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num.mokpo.ac.kr/kangbr/www/패강진.htm
新羅 下代 浿江鎭의 設置와 運營
- 州郡縣體制의 확대와 관련하여-

1. 머리말

2. 郡縣 增置와 浿江鎭 설치

1) 郡縣 增置

2) 浿江鎭 설치

3. 浿江鎭 관할 범위의 확대

4. 浿江鎭의 編制와 運營

5. 맺음말

1. 머리말

대동강 이남 및 예성강 이북의 황해도 일대에 비정되는 浿江 지역은 신라의 북방 경영의 최후 종착지였다는 점과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세력 기반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되었으며, 이에 대한 연구 역시 자연히 신라사와 고려사의 두 입장에서 병행되었다. 그간의 연구에서 제시된 대표적인 사안들을 보면, 먼저 신라사의 입장에서 신라의 패강 지역 진출과 郡縣 및 浿江鎭 설치의 과정, 패강진 官制의 구성, 그리고 浿江道 및 浿西道의 용례를 둘러싼 道制의 실시 문제 등이 집중적으로 거론되었고, 이는 다시 고려사의 입장에서 나말 여초기 패강 호족 대두의 배경으로 간주되어, 고려 왕조 성립의 유력한 기반의 하나로서 파악되기도 하였다.

그간의 연구에서 패강 호족세력을 고려 건국의 가장 중요한 주체세력으로 파악한 것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이론이 없다. 다만 신라의 패강 지역 진출과 그 편제의 성과를 곧바로 패강 호족의 대두와 고려 건국의 배경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서는 좀더 면밀한 검토가 요청되는 문제라 생각한다. 이에 신라사의 입장에서 신라의 패강 지역 진출과 편제의 과정을 다시 한번 재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본고를 작성하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다음의 순서에 따라 신라의 패강 지역 진출과 편제의 과정, 그리고 그 편제 및 운영 방식의 변화를 추적*정리하려 한다. 첫째, 州郡縣體制를 패강 지역에까지 확대 적용해간 과정을 정리하려 한다(2장). 여기에서는 통일 초부터 나타나는 군현 증치의 현상을 주목하고, 중대 말에 이르러 패강 지역에까지 郡縣이 增置되어 漢州 소속 군현으로 편제된 바의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둘째, 패강 지역의 郡縣이 타 군현과 구별*편제되는 과정을 정리하려 한다(2장 2절). 여기에서는 패강 지역의 군현이 타 군현과 비해 특히 군사적 기능이 강조되었던 것을 지적하고, 이로 말미암아 결국 782년에 浿江鎭을 설치하여 패강 지역 군현을 별도의 광역권으로 묶어 편제하게 됨을 살펴볼 것이다. 세째, 9세기에 이르러 재령강 이서 지역에 다수의 군현을 새로이 설치하여 패강진의 관할 범위가 倍加되는 사정을 정리하려 한다(3장). 여기에서는 주로 12개의 군현이 재령강 이서 지역에 새로이 증치되었던 바의 사실성을 논증하는 것에 주로 할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패강 지역에 대한 신라의 편제가 진행된 각 단계 별로 패강 지역 군현의 편제와 운영의 변화상을 정리하려 한다(4장). 여기에서는 패강 지역의 군현들이 주군현체제의 일환으로서 편제*운영된 단계, 浿江鎭에 의해서 별도의 독립적 광역권으로 묶여 편제*운영된 단계, 그리고 9세기에 군현이 다시 대폭적으로 증치되어 패강진의 관할 범위가 倍加되면서 패강진의 광역권이 浿江道와 浿西道로 나뉘어 편제*운영된 단계로 나누어 정리할 것이다. 특히 마지막 단계의 편제*운영에 대해서는 고려시기 北界의 그것와 비교하여 그 선행적 모델로 파악함으로써, 신라*고려 간의 제도적 승습 관계를 밝히려 한다.

2. 郡縣 增置와 浿江鎭 설치

1) 郡縣의 增置

통일 이후 신라는 확대된 영역을 9大分하여 編制함으로써 9州制의 큰 틀을 마련하기는 하였으나, 각 州는 郡縣 설치의 밀집도에서 상당한 편차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각 州가 내부 편제상의 불균형성을 안고 있었다고 한다면, 신라 당국은 이를 지방지배의 중대한 한계로 인식하였을 것이고, 이에 9州制를 균형있고 내실있게 운영해 가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획기적인 지방지배 정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이후의 자료에 나타나고 있는 몇 차례의 郡縣 증치 조치가 바로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선 변방 지역에 郡을 增置한 다음의 두 사례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가-1) 南海郡 神文王初置轉也山郡

2) 巨濟郡 文武王初置裳郡

이는 <<三國史記>> 地理志에 나오는 남해군과 거제군의 연혁기사 중에서 그 설치에 관한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위의 기사를 새김에 있어서 '初'字를 위에 붙여 새길 경우 막연히 신문왕 초와 문무왕 초에 설치했다는 것이 되겠지만, 아래에 붙여 새길 경우 신문왕대와 문무왕대에 처음 설치('初置')했다는 것이 되어 자못 의미하는 바가 달라질 수 있겠다. 대개 전자의 방식으로 새기는 것이 일반적인듯 하지만, 轉也山郡의 경우 新羅本紀에서 신문왕 10년(690)에 설치되었다는 기사가 확인되고 있어 그 置郡 시기를 신문왕 초로 볼 수 없는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가-1) 기사는 南海郡이 신문왕대에 轉也山郡이라는 이름으로 '初置'된 사실을, 그리고 가-2) 기사는 巨濟郡이 문무왕대에 裳郡이라는 이름으로 '初置'된 사실을 각각 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이렇게 볼 경우, 郡을 初置했다고 한 이 문무왕대 및 신문왕대라는 時點은, 남해군과 거제군이 이미 중고기에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지역이라는 통념을 부정할 수 없다면, 너무 늦은 감이 있어 의문의 여지가 있겠다.

이러한 의문과 관련하여 地理志에 나오는 다른 지명들의 연혁기사를 대조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井上秀雄의 연구에 의하면 地理志에서 연혁기사를 두어 강조하고 있는 주요 지명으로는 위의 두 지명을 포함하여 모두 33개가 찾아지고 있는데, 이들은 州 및 小京과 관련된 지명을 위시로 하여 小國 병합과 관련된 지명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주 및 소경과 관련된 지명들은 그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연혁기사를 두어 강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으며, 소국 병합과 관련된 지명들 역시 당시까지 전승되어 오던 주요 소국의 병합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연혁기사을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런데 소국 병합과 관련된 지명들의 연혁기사는 상고기의 婆娑王(80-111)과 助賁王(230-246) 대에 진한 소국들을 통합한 사실과, 중고기의 法興王과 眞興王 대에 가야 소국들을 통합한 사실을 정리한 것이 대부분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위의 가-1, 2) 기사는 置郡의 시점이 통일기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예외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南海郡과 巨濟郡의 始置 시점에 대한 의문이 다시 한번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위의 가) 기사 자체를 두찬의 소산으로 돌려버리지 않는 한, 置郡의 의미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통해서 해소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를 주군현제 운영의 충실화와 균질화를 위해 신라 당국이 취한 郡의 增置 조치였다는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즉, 위의 두 지역은 원래 가야연맹체의 일원이었다는 역사적 배경과 동남 해안지방의 거대 도서라는 지리적 조건을 공유하고 있거니와, 이러한 역사 지리적인 공통의 배경을 고려하면서, 위의 置郡 조치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보기로 한다.

신라가 법흥*진흥왕의 어간에 가야연맹체를 소국 단위로 접수해 가던 단계에서는 신라와 지리적으로 격절되어 있는 도서 지역인 이 지역들에 대한 적극적인 편제의 필요성을 갖지 못하였다가, 통일을 전후하여 새로운 편제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문무왕*신문왕대에 처음으로 이들 지역에 郡을 설치하여 적극 편제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여기에서 새로운 편제의 필요성으로서는, 대외적으로 일본과의 관계가 본격화되면서 그 관문의 위치에 있는 이 지역들에 대한 관심이 급부상했으라는 점 이외에도, 대내적으로 위에서 제기했듯이 통일기에 州郡縣制의 충실화를 기하기 위해서 변경 지역을 새로이 편제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리라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기사 역시 이와 비슷한 논리에 따라 이해해 볼 수 있겠다.

나) 井泉郡은 본래 高句麗의 泉井郡인데 文武王 21年에 이를 取했다.

윗 기사는 신라가 文武王의 말년인 21년(681년)에 취했다는 井泉郡의 연혁기사인데, 이 역시 取한 時點이 통일기였다는 점에서 가) 기사와 함께 일반적인 지리지의 연혁기사와 구분되는 또 하나의 예외적인 사례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위의 井泉郡은 오늘날 원산만의 德源에 비정되는 곳으로 이미 진흥왕 때 진출한 바 있어서, 문무왕 21년(681)에 취했다고 한 것은 매우 새삼스러운 감이 있다. 이 때문에 이를 두찬 기사로 간주하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를 두찬으로 돌려버리기 전에 무언가 역사적인 사실의 일면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 합리적인 의미를 추구하려는 것이 순리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이 기사를, 신라의 적극적인 편제의 대상에서 제외해 오던 변방지역을 문무왕 말련 이후에 비로소 郡으로 편제하게 된 또 하나의 사례로서 파악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신라는 통일기에 九州制의 큰 틀을 정비함과 함께 변방에 위치한 기왕의 미편제 지역에 속속 郡縣을 증치하는 조치를 병행하여 九州制의 충실화를 기해갔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군현 증치 조치는 당연히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옛 백제 영역에 대해서도 취해졌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사례로서 다음의 기사를 들 수 있겠다.

다) 石山*馬山*孤山*沙平의 4현을 두었다.

다) 기사에 나오는 4현은 오늘날의 석산(부여군)과 한산*예산*홍성 등지의 충남 일원 지역으로 비정되는 곳으로서 백제의 옛 영역의 일부이다. 9주의 설정이 일단락된 신문왕 5년의 이듬해(686년)에, 바로 이들 지역에 縣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백제의 옛 영역에 州의 설치와 함께 郡縣의 증치가 병행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현전하는 몇몇 자료의 검토를 통하여, 문무왕 및 신문왕 연간에 신라의 변방 지방과 백제의 옛 영역에 군현을 증치하여 州郡縣制 운영의 전국적 균질화 및 충실화를 기해 갔던 모습의 일단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군현 증치 조치는 이외에도 상당히 광범위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행해졌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바인데, 실제로 중대 말에 신라가 북방으로 영역을 확대해 감에 따라 새로운 확보한 지역에 새로운 군현을 증치한 사례가 보이고 있어, 군현 증치를 통한 주군현제 충실화의 노력이 뒷 시기까지 이어지고 있었음을 사시받을 수 있다. 다음의 기사가 그것이다.

라) 阿? 貞節 등을 보내어 北邊을 檢察케 하고 大谷城 등 14郡縣을 始置하였다.

경덕왕 7년(748)에 大谷城 등 14군현을 北邊에 처음 두었다는 것인데, 이 14군현 증치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그 설치 지역의 비정 문제를 검토해 두어야 할 것이다. 먼저 지명이 노출된 大谷城이란 오늘날의 황해도 平山 지역으로 비정되는 곳이므로, 14군현은 평산과 그 주변 일대에 설치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14군현에 대한 기왕의 비정은 이를 감안하여 이루어졌는데, 기왕의 비정 견해를 우선 살펴보기로 하자.

14군현 중 10군현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地理志2 漢州條의 후미부에 나오는 永豊郡과 그 영현인 檀溪縣*鎭湍縣, 海皐郡과 그 영현인 ?澤縣, 瀑池郡, 重盤郡, 栖?郡, 그리고 五關郡과 그 영현인 獐塞縣 등의 '6군 4현'에 비정하는 것에 이견이 없으며, 필자 역시 이에 공감하는 바이다. 문제는 나머지 4군현에 대한 비정이 되겠는데, 이에 대해서 두 가지의 이견이 있다.

먼저 나머지 4군현을 地理志 漢州條의 맨 끝에 나오는 取城郡과 그 영현인 土山縣*唐岳縣*松峴縣의 1郡 3縣에 비정하려는 견해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견해에는 가볍지 않은 문제점들이 있다. 먼저 取城郡과 그 세 영현은 地理志에서 '憲德王改名' 혹은 '憲德王置縣改名'이라 명기하고 있어, 경덕왕 7년에 설치하였다는 라) 기사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景德王 21년(762)에 五谷*?岩*漢城*獐塞*池城*德谷의 6城을 축조했다는 기사와 결부하여 14군현의 단계적 설치설로 해명하고 있기는 하다. 즉, 이 6성이 앞의 '6군 4현' 중에서 五關郡*栖?郡*重盤郡*獐塞縣*瀑池郡*鎭湍縣의 '4군 2현'과 각각 중복된다는 것에 주목하여, 경덕왕 7년에는 永豊郡*檀溪縣*海皐郡*?澤縣의 2군 2현만이, 경덕왕 21년에는 위의 '4군 2현'이, 그리고 헌덕왕대에 이르러서 취성군과 그 3영현이 각각 단계적으로 설치되었다고 보는 것이 실상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러한 3단계 설치설은 일리가 있는 견해이기는 하나, 경덕왕 7년에 14군현을 일시에 설치하였다고 한 라) 기사를 자의적으로 변개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게 되어 있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점이겠는데, 설령 이러한 문제점은 무시한다고 하여도 문제는 또 남는다. 그것은 단계적 설치설을 보강하기 위해 경덕왕 21년의 6성 설치 기사를 곧바로 '4군 2현' 설치 사실의 반영으로 보았던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데에 있다. 이는 新羅本紀에 나오는 경덕왕 16년 단계의 漢州 군현 수와 地理志에 나오는 漢州의 군현 수를 비교해 보면 명확해지는 바와 같이, '4군 2현'은 경덕왕 21년에 새로이 설치되었던 것이 아니라 늦어도 경덕왕 16년 단계에는 이미 설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 견해에는 상당한 문제점이 있음을 알 수 있겠거니와,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최근에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의하면 라) 기사에 나오는 경덕왕 7년 설치의 14군현을, 상기의 '6군 4현'과, 地理志 漢州條에서 '6군 4현'의 바로 앞에 열거되어 있는 海口郡 및 그 세 영현인 江陰縣*喬桐縣*守鎭縣의 1군 3현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14군현은 경덕왕 7년에 일시에 설치된 것이 되고, 이후 헌덕왕대에 取城郡과 그 3영현의 1군 3현이 추가로 설치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어, 이 견해는 자료를 무리하게 변개하지 않으면서도 14군현에 대한 비정을 무난하게 할 수 있는 타당한 견해로서 인정할 수 있겠다. 이에 필자는 이 견해에 따르고자 하며, 이에 따라 라) 기사에 나오는 경덕왕 7년의 14군현 설치 사실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그 의미하는 바를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첫째로 경덕왕 7년 설치의 14군현 중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海口郡과 그 영현인 江陰縣*喬桐縣*守鎭縣 설치의 의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海口郡과 그 세 영현은 서해 중부 지방의 거대 도서인 오늘날의 강화도 일대에 해당된다. 바로 이 점에서 남동 해안의 거대 도서로서 통일기 郡이 初置된 바 있는 남해도 및 거제도 지역과 지리적 조건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경덕왕 7년의 海口郡과 그 영현의 설치는, 전술한 바 있는 거제도 및 남해도의 置郡 사실과 같은 의미를 가질 것으로 일단 추측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일찍이 한강 하류 지역에 진출하여 그 일대를 편제한 바 있던 신라가 한강 하구에 있는 강화도 지역을 하대에 이르기까지 편제하지 않고 방치해 두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면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라가 이 지역에 대한 편제의 필요성을 갖지 못하다가, 중대 후반기에 이르러 편제의 필요성이 새로이 대두되면서 비로소 이 지역에 1군 3현을 증치하여 편제하기에 이르렀다고 이해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 때 새로운 편제의 필요성이란, 대외적으로 북변에 대한 군사적 관심이 점증되어 간 둥대 후반기의 시점에서 볼 때, 한강 하구와 임진강 하구의 교차점이자 예성강의 하구가 통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강화도 지역의 지정학적 조건이 중시되어 갔을 것이 충분히 예상되는 바라 하겠으며, 대내적으로 편제 대상지역을 확대해 간 당시의 추세 속에서 이 일대가 적극적인 편제의 대상으로 부각되어 경덕왕 7년에 비로소 郡縣이 증치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海口郡과 그 세 영현의 설치는 신라의 공식적 편제대상지의 확대를 의미함은 물론, 패강 지방의 개발과 패강진의 설치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서의 의미도 어느 정도는 포함한다고 하겠다.

다음에 두번째로 14군현 중에서 海口郡과 그 세 영현을 제외한 '6군 4현'의 설치 문제를 살펴볼 차례이다. 海口郡과 그 세 영현의 설치가 패강진 설치의 정지작업으로서의 간접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6군 4현'은 그 자체가 후에 浿江鎭의 핵심적 관할 구역으로 편성된다는 점에서 패강진 설치의 직접적 배경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6군 4현' 설치의 문제는 패강진 설치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 절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2) 浿江鎭의 설치

海口郡 및 그 세 영현과 함께 경덕왕 7년에 설치된 '6군 4현'은, 앞에서와 같이 비정하는 데 큰 착오가 없다면, 대체로 예성강, 재령강, 대동강과 언진산맥으로 둘러싸인 일대에 분포되어 있던 것으로 보아 무난할 것이다. 흔히 浿江 지역이라 불리는 이 일대에 신라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진출하고 급기야 이와 같이 군현을 설치하여 편제하기에 이르렀던 것일까? 그리고 신라는 이 지역을 어떻게 운영해 갔을까?

이 지역에 대한 신라의 진출 의욕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진덕왕 2년(648)에 김춘추가 당과 군사동맹을 맺어 평양 이남과 백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보장받는 것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이러한 보장은 나당 군사 동맹이 본격 가동되어 백제*고구려를 차례로 공멸해 가는 과정에서 무시되었다. 당은 오히려 고구려 및 백제의 영토는 물론이고 신라의 영역까지도 羈?州體制로 묶어 지배하려는 저의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이에 신라는 당과의 전쟁이라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고 수년간의 나당전쟁이라는 전시 상황에 들어갔다. 나당전쟁에서 연패를 거듭하던 당은 土蕃 등의 침입을 받아 더욱 수세에 몰리면서, 결국 676년에 평양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겨감으로써 평양 이남지역에 대한 패권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신라는 평양 이남 지역에 대한 지배권 관철을 실현시킬 수 있는 여건을 스스로 쟁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내외적 여건은 신라가 평양 이남의 패강 지역을 공식적으로 편제하여 지배할 수 있게 하지는 않았다. 먼저 대외적 여건을 보면, 당은 여전히 대신라 강경책을 견지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왕족을 활용하여 옛 고구려 및 백제의 民土에 대한 신라의 지배 정책을 부단히 견제했을 뿐 아니라, 698년에는 북만주 지역에서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는 발해가 건국되어 신라의 북방정책에 부담을 안겨주었다. 따라서 통일기 신라의 주요 관심사는 한강 이남 지역에 대한 치안을 확보하면서 이를 주군현체제로 편제해 가는 데에 두어졌을 뿐, 북방에 대한 관심은 당과 발해 세력의 위협을 차단하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신라의 소극적인 북방정책은 서북방 지역에 대한 축성 기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마-1) 松岳과 牛岑의 2성을 쌓았다.

2) 開城을 쌓았다.

3) 漢山州 도독 관할구역 안에 여러 성을 쌓았다.

효소왕 3년(694)에 松岳과 牛岑에, 성덕왕 12년(713)에 開城에, 그리고 17년(718)에는 漢山州 管內에 여러 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開城과 金川 지역을 위시로 하여 漢山州 관내의 北界 일대로서, 대체로 예성강의 以東南의 경계에 해당되는 곳이라 하겠는데, 이것이 곧 당시 신라의 서북방 최후 방어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볼 때 예성강 以西北의 이른바 패강 지역은, 실제 신라의 군사적 영향력 하에 있었을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유사시엔 신라의 방어 대상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겠다. 말하자면 힘의 공백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위의 축성의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어느 국가를 경계의 대상으로 하여 축성이 이루어졌겠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 성덕왕이 즉위하기 전까지만 하여도 신라의 우선적 경계의 대상은 당이었지만, 성덕왕이 즉위하면서 경계의 대상이 발해로 바뀌었다고 본 견해가 있어, 참고된다. 이 견해는, 신라가 우선 경계 대상 국가를 당에서 발해로 바꾸게 된 계기를 양국에 대한 당의 정책 전환-강경책에서 以夷制夷策으로-에서 찾으려 한 것인데, 타당한 견해라 여겨진다. 이에 따른다면, 효소왕 대의 축성(마-1 기사)은 당의 위협에 대응한 것이 되겠고, 성덕왕 대의 축성(마-2,3 기사)은 발해의 위협에 대응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확실히 성덕왕은 발해에 대한 견제책을 다각도로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서북방에서의 축성(마-1, 3 기사)뿐만 아니라 동북방에서의 축성도 병행해 갔으며, 또한 거의 매년 당에 사신을 파견했던 것 등이 그것이다.

이후 732년에 터진 발해의 唐 登州 공격 사건은 당의 以夷制夷策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하였고, 결국 당과 신라 관계의 급진전을 가져와, 두 나라에게 발해를 共敵으로 간주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성덕왕 32년(733)에 당은 신라에 발해 공격을 위한 군사 동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고, 신라는 이에 응하여 실제로 대발해 군사 작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 이듬해(734)에 신라는 숙위 사신인 金忠信(혹은 金信忠)을 통해서 발해 공격을 자청하기도 하는 등 명분을 쌓아 가더니, 성덕왕 34년(735)에는 발해를 견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신라가 이미 점거하고 있던 패강 지역에 대한 지배권의 공인을 당에게 요청하였고, 발해의 공격에 고심하고 있던 당은 신라와의 관계 유지가 절실하였던 터라 이를 기꺼이 공인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신라는 발해의 등주 공격을 계기로 패강 지역에 대한 진출과 편제라는 숙원을 실현할 발판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당으로부터 패강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공인받으면서, 신라의 이 지역에 대한 개발과 편제의 행보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먼저 성덕왕은 35년(736)에 패강 지역 공인에 감사하는 내용의 表文을 당에 올려서 패강 일대에 대한 적극적 개발의 의지를 분명히 함과 동시에, 이 지역에 대한 개발과 편제를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으니,

바) 伊? 允忠과 思仁, 英述을 보내어 平壤, 牛頭 2州의 地勢를 檢察케하였다.

고 한 것이 그것이다. 윗 기사에 나오는 3인은 모두 당대의 최고 권신이거니와, 이중 특히 允忠과 思仁은 발해가 등주 공격을 감행하기 직전의 해인 731년 12월에 將軍으로 임명된 4명에 포함되어 있다. 바로 이 731년의 장군 임명 조치가 당시 발해의 심상치 않은 동향에 대비한 인사였다고 한다면, 적어도 允忠과 思仁은 실제 733년의 대발해 군사 작전에도 장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윗 기사에 나오듯이 736년에 이 두 사람을 포함한 3인이 또한 북방에 대한 지세 검찰 작업에도 나서고 있어, 패강 지역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수행한 군사 작전에 뿐 아니라 이 지역의 편제를 위한 준비 과정이라 할 地勢 檢察의 작업에도 당대의 최고 권신들이 적극 개입하였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는 당시 신라의 패강 지역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컸었던가를 극명히 보여주는 증좌이겠다. 이후 북방 지역에 대한 공식적 편제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갔을 것인 바, 그 결실로서 라) 기사에 나타난 바와 같이 경덕왕 7년(748)에 패강 지역에 14군현, 즉 海口郡 및 그 세 영현과 '6군 4현'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浿江 郡縣'의 설치는, 통일 이후 신라가 추진해온 郡縣 增置 조치의 연속선 상에서 볼 때, 결국 신라가 주군현체제를 패강 지역에까지 확대 관철시켜 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되겠다.

그런데 한편으로 신라의 패강 지역에 대한 개발 의욕이 지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으로부터 지배권을 공인 받은 해(735)로부터 13년이 지난 748년에 이르러서야 패강지역에의 군현 설치가 가능했다고 하는 것은, 신라가 이 지역을 개발*편제해 감에 적지 않은 난관에 봉착했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겠다. 여기에서 그 난관이란 발해와의 군사적 대치 국면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경덕왕 7년에 군현이 설치된 이후에도 군사적 국면의 변화에 따른 대응 조치가 불가피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바인데, 경덕왕 21년(762)의 다음 기사는 이러한 움직임을 반영하는 유력한 사례가 될 것이다.

사) 五谷*?岩*漢城*獐塞*池城*德谷의 6城을 축조하고, 그 각각에 太守를 두었다.

윗 기사에 나오는 6城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地理志 漢州條의 五關郡*栖?郡*重盤郡*獐塞縣*瀑池郡*鎭湍縣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이들은 경덕왕 16년 단계 이전에 이미 '4郡 2縣'으로서 편제된 바 있었다고 하겠으므로, 윗 기사의 6성 축조 사실이 경덕왕 21년에 郡縣을 새로 증치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위의 6성 축조 기사는, 경덕왕 21년에 이르러 대두한 무언가의 군사적 국면 변화에 따라, 기왕의 군현 설치 지역에 축성하여 군사적 방어 시설을 보강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여기에서 당시 대두했을 군사적 국면 변화란, 경덕왕 21년(762) 바로 그 해에 당이 발해 문왕을 '渤海郡王'에서 '渤海國王'으로 進封하여 발해의 國勢를 공인해 준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해 본다. 즉, 좀 거슬러 올라가 713년에 당이 대조영을 '渤海郡王'에 봉하여 발해를 처음 공식 인정해 주어 以夷制夷策에 의해 신라와 발해를 통제하려 했을 때, 신라의 성덕왕이 발해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開城 등 漢州 管內 諸城을 쌓았던 것을 염두에 둔다면, '渤海國王'으로의 進封에 따라 신라에 대발해 군사적 경계 필요성이 증대되었으리라고 상정하는 것은 크게 무리한 것이 아님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6성 축조는 이러한 군사적 경계 필요성의 증대에 대응하여 취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런데 위 6성의 위치는 오늘날의 瑞興*鳳山*載寧*遂安*海州*谷山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海州灣에서 谷山에 이르는 북서 내륙방향의 거의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윗 기사에 나타난 6성의 축조는 군사적 방어시설을 보강하여 이들을 대발해 군사 방어선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취해진 조치였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신라는 '패강 군현'의 增置를 통해서, 州郡縣體制를 서북방면으로 확대해 감과 함께 주요 군현 설치 지역에 축성을 하여 발해에 대한 군사적 방어망을 구축해 가는 양면적인 목적을 성취해 갔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패강 군현'은 주군현체제의 확대와 군사적 성향의 강화라는 두 가지 속성을 갖게 되었던 것이고, 이에 따라 이후에 독특한 성향을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먼저 '패강 군현'들은 당초 漢州 소속으로 편제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거니와, 이는 곧 주군현체제를 패강지역에까지 확대 적용하려 한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겠다. 그런 한편으로 '패강 군현'들은 원래부터 군사적 성향을 뚜렷이 갖고 있어서, 漢州의 여타 군현들과는 구별되는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후에 군사적 경계의 필요성이 증대되어 감에 따라, '패강 군현'들은 일반 군현들과 구별되는 면을 뚜렷이 드러내었던 것이고, 급기야 漢州의 소속에서 탈피하여 별도의 군사적 특수구역으로 편제되기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인다. 浿江鎭의 설치 사실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1) 2년...7월에 使人을 파견하여 浿江 남쪽 州郡을 安撫하였다.

2) 3년...2월에 왕이 漢山州를 巡幸하여 民戶를 浿江鎭으로 옮겼다.

3) 4년 正月에 阿? 體信을 大谷鎭 軍主로 삼았다.

이는 浿江鎭의 설치에 관한 일련의 기사를 모아본 것이다. 이에 의거하여 浿江鎭이 처음 설치된 시기는 그 명칭이 처음 보이는 宣德王 3년(782)의 일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아-2 기사). 그렇다면 선덕왕 2년에 패강 남쪽 州郡을 安撫한 조치(아-1 기사)는 패강진 설치를 위한 정지 작업으로서 군현들을 안무한 것으로 보아야겠다.

그런데 아-3) 기사에 의하면 浿江鎭과는 별도로 大谷鎭이 宣德王 4년에 있었던 것처럼 기술되어 있어, 패강지역의 편제와 운영을 이해하는데 혼란스럽게 하는 면이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겠다. 먼저 大谷鎭을 浿江鎭에 대한 異稱으로 간주하려는 관점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浿江鎭 설치(782년)와 浿江鎭 軍主 임명(783년)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될 것이다. 다음에 大谷鎭을 浿江鎭과 별도의 鎭으로 간주하려는 관점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패강 지역에 대한 편제 및 운영이 浿江鎭과 大谷鎭에 의해서 이원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職官志 浿江鎭典條에 나오는 다음 기사를 눈여겨 보기로 하자.

자) 頭上大監 一人 宣德王三年 始置 大谷城頭上 位自級?至四重阿?爲之

이 기사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먼저 이를 언뜻 보면 頭上大監은 패강진을 총괄하는 지위에 있는 자로, 大谷城頭上은 大谷城에 駐箚하는 지방관으로 간주하여, 그 각각을 아) 기사에 나오는 浿江鎭 및 大谷鎭과 대응되는 존재로 볼 수도 있겠다.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위의 두 견해 중에서 후자의 관점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위의 자) 기사를 보다 엄밀히 보면, 頭上大監과 大谷城頭上은 모두 浿江鎭의 單一 官署인 浿江鎭典에 파견된 外官들로 되어 있어, 이들을 별개의 것으로 보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우선 든다. 또한 자) 기사에는 頭上大監에 취임할 수 있는 官等의 범위를 비롯하여 大谷城頭上의 인원수 및 설치 년도 등이 이례적으로 빠져 있어서, 職官志에 나오는 주요 職制의 기재 형식과 비교해 볼 때 이 기사의 기재 형식에는 무언가 결함이 내포되어 있음이 감지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일단 '大谷城頭上'이라는 구절을 빼고 보면, 자) 기사는 職官志의 주요 職制에 대한 기재 형식과 일치되는 것으로 되어서, '大谷城頭上'이 불필요하게 삽입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심증이 간다. 그렇다면 頭上大監과 大谷城頭上을 별개의 존재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동일한 대상의 異稱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본 다면, 오늘날의 平山에 해당하는 大谷城은 浿江鎭과 별개의 大谷鎭이 설치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패강진의 鎭治가 설치된 治所로서 볼 것이고, 또한 아) 기사에 나오는 浿江鎭과 大谷鎭은 같은 것으로, 大谷鎭軍主는 자) 기사의 頭上大監 및 大谷城頭上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선덕왕 3년에 浿江鎭이 설치되었다고 할 때, 또 하나의 의문점이 남는다. 즉, 浿江鎭 설치의 사실만을 가지고서, 과연 '패강 군현'들이 漢州와 구별되는 군사적 특수구역으로 정식 편제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 그것이다. 이 의문점을 해명하는데 祥瑞物 進獻 기사가 우선 주목되는 바이다. 新羅本紀에 나오는 통일 이후 상서물 진헌 기사는 20여건의 사례가 확인되고 있는데, 그 대부분은 州 단위에서 진헌한 것으로 되어 있고, 다만 元聖王 卽位年(785)에 浿江鎭에서 赤鳥를 진헌했다는 경우와 憲德王 2년(810)에 西原京에서 白雉를 바쳤다는 경우만이 두개의 예외적인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통일신라시기의 상서물 진헌은 일반적으로 州가 그 管內에서 획득한 상서물을 취합하여 진헌하는 형식을 취했음을 알 수 있겠는데, 이는 곧 광역행정구역으로서의 州의 기능과 관련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그렇다면 당시 浿江鎭과 西原京은 상서물 진헌과 관련된 기능에 있어서는 州와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음의 기사는 浿江鎭과 小京이 기능상 州와 대등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유력한 사례가 될 수 있겠다.

차) 漢山*牛頭*?良*浿江*北原 등은 헌창의 모반을 미리 알고 병사를 내어 스스

로 지켰다.

위의 기사에 나오는 각 지명들은 州*鎭*京 등 행정단위명의 尾稱이 생략된 것으로, 각각 漢山州*牛頭州*?良州*浿江鎭*北原京을 지칭한다는 것만은 쉽게 알 수 있겠다. 그런데 이들 3州와 浿江鎭, 그리고 北原京이 憲德王 14년(822)에 일어난 김헌창의 난에 대응하여 擧兵自守했다고 하여, 浿江鎭과 소경의 하나인 北原京이 州와 병렬되어 있다. 이는 浿江鎭과 小京이 광역행정단위로서의 州와 대등한 기능을 수행하는 특수구역으로 편제되어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특히 이 기사에서 浿江鎭이 漢山州와 나란히 열거되어 있다는 것을 주목해 볼 때, 822년 단계에 패강진이 이미 한산주와는 별개의 기구로 편제되어 있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浿江鎭이 漢山州와는 별개의 특수구역으로 편제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이러한 특수구역은 선덕왕 3년에 浿江鎭을 설치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편제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즉, 선덕왕 3년에 일종의 軍鎭이라 할 浿江鎭이 大谷城에 설치되어 '패강 군현'들을 총괄하는 중심지로 편제되면서, 패강 지역은 패강진을 중심으로 하여 군사적 성격이 강한 하나의 독자적 廣域圈으로 묶여져, 한주와 구분되는 특수구역으로 편제되기에 이르렀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패강진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몇 단계를 거쳐 설치되었고, 설치된 이후에는 그 관할 범위가 몇 단계를 거쳐 확대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장을 바꾸어 패강진 관할 범위(광역권)의 확대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3. 浿江鎭 관할 범위의 확대

패강진이 처음 설치된 선덕왕 3년 단계에 패강진의 최초 관할 범위는 경덕왕 7년에 설치된 14군현 중에서 海口郡과 그 세 領縣을 제외한 현 황해도 동부의 '6군 4현'이었으리라는 것은 이미 살핀 바 있다. 또한 헌덕왕대에 재령강과 대동강에 연접한 지역에 取城郡과 그 세 領縣인 土山縣*唐岳縣*松峴縣이 추가 설치됨으로써 패강진의 관할 범위가 '7군 7현'으로 제1단계 확대되었으리라는 것도 역시 살펴보았다. 그런데 제1단계 확대 이후에 패강진 관할 범위안에 편제된 '7군 7현'은 대체로 북쪽으로는 대동강을, 서쪽으로는 재령강을, 그리고 남동쪽으로는 예성강을 각각 경계로 하는 황해도 내륙 지역에 한정되어 설치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헌덕왕때까지는 재령강 이서의 황해도 서부 해안 지대는 패강진의 관할 범위에서 배제되고 있었다고 보아야겠다. 실제로 '新羅志' 二의 漢州條에 재령강 이서 지역에 비정되는 군현은 전혀 나와 있지 않으며, 다른 자료에서도 재령강의 이서 지역에 군현이 설치되었다는 구체적인 기록을 찾아볼 수 없어, 현재로서는 이를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신라는 헌덕왕 이후에도 재령강 이서 지역에 군현을 증치하여 편제하려는 조치를 끝내 취하지 않고 방치하고 말았던 것일까?

일단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재령평야가 펼쳐져 있는 재령강 이서 지역을 신라가 끝내 미편제 지역으로 남겨두었으리라는 것은 일단 납득하기 어려운 바이다. 이에 필자는 이 지역에 대한 신라의 추가 편제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하며, 그 단서를 '高句麗志' 漢山州條에 보이는 재령강 이서 지역의 '12개 지명'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12개 지명'은 다음과 같다.

仇乙峴*闕口*栗口*長淵*麻耕伊*楊岳*板麻串*熊閑伊*甕遷*付珍伊*鵠島*升山

그런데 이 '12개 지명'은 '新羅志' 漢州條에는 전혀 나오지 않고, '高句麗志' 漢山州條에만 나오고 있으므로, 이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게재되어 있는 '高句麗志'의 반영 시기를 우선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高句麗*百濟志'의 반영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시기에서 경덕왕 16년 사이의 어느 시기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려는 것이 일반적인 듯하다. 이는 '고구려지*백제지'에 실려있는 군현 명칭이 경덕왕 16년에 한자식으로 개칭되기 이전의 토착 명칭이라는 점에 주로 착목하여 추정된 견해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추정은 경덕왕 16년 이후에는 일률적으로 改名*雅化된 명칭만을 군현명으로 썼으리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겠는데, 이 전제 자체는 매우 불안하다. 경덕왕 16년에 개명*아화된 군현명은 그 다음 왕인 惠恭王代에 復故되어 다시 이전의 명칭으로 환원되고 말았으므로, 경덕왕 이후에도 개명*아화된 군현 명칭만을 썼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新羅本紀이나 금석문 등의 기사에 나타난 경덕왕대 이후의 지명 용례를 보면, 개명된 지명과 개명되기 이전의 토착 지명이 혼용되고 있으되, 후자의 용례가 오히려 더 많이 쓰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군현 명칭만을 근거로 하여 '高句麗*百濟志'가 경덕왕 16년 이전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단정내리기는 곤란하다고 할 것이다. 이에 필자는 개명된 명칭을 표제명으로 삼은 '新羅志'와 토착 지명을 표제명으로 삼은 '高句麗*百濟志'의 성격을 서로 비교해 보면서, 그 각각의 반영 시기를 추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먼저 '新羅志'는, 그 序文 부분에 잘 나타나 있듯이, 9州制에 기초하여 통일신라 州郡縣制의 내역을 정리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高句麗*百濟志'의 경우에는 사정이 좀 복잡하다. 원래 撰者가 地理志 四에서 '高句麗志'와 '百濟志'를 따로 설정했던 것은, '新羅志'와 별도로 고구려와 백제 지방제의 내역을 정리한다는 의도와 명분에서였을 것이다. 이러한 명분을 살리기 위해서였음인지 찬자는 '高句麗志'와 '百濟志'의 서두에 각각 서문에 해당하는 글을 별도로 실어서 고구려와 백제의 지리적 연혁을 총론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서문의 결론 부분에서, '신라가 (고구려의) 남쪽 지경을 얻어서 漢*朔*溟의 三州와 그 郡縣을 설치하여 九州의 制를 갖추었다'라고 하거나 '신라가 (백제) 지역을 다 차지하여 熊*全*武의 三州와 여러 郡縣을 설치하여 고구려의 남쪽 지방 및 신라의 옛 땅과 더불어 九州를 이루었다'고 함으로써, '高句麗*百濟志' 역시, 그의 표방한 의도나 명분과는 달리 통일기 신라의 9州制의 틀에 따라 정리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실제 '高句麗*百濟志' 본문의 서술에서 '高句麗志'를 漢山州*牛首州*何瑟羅州의 3주로 나누고, '百濟志'를 熊川州*完山州*武珍州의 3주로 나누어 각 州別로 소속 군현을 정리하고 있어, 통일신라시기에 정비되는 9주제를 지리지 정리의 기본 틀로 원용하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9州에 포괄되지 않는 대동강 이북의 옛 고구려 북부 영역은 대부분 '高句麗志'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면을 염두에 둔다면, '高句麗*百濟志'가 반영하는 시기는 역시 9주제 성립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고, 또한 여기에 실린 군현들은 모두 신라에 의해 공식 편제된 것에 한정된 것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 볼 때, '高句麗志'에 나오는 '12개 지명' 역시 통일 이후 신라에 의해 공식 편제된 군현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관점에서 추론이 가능해진다. 첫째, '高句麗志'가 '신라지' 보다 앞선 시기의 사정을 반영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고구려지'가 반영하는 시기 이전에 '12개 지명'에 해당하는 지역까지도 이미 편제하였다가, '新羅志'가 반영하는 시기 이전에 이를 다시 철폐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둘째, '고구려지'가 '신라지' 보다 뒷 시기의 사정을 반영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신라지'가 반영하는 시기까지는 '12개 지명'의 지역이 아직 편제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가, 그후 '高句麗志'가 반영하는 시기 이전 언제인가에 재령강 이서 지역에 군현이 추가로 증치되어 이 '12개 지명'의 지역이 공식 편제되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번 편제된 '12개 지명'의 지역이 다시 철폐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이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할 것이며, 따라서 그 배경과 이유에 대한 기록이 어떤 형태로든 남겨졌을 것인데, 실제는 이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첫째의 추론이 지니는 결정적인 약점이다. 결국 현재로서는 '12개 지명'의 지역이 '신라지' 반영 시기 이후에 추가로 편제되어 '고구려지'에 添入되었으리라고 본 둘째의 추론이 더 자연스럽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12개 지명'의 지역에 대한 편제의 상한 시점을 좀더 구체화시키기 위해서는 '新羅志'의 반영 시기를 우선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라지'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改名*雅化된 명칭을 각 지명의 표제명으로 내세워 州郡縣을 정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경덕왕 16년에 주군현명을 한자식으로 改名*雅化한 조치를 대대적으로 단행했다는 점을 함께 고려한다면, '신라지'의 찬자가 이를 편집*찬술함에 있어서 경덕왕 16년 당시의 주군현 자료를 주로 참조하였을 것으로 일단 추정할 수 있겠다. 실제 '신라지'에 열거되어 있는 주군현의 수가 新羅本紀 경덕왕 16년조에 나오는 주군현 수와 대동소이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신라지'는 경덕왕 16년 당시의 자료를 주로 참조하되, 이후에 변동된 바의 자료를 일부 보충하면서 편집*찬술된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줄로 안다.

그런데 경덕왕 16년 이후에 변동된 사정이 '신라지'에 보충되어 추가로 입록된 현저한 사례로서는, '新羅志' 漢州條의 말미 부분에서 헌덕왕대에 새로이 증치하여 取城郡과 土山縣*唐岳縣*松峴縣으로 改名*雅化했다고 한 '1군 3현'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보충된 사례까지 감안하여 본다면, '新羅志'는 주로 경덕왕 16년에 개편된 주군현 관련 자료를 기초로 하되 이후 헌덕왕대에 이르기까지 增置*改名된 일부 군현의 변동상을 추가하여, 改名*雅化된 명칭을 標題名으로 삼아 정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新羅志'가 반영하는 시기의 하한은 일단 헌덕왕대로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추론에 따라 패강진의 관할 범위의 확대 과정을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겠다. 패강진의 관할 범위는 선덕왕대에 '6군 4현'으로써 시작한 이래, 헌덕왕대에 '1군 3현'을 추가 편제하여 1단계 확대를 보게 되었고, 그 이후 언제인가 재령강 이서의 '12개 지명' 지역까지 추가로 편제함에 따라서 2단계 확대를 보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高句麗志'에 나오는 '12개 지명'이야말로 신라가 헌덕왕대 이후의 어느 시기에 재령강 이서 일대에까지 진출하여 이에 군현을 설치하고 편제하기에 이르게 된 증좌로 볼 것이다.

그런데 '12개 지명'은 改名*雅化된 명칭이 아닌 토착의 명칭으로 되어있고, 더구나 이들에게는 郡이나 縣의 행정단위명도 尾稱되어 있지 않아서, 군현의 설치를 통해 '12개 지명'의 지역을 편제한 것으로 보기 어렵겠다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겠다. 이에 대해 '高句麗志'의 지명 기재형식에서 郡*縣을 尾稱하지 않은 사례가 이외에도 상당수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선 지적해둘 필요가 있겠다. 즉, 漢山州條의 경우 91개의 지명 중에서 32개가, 牛首州條의 경우 43개의 지명 중에서 4개가, 그리고 何瑟羅州條의 경우 31개 지명 중에서 2개가 각각 郡*縣을 尾稱하지 않은 사례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처럼 '高句麗志'의 지명 중에서 郡*縣을 尾稱하지 않은 경우가 상당수 섞여 있는 것에 대해서는 추후 자세한 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原資料의 撰者 혹은 史記의 撰者가 토착의 舊地名에다가 郡*縣의 尾稱을 添記하는 과정에서 尾稱을 누락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高句麗志'에서 郡*縣을 尾稱하지 않은 지명들이 대개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散在 分布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와 같이 尾稱 添記를 누락한 것으로 볼 여지는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12개 지명' 역시 郡*縣의 尾稱이 누락된 사례로 간주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그렇지만 '12개 지명'의 경우는 이렇게 보기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먼저 '高句麗志' 漢山州條의 경우는 州*郡*縣을 尾稱하지 않은 지명이 다른 州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고, 그중 특히 '12개 지명'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재령강 以西라는 동일 지역에 집중 분포한 것이어서, 이에 대해서 별도의 보완 설명이 요청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는 입장에서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기로 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경덕왕 16년에 지명에 대한 대대적인 改名*雅化 조치를 취하였다가, 그 다음 왕인 혜공왕 대에 명칭을 다시 復故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다시 헌덕왕대에 일부 새로 增置된 군현의 명칭을 改名*雅化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에는 군현 명칭을 改名*雅化하는 조치를 다시 취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실제 하대의 지명 용례를 보면 新舊의 명칭이 竝用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로써 판단하건데, 위에서 본 대로 '12개 지명'의 지역은 헌덕왕대 이후의 어느 시기에 편제되었으되, 改名*雅化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토착의 舊地名이 그대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新羅志'에서는, 改名*雅化한 지명을 標題名으로 내세우는 것을 편집 원칙으로 삼고 이에 충실하려다 보니, 경덕왕 16년에 改名*雅化된 군현들을 위주로 하여 정리하되, 여기에 헌덕왕대에 증치되어 改名*雅化된 일부 군현들을 보충해 넣는 선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改名*雅化되지 않고 토착의 舊地名을 그대로 썼을 것으로 보이는 이후 증치된 군현들의 경우에는, 撰者가 신라 군현으로서의 확신를 가지지 못하는 한 改名*雅化된 지명을 표제명으로 내세우는 것을 편집 원칙으로 했을 '新羅志'에는 기입될 여지가 없게 되어 결국 등재되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12개 지명'의 경우도 역시 改名*雅化된 지명을 갖지 못했을 뿐 아니라, 찬자가 신라 군현으로서의 확신을 갖지 못했던 이유로 인하여 '新羅志'에 登載되지 못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舊地名을 표제명으로 내세우는 '高句麗志'에서는 '新羅志'에서 누락한 '12개 지명'이 등재되어 온전히 살아 남아, 그 군현 증치의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면서도 撰者가 이들 지명에 대하여 신라의 군현으로서의 확신을 갖지 못했던 인식이 '高句麗志'에도 작용하여 일정한 흔적을 남겼을 것이 예상되는데, '12개 지명'을 수용하여 '고구려지'에서 漢山州 소속으로 정리하면서도 그들에게 郡*縣의 尾稱을 집단적으로 누락시켰던 것이야말로 이러한 인식이 작용한 역역한 흔적으로 볼 것이다.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12개 지명'은 곧 헌덕왕 이후의 '어느 시기'에 재령강 이서의 평야지역에 신라가 새로이 군현을 증치하면서 편제한 결과물, 즉 '12개의 패강 군현'으로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패강진의 관할 범위는 12군현이 증치됨에 따라 26군현으로 倍加되어 재령강 이서 지역 일대로까지 확대되어 갔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이상의 논의는 다분히 추론에 의존한 바가 많다는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패강진의 성격과 그 운영상을 검토하면서 보완할 기회를 갖기로 하겠다.

5. 浿江鎭의 編制와 運營

이상에서 浿江鎭은 선덕왕 3년(782)에 10개 군현을 관할하는 군사적 특수구역으로 편제된 이후, 헌덕왕 대에 4개 군현이 증치되고 또 그 이후 '어느 시기'엔가에 다시 12개 군현이 증치되면서, 그 관할 범위가 확대되어 간 것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처럼 浿江鎭이 일정한 광역권을 관할하는 군사적 특수구역이었다고 한다면, 이는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다른 鎭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다고 해야겠다. 패강진의 이러한 특징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라의 다른 鎭들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타-1) 王은 何瑟羅의 땅이 靺鞨에 연접해 있어서 사람들이 불안하다 하여 京을 파하고 州로 삼고 都督을 두어 鎭하게 하였다. 또한 悉直을 北鎭으로 삼았다.

2) 淸海大使 張弓福은 入唐하여 徐州에서 軍中 小將이 되었다가 후에 歸國하여 왕에게 알현하고 兵卒 萬人으로써 淸海를 鎭하였다.

3) 唐恩郡을 唐城鎭으로 삼고 沙? 極正으로 하여금 가서 지키게 하였다.

4) 穴口鎭을 설치하고 阿? 啓弘을 鎭頭로 삼았다.

윗 기사는 사기에 나타난 設鎭 기사를 모아본 것이다. 이에 의하면, 기록상에 나타난 鎭의 기원은 무열왕 5년(658)에 설치된 신라의 北鎭에서 찾아볼 수 있겠지만, 진의 설치가 일반화된 것은 역시 신라 하대에 이르러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덕왕 3년의 浿江鎭 설치를 위시로 하여, 흥덕왕 4년(829)의 淸海鎭 설치(타-2 기사), 그 이듬해의 唐城鎭 설치(타-3 기사), 그리고 문성왕 6년(844)의 穴口鎭 설치(타-4 기사) 등이 그것이다.

먼저 北鎭의 경우를 보자. 타-1)의 기사에 의하면 '靺鞨'의 위협에 대한 군사적 대응으로써, 무열왕 5년(658)에 何瑟羅(오늘의 강릉)의 小京을 폐지하고 그 대신 '小州'[何瑟羅州]를 복구함과 함께 悉直(오늘의 삼척)에 北鎭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동해안 방면에 군사적 방어기지로서의 성격을 가진 何瑟羅州와 北鎭이라는 2중의 방어망을 구축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北鎭은 결국 悉直 지역의 '小州' 혹은 郡 단위를 바탕으로 하여 설치된 군사적 거점이었다고 할 것이다.

신라 하대의 鎭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군사적 거점으로 설치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우선 淸海鎭의 경우, 淸海(오늘의 완도)를 근거로 하여 1만여 군대 집단을 거느렸던 군사적 거점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다음에 唐城鎭의 경우, 唐恩郡(오늘의 남양)을 개편하여 設鎭한 것이라 하므로, 이 역시 군 단위를 바탕으로 한 군사적 거점이었음을 알 것이다. 또한 穴口鎭의 경우도 海口郡(오늘의 강화)을 개편하여 設鎭한 것이겠으므로, 이 역시 군사적 거점이었음은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대부분의 鎭들은 군사적 거점으로 설치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반해 유독 浿江鎭만이 10개 내지 26개의 군현을 관할하는 광역의 군사적 특수구역으로 편제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특이한 예가 아닐 수 없다. 패강진의 이러한 성격에 대해서는 앞에서 몇 가지의 논거를 제시하여 설명한 바 있거니와, 여기에서는 이를 보강한다는 의미에서 이외의 다른 두 가지의 논거를 더 들어 보고자 한다. 첫째, 명칭상의 특징을 들 수 있겠다. 淸海鎭이나 唐城鎭이나 穴口鎭 등은 모두 특정의 지명을 관칭한 것임에 반해서, 浿江鎭은 광범한 지역에 대한 범칭인 '浿江'이라는 칭호를 관칭하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이는 곧 浿江鎭이 다른 鎭과 달리 패강지역의 일정한 광역권을 관장하는 것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둘째, 조직상의 특징을 들 수 있겠다. 다른 진들의 경우엔 조직체계에 관한 기록이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음에 반해, 패강진의 경우엔 다음의 파) 기사에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패강 군현'을 관장하는 外官 職制의 조직체계가 망라적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 주목된다. 이 역시 패강지역의 일정한 광역권을 관할했던 패강진의 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바이다.

파-1) 浿江鎭典

2) 頭上大監은 1인인데, 宣德王 3년에 大谷城頭上을 처음 두었다. 位가 級?에서 四重阿?에 이르는 자를 삼았다.

3) 大監은 7인인데 位가 太守와 같다. 頭上弟監은 1인인데 位가 舍知로부터 大奈麻에 이르는 자를 삼았다. 弟監은 1인인데 位가 幢으로부터 奈麻에 이르는 자를 삼았다. 步監은 1인인데 位가 縣令과 같다. 少監은 6인인데 位가 先沮知에서 大舍에 이르는 자를 삼았다.

윗 기사는 職官志에 전하는 패강진의 조직체계에 관한 일괄 기사를 내용에 따라 세 부분으로 구분*인용한 것이다. 파-1)의 '浿江鎭典'은 패강진 관할 지역에 파견한 外官 職制를 총칭한 일종의 標題名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할 것이며, 파-2)와 3)은 패강진의 구체적인 職制體系에 관한 내용을 전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먼저 파-2) 부분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大谷城에 駐箚하며 패강진의 광역권을 총괄하는 頭上大監=大谷城頭上에 관한 기사로서, 그 설치 시기와 그에 취임할 수 있는 관등의 범위를 기술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頭上大監은, 패강진의 광역권을 총괄하는 것을 그의 직책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능상으로는 州의 장관인 都督과 대등한 존재라 하겠으나, 그에 취임할 수 있는 관등의 범위가 도독에 비해 한 단계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직급상 혹은 신분상으로는 도독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에 파-3) 부분은 頭上大監의 지휘를 받는 浿江鎭의 중하위 職制를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각 직제의 나열 순서가 그 각각에 취임 가능한 관등의 순위에 따라 정리되어 있는 관계로, 각 직제의 계통이 정연하지 못하고 매우 혼란스럽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직제들의 계통을 파악하기 위한 일정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런데 大監과 步監의 관등이 太守와 縣令의 관등과 같다고 한 구절이 그 유력한 기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太守와 비견된다는 大監은 패강진 관할의 郡 단위에 파견된 외관으로, 그리고 縣令에 비견된다는 步監은 縣 단위에 파견된 외관으로 일단 비정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파-3) 기사에서 大監이 7인, 步監이 1인이라 하였으므로, '패강 군현' 중에서 7郡 1縣에 파견된 외관은 일단 확인된 셈이다.

다음으로 頭上弟監과 弟監, 그리고 少監을 보자. 먼저 頭上弟監의 경우 그 명칭상 頭上大監과의 대응 관계를 설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弟監이란 주지하듯 신라 軍制上 大監 보다 낮은 중*하위 군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때, 頭上弟監은 패강진의 장관인 頭上大監을 보좌하는 직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頭上弟監은 州 장관인 都督을 보좌하는 長史에 비견될 만한 존재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논지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弟監은 頭上弟監 보다 하위 직제로서 역시 두상대감을 보좌하는 존재로 봄이 타당하겠다. 그렇다면 頭上大監은 각각 1인씩의 頭上弟監과 弟監의 보좌를 받으면서, 浿江鎭 광역권의 군사 및 행정을 총괄했던 셈이 되겠는데, 이는 마치 都督이 1인씩의 長史와 州助의 보좌를 받으면서 州 광역권의 행정을 총괄했던 것과 유사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少監이다. 그런데 少監이란 職制는 그 명칭상으로 볼 때, 9州 지역의 少守와 비견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우선 든다. 주지하듯이 少守는 縣令과 마찬가지로 縣 단위에 파견된 외관직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少監 역시 步監과 마찬가지로 패강 지역의 縣 단위에 파견된 외관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패강진 관할 지역 내의 縣 단위는 步監 파견 지역과 少監 파견 지역을 나뉘어 편제되어 있었던 셈이 되겠는데, 이는 9州 지역의 縣 단위가 縣令 파견 지역과 少守 파견 지역의 두 계통으로 나뉘어 편제되었던 것과 유사한 것이 된다. 그런데 파-3) 기사에서 少監이 6인이라 하므로, 이를 1인의 步監과 함께 헤아리면 패강진 관할의 縣은 모두 7개였던 것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파) 기사는 패강진의 관할 범위가 7군 7현이었던 단계의 직제를 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1군 3현이 추가 증치된 헌덕왕대 이후부터 다시 재령강 이서에 12군현이 증치되는 시기 이전의 어느 중간 시점에 해당하는 단계를 말하는 것이 되겠다. 그렇다면 12군현이 증치된 이후에 나타났을 지도 모를 패강진 직제의 조직 및 운영의 변화상에 대해서는, 이와 별도의 고찰을 요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확인되고 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거론하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고, 다만 9세기 말-10세기 초의 기사 속에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浿西道와 浿江道의 용례를 통해서 그 개략적인 모습만을 유추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하-1) 猪足*?川*夫若*金城*鐵原 등의 城을 격파하고 군사의 聲勢가 매우 떨치매, 浿西의 賊寇로서 항복해 오는 자가 많았다.

2) 弓裔는 浿西道와 漢山州 管內 30여성을 취하고 마침내 松岳郡에 都邑하였다.

3) 浿江道의 10여개 州縣이 궁예에게 투항하였다.

4) 浿西 13鎭을 分定하였다.

윗 기사는 浿西(道) 혹은 浿江道에 대한 용례를 시기 순으로 모아 본 것인데, 그 각각은 眞聖王 8년(894), 孝恭王 2년(898), 孝恭王 8년(904), 孝恭王 9년의 일로 되어 있어, 浿西(道)와 浿江道의 용례는 대개 9세기 말-10세기 초에 처음으로, 그것도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浿西道와 浿江道의 문제에 대해서는, 道制의 실시와 관련하여 파악한 木村誠의 유력한 견해가 이미 제시된 바 있어, 먼저 이에 대한 검토를 해둘 필요가 있겠다. 이 견해는 浿江鎭과 大谷鎭을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에서 논의를 출발한 것인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경덕왕 21년(762) 경에 멸악산맥 이남과 예성강 이서 지역을 관장하는 浿江鎭이 먼저 설치되고, 이후 선덕왕 3년(782)에 멸악산맥 이북과 대동강 이남 지역을 관장하는 大谷鎭이 추가로 설치되어, 패강지역은 2鎭體制로 운영되었는데, 783년 경에 浿江鎭과 大谷鎭이 다시 浿江道와 浿西道으로 개편되어 2道體制가 됨으로써, 漢州에서 완전 분리되어 군사적 성격이 강한 독자적 행정구역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대로 大谷鎭이라는 칭호는 大谷城이 浿江鎭의 중심지임으로써 붙여진 浿江鎭의 별칭으로 봄이 타당하다 하겠으므로, 패서도과 패강도를 대곡진과 패강진에 각각 대응시켜 파악한 것은 일단 문제가 있다고 보여진다. 또한 9세기 말-10세기 초의 시기에 비로소 집중적으로 나오는 패서도*패강도의 성립 시기를 8세기 중후반경까지 소급한 것 역시 불안하여, 더욱 인정키 어렵다. 또한 패강도와 패서도를 멸악산맥의 남과 북의 지역에 각각 비정했던 부분 역시, 뚜렷한 근거 제시가 없어 의문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에 필자는 浿西道와 浿江道의 용례는, 역시 浿江鎭 관할 범위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패강진 운영체계의 변화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면 어떨까 한다. 패강진 관할 범위는 선덕왕 3년에 10군현으로써 출범한 이래, 헌덕왕 대에 1군 3현이 증치되어 1단계 확대되고, 그 이후 '어느 시기'에 재령강 이서에 12군현이 증치되어 관할 범위가 2단계 확대되는 과정을 밟아 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는데, 이러한 확대의 추세 중에서 패강진 관할 범위의 대폭적 확대를 가져온 것은 역시 재령강 이서 지역의 12군현 증치에서 기인한다 하겠으므로, 浿西道와 浿江道 사이의 경계를 설정한다면 역시 재령강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추론을 인정할 때 당연히 다음의 의문이 우선적으로 떠오를 것이다. 浿西道와 浿江道는 각기 재령강 이동, 이서 중 어느 지역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을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제 하-1), 2) 기사에 나타난 궁예의 공략 경로를 참고하면서 이러한 의문에 대한 설명을 시도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하-1) 기사에 의거하여 궁예의 공략 경로를 보면, 우선 眞聖王 8년(894)에 北原 梁吉의 군사를 나누어 받아 오늘날의 강원도 남부 내륙의 원성군*영월군 일대를 거쳐 동해안의 강릉 일대를 공략하고서, 다음에 다시 강원도 중북부의 내륙 지대로 공략의 방향을 바꿔 인제*화천*김화*철원 등지를 攻破하니, 당시 많은 浿西의 賊寇들이 궁예에게 투항했다는 것이다. 김화*철원 지역에까지 진군한 궁예에게 투항한 浿西의 賊寇라고 한다면, 이와 격절된 재령강 이서의 세력보다는 이와 근접해 있는 이동의 세력으로 봄이 자연스러울 것이므로, 하-1) 기사에 나오는 894년 단계의 '浿西'라는 칭호는 일단 재령강 이동과 예성강 이서 사이의 지역 일대에 설치된 14군현 쪽의 일부 군현 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다음에 하-2) 기사에 의하면, 이처럼 浿西 賊寇들이 894년에 개별적으로 투항한 지 4년이 지난 후인 898년에 궁예는 다시 浿西道와 漢山州 管內의 30餘城을 정식 접수했다고 하는데, 이 30여성 중에는 아직 투항하지 않은 浿西道 14군현 쪽의 일부 군현 세력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하-3) 기사에 나타나 있듯이 효공왕 8년(904)에 이르러서야 궁예는 비로소 浿江道의 10여 州縣의 투항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바, 공략 경로의 순서상 浿江道의 10여 州縣은 재령강 이서의 12군현 쪽에 대응되는 것으로 파악함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궁예의 패강지역 공략 및 접수의 과정과 신라의 패강 편제 과정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확인될 수 있다. 먼저 궁예의 浿西 지역 공략 및 접수의 과정을 보면, 크게 3단계를 거쳐 완료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賊寇의 개별적 투항을 받아들인 단계(894), 浿西道의 제군현을 정식으로 접수한 단계(898),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령강 이동의 浿江道의 제군현을 접수한 단계(904)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905년에는 浿西 지역에 13鎭을 分定하였다고 하는데(하-4 기사), 이는 대개 이전의 浿西 14郡縣을 13鎭으로 再編*分定하여 이를 군사적 거점화함으로써 군사 방어시설을 확충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궁예의 浿西 지역 공략과 접수 및 편제의 과정은 신라의 그것과 매우 흡사한 바가 있는 듯하여 주의를 끈다. 먼저 궁예가 浿西道의 제군현들을 정식 접수한(898) 다음에 재령강 이서의 패강도 군현들을 접수할 때(904)까지 지체했던 6년이라는 공백 기간은, 궁예 세력의 거침없는 확대 추세에 비추어 볼 때 이례적으로 긴 기간에 해당된다고 보여지는데, 이런 면이야말로 신라가 패강 지역을 편제 확대해 갈 때, 먼저 재령강 이동 지역을 편제한 다음 상당한 기간을 지체한 연후에 재령강 이서 지역으로 나아갔던 추세와 합치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궁예가 浿西 13鎭을 分定하여 재령강 이서 지역 보다 이동 지역을 군사적으로 더 중시했던 점까지도 신라의 패강지역 편제 방식과 일치하고 있어 더욱 주목을 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신라 측이나 궁예 측이나 패강지역에의 1차적 진출 의도는 군사적 목적에서 재령강 이동 지역을 주로 중시하는데 두어졌다가, 이후 군사적 안정성이 어느 정도 확보되면서 재령강 이서의 평야 지대를 접수*편제하여 경제적 목적까지도 관철해 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한다. 다소 무리한 감은 없지 않지만 이러한 추론을 통해서 浿西道와 浿江道가 재령강을 경계로 하여 그 이동과 이서 지역에 각각 구분*편제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다시 확인해 두고자 한다.

이와 같이 浿西道와 浿江道 성립의 계기를 재령강 이서의 12군현 增置에서 찾을 수 있다면, 앞에서 막연히 헌덕왕 이후의 '어느 시기'라고만 말해 왔던 12군현의 증치 시기는, 浿西道와 浿江道의 용례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9세기 말을 내려오지는 못할 것이므로, 결국 9세기의 어느 시기로 좁혀볼 수 있겠다. 즉, 패서도와 패강도는, 9세기의 어느 시점에 패강진 관할 범위가 대폭 확대되어 패강진의 운영 형태가 새로이 재편*성립되면서 나타나게 된 산물로서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로 인하여 패강진의 운영체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는 결국 浿西와 浿江에 尾稱된 道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道의 개념은 매우 다양하게 쓰이고 있어, 신라 하대에 쓰인 道의 성격을 논함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신라 하대에 쓰인 道의 용례로는 위의 浿西道와 浿江道 이외에 다음과 같이 숫자를 관칭한 道의 용례가 보인다.

使人을 十二道에 發하여 諸郡邑의 疆境을 分定하였다.

이 기사는 哀莊王 9年(808)에 전국적인 군현제의 정비 조치가 취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十二道'의 성격에 대해서는 상당한 이견이 제기되었다. 먼저 이를 막연히 방면이나 교통로 정도로 보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생각되는데, 木村誠에 의해 道를 광역행정구역으로 보려는 신설이 제기되면서 논란의 여지가 마련되었다. 이 신설에 의하면 '十二道'를 9州와 王畿, 그리고 浿西道 및 浿江道를 포괄한 12개의 광역행정구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道制의 실시 가능성을 적극 주장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十二道'가 12개의 광역행정구역을 지칭한다는 것은 인정하되, 道制가 실시되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제삼의 견해까지 가세하여 더욱 갈피를 잡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道의 용례는 일찍이 중대 초에 교통로나 군단 편성과 관련되어 빈번히 쓰인 바 있고, 중대 후반기에도 '何瑟羅道', '十道', '五道' 등의 용례로 쓰이고 있음이 산견되고 있어, 중대에 들어 어떤 의미로든 道의 용어가 쓰이고 있었던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여러 견해들을 살펴보면서 감지했듯이, 道의 성격을 확정적으로 규정하기 곤란하다 하겠으므로, '十二道'와 浿西道 및 浿江道의 용례로써 道制의 실시 여부를 확언한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이에 필자는 道의 용례로써 접근하는 직접적인 방식 보다는, 고려시기 北界의 운영체계를 참고로 하면서 신라하대 패강진의 운영체계, 더나아가 패서도 및 패강도의 성격에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고려시기의 北界는 대개 대동강과 청천강 사이의 서북면 일대[오늘날의 평안도]에 설치된 군사적 특수구역이었다는 점에서, 예성강과 대동강 사이의 이른바 패강지역 일대[오늘날의 황해도]를 배경으로 하여 신라하대의 군사적 특수구역으로서 설치된 浿江鎭과 성격상 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신라가 예성강 이서 지역에서 대동강 이남 지역에 걸친 지역 일대로 처음 진출하여 남쪽의 9州와 구별되는 군사적 특수구역을 구축한 것이 浿江鎭이었다고 한다면, 고려가 대동강 이북 지역으로 처음 진출하여 남쪽의 5道와 구분되는 군사적 특수구역을 구축한 것이 北界였다고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패강진과 북계는 최전방지역의 확대에 따라 군사적 특수구역이 추진 설정된 동일한 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추세를 감안할 때, 신라하대 패강진의 운영 실태, 더나아가 浿西道 및 浿江道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고려시기의 北界가 참고자료로 활용될 수는 있으리라 여겨진다. 北界의 모든 편제가 고려시기 당대에 갑자기 성립된 것이라기 보다는, 일부나마 그 전대에 이루어진 패강진 편제의 경험이 하나의 모델로서 참고되었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고려시기의 北界는 동북면에 설치된 東界와 더불어 군사적 특수구역으로서의 兩界를 이루고, 이는 또한 남쪽의 일반적 행정구역인 五道와 병렬적으로 두어져 五道兩界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北界는 여러 가지 면에서 패강진과 유사한 편제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상당한 所管 州縣을 관할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패강진과 같이 일정한 광역권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겠다. 北界는 2주목 43영군 4속현을 소관 주현으로 거느리고 있어, 26군현을 거느리고 있던 패강진 보다 관할 범위가 다소 넓었다고 할 수 있겠으나, 광역권을 바탕으로 한 특수구역이었다는 점은 동질적이다.

다음에 北界에서 실시되었다는 이른바 分道制가 浿江鎭의 浿西道 및 浿江道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북계 분도제의 주요 내용이란, 北界에 雲中道와 興化道라는 2개의 道를 分置하고, 각 道에 民事를 담당하는 監倉使와 軍事之任인 分道將軍을 두어 관장케 했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分道制는 驛站制를 운영하는데 있어서도 원용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분도제의 실제적 활용 범위는 상당히 광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北界內 군사*민사의 모든 분야를 관장하는 장관으로서 兵馬使를 정점에 두어 북계를 일원적으로 통괄하도록 함으로써, 북계의 편제 구조는 '兵馬使-分道制'로 이어지는 二重體制를 이루게 했던 것이다. 浿江鎭의 浿西道와 浿江道야말로 이러한 북계 분도제의 선행 형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浿江鎭은 그 관할 범위가 재령강 이서 지역으로까지 대폭 확대됨에 따라, 그 관할 범위를 재령강을 경계로 2대분하여 그 동서에 각각 패서도와 패강도로 分置하는 한편, 그 정점에 패강진의 장관을 두어 두 道를 일원적으로 통괄케 하는 구조로 편제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데 浿西道 및 浿江道의 용례가 나오는 9세기 말과 가까운 시점에, 패강진 장관의 명칭이 '浿江鎭頭上(大監)' 대신에 '浿江鎭都護' 혹은 '浿江都護'라 칭해지는 사례가 일부 고문서 혹은 금석문에서 확인되기 시작한다는 것은, 이 단계 패강진의 편제 구조와 운영 실태를 이해하는데 몇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먼저 이처럼 패강진 장관의 칭호가 바뀌어 나타나는 시점이 패서도 및 패강도의 용례가 처음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시점과 겹친다는 점인데, 이는 단순한 우연으로 돌려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都護의 명칭 사용은, 浿西道나 浿江道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9세기 후반 경에 패강진 관할 범위의 확대와 더불어 취해진 패강진 편제 구조의 재편 과정에서 나타난 산물로 볼 것이다.

다음에 바뀌어진 패강진 장관의 칭호가 都護였다는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다. 원래 都護란 중국 唐代에 정비된 제도로서, 內地의 일반 郡縣 지역과 구별되는 변경 지역에 설정된 都護府의 장관이었다. 그의 관할 범위와 직임은 변경 지역에 설치된 다수의 府*州*縣을 羈?州體制로 통할하고, 군사*민사를 겸장하면서 內地의 군현을 보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唐代 都護의 성격을 감안할 때, 패강진의 장관이 都護로 개칭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都護制의 영향을 받아 패강진을 도호부와 비슷한 체제로 재편*운영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되겠다. 이를 감안하면서 앞에서의 논지에 따라 浿江鎭과 都護의 성격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浿江鎭은 浿西道와 浿江道의 兩道와 각 도에 분속된 군현들을 통괄하는 단일의 광역권으로 운영되었을 것이고, 都護는 이러한 패강진의 정점에 선 장관으로서 군사*민사를 일원적으로 겸장함으로써, 州郡縣制가 실현되고 있는 內地의 9州 설치 지역을 보위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패강지역에의 진출과 편제의 과정은 크게 세 단계를 거치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패강지역에 증치된 군현들을 漢州에 소속시킴으로써 주군현체제의 일환으로 운영한 제1 단계, 패강진을 설치하여 漢州에 속하던 '패강 군현'들을 移屬받음으로써 군사적 특수구역으로 독립화한 제 2단계, 그리고 패강진의 관할 범위를 동서로 나누어 패서도와 패강도로 분치하고, 장관을 頭上大監에서 都護로 개칭하여 都護府와 비슷한 체제로 운영한 제 3단계가 그것이라 하겠는데, 이러한 변화*전개의 과정은 패강지역 특유의 강한 군사적 성격과 대규모적 군현 증치에 기인하는 바라고 할 것이다. 결국 마지막 단계의 패강진 편제와 운영 방식은 고려시기에까지 이어져, 남쪽의 五道制의 실시와 구별되는 兩界制의 실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9세기 후반 경에 이르러 패강진의 운영 형태는 道制가 본격 개시된 형태도 아니고 기왕의 패강진 운영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형태도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는 달리 패강진의 장관인 都護가 패강진의 군사*민사의 업무 전반을 일원적으로 총괄하되 재령강을 경계로 그 동서에 각각 패서도와 패강도를 분치하여, 二重的 體制로 운영해 갔을 것으로 보인다.

6. 맺음말

통일후 신라는 편제가 충실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던 변방 지역이나 백제 및 고구려의 옛 영역 등에 郡縣을 增置하여, 9州制의 균형있고 내실있는 운영을 꾀해 갔다. 본고에서는 경덕왕 7년(748)에 패강 지역을 중심으로 14군현을 增置한 것 역시 이러한 군현 증치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여, 그에 대한 진출*편제의 과정과 운영방식을 종합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패강 지역에 대한 신라의 진출 의욕은 이미 통일전쟁기부터 나타나고 있기는 하나, 성덕왕 34년(735)에 당으로부터 대동강 이남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공인받은 것이 본격적 진출의 큰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당의 공인은 당시 당과 신라와 발해 사이의 역관계 속에서 당이 취할 수 밖에 없었던 정치적인 조치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이에 대한 신라의 편제*지배는 곧바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첫 편제는 이후 13년의 준비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가능하였다. 748년의 14군현 증치는 그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때 증치된 14군현이란 6군 4현의 '패강 군현'과 海口郡(오늘의 강화) 및 그 세 영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되는데, 당초 이들은 모두 漢州에 소속하는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이는 곧 주군현체제가 패강 지역에까지 확대 적용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가 패강 지역의 군현들을 설치함에 주군현체제의 확대 적용이라는 측면 이외에도 북방에 대한 군사적 대처라는 목적이 강하게 배려되었다. 이런 점에서 '패강 군현'들은 다른 군현과 구분되는 바였다고 하겠으며, 따라서 이후 북방에 대한 군사적 갈등이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어감에 따라 패강 군현은 강력한 군사적 대응체제로 재편할 것을 요청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漢州에서 분리되어 하나의 독자적인 광역권으로 묶여 편제되기에 이르렀으니, 선덕왕 3년(782)에 浿江鎭의 설치가 그 산물이었다. 곧 大谷城(오늘날의 平山)에 설치된 浿江鎭은 패강 군현들을 독자적인 광역권으로 묶는 구심체였으며, 한편으로 광역권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패강진이 관할하는 광역권의 범위는 패강 지역에 새로운 군현이 증치되면서 확대되어 갔다. 먼저 헌덕왕대(809-825)에 取城郡(오늘의 黃州)과 그 세 영현이 설치되면서 패강진의 관할 범위는 10군현(6군 4현)에서 14군현(7군 7현)으로 1단계 확대되었으며, 그 이후 다시 재령강 이서의 평야 지대에 12개의 군현이 추가 증치되어 26개의 군현을 거느리는 거대한 광역권으로 2단계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패강진의 관할 범위가 확대되어 감에 따라 광역권으로서의 패강진에 대한 편제와 운영도 함께 재편되어 갔다. 먼저 <<三國史記>> 職官志의 浿江鎭典條에서는 14군현(7군 7현) 단계의 패강진 외관 직제를 총괄적으로 전해 주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의하면 頭上大監은 頭上弟監과 弟監의 보좌를 받으면서 浿江鎭의 광역권을 총괄적으로 관장한 장관으로서 內地의 都督에 비견되는 존재로, 7명의 大監은 패강 지역의 郡 단위를 관장하는 자로서 내지의 太守에 비견되는 존재로, 그리고 1명의 步監과 6명의 少監은 패강 지역의 縣 단위를 관장는 자로서 내지의 縣令 및 少守에 비견되는 존재로 각각 파악하였다.

그런데 이후 재령강 이서 지역에 12군현이 추가로 증치되어 패강진의 관할 범위가 거의 倍加됨에 따라, 9세기 후반경에는 패강진의 편제 및 운영체계도 새로이 재편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재편의 결과 나타난 주요 변화로서, 頭上大監의 명칭이 都護로 개칭되었다는 점과, 재령강을 경계로 하여 그 이서와 이동 지역이 각각 浿江道와 浿西道로 구분*편제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결국 都護를 정점으로 하여 浿江道와 浿西道의 兩道로 구분하여 편제*운영했다는 것이 되겠는데, 이러한 편제 구조는 兵馬使를 정점으로 하면서 雲中道와 興化道라는 2개의 道로 나누어 편제*운영한 고려시기 北界의 分道制와 유사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9세기 후반의 신라 浿江鎭의 浿西道와 浿江道는 고려의 이러한 北界 分道制의 선행 형태로 파악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