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num.mokpo.ac.kr/kangbr/www/주군제지방관.htm
新羅 中古期의 州郡制와 地方官

1. 머리말

2. 郡*村과 邏頭*道使

3. 州의 용례 - '小州'와 '廣域州'

4. '小州'와 軍主*幢主

5. '廣域州'와 行使大等

6. 맺음말

1. 머리말

지방제는 고대의 집권적 영역국가가 성립되면서 중앙정부가 지방사회를 편제*지배하기 위한 제도로서 처음 마련되었으며, 이후에 변화*발전을 거듭해 갔다. 신라 역시 5-6세기에 영역국가가 성립되면서 처음 지방제가 성립되었으며, 6-7세기에 삼국통일 과정에서 한 단계 진전된 지방제로 정비되어 갔다고 하겠는데, 이러한 신라 지방제의 추이는 대체로 '州郡制에서 州郡縣制로의 발전'이라는 도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신라의 제1단계 지방제라 할 州郡制의 특징적 측면을, 공식적 편제단위로서의 州*郡과 비공식적 편제단위로서의 村, 그리그 그 각각에 파견된 지방관의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먼저 郡*村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간 郡司*村司의 문제를 갖춘 매우 정비된 행정단위로 파악한 견해에서부터, 郡을 일종의 감찰단위로 파악하여 행정단위로서의 정형성을 부정하려는 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이 제기된 바 있다. 필자는 기왕의 고정적 관점에서 벗어나 지방관인 邏頭*道使의 문제와 관련하여 중고기에 郡制가 성립하고 변화한 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다음에 州制의 경우를 보면 軍制의 문제와도 결부되어 기왕에 특히 무성한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여기에서는 기왕에 필자가 이 문제에 접근한 방식이 아직도 유효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는 입장에서 중고기 州制를 다음과 같이 단계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먼저 중고기 '州'의 용례 검토를 통해서 '小州'와 '廣域州'의 개념을 도출하고, '소주'와 '광역주'의 2원적 州制의 특징적 면모를 제시하려 한다. 다음에 '소주'에 대해서 군사적 전진 및 방어기지로 파악하고, 軍主와 幢主가 '소주'의 군사력[停]을 통솔하여 중고기 신라의 대외팽창을 주도하였음을 살펴볼 것이며, 이어서 창녕비에 나오는 行使大等의 성격 검토를 통해서 '광역주'의 운영 실태를 살펴보고, 小京이 그의 관할 중심지였음을 검증하려 한다. 마지막으로 '소주'와 '광역주'의 관련성에 주목하고, 중고 말에 이르러 '소주'와 '광역주'가 점차 州治와 州領域의 관계로 전환되어 통일기 州制로 연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음을 살피려 한다.

2. 郡*村과 邏頭*道使

신라 州郡制에서 郡과 村은 각각 이전 단계의 小國과 邑落 단위에서 재편된 편제단위라고 할 수 있다. 일개 소국이었던 斯盧國이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여 집권적 영역국가 체제를 갖추어 가면서, 각 소국 단위를 郡으로, 소국의 구성분자였던 邑落 단위를 村으로 각각 편제하여 이들을 지방제[州郡制]의 근간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군과 촌 단위에는 邏頭와 道使가 중앙으로부터 파견되고 있었음이 지적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군과 촌의 지방관제는 시종 고정불변한 것은 아니었고, 6세기 단계에 일정한 변화 및 정비의 과정을 거쳤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그 변화 및 정비의 과정을 6세기의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서 살피려 한다.

먼저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蔚珍鳳坪新羅碑(이하에서 '鳳坪碑'라 약칭)에 나타난 바를 통해서 6세기 전반 단계의 군*촌과 이에 파견된 지방관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봉평비는 동해안 방면에서 일어난 일종의 소요사태를 신라 중앙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일련의 조치를 취한 사실을 기록한 비이다. 봉평비에 나오는 동해안 방면과 관련된 지명 및 인물에 대한 자료는 당시 이 방면에 대한 편제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유효한 정보로 활용될 수 있다.

鳳坪碑에 의하면 居伐牟羅를 위시로 하여 男?只村*阿大兮村*葛尸組村*悉支 등의 지명들과 이와 관련된 인물들이 명기되어 있다. 이중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난 곳으로 居伐牟羅와 男?只村이 가장 앞에 명기되었고, 사태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阿大兮村과 葛尸組村도 함께 적기되었으며, 이와 함께 杖 60 혹은 杖 100의 형벌에 처해진 각 촌별 토착 책임자들의 이름도 기입되었다. 이와 함께 왕경인으로서 小舍帝智의 京位를 가진 居伐牟羅道使 卒次와 悉支道使 烏婁次, 그리고 奈麻의 경위를 가진 悉支軍主 介夫智 등도 열거되었다.

봉평비에 나오는 지명들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곳은 역시 사태가 발생한 居伐牟羅와 男?只가 되겠는데, 이들의 오늘날 위치는 봉평비가 발견된 蔚珍郡 竹邊面 일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또한 이와 함께 사태에 대한 연대 책임을 진 것으로 나타난 阿大兮村과 葛尸組村 역시 그 주변 일대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거벌모라*남미지촌*아대혜촌*갈시조촌의 4개 촌은 당해 사태에 대해서 연대 책임을 지고 있다는 점과 지역적으로 근접해 있었으리라는 점에서 하나의 편제단위로 파악되고 있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그런데 悉支의 경우는 이와 사정이 다르다. 실지는 오늘날 삼척 지역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사태의 발생지와 비교적 거리가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당해 사건에 연대 책임을 지고 형벌을 받은 실지 출신의 토착 인물은 전혀 나와 있지 않고, 왕경 출신의 실지군주와 도사만이 나와 있는 것이다. 이런 사정에 미루어 볼 때, 悉支의 軍主와 道使가 당해 사태에 개입한 것은 실지가 당해 사건에 직접 연루되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웃한 편제단위체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를 진압하고 수습하는데 있어서 군사적*행정적 지원을 하기 위한 데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悉支는 위의 4개 촌과는 다른 별도의 편제단위에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편제단위위 관련하여 居伐牟羅道使와 悉支道使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중 먼저 거벌모라도사의 경우를 보면, 앞에서 거론했듯이 거벌모라*남미지촌*아대혜촌*갈시조촌의 4개 촌이 하나의 편제단위로 파악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도사가 나머지 촌에는 보이지 않고 중심촌인 거벌모라에만 있다는 사실은 일단 주목되어 좋으리라 본다. 즉, 거벌모라도사는 중심촌인 거벌모라에 파견되어 위의 4개 촌으로 구성된 편제단위체를 관할하는 지방관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볼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수 있다면, 悉支道使 역시 몇개의 촌으로 구성된 또 하나의 편제단위체에 대한 관할 책임자로서 중심촌인 悉支에 파견된 존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대로라면 동해안 방면에는 6세기 전반에 적어도 2개의 편제단위체, 즉 居伐牟羅를 중심으로 한 편제단위체와 悉支를 중심으로 한 편제단위체가 있었음이 확인된 셈이 된다. 이러한 편제단위체는 4개 정도의 촌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단위체 별로 1명의 도사가 파견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러한 편제단위체가 공식 명칭으로 칭해지지 않고 단순히 몇개의 촌으로 구성된 막연한 단위체로 파악되고 있다는 점이 주의를 끈다. 이는 소국 단위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신라의 지방제가 성립된 것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주지하듯이 삼한사회에서 小國은 그 결집력이 그리 강고하지 못했던 반면에 소국을 구성하는 邑落은 정치단위체적 독자성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사정이 신라의 초기 지방제 성립에 어떤 형태로든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봉평비에서 소국 단위는 道使의 관할을 받는 공식 편제단위체로 파악하면서도 이에 정식의 편제단위명을 붙이지 못했던 반면에, 읍락 단위는 공식적인 단위체로 파악되지는 못하였으나 이에 村이라는 명칭을 붙여서 그 개체성을 어느 정도 용인한 것처럼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 반영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지증왕 4년(503)에 세워진 迎日冷水里新羅碑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신라 초기 지방제의 특징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봉평비에 나타나는 이러한 편제단위체는 이후에 郡이라는 정식의 명칭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진 昌寧眞興王巡狩碑(이하 '창녕비'라 약칭함)에 나오는 '于抽悉直河西阿郡'이라는 구절이 주목될 수 있다. 이 구절은 당시 동해안 방면에 두어졌던 于抽郡과 悉直郡과 河西阿郡을 합칭한 것으로서, 이들은 각각 오늘날 울진, 삼척, 강릉 지역에 비정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6세기 중후반 경의 동해안 방면에 3개의 군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겠는데, 이중 우추군과 실직군은 봉평비에 나타나는 두 개의 편제단위체, 즉 居伐牟羅道使가 관할하는 단위체와 悉支道使가 관할하는 단위체와 각각 대응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6세기 전반의 봉평비 단계에서는 4개 정도의 촌으로 구성되어 있고 道使에 의해 관할되는 편제단위체로서 막연히 파악되고 있던 것이, 6세기 중후반의 창녕비 단계에서는 郡이라는 정식의 편제단위명으로 칭해지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지방제가 정비되어진 결과로 볼 것이다.

이러한 지방제의 진전된 모습은 진평왕 13년(591)에 세워진 남산신성비에서 살필 수 있다. 南山新城碑('신성비'라 약칭함)에 의하면 우선 郡은 대개 4개 정도의 촌으로 구성된 것으로 되어 있어, 편제단위의 기본 구조에서는 봉평비 단계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군을 구성하는 모든 촌들에 邏頭 혹은 道使가 파견된 것으로 되어 있어, 지방관제에서는 봉평비 단계의 그것에 비해 확실히 분화*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좀더 부연하자면 신성비에서는 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촌에는 邏頭가, 그외 여타의 촌들에는 道使가 파견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1개의 중심촌에만 道使가 파견된 것으로 되어 있는 봉평비 단계에 비해서 지방관제가 크게 분화되었음이 엿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지방관제의 분화는, 중심촌에만 파견하던 도사를 모든 촌들에 확대 파견하게 되면서, 중심촌에 파견하는 도사를 여타의 도사와 구분하기 위해서 邏頭라 특칭하게 된 결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이런 견지에서 신라 지방관제의 분화*발전을 반영해 주는 주요 지표로서 邏頭의 용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邏頭란 용례가 처음 확인되는 것는 551년에 세워진 明活山城碑에서이므로, 신라 국가에서 邏頭란 칭호를 지방관명으로 처음 사용한 시기는 6세기 중반 경까지 올라갈 수 있겠다. 이는 곧 신성비에 보이는 지방관제의 분화*발전의 추세가 늦어도 6세기 중반 경부터 진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지방관제의 이러한 분화*발전의 추세는 郡 단위만을 공식적 편제단위로 파악하던 봉평비 단계와는 달리, 신성비 단계에서는 촌 단위까지를 공식적인 편제단위로 파악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는 곧 국가의 집권력이 강화됨에 따라 지방에 대한 편제를 철저화해 간 결과라 할 것인 바, 이것이 통일기로 이어져서 村이 縣으로 재편되는 배경이 되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3. 州의 용례 - '小州'와 '廣域州'

州는 郡*村과 더불어 신라 중고기 州郡制의 기본 단위이다. 중고기 州는 대체로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그간 여러 논자들은 이를 각기 다른 명칭으로 칭하면서도 그 성격에 관한 한 대부분 州領域과 州治의 관계로 보는데 이론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州領域과 州治의 관계 도식은 안정화된 통일신라 州制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는 유효하겠으나, 역동적인 중고기 州制 성립의 과정을 설명하는 데는 부적절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에 여기에서는 중고기 州制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우선 昌寧眞興王巡狩碑(561년에 건립됨; 이하 '昌寧碑'라 약칭함)와 {三國史記}에 나오는 중고기 州 용례를 비교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창녕비에서의 州 용례를 보면, 上州와 下州와 같이 '추상적 용례의 州'만 쓰고 있고 이들 각 州에는 行使大等 2인씩이 파견된 것으로 되어 있으며, 軍主가 파견된 곳은 州를 칭하지 않고 구체적인 지명만을 표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비해 {三國史記}에서는, 州는 기본적으로 군주가 파견된 곳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 용례를 보면 悉直州라든가 沙伐州 등과 같이 '구체적인 지명을 冠한 州'를 일반적인 용례로 쓰고 있으며, 上州나 下州, 新州와 같은 '추상적인 표현의 州'는 예외적인 용례로 쓰되 '지명을 冠한 州'와 같은 것으로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창녕비와 {삼국사기}의 州 용례의 차이를 대비해 보면 다음 <표 1>와 같다.

<표 1> 昌寧碑와 三國史記의 州 용례의 비교
전 거
州 용례
지 방 관
비 고
昌 寧 碑
(구체적 지명)
軍 主
州를 尾稱하지 않음
추상적 표현의 州
行使大等 2인
三國史記
구체적 지명을 冠한 州
軍 主
추상적 표현의 州
 
 

<표 1>에 나타난 창녕비와 {삼국사기}의 주 용례의 차이를 염두에 두면서, 우선 軍主와 行使大等 2인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부터 논의의 실마리를 풀어가 보기로 하자.

<표 1>에 의하면 창녕비에서는 行使大等 2인에 의해 관할되는 '추상적 표현의 州'만을 州로 표기하고 있으며 軍主 파견지에 대해서는 구체적 지명만 쓰고 州 표기를 하지 않고 있는 반면에, {삼국사기}에서는 行使大等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고 '지명을 冠한 州'든 '추상적 표현의 州'든 모든 州 용례는 軍主의 파견지를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上州와 下州 등 '추상적 표현의 州'를 관할했다는 行使大等 2인에 대한 기록은, 비록 {삼국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해도 당대의 일차 사료인 창녕비에 나오고 있으므로, 분명한 사실로 인정해도 좋으리라 본다. 문제는 軍主를 과연 州와 관련시킬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군주 파견지에 대해 州 표기조차 하고 있지 않은 창녕비의 입장에서 보면 軍主와 州의 관련성은 일단 회의적이지만, 모든 州 용례를 군주 파견지와 결부시키고 있는 {삼국사기}의 입장에서 보면 그 관련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는 州에 대한 {삼국사기} 찬자의 인식과 관련하여 해명될 문제라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주목해야 할 점은, 州와 관련된 것이 분명한 行使大等에 대한 기록이 {삼국사기}에서는 왜 전혀 언급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세가지의 측면에서 살펴질 수 있겠다.

첫째, {삼국사기} 찬자가 行使大等에 대한 전거 자료를 전혀 보지 못했을 가능성이다. 우선적으로 생각해 볼만한 가능성인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서는 일단 유보해 두기로 한다.

둘째, {삼국사기} 찬자가 州에 파견된 지방관들 중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장관격인 軍主만을 거론하고 나머지는 생략했을 가능성이다. 이는 군주를 주와 관련시킨 {삼국사기}의 입장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되겠는데, 이렇게 본다면 行使大等은 州 장관인 군주 휘하의 중하위 官員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창녕비에 의하면 군주 파견지는 구체적 지명으로, 그리고 행사대등의 관할지는 '추상적 표현의 주'로 각각 따로 표기되고 있어서, 군주와 행사대등을 州라는 동일 차원의 상하 관계로 치부해 버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세째, {삼국사기} 찬자가 중고기의 州를 잘못 인식했을 가능성이다. 사실 {삼국사기} 찬자는 軍主와 摠管을 통일기 州 장관인 都督의 연원적 동일체로 파악한 것에 기초하여, 중고기 州를 단순히 통일기 州의 연원적 동일체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摠管을 都督의 연원적 동일체로 파악한 것이 분명한 오류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軍主를 단순히 도독의 연원적 동일체로 파악한 것 역시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고, 이런 면에서 통일기 州를 중고기 州에 단순 소급*대입시켜 파악한 인식 역시 문제가 없을 수 없다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에 의거할 경우, 軍主를 중심으로 중고기 州制가 파악될 수밖에 없어, 行使大等과 관련된 州制의 또 다른 측면이 수용될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겠다. 여기에서는 이 세번째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창녕비를 기준으로 삼고 {삼국사기}의 관련 기사를 비판적으로 이해하여, 중고기 州와 軍主 및 行使大等과의 관계를 재구성해 보려 한다.

먼저 行使大等에 의해 관할되었을 '추상적 표현의 주'의 용례를 들 수 있겠다. 창녕비에 나오는 上州와 下州는 물론이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新州가 이러한 부류의 州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군주 파견지에 대한 문제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창녕비에서는 군주 파견지에 대하여 구체적 지명만을 쓸 뿐 州 표기를 하지 않고 있고, {삼국사기}에서는 '추상적 표현의 주'와 '지명을 冠한 주' 용례를 혼동하여 모두 군주 파견지로 파악하고 있어 대조적인데, 이러한 두 기록을 함께 감안하여 주와 군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즉, {삼국사기}에 의거하여 軍主와 州와의 관련성은 일단 인정하되, 창녕비에 의거하여 행사대등과 관련된 '추상적 표현의 주'를 제외하고 '지명을 冠한 주' 용례만을 군주와 관련된 州로 파악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고기의 州制는 결국 행사대등이 관할하는 '추상적 표현의 주'와 군주가 파견되어 駐箚한 '지명을 冠한 주'로 구성되는 2원적 구조를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먼저 행사대등에 의해 관할된 전자의 주는, 창녕비에서 上州'行使大等' 및 下州'行使大等'과 대등한 것으로 나오는 于抽悉直河西阿郡'使大等'이 동해안방면의 于抽郡과 悉直郡과 河西阿郡의 3개 군의 광역을 관할했던 지방관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 '廣域州'라 칭하기로 하고, 이에 반해 군주가 駐車한 후자의 州는 구체적 지명을 冠하고 있다는 점에서 편의상 '小州'라 불러 '광역주'와 구분해 두기로 한다. 이제 '광역주'와 '소주'로 나누어 그 각각의 성격과 지방관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소주'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4. '小州'와 軍主*幢主

창녕비에 의하면 561년 당시에 군주는 比子伐軍主, 漢城軍主, 碑利城軍主, 甘文軍主의 '四方軍主'가 있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러한 '사방군주'가 파견된 '小州'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영토가 팽창함에 따라 수시로 최전방으로 추진*배치되어 가는 유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거하여 중고기에 小州가 네 방면으로 移置되어간 과정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표 2> '小州'의 移置
방 면
'小州' 이름
현 위치
설치 시기
동해안 방면
悉 直 州
강원 三陟
지증왕 6년(505)
何瑟羅州
강원 江陵
지증왕 13년(512)
(悉直州)
강원 三陟
?
比列忽州
함남 安邊
진흥왕 17년(556)
達 忽 州
강원 高城
진흥왕 29년(568)
조령 및 추풍령 방면
沙 伐 州
경북 尙州
법흥왕 11년(524)
甘 文 州
경북 開寧
진흥왕 18년(557)
一 善 州
경북 善山
진평왕 36년(614)
한강하류 방면
南 川 州
경기 利川
진흥왕 14년(553)
北漢山州
서울 강북
진흥왕 18년(557)
南 川 州
경기 利川
진흥왕 29년(568)
北漢山州
서울 강북
진평왕 26년(604)
가야 방면
比斯伐州
경남 昌寧
진흥왕 16년(555)
大 耶 州
경남 陜川
진흥왕 26년(565)
押 梁 州
경북 慶山
선덕왕 11년(642)
 
① {삼국사기}에는 何瑟羅州에서 悉直州로 다시 이치했다는 기록이 없으나,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鳳坪碑에 '悉支軍主'가 나오고 있어, 지증왕 13년에서 법흥왕 11년 사이에 하슬라주에서 실직주로 주가 다시 이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표시한 것이다.

②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흥왕 14년에 '新州'를 설치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광역주'의 용례를 南川州라는 '소주'의 용례와 혼동하여 쓴 것으로 판단하여 교정한 것이다(姜鳳龍, 1994, 앞 논문, pp.98-99 참조).

<표 2>에 의하면 신라의 '소주' 중에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동해안 방면의 실직주였다. 그런데 동해안 방면은, 눌지왕 대에 고구려와 실직에서 처음 군사적 갈등이 야기된 이후 '말갈'을 앞세운 고구려군과 신라군과의 군사적 충돌이 빈번하게 행해지고 있었고, 무열왕 대까지도 이러한 군사적 불안정 추세가 계속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서, 이 방면에 가장 먼저 '소주'가 설치되었다는 점을 돌이켜 본다면, '소주'란 군사적 방어 및 전진기지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음이 쉽게 추론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신라는 이 방면에 대한 군사적 진출을 거듭하여 悉直州에서 何瑟羅州로, 그리고 比列忽州로 '소주'를 추진 배치시켜갔던 것이다.

두번째로 '소주'가 설치된 방면은 조령 및 추풍령 방면이었다. 법흥왕 11년에 설치된 사벌주가 그것이다. 사벌주는 조령과 이화령을 넘어 충주와 청주를 거쳐 한강하류에 이르는 길목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고구려와 백제 세력의 진출을 저지하면서 동시에 한강하류 방면으로 진출해 갈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한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역시 군사기지적 성격이 자연스럽게 추론될 수 있다. 과연 이후 신라는 한강하류 방면으로 진군하여 진흥왕 14년에는 이천 지역에 南川州라는 '소주'를 설치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聖王이 친히 이끌고 온 백제군을 관산성 전투에서 패퇴시킴으로써, 한강하류 방면에 대한 군사적 주도권을 확립해 갔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사벌주의 군사적 필요성은 자연히 사라졌고, 그 대신 추풍령으로 통하는 길목이 적대국으로 화한 백제의 군사적 공세를 저지할 새로운 요충지로 부각되어 진흥왕 18년에 沙伐州가 폐지되고 甘文州가 새로이 설치되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소주'가 설치된 방면은 가야 방면이었다. 법흥왕 19년(532)의 金官國 투항 사건을 계기로 남부 해안일대의 가야세력에 대한 지배권을 접수한 신라는 이제 내륙의 가야세력에 대해서도 당연히 군사적 진출을 꾀했을 터이다. 이 방면에 대한 본격적 진출의 신호탄이 될 군사 기지의 구축은 관산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한강하류 방면에 대한 군사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직후인 진흥왕 16년에 이루어졌으니, 比斯伐州의 설치가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진흥왕은 즉위 22년에 중앙의 大等들을 거느리고 비사벌(오늘의 창녕)에 순수하여 사방의 '소주'에 파견한 군주들('사방군주')과 각 '광역주'를 관할하는 行使大等을 위시로 한 外官들을 비사벌에 초치하여 일대 군사적 단합 대회를 개최하고 그 참석자를 명기한 昌寧碑를 세움으로써, 이제까지의 대외팽창의 성과를 점검하고 내륙의 가야 방면에 대한 군사적 진출 의지를 촉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후 가야 방면에 대한 신라의 진출은 파죽지세로 이루어졌을 것이 예상되는 바, 그 결과 신라는 진흥왕 26년에 大耶州로 '소주'를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내륙의 가야세력을 군사적으로 통제*감시하는 한편, 육십령과 팔량치를 통하는 백제군의 공격 루트을 차단하고자 하는 양면적 의도의 군사 거점으로 활용되었을 터이다.

'소주'의 설치 및 이치의 과정과 그 의미를 위와 같이 풀이할 수 있다면, '소주'는 역시 최전방의 군사적 방어 및 군사기지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할 것이며, 이런 면에서 이는 확실히 중대의 州治와는 성격이 구분되는 것이다. 또한 '소주'에 파견된 軍主는 '소주'에 주둔해 있는 군단을 통수하여 최전방의 군사적 방어와 전진을 진두지휘한 야전군사령관격에 해당한다 할 것으로서, 이 역시 통일기의 州 장관인 도독의 연원적 동일체로 치부해 버리기는 곤란하다 할 것이다.

대팽창기인 중고기에 있어서 이러한 군주의 역할은 지대했을 것이며, 그 위상 역시 그에 상응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필자는 軍主를, 중앙 군단인 大幢 소속의 將軍群의 일원으로서 자기 휘하의 독자적 군사력('三千幢')을 인솔하여 사방의 '소주'에 파견된 존재로 파악한 바 있다. 이러한 필자의 논지를 약술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겠다. 각 將軍들이 각기 독자적 군사력으로서 거느리고 있던 '삼천당'은 將軍 휘하에 있는 副將軍격의 幢主들이 삼천당의 군사력을 분담 운용했는데, 군주는 이러한 將軍群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삼천당을 거느리고 '소주'에 파견된 자였다. '소주'는 공간적 규모는 郡 정도이고, 그 군사적 구성은 군주가 거느리고 간 중앙군과 '소주' 설치 지역의 토착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앙군을 분담 운용하는 幢主들은 다시 '소주' 설치 지역의 토착 지배자인 使人을 매개로 하여 촌별로 분담 통솔했다. 군주를 정점으로 운용된 이러한 '소주'의 군단에 대하여, 군영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인 '停'을 尾稱하여 '某停'이라 칭하였다. 따라서 '소주'를 지칭하는 '某州'는 '某停'이라고도 불리웠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중고기 '소주'의 특징은 수시로 이동하는 군사기지였다는 데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고 말에 신라의 대외팽창이 주춤해지고 삼국 간 국경이 고착화되면서 '小州'의 유동성은 점차 지양되어 갔을 것인데, 이에 따라 '소주'는 자연히 광역주의 州治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대의 州制와 都督의 관계를 중고기 州制와 軍主 관계와 동일시하는 인식은 이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이해된다.

5. '廣域州'와 行使大等

'광역주'는 行使大等 2인에 의해 관할되는 '추상적 표현의 주'를 말한다. 창녕비에는 '上州行使大等'과 '下州行使大等', 그리고 이와 대등한 '于抽悉直河西阿郡使大等'이 연이어서 각각 2인씩이 명기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서 진흥왕 22년 단계에 上州와 下州의 '광역주', 그리고 이와 동류의 광역권인 '于抽悉直河西阿郡'이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중 上州는 가장 먼저 신라에 편입된 경북 일대를 공간적 범위로 한 것이고, 下州는 법흥왕대 이래 신라에 투항한 일부의 가야지역을 대상으로 하였다고 생각된다. 또한 '우추실직하서아군'은 동해안 방면의 3개 군을 합칭하여 그 방면의 廣域圈을 임시적으로 설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上州와 下州 이외의 '추상적 표현의 주' 용례로서 新州가 쓰이고 있는데, 이는 진흥왕 22년 이후의 언제인가에 한강하류 방면의 경기 충청 일부 지역에 또 하나의 '광역주'가 설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광역주'는 어떻게 운영되었을까? {삼국사기} 등에는 이에 대한 자료가 전무하므로, 결국 창녕비에서 '광역주'의 관할자로 명기한 2명의 行使大等의 성격을 통해서 추론할 수밖에 없겠다. 그간 行使大等의 성격에 대한 기왕의 견해는 ① 軍主 휘하의 중하위 행정관으로 파악한 견해, ② 중대의 小京 장관인 仕大等의 전신으로 본 견해, ③ 上州와 下州의 行使大等을 州의 민정관으로, 于抽悉直河西阿郡의 使大等을 郡의 민정관으로 본 견해 등으로 묶어 볼 수 있다.

먼저 ①의 견해는 중고기 州制를 일원적으로 파악하여 州治에 주 장관인 군주와 중하위 행정관인 행사대등이 같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한 것인데, 앞에서 살펴본 중고기 州의 용례에 비추어 볼 때 인정하기 어렵다. ②의 견해는 ①의 견해에 내포된 이러한 문제점을 염두에 둔 대안이라 여겨지는데, 이는 다시 세가지 견해로 나누어진다. 첫째, 軍主와 行使大等을 각각 州의 軍政長官과 民政長官으로 보려는 견해와 둘째, 양자의 관계에 대한 입장 표명을 보류하려는 견해, 그리고 세째 行使大等을 幢主와 道使 등 지방관에 대한 범칭으로 보려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중 첫째의 견해는 일원적 州制 하의 이원적인 州長官體制를 상정한 것이 되겠으며, 세째의 견해는 行使大等을 郡*村 단위에 파견한 지방관으로 보아 州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회피하려 한 것인데, 이들은 使大等을 소경 장관인 仕大等의 전신일 것으로 전제면서도, 그 성격에 대해서는 모두 仕大等과 전혀 무관한 것을 상정했다는 문제점이 있다. 둘째 견해는 이러한 문제점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행사대등에 대한 성격 규정을 보류하여 고심한 흔적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③의 견해는 ②의 첫째 견해에서 제시한 이원적 州長官體制를 수용하여 이를 보완하려 것인데, 군주를 군정장관으로 본 것은 마찬가지이고 使大等을 주의 민정장관과 군의 민정장관으로 나누어 본 것이 다르다. 그러나 '于抽悉直河西阿郡'은 세개의 군을 합칭한 것으로 '광역주'와 상당하는 광역권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于抽悉直河西阿郡使大等을 일개 郡의 민정장관으로 본 것은 오히려 이전 견해를 개악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에서 行使大等의 성격에 대한 기왕의 견해와 이에 대한 필자의 논평을 나름대로 덧붙여 보았는데, 너무 견해가 다양다기하여 선뜻 어느 견해에 동조하기가 어렵다. 다만 필자는 중고기 州制를 군주가 통수하는 '소주'와 행사대등 2인이 관할하는 '광역주'의 2원적 관계로 파악하는 입장에서, 行使大等을 소경 장관 仕大等의 전신으로 파악한 ②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주목해 보려 한다. 주지하듯이 중대 뿐만 아니라 중고기에도 阿尸村이나 國原城 등에 소경이 설치된 적이 있었으므로, 使大等을 仕大等의 전신으로 파악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중고기의 소경 장관으로 판단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이를 인정하여 '광역주'를 관할한 것으로 파악한 行使大等 2인이 소경에 파견되었다고 한다면, 중고기의 소경은 上州*下州*新州 등의 '광역주'를 관할하는 중심지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므로, 중대의 소경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중대의 5소경은 통일후 지방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거점 혹은 지방 문화 창달을 위한 중심지로서 설치된 특별 행정구역이라 하겠으므로, 州制와의 직접적 관련성은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고기의 소경을 중대의 그것과는 달리 '광역주'의 중심지로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중고기의 소경은 다분히 왕경의 분신적 성격을 띠고서 해당 '광역주' 영역을 관할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실제 중고기 小京에는 왕경의 지배층이 집단적으로 옮겨가 살고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는데, 왕경과 지방의 차별적 편제가 강하게 적용되고 있던 당시의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것으로서, 곧 왕경의 분신으로서의 소경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바라 할 수 있겠다. 신라의 대외적 대팽창이 성취되어 가고 있던 중고기에 있어서, 왕경이 동남우에 치우쳐 있다는 점을 보완하면서 기왕의 영역과 새로 확보된 영역을 효과적으로 편제해 가기 위해서는 몇개의 '광역주'로 구분하여 그 각각에 왕경의 분신으로서의 소경을 설치하여 관할하게 하는 방식은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광역주'와 소경의 문제는 중고기 州制의 특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는데, 이는 필시 또 다른 州인 '소주'와 군주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광역주'의 설정은 그 중심지인 소경에 왕경 지배층이 집단적으로 이주하는 것을 전제로 하였을 것이므로 '광역주'를 설정하는 데에는 군사적 안정성이 반드시 확보되어야 할 필수 조건이라 할 것인데, 다름아닌 '소주'가 '광역주'의 군사적 안정성을 뒷받침하였을 것이다.

'광역주'와 '소주'의 이러한 관계와 관련하여 창녕비에 나오는 이러한 '광역주' 혹은 광역권이 '소주'가 설치된 네 방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조령 및 추풍령 방면과 가야 방면에는 上州와 下州라는 정식의 '광역주'가 설정되어 있는 반면에, 동해안 방면에서는 3개 군을 합칭한 임시적 광역권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한강하류 방면에는 임시적 광역권의 흔적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어디까지나 창녕비가 세워진 진흥왕 22년 단계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당시의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동해안 방면의 경우는 가장 일찍부터 '소주'를 설치하여 군사적 진출을 성취하긴 했으나 다른 지역에 비해 군사적 불안정 추세가 늦은 시기까지 이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방면에 정식의 '광역주'가 설정되지 못했던 것이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강하류 방면은 진흥왕 14년에 南川州가 설치되고, 이것이 18년에는 北漢山州로 추진 배치되어 군사적 진출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진흥왕 22년 단계의 창녕비에서 이 방면에 임시적 광역권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의외로 생각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좀더 깊이 생각한다면, '광역주' 설정을 위해서는 군사적 진출 이외에도 군사적 안정성의 확보라는 또 다른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어야 할 터인데, 진흥왕 22년 단계에는 그 조건이 아직 갖추어지지 못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 '광역주'가 설정되지 못했을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강하류 방면은 신라가 진출하기 이전까지 백제와 고구려가 교대로 점거한 지역으로 그들의 세력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고 하겠으므로, 신라가 이 방면으로 군사적 진출을 성취한 이후에도 군사적 불안정성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을 것이 예상되는 바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후 언제인가에 한강하류 방면에 새로운 '광역주'로서 新州가 설정되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어, 이 방면의 군사적 안정성이 확보됨에 따라 '광역주'가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광역주'는 최전방에 설치된 '소주'의 군사적 保衛 하에 군사적 안정성이 확보된 연후에 비로소 설정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더욱이 한강하류 방면의 경우는 '소주' 중심의 군사적 진출로 확보한 충청*경기의 일부 지역에 新州가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소주'의 군사 활동 자체가 새로운 '광역주' 설정의 직접적 토대를 창출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소주'가 이처럼 '광역주' 신설과 존립의 필수적 조건이라 할 군사적 안정성의 확보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면, '소주'의 통수권자인 軍主가 '광역주' 운영에 있어서도 이에 상응하는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상정될 수 있을 것이다.

'소주'와 '광역주'의 이러한 관계는 점차 州治와 州領域의 관계로 전환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 전환의 과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삼국 간의 國界가 확정되어 감에 따라 '小州'는 군사적 전진기지로서의 성격 보다는 이미 확보한 영역을 방어하는 핵심 기지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으며, 이러한 추세에 따라 중고 후기에는 그간 무상히 移置되던 불안정성을 지양하고 일정 지역에 정착됨으로써 안정성을 확보해 갔다. 이에 따라 '소주'는 '광역주'에 대한 기왕의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하여 '광역주'에 대한 명실상부한 중심지로 부상되어 갔으며, 급기야는 구체적인 지명을 冠하는 '소주'의 칭호가 기왕의 추상적 표현의 '광역주' 칭호와 混稱되든가 혹은 그를 대체해 갔다. 그 결과 '소주'와 '광역주'의 2원적 구조를 가지고 있던 중고기의 州制는 '소주'가 '광역주'의 州治化되어 1원적 구조로 재편되어 갔다. 7세기 중반경의 이러한 신라 성격의 州制는 一善州[上州], 居列州[下州], 北漢山州[新州], 牛首州(강원도 내륙지역), 何瑟羅州[동해안 지역]의 5州로 일단 성립됨을 보았으며, 문무왕 5년(665)에는 上州와 下州의 일부를 떼어서 ?良州를 다시 추가 설정하면서 6州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통일 이후에는 새로이 확보한 영역을 포함하여 9州制로 재편되는 과정으로 나아갔음은 물론이다.

6. 맺음말

이상에서 신라 중고기 州郡制의 특징적 측면을 지방관의 문제와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이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중고기의 郡과 村 단위는 각각 기왕의 小國 단위와 邑落 단위에서 재편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고 초에는 郡의 명칭은 아직 사용되지 않고 道使에 의해 관할되는 정식의 편제단위체로 파악되고 있었던 반면에, 村의 명칭은 사용되고 있었지만 정식의 편제단위체로 파악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는 신라가 소국 단위를 편제의 기본 단위로 설정하면서도 읍락 단위의 독자성을 아울러 염두에 둔 결과였다고 보았다.

6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郡을 구성하는 모든 村의 차원에까지 도사를 파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촌 단위를 정식 편제단위로 파악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郡의 중심 촌에는 道使가 아닌 邏頭를 파견하여 나두를 중심으로 한 군 단위의 편제단위를 여전히 중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郡村 관계는 통일기 州郡縣制 하의 郡縣 관계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중고기의 州는 '小州'와 '廣域州'의 두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이들은 州治와 州領域의 관계로 파악될 수 있는 통일기 州制의 연원적 동일체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먼저 '小州'는 사방의 최전방의 郡 정도의 공간적 범위에 설치된 군사적 전진 및 방어기지였다. 소주에 駐箚한 軍主는 중앙의 將軍群의 일원으로서 그의 휘하에 있는 군단인 '三千幢'의 군사력과 '소주' 설치 지역의 토착 군사력을 총괄 통수하였고, 군주 휘하의 副將軍格인 몇몇의 당주들은 이러한 '소주'의 군사력[停]을 분담 통솔했다. '소주'는 이러한 군사력의 운용을 통해서 중고기 신라의 대외팽창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廣域州'는 '소주'의 활동에 의해 군사적 안정성이 확보된 후방 지역에 설정된 것이었다. '광역주'의 사례로는 경북 일원을 대상으로 한 上州와 경남 일원을 대상으로 한 下州, 그리고 새로이 拓境한 경기*충청의 일부 지역을 대상으로 한 新州 등을 들 수 있다. 이밖에 창녕비에 보이는 '于抽悉直河西阿郡'은 우추군(울진)과 실직군(삼척)과 하서아군(강릉)의 3군을 합칭한 것으로, '광역주'와 대등한 광역권으로 假編制된 것이었다. 이러한 '광역주'는 行使大等 2인에 의해서 관할되었는데, 그 관할의 중심지는 小京이었다. 중고기의 소경에는 '광역주'의 책임자인 2인의 행사대등을 위시로 하여 왕경의 지배집단이 대거 이주하여 왕경의 분신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이를 통해 소경은 동남우에 치우쳐 있는 왕경의 지방 편제상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소경에 이주한 왕경인의 군사적 안정성이야말로 '광역주' 설정의 필수적 전제조건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광역주'의 군사적 안정성 확보는 '소주'의 군사적 활동에 의해서 보장된 면이 강하였기 때문에 '소주'의 군사 통수권자인 군주는 '광역주'에 대해서도 일정한 군사적*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소주'와 '광역주'의 관계는 중고 말기에 이르면 점차 州治와 州領域의 관계로 전환되어 갔으며, 이것이 통일기 州制 성립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