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num.mokpo.ac.kr/kangbr/www/토지.htm

統一期 新羅의 土地分給制度의 整備

게재 : {국사관논총}69, 1996

1. 머리말

2. 食邑制의 性格變化

3. 祿邑과 歲租

4. 文武官僚田과 百姓丁田

5. 맺음말 -結論과 展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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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삼국 통합 전후 시기인 6-8세기는 제방면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로 주목되어 왔다. 정치적으로 '部體制'가 해체되고 국왕 중심의 관료체제가 크게 강화되었고, 사회적으로 유력 가문의 대두와 함께 귀족신분세력이 구체화되었으며, 에에 따라 경제적으로 토지제 및 수취제의 정비가 일대 진전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방면의 변화는 서로 밀접한 유기적 연관성을 가지면서 나타난 것이었다고 하겠는데, 이중에서 경제제도의 정비는 특히 통일직후의 시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일련의 변화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기록상에 나타난 바만 보아도, 687년에 文武官僚田이 분급되었고, 689년에는 祿邑이 혁파되고 대신 歲租의 지급으로 대체되었으며, 722년에는 百姓丁田이 분급되었던 것으로 되어 있어, 이 시기에 경제제도의 개편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둘러싼 기왕의 견해는 토지제와 수취제의 정비라는 관점에서 다양하게 제기되었다. 녹읍의 기원과 계통성의 문제로서 食邑이 주목되었고, 문무관료전과 녹읍의 관련성 여부가 논의되었으며, 녹읍과 세조 사이의 대체성이 祿俸制의 정비라는 시각에서 검토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百姓丁田의 지급 조치가 촌락문서에 나오는 烟授有田畓과 관련 속에서, 민의 토지 사유의 관행을 국가가 공인해주는 형태로서 살펴지기도 하였다. 그간 중요한 논점들을 둘러싼 제문제가 대체적으로 짚어진 셈이다. 그렇지만 그간 논의의 기초가 되었던 식읍·문무관료전·녹읍·세조·백성정전 등에 대한 일관된 정리가 흡족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면이 있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역사적 의미가 체계적으로 파악되지 못한 감이 있다. 본고에서는 기왕의 연구 성과를 십분 참고하면서, 토지 및 보수 급여제의 정비라는 각도에서 통일기 경제제도의 개편 문제에 대한 체계적 정리를 시도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이 시기의 제반 변화상과 결부하여 탐색해 보고자 한다.

먼저 녹읍제의 성립 문제를 식읍제의 성격 변화 문제와 결부하여 살펴보고, 그 성립의 의미와 지배의 내용에 대하여 논급하기로 한다. 다음에 그런 녹읍이 혁파되고 세조로 일원화되는 과정을 녹읍제를 성립시킨 국가적 의도의 연속선상에서 검토하고, 그 의미를 살피기로 한다. 이어서 관료를 대상으로 분급된 문무관료전의 분급 조치가 취해질 수 있었던 배경을 녹읍제의 성립 및 그 혁파의 문제와 관련하여 파악하고 그 운영실태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百姓丁田의 분급 조치를 수취제 정비의 2단계 조치로서의 丁田制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하고 그 의미를 국가의 民과 土地에 대한 支配의 진전이라는 시각에서 살피고자 한다.

통일 전후기에 정비된 이러한 경제제도는 신라 중대의 경제 운영에 있어서 기본 기조로서 유지되어 갔을 것으로 보이나, 하대에 이를 떠받치던 정치사회적 제반의 기반이 급격히 무너지면서 운영의 파행성을 면치 못하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나말여초기의 무정부상태에서 나타난 그 파행적 운영의 실상과 그것이 고려조에 재편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별도의 연구 과제로 돌리기로 하고, 본고에서는 결론 부분에서 이를 전망하는데 그치고자 한다. 많은 질정을 부탁드린다.

2. 食邑制의 性格變化

食邑은 왕에게 충성을 다하여 왕실의 藩屛이 될 것에 대한 반대 급부로서 왕족과 공신 등에게 爵位와 함께 영토 혹은 민호를 분봉하는 급여제의 일환이었다. 이는 중국 周代에 領土[封土]를 분봉하여 그 지역을 직접통치하게 하던 봉건제도에서 유래하여, 漢代 이후에는 民戶[封戶]를 분봉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즉, 중국의 식읍제는 군신관계를 銘念케 한다는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성격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중국 식읍제는 우리 식읍제의 성립 및 운영에 있어서 典範이 되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우리의 식읍제는 기원 전후의 시기에 최초의 기사가 나타난 이래 조선 초기에 소멸될 때까지의 장구한 기간 동안에, 고대와 중세의 시대를 관통하는 제도로서 존속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식읍제는 그 기본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상의 변화에 따라 성격 변화를 가져왔을 터이다. 그 성격 변화의 한 기점으로서 삼국 통합 전후시기를 일단 주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 시기를 경계로 하여 전후 식읍제의 변화상을 두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식읍은 왕실의 성원이나 대공신이라는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 한정된 급여제라 하겠으나, 그 성격의 변화는 제반 경제 기반의 변화 과정에서 그 결과로서 나타난 바라 하겠으므로, 본고에서는 이를 민과 토지에 대한 일반적인 지배의 관행과 그 변화의 모습을 반영하는 일종의 바로미터로서 간주하면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1) 제 1단계의 식읍제

우리의 초기 식읍 관계 기록은 다음과 같이 주로 <<三國史記>>의 고구려 초기 기사에서 찾아지고 있다. 이를 검토하면서 제 1단계 식읍의 성격을 추적해 보기로 하겠다.

가-1) 鮮卑는 앞뒤로 적을 맞게 되어 계책과 힘이 다하니 투항하여 屬國이 되었다. 왕은 扶芬奴의 功을 생각하여 食邑을 상주려 하니 (부분노가) 이를 사양하였다.

가-2) 明臨答夫가 천여 騎兵으로 추격하여 坐原에서 漢軍을 大敗시키니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王이 크게 기뻐하여 答夫에게 坐原와 質山을 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가-3) 왕이 군사를 三道로 나누어 급히 치니 魏軍이 요란하여 陳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樂浪에서 물러갔다. 왕이 나라를 회복하고 功을 논함에 있어 密友와 紐由을 第一로 삼아 密友에게는 巨谷·靑木谷등을 사여하고 劉屋句에게는 鴨?·杜訥河原을 사여하여 食邑으로 삼게 하였으며, 紐由에게는 벼슬을 추증하여 九使者로 삼고 그 아들 多優를 大使者로 삼았다.

가-4) 慕容?가 來侵해 오자 왕은 新城으로 가서 賊을 피하고자 하여 나아가 谷林에 이르렀다.···그 때 新城宰인 北部 小兄 高奴子가 五百騎를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고 賊을 맞아 이를 奮擊하니, ?軍이 敗退하였다. 왕은 기뻐하면서 高奴子에게 大兄의 爵을 가하고 겸하여 谷林을 하사하여 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위의 식읍 관계 기사에 의하면, 식읍은 주로 대외적 전쟁을 계기로 하여 戰功者에게 征服地 혹은 守護地의 일부 지역을 국왕이 사여해주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2) 기사에서 좌원 전투에서 공을 세운 明臨答夫에게 좌원을 식읍으로 준 것이나, 가-4) 기사에서 곡림 전투에 공을 세운 高奴子에게 곡림을 식읍으로 준 것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이러한 경향성을 볼 때, 가-1) 기사에서 부분노에게 사여하려 했던 식읍 역시 '屬國'으로 편제된 선비 지역을 대상으로 했을 가능성이 크겠으며, 가-3) 기사에서 전투지가 명기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식읍 역시 수복지에 설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즉, 고구려 초기에 있어서 식읍 사여란 전공자로 하여급 戰功 지역에 대한 지배를 일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것이었음을 알겠다.

그런데 식읍 사여 대상자들은 대개 국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들이었다. 먼저 扶芬奴는 동명왕이 송양왕의 비류국을 복속시킬 때 비류국으로부터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鼓角을 훔쳐오는데 앞장선 바가 있으며, 동명왕 6년에는 국왕의 명을 받아 烏伊와 더불어 荇人國을 정벌한 적이 있었다. 烏伊가 주몽이 부여를 탈출할 때 행보를 같이했던 烏伊·摩離·挾父의 3인 중의 한 사람이었듯이, 부분노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국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密友·劉屋句·高奴子 등은 전투에서 국왕이 위기 상황에 몰렸을 때 목숨을 걸고 국왕을 구출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었으니, 이들의 국왕과의 관계는 더욱 재론할 여지가 없겠다. 다음에 明臨答夫는 무도한 정치를 행한다는 이유로 次大王을 시해하고 新大王이 즉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인물이었으므로, 그의 신대왕과의 관계는 더욱 특별한 바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신대왕은 2년(166)에 명림답부를 國相으로 임명하고 沛者로 加爵하였으며, 8년에는 다) 기사에 나오듯이 전공을 계기로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사여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식읍 사여는 국왕과 그 대상자들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주는 정치적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고구려 초기의 식읍 사여는 국왕과 밀접히 관련이 있는 인물에게 전공 등을 계기로 하여 일정한 지역을 분급함으로써 그들에게 국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왕실의 번병이 될 것을 기대하였으리라는 점에서, 중국 周代의 영토 分封의 면모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고구려의 식읍 사여는 주대의 그것과 같은 봉건적 분봉을 내용으로 한 것은 아니었으며, 당시 고구려 국가의 일반적인 지배의 관행이 식읍에 발현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윗 식읍 사여 기사들은 1세기 초에서 3세기 후반에 걸쳐 있거니와, 이 시기에 있어서 고구려의 정치체제는 국왕과 部의 상호 통제와 견제의 관계 속에서 운영되는 '部體制'를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부는 국가의 지방 지배에도 일정하게 관여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와 비슷한 단계에 있던 부여에서 '四出道'에 대한 諸加의 독자적 지배권이 행사되고 있었고, 고구려의 경우도 동옥저에 대한 지배에 大加가 관여하고 있었던 것 등은 部가 지방지배에 관여했던 한 측면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것이다. 大加와 諸加는 부의 최고 대표자 혹은 부의 규제를 받는 최상층의 지배자집단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三國史記>> 高句麗本紀에 의하면 통합한 소국들에 대하여 '郡縣'을 설치했다는 경우와 '城邑'을 설치했다는 경우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는 각각 왕실 직할지역과 부 단위의 지배지역을 구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 왕실 혹은 부 단위의 이러한 지배의 내용은 諸加가 豪民을 매개로 하여 下戶를 지배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諸加의 지배력 대소는 그들의 지배 대상인 下戶의 家戶數로 표시되고 있었고, 諸加는 읍락 토착사회의 지배층인 豪民 중에서 선별된 大人을 통하여 下戶를 지배하고 있었다. 下戶는 평시나 전시를 막론하고 諸加에게 바치는 부세와 그 밖의 특산물 일체를 생산하고 이를 수송하는 일까지 수행하였으며, 심지어는 그들 중에서 미녀까지 징발당해야 했던 존재들이었다. 말하자면 下戶는 그들이 생산한 물자의 일체와 그들의 인신까지도 諸加의 지배 대상이었던 것이다. 중국 사서에서 이들을 흔히 '奴' 혹은 '奴僕'과 같은 존재로 표현하였던 것은 이러한 이들의 혹독한 처지를 두고 한 바였을 것이다.

그런데 諸加의 하호 지배는 단순한 하호만의 지배는 아니었고, 일정 지역을 단위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는 그 지역의 대표적인 지배자를 大人으로 삼아 이를 매개로 하여 下戶 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점에서 그렇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 단계에는 아직 田租와 貢賦와 力役으로 구분된 형태의 정제된 수취제가 마련되지는 못하였을 것이므로, 그 지배란 일정 지역의 民과 土에 대한 포괄적 지배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지배 형태를 일단 '地域支配'라 칭해두기로 한다.

당시의 식읍에 대한 지배 역시 이러한 '지역지배'의 일반적인 관행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식읍이 部 단위가 아닌, 국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개인을 대상으로 사여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개인에게 국왕에 대한 충성을 기대하면서 국왕이 직접 사여해 주었다는 점 등에서, 식읍 사여는 '부체제'를 초월하여 정치를 운영해 가려는 국왕의 의도가 반영된 정치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식읍은 국왕에 의한 토지 및 보수 급여제의 선구적 형태로서, '부체제'와 갈등을 빗는 경제적 토대로서 작용하는 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국왕이 일정 지역을 사여해 주는 형식의 식읍제는 다음 기사에 나타나 있듯이 변질된 형태로나마 6세기 단계까지 존속하였다.

나-1) 金官國主 金仇亥가···나라 창고에 있는 보물을 가지고 투항하니 王이 그를 예로 대우하여 上等의 位를 주고 본국을 食邑으로 삼게 했다.

나-2) 仇衡王은···대적하여 싸울 수 없게 되자 同氣인 脫知 爾叱今을 보내어 나라에 머물러 있게 하고 王子 上孫 卒支公 등과 함께 신라에 투항하였다.

나-1) 기사에 의하면 법흥왕이 투항해 온 금관국주 金仇亥에게 上等의 位와 함께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했다는 것인데, 이는 이전의 식읍 사여와 마찬가지로 국왕이 김구해에게 본국에 대한 '지역지배'를 인정해 주면서, 이를 통해서 그를 왕실의 번병으로 삼으려는 의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김구해의 식읍에 대한 지배방식은 <<三國遺事>> 所載의 駕洛國記에서 나-1) 기사와 동일한 사건을 전한 나-2) 기사에 나타나 있다. 이에 의하면, 구형왕 김구해는 동기인 脫知爾叱今을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여 이를 통해서 옛 지배질서에 따라 그 지역에 대한 포괄적 지배를 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단계의 식읍에 대한 지배의 내용은 고구려 초기 단계의 그것과는 달랐을 것이다. 이미 국왕의 부에 대한 장악력이 강화되어 있었고, 이에 상응하여 지방제 역시 보다 진전된 형태인 '州郡制'로 정비된 상태였으므로, 부 단위 혹은 지배층 개인의 '지역지배'는 국가권력에 의해서 크게 규제받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지배의 특수한 형태로서의 식읍 역시 이러한 변화된 지배 내용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었다. 실제 식읍으로 사여된 금관국에는 금관군이 설치되어 주군제의 규제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김구해의 식읍 지배의 실제적 내용이란 주군제의 행정체계와 마찰을 빗지 않는 범위내에서 금관군 지역에서 수취되는 물자와 인력의 일부를 징수하는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2) 제 2단계의 식읍제

제 1단계의 식읍제는 '지역지배'를 특징으로 하면서도, 지배체제의 변화와 함께 지배 내용상에 변화가 동반하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통일전쟁의 과정은 사회경제적인 기반의 전반적인 변화와 함께 더욱 급격한 지배체제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에 따라 식읍제의 성격도 크게 변하였을 것이 예상된다. 이 시기의 식읍 사여 기사를 검토하면서, 이러한 성격 변화의 모습을 추적해 보기로 하자.

다-1) (무열왕 4년 ; 657) 태종대왕이 押督州摠管으로 제수하여는데, 이에 獐山城을 쌓아 設險하니, 태종이 그 공을 기록하고 食邑 三百戶를 주었다.

다-2) (문무왕 8년 ; 668) 문무대왕은 인문의 英略과 勇功이 특이함으로 해서 故 大琢角干 朴紐의 食邑 五百戶를 내렸다.

다-3) (문무왕 8년 ; 688) 이에 (김유신에게) 太大舒發翰의 職과 食邑 五百戶를 제수하고 輿杖을 하사하였다.

윗 기사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이 시기의 식읍은 주로 金仁問과 金庾信에게 사여된 것으로 되어 있다. 장산성 축성의 공과 관련하여 무열왕이 김인문에게 식읍 300호를 주었고(다-1 기사), 대고구려 전투에서의 전공과 관련하여 죽은 大琢角干 朴紐의 식읍 500호를 문무왕이 역시 김인문에게 내렸으며(다-2 기사), 김유신에 대하여 문무왕이 그의 祖 武力과 父 舒玄의 전공, 그리고 유신 본인의 전공을 열거하면서 식읍 500호를 내렸던 것이다(다-3 기사).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요 문무왕의 아우였으며, 김유신은 문무왕의 외삼촌이었으니, 역시 전공을 세운 왕족과 대공신에게 왕실의 번병으로 삼기 위해 사여한다는 식읍 본래의 의도와 정신이 구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전의 식읍과 다른 점도 있었으니, 일정 지역이 아닌 封戶의 수로 사여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식읍을 봉호의 수로 사여하는 사례는 같은 시기에 당의 고종이 역시 김인문과 김유신에게 내린 식읍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라-1) 仁德 2년(665) 高宗은 사신 梁冬碧과 任智高 등을 보내어 聘問하고 겸하여 유신을 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 食邑 二千戶로 책봉하였다.

라-2) 인문은 또 당에 들어갔다. 乾封 원년(666)에 車駕를 따라 泰山에 올라 封禪의 의식을 행한 후, 右驍衛大將軍과 食邑 四百戶를 加授하였다.

라-3) 高宗도 인문이 여러번 전공이 있음을 듣고 制書하여 이르기를 "爪牙의 良將이요 文武의 英材이다 爵을 制定하고 封邑을 설하는 아름다운 명을 내림이 마땅하겠다" 하고 爵秩과 食邑 二千戶를 더하였다.

당의 고종은 665년에 김유신에 대하여 작호와 더불어 식읍 2,000호로 책봉하였으며(라-1 기사), 김인문에 대해서는 666년에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封禪 의식에 인문을 대동하고 효위대장군의 작호와 함께 식읍 400호를 내렸고(라-2 기사), 이어 668년에는 문무왕이 인문에게 식읍을 지급하자(다-2 기사) 고종도 곧바로 인문에게 爵秩과 식읍 2,000호를 더하였다(라-3 기사). 통일전쟁의 과정에서 당의 황제는 김인문과 김유신에게 爵號와 함께 식읍을 봉호의 수를 세어 사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의 고종이 사여했다는 봉호는, 고려조에 송의 황제가 고려 국왕들이나 중신들에게 사여한 식읍의 봉호와 마찬가지로, 實封이 아닌 虛封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중국 내의 봉호를 사여했을 리가 없고, 더구나 신라 내의 봉호를 사여했다는 것은 더욱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종이 사여한 식읍의 봉호 수는 작호의 등급과 짝을 이루어 관념적인 명예의 등급을 표시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는 곧 이 두 사람을 중국 황실의 번병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관념적으로 표현한 것이 되겠는데, 이를 통해서 당 황제는 신라 왕실의 두 기둥이라 할 이들에게 작호와 명예적인 식읍의 사여를 통해서 신라 집권층의 분열을 유도함으로써, 신라 왕실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뭏든 고종의 식읍 사여는 실질적인 이권이 수반되지 않은 명예 등급의 사여만으로써, 황실의 번병으로 삼는다는, 식읍에 내포된 의도와 정신을 '관념적'으로 전달한 형태의 것으로서 주목되는 바이다.

이러한 당 고종의 식읍 사여 사례에 비추어 볼 때, 같은 시기에 무열왕과 문무왕이 같은 인물인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봉호의 수를 세어 사여한 식읍 역시 實封이라기 보다는 명예적 등급을 표시하는 虛封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다-2) 기사 내용은 實封을 사여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게 한다. 즉, 다-2) 기사에서 죽은 朴紐의 식읍을 김인문에게 내렸다고 한 것은 朴紐가 실제로 사여받았던 봉호를 김인문에게 이어받도록 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일단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면서도 한편으로 爵號와 짝을 이루어 사여되는 식읍의 속성을 염두에 둘 때, 이 기사를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지도 않다. 즉, 죽은 朴紐의 爵號인 大琢角干의 位를 잇도록 함과 동시에 이에 상응하는 식읍의 봉호 수가 명목적 등급 표시로서 내려졌을 것이라는 식의 추론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大琢角干이 특수한 위계를 표시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가능성을 지지해 주는 요소가 될 수 있겠다.

현재로서는 무열왕과 문무왕이 김인문과 김유신에게 사여한 식읍의 봉호가 실봉이었는지 허봉이었는지 단정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어떠한 경우를 상정하더라도 봉호의 수를 세어 사여하는 형식의 식읍은 '지역지배'를 일임하는 형식의 이전 단계 식읍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었으리라는 것만은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2단계의 식읍은 그에 내포된 군신관계의 관념과 정신이 우선시 되고 경제적 이권의 수수는 별개의 문제로 처리되는 단계의 소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일정 지역에 대한 포괄적인 지배권의 수수가 우선이고 군신관계의 정신은 관념적 표방으로써만 처리되던 1단계 식읍 사여와는 대조가 되는 바이다.

그렇다면 식읍제에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 직접적 요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먼저 唐의 영향을 들 수 있겠다. 이미 무열왕 즉위년에 당의 율령에 따라 기왕의 신라 율령이 개정된 바 있고, 라) 기사에 보이듯이 김유신과 김인문에 대한 당 고종의 구체적인 식읍 사례가 있었고 보면, 唐制의 영향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외부적 법제의 수용 여부는 결국 그 수용 주체의 내부적 조건의 충족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 하겠으므로, 신라의 내적 변화는 식읍제 성격 변화에 있어서 더욱 근본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겠다.

식읍은 국왕이 직접 사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실제적 운영방식과 성격은 정치운영에 작용하는 국왕과 권력관계의 추이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식읍제에 성격변화가 나타난 무열·문무왕대에는, 국왕은 이미 확보한 초월적인 전제권을 바탕으로 하여 관료제의 운영을 강화해 가고 있었다. 국왕의 신임에 따라 貴族들을 관료로 발탁해서 쓰거나 숙청하거나 할 수도 있었다. 국왕의 신임 여부 자체가 귀족 개인의 존립 기반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의 식읍 사여 자체는 경제적 이권의 수반 여부를 차치하고 사여의 대상자들의 정치적 위상의 등급을 결정해 주는 상징적 의미를 포함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위상의 등급은 곧 권력 배분의 기준으로도 활용되었을 것이니, 자연히 그 기준에 따라 경제적 이권의 배분체계도 별도로 마련되었을 것이다.

식읍의 사여가 왕족 혹은 대공훈자의 극히 일부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식읍의 성격 변화는 곧 귀족세력 일반의 경제적 기반의 변화를 반영하는 바로미터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경제적 이권의 배분체계는 식읍 사여 대상자뿐 아니라 지배층 일반에게도 적용되는 일원적 급여제로 정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전 단계의 '지역지배'의 형태를 지양하고 국가의 공적 차원에서 토지나 보수를 분급하는 형식을 취하였을 것이다. 祿邑과 歲租, 文武官僚田과 百姓丁田 등이 이 시기의 전개과정에서 정비된 급여제의 명목들이었다.

3. 祿邑과 歲租

給與制로서의 祿邑과 歲租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祿邑'을 혁파하고 歲租('逐年賜租')를 지급토록 교시한 신문왕의 敎令에 함께 전해지고 있다.

마) 敎令을 내려 內外官의 祿邑을 혁파하고 해마다 租를 차등있게 하사하는 것을 恒式으로 삼도록 했다.

689년에 신문왕이 교령을 내려 '內外官'의 녹읍을 혁파하고, 그 대신에 국가가 租를 차등있게 지급하는 것으로써 이를 대치케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의 의문점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혁파되기 이전의 녹읍은 어떠한 지배 내용을 가지고 있었는가의 문제와 이러한 녹읍제의 기원은 어느 시기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중 녹읍의 지배 내용의 문제는 그 성격을 논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라 하겠는데, 이를 둘러싼 견해는 크게 네가지로 제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녹읍의 지배 내용을 경지와 예민에 대한 총체적 수취권에 있다고 파악한 견해를 들 수 있다. 이 견해는 대체로 두가지 관점에 서고 있다. 먼저 녹읍을 식읍과 동질적인 지배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과, 다음에 신라 하대 및 고려 초에 관행된 녹읍의 현실적 지배 양태가 녹읍의 원래적 지배 내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러나 식읍은 소수의 왕족과 대공훈자를 대상으로 사여되었고 녹읍은 일반적인 '內外官'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일정한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신라 하대 및 고려 초의 녹읍에 대한 현실적 지배 관행은 당시의 무정부적 특수 상황에서 호족이 일정 지역에 대하여 포괄적인 지배권을 행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으므로, 이로부터 원래적 녹읍의 지배 내용을 추론해낸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겠다.

둘째, 녹읍의 지배 내용을 田租 수취권을 제외한 力役과 貢賦 및 牛馬에 대한 지배권에 한정하여 파악한 견해가 있는데, 이는 정창원에서 발견된 신라의 촌락문서가 녹읍관계문서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촌락문서를 이처럼 녹읍관계문서로 파악하는데 대하여 아직 이견이 비등하게 제기되어 있는 상태이고, 이 견해의 문제점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이 가해진 바도 있거니와, 필자 역시 현재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세째, 혁파이전의 녹읍('전기녹읍')과 경덕왕 16년(757) 부활이후의 녹읍('후기녹읍')을 구분하여, 전자는 인민·토지 및 각종 생산물을 총체적으로 지배한 것이었던데 반해 후자는 수조권 지배에 한정된 것이었다고 파악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는 촌락문서(815년에 작성된 것으로 파악함)에서 엿볼 수 있는 효율적인 행정체계의 모습이나 녹읍 부활이 중대의 안정된 정권에서 실시되었다는 점 둥을 들면서 경덕왕 16년의 녹읍 부활 조치를 반동적인 사태로 규정한 기존의 연구 경향에 비판을 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전기녹읍에 대해서는, 총체적 지배를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는 기왕의 견해를 별다른 논의 없이 답습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네째, 녹읍의 지배 내용을 收租權에 한정된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다. 이는 녹읍을 歲租의 지급으로 대체케 했다는 마) 기사에 충실하려고 할 때 가장 합당한 견해라 생각되며, 이런 측면에서 최근에 가장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다만 이러한 녹읍의 수조권 지배가 신라 하대 및 고려 초의 녹읍 지배의 관행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도 있겠는데, 이는 원칙과 현실적 관행의 괴리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바라 하겠으므로 심각한 문제로 되지는 못한다. 필자 역시 녹읍 지배가 수조권을 위주로 한 것이었다는 이 견해를 따르면서, 원래의 녹읍제가 성립되고 혁파되는 역사적 의미를, 통일기 급여제의 정비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서 이 견해의 타당성은 더욱 보강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혁파 이전 녹읍제의 성격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당연히 위의 마) 기사의 검토에서부터 논의를 출발해야겠다. 이 기사에서 우선 주목되는 바는 '內外官祿邑'이라는 구절이다. 먼저 '內外官'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혁파 이전의 녹읍 지배의 주체들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의 공적 질서체계에 일정하게 편제된 존재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음에 祿邑의 '祿'이란, 흔히 국가의 공적 급여물을 '國祿'이라 칭하듯이, 국가의 공적 질서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應邵가 일찍이 '祿'을 '爵'이라 풀이한 것은 '祿'의 이러한 개념을 염두에 둔 것이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爵'을 지배층의 '私'적 기득권을 담보하면서 집단 또는 개인 간의 정치적 관계를 '公'의 형식으로 승인하기 위해 마련된 禮的 체계라고 파악하여, 이를 관료제의 '公'적 기능만을 담보하는 '官'의 개념과 대비시켜 이해한 견해가 참고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른다면 '爵'이란 황제 혹은 국왕이 지배층을 그들의 사적 기반의 대소에 따라 국가의 공적 질서체계 내로 승인하는 과정에서 사여하는 '爵位'의 차등으로 표현되는 바가 되겠다. 그렇다면 '祿'이란 지배층의 사적 기득권을 爵位의 등급에 따라 경제적으로 공인해주는 바가 될 것이다.

이처럼 '爵'과 '祿'이 통하는 개념임은 이들이 흔히 짝하여 '爵祿'이라는 용례로 쓰이는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 합치되는 '爵祿'의 용례는 <<孟子>>에서 확인되기도 하는데, 우리 사서에서도 종종 확인된다. 이중 특히 다음의 기사에 나오는 爵祿의 용례가 주목된다.

유신은 그 용기를 가상히 여겨 級?의 位를 주었다. 군사를 돌려 돌아와서 유신이 왕에게 고하기를, "裂起와 仇近은 천하의 용사입니다. 臣이 편의로 급찬의 위를 허여해 주었는데 功勞에 맞지 아니하니 沙?의 位로 올려줄 것을 청합니다"라 하니, 왕이 "沙?의 秩은 과하지 아니한가" 하였다. 유신이 재배하고 아뢰기를 "爵祿은 公器로서 功에 대한 보수이니 어찌 과하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661년에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한 소정방에 대한 軍資 수송작전에서, 김유신이 자신을 수행하여 전공을 세운 裂起와 仇近에게 級?에서 沙?으로 官位를 올려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대한 문무왕의 이의제기가 있자 유신이 "爵祿은 公器로서 功에 대한 보수"라고 잘라 말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爵이란 바로 官位를 지칭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祿은 그에 따라 지급되는 보수로 생각할 수 알겠는데, 이러한 爵祿은 功에 대한 반대급부로 가해지는 公器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官位制는 국왕이 지배층 일반을 그들 소속부의 위상과 소속부에서의 각자의 위치 등을 고려하면서 공적 질서체계에 서열화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었다. 이는 지배층을 사적 기반의 대소에 따라 국가의 공적 질서체계 내로 승인하는 수단으로서의 '爵'의 속성과 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관제적 성격과 함께 신분적 성격을 동시에 포함한다. 이러한 관위체계에 따라 당연히 경제적 보수로서의 祿의 공인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官位와 祿은 국가에 대한 功에 따라 加授되기도 하고 관료제의 공적인 관직체계와 결부되기도 하면서 그에 내포된 사적 지배기반이라는 성격이 탈색되어 갔을 것인바, 통일기에는 이러한 과정이 크게 진전되어 윗 기사에 나타난 바와 같이 公器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겠다.

祿邑이란 爵位, 즉 官位와 戰功 등에 대한 반대급부로 지급되는 국가의 공적 보수로서의 '祿'과 지역지배와 관련된 '邑'이 합성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녹읍은 식읍과 통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는데, 그렇다면 녹읍제의 성립은 식읍의 성격변화와 일정한 관계가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식읍이 일정 지역에 대한 포괄적 지배를 내용으로 하는 1단계 식읍제에서 爵號와 짝을 이루는 봉호 사여를 위주로 하는 2단계 식읍제로 재편되면서, 녹읍제는 그에 따른 경제적 보장책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녹읍은 단순히 식읍 사여 대상자에 대한 경제적 보장책으로서만 성립된 것은 아니었다. 식읍의 사여 대상은 왕실과 공훈자 등 극히 일부 지배층에 한정되고 있었던데 비해, 녹읍은 관위제에 따라 재편성된 지배층 일반에 대한 급여제라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1단계 식읍제가 적용되고 있던 시기에 식읍의 사여 대상자가 아닌 일반의 지배층도 식읍과 같은 일정 지역에 대한 포괄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지배층 일반의 사적 지배기반이 관위제의 정비에 따라 국왕에 의해 공적으로 재분급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녹읍제로 재편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식읍 사여 대상자에 대한 경제적 보상도 녹읍제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해야겠다.

이처럼 녹읍제를 관위제의 정비와 결부된 국가의 공적 급여제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녹읍에 대한 지배의 내용은 民과 土에 대한 포괄적 지배를 내용으로 하는 기왕의 '지역지배'에 대하여 국가의 규제가 일정하게 가해진 것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지배 내용의 규제는 수취체제의 분화 정비가 상당히 진전된 단계에 가능한 일이었다. 즉 일정 토지에서 소출되는 생산물의 일부를 징수하는 田租, 민의 노동력의 일부를 징발하는 力役, 그리고 특별 생산물의 일부를 징수하는 貢賦 등을 내용으로 하는 租庸調制로의 분화 정비가 그것이다. 수취체제의 이와 같은 분화 정비는 지배 대상인 民과 土地에 대하여 公의 개념을 적용한 公民과 公地의 관념, 즉 王土王民의 이념이 구체화된 단계에 가능한 것으로서, 이는 곧 그간 생산력의 발전과 집권체제의 정비과정의 소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녹읍제는 녹읍주에게는 일정 비율의 田租만을 수취할 수 있는 권리(=收租權)만을 한정하여 인정하고, 나머지 공부와 역역은 국가의 공적 수취의 분야로 귀속시키려는 방향에서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녹읍제는 관위제가 정비되고 수취제가 분화 정비되며 왕토왕민의 이념이 대두해간 6세기 단계에 시원적 형태가 갖추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기에 '지역지배'를 위주로 하던 식읍제가 봉호 사여의 형태라는 형식적 성격의 것으로 재편되면서 재차 정비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녹읍제의 성립 및 정비 과정에서 국가는 녹읍에 대한 지배의 내용을 收租權에만 한정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녹읍이 이전의 지배 관행에 따른 '지역지배'의 성격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던 까닭으로, 수조권적 지배에 한정하도록 규제한다는 국가적 차원의 의도를 실질적으로 관철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녹읍 지배를 수조권 지배에 한정시켜 이를 실질적으로 규제·감시하기 위한 제도 정비가 요청되었을 것인 바, 이것이 문무왕대에 이르러 左右司祿館의 설치로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녹읍에 대한 국가의 규제 및 감시가 강화되어 감에 따라, 기왕의 '지역지배'에서 나오는 귀족들의 사적 권력기반은 크게 위축되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이들의 반발이 예상되는 바였다. 진평왕대의 柒宿의 난에서부터 본격 개시된 이들의 반발은 선덕왕대의 上大等 毗曇의 난을 거쳐, 통일전쟁기에 크고 작은 반발로 이어졌다. 이러한 반발세력에 대한 신라국가의 대응은 무자비한 피의 숙청으로 일관하였다. 신문왕 원년(681)에 김흠돌 난에 연루된 인물들에 대한 숙청은 반발세력에 대한 일련의 숙청극을 마무리 하는 단계의 수순이었다. 이 난의 진압에 즈음하여 신문왕은 교서를 내려 반발세력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공표하였고, 난에 직접 연루되지도 않은 현직 병부령인 金軍官에게 반역의 사실을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그의 嫡子 1인과 함께 自盡케 하는 혹형을 가함으로써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국왕 주도하에 과감한 개혁조치들이 대대적으로 취해졌던 것이다.

마) 기사에 나타나 있는, 신문왕 9년에 祿邑을 혁파하고 歲租의 지급으로 대체케 했던 조치 역시 이러한 개혁조치의 하나였다. 이 조치는 국가가 녹읍지에서 일괄적으로 收租하여 이를 녹읍주들에게 나누어 주는 官收官給의 형태로 전환시킨 것을 내용으로 한 것이었겠는데, 이로써 결국 녹읍지에 대한 '지역지배'의 여지를 완전 차단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녹읍에 대한 지배를 수조권 지배에 실질적으로 한정 규제시키려는 그간의 국가적 노력이 그 연속선상에서 가장 극단적이고 과격한 형태로 귀납된 바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급진적 조치는 신라가 삼국을 통합해 가는 격동의 시기에 반발 귀족들에 대한 숙청과 관제정비를 대대적으로 추진해가는 개혁의 분위기 속에서, 강력한 힘을 얻게된 왕권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이처럼 歲租 지급은 祿邑 혁파의 대체물이었다. 그렇지만 歲租는 다음과 같이 녹읍 혁파 이전부터 이미 지급되고 있었다.

바) 강수가 일찍이 생계를 도모하지 않고 집이 가난하지만 태연하므로, (武烈)王이 有司에게 명하여 매년 新城租 100石씩을 사여하도록 하였다. 文武王은···沙?의 位를 주고 增俸하여 歲租를 200石으로 하였다.

무열왕 즉위(654) 초에 당의 詔書를 해독한 공으로 강수에게 매년 新城租 100석씩을 지급케 하였으며, 문무왕 13년(673)에 삼국 통일에 미친 강수의 文功을 치하하면서 歲租를 200석으로 '增俸'해 주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녹읍이 혁파되기 이전이므로 歲租와 祿邑이 병존해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때 세조의 지급대상으로 거론된 강수는, 매우 가난한 처지에 있었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지배기반이 매우 빈약한 상태에 있었음을 알겠다. 그렇다면 신라 국가는 전래의 지배기반을 가진 전통 귀족에게는 祿邑 지배를 인정해주었던 것에 대해, 이러한 지배기반이 미약하거나 전무한 인물 중에서 그의 능력에 따라 국왕에 의해 발탁되어 官職을 제수받은 자에 대해서는 특례적 보수인 '俸'의 일종으로서 歲租를 지급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강수에게 지급된 歲租는 新城租로 규정되고 있었다. 이 新城에 대해서는 南山新城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별도의 지명으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전자의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자 한다. 그것은 南山新城과 新城의 명칭상의 유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俸'의 일종으로 간주되던 歲租는 그 용도에만 충당되는 특정한 중앙의 창고에서 지출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국가의 수조 곡물을 비축하는 중앙의 창고로는 남산신성의 左倉과 右倉, 富山城의 창고 등이 확인되거니와, 현재로서는 그 각각의 용도별 차이를 알길이 없으나 곡물을 보관하고 지출하는데 있어서 지출상의 일정한 용도 구분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데 남산 新城의 창고는 바) 기사의 강수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歲租 지급의 용도에 충당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또한 州縣 단위로 田租를 수취하여 이를 보관하는 州縣倉이 있어 중앙의 창고와 유기적인 관계속에서 운영되었을 것인 바, 진덕왕 5년에 稟主에서 分置된 倉部는 이러한 창고제 운영을 관장하는 주무관서로서 국가의 收租 업무와 租 지급의 업무를 주로 관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收租와 租의 지출 업무가 倉部에서 일괄 관장되었다고 한다면, '租'의 개념에는 田賦 혹은 倉?과 벼(禾稻)의 의미 이외에 특별한 관념이 담겨 있을 법하다. 국왕 직속의 관료에게 지급한 歲租에서 이러한 관념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겠거니와, 이와 함께 다음의 '賜租' 기사가 주목될 수 있을 것이다.

사) 大幢少監인 本得···, 漢山州少監朴京漢···, 黑岳令宣極···, 모두 一吉?의 位를 주고 一千石을 賜租한다. 誓幢幢主인 金遁山···, 沙?의 位를 주고 七百石을 賜租한다. 軍師인 南漢山의 北渠···, 述干의 位를 주고 一千石을 賜粟한다. 軍師인 斧壤의 仇杞···, 述干을 주고 七百石을 賜粟한다. 假軍師인 比列忽의 世活···, 高干의 位를 주고 五百石을 賜粟한다. 漢山州少監인 金相京···, 一吉?의 位를 추증하고 一千石을 賜租한다.

이는 고구려를 멸한 후의 논공행상에서 김유신과 김인문을 비롯한 고위 신분층에게 행상을 한 데 이어, 중앙의 중하급 관료와 지방의 토착지배층이라 할 軍師 등에게 내린 포상의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바는 전공의 대소에 따라 1,000석, 700석, 500석의 등급 구분을 함과 함께, 중앙 관료 출신에게는 京位와 함께 '賜租'를, 지방 軍師層에게는 外位와 함께 '賜粟'을 행하는 것으로 예외없이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홍직의 설명에 의하면 租는 벼를, 粟은 조를 각각 지칭하는 것이라 하나, 그렇다면 이는 중앙의 중하급 관료와 지방의 토착지배층 사이에 각각 양은 같되 질이 다른 곡물을 지급하여 차별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납득하기 곤란하다. 이들에 대한 차별은 지급한 곡물의 종류로써가 아니라 경위와 외위의 차이로써 충분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 '粟'은 조라는 구체적인 곡물명을 칭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곡물을 칭하는 용례로 봄이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처럼 '租'와 '粟'으로 구분한 것은 '租'에 내포된 특별한 관념 때문이었지 않을까 하는 바, 중앙의 관료조직체계에 편제된 관료군에게만 '租'를 지급한다는 것이 그 관념의 정체가 아닐까 한다. 이런 면에서 歲租이든 賜租이든 租의 재원은 여타의 용도에 지출되는 재원과는 구별하여 별도의 창고에 별도로 비축하여 역시 별도로 지출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통일기에 행해진 이러한 歲租의 지급 혹은 賜租는, 당시 관료제의 정비 과정에 따라 국왕에 의해 발탁되어 공적 기능을 담보하는 '官'[官職] 계통의 중소 관료층이 대두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겠는데, 이는 녹읍 지배의 사적 기득권을 담보하는 '爵'[爵位=官位] 계통의 고위 신분층과 대비되는 부류에 속하는 바이겠다. 강수의 예가 그렇고 사) 기사에서 '賜租'의 대상자로 나오는 중앙의 중하급 관료층 인사들의 예가 그렇다. 그렇다면 녹읍을 혁파하고 세조 지급으로 대체케 한 신문왕 9년의 조치는 이러한 두 계통의 급여제를 전자의 계통에 의해 일원화시킴으로써, 관료제의 공적 기능을 일대 강화시킨 결과를 가져왔던 것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전국의 대부분의 토지에 대한 수조권을 국가가 관장하여 모든 지배 신분층 및 관료층에게 祿俸의 형태로 나누어 주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어, 관료 일반에 대한 보조적 보수 급여제로서 마련된 고려시대 祿俸制의 범위를 훨씬 능가하는, '統合 歲租 給與制'라 부를 수 있을 것이었다. 따라서 이 조치 자체에는 급진성과 무모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것이며, 이에 당연히 뒤따를 지배 신분층의 반발을 압도할 수 있는 국왕의 전제권과, 이 조치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고도의 조직적인 수취기구 및 치밀한 지방제의 정비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 중대의 왕권이 막강한 전제성을 발휘하였음은 익히 알려진 바이고, 수취기구도 착실히 정비되어 왔으며 지방제 역시 신문왕 5년 단계에 州郡縣制로의 재편을 일단계 마무리하게 되었으므, '통합 세조 급여제'의 운영이 이후 약 70년 동안이나 유지되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국왕의 전제권이 문제가 생기거나 수취기구의 원활한 운영에 문제가 생길 경우, 이의 운영은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경덕왕 16년(757)에 취해진 녹읍 부활은, 전제권과 수취기구 운영이라는 양면에서 문제가 생기면서 취해질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조치였던 것이다.

4. 文武官僚田과 百姓丁田

녹읍제가 모든 지배층을 국가의 공적 질서체계에 편제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를 혁파하고 세조로 일원화한 조치는 관료제의 공적 기능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이는 그간 관료제 강화의 결과이기도 했다. 신문왕 7년(687)에 문무관료전을 차등있게 지급하라고 한 다음과 같은 조치 역시 이렇듯 관료제 강화의 결과로 취해질 수 있었던 바였다.

아) 文武官僚田을 차등있게 사여하도록 교시하였다.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文武官僚田에 대한 직접적 기록은 위의 아) 기사 이외에는 찾아지지 않아서, 그것은 다만 그 명칭으로부터 문무관료들에게 그들의 관직에 따라 토지를 분급한 조치였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듯 자료의 사정은 매우 어려운 형편이며, 바로 이 때문에 문무관료전의 실체를 둘러싸고 두 갈레의 다른 견해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삼국통일의 공에 따라 모든 문무관료에게 단순히 일회적으로 賜田한 조치에 불과한 것으로서 평가절하하려는 견해와, 이를 적극적으로 평가하여 일종의 職田 分給制의 실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려는 견해가 그것이다. 그런데 촌락문서에서 확인되는 內視令畓의 地目이 문무관료전의 구체적인 실례로서 지목되면서 전자의 견해보다 후자의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촌락문서에 나오는 內視令畓은, 內視令의 정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긴 하나 내시령이라는 관직에 있는 자에 대한 職田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겠으므로, 촌락문서 작성시에 職田의 분급제가 실시되고 있었던 것이 사실로 확인된 된 셈이다. 따라서 신문왕 7년 차등 분급이 교시된 문무관료전을 이에 해당되는 것으로 봄이 현재로서는 설득력이 커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촌락문서의 내시령답에 대한 기재 내용을 통해서 문무관료전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적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촌락문서에서 前內視令이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시령답에 대한 권리는 내시령이라는 관직에 있는 동안에만 인정받았으리라는 점이다. 즉, 내시령답은 관료 개인이 아니라 관직을 대상으로 지급된 職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서에 나타난 내시령답은 4결로서 지나치게 작은 규모에 불과하다는 것이 주목된다. 이에 대하여 두가지 견해가 제기되었으니, 먼저 관료의 세력집중을 막기 위해서 관료전을 여러 촌락에 분산 설치했을 것이라는 견해와, 다음에 중국에서 이와 비슷한 규모로 지급된 職分田의 사례를 지적하면서 내시령답의 소규모성을 그대로 인정하려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통일기에 관료체제가 일층 정비 강화되면서 귀족세력이 대개 관료 신분으로 편성되었을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 관료들의 주된 경제적 기반은 역시 녹읍이었을 것이고, 녹읍이 혁파되고 세조로 일원화된 이후에는 세조가 그런 주된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관료전을 보족적인 것으로 파악한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다음에 內視令畓이 촌락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烟授有田畓과는 다른 地目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관료전은 사유권을 주장할 민이 존재하지 않은 토지 위에 설정되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관료전에서 소출되는 생산물은 그 전체가 해당 관료에게 귀속되었던 셈이 되겠는데, 이에 대한 경영과 경작은 어떠한 방식으로 행해졌을까? 이에 대해 국가의 관장하에서 佃戶制 경작 방식이 적용되었으리라고 주장한 견해가 있는데, 이에 의하면 결국 국가가 소출량의 1/2에 해당하는 租를 거두어 해당 관료에게 지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설정 규모가 극히 작은 관료전에 대하여 국가가 일일이 佃戶를 붙여 관리하고 수조하여 이를 다시 관료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은 생각하기 곤란하다 하겠으며, 그렇다고 관료 자신이 직접 그러한 과정을 밟았다고 보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관료전의 경영 및 경작 방식에 대해서는, 설정 규모가 역시 매우 작고 연수유전답에 포함되지 않은 별도의 지목으로 기재되어 있어 官僚田과 같은 종류의 토지 위에 설정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官謀田 및 麻田의 경우와 견주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먼저 麻田의 경우 국가가 촌마다에 마전을 설정하여 촌민의 공동 노동으로 경작케 하여 그 수확물인 麻 혹은 그 가공물인 布를 調로서 징수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작의 과정은 촌주의 책임하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마전의 이러한 경작방식은 해당 관료와 관청의 경비 충당을 위해 설정된 것으로 보이는 내시령답이나 관모답의 경우에도 적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관료전은 촌주의 책임하에 지역 주민의 역 동원에 의해서 경작되었을 것이며, 그 생산물 일체가 해당 관료에게 귀속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국가가 공민의 역을 동원하여 경작했다고 한다면, 관료전은 관모전답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배타적 지배지의 한 지목으로서, 관직 복무에 대한 국가의 공적 댓가로서 관료에게 분급된 토지였다고 할 것이다. 이는 소출물 중에서 일정 비율의 것만을 租의 형태로 거두는 개인 수조지로서의 녹읍이나 국가 수조지에 비해서 단위 면적당의 수취량이 훨씬 많았을 것이고, 따라서 소규모의 토지로서도 소기의 목적에 충당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국가는 민에게도 토지를 분급해 주었다. 촌락문서에 나오는 烟授有田畓이 그것이었다. 이는 '烟에게 주어 가지게 한 田畓'이라는 의미로서, 烟戶 단위로 토지가 분급되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분급은 국가의 토지를 실제적으로 나누어 준 것이라기 보다는 민의 사유 토지에 대한 기왕의 지배권을 관념적으로 공인해주는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이러한 관념적 토지 분급은 왕토왕민 혹은 공지공민의 관념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왕민(=공민)에게 왕토(=공지)를 분급해 준다는 관념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민으로부터 조용조를 징수할 수 있는 명분을 국가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고 하겠고, 따라서 자연히 실질적으로는 체계적인 수취제의 정비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이러한 관념적 형태의 대민 토지 분급제의 실시는 戶口 조사와 量田 사업이 진행되어 민의 토지소유실태에 대한 정보가 상당 정도 축적된 단계에서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6-7세기 단계부터 전국적인 역역징발이 행해지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어 戶口에 대한 파악이 상당 정도 진척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겠고, 또한 삼국시대 이래 賜田의 경험이 축적되어 왔고 문무왕 연간에는 結負制가 실시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통일 전후기에 양전 사업의 성과 역시 상당히 진척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추세로 미루어 보아 관념적 형태의 민에 대한 토지 분급제는 통일 전후기에 실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통일기에 이러한 '관념적 토지 분급제'가 실시되었음은,

자) 百姓에게 丁田을 처음 지급하였다.

라는 기사로써 확인된다. 이 기사에 대해서 흔히 기왕의 토지 지배권을 민에게 공인해 주는 조치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통일기 이래 제반 환경적 조건을 구비해 온 것을 배경으로 하여, 성덕왕 21년(722)에 비로소 처음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丁田'이라는 용어가 이 단계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즉, 고려시대에나 사용되었음직한 '丁田'이라는 용어는 <<삼국사기>>의 편찬 과정에서 삽입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이 단계에는 촌락문서에 나오는 烟授有田畓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으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존의 이해 방식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즉, 민에 대한 관념적 토지 분급의 실제적 목적이 왕토왕민의 이데올로기와 결부하여 수취의 명분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고 한다면, 삼국 통합을 달성한 지 50여년이 지난 성덕왕 21년의 시점에서 이를 처음 실시했다고 보는 것은 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6세기 이래 왕토왕민의 정치 이념이 구체화되어 왔고 전국적인 역역동원 및 賜田 등이 관행화되어 왔으며, 늦어도 문무왕대에는 結負制를 통한 量田 사업이 실시되었음이 확인되고 있는 것을 보면, 수취의 명분을 확보하고 수취제의 정비를 위한 관념적인 대민 토지 분급 조치가 취해질 수 있는 제반 여건은 통일 전후기에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고 봄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성덕왕 21년의 윗 조치는 통일전후기에 이미 취한 '관념적 토지 분급' 조치를 한 단계 진전시킨 형태로 정비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자) 기사에 나오는 '丁田'이라는 용어에 적극적인 의미 부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는 人丁의 수와 토지 결수를 결합시켜 인위적인 편호를 설정하고, 편호를 단위로 해서 토지를 분급한다는 보다 진전된 단계의 관념적인 대민 토지분급제로서의 丁田制의 실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田租 수취와 力役 징발을 별도로 행하던 통일전후기의 수취제에서 양자를 결합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수취제로 일대 정비하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겠다. 촌락문서에 나오는 孔烟이 人丁과 田畓 등의 재산상태를 고려하여 9등호로 구분하여 인위적으로 편성한 편호였을 것으로 파악되는 것은 이러한 丁田制 시행의 결과로서 나타난 바였다고 할 것이다. 촌락문서에 나오는 '烟授有田畓'이라는 용어 역시 이러한 '丁田'을 일상적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었겠다. 이러한 丁田制는 고려시대 田丁制의 선구적 형태로서 주목되는 바라 하겠는데 그 계기적 연결성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연구가 요청된다.

신라 국가의 군현제와 수취제는 성덕왕 21년 이후 이러한 丁田制를 기초로 하여 운영되었을 것이다. 즉, 수취제의 경우를 예로 들면, 烟授有田畓은 녹읍이 세조 지급으로 일원화되면서 방대한 규모로 늘어나게 된 국가의 收租地가 설정되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고, 연수유전답에 대한 사유권을 공인받은 孔烟은 力役 징발의 단위로 활용되었을 것이며, 貢賦의 징수는 촌민의 역동원을 통해서 麻田 등의 별도 地目을 경작케 하거나 추자목을 위시한 과수들을 관리케 하는 형식으로써 관철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즉, 이러한 형태로 丁田制가 조용조의 수취원리로서 적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관료의 직무에 대한 댓가로서 지급되는 관료전과 관청의 경비 충당을 목적으로 한 관모답 등은 烟授有田畓에서 제외되는 특수 지목으로서,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에 대한 경영 및 경작은 마전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행해지고, 그 소출량 전액이 해당 관료나 관청에 귀속되게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역시 丁田制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촌주위답은 연수유전답의 지목으로 포함되어 기재되어 있긴 하나, 촌주가 촌 단위의 행정실무를 수행하거나 내시령답·관모전답의 경작, 그리고 貢賦 징수의 일환으로서의 마전 경작이나 과수의 관리 등을 책임지는 직역을 수행하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수조 대상에서 면제('免租')되었을 가능성이 크겠다. 그렇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로 정전제의 원리에 규정되고 있었던 것임은 물론이다.

문무관료전의 분급과 백성정전의 관념적 지급 관행은, 관료제의 진전에 따라 전문 관료층이 대두하고 양천제적 신분제의 정비에 따라 국가 통치대상으로서의 법제적 '公民'(=良民)의 실체가 '私民'(=賤民)과 구별되어 구체화되면서 새로운 지목으로 혹은 관념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곧 국왕과 관료, 국왕과 민 사이의 쌍무적 인간관계를 전형으로 하는 사회 단계에서 取擇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토지 분급제였다.

5. 맺음말 -결론과 전망-

통일기의 사회경제적 제반 조건의 변화와 함께 식읍제에도 일정한 성격 변화가 일어났다. 일정 지역 내의 민에 대한 포괄적 지배, 즉 '지역지배'를 인정받는 형태의 제도에서 封戶 사여를 위주로 하는 형식적 차원의 제도로 변화한 것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식읍제는 왕실의 성원이나 대공신이라는 극히 일부의 인사에 한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왕실의 번병이 될 것을, 그리고 국왕에 대한 충성을 다할 것을 기대하면서 사여한 일종의 급여제라 할 것이었으나, 그 성격의 변화는 제반 사회경제적 기반의 변화 과정에서 그 결과로서 나타난 바라 하겠으므로, 민과 토지에 대한 일반적인 지배의 관행과 그 변화의 모습을 반영하는 일종의 바로미터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통일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여타 경제제도의 정비는 이러한 식읍제의 성격 변화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먼저 식읍을 위시로 하여, 部 혹은 지배층 일반의 집단적 혹은 개별적 차원의 私的 지배의 관행이 되고 있던 '지역지배'의 형태는, 국가의 公的 차원에서 일정한 규제를 받게 되었다. 祿邑制는 이러한 국가적 규제의 과정에서 지배 내용이 收租權 지배에 한정되는 형태로 귀결된 바였던 것이며, 따라서 이의 성립은 지배층의 사적 지배의 기반을 공적 제도의 차원으로 재편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6세기 이래 모든 지배층을 官位制라는 국가의 공적 질서체계 내에 편제한 과정과 모든 민과 토지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의 공적 지배의 대상이라는 公地公民 혹은 王土王民의 정치이념이 대두된 과정과 함께 나타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녹읍제는 당분간 기왕의 '지역지배'의 제약하에서 운영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이를 수조권 지배에 실질적으로 한정시키려는 국가의 노력은 단계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6세기 단계까지 '지역지배'의 형태를 강하게 유지하고 있던 식읍제가 통일기에 들어 封戶 사여의 형태로 형식화된 것으로부터 기왕의 '지역지배'의 형태가 크게 지양되었음을 알 수 있는 바, 바로 이러한 변화된 기반 위에서 문무왕대에 녹읍제를 수조권 지배에 한정시키고 이를 규제·감시하기 위한 국가 제도로서 左右司祿館 설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국가의 이러한 강제적 조치는 지배층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칠품의 난·비담의 난을 거쳐 통일전쟁기에는 지배층의 소극적 혹은 적극적 반발이 빈발하였다. 이에 대한 신라 국가의 대처는 가혹한 피의 숙청으로 일관하였으며, 신문왕대의 김흠돌의 난에 대한 진압 조치를 계기로 숙청극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반발세력에 대한 숙청의 과정과 함께 신라 국가는 관료제를 강화하는 일대 개혁의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신문왕 9년(689)에 녹읍을 혁파하고 세조 지급으로 대체케 한 조치는 이러한 개혁 조치의 핵심적 사안이었다. 이는 녹읍에 대한 수조권 지배를 국가가 관장하여 官收官給해 주겠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것으로서, 결과적으로 녹읍주의 녹읍지에 대한 자의적 수탈의 여지를 차단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전 단계에도 歲租는 사적 지배기반이 빈약한 인사 중에서 국왕에 의해 발탁된 일부의 중소 관료층에게 특례적 보수체계인 '俸'의 일환으로 지급되고 있었다. 따라서 신문왕 9년의 조치는 지배층의 사적 지배기반에서 연원한 녹읍제를 이러한 세조로 일원화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으며, 그 결과는 관료제의 일대 강화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또한 그간 국왕 중심의 관료제가 강력하게 시행되어온 결과이기도 하였다.

신문왕 7년(687)에 차등 지급케 한 文武官僚田은 이러한 관료제의 강화 추세 속에서 현직 관료들의 관직 복무에 대한 반대 급부로서 새로이 설정된 토지 분급제의 시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문무관료전의 구체적 사례로서 거론되는 촌락문서의 內視令畓이 극히 소규모인 4결에 불과했던 것에서, 이는 당시 관료층의 주된 경제적 기반은 될 수 없었으며, 역시 녹읍이, 그리고 그것이 혁파된 이후에는 세조가 이들의 주된 경제적 기반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민의 사유지인 연수유전답이 아닌 별도의 토지에 설정된 것이었으며, 그 경영과 경작은 촌주의 책임하에 촌민들의 역 동원에 의해 행해졌고, 그 소출물은 일체가 해당관료에 귀속된 것으로 여겨져, 토지의 규모에 비해 수취의 양은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공지공민 혹은 왕토왕민의 이념이 구체화되면서 나타난 것이 왕민(=공민)에게 왕토(=공지)를 분급해 준다는 관념이었고, 민의 사유 토지에 대하여 국가가 그 사유권을 공인해 주는 조치가 이 관념의 실현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관념적 대민 토지 분급제'라 칭해질 수 있는 바라 하겠는데, 이를 통해 국가는 공민과 공지로부터 조용조를 수취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결국 실질적 측면에 있어서 이는 그간의 戶口 조사와 양전 사업의 성과를 배경으로 하여 체계적인 수취제의 정비가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덕왕 21년(722)의 百姓丁田의 始給 조치는 이러한 관념적 '대민 토지 분급제'가 처음으로 행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에서 한단계 진전된 수취제의 정비를 위한 조치였다. 그것은 人丁의 수와 토지 結數를 결합하여 인위적인 편호를 설정하고, 이를 단위로 하여 예의 '관념적 토지 분급'을 행한다는 '丁田制'의 시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전제의 시행은 조용조의 수취를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함은 물론 州郡縣制의 제방제를 운영해 가는데 있어서도 일관된 기준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으로서, 고려시대 '田丁制'의 선행형태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촌락문서에서 '烟에게 주어 가지게 한 田畓'이라는 의미의 관념적 분급지가 편호로서의 孔烟을 단위로 하여 분급되고 있었다는 것은 이러한 丁田制 운영의 실재성을 입증하는 바이다.

이상이 통일전후기 국가적 토지 및 보수 급여제 정비의 과정과 그에 내포된 의미를 개괄적으로 재정리한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 급여제는, 下代에 들어 이의 정상적 운영을 뒷받침하던 국왕 중심의 강력한 관료제의 운영에 이상이 생기고 수취제가 파행적으로 운영되면서 서서히 무너져 갔다. 이후의 전망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간략히 피력하면서 본고를 마치고자 한다.

먼저 경덕왕 16년(757)에 內外群官에 대하여 歲租에서 이어진 月俸을 지급하는 대신 다시 祿邑을 지급토록 조치한 것은, 녹읍에 대한 官收官給的 운영을 당시의 관료체제가 더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세조 지급의 폐지와 녹읍의 부활 조치를 취했던 근저에는 기왕의 견해에서 피력된 바대로 지배층의 반동적 발호와 이 시기를 전후한 시기에 나타난 계속된 재해로 인해 국가 재정의 궁핍 및 수세원인 민의 유망 현상 등이 중첩적으로되어 작용했을 것이 분명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관수관급적 운영에 부하되는 국가 기구의 과중한 부담을 무릅쓰면서 시행한 세조 급여제 자제의 급진성과 무모성에서 필연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면이 있음도 부정하기 어렵다.

경덕왕대만 하더라도 기왕의 관료제가 지닌 강고성이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었으므로, 세조 급여제의 운영상에 내포된 이러한 난점을 해소하기 위해 각 녹읍주에게 수조권을 환원시키는 녹읍 부활 조치를 취하긴 하였으나, 녹읍에 대한 국가적 감시와 규제를 위한 조치가 함께 취해져서 당분간은 큰 무리 없이 운영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수취제의 운영이 파행으로 치달으면서 녹읍제 운영은 녹읍주의 자의적 지배에 맡겨지는 경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지방세력의 독립화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면서 이러한 녹읍은 지방세력의 독자적 지배기반으로 화하였고, 이것이 유력 호족에 의해 통합되면서 후삼국으로 再鼎立되어 갔던 것이다.

한편 食邑의 사여와 지배의 형태도 반동적 모습으로 나타났다. 무열왕계의 대표주자인 김주원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元聖王 金敬信이 무열왕계와의 타협의 수단으로서 김주원을 溟州君王으로 봉하고 그 일대를 食邑으로 할양해 줌으로써, 이에 대한 그의 지배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후 神武王이 閔哀王을 타도하고 왕위에 오르는데 자신의 무력 기반을 제공해준 淸海鎭大使 弓福(張保皐)을 感義軍使로 삼고 食實封 2,000호를 食邑으로 봉해 준 것 역시 封戶의 수 보다는 기실 청해진을 중심으로 장악하고 있던 남해안 일대에 대한 그의 지배권을 공인해 주는 의미가 더 강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왕실의 번병이 되는 왕족과 대공신에게 국왕이 사여한다는 관념을 담은 식읍 역시 이처럼 현실적 지배기반을 공인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음을 알 것이다.

祿邑과 食邑에 대한 장악 세력의 현실적 지배권을 인정해주는 이러한 형태는 고려 건국초에까지 이어졌다. 식읍의 경우는 金傅나 甄萱과 같은 국왕급 인사가 투항해 올 때 그의 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의 민과 토지에 대한 지배를 일임하는 형태로 사여되었고, 녹읍의 경우는 호족급 인사가 투항해 올 때 그의 세력범위에 대한 지배를 일임하는 형태로 사여되었다. 지방에 대한 장악력이 미치지 못하던 고려 초의 상황하에서는 불가피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국가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식읍과 녹읍은 개편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식읍의 경우는 식읍에 대한 지배 내용에 국가적 규제를 가하는 제도를 마련하였으며, 더나아가 封爵制를 정비하여 식읍 사여의 대상을 확정하고 이들에게 형식적인 封戶만을 사여해 주는 것으로 정리함으로써, 그에 내포된 이념은 살리되 실제적 지배력은 배제하는 방향으로 재편하였다. 녹읍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재편의 과정을 거쳤다. 즉 태조 17년(934)에 태조가 禮山鎭에 행차하여 내린 詔書에서, 祿邑民에 대한 자의적 수취를 자행하는 녹읍주, 즉 호족들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이를 규제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표출했던 것은 녹읍제 개편의 단초를 연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후 녹읍 사여의 사례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녹읍제 자체가 폐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에 고려는 役分田 사여의 단계를 거쳐 경종대에 수조권 지배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 분급제로서 전시과제도를 처음 정하는 단계를 거치더니, 이후에 전시과제도 자체도 그 분급 기준을 '人品'에서 '官品'으로 재정리함과 함께 분급의 범위도 확정하는 것으로 정비해 갔다. 이와 함께 관리에 대한 보족적 생계 수단으로서 지급되는 祿俸制도 정비하였다. 결국 고려의 전시과제도와 녹봉제는, 6-8세기에 일차 정비되고 신라 하대와 고려 초에 일정한 재조정의 과정을 거쳐 보다 진전된 형태로 재편된 토지 및 보수 급여제의 골격을 형성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