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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역사
제3장 고 려

제1절 후삼국시대의 청주지역

1. 신라의 멸망과 청주 지방세력의 성장

신라 말기는 한국사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기였다. 즉 고대사회가 무너지고 중세사회로의 변화과정에서, 전제왕권은 몰락하고 진골귀족을 비롯한 지배체제가 점차 해체되어 갔다. 특히 진성여왕 이후 신라 말기에 이르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은 증대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국가재정도 궁핍해 갔다. 따라서 왕실을 비롯한 지배 귀족들은 재정의 확보를 위하여 조세를 독촉하게 되었다.

한편 농민들은 흉년과 질병으로 고통받던 중에 조세의 독촉을 받게되자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 상주에서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반란을 일으킨 이래 죽주의 기훤(箕萱), 북원의 양길(梁吉), 경주 서부의 적과적(赤跨賊) 등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중에 견훤과 궁예는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고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여 신라와 정립하게 되었으므로 이를 후삼국이라 한다.

견훤은 본래 경상북도 가은현의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자개라는 사람이었는데 신라말기에 점차 지방민들을 모아 경제적, 군사적기반을 마련하였다. 가은현에서 상주로 이주한 아자개는 드디어 장군으로 불리우는 지방의 일대 세력가로 성장하였다. 그의 장남인 견훤은 신라의 중앙군으로 경주에 들어가 출세의 길을 열었다. 그는 서남해의 해군 장교로 나아갔는데 거기서 견훤은 자신의 세력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전라도 광주를 점령하고 이어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즉 그는 백제의 부흥을 표방하여 민심을 흡수하고자 하였다.

한편 궁예는 신라의 왕자 출신으로 정권쟁탈전의 희생으로 지방에 쫓겨나 승려로 성장하였다. 진성여왕대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나자 죽주적(竹州賊) 기훤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곧 북원적(北原賊) 양길의 부하가 되었으나, 양길을 타도하고 강원·경기·황해일대를 그의 세력안에 넣었다. 궁예는 철원·송악을 근거로 고구려의 부흥을 외치며 건국하였으나, 곧 국호를 마진(摩震), 태봉(泰封)으로 개칭하였다. 그는 자기의 부하였던 왕건에 의해 축출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 중앙귀족들은 정권 쟁탈전을 벌렸고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지방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게 하였다. 따라서 지방에서는 중앙정부의 간섭이나 통제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세력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들 지방세력들을 흔히 '호족'이라고 부른다.

호족세력의 성장은 우선 해외 무역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중앙의 공무역을 제치고 그들은 중국이나 일본을 상대로 대규모의 교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해외무역의 신장에 따라 신라인의 해외 거주지가 증대되었는데 산동반도나 강소성 연안에는 여러 곳에 신라방(新羅坊)이 생겨났다. 이들 신라인 거주지에는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기관이 설치되었다. 또 이들 거류민은 그곳에 사원을 세워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신라원(新羅院)이라 불렀다. 해상활동을 크게 벌였던 대표적인 인물은 청해진의 장보고였다. 그밖에도 강주(康州 : 지금의 경남 진주)의 왕봉규라든가, 송악(松岳 : 지금의 황해도 개성)의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과 같은 인물들이 유명하다. 지방세력이 대두하는 또 하나 중요한 요소로는 군진(軍鎭)세력이었다. 신라의 군진은 변경수비를 위하여 내륙지역에 설치되었으나 점차 해외무역의 보호와 해적의 방비를 위하여 해안의 요지에도 군진을 설치하였다. 이들 군진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청해진·당성진·혈구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지방세력들은 스스로 '성주'(城主) 또는 '장군'이라 칭하며 사병을 거느리게 되었고, 그 지방의 행정을 장악하고 조세와 노동력을 징수하기도 하였다. 성주들 중에는 지방으로 몰락해 내려간 중앙귀족 출신도 있었다. 또 중앙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자들이 중앙정치의 혼란을 틈타 그곳에 눌러 앉아 호족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오랫동안 지방에 토착해서 살던 촌주(村主) 출신도 있었다. 이렇게 성장한 호족들은 실질적으로 군현의 장관을 대신하는 지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후삼국시대의 청주지방에도 강력한 호족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주지방은 궁예의 후고구려와 견훤의 후백제가 대립하는 접경지역이었다. 따라서 이들 두 세력간의 세력확장을 위해서 청주일대에서 여러 차례 전투가 계속되었다. 특히 견훤과 궁예(후일의 왕건)는 중부일대의 호족세력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들이 치열한 영토전쟁을 벌이고 있을 당시 청주지방은 두 세력사이에서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대체적으로 볼때 청주지방의 호족세력들은 처음에는 궁예의 후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다가, 그 뒤를 이어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절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2. 궁예정권과 청주호족

청주는 신라말에서 고려초기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호족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후삼국의 건국세력들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특히 궁예와 왕건의 정권교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려초기 청주지방의 호족세력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역사학자들에 의해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신라말에서 고려초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청주의 지방세력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고, 특히 고려 건국 과정에서 청주세력의 역할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하는 점은 매우 흥미 있는 과제이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우려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면서 ?청주인호 일천(淸州人戶 一千)?을 옮겨 수도를 설비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궁예가 왜 하필이면 청주인 일천호를 철원으로 이주시켜 수도를 정비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크게 두가지 상반된 견해로 대립되어 있는 실정이다. 즉 그 하나는 청주인들이 궁예의 핵심세력으로서 후고구려 건국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는 반대로 청주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킨 이질적인 집단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견해이다. 따라서 후자의 견해에 따르면 청주세력은 궁예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가지 상반된 견해는 궁예가 청주인들을 철원에 옮긴 근본 동기를 이해하게 되면 자연히 해결될 수 있다. 즉 철원과 거리가 먼 청주에서 대규모의 인원을 이주시켜 도읍을 삼은 데는 궁예에게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지금까지 청주인을 옮긴 이유를 청주의 인호(人戶)가 많았기 때문이라든가, 소경(小京)의 문화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던 청주인들을 옮겨 왕도로서의 문화적 수준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왔으나, 이러한 주장은 별로 공감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유라면, 북원경(원주)이나 중원경(충주)이 청주보다 지리적으로 가깝고, 문화적 수준이나 인구도 청주 못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좀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궁예가 청주지방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궁예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청주가 그의 유년기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그것은 궁예의 초기 활동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궁예가 뜻을 세운 후 처음 찾아간 곳은 죽주의 기훤이었다. 그런데 죽주는 지금의 안성·음성일대로 청주의 북쪽에 인접해 있다. 그곳에서 궁예는 청주인 신훤(申萱) 등과 결탁하여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궁예가 몰래 자신의 세력을 모으고자 최초로 결탁한 인물이 바로 청주출신인 것이다. 궁예가 자신의 세력을 모으고자 처음으로 찾아간 곳이 청주와 인접한 곳이고 그곳에서 청주출신과 결탁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가 청주와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음으로, 궁예의 세력기반으로서 청주를 비롯한 중부일대의 역할이 주목된다.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기 이전부터, 그는 양길의 부하로 있으면서 주로 중부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즉 궁예는 청주를 비롯 지금의 음성·괴산 등지를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궁예정권하에서 궁예의 핵심측근으로 활약했던 청주인들이 많이 있었고, 특히 청주는 궁예세력의 온상과 같은 곳이었다. 궁예정권이 왕건에 의해 무너진 후 친궁예적인 청주의 지방세력들은 심한 반발을 보였다. 그것은 궁예와 청주지역이 특별한 관계라는 점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궁예가 철원으로 수도를 옮긴 것과 철원에 청주인들을 대거 이주시킨 것은 대체로 두가지 이유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황해도일대 호족세력들의 견제로부터 벗어나 왕권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과 일찍부터 관련을 맺고 있었던 청주인들을 옮김으로써 확고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청주시 / '97 / 체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