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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의 역사인식

신라는 660년대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연합군으로 끌어들인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써 삼 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그로부터 통일신라시대 260년간에 신라조정에 의해 어떤 역사서가 편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를 알수없다. 이시대를 기록한 삼 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역사편찬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에 관찬사서는 편찬되지 않았던 것으로 일단 추측할수 있지만, 그러나 신라본기의 기사가 본래 소략하므로 쉽사리 단정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하대 150여년간 비록 정치적으로는 혼돈의 시기였다고 하더라도 한림대?숭문대 등 문한기구가 크게 확대,강화되던 때였으므로 혹 당제의 영향을 받아 사관 및 사관제도가 채용되었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혹은 금석문자료를 갖고 신라 김씨 시조의 전승이 역사적으로 변천했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 어떤 연구에 의하면, 중고시대의 소위 성한(星漢)-내물(奈勿)-시조전승은 중대 전제왕권시대에 이르러 그 왕권의 위엄을 분식하기 위하여 소의 알지-미추형 시조전승으로 변화했다고 한다.
즉 강력한 시조신화의 확립을 목적으로 내물왕의 위에 미추를, 성한의 위에 알지를 각가 소급, 가상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 해의 타당성여부는 문제이지만, 어떻든 삼국통일에 의해 그 기반이 크게 강화되된 중대왕권이 780년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백년 이상의 기간중에 국사를 편찬했을 가능성은 큰 것이다.

김대문의 역사서술

김대문에 대하여는 [삼국사기](권46)설총적기 끝에"金大問, 本新羅貴子弟, 聖德王三年爲漢山州都督, 作傳記若干卷, 其高僧傳,花郞世紀,樂本,漢山其()存"라고 언급되어있다.
이에 의하면 그는 성덕왕3년(704)에1 한산주장관을 역임한 사실을 알수 있다. 삼국사기(권40)직관지(하)외관 도독조에 의하면 도 독은 주의 장관으로 원성광 원년 (785)에 종래총관이라 부르던 것을 도독이라 개칭하였다고 하므로 김대문이 한산주장관에 재임 할 당시에는 총관이었을 것이다. 동 도독조에 의하면 이 주의 장관에는 급찬으로부터 이찬까지의 관등 소유자로서 보임하였다고 한다. 이 규정에는 진골출신이 할수있다는 단서는 없으나 실제로 주의 장관은 진골만이 한듯하며 그는 진골출신이었던 것이 다.
[삼국사기]열전에 보이는 김대문의 저서는 4종(고승전,화랑세기,악본,한산기)이지만, 한편 신라본기 법흥왕 15년(528)조에는 [ 계림잡지]이 인용등이있어 그의 저서목록에 추가하면 모두 5종이된다. 그러나 이는 현재 우리가 삼국사기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 는 한도내의 것뿐이며, 그의 저서를 총 5종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어떻든 그가 8세기초를 전후한 시기에 이처럼 수종의 저술을 한것은 특기할만한 사실임에 틀림없다.
김대문의 여러저서 가운데 먼저 주목되는 것이 계림잡전이거니와, 삼국사기 찬자는 신라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이래 공인ㄷ까지 의 일련의 사실을 이 책에 의해서 기술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타는 차차웅,거서간,마립간 등의 초기 왕호에 대 한 그의 해설이라는것도 이책에서 인용했을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생각할 때 계림잡전은 신라 역사성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저술로 볼 수 있다
화랑세기는 삼국사기(권4) 진흥왕본기 동 37년(576)에 우너화제의 시말과 화랑의 제정에 대한 일련의 기사 끝에 [김대문화랑세 기와, 현우충신, 종비이수,랑장용졸, 윳기이생]이라 하듯 직접 그 일구가 인용되어 있다. 또한 동(권47) 김흠운의 전기에서 이 책의 몇 구절을 인용한 바 있다. 비단 김흠운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열전에 오른 여러 화랑 및 낭도에 대한 이야기 역시 이 책에 근거를 두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승전은 현재 그 일문마저 남아 있지 않다. 비록 삼국유사에는 이 책이 두 번 추기로 인용되어 있으나 이것이 과연 그의 책을 가리키는 것인지 어떤지는 의문이다. 삼국유사(권3) 흥법[아도기라]조에는 아도화상에 대해 기술한 다음 주기로 [又高僧傳云, 西 天竺人, 或云 從吳來]라 하였거니와 이 구절을 각훈의 해동고숭전기사와 비교 同書(권1)을 지칭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밖에 한산기는 책이름으로 미뤄볼 때 그가 한산주 장관으로 재직했던 인연으로 저술한 지리지 혹은 역사서일것으로 짐직되며, 악본은 신라고유의 음악에 관한 책이었을 것이다,
이상 열거한 바 김대문의 저서들이 갖는 특징에 대하여 이기백은 그의 관심사를 신라사, 특히 그중에서도 왕경중심, 진골귀족중 심의 역사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게림잡전과 화랑세기등이 이를 단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신라의 전통을 저술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서술이 비교적 객관성을 띠고 있으면서도 단순한 사실의 설명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사실에 대한 그 자 신의 해석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김대문은 어떠한 동기에서 이것들을 저술하였을까?
이기백에 의하면 김대문이 이처럼 여러저서를 남긴 것은 신라의 전통을 살려야 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에 말미암은 것이며, 한 편으로는 진골귀족의 입장에서 그 절정에 도달한 국왕의 전제주위에 반대한다는 의식도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전제정치의 절정기라고 할 성덕왕대에 군사적 요충지였던 한산주 도독이 될 수있었던것은 김대문이 전제정권을 지 지하였기 때문인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이기백은 김대문이 왕실의 이야기보다는 진골귀족이라는 더욱 광범한 계층의 역사를 한층 개고간적이고 합리적인 입장에서 서술 하고 해석했다는 의미에서 사학사적으로 살펴볼 때 종전의 역사인식 수준에서 일단의 발전을 이루었음을 지적하고, 김대문의 사 학을 유교사관 확립이전단계에 자리매기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기백씨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김대문은 유교적인 입장에서 전제왕권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고 한 다. 그들은 김대문이 전제왕권의 입장에서 삼국시대 화랑도의 충군이 명실상부한 군주에의 충성으로 이해될어지길 우너해 화랑세 기를 저술했을것이며, 고승전도 중대에 전체왕권과 걸맞는 화엄사상이 융성했었음에 염두를 두고 저술했을것이라고 미루어 짐작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산기는 대외 발전의 전진기지에 대한 인식을 강조하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이해된다.

최치원의 역사서술

신라하대의 역사가로서는 최치원이 주목된다. 최치원은 국왕 중심의 개혁정치에 밀착해보려는 육두품출신이었고, 그 사상적 입 장은 신라의 전통을 고수하려기 보다는 오히려 중국(唐)문화의 절대적인 우위를 인정하는 입장이었으며, 따라서 신라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도 어디까지나 중국적인 역사개면에 입각하려 하였다.
그는 진성여왕 3년(889)에 터진 전국적인 농민반란이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앉자 관직을 버리고해인사로 숨어 들어가 각지를 돌 아다녔는데, 그가 역사를 쓴 것도 바로 이 시절 이었다고 짐작된다.
최치원의 저서에는 사육집 1권, 중산복궤집5권, 계원필경20권, 기타시문집 몇권이 있어 고려초에 문집 30권으로 집대성되었으나 , 다만 오늘날 계원필경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책은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 세상에 전해져서 김부 식도 삼국사기(권4) 지증마립가본기 동 원년(500)조에서 다음과 같이 이 책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論曰, 新羅王稱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尼師今者十六,麻立干者四,羅말末名儒崔致遠作帝王年代曆, 稱某王,不言居西干等,대以其 言칭野不足稱也]
이에 의하면 최치원이 제왕년대력에서 왕이란 칭호가 생기기 이전의 거서간 등 신라 왕호를 일률로 왕이라 칭한 것을 알 수 있 다. 한편 김부식은 이러한 최치원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제왕년대력에 대해서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지식은 이상의 것이 전부 이다.
이 책은 그 이름으로 보아 연대유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최치원이 신라 고유의 왕호를 왕이라 일괄 지칭한 것은 그가 중국적인 지식을 갖고, 즉 당에서배운 새로운 개념을 갖고서 신라의 역사를 자기나름대로 해석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점에서 그가 김대문과는 대조적인 입장을 취한 역사가로 생각되는데, 다시말하면 김대문의 저술이 중대 전제주의 왕권을 다소간 뒤받침해 주고 있던 유교에 대항하여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것이라면 최치원의 그것은 유교적, 중국문화 중심의 입 장을 취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제왕년대력의 성격이나 그 저작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저자인 최치원의 생애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권46)에 수록된 그의 전기나 계원필경, 동문선, 등에는 그에 관한 자료가 비교적 많이 나타나거니와 이들 자료를 종합해 보면, 그는 문성왕 19년 ?헌안왕원년(857)경주 사량부에서 출생했고, 12세기가 되던 해에 당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으며, 18세기가 되던 874년에는 당제 국이 외국인을 위해서 실시하던 과거 시험인 보공과에 합격하여 선주 표수현위가 되었다. 이때 공사간에 지은 글들을 추려 모은 것이 중산복궤집 5권이다. 그 뒤 887년 겨울 표수현위를 사직하고 다른 시험에 응시하고자 회남지방에서 시험준비를 하고 있던 그는 880년경 황소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제도행영병마도통에 임명된 회남절도사 고병의 종사관이 되어 문필을 장악하게 되 었다. 그가 바야흐로 문명을 떨치게 된 토황소격문을 지은 것이 881년 여름의 일이었다. 그는 고도통의 주선으로 승무랑?전중시 어사?내공봉?자금어대의 관직을 받았고, 당시 당 정부의 고의 인사들과도 서신을 통해 교제하였다. 이처럼 중국에서 활약한 그 는 헌강왕 11년(885)年에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수병부사시랑?지서감사에 임명되었다. 신라의 한림학사원인 서시원 장관으 로 그의 포부도 컷을것이며, 또한 일반으로부터 그 활동이 기대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조국 신라는 바 야흐로 대파국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의 귀국후 몇해 지나지 않은 889년에 농민반란이 터지면서 신라는 급격히 무너져가 기 시작했다.
게다가 국내에서는 그의 명성을 시기하는 사람도 많아 그는 대사군(지금의 태인),부성군(지금의 충남서산)등 충청도 연해지방의 태수로 전전할수 밖에 없었다. 진성여왕8년(894)에 그는 시국의 혼란을 공정하기 위한 그의 포부를 담은 시무책10여조를 국왕에 게 올려 아찬의 고위관 등을 박디고 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또한 두차례나 사명을 띠고 당으로 가려던 그의 노력도 농민반란군의 창궐로 길이 막혀 실현되지 못하자 뜻을 얻지 못함을 한탄 한 끝에 887년경 그는 마침내 벼슬을 사직하고 산림속으로 음거하고 말았다. 그는 최후로 거처를 가야산 해인사로 옮기고 형 현 준과 안현사를를 도우로 기거를 같이 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수록된 그의 전기에 일년의 그의 은거 생활을 다 음과 같이 쓰고 있다.
[逍遙自放,山林之下,江海之濱,營臺 植松竹,枕籍書史,肅詠風月]
이에 의하면 그가 역사공부를 한 것으로 은퇴생활중의 일이었던 것으로 짐작할수있을 것이다. 요컨대 제왕년대력은 900년을 전 후한 시기, 즉 당의 멸망(907)과 조국의 멸망(935)을 바로 눈앞에 둔 음담한시기의 저작일것으로 추측된다. 중국의 국학에서 공 부하고, 또 거기서 관료생활을 하고 그들과 사귀면서 문명까지 날려 동시대 신라의 누구보다도 중국을 잘 이해하였던 최치원은 중국적인 역사개념을 갖고, 나아가 중국의 역사가지를 포함시켜 신라의 흥망사를 연대기적으로 기술하였을것으로 생각된다.

김대문이나 최치원은 모두 각자의 독특한 입장에서 일정한 목적 아래 역사를 서술하였다. 즉 진골귀족 출신인 김대문은 왕권이 전제화하여 진곡귀족들이 소외당하고 있던 8세기 초의 시대적 상황속에서 역사서를 쓰는데, 여기에는 전제왕권에 반발하는 의도 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아울러 그에게는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부터 물밀 듯이 신라에 들어오고 있던 중국의 사상이나 제도?문물에 대항하여 신라 고유의것을 내세우려는 속셈도 작요하고 있었던것으로보인다. 한편 육두품 출신으로 중국 에서 벼슬하고 돌아온 최치원은 9세기말 진골귀족 만능의 정치풍토에 반발하는 유학자의 입장에서 신라의 멸망을 바로 눈앞에 두 고 연대기를 저술하였다. 그는 중국적인 개념과 지식을 갖고 신라의 역사를 썼는데, 이는 그의 경력과 사상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들의 역사인식 단계는 삼국시대의 신화적?설화적 단계에 비하면 한발짝 진전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 나 학자들은 이를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다고 언급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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