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num.mokpo.ac.kr/kangbr/www/부성씨.htm

新羅 中古期 部의 性格 變化와 姓氏制 -'部體制' 解體의 政治社會的 背景-

1. 머리말

2. 六部의 成立問題와 '部代表者會議'

3. 部의 性格 變化와 '大等會議'

4. 社會分化와 姓氏制

5. 맺음말

1. 머리말

6부의 문제는 신라의 정치사회 구조를 해명하는데 관건이 되는 주요 사안으로 인식되어 그간 많은 연구성과를 축적해 왔다. 그중에서 논의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역시 6부의 성격문제가 되겠는데, 그간 제시된 여러 견해들 중에서 근래에 들어 6部가 '정치단위체'적 성격에서 '행정구역'적 성격의 것으로 변화되어간 것으로 파악하려는 견해가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최근에 발견된 迎日冷水新羅碑(이하 冷水碑라 약칭함)와 蔚珍鳳坪新羅碑(이하 鳳坪碑라 약칭함)에서 6세기초 단계에 정치단위체적 성격을 띤 6부의 실재가 비록 상당히 변질된 형태로나마 어느정도 확인됨으로써, 이러한 견해의 타당성은 새삼 검증된 셈이 되었다. 이에 따라 부의 성격변화의 문제도 구체적으로 거론될 수 있게 되었다. 6세기초 이전의 정치단위체적 성격을 전형적으로 가지고 있던 단계의 6부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그 이후에 6部가 정치단위체적 성격을 탈각하고 행정구역적 성격의 것으로 재편되어 간 과정은 어떠했는가의 문제 등이 그 주요 대상이 되겠다.

부의 성격변화에 관한 최근의 논의는 성격변화의 완결 시점을 둘러싸고 6세기 전반설과 7세기 후반설로 대별되고 있다. 전자의 견해는 법흥왕 대를 전후한 시기에 관등제와 골품제가 율령 반포에 의해 법제화되었던 사실과 대대적인 왕권강화의 조치가 했해졌던 사실 등을 강조하면서 6세기 전반기에 부의 정치단위체적 성격이 완전 해소되고 6부가 행정구획으로 재편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는 반면에, 후자의 견해는 6세기 단계에는 部名冠稱이나 部役 등의 관행이 잔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부의 정치단위체적 기능이 완전 소멸한 것은 아닐 것이라 판단하고, 행정구역적 성격의 것으로 완전히 재편된 시기를 7세기 후반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두 견해의 차이점은 결국 중고기 부의 성격에 관한 문제로 귀착된다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연구성과를 참고하면서 중고기 부의 성격변화 문제를 재삼 거론하려고 하거니와, 기왕의 연구와는 달리 두 가지 측면에서의 간접적 접근방식을 취하기로 한다. 먼저 각 단계에서 중앙 6부 지배세력층의 성격이 변화해간 과정을 부의 성격변화와 결부하여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들 지배세력층은, 부의 정치단위체적 성격이 전형적으로 존재하던 시기에는 각자의 소속부를 가장 중요한 정치사회적 기반으로 활용하였을 터이지만, 부가 행정구역으로 재편됨에 따라 소속부에 대한 의존 보다는 가문단위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 갔을 것이 예상된다. 제2장과 3장에서 국가적 중대사를 논의하는 회의체가 '部代表者會議'에서 '大等會議'로 성격 전환됨을 주목하면서 이러한 변화를 추적해 보기로 하겠다. 다음에 이러한 지배층의 성격변화가 일어나게 된 사회적 배경으로서, 부가 해체되고 가문이 새로운 세력결집단위로 대두되어간 사회분화의 추세를 살펴보려 한다. 제4장에서 姓氏制의 성립과 그 확산과정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이러한 사회분화의 대추세를 부각시켜 보기로 하겠다.

최고 지배층으로 구성되는 회의체와 그 구성원의 성격변화는 정치적 의사결정에 작용하는 정치사회집단의 분화현상과 맞물리면서 나타나는 바이다. 따라서 위의 두 측면은 중고기 정치체제의 변화['부체제'의 해체]라는 동일체의 양면을 규정하는 양대 요소[정치사회적 배경들]로서 주목될 수 있을 것이다.

2. 六部의 成立問題와 ?部代表者會議?

6부 성립문제는 초기 部制의 성격을 해명하기 위한 전제적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입장 정리가 선결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이에 관한 기왕의 견해를 일별해 보면서 6부의 성립문제를 정리하고, 다음에 최고 지배층으로 구성된 회의체('部代表者會議')의 검토를 통해서 초기 部制의 성격문제를 추적해 보기로 하겠다.

6부의 성립문제에 대한 기왕의 견해는 크게 단계적 성립설, 6촌 기원설, 그리고 분화설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먼저 단계적 성립설에 의하면, 사로국의 기반이 되었던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喙部가 가장 먼저 성립되었고, 4세기중엽에 사벌국을 복속하고 그 지배자 집단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沙喙部이, 그리고 6세기초에 반파국을 복속하는 과정에서 本彼部이 성립되었으며, 그 이후 100여년 동안에 역시 지방세력집단을 복속하는 과정에서 나머지 3부가 단계적으로 성립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우리측 사서의 초기 기사를 철저히 불신하고 당시까지 전해지고 있던 단편적인 금석문 자료에만 의지하여 구성한 가설적 견해라 할 것인데, 최근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가 발견되면서 그 주요 논거 자체가 부정되기에 이르렀다.

다음에 六村 기원설은, 6村의 존재 기반을 경상도 일대로 보느냐 혹은 경주평야 일대에 한정하여 보느냐에 따라서 다시 두 견해로 구분될 수 있겠는데, 후자적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후자의 견해는 6촌에서 6부로 전환된 시점에 대하여 赫居世代說, 儒理尼師今 9年(32)說, 慈悲麻立干 12年(469)說 등으로 나뉘어지는데, 이중에서 자비마립간 12년은 5부의 성립시기로서 보다는 6부의 성격변화의 시점으로서 더욱 주목되고 있는 것이 최근의 연구경향이고 보면, 결국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경주평야 일대를 중심으로 6부가 성립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신설로 제기된 분화설에 의하면, 원래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하여 喙·(本)彼·(韓)岐의 3部만이 존재하다가, 5세기 후반 경에 喙部는 喙部·沙喙部·牟喙部의 3부로 분화되고, 彼部가 本彼部와 斯彼部의 2부로 분화되어 6부가 성립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 견해는 '3부→6부'라는 단계적 성립을 상정했다는 점에서 첫째 견해와 유사한 듯 보이지만,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部制[3부]가 성립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둘째 견해와 접근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경주평야 일대에 원래부터 6개의 집단('6촌')이 존재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3개의 세력집단('3부')만이 포진해 있었고, 이것이 분화과정을 거쳐 6부로 성립된 것으로 보았던 점에서는 두번째 견해와도 구분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둘째 견해는 '六村'의 기사를 주요 논거로 삼고 있고, 세째의 견해 역시 '朴·石·金'의 3姓에 관한 기사를 '3부'의 실체로 보고 있어, 두 견해는 우리측 사서의 초기기사를 논거로 적극 활용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방법론상 인식을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고 여겨진다. 둘째 견해의 '6촌→6부'의 도식이나 세째 견해의 '3부→6부'의 도식 중 어느 것을 취하든, 신라의 部制가 上古 초의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경주일대를 중심으로 성립해 있었던 것으로 되는 것은 이러한 인식상의 공통성에서 말미암은 바라 하겠다.

이상의 6부 성립문제에 관한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초기 部制의 성격을 해명하는데 있어서도 '六村'과 '朴·石·金' 등의 초기기사를 비판적인 차원에서 적극 활용할 수 있음을 시사받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부의 대표자들이 일종의 회의체를 구성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광경을 전하는 초기기사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하여 초기 部制의 성격문제 해명에 접근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다음의 기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前漢 地節 元年 壬子[B.C.69] 三月 초하루에 六部의 祖들이 각기 子弟를 거느리고 閼川의 언덕위에 모두 모여서 의논하였다. "우리들은 위에 民들을 다스릴 君主가 없어서 民들은 모두 방자하여 마음대로 하게 되었소. 어찌 덕있는 사람을 찾아 君主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겠소." 이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楊山 밑 蘿井 근처에 이상한 기운이 電光처럼 땅에 드리워져 있는데, 흰말 한마리가 꿇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 살펴보니 붉은 알 한개가 있었는데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면서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그 알을 깨뜨려 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그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라고 이상히 여겨 東泉서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그리하여 이름을 赫居世王이라 하고 位號를 居瑟한이라 했다.

이 기사에 전하는 이야기의 근간은 6부의 대표들, 즉 '六部祖'와 그 子弟들이 희의를 통해 혁거세를 그들의 공동의 군주로 추대했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밖에 하늘을 나는 백마와 卵生 등의 이야기는 이를 신성화하기 위하여 덧붙인 神話的 표현이라 할 것이고, 동천에 목욕시켰다는 이야기는 국왕 추대의 한 절차로 행해진 성스러운 종교적 浸禮儀式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윗 기사에 나타난 회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회의에 참석한 대표자의 범위는 대체로 各 部의 部長과 그 子弟들이었다. 둘째, 회의의 주요 논제는 국왕 선출에 있었다. 그리고 세째, 회의가 개최된 ?閼川岸上?과 혁거세가 발견된 ?楊山下蘿井傍? 등이 모두 후에 及梁部(梁部)로 계통이 이어지는 ?閼川楊山村? 域內의 聖所였을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 이 회의는 梁部에서 주도하였을 것이며 추대된 王 역시 梁部 출신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이렇게 본다면 이는 部의 대표자들이 국왕을 선출하기 위해 개최한 회의 장면을 전하는 것이 되겠는데, 이러한 형태의 회의체를 인정할 수 있다면 이를 '部代表者會議'라고 칭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부대표자회의'는 국왕의 선출문제 뿐만 아니라 그 밖의 국가적 중대사가 발생할 때에도 이를 의결하기 위해 수시로 개최되었을 것이 예상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音汁伐國이 悉直谷國과 더불어 疆域을 다투다가 (신라)王에게 와서 결정해줄 것을 청하였다. 왕이 이를 난처히 여겨, 金官國의 首露王이 연세도 많고 지식이 많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자고 하였다. 首露가 立議하여 音汁伐國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王이 六部에 명하여 모여서 首露王에게 향연을 베풀게 하였는데, 다섯 部에서는 모두 伊?을 主로 삼았으나 오직 漢祇部만이 지위가 낮은 자를 主로 삼았다. 首露가 노하여 奴 耽下里에게 명하여 漢祇部主인 保齊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奴는 도망하여 音汁伐主인 ?鄒干의 집에 숨었다. (신라)王이 사람을 시켜 그 奴를 찾아오도록 하였는데 ?鄒가 이를 보내주지 않자, 왕은 노하여 군사를 발하여 音汁伐國을 쳤다. (음즙벌의) 主가 무리와 더불어 항복하니, 悉直과 押督의 二國王도 來降하였다.

이 기사가 전하는 이야기의 근간은 사로국이 읍즙벌국과 실직국, 그리고 압독국 등의 소국을 복속하는 과정에 대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야기의 전개상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즉 먼저 '年老多智識'하다 하여 금관국의 수로왕을 개입시킨 점 자체도 미심쩍은 바인데, 더구나 초빙된 수로왕이 그를 위해 베푼 향연의 자리에 '位卑者'를 보냈다는 이유로 漢祗部主를 奴로 하여금 죽이게 했다는 점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바이다. 위 기사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서 금관국의 수로왕과 관련된 부분은 새로이 해석되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관련하여 수로왕에 관한 기록이 하나같이 상식성과 일관성의 면에서 매우 흐트러진 상태로 전해진다는 점이 주목된다. 먼저 그의 재위년도가 지나치게 과도하게 설정되어 전한다는 점이다. 《三國遺事》에 실려 전하는 《駕洛國記》는 수로왕의 재위년도를 자그마치 158년간(42-199년)으로 전하고 있다. 다음에 수로왕과 탈해와의 관련 기사들에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三國遺事》에서는 탈해를 실은 배가 가락국에 닿아 수로왕이 이를 맞아들이려 했으나 곧바로 떠나가 계림 동쪽의 하서지촌 아진포에 당도하였다는 기사를 전하면서 그 시기를 남해왕(4-23년) 때라고 하였던데 반해, 《三國史記》에서는 혁거세 39년(B.C. 19)의 일로서 전하고 있다. 또한 《駕洛國記》에서는 수로왕과 탈해의 도술 대결 장면을 설화적으로 서술하기도 하였다. 어느 것을 취해도 금관국의 수로왕이 탄강하여 즉위했다는 해(42년)와는 맞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수로왕과 파사왕의 관계를 전하는 윗 기사가 또 하나의 사례가 되겠는데, 이 역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바가 있음은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기록상으로 볼 때 수로왕의 실체 파악은 매우 어렵게 되어 있다. 이는 혹시 수로라 불린 인물이 금관국의 수로왕 이외에 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와 관련하여 《三國遺事》에 전하는 水路夫人에 대한 이야기가 참고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의하면 수로부인은 聖德王代의 純貞公이라는 인물의 부인이라 하여 짐짓 역사적 사실성을 강조하고는 있으나, 실제 이야기 전개는 매우 설화적으로 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바다의 용이 수로부인을 바다로 납치해간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어느 노인의 말에 따라 백성을 모아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서 海歌詞라는 주술적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駕洛國記》에서 수로왕의 탄강시에 2-300명의 무리가 구지봉의 땅을 파면서 龜旨歌를 불렀다고 전하는 것과 그 의식 행위 및 가사의 내용에 있어서 매우 흡사하다. '首露'와 '水路'의 음이 같고 양자에 관련된 의식 행위와 가사 내용도 이처럼 흡사하다고 한다면, 신라에서 '수로'란 칭호가 가락국의 수로왕과 혼동되면서 신성한 인물에 대한 보통명사로서 칭해지는 경우가 있었을 성도 싶다. 그렇다면 탈해와 파사가 관계한 것으로 나오는 수로는 가락국의 수로왕이라기 보다는 신라 내의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고 해야겠다.

이런 관점에서 추론해 볼 때, 먼저 탈해가 관계했다는 '수로'란 탈해가 집자리(月城 자리)를 둘러싸고 다투었다는 瓠公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호공은 혁거세 때에는 마한에 修聘 사절로 파견되기도 하는 등 신라의 대외문제에 적극 관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남해왕 때에는 大輔로 발탁된 탈해에 밀리기도 하였으나 탈해가 즉위하면서 대보로 발탁되어 그는 최고의 지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우연일지 모르나 윗 기사에 나오는 婆娑尼師今代의 수로도 파사왕의 요청으로 대외문제에 관해 '立議'한 것으로 되어 있어, 그 역할에서 호공의 경우와 類比되는 바가 있다. 이런 면에서 그 역시 신라 내 최고의 지위에 있던 어떤 인물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상에서 대담한 추론을 거듭해 왔거니와, 이를 바탕으로 다시 한번 대담한 추론을 더하고자 한다. 즉 윗 기사의 수로에 관한 부분은, 斯盧國이 대외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部代表者會議?를 개최함에 있어 국왕의 의뢰를 받아 회의를 주재하게 된 어떤 인물이 금관국 수로왕에 부회된 결과 성립된 이야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그는 금관국의 수로왕은 아니었을 것이며, 국왕의 의뢰를 받아 대외관계를 논제로 한 ?부대표자회의?를 ?立議?하여 이를 주재한 議長 격에 해당되는 인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입론에 따라 윗 기사에 나타난 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첫째, 당시 ?부대표자회의?의 주재자는 국왕 자신이었다기 보다는, 국왕의 의뢰를 받은, 6부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별도의 某人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의의 주재자는 일정하게 정해졌던 것이 아니고 국가적인 중대 사안이 있을 때마다 국왕이 6部의 세력관계를 고려하여 ?年老多智識?한 인물에게 수시로 의뢰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런 면에서 ?부대표자회의?는 상설기구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각 部는 ?부대표자회의?에 部의 최고 대표급에 해당하는 伊?을 파견해야 할 것을 일종의 의무와 같이 준수해야 했으리라는 것이다. 윗 기사에서 오직 漢祇部만이 ?位卑者?를 보냈던 것에 대하여 주재자가 그 部主를 살해케 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한기부가 '位卑者'를 보냈던 것은 ?부대표자회의?에 적격자를 참석시켜야 할 의무와 격식을 위반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는데, 이는 한기부가 결정사항에 대해 뭔가 불만을 표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것은 곧 '부대표자회의'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세째, 당시의 정치적 의사결정체계가 국왕과 '부대표자회의'의 주재자 간의 2원적 구도속에서 운영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속에서 국왕은 '부대표자회의'의 격식을 파기한 한기부주를 살해한 것에 대하여 주재자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다만 살해를 실행한 奴를 소환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국왕의 입장을 표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특정 部의 돌발적 행위에 대하여 ?부대표자회의?의 주재자와 국왕이 각각 독자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음을 간취할 수 있겠다.

대담한 추론에 의존한 것이긴 하지만, 이처럼 각 부가 적격한 대표자를 '부대표자회의'에 파견하여 국가의 중대사안을 의결하였다고 한다면, 그 자체가 중요한 정치행위였다고 할 것이다. 각 부의 대표자들은 회의에 참석하여 소속부의 이해를 대변하고, 주재자는 회의를 통해 6부의 이해관계를 수렴하여 6부 공동의 중대 사안을 의결하였을 것이다. 즉 '부대표자회의'는 6부의 세력관계를 조정하면서 정치를 운영해 가는데 필요한 공통분모를 도출하는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여기에서 일단 의결된 사항은 절대적 권위를 지니게 되어 이에 대해서는 6부 모두가 의무적으로 준수해야 함이 요청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왕은 6부의 공적 대표자의 위치에서 유사시 ?年老多智識?한 인물을 '부대표자회의'의 주재자로 위촉하여 논의케 하고, 그 회의에서 의결된 사항을 집행하며, 혹은 6부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쟁의 소지를 조정하는 일 등을 수행했을 것이다. 신라측 자료에서는 국왕이 이러한 권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다음의 고구려측 기사를 통해서 이러한 측면을 간접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가) 12년[190] 9월에···中畏大夫 沛者인 於卑留와 評者인 左加慮는 다 왕후의 친척으로 나라의 권세를 잡고 있었는데, 그 子弟들도 권세를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여 남의 자녀와 田宅을 약탈하니, 國人이 怨憤해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이들을 주살하고자 하니, 左可慮 등이 四椽那와 함께 모반을 일으켰다.

나) 13년 4월에 (左可慮 등이) 무리를 모아 王都를 공격하니 王이 畿內의 병마를 징발하여 이를 평정하고서 마침내 下令하여 말하였다. "근자에 官은 총애에 따라 주어지고 位는 德으로 승진치 아니하여 그 해독이 백성에게 미치고 우리 왕가를 驚動케 하였다. 이는 과인이 총명치 못한 소치라. 너희 4部는 각기 아래에 있는 賢良者를 천거하라."

사료 가)에서 국왕이 약탈자를 주살하려고 했던 것은 다른 部에 소속한 ?국인?들의 반발 여론에 힘입어 국가의 공적 조치로서 행하려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당사자가 소속한 연나부에서는 모반을 일으켰고, 급기야는 사료 나)에 나타나 있듯이 왕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일개 部가 국왕에 대항하는 사례를 엿볼 수 있다. 이에 국왕은 ?畿內兵馬?를 징발하여 이를 평정하였다고 하는데, '기내병마'란 연나부를 제외한 4部의 휘하 병마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현량자를 천거토록 지시한 교령의 대상이 연나부를 제외한 ?四部?였던 데에서 알 수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 고구려 초기에 국왕의 권능은 5부의 ?공적? 측면을 대표하여 각 部의 ?사적? 측면을 규제하는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바꾸어 생각하면 국왕의 권능은 각 部間 세력관계의 공통분모 위에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각 部의 영향력에 의해 규정되는 면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部의 경우도 사적 측면과 공적 측면이라는 2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에 있어서 흔히 각 부의 ?단위정치체?적 측면과 6부 전체의 ?왕경지배자공동체?적 측면을 운위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부의 2중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겠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체제는, 국왕과 각 부 사이에 '자치와 통제의 관계'가 견지되고, '지배자공동체'로서의 6부의 공적 측면과 '단위정치체'로서의 각 부의 개별적·사적 이해관계의 제관계가 교차·작용하는 가운데에서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部體制'라 불리는 이러한 정치체제는 삼국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바로 여겨지는데, 그 운영의 핵심에는 앞에서 추론해온 '部代表者會議'가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러한 회의체의 변화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部의 성격변화와 이에 따른 정치체제의 변화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3. 部의 性格 變化와 '大等會議'

최근 발견된 冷水碑와 鳳坪碑는 6세기 초 신라의 部의 성격과 그 변화를 추적하는데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먼저 두 비에 의하면 寐錦王과 葛文王에게까지도 소속부가 표기되어 있고, '王等'이라 칭해지는 각 부 소속의 최고 지배층 인사들이 '共論'을 통해 국가의 중요 사안을 논의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어, 6세기 초 단계의 부가 독자적인 단위정치체적 성격을 어느정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받을 수 있다.

다음에 두 비에 나타난 관등 표기와 인물 구성상의 특징적 측면을 통해서 부의 성격 변화 문제에 접근해 볼 수 있다. 먼저 관등 표기의 특징을 보면, 두 비에는 신라 경위의 명칭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干支'라는 독특한 칭호가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아예 관등 자체를 갖지 않은 인물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이는 곧 6세기 초반의 관등제의 정비 실태를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는데,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부의 성격을 해명하는 데에도 참고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두 비에 나오는 인물 구성을 보면, 크게 왕경인과 지방인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왕경인은 다시 관직이 표기되지 않은 인물(이하에서 ?관직 미표기 인물?이라 칭하기로 함)과 관직(혹은 직역)이 표기된 인물로 구분될 수 있다. 이중 특히 '관직 미표기 인물'들은 6세기 중후반 이후의 금석문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사례로서, 당시 정치체제의 특성과 관련하여 6부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주목될 수 있는 바이다. 이들만을 뽑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표 1〉 냉수비·봉평비에 나타난 '관직 미표기 인물'

------------------------------------+--------------------------------------

冷 水 碑 | 鳳 坪 碑

-----------+-----------+------------+----------+------------+--------------

部 名 | 人 名 |官等[等級] | 部 名 | 人 名 | 官 等

-----------+-----------+------------+----------+------------+--------------

| 斯夫智 | (前世王) | 喙 | 牟卽智 | (寐錦王)

| 內智 | (前世王) | 沙喙 | 徙夫智 | (葛文王)

-----------+-----------+------------+ 本彼 | △夫智 | 干支

沙喙 | 至都盧 | (葛文王) | 岑喙 | 美夫智 | 干支

沙喙 | 斯德智 |阿干智[6] +----------+------------+--------------

沙喙 | 子宿智 |居伐干智[9] | 沙喙 | 而粘智 | 太阿干智[5]

| 이夫智 | 壹干支[2] | 沙喙 | 吉先智 | 阿干智[6]

| 只心智 |居伐干智[9] | 沙喙 | 一毒夫智 | 一吉干智[7]

本彼 | 頭腹智 | 干支 | 喙 | 勿力智 | 一吉干支[7]

斯彼 | 暮斯智 | 干支 | 喙 | 愼肉智 | 居伐干智[9]

-----------+-----------+------------| 喙 | 一夫智 | 太奈麻[10]

+ 喙 | 一이智 | 太奈麻[10]

| 喙 | 牟心智 | 奈麻[11]

| 沙喙 | 十斯智 | 奈麻[11]

| 沙喙 | 悉이智 | 奈麻[11]

+----------+------------+--------------

매금왕과 갈문왕을 포함하는 이들 '관직 미표기 인물'들은, 국초 이래 국가적 중대 사안을 의결하는 최고 회의체로서의 ?部代表者會議?의 구성원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이들의 각 부별 소속 현황을 보면, 梁部와 沙梁部 소속인이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는 반면에 여타 부 소속인은 한 사람, 혹은 全無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각 부 소속인의 인원수 차이가 현격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당시 부의 성격 변화를 일정하게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제 냉수비와 봉평비에 나타난 이와 같은 관등과 '관직 미표기 인물'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6세기 초 신라의 부의 성격과 그 변화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추적해 보기로 하겠다. 먼저 관등와 부의 관련성 문제로부터 논의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두 비에 나타난 관등과 부의 관계를 보면, 沙喙部와 喙部에 속한 인물들에게는 신라 경위가 붙여지고 있음에 반해, 本彼部·斯彼部·岑喙部 등의 다른 부에 소속한 인물들에게는 경위 관등 대신 ?干支?라는 독특한 칭호를 붙여지고 있는 차이가 엿보이고 있다. 이런 측면을 중시하여, 6세기 전반 초에는 신라의 경위체제가 喙部와 沙喙部에만 한정·적용되고 있었을 뿐이고, 6부 전체 차원에까지는 아직 관철되지 못하였으리라고 추단한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또 이와 같은 맥락에서 최근에 관등제의 확대 과정을 단계적으로 설정하면서, 이를 部體制 해체의 문제와 직결시켜 이해하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두가지의 의문점을 안고 있다. 첫째, 官等制가 양부와 사량부로부터 여타 부에까지 단계적으로 확대·적용되어 간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점과, 둘째, 관등제가 6부 전체에 확대되었다고 한 530년 경에 과연 部體制가 완전 해체되었겠는가 하는 점이 그것이다. 먼저 전자의 의문점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官等制의 원형태는 이른 시기부터 6부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婆娑尼師今代에 한기부의 許婁와 摩帝라는 인물이 ?伊??을 칭하고 있고, 후대의 角干에 해당한다는 ?酒多?의 位가 확인되고 있는 것은 이를 반영하는 것이겠다. '伊?'의 경우는 후대적 관등 칭호을 轉稱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에 해당하는 位에 대한 당대적 칭호가 있었을 것이고, '酒多'의 경우는 그 자체가 당대적 位의 칭호라 할 것이므로, 이들은 곧 당대에 후대적 관등제의 원형태가 6부에 일관하여 적용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다음의 기사는 고구려 초기에 관등제의 원형적 형태가 존재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諸大加도 스스로 使者·?衣·先人 등을 두었는데, 그 이름이 모두 왕에게 보고되었으니, 이들은 卿大夫의 家臣과 같은 자들로서, 會同坐起할 때에 使者·?衣·先人과 同列에 있지 못했다.

여기에서 각 部의 長인 大加과 왕의 휘하에는 공히 使者·?衣·先人 등으로 등급이 구분된 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의 명단은 다시 국왕에게 보고되었다는 것이다. 즉 使者·?衣·先人 등의 구분은 大加를 정점으로 하여 '部別 위계질서'를 형성함과 동시에, 다시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모든 部를 망라하는 '포괄적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단계에 있어서 大加는 '부별 위계질서'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어,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포괄적 위계질서'에 형식적으로 편제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관등제의 원형태란 이처럼 部와 국왕에 의해 이원적으로 규제되는 형태의 위계제를 말함이다. 이는 점차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部를 초월하는 일원적인 계서조직으로서의 실질적인 관등제로 정비되어 갔을 것인데, 이러한 관등제에는 부장 이하 중앙의 部 소속 세력은 물론, 중앙 지배세력으로 새로이 편입되어 들어온 일부의 지방세력까지도 포괄되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추세를 인정할 수 있다면, 냉수비와 봉평비가 반영하는 6세기 초 단계에 있어서 官等制가 喙部와 沙喙部에만 한정적으로 적용되었고, 이후 단계적으로 여타부에 적용되면서 정비되어 간 것으로 보기는 곤란하다. 이 보다는 원래부터 6부를 포괄하는 관등제의 원형태가 존재했고 이것이 점차 분화·정비되어 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냉수비와 봉평비에 나오는 '관직 미표기 인물' 중에서 沙喙部와 喙部 소속인들에게만 官等名이 붙여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喙部와 沙喙部 이외의 部 소속인은 1명이거나 全無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이들에게는 官等 대신에 ?干支?라는 독특한 칭호가 붙여지고 있다는 것이 주목될 수 있을 것이다. ?干支?란 독자적인 정치단위체의 長을 지칭하는 칭호라 할 것이므로, ?干支?가 붙여진 이들은 각각 해당 部를 대표하는 部長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들에게 官等 대신에 首長에 대한 전통적인 존칭인 ?干支?를 칭하였다는 것은, 고구려 초기의 大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이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포괄적 위계질서'에 편제되지 않았던 단계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것이다. 즉 '干支'란 喙部와 沙喙部를 대표하는 자들에 게 官等 대신에 칭한 ?寐錦王?이나 ?葛文王?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칭호였던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냉수비와 봉평비에서 沙喙部와 喙部 이외의 部 소속인들에게 관등이 칭해진 경우가 나오지 않는 것은, 해당 사안을 논의하는 ?部代表者會議?에 이들 部 소속인들이 아예 참석을 하지 않았거나 혹은 ?干支?를 칭하는 部 대표 1인만이 참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비들이 일정 관등 이상을 소지한 6부의 인물들에 대한 총목록은 결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상의 추론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냉수비와 봉평비에 梁部와 沙梁部 이외의 部의 인물은 부대표 1인만 기재되거나 혹은 전무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 있어야 하겠다. 이는 해당 사안을 논의하는 '부대표자회의'에 대한 각 부의 참석 기준이 이전과 달라졌기 때문으로 여겨지거니와,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부의 성격변화 문제를 거론하는 자리로 미루어 두기로 하자.

이상의 추론대로라면, 비문 상에 관등 소지자가 沙喙部와 喙部 소속인들에만 한정되어 나온다 하여, 당시를 沙喙部와 喙部에만 관등제가 적용되던 단계로 이해하고, 더나아가 이를 部의 성격 변화와 部體制 해체의 한 단계로까지 직결시켜 이해하려 했던 견해는 재고될 여지가 다분하다 하겠다. 이제 이와 관련하여 官等制의 정비가 과연 곧바로 部의 성격변화, 즉 部體制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하는 또 하나의 의문점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실제 관등의 정비과정과 부의 성격변화는 반드시 일치되게 나타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표 1〉에 정리되어 있는 바에 따라 '관직 미표기 인물'들에 대한 냉수비와 봉평비 간의 배열순서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먼저 냉수비에서는 至都盧葛文王 이하 ?七王等?들에 대한 배열 순서를 정함에 있어 부별 배열을 최우선 원칙으로 하고, 관등의 높낮이는 동일 部 소속인들 사이의 배열 순서를 정하는 한정적 기준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봉평비의 경우에서는 관등의 높낮이가 인물 배열 순서의 우선적 기준이 되고 있는 것으로 타나나고 있다. 이러한 인물 배열 원칙의 차이는, 흔히 냉수비(503년)와 봉평비(524년) 사이의 시차에서 말미암는, 部보다 官等을 중시하게 되는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것이 흔히 지적되고 있느며, 이는 실제 사실과 부합되는 것으로 여져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에 반비례하여 봉평비에서의 部에 대한 중시도가 냉수비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졌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즉 봉평비에서는 관등 순서에 따른 배열을 기본 원칙으로 하면서도, 그와 함께 寐錦王, 葛文王, 干支 등을 칭한 각 部의 대표자 1인씩은 최선두그룹에 배열함으로써, 각 부의 대표성을 여전히 중시하고 있음을 엿보게 해준다. 이에 반해 냉수비에서는 喙部·沙喙部 소속의 인물들을 우선적으로 배열하고 그 맨 마지막에 中小 部인 本彼部·斯彼部의 대표자 1인씩을 배열하고 있는 것이다(〈표 1〉 참조). 단순히 배열 순서의 형식적 측면에서만 볼 때, 각 부의 대표성은 봉평비에서 오히려 보다 더 중시되고 있다고 볼 여지조차 있다. 따라서 냉수비와 봉평비의 인물 배열 원칙상의 이러한 차이는 일차적으로 그간 관등제가 정비되어 온 과정의 결과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이를 곧바로 부의 성격변화, 즉 부체제 해체의 문제와 직결시켜 파악하기는 곤란하다 하겠다.

이상의 논의에서 필자가 의도한 바는, 관등제의 정비과정과 部의 성격 변화가 무관한 것임을 주장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관등제의 정비는 국왕을 정점으로 한 일원적 정치체제의 정비를 촉진시키고 결과적으로 部의 정치단위체적 기능을 제약하는 측면으로 작용하였음은 사실이었을 것이나, 관등제의 정비가 곧 ?部體制?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중고기 전시기에 걸쳐 지배층 인사들은 의연히 소속부에 의지하여 정치사회적 활동을 전개해 갔다고 보는 것이 실제에 가까울 것이다. 6세기 중후반 경의 신라 금석문에 나오는 인물들이 각자의 소속부를 관칭하는 관행을 집요할 정도로 유지해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7세기 후반경에 이르러 금석문 혹은 고문서 상에 인물을 표기함에 있어 소속부를 관칭하는 관행이 사라지고, 그 대신 ?大京? 등의 포괄적 출신지 표기로 대체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결국 이 단계에 이르러 잔존한 부의 정치단위체적 기능이 완전 소멸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중고기는 部의 성격 변화가 완료되었다기 보다는 변화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고 할 것이며, 이에 중고기 部의 성격 변화과정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6세기 초의 ?部代表者會議? 구성원이었을 〈표 1〉에 나타난 인물들의 각 部別 구성 비율은, 중고기에 있어서 部의 성격 변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줄 수 있다. 먼저 지증왕 단계의 냉수비에는 沙喙部 3인, 喙部 2인, 本彼部 1인, 斯彼部 1인으로 총 7인이 나와 있으며, 법흥왕 단계의 봉평비에는 喙部 6인, 沙喙部 6인, 本彼部 1인, 그리고 岑喙部 1인으로 총 14인이 나와 있다. 이를 정리해 보면 냉수비에서는 沙喙部 소속인이 최다수로 나타나 있는 반면에, 봉평비에서는 沙喙部와 喙部가 동수로 나타나 있다. 또한 봉평비에서 沙喙部와 喙部가 여타의 部에 대하여 점하는 비율이 냉수비에서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두 비에 나타난 部 소속인들의 이러한 구성상에서 볼 때, 6세기 초 단계에 있어서 沙喙部와 喙部는 이미 여타의 4部를 압도하는 2大 部로 부상해 있었으며, 이러한 2대 部의 압도적 추세는 더욱 고조되어 가고 있었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6세기 중후반의 금석문상에 나타난 인물들의 소속부 별 구성에서도 이러한 추세는 이어져서, 沙喙部와 喙部 소속인들이 더욱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을 주목하여 중고기 部의 세력관계를 ?2部體制?로 이해하려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대표자회의?에 대한 각 部의 참석 인원수가 이처럼 현격하게 차이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그간 각 部 세력집단 간의 정치적 우열의 격차가 漸增되어 온 결과였을 것이다. 즉 部 사이의 세력 차이가 심화되어 감에 따라, 정치체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部는 ?부대표자회의?에 상대적으로 많은 인원의 대표자를 파견할 수 있었고, 극히 미약한 部의 경우는 단 한 명의 대표자조차 파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대표자회의?에 적격자를 파견하는 것이 6부의 의무이자 권리로 인식되던 이전 단계의 관행과 이를 비교해 볼 때, '부대표자회의'의 성격 자체가 크게 바뀌어졌음을 알 수 있겠다. 즉 6세기 초의 단계에서는 각 부가 ?부대표자회의?에 대표자를 파견하는 것이 더 이상 部의 의무는 아니었고, 部의 세력 판도에 의해 파견자 수가 배정되는 '권리'로서의 의미만이 남게 된 셈이다. 이는 곧 각 部間에,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도 차이가 크게 벌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되겠다. 다만 봉평비에서 ?新羅六部?의 이름으로 사안이 논의되고 집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 관념상으로는 아직까지 ?부대표자회의?가 6부 전체의 대표자회의로 인식되는 면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어디까지나 의례적이고 명목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법흥왕대를 거치면서 이미 정치적 환경이 크게 변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그간 정비되어온 관등제는 법흥왕대에 반포된 율령에 의해 17등제로 법제화되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각 部의 部長들도 이러한 17등 관등체계 내에 편제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부대표자회의?의 주재자로서의 上大等이 제도적으로 정해짐에 따라 자연히 회의도 상설·정례화되고 제도화되었을 것이다. 이는, 국가의 중대 사안이 있을 때 마다 수시로 국왕이 의뢰한 인물이 ?부대표자회의?를 주재했던 초기 단계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크게 일신되어 있는 모습인 것이다.

이에 따라 ?부대표자회의?의 구성원의 성격도 달라지게 되었을 것이다. 즉 6부 간의 세력 격차가 크게 벌어져, 실제 회의는 喙部와 沙喙部 소속 인물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갔으므로, 그 구성원의 6부에 대한 대표성은 크게 손상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율령 반포와 상대등 설치 이후에는 더욱 심화되어, 여타의 부 출신자들의 회의 참여자가 全無하게 되는 경우는 더욱 일반화되어 갔을 것이다. 이런 추세에 따라 회의의 구성원들은 약화된 상태로 나마 소속부의 규제를 일정하게 받으면서도, 점차 가문 단위의 家勢에 의존하는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되고 국가적 신분제에 편제되는 ?貴族?的 성격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상대등 설치 이후에 있어서 회의의 구성원이었을 ?大等?들은 이러한 성격을 지닌 존재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등?들로 구성된 회의를 ?部代表者會議?이라 부르기는 어색하다 할 것이며, 그렇다고 이들이 部 단위에 대한 대표성이 완전 소멸하지 않은 상태에 있으므로 ?貴族會議?라 부르기도 무리가 있으리라 보며, 그 중간적 의미로서의 ?大等會議?라 부르고자 한다.

진흥왕 대에 세워진 4大 巡狩碑는 이러한 변화 과정을 겪은 이후의 단계를 반영하는 大等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전해주고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昌寧碑에서는 비문의 마모가 심한 관계로 ?大等?의 명칭을 직접 찾을 수는 없고, 다만 大等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20명 남짓 있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들 모두가 ?大等會議?의 구성원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며, 대개는 ?대등회의?의 구성원이 6∼7명 정도로 구성되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 같다. 즉 그 7년 후에 세워지는 세 巡狩碑에서는 대개 7명 정도의 大等이 확인되고 있다. 이중 가장 마모가 적은 磨雲嶺碑에 나타난 大等들의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표 2〉 마운령비에 나타난 ?大等?

+----------------+------------------+------------------+------------------+

| 職 名 | 部 名 | 人 名 | 官 等 名 |

+----------------+------------------+------------------+------------------+

| 大 等 | 喙 部 | 居칠夫智 | 伊 干 |

| | | 內 夫 智 | 伊 干 |

| | 沙 喙 部 | 무 力 智 | 잡 干 |

| | 喙 部 | 服 冬 智 | 大 阿 干 |

| | | 比知夫智 | 及 干 |

| | | 未 智 | 大 奈 末 |

| | | 及이夫智 | 奈 末 |

+----------------+------------------+------------------+------------------+

여기에 7명의 대등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은 냉수비와 봉평비에 나타나 있는 ?직명 미표기 인물?(〈표 1〉 참조), 즉 '부대표자회의'의 구성원에 상당하는 인물들로서, ?大等會議?의 실제적 구성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구성원들의 部別 구성 비율을 보면, 喙部가 6명이고 沙喙部는 1명으로 나타나 있다. 지증왕대의 냉수비에 나타난 ?部 대표자회의?의 구성원이 沙喙部가 喙部 보다 1명 많은 것으로 되어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그간 喙部勢의 약진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大等들이 국왕의 지방 巡狩에 隨駕하는 존재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들은 소속부의 대표자 및 가문의 대표자로서의 2중적 성격과 함께 국왕의 臣僚的 성격이라는 또 하나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진흥왕 단계에 있어서 ?大等會議?의 주재자인 상대등은 누구였을까? 《三國史記》에는 진흥왕대의 상대등에 대한 기록이 누락되어 있어서 알 수 없다. 그런데 위의 〈표 2〉에 나온 大等 중 최선두에 기재되어 있는 居柒夫智가 당시의 상대등이었으리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三國史記》에서 거칠부는 眞智王 元年에 가서야 상대등의 지위에 오른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그 가능성은 적다고 하겠다. 최선두에 기재되어 있는 거칠부지가 上大等이 아니라면, 기재 순서상 그 다음에 기재된 인물들을 상대등으로 보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上大等은 국왕의 隨駕人들 중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는데, 이처럼 상대등이 국왕을 순수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는 혹 ?大等會議?의 주재자로서의 上大等이 왕에 대하여 독자적 지위 가지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眞平王代의 사정을 전하는 다음의 자료는 上大等의 이러한 지위와 성격을 살피는데 시사를 받을 수 있다.

조정의 花主가 이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益宣을 잡아다가 그 더럽고 추잡한 것을 씻어 주려고 하니 익선이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그 長子를 잡아 갔다. 그 때는 한 겨울의 몹씨 추운 날이었으므로 성안의 못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이내 얼어죽었다. 大王이 이를 듣고 牟梁里 사람들 중 관직에 있는 자는 모두 ?아 보내어 다시는 公署에 관계하지 못하게 하고, 승려가 되지 못하게 하였으며 승려가 된 사람일지라도 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益宣이란 자의 ?垢醜?한 행위에 대하여 花主와 大王의 처벌 조치를 전하는 것이다. 즉 모량부의 幢典인 益宣 阿干이 竹旨郞의 낭도인 得烏를 富山城의 倉直으로 차출하여 자신의 밭에서 赴役케 했는데, 죽지랑이 찾아가 잠시 휴가를 내줄 것을 요청하였는 바, 익선이 이를 완강하게 거절하다가 租 30石과 騎馬 鞍具를 뇌물로 받고서야 비로소 허락해 주었다는 것이 그 행위의 전모이다. 그의 행위 중에서 公役에 차출한 득오를 자신의 밭에서 私役시킨 것이 문제가 된 것인지, 아니면 뇌물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된 것인지 혹은 두 가지가 모두 문제로 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윗 기사에 나타난 바와 같은 처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몇 가지 주목되는 바가 있다. 먼저 죄과에 비해 모량부인 전체에게 씌워진 그 처벌 내용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부에 소속한 한 개인의 잘못으로 部員 전체가 관직이나 승직에 나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잘 납득되지 않는 면이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바로 이러한 측면이야말로 당시 部의 단위체적 성격이 잔존해 있다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幢典 益宣은 그의 행위에 따라 部員 전체가 영향을 받을 수도 있는, 牟梁部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위치에서 그는 모량부 소속의 득오를 部 단위의 公役에 차출할 수 있었을 것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다음에 주목되는 바는 익선을 처벌하는 주체가 花主와 大王으로 이원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花主 측는 당사자를 잡아다가 연못에 그 ?垢醜?함을 씻어내는 의식을 행하도록 했던데 대하여, 대왕 측은 牟梁里(部)人의 관직자를 추방하여 다시는 公署에 들지 못하게 하고 또한 승려가 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花主의 성격이 문제이다. 이 사건이 죽지랑이라는 花郞의 낭도와 연관되어 있고 또 그 명칭상의 유사성도 있어, 이를 ?화랑의 통주자?로 이해하려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화랑의 낭도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을 경우엔 花主가 굳이 나설 바가 못되는 일이었겠다. 그러나 일개 화랑의 요청을 묵살하였다 하여 화랑의 통주자가 部의 대표자에 해당되는 자에 대하여 죽음에 이르는 가혹한 조치를 가하였다고 보는 것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이런 면에서 花主를 6部와 관련하여 살펴볼 여지는 없겠는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앞 장에서 인용한 바 있는 파사왕 대의 기사이다. 그 기사를 통해서, 관례를 무시하고 부적격자를 ?부대표자회의?에 파견한 漢祇部主의 행위에 대하여, 수로왕으로 부회된 당시 ?부대표자회의?의 주재자는 그 部主를 잡아죽이도록 조치했고, 국왕은 음즙벌국을 정벌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던 것을 살핀 바 있다. 여기에서 익선의 행위에 대하여 花主와 大王이 이원적으로 처벌한 것은, 파사왕대의 기사에서 部主의 행위에 대하여 ?부대표자회의? 주재자와 국왕이 이원적으로 대응 조치를 내린 것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다만 파사왕대의 기사에서는 ?부대표자회의? 주재자와 왕의 대응이 대립되는 듯한 면을 보여주고 있었음에 반해, 윗 기사에서는 花主와 대왕의 조치가 당사자에 대한 집요한 징벌과 부원 전체에 대한 연좌적 징벌로 나타나고 있어 양자의 조치가 공히 모량부에 대한 징벌에 모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가 된다.

이러한 양 자료 간의 차이는 시기적 간격에서 나타난 개별적 部勢의 약화 추세를 반영하는 바로 이해되거니와, 이 양 자료의 공통점을 비교하여 볼 때, 花主는 이전 단계의 6부를 통주하는 ?부대표자회의? 주재자의 계통을 잇는 존재였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국왕과는 다른 계통, 즉 部 세력집단의 계통에서 연유하는 권위를 지닌 자였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가 익선에게 가한 조치는, 6부 전체 차원의 공적 관행에 비추어 특정 部의 비리를 단죄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花主의 권위는 한기부주에 대한 조치를 내린 ?部 대표자회의?의 주재자의 권위와 비견되는 바라 할 것이며, 또한 국왕을 隨駕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 상대등의 독자적 권위와도 통할 바가 있다 할 것으로서, 이를 上大等 그 자체로 볼 수는 없을까 한다.

이와 같다면 상대등의 권위는 상당히 막강하였던 것을 알 수 있겠다. 따라서 상대등은 때로는 국왕의 권위와 갈등을 겪기도 하였을 것이고, 더나아가 국왕권에 도전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善德王 때의 上大等이었던 毗曇을 중심으로 일군의 세력이 明活山城에 집결하여 月城의 선덕왕 측에 위협을 가했던 것은 그 좋은 사례가 될 수 있겠다.

그러나 점차 上大等을 위시로 하여 部에 기반한 세력집단은 점차 失勢되는 추세로 떨어져 갔다. 진평왕대에 왕의 從弟인 龍樹를 內省私臣으로 삼아 大宮·梁宮·沙梁宮의 三宮을 兼掌케 했던 기록은, 곧 部의 세력기반에 대한 왕권의 통제권 강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기사에서 이러한 추세를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

왕의 시대에 閼川公·林宗公·述宗公·虎林公·廉長公·庾信公이 南山의 오지암에 모여 國事를 의논하였다. 이 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자리에 뛰어드니 여러 公들이 놀라 일어났으나 閼川公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담소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어쳐 죽였다. 閼川公의 완력이 이와 같았으므로 首席에 앉았으나 여러 公들은 모두 庾信의 위엄에 복종했다.

이는 眞德王代의 ?대등회의?의 장면을 전하는 것이라 하겠다. 당시의 상대등은 閼川公이었는데, 여기에서 그는 좌중에 뛰어든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은 대담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상대등으로서의 그의 권위가 전대 이래로 막강한 것이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뭇 大等들이 김유신의 위세에 눌려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실질적인 세력관계가 새로이 재편되어 가고 있었음을 아울러 느껴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가문 단위가 독자적인 세력 결집단위로 대두되는 등의 전반적 사회분화의 추세가 진행되어 가는 속에서 정치단위체로서의 部의 결집력이 약화되고, 급기야는 해체되어 감에 따라 나타난 정치체제의 재편 현상과 관계가 있으리라 여겨진다. 이제 신라사회의 이러한 사회분화의 추세를 姓氏制의 성립과 그 확대의 과정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4. 社會分化와 姓氏制

신라 姓氏制의 성립과 그 확대의 과정은 신라의 정치사회적 세력집단의 분화와 정치체제의 변화 추세를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에 중고기 정치체제의 변화과정을 살펴보기 위한 전제작업으로서 신라 성씨제의 문제를 검토해 두기로 한다.

신라의 姓氏에 관한 자료를 검토해 볼 때, 우리측 사서와 중국측 사서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고 있음이 우선 눈에 띤다. 중국측 사서에서 신라의 姓氏를 언급한 것은, 法興王에 대하여 ?姓募名秦?이라 하여 법흥왕의 姓을 ?募?라 칭한 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이 姓氏 용례는 그대로 믿기 어려운 면이 있다. 즉 중국측 기록 중에는 ?募秦?을 모두 名이라 본 경우도 있으며, 또한 당대의 사정을 반영하는 鳳坪碑나 川前里書石 등의 신라측 금석문 자료에서 역시 法興王을 ?牟卽智寐錦? 혹은 ?●卽知太王?이라고만 표기하고 있을 뿐, 그의 姓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즉 중국 사서에 나오는 ?募秦?은 ?牟卽智?나 ?●卽知?와의 音相似로 표현된 것으로서, 그 자체가 법흥왕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중국측 사서에서 募를 姓이라 하고 秦을 名이라 한 것은, 史官이 법흥왕의 이름을 중국적 姓名 관념에 의해 재해석하여, 구분·표기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처럼 중국측 사서에 법흥왕 단계에 이르기까지도 신라 성씨에 대한 믿을만한 용례가 보이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三國史記》·《三國遺事》 등 우리측 사서에는 朴·昔·金이라는 중국적 姓氏가 신라의 최초 시기부터 쓰이고 있다. 즉 赫居世는 朴氏의 시조로, 혁거세 39년에 신라에 들어와 신라의 제4대왕이 되는 脫解는 昔氏의 시조로, 그리고 탈해왕 때에 始林으로 誕降했다고 전해지는 閼智는 金氏의 시조로 각각 나오고 있으며, 이후 박·석·김의 三姓은 국왕 혹은 왕비의 성씨로 계속 쓰이고 있다.

중국측 사서와 우리측 사서 사이에 나타나는 신라의 성씨 사용 시기에 대한 이같은 현격한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먼저 우리측 사서의 기록을 허구로 볼 경우, 그 차이는 간단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측 사서에 나타난 성씨 용례를 어느정도 취하고자 한다면, 양 계통의 사서에 나타난 이러한 차이점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하게 된다.

우선 신라에 대한 중국의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있었을 신라 성씨가 중국측 사서에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들 수 있겠다. 실제 法興王代까지 신라와 중국 제국과의 교류는 지극히 저조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법흥왕 이전에 신라가 중국 제국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는, 내물왕 때에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아 符秦에 사신을 보낸 것과 법흥왕 때에 백제의 사신에 딸려 남조의 梁에 보낸 것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법흥왕 단계까지 신라의 중국에 대한 사신 파견은 주체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고구려나 백제의 사신을 수행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바, 그 당연한 결과로서 중국의 신라에 대한 정보가 극히 미미했으리라는 것은 이해될 수 있겠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당시 중국 제국에서는 신라에서 통용되고 있던 姓氏에 대해서도 무지했고, 결국 중국 사서에 이를 제대로 전하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법흥왕의 성명에 대한 중국 사서의 표기도 중국 사관의 무지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생각해 버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똑같은 이유 때문에 이같이 단정을 내리는 것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우리측 사서에서 신라 초기 이래 사용했다고 전하는 성씨는 중국의 성씨와 형태상 동일한 것인데, 중국과의 교류가 극히 미미하여 성씨의 사용 여부에 대해서조차 중국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신라에서, 이와 같은 중국적 성씨를 그 최초의 시기부터 수용하여 통용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웃한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도 당시 중국적 성씨제를 쓰지 않았으므로,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도입했을 리도 없겠다. 결국 우리측 사서에 나타난 법흥왕 때까지의 성씨 용례는 그대로는 믿기 어려운 면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진흥왕 대에 이르면, 중국 사서에 나타난 신라 성씨의 용례는 확실히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以新羅國王金眞興 爲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즉, 진흥왕을 ?金眞興?이라 하여 중국적 성씨의 용례로 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후의 중국 사서에서도 진흥왕 이후의 신라 왕들에 대하여 역시 중국적 성씨로 표기하고 있으며, 이러한 성씨 용례는 우리측 사서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전의 중국 사서에서 법흥왕의 성명을 표기했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이는 단연 일변된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신라가 중국적 성씨제를 도입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진흥왕 때부터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이 시기에는 신라가 대외적으로 중국 제국과의 주체적 교류를 본격화해 가고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중국 성씨제 수용을 위한 객관적 조건 역시 갖추어져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신라에서 중국적 성씨제가 진흥왕 어간, 즉 6세기 중반 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도입·성립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 시기 신라의 성씨제 도입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6세기 경 신라의 성씨 사용자의 범위가 극히 소수에 한정되고 있었다는 것이 주목될 수 있겠다. 6세기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異斯夫나 居柒夫 등의 경우, 《三國史記》 列傳에서 그들이 각각 ?苔宗?과 ?荒宗?이라는 漢化된 이름으로 별칭되기도 하였다 하고 또한 모두 金氏였다고 명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성씨를 칭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당대 자료인 금석문 상에는 異斯夫의 이름이 ?伊史夫智?로 표기되기도 하고 居柒夫의 이름이 ?居칠夫智?로 표기되기도 하는 등, 이름에 대한 한자 표기에서조차 엄밀성을 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대에는 ?苔宗?이나 ?荒宗? 등 한화된 이름을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며, 단지 토착적 이름을 한자의 音을 차용하여 표기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부?나 ?거칠부? 등류의 토착적 이름에 중국적 姓氏를 冠稱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6세기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이 두 사람이 姓氏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면, 당시엔 진골 신분층조차 성씨를 쓰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보아서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즉 진흥왕 단계에 있어 신라의 성씨는 국왕과 극히 일부에 국한된 왕족에 한해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국왕을 중심으로 극히 한정된 범위 내에서만 姓氏가 사용되고 있었던 것을 통해서 신라의 성씨제 성립이 지닌 의미를 추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신라 국왕의 대외적 권위를 강화시켜 주었다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즉 중국과의 관계에서 외교상 국왕의 격을 중국식으로 수식하고 대내적으로도 중국적 稱姓 방식을 따옴으로써 그 권위를 증대시킬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들 수 있는 것은 국왕의 父系的 계보의 확립을 구체화하는 의미도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신라 성씨제의 모태가 되었던 중국 성씨제와 비교해 보면 어느 정도 살펴지리라 생각된다.

중국의 姓氏制는 姓과 氏를 구별하여 사용하는 경향이 강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시대적 변화 과정속에서 살펴볼 때, 대체로 姓은 女子 혹은 女系를 칭하는 것이었고, 氏는 男子 혹은 男系를 칭하는 것이었는데, 秦代 이후에는 이것이 姓氏로 일체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진대 이후에도 중국의 姓과 氏는 성격상 구별될 수 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의하면 중국에 있어서 姓은 ?혈통?을 표시하는 칭호이고, 氏는 ?거주지? 등 개인적 특징을 표시하는 칭호라 할 수 있겠는데, 다만 姓이 氏를 포괄하여 일체화된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그렇다면 중국의 姓은 母系에 따르던 원초적 혈통의식이 父系 出自意識으로 전환된 형태로 재정립된 것이라 하겠고, 氏는 거주지 집단에 대한 지연적 소속의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정립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父系 출자원리를 위주로 한 신라의 姓氏制는, 우선 표기의 형태상으로는 중국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 내용과 원리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이 지적되고 있다. 즉 신라 성씨제의 경우 중국의 氏에 반영된 지연적 集團意識의 측면보다는 姓에 반영된 혈연적 出系意識만이 강조된 형태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그것이다. 결국 신라의 姓氏는 곧 부계 출자의식을 강조하는 중국의 姓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신라의 姓氏制가 지닌 이러한 특징은, 진흥왕 어간에 王家의 出自意識을 父系的 계보로써 확립하려는 의도에서 중국의 성씨제가 取捨된 형태로 수용된 데에서부터 연유하는 것으로 일단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첫 수용 시기의 성씨제는, 국왕의 父系 계보를 확정지음으로써 ?王家?의 범위를 구체화하고 그 권위를 제고시키는 정치적 기능을 행했을 것이다. 이는 상고기의 미추왕·내물왕 이래 추구되어 온 왕가의 父系 계보 확립의 시도가 일 단계의 제도적 결실을 맺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신라 성씨제가 父系的 出自意識을 반영하는 중국의 姓을 위주로 하여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원래부터 중국의 氏에 해당하는, 集團意識을 반영하는 체계는 없었던 것일까? 이와 유사한 원리를 가진 체계로서 필자는 ?部?를 들고 싶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상고기 이래 ?部?는 중앙의 정치체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단위체였다. 당시의 모든 왕경인들은 특정 部에 대한 강한 집단적 소속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部는 그만큼 이들의 정치사회적 지위를 규정하고 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국왕의 경우도 部의 이러한 규정에서 벗어나는 예외적인 존재는 못되었던 것이다.

집단적 소속의식을 대변하는 신라의 部가 가진 이러한 정치적 기능을 염두에 둘 때, 신라가 중국의 성씨제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集團意識을 반영하는 氏를 배제하고 出自意識을 반영하는 姓을 위주로 했던 것은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즉 王家의 萬歲一系的 父系系譜의 확립을 중국적 권위를 지닌 예의 姓氏制로써 제도화시킴으로써, 역대 국왕이 꾸준히 진척시켜 온 정치과정에서의 部의 영향력 배제라는 과제를 한 단계 정리했다는 정치적 의미를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7세기 경에 접어들면서, 국왕을 중심으로 극히 한정된 범위에서만 사용되던 姓氏가 귀족들 사이에도 일반화되어 갔다. 《三國史記》 列傳에 의거하여 중국적 姓氏를 관칭한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들어보면 金春秋·金庾信·金后稷 등을 열거할 수 있겠는데, 이들은 그들의 이름까지도 중국 역사상에 나오는 명망가의 이름을 본뜨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아, 이들의 姓氏 사용은 확실한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는 《日本書記》에 나와 있는 신라 사신에 대한 표기방식에서도 확인될 수 있는 바이다. 중국측 사서도 다음과 같이 이러한 성씨 사용의 확대 추세를 전하고 있다.

·國人多金朴兩姓 異姓不爲婚

·王姓金 貴人姓朴 民無氏有名

즉 이 시기에 이르면, 국왕과 貴人들의 稱姓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王姓?과 ?貴人姓?이 구분되고 있었고 民들은 아예 성씨를 쓰지 않았으며, 또한 異姓 간에는 혼인하지 않았다고 한 것 등으로 보아, 姓氏는 신분을 규정하는 出系的 지표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7세기 경에 이르러 성씨가 귀족에 일반적으로 보급되어 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측 사서에 나타나 있는 상고기의 성씨 용례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姓氏制가 확대·보급되는 7세기 이후의 어느 시기에 귀족 가문 별로 이전 시기의 父系 계보를 소급 정리한 것의 결과물로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상고기의 성씨 용례가 대체적으로 父系적 계보에 따라 정리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는 성씨제가 확대되는 7세기 이후의 관례에 따른 것이라 하겠으며, 따라서 신라의 姓氏制는 父系的 출자원리를 기본으로 한 것이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데 신라의 성씨제는 왕실이 시조 이래의 一系的 父系 계보를 확립하고 王家의 범위를 구체화하기 위한 정치적 필요성에서 도입·성립되었는데, 그 이후에 중앙의 지배층 가문에 확대되면서 각 가문별로 부계 계보를 소급·정리하는데 적용되는 사회제도로 정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적 신분으로서의 '귀족'은 더욱 구체적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을 것이다.

독자적 가문의 대두라는 전반적 사회분화의 추세가 중고기 이래 나타나고 있다는 견해는 이미 다양하게 제기되어 왔다. 이중 ?門客?의 존재를 확인한 盧泰敦의 연구는 貴族家門의 대두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바이다. 이에 의하면 귀족 가문에의 사적 의탁자라 할 門客의 존재는 중고 후반 경부터는 확인될 수 있다고 하면서, 그 예로서 金品釋(善德王代의 大耶州 軍主) 휘하에 있었다는 幕客의 직을 가진 舍知 黔日이란 자와 김유신 휘하의 인물로 확인되는 裂起·仇近·丕寧子 등을 들고 있다. 가문 단위의 무력적 기반이 되었을 이러한 문객의 존재가 7세기 경에 확인된다는 것은, 비슷한 시기에 성씨제가 확대·보급되고 있었다는 점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바이다. 즉 성씨제의 확대·보급으로 가문 단위의 父系 계보가 확립됨과 함께, 가문 단위가 독자적인 세력결집 단위로 부각되어 간 추세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문들 중에는 서로 간에 제휴하고 유교적 이념에 의해 국왕의 권위를 떠바치면서 部의 구속을 초월해가려는 부류도 나타나게 되었다. 김춘추 가문과 김유신 가문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이 두 가문은 유교적 존왕이념을 표방하면서 왕권의 절대적 권위를 지지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상대등을 위시로 하여 정치과정에서 部의 영향력을 유지해 가려는 보수세력을 타도해 갔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과정에 작용하는 부의 영향력은 약화되어 갈 수밖에 없었으니,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난(647년)이 진압되면서 部體制를 유지하려는 세력의 결집력이 결정적으로 궤멸되는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후 무열·문무왕대의 통일전쟁의 과정에서 보수세력에 대한 개별적 숙청이 뒤따랐고, 신문왕대에 김흠돌난이 진압되었으니, 이 단계에 이르면 6부는 이미 중앙의 행정구역으로 재편되어 있었으며 정치체제도 국왕 중심의 관료체제로 재편되어 있었다.

5. 맺음말

이상에서 국가적 중대 사안을 의결하던 會議體 및 그 구성원들의 성격변화와 姓氏制의 성립 및 확산의 과정을 통해서, 신라 중고기 部의 성격변화와 그에 따른 部體制 해체과정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를 다시 간략히 정리하기로 한다.

상고기에 신라국가는 각 부의 대표자로 구성되는 '部代表者會議'를 통해서 국가의 중요 사안에 대한 정치적 의사결정을 행하였다. '부대표자회의'의 발의는 국왕에 의해 이루어졌고, 회의의 주재는 사안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국왕이 의뢰하는 '年老多智識'한 인물에 의해서 행해졌다. '부대표자회의'는 상설적 회의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각 부는 이러한 '부대표자회의'에 적격한 대표자의 파견을 요청받았고, 회의에서 의결된 사항을 준수해야 할 의무를 져야했다. 만약 어느 부에서 '位卑者'를 파견하거나 의결된 사항을 어길 경우에는, 그 부는 그에 상응하는 징벌 조치를 국왕과 주재자로부터 이원적으로 받아야 했다. 당시의 정치과정은 국왕과 부의 公的 측면과 私的 측명이 교체되는 '통제와 자치'의 관계속에서 운영되었으며, 이러한 정치과정의 중심에 '부대표자회의'가 위치하고 있었다. 즉 '部體制'적 정치운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왕과 부의 '통제와 자치'의 관계 속에서 운영된 部體制는, 국왕권이 강화해가고 각 부 사이의 세력 격차가 벌어지면서 변화되어 갔다. 6세기 초 단계의 냉수비와 봉평비에 나타난 부에 관련한 기록에 이러한 변화의 일단이 엿보이고 있다. 먼저 '부대표자회의'의 구성원으로, 喙部와 沙喙部 출신의 대표자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여타의 부 출신자들은 1명이나 全無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주목된다. 이는, '부대표자회의'에 적격한 대표자를 참여시키는 것이 각 부의 권리이며 의무였던 기왕의 구도가 더이상 통용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대신 部勢에 따라 각 부의 '부대표자회의'에의 참여자가 배정되는 구도로 재편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치적 의사결정이 양대부인 喙部와 沙喙部에 의해서 장악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는 '부대표자회의'와 그에 참여하는 지배층의 성격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회의가 喙部와 沙喙部의 양대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므로, 그 구성원의 6부에 대한 대표성이 크게 손상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회의의 구성원은 점차 소속부의 규제 보다는 家勢에 의존하는 경향을 더 강하게 띠어가고 있었다. 가문 단위가 새로운 세력결집단위로 대두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소속부와 개별적인 家 단위의 勢力 정도에 따라 양면적으로 규정되게 되었고,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일원적인 위계체제로서의 官等制에 편제되어 '臣'的 성격도 가지게 되었다. 사회신분으로서의 '貴族'的 성격을 강하게 띠어 갔던 것이다. 이들은 '大等'이라 칭해지고 있었으니, 이들에 의해 구성되는 회의체도 전대의 '部代表者會議'와 구별하여 '大等會議'라 칭함이 좋을 것이다.

'대등회의'는, 법흥왕대에 上大等制가 마련되어 上大等이 회의의 고정적 주재자로 정해지면서 상설화되었을 것이다. 이는, 적격자의 참여가 각 부의 의무이면서 권리였던 전대의 '부대표자회의'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재편되어 있었던 것이다. 大等은 '대등회의'에의 참석을 통해서 정치적 의사결정을 행하는 신라 최고의 지배층이었다. 이러한 大等의 지위와 '大等會議'의 기능은 역시 법흥왕대에 반포된 율령에 의해서 법제적으로 규정되는 바가 되었을 것이다.

'대등회의'의 주재자인 상대등은 형식상으로는 여전히 국왕과 더불어 이원적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권위는 '六部'의 대표자라는 전대의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므로, 가문 단위가 중시되면서 部의 정치단위체가 해체되어 감에 따라, 그리고 최대의 가문으로 성장한 王家의 실질적인 권능이 강화되어 감에 따라, 그의 실질적인 권한은 위축되고 허구화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대등은 그의 위상이 위축되어 버린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왕과 이원적 구도를 형성하던 존재로서의 전대 이래의 위상에 대한 '관념'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실과 유리된 이러한 '관념'이 그를 점차 반동적 보수세력의 구심체로 화하게 하였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왕에 대한 도전을 시도하게 하였다. 그러나 선덕왕대에 상대등 비담이 시도한 도전이 좌절되면서 기왕의 관념적인 이원 구도마저도 결정적으로 깨지고 말았다. 이후의 정치과정은 部體制의 해체와 국왕 중심의 일원적 官僚體制의 정비로 나타나게 되었다.

부의 성격변화와 이에 따른 정치체제의 변화는 사회분화의 대추세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분화의 추세는 姓氏制의 성립과 확대과정에 잘 엿보인다. 신라의 성씨제는 진흥왕대에 王家에 한정되어 적용되는 제도로서 성립되었다. 이러한 성씨제는 신라 국왕의 대외적 권위를 강화시켜 줌과 함께, 왕실의 부계 계보를 시조에까지 소급하여 정리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기능하였다. 곧 왕가의 초월적 권위를 제도화하는 유력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7세기 중후반 경부터 성씨제가 지배층 일반에게 확대 적용되어 그들의 가문별 부계 계보를 정리하는 지표로 활용되면서 사회제도화되였다. 이는 王家 뿐 아니라 일반 지배층의 가문 단위가 독자적인 세력 결집단위로 크게 대두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력 결집단위로서 대두해간 가문 단위는 부체제를 떠바쳐온 정치단위체로서의 부 단위를 근저에서부터 해체시켜간 사회적 분화의 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