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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와 바이킹

'바이킹!'이라고 하면 놀이기구가 먼저 떠오를지 모르겠다. 하지만, 실은 바이킹이 무시무시한 해적의 이름인 건 다 안다. 바이킹은 용맹스럽기로 첫손에 꼽히는 그런 해상세력이었다. 바이킹은 8세기 말에서 11세기초에 걸쳐 바닷길을 통해 유럽 러시아 등지에 침입한 노르웨이의 노르만인을 말한다. 그들은 779년에 최초로 잉글랜드를 침입했고, 830년경에는 브리타니아를 공격했다. 이때를 전후하여 200여년간 노르만인은 각지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무자비한 침입 싸움 약탈을 자행하여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용감하게 싸워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존의 원리를 가르쳐 주었다. 이처럼 바이킹은 세계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해적 민족'이었다.

서역 만리 떨어진 바다에 바이킹이 있었다면, 우리의 서남해안 바닷길에는 장보고(? ∼ 846)가 있었다. 청해진, 해상왕국 . 듣기만 해도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들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바다라고 하면 해수욕하는 곳 정도로만 생각하는 왜소해진 우리들에게 동아시아의 바다를 주름잡았던 장보고의 모습은 이국적이고 신선하기까지 하다. 장보고의 본래 이름은 궁복(弓福)으로, 완도가 고향이었다. 그는 일찍이 정년(鄭年)과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무녕군(武寧軍)의 소장(小將)이 되어 무공(武功)을 떨쳤다. 그후 신라로 돌아와서 왕에게 말하기를 "중국 어디를 가보나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청해에 진을 설치하여 해적들이 사람을 잡아서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기 바랍니다"라 하였다. 그러자 왕이 장보고에게 만 명의 군사를 주었고 그후로는 해상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파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장보고는 남해와 황해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그래서 그를 일러 '해상왕 장보고'라 하고 청해진을 '해상왕국'이라고 부른다. 이후 세력이 커지면서 그는 중앙정치에까지 관여하여 신무왕이 왕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는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들여보내려다가 중앙귀족들과 반목하게 되었고 끝내는 그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장보고의 세력 근거지 청해진은 9세기 초반에, 정확히 828년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건설되었다. 청해진은 완도 옆 장도라는 작은 섬에 자리잡았었다. 청해진은 우리나라 바닷길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그만큼 국제교통과 무역의 요지였다. 따라서 동아시아를 주름잡는 해상왕국의 터로는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장보고가 중국에 마련한 근거지는 산동반도의 등주였다. 산동반도는 거기서 개가 짖거나 닭이 울면 우리나라에까지 그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매우 가까웠다. 그래서 일찍부터 무역 통로가 되었다.

지금까지 바이킹에서 장보고로 이야기를 이어왔는데, 이역만리 떨어져 있는 두 세력이 세계사적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면 뭘까? 묘하게도 그 활동의 시기가 같았다. 왜 하필이면 지구의 반대편에서 같은 시기에 같은 해상세력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을까? 그 이유로 학자들은 기후를 든다. 온난기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해수면이 높아져 해상세력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문화도 꽃피는 반면에, 날씨가 추워지는 시기에는 기근이나 질병이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9세기는 바로 온난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우리는 통일신라의 화려한 불교문화가, 당나라에서는 성당(盛唐)문화가 각각 꽃피었다. 일본에서도 헤이안(平安)문화가 발달했다. 물론 이들 문화는 장보고의 바닷길로 이어졌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바이킹이 활발히 활동했다. 역사발전의 흐름이 전 지구적으로 유사한 과정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하나의 지구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경험이 자연환경의 변화와 무관할 수 없다는 너무도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그래도 그건 좋은 기후가 가져온 결과였다. 그런데 요즘은 엘리뇨가 기승을 부린다. 이는 나쁜 기후다. 나쁜 기후는 재앙을 가져온다. 그 재앙은 과거의 경험에서 본대로 전 지구에 똑같이 일어난다. 굳이 과거의 경험을 들추어 내야만 환경의 중요성을 깨닫는 어리석음을 언제까지나 반복할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