(A.D 16년) 마한의 구장(舊將)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의거하여 배반하자 왕이 몸소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치니 주근(周勤)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위 우곡성(牛谷城)은 다루왕(多婁王) 29년조를 보면 동부(東部)에 속해 있으므로, 춘천(牛首國) 방면에 위치한 성이다.

 

「36년(A.D 18년) 가을 7월에 탕정성(湯井城:온양)을 쌓고 대두성(大豆城:공주 두곡?)의 민가를 나누어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圓山), 금현(錦峴:금산) 2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예산 고사원?)을 쌓았다.」

 

온조왕 36년에 십제국이 외적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은 지점은 모두 금강하류(錦江下流)보다 북쪽에 위치한 지점이다. 이를 보면 십제국은 온조왕 36년까지도 금강하류 이남 지역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38년(A.D 20년) 봄 2월 왕은 순시차 동으로 주양(走壤) 북으로 패하(浿河)를 거쳐 50일만에 돌아왔다. 3월 사자를 보내어 농업을 권장하고 급하지 않는 일로서 백성을 소란케 하는 따위를 모조리 제거케 하였다.」

「43년(A.D 25년) 겨울 10월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호가 부양(斧壤)에 와서 백성이 되기를 원하니 왕은 한산의 서쪽에 편히 살게 하였다.」

 

온조는 초기에 비류가 세운 백제(伯帝)와 같은 발음을 피하여 나라 이름을 온조(溫祚)라 불렀으나, A.D 19년에 비류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百帝)로 개명하였다.

 

「다루왕(多婁王) 36년(A.D 63년) 국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娘子谷城)까지 미치고 사자를 신라에 보내었다.」

「다루왕 37년(A.D 64년) 신라의 와산성(蛙山城)을 빼앗았다.」

 

위 문구를 보면 이 무렵 온조백제는 신라 방면으로 진출하다가 소백산맥을 넘어 온조백제 방면으로 진출하는 신라와 보은에서 서로 싸웠다.

A.D 205년에 온조백제는 만주에서 이동한 위구태 무리에게 정복되었고, 이때부터 온조백제는 구태백제(九台百濟)의 후국(侯國)이 되었다.

 

「초고왕(肖古王) 40년(A.D 205년) 秋 七月 太白犯月」

 

A.D 392년 10월에 온조백제는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고주몽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그 해 11월에 구태백제가 기각숙니(紀角宿示爾) 등을 보내어 진사왕(辰斯王)을 죽이고 아신왕(阿莘王)을 세움으로써 온조백제는 다시 구태백제의 후국이 되었다.

A.D 396년에 온조백제는 다시 광개토왕의 공격을 받고 고주몽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A.D 397년에 아신왕은 전지(전支)를 일본열도에 피신해 있던 구태백제왕에게 인질로 보내고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A.D 405년에 일본열도에 피신해 있던 구태백제왕은 전지(전支)를 온조백제 지역으로 들여 보내어 온조백제왕으로 즉위시키고, 광개토왕 공격 전에 한반도 구태백제 지역의 담로로 있던 전지왕의 서제(庶弟) 여신(餘信)과 전지왕의 친척 해수(解須)와 해구(解丘)를 온조백제 조정의 고위관리로 들여보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반도 백제 지역은 온조백제 중심으로 통합되었으나, 온조백제 조정의 실권은 내신좌평이 된 여신(餘信)과 병관좌평이 된 해구(解丘) 등에게로 넘어갔다.

A.D 408년에 한반도 백제 지역으로 온 구태백제왕은 상좌평(上佐平) 제도를 만들어 여신(餘信)을 상좌평에 임명한 후 여신에게 백제의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모두 맡겼다. 이때부터 구태백제왕이 백제 지역을 통치하였고, 온조백제 전지왕((전支王)은 허수아비로 변하였다.

진서(晋書)나 송서(宋書)를 보면 이 시기 백제왕의 이름이 여영(餘映)으로 적혀 있다. 이를 보면 일본열도로 피신해 있던 구태백제왕이 다시 한반도로 돌아와 A.D 408년부터 백제 지역을 통치한 후부터 온조백제의 전지왕이나 그 뒤 구이신왕은 대외적으로 백제왕 행세를 전혀 하지 못하였다.

그 후 구태백제왕 여영이 A.D 420년에 전지왕을, A.D 427년에 구이신왕을 차례로 죽임으로써 온조백제는 구이신왕 대에서 왕통이 끊어졌다.
 

 

5. 구태백제

 

 

1). 건국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태가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백제를 세웠다고 적혀 있다. 이 대방고지는 공손탁(公孫度)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이 A.D 204년경에 지금의 황해도에 설치한 대방군이다.
일부 사학자는 이 대방고지를 백제의 대방군이 있던 계(북경 동쪽에 있는 지명) 동쪽 방면 또는 금주(소릉하하류) 방면이라고 주장하나, 구태백제가 세워진 대방고지는 당시 한나라의 대방군이 있던 지금의 황해도 방면이지 계 동쪽 방면이나 금주 방면이 아니다.

 

 

2). 건국경위

 

 

위구태(尉九台)는 입국(立國)함에 있어 장인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의 도움을 받았는데, 아래에 위구태와 공손탁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동명(東明)의 후손으로 구태(仇台)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였다. 처음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한 요동태수 공손탁(公孫度)이 그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어 드디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北史.唐書.三國史記 百濟本紀

 

A.D 190년에 공손탁(公孫度)은 요동후평주목(遼東侯平州牧)이 되어 그때부터 요동왕(遼東王) 행세를 하였고, 공손탁의 아들 공손강(公孫康)은 고주몽고구려를 포위하기 위하여 A.D 204년에 황해도에 대방군(帶方郡) 설치하였다.

대방군을 설치한 공손강은 다음해 한반도를 공손씨의 우호세력으로 만들기 위하여 장춘(長春) 방면의 부여왕 위구태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당시 고주몽고구려와 우호관계에 있던 온조백제와 익산(益山) 금마(金馬) 마한(馬韓)을 정복하는 것을 지원하였다.

위구태는 공손강의 도움으로 장춘(長春) 방면의 부여 무리를 이끌고 처남인 공손강이 황해도에 설치한 대방군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세운 후 그 곳을 근거지로 하여 온조백제와 익산(益山) 금마(金馬) 마한(馬韓)을 정복하였다.

 

 

3). 구태백제 역사

 

 

가. 대방고지로 이동하여 온조백제와 마한 정복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구태가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백제를 세웠다고 적혀 있고, 북사(北史) 백제전에는 백제의 시조가 구태(仇台)라고 적혀 있으며, 주서(周書) 백제전에는 웅진에 구태의 묘가 있다고 적혀 있다.

구태는 A.D 205년에 공손강이 황해도에 설치한 대방군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세운 후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초고왕(肖古王) 이전에는 왕 명칭이 "0婁王"이다가 초고왕 때부터 갑자기 고(高)자나 구(仇)자가 들어가는 왕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는 초고왕 때부터 백제가 새로운 왕통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위구태가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한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초고왕(肖古王) 40년 가을 7월 태백이 달을 범하였다. 秋 七月 太白犯月」

 

위 문구 중 하늘(위)에 있는 태백(太白)은 "위"자를 사용한 위구태(尉九台)를 가리키고, 달(月)은 월지(月支)라는 뜻으로 옛 홍성 금마 마한 지역에 건국된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가리킨다.

광개토왕비문 영락(永樂) 6년조에는 왜(倭)가 백잔(百殘)을 속국(屬國)으로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나. 야마대연맹 복속시킴

 

익산 금마 마한과 온조백제를 정복한 구태백제는 온조백제 초고왕(肖古王) 재위 때 구주의 가야계 소국들이 주축이 되어 A.D 97-103년경에 일본열도에 세워진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을 복속시켰다.

일본서기 흠명천황기(欽明天皇紀) 2년조에는 대마도왜가 백제 초고왕(肖古王), 구수왕(仇首王) 재위시기에 백제를 부형(父兄)의 나라로 섬겼다고 적혀 있고,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에는 왜왕(倭王)이 백제의 후왕(侯王)으로 적혀 있으며,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왜(倭)는 백제의 보좌였다"고 적혀 있고,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 46년조에는 백제와 왜(倭)가 초고왕 때부터 교류하였는데, 일본열도왜가 백제와 같이 군사활동을 벌여 그 점령지를 백제에 주었다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야마대연맹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 시에 구태백제에 복속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온조백제의 초고왕 재위시기는 A.D 166년부터 214년까지이나, 일본열도왜가 구태백제에 복속한 시기는 구태백제가 건국된 A.D 205년부터 일본열도왜가 백제와 같이 신라를 공격한 A.D 208년(삼국사기 신라본기 참조) 사이 어느 해이다.

 

다. 가야 지역 일부 평정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49년조에 의하면 구태백제는 후국인 야마대연맹과 온조백제 군사를 동원하여 가야 지역 일부를 평정하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황후 49년은 A.D 249년이나, 이 사실은 실제로는 A.D 208년경에 일어난 사실이다.

일본서기에 A.D 208년경에 일어난 사실이 A.D 249년조에 적혀 있는 것은 일본서기 저자가 왜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에 백제를 부형의 나라로 섬셨다는 구주왜 사료를 부정하기 위하여 신공황후가 백제 초고왕, 구수왕과 접촉한 사실이 없는 것처럼 신공황후기의 백제관련 기사를 연도순서대로 적지 않고 모두 백제 초고왕, 구수왕 재위시기 이후 연도로 뒤로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신공황후 49년 황전별(荒田別) 록아별(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았다..중략..탁순국(卓淳國)에 건너가서 장차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중략..목라근자(木羅斤資:原註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와 사사노궤(沙沙奴궤)에 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백(沙白)과 개로(蓋盧)와 함께 가게 하였다. 모두 탁순(卓淳)에 모여 신라를 쳐서 파하고 비자화본(比自火本), 남가라(南加羅), 록국(록國), 아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가서 남만(南蠻)의 침미다례(沈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때 그 왕인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사를 끌고 와 모였다. 비리(比利), 벽중(벽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 4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

 

위 초고왕과 구수왕은 온조백제 지역을 다스린 구태백제의 후왕(侯王)이다.

 

라. 부여를 백제분국으로 만듬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기(古이王紀) 5년조에 의하면 구태백제는 A.D 238년에 구태백제를 세운 부여 무리들의 원거주지인 장춘 방면의 부여를 구태백제의 분국으로 만들었다.

 

「고이왕 5년(A.D 238년) 2월 부산(釜山)으로 사냥 가서 50일만에 돌아왔다. 4월 대궐 문기둥에 낙뢰가 있었다. 황룡이 그 문에서 날아 나왔다.」

 

위 낙뢰(震)는 임금을 뜻하는 진(辰)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고, 황(黃)은 역(易)에서 중앙 또는 수도를 뜻하며, 용(龍)은 임금을 뜻한다. 위 문구의 의미는 백제왕이 만주중앙에 위치한 부여 지역을 다스릴 분국왕(分國王)을 임명했다는 뜻이다.

이 해는 위나라의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고주몽고구려와 연합하여 구태백제의 인척 되는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衍)과 구태백제의 원주지(原住地)인 장춘 방면의 부여를 토벌할 때이다.

이때 구태백제는 공손씨(公孫氏)를 돕는 한편 부여를 지키기 위하여 그 해 2월에 후국(侯國)인 온조백제와 같이 군사를 이끌고 부산(釜山)으로 출병하였다가 50일만에 돌아와서 부여를 구태백제의 분국(分國)으로 만들었다.

 

마. 유성에서 북평 사이로 진출

 

A.D 313-314년경에 구태백제는 모용씨(慕容氏)와 동맹한 후 유성(柳城)에서 난하(난河) 사이 지역으로 진출하여 그 곳에 나라태수(樂浪太守), 대방태수(帶方太守)를 두었다(한군현편 중 "나라군과 대방군의 모용씨 영역으로 이동" 참조).

그 뒤 A.D 316년에 구태백제는 서진(西晋)이 망하는 틈을 타서 서쪽으로 난하에서 북평(北平) 사이 지역으로 진출하여 그 곳에 광양태수(廣陽太守), 조선태수(朝鮮太守)를 두었다.

통전(通典)에는 진(晋) 시에 유성에서 북평 사이에 백제의 군(郡)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百濟晋時亦據有遼西晋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通典

 

바. 중국동해안으로 진출

 

A.D 316년에 구태백제는 양자강하류에서 월남(越南) 사이 즉 지금의 강소성(江蘇城) 일부, 절강성(浙江城), 복건성(福建城), 광동성(廣東城), 광서자치구(廣西自治區) 방면 중국동해안으로 진출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류왕기 13년조에는 그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비류왕(比流王) 13년(A.D 316년) 봄 가물었다. 큰 별이 서쪽으로 흘렀다. 왕도의 우물이 넘치고 검은 용이 우물 가운데서 나타났다. 春早大星西流夏四月王都井水溢黑龍見其中」

 

위 문구 중 큰 별이 서쪽으로 흘렀다는 것은 백제분국의 대장군이 난하를 건너 서쪽으로 북경 방면과 중국동해안 방면으로 진출했다는 뜻이고, 왕도의 우물(井)이 넘쳤다는 것은 새로운 분국을 개척한 백제분국의 수군 대장군이 왕도로 왔다는 뜻이며, 검은 용(龍)이 왕도의 우물(井)에 나타났다는 것은 왕도로 온 백제분국의 수군 대장군을 새로 개척한 분국의 분국왕으로 임명하였다는 뜻이다.

이때 분국왕으로 임명된 사람은 대방태수(帶方太守), 조선태수(朝鮮太守), 광릉태수(廣陵太守)를 겸한 양무(楊茂)로 추정된다.

북사에는 백제가 晋.宋.濟.梁 때 양자강 방면에 진출해 있었다고 적혀 있고,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백제가 제(齊:산동성 방면), 노(魯:산동성 서남 방면), 오(吳:양자강 하류 방면), 월(越:양자강 하류에서 월남 사이) 등지를 평정하여 관서를 두었다고 적혀 있다.

 

「自晋宋濟梁據江佐右亦遣使稱藩兼受拜封」北史

「백제는 병력으로써 제(齊), 노(魯), 오(吳), 월(越)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官署)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王爵)을 분봉(分封)하여」桓檀古記

 

삼국유사에는 구당서와 신당서를 인용하여 백제의 영역이 서쪽으로 월주(越州)까지, 남쪽으로 왜(倭)까지 미쳤다고 적혀 있다.

 

「구당서에 이르기를 "백제는 부여의 별종으로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으로는 바다 건너 월주까지 미치고, 남쪽으로는 바다 건너 왜까지 미쳤다"고 하였다. 舊唐書云百濟夫餘之別種東北新羅西渡海至越州南渡海至倭」

「신당서에 이르기를 "백제의 서쪽 경계는 월주(越州)이고, 남쪽 경계는 왜(倭)인데, 모두 바다 건너에 있다"고 하였다. 新唐書云百濟西界越州南倭皆踰海」

 

사. 중원으로 진출

 

구태백제는 A.D 316년에 양자강하류와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 광서자치구 방면 중국동해안으로 진출한 후 A.D 383년에 전진(前秦)의 부견(符堅) 군대가 비수(비水)에서 동진(東晋)의 군대에게 패배하자 후위(後魏) 때 전에 전진(前秦)의 영역이던 중원(中原)으로 진출하였다.

 

「自晋宋齊梁據江左 後魏宅中原」周書 百濟傳

 

위 중원은 지금의 하남성(河南城) 낙양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중심지이다.

남제서(南齊書)를 보면 백제가 중국동해안 지역에 발령한 태수들의 명칭에 청하태수(靑河太守:산동성 小靑河 방면)와 성양태수(城陽太守:산동반도 방면)가 들어 있다. 이를 보면 백제는 양자강하류 방면에서 중원으로 진출할 무렵 지금의 산동성(山東城), 강소성(江蘇城) 방면에도 진출하였다.

 

 백제의 영역확장

 

아. 고주몽고구려와 전쟁

 

백제는 고주몽고구려와 적대관계를 피하였으나 구태백제가 A.D 313-314년에 고주몽고구려의 적국인 모용씨와 동맹을 맺고부터 백제와 고주몽고구려는 적대관계로 되었다.

A.D 369년에 고주몽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보기병(步騎兵)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주둔하여 온조백제의 민가를 약탈함으로써 백제와 고주몽고구려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일어난 전쟁은 A.D 371년에 구태백제를 등에 업은 온조백제가 평양을 공격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킴으로써 온조백제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후 고주몽고구려는 수차 온조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별다른 승리를 얻지 못하였다. 이는 구태백제가 온조백제를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국양왕 3년(A.D 386년)에 고국양왕의 태자 담덕이 온조백제를 공격해 보았다가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가 같은 세력임을 알고 중지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양왕기 3년조에는 이 사실이 은유법으로 적혀 있다.

 

「고국양왕 3년(A.D 386년) 봄 정월 왕자 담덕(談德)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가을 8월 왕은 군사를 내어 남으로 백제를 쳤다. 겨울 10월 복사꽃(桃) 오얏꽃(李)이 피었다. 소가 말을 낳았는데 발이 여덟 꼬리가 둘이었다.」

 

위에서 복사꽃 오얏꽃이 피었다고 적혀 있는 것은 단순히 꽃이 핀 사실을 사서에 적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새해가 10월부터 시작되고 있었고, 당시의 10월은 지금의 정월인데, 정월은 복사꽃 오얏꽃이 피는 시기가 아닐 뿐더러 고국양왕 10월조 문구는 어떤 사실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 나온 복사꽃(桃), 오얏꽃(李)은 같은 발음의 도이(島夷) 즉 왜(倭)를 군사로 사용한 구태백제를 지칭한 것이다. 또 소(牛)는 소마리에서 이주한 구태백제를 가리키고, 말(馬)은 마한(馬韓) 지역에서 건국된 온조백제를 가리킨다. 그리고 소(牛)가 말(馬)을 낳았다는 것은 구태백제가 부모이고 온조백제가 자식이라는 뜻이며, 발이 여덟 꼬리가 둘이라는 것은 몸뚱이가 붙어 있었다는 뜻으로 구태백제와 온조백제가 같은 세력이었다는 뜻이다.

위 문구의 의미는 담덕이 8월에 온조백제를 공격하였다가 10월 달에 구태백제와 온조백제가 같은 세력인 것을 알았다는 내용이다.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가 같은 세력임을 알게 된 담덕은 대백제(對百濟)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즉 고주몽고구려가 온조백제에게 고전한 원인이 외교실패로 서쪽 방면의 모용씨(燕)와 적대세력이 됨으로써 고주몽고구려의 군사력이 연(燕)과 백제 방면으로 양분된 점,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가 같은 세력인 점, 구태백제가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고 있는 점 등을 깨닫고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정책을 취하였다.

 

-수군(水軍)을 강화하였다. 이는 상대의 허를 찌르는 상륙전술을 펼치기 위해서이다. 이 정책으로 고주몽고구려는 백제보다 월등히 강한 수군(水軍)을 보유하게 되었고, 이 수군은 그 뒤 A.D 392년에 수만 명이 동원된 한강하류 상륙작전과 A.D 396년에 역시 수만 명이 동원된 금강하류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쳤다.

-외교적으로 구태백제를 고립시켰다. 이를 위하여 광개토왕은 여태까지 적대국이던 연나라에 칭신하며 고주몽고구려와 연나라를 동맹관계로 만들고, 동맹관계에 있던 연나라와 구태백제를 적대관계로 만들었다. 또 미해(美海)를 구태백제에 인질로 보내고 구태백제에 복속하던 신라를 위협하여 실성을 인질로 받아, 구태백제와 신라를 적대관계로 만들고 신라와 고주몽고구려를 동맹관계로 만들었다.

광개토왕의 이러한 정책은 온조백제, 구태백제를 불문하고 백제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즉 신라와 고주몽고구려가 동맹세력이 됨으로써 백제는 고주몽고구려와의 국경 외에 신라와의 국경에도 군사를 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백제 군사의 신라 국경 배치는 백제 전력(戰力)의 분산을 가져와 서해안 방면의 방위력이 약화되었으며, 서해안 방면의 방위력 약화는 광개토왕에게 고주몽고구려 수군이 서해안에서 상륙작전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또 고주몽고구려는 연나라와 동맹세력이 됨으로써 연나라 방면에 배치한 군사들을 백제 공격에 집중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의 비정규전에 해당하는 전술을 사용하여 구태백제와 온조백제를 이간시켰다. 이 정책도 성공을 거두어 그 후 온조백제 진사왕(辰斯王)이 구태백제를 배신하여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간에 불화가 일어났고, 온조백제와 구태백제간의 불화는 백제 전력(戰力)의 분열을 가져왔다.

 

일본서기 응신천황기(應神天皇紀) 3년조에는 진사왕(辰斯王)이 구태백제를 배신하였다고 적혀 있다.

 

「응신천황 3년(A.D 392년) 이 해 백제의 진사왕(辰斯王)이 귀국(貴國)의 천황에게 무례(無禮)하였다. 그래서 기각숙니(紀角宿니) 등을 보내어 무례함을 책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국은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 기각숙니 등은 아화(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

 

광개토왕이 취한 정책이 모두 성공을 거두자 광개토왕은 온조백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A.D 392년 7월에 탁월한 전략가인 광개토왕은 먼저 온조백제와 신라와의 접경인 구원(狗原)에서 양동작전(陽動作戰)을 펼쳐 온조백제 군사가 동쪽인 구원으로 몰려 온조백제의 서해안이 허술해졌을 때, 수군(水軍)을 한강하류에 상륙시켜 한강 이북 10여 성를 빼앗고 관미성으로 통하는 양도(糧道)를 끊었다. 이때 진사왕은 광개토왕의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에 말려들어 구원으로 갔다가 고주몽고구려 수군의 기습 상륙공격에 전혀 대항도 해보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기 8년조에는 그 사실이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전략..왕은 담덕(談德)이 군사를 부리는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감히 나가서 항거하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이 많이 떨어져 나갔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왕은 구원(狗原)에서 사냥하고 열흘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行宮)에서 돌아갔다.」

 

진사왕이 광개토왕의 성동격서 작전에 너무 쉽게 말려든 것은 청목령(靑木嶺)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팔곤성(八坤城)까지 설치한 관방(關防)과 한강하류에 쌓은 관미성(關彌城)을 너무 믿었기 때문이다. 즉 진사왕은 고주몽고구려 군사들이 구원(狗原)에서 성동격서 작전을 벌이자 고주몽고구려의 주력이 온조백제의 전방방어선을 우회하여 온조백제와 신라와의 접경지대에서 온조백제로 쳐들어 올 것으로 보고 군사를 이끌고 구원으로 갔다가 광개토왕에게 서해안이 텅 빈 허를 찔렸다.

같은 해 10월에 고주몽고구려 군사들이 온조백제의 수도를 지키는 요지인 관미성을 점령하자 진사왕은 더 대항할 힘을 잃고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다.

 

「麗王談德在位初年冬十月南伐濟數十城之入德燕取人質濟太子外王親子一 人」

「麗王談德苦還德父伊連末失地平壤城之濟」燕書

 

온조백제가 A.D 392년 10월부터 고주몽고구려에게 복속하자 구태백제는 같은 해 11월에 장군 기각숙니 등을 보내어 진사왕을 죽이고 아신왕을 세움으로써 온조백제를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시켰다.

그 후 아신왕(阿莘王) 때에도 구태백제와 온조백제간에 불화가 계속되자 광개토왕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A.D 396년에 몸소 수군을 이끌고 금강하류에 상륙하여 구태백제를 궤멸시킨 후, 이어서 보기병으로 북쪽에서 아리수(한강)를 건너 온조백제를 항복 받았다.

광개토왕비문과 환단고기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백잔(百殘:온조백제)과 신라(新羅)는 예로부터 우리의 속국(屬國)이어서 조공(朝貢)을 바쳐 왔는데 왜(倭:구태백제의 후국인 응신조왜 군사 지칭)가 신묘년(A.D 391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00.신라를 깨뜨리고 그들을 (구태백제가) 신민(臣民)으로 만들었으므로, 왕은 친히 수군을 이끌고 이잔국(利殘國:구태백제)을 토벌한 후 대군을 남진시켜..중략..왕은 발연히 대노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아리수(한강)를 건너 선봉부대를 보내어 그 도성을 핍박하니 백잔왕(百殘王)이 곤핍하여 남녀 1천명과 세포 1천필을 바치고 왕께 귀복하였다. 후략」廣開土王碑文 永樂 6年條

「제(帝)는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웅진(熊津:공주), 임천(林天:부여군 임천면), 와산(蛙山:보은), 괴구(槐口:충북 괴산), 복사매(伏斯賣:충북 영동), 우술산(雨述山:충남 대덕군), 진을례(進乙禮:충남 금산군), 노사지(奴斯只:유성)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 아침을 기해서 제천하고 돌아오다.」桓檀古記 高句麗本紀

 

위 광개토왕비문 영락 6년조 문구를 나누어 살펴본다.

 -위 문구를 보면 광개토왕은 수군을 이끌고 금강하류에 상륙하여 먼저 구태백제의 본거지인 공주, 부여를 점령한 후, 이어서 보은, 괴산, 영동, 대덕, 금산, 유성, 보은 등지를 점령하고 속리산을 넘어 신라 지역으로 넘어와서 육로로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이때 전방에 있던 고주몽고구려 보기병은 광개토왕이 거느린 수군이 구태백제를 궤멸시키는데 맞추어 온조백제의 전방방어선을 돌파하여 온조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하고 온조백제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비문에는 부여 무리가 구태백제를 세웠다는 뜻으로 구태백제는 이잔(利殘)으로 적혀 있고, 온조백제는 백잔(百殘)으로 적혀 있다. 또 응신조(應神朝) 왜(倭) 군사는 왜(倭)로 적혀 있다.

-고주몽고구려는 백잔(百殘)을 공격하기 전에 수군(水軍)으로 온조백제 남쪽에 위치한 이잔국(利殘國)을 먼저 공격하여 궤멸시킨 후 북쪽에서 보기병(步騎兵)으로 백잔(百殘)을 공격하여 항복 받았다.

-비문에는 왜(倭)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과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만들었으므로, 고주몽고구려는 이에 보복하여 이잔(利殘)과 백잔(百殘)을 공격하였다고 적혀 있다. 비문에 왜(倭)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과 신라를 신민(臣民)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구태백제는 A.D 390년에 일본열도에 후국(侯國)인 응신조(應神朝)를 세운 후 다음해 내물왕 36년(A.D 391년)에 응신조(應神朝) 왜(倭)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신라왕을 위협하여 신라왕자 미해(美海)를 인질로 받고 신라를 복속시켰다. 비문에 왜가 신묘년(A.D 391년)에 신라를 신민으로 만들었다는 문구는 구태백제가 내물왕 36년(A.D 391년)에 신라왕을 위협하여 미해를 인질로 받고 신라를 구태백제에 복속시킨 것을 말한다.

비문에는 신라와 온조백제가 예로부터 고주몽고구려의 속국이었다고 적혀 있으나, 신라가 고주몽고구려에 복속한 해는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實聖)을 고주몽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A.D 392년 정월이고, 신라가 구태백제에 복속한 해는 미해(美海)를 구태백제에 인질로 보낸 A.D 391년이다. 또 온조백제가 고주몽고구려에 항복한 해는 진사왕 때인 A.D 392년 10월과 A.D 396년이고, 온조백제가 구태백제에 복속한 해는 A.D 205년이다. 즉 신라나 온조백제 모두 고주몽고구려보다 구태백제에 먼저 복속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락 6년(A.D 396년)조 문구는 고주몽고구려가 구태백제와 온조백제를 공격하면서 내건 명분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신라와 온조백제가 예로부터 고주몽고구려에 복속한 것이 아니었다.

위에 나온 영락 6년조 사실이 일본서기 응신천황기(應神天皇紀) 8년조에 적혀 있다.

 

「응신천황(應神天皇) 8년(A.D 397년) 백제인이 내조(來朝)하였다. 백제기(百濟記)에 말하였다. 아화(阿花)가 왕이 되어 귀국(貴國)에 무례하였다. 때문에 우리의 침미다례(枕彌多禮:제주도?), 현남(峴南:황해도 방면), 지침(支侵:홍성 방면?), 곡나(谷那:황해도 방면), 동한(東韓:가야 지역)의 땅을 빼앗겼다.」

 

광개토왕이 백제로부터 황해도, 홍성, 가야 , 제주도(?) 등지를 빼앗은 것은 백제의 요충지 점령, 백제와 일본열도간의 해상통로(海上通路) 차단, 남해(南海)의 제해권(制海權) 장악을 위한 것이다.

 

자. 구태백제의 반격과 광개토왕의 재반격

 

영락(永樂) 9년(A.D 399년)에 일본열도에 피신해 있던 구태백제왕은 응신조(應神朝) 왜(倭)를 동원하여 신라, 가야 지역을 공격하였다. 이를 보면 구태백제와 응신조왜는 A.D 396년에 고주몽고구려에 빼앗긴 남해의 제해권을 A.D 399년 이전에 도로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구태백제와 응신조 왜 군사가 신라, 가야 지역을 공격하자 광개토왕은 영락(永樂) 10년(A.D 400년)에 보기병 5만을 보내어 신라, 가야 지역을 점령한 왜를 물리치고 계속 추격하여 대마도를 점령한 후 일본열도왜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광개토왕비문과 환단고기 고구려본기 문구를 살펴본다.

 

「영락 9년 기해년에 백잔은 맹세를 어기고 왜인(倭人)과 더불어 화통(和通)하였다..중략..영락 10년 경자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중략..관병(官兵)이 왜의 자취를 밟고 넘어 급히 쫓아 임나가라(任那加羅)에 이르러 성(城)을 발(拔)하니 성은 귀복 하였다..중략..왜가 드디어 거국(擧國)으로 항복하니 죽은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으며 신하를 모두 데리고 왔다. 후략」廣開土王碑文

「일단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를 격파하였다. 왜인은 백제의 보좌였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중략..임나(任那)와 이(伊), 왜(倭)의 무리는 신하로서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桓檀古記 高句麗本紀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광개토왕은 영락 10년(A.D 400년)까지 한반도, 대마도, 일본열도를 모두 평정한 후 평정지를 군사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요지(要地)에 위치한 10국으로 연립정부(임나연정)를 만들어 그 치소를 대마도에 두었다.

이 임나연정은 신라와 백제간의 통로통제, 백제와 일본열도간의 통로통제, 신라.백제.대마도.일본열도 통제 등 임무를 담당하였다.

A.D 400년에 일본열도왜마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자 중국동해안과 유성(柳城)에서 북평(北平) 사이 백제분국의 장군들은 광개토왕에게 복속하였다.

광개토왕비문 영락 14년(A.D 404년)조에 의하면 구태백제(九台百濟)와 응신조(應神朝) 왜(倭) 잔존세력들은 다시 고주몽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영락 14년(A.D 404년) 갑진년 왜(倭:구태백제와 일본열도왜 지칭)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帶方)의 경내로 침입하여..중략..석성(石城) 아래로 왜적의 배들이 줄을 이었다. 대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러 나섰다. 평양에 이르자 왜적의 선봉과 서로 만났다. 대왕의 선봉이 길을 막고 사방에서 시살하니 왜구는 궤패(潰敗)되었으므로 무수한 적을 베어 죽였다.」

 

일본열도왜는 영락(永樂) 10년(A.D 400년)부터 임나연정의 통제를 받고 있었는데, A.D 404년에 왜가 다시 고주몽고구려를 공격하였다는 것은 임나연정의 왜 통제가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 전쟁에서도 왜가 패배함으로써 구태백제와 광개토왕간의 10여 년간에 걸친 전쟁은 광개토왕의 승리로 끝이 나고 일본열도왜는 다시 임나연정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차. 구태백제가 고주몽고구려에게 패배한 원인

 

A.D 392년 이전까지는 고주몽고구려가 백제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하거나 또는 국경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싸움을 하였다. 그러나 A.D 392년부터 A.D 404년까지는 고주몽고구려가 일방적으로 승리하였는데, 이는 광개토왕의 탁월한 전략과 전술 때문이다.

구태백제와 고주몽고구려의 전술상 차이점을 살펴보면, 구태백제는 보병전술(步兵戰術)과 기마전술(騎馬戰術)을 주전술로 사용하였고 상륙전술(上陸戰術)은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보조하는 전술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상륙전술에 동원된 배는 왜(倭)가 사용하는 소정(小艇)이었고, 이 소정에는 대략 20-30명 정도가 승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륙전술에 동원된 왜는 수천 명을 넘지 못하였다.

반면에 고주몽고구려는 광개토왕 이전까지는 주로 기마전술과 보병전술을 사용하다가 광개토왕 때부터 해상전(海上戰)과 상륙전(上陸戰)에 대비하여 대규모 병력이 승선할 수 있는 대함(大艦)과 수군(水軍)을 대량으로 보유하였다. 그 결과 광개토왕 때부터 고주몽고구려 수군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해졌다.

A.D 392년에 고주몽고구려 수군(水軍) 수만 명이 한강하류에 상륙하여 한강 이북에 위치한 10여성을 빼앗고 관미성((關彌城)으로 통하는 양도(糧道)를 끊어 관미성을 점령한 것, A.D 396년에 수군 수만 명이 금강하류에 상륙하여 구태백제의 본거지인 웅진 등을 궤멸시킨 것, A.D 400년에 수군과 보기병 수만 명이 대마도를 점령하고 이어서 일본열도왜를 복속시킨 것, A.D 404년에 대방계로 침입한 왜를 물리친 것 등은 고주몽고구려 수군의 전투력이 구태백제 수군의 전투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하였기 때문이다.

구태백제도 이 전쟁에서 패배한 후 함정(艦艇)과 수군(水軍)을 대폭 강화하여 A.D 416년에는 옛 중국동해안분국을, A.D 463년에는 난하에서 북평 사이 지역을 수복하였다.

 

카. 한반도 백제 지역 통합

 

A.D 405년 3월에 아신왕이 암살당하자, 일본열도에 피신해 있던 구태백제왕은 인질로 와 있던 전지(전支)를 귀국시켜 온조백제왕으로 세우고, 한반도 구태백제 지역의 옛 담로들인 전지왕의 서제(庶弟) 여신(餘信)과 전지왕의 친척 해수(解須)와 해구(解丘)를 온조백제 조정의 고위관리로 들여보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반도 백제 지역은 온조백제 중심으로 통합되었으나 온조백제의 실권은 여신, 해수, 해구 등이 장악하였다.

A.D 408년에 대마도 임나연정이 대마도에 다시 병영을 설치하여 백제와 일본열도간의 통로를 끊고 일본열도를 임나연정의 통제 아래 두자 구태백제왕 여영(餘映)은 한반도로 돌아와서 상좌평(上佐平) 제도를 만들어 여신을 상좌평에 임명하고 여신에게 군국정사를 모두 맡겼다. 이때부터 구태백제왕이 백제 지역을 통치하였고 전지왕은 허수아비로 변하였다.

A.D 416년에 구태백제왕 여영(餘映)은 전에 백제의 중국동해안분국 장군으로 있다가 A.D 400년에 광개토왕에게 복속한 백제장군들을 다시 구태백제에 복속시기고 중국동해안분국을 수복하였다.

그 후 구태백제는 A.D 420년에 전지왕(전支王)을, A.D 427년에 구이신왕(久이辛王)을 차례로 제거하였다. 이는 백제가 광개토왕에게 패한 원인이 구태백제와 온조백제간의 불화로 인한 국력의 분열 때문인 만큼 다시는 불화로 인한 국력의 분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전지왕과 구이신왕을 차례로 죽여 온조백제계 세력을 모두 제거한 것이다.

양서(梁書)에는 여영이 전지왕이라고 적혀 있으나, 진서(晋書)나 송서(宋書)에는 여영이 A.D 416년, 420년, 424년에 백제왕으로 나오는데, 전지왕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A.D 420년에, 일본서기에 의하면 A.D 414년에 죽었으므로, 여영은 온조백제의 전지왕이 아니고 구태백제왕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유왕이 온조백제의 구이신왕 아들로 적혀 있지만 비유왕은 구태백제왕이므로 구이신왕의 아들이 아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유왕기 29년조에 의하면 A.D 455년에 백제에 내란이 일어나 비유왕이 죽었다.

 

「비유왕(毘有王) 29년 봄 3월 한산(漢山)에서 사냥하였다. 가을 9월 흑룡(黑龍)이 한산에 나타났다가 이윽고 구름과 안개의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왕이 돌아갔다.」

 

위 문구는 옛 온조백제계 장군들이 한산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 반란의 규모가 커서 비유왕이 진압하지 못하자 흑룡(黑龍)이 출동하여 반란을 진압했으며, 이때 비유왕이 반란군의 손에 죽었다는 내용이다. 이때 반란을 일으킨 옛 온조백제계 장군들은 개로왕 21년조에 나오는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이萬年) 등으로 보이며, 이들은 비유왕을 죽이고 고주몽고구려로 도망갔다가 A.D 475년에 고주몽고구려 군사를 끌어들여 개로왕을 죽였다.

A.D 458년에 개로왕(蓋鹵王)은 백제본국(百濟本國)의 군사를 중국동해안분국으로 보내었다. 그때부터 A.D 463년 사이에 백제는 북평(北平)에서 난하(난河) 사이 지역을 다시 수복하였다.

A.D 471년에 백제는 중국동해안분국을 고주몽고구려에게 상실하였다.

 

타. 고주몽고구려 공격으로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김

 

A.D 475년에 백제는 고주몽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을 빼앗기고 개로왕(蓋鹵王)이 피살되자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여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A.D 479년에 동성왕(東城王)이 즉위하자 백제의 국력이 다시 강화되었다.

A.D 487년에 백제는 대마도를 평정하고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평정하여 인현천황(仁賢天皇)을 세운 후 백제본국의 군사를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으로 보내어 북위와 고주몽고구려를 패배시키고 중국동해안분국을 다시 수복하였다.

A.D 501년에 궁중에 반란이 일어나 동성왕이 죽고 무령왕(武寧王)이 즉위하였다. 이 정변으로 동성왕이 쫓겨나고 동성왕계인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 출신 고위관리들이 모두 몰락하였다. 이에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에 있던 백제장군들이 백제본국에서 이탈하여 고주몽고구려에 복속함으로써 백제는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을 상실하였고 그 결과 백제의 국력이 약화되었다.

 

파.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김

 

성왕(聖王) 16년(538년)에 도읍을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 하였다.

의자왕 20년(A.D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였다.

 

 

6. 백제의 해외분국 변동상황

 

 

1). A.D 396년부터 송 건국 시 까지 백제분국 상황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A.D 396년에 구태백제가 궤멸되고 온조백제가 항복한 후 A.D 400년에 대마도왜와 일본열도왜 마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자 중국동해안과 유성에서 북평 사이에 있던 백제분국의 장군들은 광개토왕에게 복속하였다.

그 후 A.D 416년에 구태백제는 옛 중국동해안분국의 백제장군들을 다시 백제에 복속시키고 중국동해안분국을 수복하였다.

 

2). 송나라 때 백제분국 상황

 

 

송(宋)은 백제장군 출신인 유유(劉裕)가 동진을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이기 때문인지 개국하고부터 백제와 우호관계가 계속되었다.

송서 백제전에 의하면 송(宋) 고조(高祖)는 개국한 의희(義熙) 12년(A.D 420년)에 구태백제왕 여영(餘映)에게 "鎭東大將軍"이라는 작호(爵號)를 내렸다. 이 작호는 여영이 A.D 416년에 동진으로부터 받은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이라는 3품 작호보다 1품이 높은 2품 작호이다.

위 작호 수여가 가지는 의미는 송과 백제가 우호관계에 있다는 것과 당시 백제가 중국동해안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사실을 송(宋) 황제가 확인한 것이다.

 

「義熙十二年 以百濟王餘映..高祖踐祚進號進東大將軍」

 

송서 백제전에 의하면 경평(景平) 2년(A.D 424년)에 구태백제왕 여영(餘映)이 송황제에게 친선 사자를 보내었고, 다음해 원가(元嘉) 2년(A.D 425년)에 송 문제(文帝) 의융(義隆)도 백제왕에게 답례 사자를 보내었다.

 

「少帝景平2年映遣長使張威詣闕貢獻」

「元嘉二年太祖詔之曰皇帝問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송서 백제전에 의하면 송 효무제는 대명(大明) 2년(A.D 458년)에 중국동해안 주둔 백제장군 11명에 대하여 백제의 직위대로 이들을 송의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大明二年京遣使上表曰..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爲冠軍將軍以行征虜將軍佐賢王餘昆行征虜將軍餘暈竝爲征虜將軍以行輔國將軍餘都餘乂竝爲輔國將軍以行龍양將軍沐衿餘爵竝爲龍양將軍以行寧朔將軍餘流마貴竝爲寧朔將軍以行建武將軍于西餘婁竝爲建武將軍」

 

위 인사 내용을 보면, 여기(餘紀)를 관군장군(冠軍將軍)에, 여곤(餘昆)을 정로장군(征虜將軍)에, 여운(餘暈)을 정로장군에, 여도(餘都)를 보국장군(輔國將軍)에, 여예(餘乂)를 보국장군에, 목금(沐衿)을 용양장군(龍양將軍)에, 여작(餘爵)을 용양장군에, 여류(餘流)를 영삭장군(寧朔將軍)에, 마귀(마貴)를 영삭장군에, 우서(于西)를 건무장군(建武將軍)에, 여루(餘婁)를 건무장군에 각 임명하였다.

이 인사는 송과 백제가 북위를 공격하기 위하여 송.백제 연합군을 편성하면서 백제장군들이 송의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백제장군들을 송의 장군으로 겸임 임명한 것으로, 이때 발령 받은 백제장군들은 여씨(餘氏) 성을 가진 백제의 왕족이거나 우씨(于氏), 목씨(沐氏) 등 성을 가진 백제의 지배층이다.

이 인사 후 백제.송 연합군은 북위와 고주몽고구려를 공격하여 A.D 463년에 유성(柳城)에서 북평(北平) 사이 옛 백제분국의 절반에 가까운 난하에서 북평(北平) 사이 지역을 수복하였고, A.D 465년에 백제는 그 곳에 조선태수(朝鮮太守), 나라태수(樂浪太守), 대방태수(帶方太守), 광양태수(廣陽太守)를 두고 양무(楊茂), 고달(高達) 등을 태수로 임명하였다.

이에 당황한 북위(北魏)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A.D 467년에 청주자사(靑州刺史) 심문수(沈文秀)를 꾀어 청주(靑州)를 북위의 영토로 만들었고, 고주몽고구려는 송과 동맹한 후 A.D 471년에 백제의 중국동해안분국을 빼앗았다.

고주몽고구려는 이에 그치지 않고 북쪽으로 유유, 남쪽으로 송(宋), 서쪽으로 북위(北魏)와 손을 잡고 난하에서 북평 사이 백제의 요서분국을 동서남북으로 포위하여 고립시켰다.

이때 친백제(親百濟) 국가인 송이 갑자기 적국인 고주몽고구려와 손을 잡은 것은 A.D 463년에 송.백제 연합군이 빼앗은 난하 서쪽 지역을 백제가 독차지함으로써 백제(百濟)와 송(宋)간에 불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3). 남제 때 백제분국 상황

 

 

남제(南齊)는 백제장군인 양무(楊茂), 고달(高達) 등과 같이 송(宋)에 벼슬하면서 북위 정벌에 공훈을 세운 백제장군 소도성(蕭道成)에 의하여 건국되었다.

남제와 백제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남제(南齊) 역시 백제장군 출신이 세운 나라인 때문인지 개국 후 백제와 우호관계가 계속되었다.

백제는 A.D 479년에 동성왕이 즉위한 후 국력을 다시 회복하여 A.D 487년에 대마도를 평정하고 A.D 488년에 일본열도를 평정하여 인현천황(仁賢天皇)을 세운 후, 같은 해 북위(北魏)의 공격을 받고 있던 남제를 도우기 위하여 백제군의 주력을 중국으로 보내었다. 백제장군들이 남제(南齊)로 오자 남제도 백제장군들을 남제의 장군으로 겸직 임명하였다.

A.D 488년부터 남제.백제 연합군과 북위.고주몽고구려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남제.백제 연합군은 북위와 고주몽고구려 군대를 처참하게 패배시키고 A.D 471년에 고주몽고구려에게 빼앗겼던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 광서자치구 방면의 중국동해안분국을 수복하였다.

 

 

4). 양나라 때 백제분국 상황

 

 

양나라는 소도성의 9촌 조카 소연(蕭衍)에 의하여 건국되었다.

양서(梁書)에는 양나라가 백제장군들을 양나라 장군으로 겸직 임명한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고,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동성왕이 죽은 후 요서분국 또는 중국동해안분국 출신 고위관리들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송서(宋書)나 남제서(南齊書)를 보면 백제분국 장군들에 대한 관작 수여는 백제왕이 중국황제에게 공적을 기록한 표문을 올려 재가를 받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양나라 때 양황제가 백제분국의 장군들에게 관작을 내린 사실이 전혀 없다는 것은 백제가 백제분국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또 요서분국이나 중국동해안분국 출신 백제장령들이 동성왕의 죽음 이후 백제본국의 요직에서 모두 사라진 것은 동성왕의 죽음과 함께 이들도 함께 몰락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환단고기 고구려본기에는 백제가 A.D 502-503년에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고주몽고구려에 상실하였다고 적혀 있다.

 

「문자호태열제(文咨好太烈帝)는 명치(明治)라고 개원하였다. 11년(A.D 502년)에 제(齊), 노(魯), 오(吳), 월(越)의 땅이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전략..백제는 병력으로 제(齊), 노(魯), 오(吳), 월(越)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고 왕작(王爵)을 분봉(分封)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치(內治)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년간(明治年間)에 백제의 군정(軍政)이 쇠퇴(衰頹)하고 부진(不振)하여 권익(權益)의 집행이 모두 성조(聖朝)에게로 돌아왔다. 성읍(城邑)을 구획 짓고 문무(文武)의 관리를 두었는데, 수(隨)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말썽이 났다. 후략」

 

위 문구를 보면, 백제는 양나라 때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모두 고주몽고구려에게 빼앗겼다. 이때 백제가 고주몽고구려에게 백제분국을 상실한 것은 무령왕이 정변을 일으켜 동성왕과 동성왕계인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 출신 고위관리들을 제거하자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의 백제 장군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백제본국에서 이탈하여 고주몽고구려에 복속하였기 때문이다.

 

 

5). 북제, 수, 당 때 백제분국 상황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 17년조와 18년조에 의하면 백제는 북제(A.D 550-577년)로부터 대방 지역과 동청주 지역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위덕왕 17년(A.D 570년) 고제(高齊) 후주(後主)가 왕을 봉하여 "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을 삼았다.」

「위덕왕 18년(A.D 571년) 고제(高齊) 후주(後主)가 또 왕을 "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使"로 삼았다.」

 

위에 나온 대방(帶方)은 북경 동쪽 계(계) 부근이고, 동청주(東靑州)는 산동반도(山東半島) 지역이다. 이때 북제(北齊)가 백제에게 동청주 지역과 대방 지역 영유를 인정해 준 것은 북제가 적대국인 북주(北周)를 상대하기 위하여 백제의 무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 28년조에 의하면 백제는 수(隋)나라로부터 대방 지역 영유를 인정받았다. 이때 수나라가 백제에게 영유를 인정해 준 지역은 대방 지역뿐이므로, 백제는 A.D 581년 이전에 산동반도 지역을 상실하였다.

 

「위덕왕 28년(A.D 581년) 수(隋) 고조(高祖)가 조서로 왕을 봉하여 "上開府儀同三司帶方君公"으로 봉하였다.」

「위덕왕 45년(A.D 598년) 가을 9월 왕을 수(隨)에서 요동(遼東)의 역(役)을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장사(長史) 왕변나(王辯那)를 수(隨)에 보내어 표를 올려 향도(鄕導)가 되기를 청하니..후략」

 

A.D 598년에 수나라가 고주몽고구려를 공격하려 할 때 백제가 군도(軍道)가 되겠다고 표를 올린 것을 보면, 백제는 A.D 598년에도 대방 지역을 영유하고 있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기(武王紀) 25년조에 의하면 백제는 당나라로부터 대방 지역 영유를 인정받았다.

 

「무왕(武王) 25년(A.D 624년) 당고조는 백제왕을 "帶方郡公百濟王"으로 삼았다.」

「동쪽에 나라를 가지고 있는 마한의 추장 제시영모는 하늘의 뜻을 거슬리고 옛 고죽국 땅을 도둑질하여 신에게 죄를 지어 오다가 신이 노하여 위기에 처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와 항복하였다. 馬韓尊長제是英髮分義景於扶桑數種天厭竊封疆於孤竹自貽神怒臨危轉禍率衆來降」 冊府元龜

 

위 문구는 옛 고죽(孤竹) 지역 즉 대방(帶方) 지역에 있던 백제장군이 당나라에게 항복한 것을 적은 것이다. 이때 당나라는 고주몽고구려의 적국인 백제에게 당나라와 고주몽고구려 사이에 있는 대방 지역의 영유를 인정해 주었다. 이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을 사용한 것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 태종기(太宗紀)에 의하면 백제는 정관 19년(A.D 645년)에 고주몽고구려에게 대방 지역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貞觀十九年十月丙辰上聞太子奉迎將至從飛騎三千人馳入臨유關..中略..諸軍所虜高麗民萬四千人先集幽州..환呼之聲三日不息」

 

통전(通典) 백제전(百濟傳)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한 후 그 곳에 있던 무리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성 부근에 남은 무리들은 후에 점점 수가 약해지자 흩어져서 돌궐이나 말갈에 투항하였고, 그 군장인 부여숭은 옛 나라로 돌아갈 수 없었다. 城傍餘衆後漸寡弱散投突厥及靺鞨其主夫餘崇竟不敢還舊國夫餘氏君長遂滅」

 

 

7. 백제분국과 북위.고주몽고구려간의 전쟁상황

 

 

고주몽고구려는 A.D 425년에 북위에 사신을 보내었고 그 때부터 북위와 고주몽고구려는 동맹세력이 되었다.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유성(柳城)에서 북평(北平) 사이에 있던 옛 백제분국을 탈환하기 위하여 대명(大明) 2년(A.D 458년)에 여기(餘紀), 여곤(餘昆) 등 11명의 백제장군들을 송(宋)에 파견하였고, 송은 이들을 백제의 직급대로 송(宋)의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송에 파견된 백제장군들은 백제와 송의 장군을 겸임하였고 백제장군들이 송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大明二年京遣使上表曰..仍以行冠軍將軍右賢王餘紀爲冠軍將軍以行征虜將軍佐賢王餘昆行征虜將軍餘暈竝爲征虜將軍以行輔國將軍餘都餘乂竝爲輔國將軍以行龍양將軍沐衿餘爵竝爲龍양將軍以行寧朔將軍餘流마貴竝爲寧朔將軍以行建武將軍于西餘婁竝爲建武將軍」宋書 百濟傳

 

이때 임명된 백제장군들의 직위는 제일 우두머리인 관군장군을 비롯하여 북위 정벌을 담당하는 정로장군과 그 외 보국장군, 용양장군, 영삭장군, 건무장군 등이다. 이때부터 송.백제 연합군은 A.D 458년경부터 북위(北魏)를 공격하여 A.D 463년에 난하(난河)에서 북평(北平) 사이 지역을 탈환하였고, 백제는 A.D 465년에 그 곳에 요서분국(遼西分國)을 두고 고달(高達), 양무(楊茂) 등을 요서분국의 태수(太守)로 임명하였다.

 

「牟大又表曰臣所遣行建威將軍廣楊太守兼長史臣高達行建威將軍朝鮮太守兼司馬臣楊茂行宣威將軍兼參軍臣會邁等三人..往太始中比使宋朝」

南齊書 百濟傳

 

위 나라태수, 대방태수는 A.D 313-400년경까지는 대릉하 남쪽 방면에 두었으나, A.D 465년부터는 난하에서 북경 사이에 두었다.

백제가 난하에서 북경 사이 지역을 수복하자 이에 당황한 고주몽고구려는 A.D 425년 이후 거의 보내지 않던 북위(北魏) 사절을 백제가 요서분국(遼西分國)을 설치한 A.D 465년부터 매년 보내었다.

[참고 고주몽고구려가 A.D 465년부터 매년 북위 사절을 보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이 시기 북위와 고주몽고구려간의 외교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꼭 이해할 필요가 있다].

A.D 467년에 북위가 청주자사(靑州刺史) 심문수(沈文秀)를 꾀어 복속시킴으로써, 백제는 산동반도 지역을 상실하였고, 그 때문에 요서분국(遼西分國)과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간의 통로가 차단되었다.

A.D 471년에 고주몽고구려는 송(宋)과 손을 잡고 백제의 중국동해안분국을 빼앗았다. 고주몽고구려는 이에 그치지 않고 북쪽으로 유유(유유), 남쪽으로 송(宋), 서쪽으로 북위(北魏)와 같이 백제의 요서분국(遼西分國)을 사방으로 포위하여 고립시켰다.

A.D 475년에 고주몽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을 점령당하여 국력이 약해져 있던 백제는 요서분국 군대의 도움으로 국력을 회복하여 A.D 487년에는 대마도를, A.D 488년에는 일본열도를 각 평정하여 인현천황을 세우고 일본열도를 다시 백제의 후국으로 만들었다.

[참고: 일본열도왜는 대화 지역에 소국연맹이 다시 세워진 인현천황 때부터 종전까지 사용하지 않던 휘를 사용하였는데, 일본열도왜가 왜 인현천황 때부터 휘를 사용하게 되었는지? 백제와 일본열도왜가 A,D 488년에 다시 동일세력이 된 이유? 이 해부터 북위와 고주몽고구려가 일년에 3번씩 사절을 교환한 이유? 이 해에 백제와 북위간에 전쟁이 일어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백제사 뿐 아니라 고주몽고구려사, 북위와 고주몽고구려간의 외교사, 일본열도왜 역사 등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므로 꼭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부 사학자들은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여 A.D 488년이나 490년에 백제가 북위, 고주몽고구려와 싸운 사실이 없고, 백제와 싸운 상대방은 고주몽고구려이지 북위가 아니며, 싸운 장소도 요서가 아니고 한반도라고 주장하였다.]

같은 해 백제는 백제본국과 후국의 군사들로 구성된 백제군의 주력(主力)을 중국동해안으로 이동시켰다. 백제군의 주력이 중국동해안으로 이동하자 북위와 고주몽고구려는 바짝 긴장하여 이때부터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일년에 3번씩 서로 사신을 교환하며 동맹관계를 강화하였다.

같은 해 백제군의 주력이동으로 병력이 강화된 백제.남제 연합군은 북위가 영유하고 있던 산동반도 지역과 고주몽고구려가 영유하고 있던 중국동해안 지역을 공격하였다.

 

「太和12年夏四月蕭신將軍陳顯達等寇邊」北魏書

「永明六年魏遣兵擊百濟爲百濟所敗」資治通鑑

 

이 전쟁 후 모대(牟大)는 영명(永明) 8년(A.D 490년)에 남제황제에게 공훈장령들에 대한 관작(官爵) 수여 요청 표문을 올려 남제로부터 양무(楊茂)는 광릉태수(廣陵太守) 작호를, 회매(會邁)는 청하태수(靑河太守) 작호를, 고달(高達)은 대방태수(帶方太守) 작호를 각 받았다. 이로 보아 요서분국 장군인 고달은 요서분국을 확장하는데, 양무(楊茂)와 회매(會邁)는 중국동해안분국을 수복하는데 각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牟大又表曰臣所遣行建威將軍廣陽太守兼長史臣高達行建威將軍朝鮮太守兼司馬臣楊茂行宣威將軍兼參軍臣會邁..中略..達..今假行龍양將軍帶方太守茂..今假行建威將軍廣陵太守萬(邁誤記?)..今假行廣武將軍靑河太守」

南齊書 百濟傳

 

위 광양은 북경 북쪽 방면이고, 조선은 난하 서쪽 방면이며, 대방은 계(계) 동쪽이고, 청하는 산동반도 방면이며, 광릉은 양자강하류 방면이다.

위 문구를 보면 북위(北魏)는 A.D 467년에 청주자사 심문수(沈文秀)를 꾀어서 빼앗은 산동반도 지역을, 고주몽고구려는 A.D 471년에 백제로부터 빼앗은 중국동해안 지역을 백제에 각 빼앗겼다.

A.D 490년에 북위.고주몽고구려 연합군이 백제의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다시 공격하였으나 백제.남제 연합군에게 무참히 패배하였다.

 

「建武二年牟大遣使上表曰去庚午年험윤弗悛擧兵深逼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宵襲霆擊匈梨張惶崩若海蕩乘奔追斬장屍丹野由是퇴其銳氣鯨暴韜凶今邦宇謐靜實名等之略尋共功勳宜在褒顯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贊首流爲行安國將軍

벽中王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木千那前有軍功又拔臺舫爲行廣威將軍面中侯伏願天恩特愍廳除又表曰臣所遣行龍양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

臣張塞行揚武將軍陳明在官忘私唯公是務遣危授命蹈難弗願今任臣使昌涉波險盡其至誠實宜進爵各假行署伏願聖朝特賜除正詔可병賜軍號」

南齊書 百濟傳

 

남제서에는 북위 또는 고주몽고구려 군사가 험윤(험윤) 또는 흉리(匈梨)로 비하되어 적혀 있다.

일부 사학자들은 북위서(北魏書)에 백제와 북위가 싸운 내용이 없으므로, A.D 490년에 백제가 북위와 싸웠다는 남제서(南齊書) 문구는 믿을 수 없고, 또 백제가 싸운 상대방도 북위가 아니고 고주몽고구려이며, 싸운 장소도 한반도이지 요서(遼西)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와 북위가 A.D 488년에 싸웠다고 적혀 있는 것은 자치통감 내용을 취하였기 때문이고 실제로는 A.D 490년에 백제와 고주몽고구려가 싸웠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은 당시의 북위와 고주몽고구려간의 외교관계, A.D 488년에 백제가 일본열도왜를 평정하고 인현조를 세운 사실, 백제가 백제본국과 일본열도왜 주력을 요서로 보낸 사실 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고, 또 북위가 백제와 싸워 패배한 사실을 수치스럽다고 북위서에 적지 않은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8. 담로제

 

 

구태백제는 담로제(담魯制)라는 특이한 제도를 사용하였다.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는 담로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號所治城曰固麻謂邑曰담如中國之言郡縣也其國有二十二담魯」

 

 

1). 일본열도(日本列島) 방면 담로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52년조에는 백제가 칠지도를 만들어 신공에게 보낸 내용이 나오고, 칠지도 명문(銘文)을 보면 문구 중에 왜왕(倭王)과 후왕(侯王)이 나온다. 칠지도 문구로 보아 구태백제는 야마대연맹왕을 왜왕이라 부르고 야마대연맹에 속한 백제계 소국왕(小國王)을 후왕(侯王)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서기 무열천황기(武列天皇紀) 7년조에는 칠지도 명문 문구와는 달리 담로의 명칭이 군(君)으로 적혀 있다.

백제가 일본열도에 있는 백제계 소국(小國)에 담로(담魯)를 계속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 응신조(應神朝), 인현조(仁賢朝) 등이 모두 강력한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 국가가 아니고 소국연맹체(小國聯盟體)이며, 일본열도를 실질적으로 다스린 사람은 연맹왕인 천황(天皇)이 아니고 각 소국(小國)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2). 중국 방면 담로

 

 

백제는 중국에 있는 백제분국에도 담로를 보내었는데, 백제가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에 보낸 담로들의 직명은 장군(將軍), 왕(王), 후(侯), 태수(太守)였다. 이는 담로들의 임무가 무력으로 분국을 유지 확장하는 것이 주임무이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담로 중에는 여씨(餘氏)가 아닌 사람도 보인다. 이는 자제, 종친이 아닌 사람이라도 능력이 있는 사람을 담로로 임명하였기 때문이다.

중국사서에 나오는 담로들의 명칭을 보면, 왕(王) 명칭으로 적혀 있는 것이 도한왕(都漢王), 아착왕(阿錯王), 매로왕(邁盧王), 매라왕(邁羅王), 벽중왕(벽中王), 면중왕(面中王)이고, 후(侯) 명칭으로 적혀 있는 것이 불사후(弗斯侯), 불중후(弗中侯), 팔중후(八中侯)이고, 태수(太守) 명칭으로 적혀 있는 것이 광양태수(廣陽太守), 조선태수(朝鮮太守), 대방태수(帶方太守), 광릉태수(廣陵太守), 청하태수(淸河太守), 성양태수(城陽太守), 나라태수(樂浪太守)이다.

온조백제와 구태백제로 나누어져 있던 한반도 백제 지역은 5세기 초 백제가 통합되어 5부 5방 제도가 실시되면서부터 담로제가 사라졌다.

 

 

9. 양나라 때 백제분국 상실사유

 

 

A.D 502-503년에 백제는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고주몽고구려에 상실하였다.

A.D 502-503년에 백제가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상실한 원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당시 백제왕실에서 일어난 내분과 개로왕(蓋鹵王), 문주왕(文周王), 곤지(昆支), 무령왕(武寧王), 모도(牟都), 모대(牟大)간의 관계를 살펴본다.

 

「영명 8년(A.D 490년)에 백제왕 모대(牟大)가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리므로..중략..모대를 책봉하여 조부 모도(牟都)를 이어받아..후략」 南齊書 百濟傳

「백제신찬(百濟新撰)에 말하였다. 말다왕(末多王)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학한 짓을 하였다. 국인(國人)이 같이 제거하였다. 무령왕(武寧王)이 섰다. 사마왕(斯摩王)이다. 이는 곤지(琨支) 왕자의 아들이다. 즉 말다왕의 이모형(異母兄)이다. 곤지가 왜에 향하였을 때 축자도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중략..지금 생각하니 도왕(島王)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말다왕(末多王)은 곤지왕(昆支王)의 아들이다. 이를 이모형(異母兄)이라 함은 미상이다.」日本書紀 武列天皇紀 4年條

「문주왕(汶洲王)은 개로왕(蓋鹵王)의 모제(母弟)이다. 구마나리(久痲那利)를 말다왕(末多王)에게 주었다 한다. 아마 이는 잘못일 것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의 하치호리현(下치呼唎縣)의 별읍이다.」日本書紀 雄略天皇紀 21年條

「백제의 문근왕(文斤王)이 훙(薨)하였다. 천황이 곤지왕(昆支王)의 다섯 아들 중 둘째 말다왕(末多王)이 젊고 총명하므로..중략..이를 동성왕(東城王)이라 한다.」日本書紀 雄略天皇紀 23年條

 

문주왕과 개로왕의 관계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문주왕이 개로왕의 아들로 적혀 있으나, 일본서기 웅략천황기(雄略天皇紀) 21년조에는 문주왕이 개로왕의 모제(母弟:어머니가 같은 친동생)로 적혀 있다. 백제신찬을 보고 지은 일본서기 내용대로 문주왕은 개로왕의 친동생으로 보인다.

무령왕과 동성왕의 관계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적혀 있으나, 일본서기에는 백제신찬을 인용하여 무령왕이 동성왕의 이모형(異母兄)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서기 웅략천황기 5년 4월조를 보면 가수리군(加須利君:동성왕)이 동생 군군(軍君:곤지)의 요청에 따라 군군(軍君)을 임신한 자기 부인에게 장가들였고, 그 부인이 군군(軍君)과 함께 일본으로 가다가 축자(북구주)의 각라도(各羅島)에서 도군(島君)을 낳았다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무령왕은 호적상으로는 곤지의 아들이지만 실제로는 개로왕의 아들이다. 따라서 무령왕과 동성왕간의 관계는 호적상으로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이모형(異母兄:어머니가 다른 형제)이지만 실제로는 사촌간이다.

모도와 모대와의 관계는 남제서(南齊書)에는 모도가 모대의 조부(祖父)로 적혀 있으나, 양서(梁書)에는 모도가 모대의 아버지로 적혀 있다. 동성왕의 부(父)는 곤지이고 곤지는 개로왕, 문주왕과 형제간이므로, 곤지의 부(父)는 비유왕이다. 따라서 모도는 동성왕의 친조부(親祖父)나 친부(親父)가 아니다.

일부 사학자들은 모도를 문주왕이라고 주장하였다. 모도는 A.D 480년에 남제로부터 2품인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이라는 관작(官爵)을 수여 받았고, 문주왕은 A.D 477년에 일어난 해구(解仇)의 반란 때 피살되었으므로, 모도와 문주왕은 동일인물이 아니다.

모도의 다른 이름은 진로(眞老)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동성왕이 즉위한 후 제일 처음 한 일은 동성왕 4년(A.D 482년)에 진로(眞老)에게 병관좌평과 내외병마사 직위를 수여하여 군사에 관한 모든 업무를 위임한 것이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동성왕이 남제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제일 처음 한 일은 A.D 480년에 모도에게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이라는 관작을 내려 달라는 표문을 올린 것이었다.

백제본기와 남제서를 대비해 보면 동성왕이 즉위한 후 백제의 모든 군권을 장악한 사람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로(眞老)이고 남제서에 의하면 모도(牟都)이다. 따라서 모도와 진로는 동일인물이므로 모도는 진로의 다른 이름이다.

곤지, 모대, 문주왕, 개로왕, 무령왕간의 관계를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餘映

↕父子

牟都 毘有王

↕父子

昆支 →兄弟←文周王→兄弟←蓋鹵王

↕父子 ↕父子

武寧王→異母兄←東城王(牟大) 三斤王

 

앞에 나온 내용을 참고로 하여 개로왕(蓋鹵王) 말기부터 무령왕(武寧王) 즉위 시까지 상황을 정리해 본다.

A.D 455년에 개로왕의 모제(母弟)인 문주(文周)는 개로왕을 보좌하여 상좌평의 지위에 올랐고, 3년 후인 A.D 458년에 모도는 개로왕으로부터 중국에 위치한 백제분국의 담로로 임명되어 송으로부터 보국장군(輔國將軍)이라는 관작을 받았다.

A.D 475년 고주몽고구려 공격으로 개로왕이 죽고 왕족 등 8천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가자 문주가 왕이 되어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A.D 476년 가을 8월에 해구(解仇)는 병관좌평으로 승진하여 병권을 장악한 후 은솔 연신(燕信)과 같이 임금을 무시하고 군국정사를 마음대로 처리하자 문주왕은 A.D 477년에 해구를 견제하기 위하여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으로 삼고 장자 삼근(三斤)을 태자로 삼았다.

그 해 5월 흑룡(黑龍)이 웅진에 나타났다. 이는 모도(牟都)가 해구 등을 견제하기 위하여 요서분국 군대를 이끌고 백제본국으로 온 것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다. 모도가 이끄는 요서분국 군대가 나타나자 해구(解仇)는 그 해 9월에 문주왕을 죽이고 허수아비 삼근왕을 세운 후 대두성(大豆城)을 근거삼아 배반하였으나, A.D 478년 봄에 진남(眞男)과 진로(眞老)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백제본기에는 문주왕이 A.D 478년 9월에 죽은 것으로 적혀 있으나, 해구가 문주왕을 죽이고 삼근왕을 세운 해는 A.D 477년이고, 해구의 반란이 진압된 시기는 A.D 478년 봄이므로, 문주왕이 죽은 때는 A.D 477년 9월이다.

A.D 479년에 삼근왕(三斤王)이 갑자기 죽었다. 삼근왕이 죽자 모도는 같은 해 모대(牟大)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이때 무령(武寧)의 나이가 18세이고, 모대는 그 보다 더 어렸는데도 모대가 왕위에 오른 것은 요서분국 군대를 이끌고 온 모도의 지원에 힘입은 것이다.

동성왕이 즉위한 후 모도는 동성왕으로부터 병관좌평과 내외병마사를 위촉받아 백제의 모든 군권을 장악하였고, A.D 480년에 남제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이라는 관작을 받았다.

A.D 497년에 진로(眞老)가 죽고 연돌(燕突)이 병관좌평으로 승진하였다. 이는 A.D 501년에 일어난 내란 때 동성왕계가 패배하는 원인이 되었다.

A.D 500년 12월에 소연(蕭衍)이 반란을 일으켜 남제(南齊)를 장악하자 다음달인 A.D 500년 1월에 백제에도 정변이 일어났다.

 

「동성왕 23년(A.D 501년) 봄 정월 서울에서 할멈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갔다. 호랑이 2마리가 남산에서 싸우므로 잡으려다 못 잡았다..중략..8월 가림성(加林城)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로서 지키게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사자의 동원(東原)에서 사냥하였다. 11월 웅천의 북원(北原)에서 사냥하고 또 사자의 서원(西原)에서 사냥하였다. 백가(백加)에게 가림성을 지키게 하니 백가는 가기 싫어서 병을 핑계로 사직하니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써 왕을 원망하더니 이에 당하여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찌르게 하여 12월에 돌아갔다.」

 

위 할멈 또는 여우는 동성왕의 모를, 호랑이 2마리는 동성왕과 무령왕을 지칭한 것이다.

위 문구의 의미는 A.D 501년 정월에 무령왕이 반란을 일으켜 동성왕과 싸웠고, 싸운 장소는 부여와 공주 부근이며, 이 전투 결과 무령왕계가 승리하여 12월달에 동성왕이 죽었다는 것이다.

위 문구에는 동성왕계인 백가가 동성왕을 죽인 것처럼 적혀 있으나, 일본서기 무열천황기 4년조에는 국인(國人)이 같이 동성왕을 제거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로 보아 동성왕을 죽인 사람은 동성왕계인 백가가 아니라 무령왕계 반란군이다. 그렇다면 일본열도왜는 왜 무령왕을 지원하여 동성왕을 밀어내었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무령왕계의 세력 근거지를 살펴본다.

 

「전략..무령왕이 섰다. 휘(諱)는 사마왕(斯麻王)이다. 이는 곤지(琨支) 왕자의 아들(原註 실은 곤지의 형인 개로왕의 아들)이다..중략..왜에 향하였을 때 축자도(筑紫島)에 이르러 사마왕을 낳았다..중략..지금도 각라(各羅)의 바다 속에 주도(主島)가 있다. 왕이 탄생한 섬이다. 후략」日本書紀 武列天皇紀 4年條

 

위 문구를 보면 무령왕은 축자도에서 출생한 후 후국(侯國)인 일본열도에서 자랐다. 그 때문에 무령왕계의 세력 근거지는 일본열도였다.

당시 백제본국(百濟本國)에 있던 무령왕계 세력들은 요서분국(遼西分國)과 중국동해안분국(中國東海岸分國)을 근거지로 한 동성왕계 세력에게 눌려지내다가, A.D 500년 12월에 남제(南齊)에 정변이 일어나 백제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나도 남제의 정변 때문에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에 있던 백제분국의 군대가 백제본국으로 올 가능성이 없자 다음달인 A.D 502년 정월에 일본열도에 있던 무령왕계 세력들을 동원하여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 동성왕을 쫓아내고 무령왕을 세웠다.

무령왕계와 동성왕계의 싸움에서 동성왕계가 패배함으로써 한반도에 있던 동성왕과 동성왕계인 요서분국과 중국동해안분국 출신 고위관리들은 모두 몰락하였다. 이에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에 있던 백제장군들이 백제본국에 등을 돌리고 고주몽고구려에 복속함으로써, 백제는 중국동해안분국과 요서분국을 상실하였다.

이 정변으로 일본열도왜(日本列島倭)와 백제(百濟)와의 관계도 역전(逆轉)되어 백제는 종주국(宗主國)의 위치에서 일본열도왜의 지원을 받는 처지로 전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