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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역사
제2장 고대
제4절 통일신라시대의 청주

1. 통일신라의 지방 행정구역 개편과 서원경의 설치

1) 통일신라의 지방 행정구역 개편

7세기 후엽 한국사는 커다란 전환기에 접어드는데, 그것은 한반도 안에서의 신라의 삼국통일과 만주에서의 발해의 건국이었다. 이제 한국의 고대사회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와 발해의 역사가 펼쳐지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확대된 영토와 인구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보다 정비된 정치제도를 필요로 하였다. 이에 따라 중앙의 정치기구는 확대되고 지방 행정조직도 재편성되는 조치가 취해지게 되었다. 즉 통일신라의 중앙 정치기구는 집사성을 중심으로 10여 개의 관부가 설치·운영되고 지방은 9주 5소경제로 정비되었다.

통일신라의 지방제도는 신문왕(神文王, 681∼692) 5년(685)에 9주 5소경의 제도를 마련함으로써 일단 완비되었다. 9주는 통일 전의 신라의 옛 영역이었던 5주를 바탕으로 백제와 가야지역에 4주를 설치하고, 이어 새로 편입된 고구려의 옛 땅 남부를 북방의 주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주의 장관은 문무왕 원년(661)에 군주(軍州)에서 총관(摠管)으로 고쳤다가 원성왕 원년(785)에 다시 도독(都督)으로 개칭하였다. 이것은 당제를 모방하여 종래의 군사적인 성격에서 민정 장관의 성격으로 바뀌어졌음을 뜻한다.

소경제(小京制)는 이미 통일 전에 설치한 국원소경(國原小京, 충주)을 비롯하여 문무왕때 북원소경(北原小京, 원주)·금관소경(金官小京, 김해)이 설치되었고, 다시 신문왕때 서원소경(西原小京, 청주)·남원소경(南原小京, 남원)이 설치되었으며, 경덕왕때에는 종래의 국원소경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개칭됨으로써 일단 5소경 체제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신라의 5소경은 행정구획의 의미보다도 정치적 또는 문화적 필요에 의해서 설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지방제도의 기본이 되는 것은 주(州)·군(郡)·현(縣)이었다. 주 밑에는 군?현을 설치하였는데,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전국에 군이 120개이고, 현은 305개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군에는 장관으로 군태수(郡太守)가 있고, 현에는 현령(縣令) 또는 소수(少守)가 있었는데 이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였다. 특히 주와 군에는 감찰의 임무를 가진 외사정(外司正)이 파견되어 있어 통일 전보다 더욱 중앙 집권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주·군·현과 5소경 밑에는 일반적으로 촌(村)이라는 보다 작은 행정구역이 설정되어 있었다. 행정적으로 설정된 촌은 자연촌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몇 개의 자연촌이 합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행정촌에는 그 지방의 토착 유력자를 촌주(村主)로 임명하여 중앙으로부터 지방관이 파견된 지방 행정기관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이러한 촌주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에 주·군·현의 이(吏)가 있었다. 이들은 촌주와 같이 토착 세력 출신이지만, 주·군·현의 말단 행정 보좌직으로서 중앙정부의 의존도는 촌주보다도 더 컸다. 이들은 향촌사회에서 정치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촌주의 경우 신분적으로 중앙귀족의 5두품과 4두품에 해당하는 진촌주(眞村主)와 차촌주(次村主)로 나누어져 있었고, 관등도 중앙귀족과 마찬가지로 경위(京位, 17관등)를 받았다. 따라서 중앙정부는 이들 지방 토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들 중 한 사람을 상경시켜 왕경의 여러 관부를 지키게 하는 상수리(上守吏) 제도를 마련하였다.

한편 주·군·현 밑에는 촌 이외에 향(鄕)과 부곡(部曲)이 있었다. 향과 부곡의 행정 계통상의 위치는 촌과 비슷하였으나, 다만 그것은 피정복민이나 전쟁포로의 집단 주거지를 재편성한 것으로 그 주민의 신분은 촌락민과는 달리 천민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에도 토착 세력가가 있어서 촌주와 마찬가지로 향과 부곡에 대한 행정사무를 관할하였다.

2) 서원경의 설치와 구조

(1) 5소경의 설치과정과 성격

신라는 정복한 지역의 토착 지배층을 강제로 다른 지역에 이주시켜 살게함으로써 토착세력을 효과적으로 분해시키는 정치적 조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신라가 체제를 정비하고 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조처가 뒤따랐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소경 설치로 나타났다. 통일신라 이전에는 이미 아시촌 소경(阿尸村小京, 514)과 국원소경(충주, 557) 및 북소경(강릉, 639)이 각각 설치되었다. 아시촌 소경은 신라 지방행정 조직상 최초의 소경으로서 그 위치는 경북 의성군 안계면 안정동 일대로 비정된다. 이곳은 왕도인 경주와 지근한 거리에 있어 신라의 중앙문화에 영향을 깊게 받을 수 있는 지역이었고, 지증왕대 각 지방에 주·군제가 실시(504)되고 상주에 사벌주가 설치되면서(511) 경주와 이곳을 연결하는 새로운 중간 거점도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충주지역은 신라의 중앙권력이 미치기 어려운 소백산맥 이북의 북방영토를 관리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전략적 중요성이 기대되는 곳이었다. 반면 강릉의 북소경은 말갈의 침입이 상존하는 곳이기 때문에 설치한 지 얼마 안되어 658년에 소경을 폐지하고 주로 환원시켰다. 그 대신 실직(삼척)에다 군사적 거점단위의 성격을 가진 북진(北鎭)을 설치하여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여기서 소경은 군사적 의협이 노정되는 안보상 불안정한 지역에 설치될 수 없음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북소경은 위치 선정이 잘못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북소경의 폐지로 후에 5소경 중 동원경이 설치되지 않는 결과가 생겨나게 되었다.

신라의 소경제 채용은 고구려의 3경제 운용에 관한 지식과 경험을 참작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그 직접적인 계기는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체제정비와 왕경의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다. 특히 지증왕대부터 주군제가 실시되고 변경지역에 이르는 관도와 우역이 정비됨에 따라 왕경과 변경지역을 연결하는 중간 거점도시로서 소경제가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 이전의 소경제는 영역확대에 따라 신라의 중앙권력이 미치기 어려운 지역에 소경을 설치하여 지방지배의 효율성을 제고시키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이어 삼국 통일기인 문무왕과 신문왕대에 걸쳐 소경제는 일단 전국적으로 체계있게 방위 명칭을 가진 5소경제로 정비를 보게 된다. 고구려 옛땅인 원주에 북원소경(678)이, 가야의 옛땅에는 김해의 금관소경(680)이, 백제의 옛땅인 청주의 서원소경과 남원의 남원소경(685)이 차례로 설치되어 통일 이전의 충주 국원소경과 함께 5소경의 체제를 갖추게 된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되자 동남쪽으로 편재되어 있는 경주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중앙 통치력을 미치는 데에는 일정한 제약이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고구려 지역에 2개, 백제 지역에 2개, 가야 지역에 1개를 배정하여 복속된 고구려·백제·가야의 옛 귀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살게하였다. 가령 중원소경에는 대가야의 귀족들이 강제로 사민해 옴으로써 가야금과 가야춤이 전존되었으며, 남원소경에는 고구려의 귀족들이 옮겨와 살면서 고구려 악사나 법경(法鏡) 대사와 같은 승려를 배출하게 되었다. 신라는 이들 복속민을 감시할 필요에서 중앙의 귀족들을 보내 이를 감시·견제하는 역할을 담당케 하였던 것이다. 주와 군이 군정적 거점으로서의 성격이 강한데 비하여 소경은 주로 정치적·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성격이 강했고, 한편으로는 주와 군을 견제·감시하는 듯한 기능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 시기의 5소경 설치는 통일 이전 시기와는 달리 통일전쟁이 끝난 직후에 귀족세력의 재배치를 통한 왕권의 전제화 시책과 관련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문무왕은 통일전쟁의 성공을 바탕으로 왕권강화를 위한 대내적 정치개혁을 두 가지 방향으로 추진해 나갔다. 하나는 진골귀족들의 군사적 기반을 박탈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관료적인 질서의 확립이었다. 이어 신문왕대에는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지방세력의 통제를 도모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포화상태에 있는 중앙의 귀족세력들을 소경에 분산 배치함으로써 왕권강화도 기할 수 있고, 또 고구려·백제·가야의 옛땅에 소경을 고루 배치하고 왕권 주도하에 이들을 고루 사민시켜 중앙권력에 의한 지방지배의 효율성을 기할 수 있는 의미도 갖고 있다.
소 경 명
설 치 연 대
현 위 치
비 고
아시촌 소경
지증왕 15년(514)
경북 의성 안계 

면 안정동

557년 폐지(?)
국원소경 

(중원소경)

진흥왕 18년(557)
충 주
북소경
선덕여왕 8년(639)
강 릉
658년 폐지
북원소경
문무왕 18년(678)
원 주
금관소경
문무왕 20년(680)
김 해
서원소경 
신문왕 5년(685)
청 주
남원소경
신문왕 5년(685)
남 원
 

<표 4-1> 신라 5소경의 설치과정

통일 후의 소경제에서는 중원소경이라는 명칭에서 시사를 받듯이 충주의 중원소경을 중심으로 하여 소백산맥을 넘어 교통로상의 요지에 설치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방위 명칭을 가진 소경이 고구려와 백제의 옛땅을 대상으로 사방에 설치된 것이라면 금관소경은 이와는 별도로 옛 가야지역에 대한 통치상의 효율성을 고려해서 배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방위 명칭을 가진 소경은 평원에 설치되었으며, 그 위치가 직접적인 군사 위협에서 벗어난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한 주의 치소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설치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점은 소경의 기능이 군사적 측면보다 행정적 측면에 더 비증을 두고 있음을 반영해 주고 있다. 그 설치 지점도 기존의 소국이나 고구려·백제때의 정치적 비중이 높았던 지역을 배제하고 오히려 이 지역을 배후에서 공제할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기존 세력의 연고성과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인근 주와 군을 견제·감시하는 역할을 통해서 중앙권력의 지방지배를 적극화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 5소경도 경덕왕 18년(759)에 추진한 한화정책에 따라 명칭과 직제상에 있어서 약간의 변화를 겪게 된다. 서원소경이 서원경으로, 남원소경이 남원경으로 불려지듯이 소경의 명칭이 경(京)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 관원인 사대등(仕大等)과 사대사(仕大舍)를 중국식으로 대윤(大尹)과 소윤(少尹)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2) 서원경의 설치 배경과 구조

오늘날의 청주와 그 부근의 일부 지역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새로이 지방조직을 정비할 때에 소경이 설치된 지역이다. 신문왕 5년(685)에 남원소경과 함께 청주에 서원소경이 설치되고 아찬(阿?, 6위) 원태(元泰)가 최초로 최고 책임자인 사신(仕臣 또는 仕大等)에 임명되었다. 서원소경의 설치는 신라의 영토를 9개의 주로 나누어 통치하는 지방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점에서 정복지역의 토착 지배층을 강제로 이주시켜 성립된 중원소경과는 달리 여러 곳의 주·군에서 민호를 옮겨 살게 하였던 행정적 계획적인 소경이었다. 685년 소경은 설치되었지만 아직 모든 시설이 제대로 마련되지는 못하였다. 4년 뒤인 689년에 가서야 서원경성이 축조됨으로써 비로서 소경의 면모를 하나씩 갖추어 나갔던 것이다.

본래 백제의 상당현이었던 지역에 통일신라가 서원소경을 설치하는 데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와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청주지역은 당시 신라의 왕도 경주에서 상주를 거쳐 관기·보은·수리티와 피반령을 넘어 청주에 이르는 통로가 있었고, 여기서 북동으로는 증평·도안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북으로 진천·죽산·안성을 거쳐 한강유역에 통하며, 서쪽과 서북쪽으로는 공주와 남양만에 이르는 옛백제 가도상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동으로는 노령산맥의 산지를 등지고 있고, 서로는 파랑상의 구릉지가 연이어져 있는 준평원에 곡창지대인 미호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무심천이 이곳을 관통하여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는 산록도시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볼 때 금강유역의 옛백제 지역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 적합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이곳에 소경을 설치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이다.

서원소경은 백제시대에 상당현이 설치된 곳이기 때문에 그 규모는 현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일개 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통일 후 신라가 백제의 행정 단위를 거의 따르고 있는 것을 감안해 보면 신라의 군이나 현 정도의 규모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서원경의 규모는 대략 현재의 청주시와 청원군의 일부 지역을 포괄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원군은 현재 14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문의면, 현도면, 부용면, 미원면, 가덕면의 일부 지역이 신라시대에 독립적인 행정구역이었기 때문에 서원경의 영역에 포함될 수는 없다. 즉 문의면은 백제때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이었다가 신라때 연기군(燕岐郡)으로 개칭되었고, 현도와 부용면은 백제의 우술군(雨述郡)으로 신라때의 회덕군(懷德郡) 관할하에 있었다. 미원면은 신라 삼년군의 영현인 살매현(薩買縣)에 속한 곳이었고, 가덕면의 일부 지역은 신라 매곡현(昧谷縣)의 관할이었다. 대신 대전시 동면 사정동 지역으로 비정되는 주안향(周岸鄕)과 전의의 덕평향(德平鄕) 및 청안의 조풍부곡(調豊部曲)은 청주의 관할이었다.

서원소경은 그 중심부와 주변의 일정한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서원(소)경성의 중심적인 위치가 어느 곳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여러 견해가 제시되고 있지만, 현존하는 유적으로 보면 청주시 동부에 위치한 우암산의 내외곽과 배후의 상당산성으로 일단 규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의 사찰과 관련된 유적이 현재의 우암산과 그 서쪽에 전개된 평야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우암산 일대와 무심천 유역이 될 것이 거의 분명하다. 이곳은 우암산의 내성과 외곽 및 옛읍성이 자리잡고, 그 외곽은 무심천변의 평지와 낮은 구릉지대이다. 이곳이 서원소경의 중심부가 자리잡은 곳이며, 여기에는 도시계획의 흔적도 있고 평지에 장방형으로 축조된 성에 둘러쌓여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문왕 9년(689)에 서원경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또 {삼국사기} 열기전(裂起傳)에 김유신의 가신인 구근(仇近)이 김유신의 셋째 아들인 원정(元貞)의 명을 받아 서원술성(西原述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원경성과 관련된 축성공사는 대략 신문왕대인 7세기 후반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13년에 제작된 1/1,200 지적도에 의하면 무심천의 제방은 남쪽으로 똑바로 서향하다가 거의 각을 이루면서 북으로 곧장 이어져 있었으며, 그 제방과 각부의 모습은 마치 방형의 토성을 연상케 한다. 제방이 성벽이었을 경우 남북 길이 660m이고 동서 너비가 600m로 둘레 2,520m에 달하는 장방형의 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옛읍성의 동서로는 북벽선을 기준하여 6개의 구역으로 길이 있으며 평균 간격은 144∼162cm와 66∼84cm의 간격을 이룬다. 이러한 길이는 왕도인 경주가 160m 사방의 규격을 가진 도시계획이 있었던 사실과 관련있어 보인다. 그리고 현재 청주시 중심가에 있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설치된 용두사지 철당간의 존재로 미루어 보아 이것이 고려초에 읍치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우암산성과 옛청주성 및 그 외곽의 무심천변의 평지와 낮은 구릉지대를 서원경성의 범위로 추정한 견해가 주목된다. 조선시대 읍성은 이 성보다 좁혀진 범위 내에서 축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서원소경은 무심천을 해자로 삼고, 동으로 바로 우암산 골짜기 입구에 이어진 곳으로서 고려 태조때 산성과 평지성을 연결한 나성이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즉 평지의 도시성과 바로 동쪽으로 인접한 우암산성, 배후에 보다 높은 위치의 상당산성으로 배치되어 있어 그 중심부가 방어도시의 성격을 농후하게 띤 전통적인 우리 나라 고대도시의 형태를 가진 것이었다. 이 전통은 고려 태조에 의해서 나성이 축조됨으로써 보다 발전된 형태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구녀산성, 서쪽으로 부모산성, 북으로 정북동 토성과 목령산성, 그리고 남쪽으로는 현 청원군 문의면과 경계하고 있다. 따라서 서원소경은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는 짧은 범위의 영역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원경성 중심부와 그 주변 지역에는 토착민과 왕경 출신의 6부민 및 여러 주·군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거주하였는데, 그들은 왕경의 행정 구역처럼 6부로 편성되어 거주하였을 것이다. 강수(强首)는 중원경 사량부 출신이었는데, 사량부는 왕경의 6부 명칭의 하나인 것으로 보아 중원경에 왕경을 축쇄한 6부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주 상당산성 남문 사면지역과 우암산성 내에서도 '사량부(沙梁部)'와 '탁부속(啄部屬)'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고 있어 서원소경에도 중원경과 마찬가지로 6부가 설치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서원소경과 그 주변에 있는 산성에는 소경여갑당(小京餘甲幢)에 소속된 병력이 주둔하고 있으면서 관할 내의 치안유지와 유사시에 대피하여 농성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또한 서원경성 일대에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우암동의 용암사(龍岩寺), 수동의 목우사(牧牛寺), 운천동의 흥덕사(興德寺)지와 구양사(句陽寺)지 등이 있어서 이곳 사람들의 종교적 구심체로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운천동의 흥덕사지에서는 사적비가 발견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신문왕 6년(686)에 보혜(寶慧) 스님이 절을 짓고 사적비를 이곳에 건립한 것이다. 여기서 그 건립시점이 서원소경이 설치된 직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절의 창건은 서원경성 설치와 깊은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비의 건립에는 아간(阿干) 천인(天仁) 등이 시주자로 참여하고 있는데, 국주대왕(國主大王)으로 표현된 신문왕에 대한 축도(祝禱)와 삼국통일의 성취 및 국부민안(國富民安) 등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점으로 보아 서원소경이 왕권과 일정한 관련하에서 설치되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 비는 사륙병려체(四六騈儷體)의 문장을 유려하게 구사하고 있는 점에서 당시 소경의 문화적 수준을 엿보게 해준다.

서원경 중심부의 외곽지역은 청원군의 일부 지역을 말하는데, 이곳은 촌락문서에 보이는 바와 같은 촌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촌락에는 촌주를 비롯하여 주로 농민과 노비들이 거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촌들은 자연 촌락으로서 재지 세력가인 촌주에 의해 통할되는 행정촌의 한 구성 요소이었다. 이 촌 주변에는 역시 산성이 축조되어 있어 유사시에 대비한 피난용 기능을 가진 것이었다. 강내면 태성리산성(248m)·저산리산성(300m)·남이면 산막리의 독안산성(596.5m)·옥산면 장동리의 동림산성(819.5m)·강외면 정중리의 병마산성(500m)·북이면 부연리의 낭비성(774m)·영하리의 할미성(738m)·오창면 주성리의 목령산성(390m)·낭성면 성대리의 낭성산성(360m) 등이 사방으로 축성되어 있었는데, 촌락들은 이러한 성을 중심으로하여 분산 배치되었음이 짐작된다.

이와 같이 서원소경의 중심부에는 왕경을 축쇄 모방한 질서정연한 도시구획이 설정되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소경여갑당에 소속된 병력을 대피용 산성에 배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여기에는 토착민과 이주해온 왕경과 여러 주군민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유려한 문장 사용과 불교활동 등에서 보듯이 문화적 수준도 높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원경 치소의 외곽에는 100여 명 내외로 구성된 촌락들이 산성을 중심으로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끝으로 서원소경의 관원과 행정계통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서원소경의 관원으로는 최고 책임자인 사신(仕臣) 또는 사대등(仕大等)이 있고 그 밑에는 사대사(仕大舍) 또는 소윤(少尹)이 있어 관내의 행정·경찰·병권·징세권 등의 역할을 하였다. 사신은 급찬(9위)에서 파진찬(4위)의 관등을 가진 진골 출신이 임명되었고, 사대사는 사지(舍知, 13위)에서 대나마(大奈麻, 10위)의 관등을 가진 인물이 임명되었다. 반면 주의 장관인 도독은 급찬(9위)에서 이찬(2위)의 관등 소지자가 임명되어 사신보다는 상위에 있었다. 중원경 사신을 '중원 대윤(大尹)'이라 별칭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종래 소경의 고유한 관원 명칭인 사신과 사대사를 당나라 식으로 대윤과 소윤으로 고쳐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한화정책에 따라 관명을 중국식으로 개칭했던 경덕왕 18년(759)의 조치와 관련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신라 하대에 이르면 당 제도의 영향을 받아 소경을 경(京)이라 하였고, 소경에 부제(府制)를 채용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관원도 대윤과 소윤이라 불렀던 것 같다. 소경의 행정 체계상 위상도 군태수로 인식될 정도로 약화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명령 전달 및 수취계통은 주에서 군과 현으로, 또 군에서 현으로 이어졌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소경은 비록 지방행정 체계상 독자적인 영역을 가진 특수 행정구역이라 할지라도, 주의 도독은 사신보다 직급상 상위에 있고 또 직할지와 영현 및 군·현을 통속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같은 관할하에 있는 소경보다도 우위에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소경의 행정계통은 사안에 따라 중층적인 통속관계가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즉 상서로운 물건을 진상할 때나 조세 수취 등은 중앙과 직속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촌락문서의 작성과 일반 행정의 일부 사안처리는 주와 상하 통속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서원경의 촌락과 농민의 생활

신라의 귀족들은 전공을 세우거나 관직에 복무하는 대가로 전쟁노비와 식읍·녹읍·사전 등의 토지를 받아 경제적 부를 늘릴 수 있었다. 또한 이들 중 식읍과 녹읍은 토지에서 나오는 조세 이외에 백성들의 노동력까지도 징발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들은 광대한 토지뿐만 아니라 '재상가는 노비가 삼천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많은 노비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삼국통일의 원훈인 김유신은 그 공로로 식읍 500호, 토지 500결, 목장 6개소를 지급받았던 사례가 참고된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귀족들은 경주에 35개의 큰 저택(金入宅)과 별장(四節遊宅)을 짓고 살면서 사치와 향락생활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이에 비해 일반 농민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1933년 일본 동대사(東大寺)의 창고인 정창원(正倉院)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촌락문서를 통해 당시 서원경과 그 주변의 거주하던 농민들의 생활상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문서는 통일신라의 정치·사회·경제의 실상을 규명하는데 있어 거의 유일한 1차사료라 할 만큼 사료로서의 가치가 큼에도 불구하고 문서의 명칭과 내용파악, 작성연대 및 문서의 성격 등에 관해 많은 이견이 제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문서는 두 장에 모두 62행으로 되어 있으며 글씨는 해서체인데 모두가 동일인의 필적으로 되어 있다. 이는 경덕왕 14년(755)에 서원경 관내의 1개 촌과 인근의 3개 촌을 대상으로 작성한 촌세 조사서였다. 여기에 나오는 촌락은 모두 4개인데 ① 당현 사해점촌(沙害漸村) ② 당현 살하지촌(薩下知村) ③ 앞 부분이 잘려나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실명촌 ④ 서원경 △△△촌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국가는 촌락 단위로 촌의 둘레 및 면적, 호수(戶數), 인구수, 우마수, 토지면적, 뽕나무(桑)·잣나무(栢)·호도나무(楸)와 같은 유실수의 나무 그루수 등의 증감 변동사항을 3년마다 한 번씩 파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촌 명
호 구
토 지
인 구
종목
官謨田沓
內視令沓
烟受有田沓
麻 田
沙害漸村
10
남 66(2) 

여 81(7)

 

전 

4결 
4결 
94결 2부4속* 

62결10부△속

1결 9부
薩下知村
15
남 47(4) 

여 78(3)

 

3결66부7속 
59결 98부 2속 

119결 5부 8속

???村
8
남 40 

여 32

 

3결 
68결 67부 

58결 7부 1속

1결?부
西原京 

???村

10
남 51(4) 

여 67(5)

 

3결 20부 

1결

25결 99부 

76결 19부

1결 8부
43
462(25)
 

14결 86부
4결
248결66부6속 

315결41부9속

(3결17부)
 
<표 4-2> 촌락문서에 나타난 호구와 토지 ( 비고 : *에는 村主位沓 19결 20부가 포함되어 있음, ( )은 노비의 숫자임)

그러면 촌락문서의 내용에 있어서 서원경 직할촌의 기재내용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 촌의 둘레는 4,800보(步)인데, 1보를 당척(唐尺)으로 6척(尺), 1척을 30cm로 계산하면 촌의 추산한 길이는 8.64km이고 촌의 중앙에서 가장 자리까지의 거리는 1.376km로 직할촌의 면적은 5.945㎢로 나타나고 있어서 다른 촌락에 비해 규모가 비교적 작았음을 알 수 있다. 촌락의 주민구성은 촌주를 비롯하여 농민과 노비들이다. 그러나 촌주는 비교적 많은 전답을 보유하고 있어 일반 농민과는 다른 신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촌주 이외에 다른 지배층 신분의 사람들이 촌락에 거주한 흔적은 없다. 농민들은 연령과 남녀별로 정(丁, 丁女)·조자(助子, 助女子)·추자(追子, 追女子)·소자(小子, 小女子)·제공(除公, 除母)·노공(老公, 老母)의 6등급으로 구분되었고 노비도 이에 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직할촌의 경우 남자 51명, 여자 67명으로 도합 118명이 거주하였는데, 직할촌의 인구수는 역시 다른 촌에 비해 적은 편이지만 1호당 평균 인구수는 약 10명으로 사해점촌 다음으로 높다. 그 중에서 16세에서 60세까지의 정(丁)은 남자가 19명, 여자가 38명으로 여자가 19명이나 많다. 살하지촌의 경우 촌락의 정남들로 이루어진 군사조직인 법당(法幢)과 여자(余子)의 존재가 나타난다. 이는 당시의 남자들이 군대나 힘든 노역에 많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풀이된다. 또 노비가 9명으로 약 6.3%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촌락에 비해 높은 편이다. 4개 촌락의 총인구에 대한 노비의 비율은 약 6%가 되는데 이로 보아 당시 일반 촌락의 노비 숫자는 별로 많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촌락의 호(戶)는 연(烟)·공연(孔烟)·계연(計烟)의 구별이 있었다. 이 중 연은 부부를 단위로 한 5명 내외의 식구를 가진 자연가호를 뜻하며, 공연은 몇 개의 연 또는 사람을 묶어서 편성한 편호라는 해석도 내려지고 있다. 공연은 인정(人丁)의 다과에 따라 상상연부터 하하연까지 9등급으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계연은 각 등급연에 1/6, 2/6, 3/6, 4/6, 5/6, 6/6 등의 기본수를 설정하여 이를 등급연의 수와 곱하여 합계를 낸 뒤에 이를 다시 분자를 분모로 나누어서 나온 몫과 나머지를 표기한 수치이다. 각 촌에서 각종 부역과 특산물 등 관수용의 경작 생산을 할당하는 기준으로 보인다. 즉 공연은 그 정(丁)과 조인(助人)의 수 및 소유 노비를 포함한 약간의 재산 정도를 참작하여 9등급으로 나누고 그 공연의 등급별 평가에 따라 촌락 단위로 계연이 산정되고, 그 계연의 수에 따라 부역과 기타 부담이 할당되었던 것 같다. 서원경 직할촌의 공연별 호의 등급은 9등급 중 8등급인 하중연이 1호, 최하등급인 하하연이 9호로 나타나고 있어 다른 촌락에 비해 매우 열악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 촌락의 경작지는 관모전답(官謨田畓)·내시령답(內視令畓)·마전(麻田)·촌주위답(村主位畓)·연수유전답(烟受有田沓)으로 구분하여 그 면적을 파악하였다. 전체 토지 면적에서 약 3.75%를 차지하고 있는 국유지는 관모전답·내시령답·마전이 있어 촌락민에 의해 경작되었다. 이외에 96.25%에 해당하는 연수유전답은 농민의 개별적 경작지로서 성덕왕 22년(722)에 지급한 정전(丁田)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이해된다. 이 중 촌주의 직전인 촌주위답은 연수유전답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어 촌주는 관료가 아니라 촌민으로 파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촌주는 100명 내외의 인구를 가진 촌락 2∼3개를 관할하는 재지 세력으로서 촌락민은 촌주를 통해 집단적으로 국가에 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직할촌의 경우 관유지인 관모전답은 3결 20부이고 마전은 1결 8부, 농민 보유지인 연수유전답은 논이 25결 99부 밭이 76결 19부를 차지하고 있다. 마전은 모든 촌락에 1결씩 있는 것으로 보아 국가에서 촌락별로 일정한 면적씩을 마전으로 설정해 농민들에 의해 공동 경작되었다. 전체적으로 한 집에서 논밭을 합해 평균 11∼15결이란 넓은 농토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의 1결의 면적이 얼마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지만 조선초기의 1호당 평균 농지소유가 1결 미만이 많았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당시의 토지사정은 아주 넉넉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경작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사회에서는 대개 지력회복을 위해 일정 기간 토지를 묵히는 휴한법이 적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수확량은 투하된 노동력에 좌우되기 마련일 것이다.

다음, 소와 말의 숫자는 전체적으로 한 집에서 소는 한 마리 정도 말은 1.5마리를 소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소는 주로 농경에 이용되었지만, 말은 유사시에 군마를 확보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강제로 사육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직할촌의 경우 소가 8마리, 말이 10마리로 도합 18마리가 있었는데, 촌락 농민들의 호당 소 보유수는 0.8마리, 말은 1.0마리로 전체 평균보다 낮은 보유율을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뽕나무·잣나무·호도나무는 국가에서 특산물세로 걷는 대상이었기 때문에 나무그루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직할촌의 경우 뽕나무가 1,235그루, 잣나무가 68그루, 호도나무가 48그루로 어느 촌락이나 뽕나무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특색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촌락 농민들은 매년 적지 않은 양의 누에고치나 비단을 세금으로 국가에 특산물세로 바쳤을 것이다.

다음으로 촌락문서의 특징과 성격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첫째, 이 문서는 모두 촌락별로 기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촌락별로 호수와 인구수, 소와 말의 수, 토지의 면적 등이 적혀 있을 뿐, 그것이 누구에게 소속되었는가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 점이 이 문서의 성격을 가늠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촌락문서는 일종의 징세 장부였으며, 국가에서는 모든 세금을 촌락 단위로 부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 문서에 기재된 내용 중 호수와 인구수의 분량이 가장 많을 뿐아니라 그 증감 변동사항에 관한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조세징수의 중요한 대상이 되었을 법한 토지의 증감사항에 대하여는 전혀 기재되지 않은 것과 좋은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아마도 당시 국가에서의 징세 대상이 곡물보다는 노동력에 중점이 두어졌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촌락문서의 작성을 통해 인적자원 파악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적 자원보다는 인적자원의 확보에 치중하는 것은 고대사회의 특징적인 현상이며 이 문서를 통해 그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신라의 촌락지배 정책은 혈연을 기반으로 형성된 자연촌을 기본 단위로 하되 거기에는 인위적 중가족제(1호당 평균 10명 내외)라고 볼 수 있는 공연을 편성하여 등급을 매겼고 다시 주로 노동력을 기준으로 하여 편성한 계연을 단위로 수취가 이루어졌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농민집단 체제에서는 중앙정권이 약화될 때 쉽게 혈연집단의 수장인 촌주를 중심으로 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진성여왕대에 성주 장군으로 불렸던 많은 호족들 중에는 촌주층에서 성장한 세력가가 많았던 것이다. 촌주들은 치안이나 유사시에 대비한 군사 조직인 여자(余子)와 법사(法私)를 관할하고 있었으므로 신라 하대의 경우처럼 중앙의 통제가 약화될 때 쉽게 자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청주시 / '97 / 체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