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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의 僧官制와 地方支配

姜 鳳 龍 (목포대)

1. 머리말

2. 中古期 金石文 자료에 나타난 宗敎專門家와 地方支配

3. 僧官制의 성립과 地方支配

4. 統一期의 僧官制 개편과 地方支配

5. 맺음말

1. 머리말

고대 지배이념의 큰 특징은 신성한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띤다는 점에 있다. 한국 고대의 지배이념 역시 마찬가지여서, 초기에는 天降神話를 바탕으로 한 神聖理念이 지배이념의 주요 골격을 이루고 있었고, 불교 수용 이후에는 이와 함께 王卽佛이나 轉輪聖王을 표방하는 불교의 신성이념이 추가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고대의 지배이념은 지방지배에도 적용되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간 신라 지방지배에 관한 연구는 다방면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축적해 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에 적용된 지배이념의 문제에 관해서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관련 자료가 극히 제약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큰 원인은 지배이념을 막연히 중앙의 범주에 한정되는 사안으로 간주했던 인식의 제약성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실제 그간 지방지배의 차원에서 지배이념의 문제를 살펴 보려는 시각 자체가 不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그간 신라 지방지배의 문제를 추구해 오던 중에, 이에 적용된 지배이념의 흔적을 찾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자료상의 한계와 사상사 분야에 대한 필자의 무지로 인해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을 미루어 왔다. 이제 새삼스레 본고를 발표하는 것은 충분한 준비가 되어서라기 보다는, 일단 이에 대한 필자의 淺見을 표명함으로써 타연구자들의 관심을 환기해 보려는 데 있다. 여러 연구자들의 질정을 기대한다.

2. 中古期 金石文 자료에 나타난 宗敎專門家와 地方支配

신라 중고기의 몇몇 금석문 자료에는 불교 수용 전후시기의 宗敎專門家와 지방지배의 관련성을 시사하는 구절이 눈에 띠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를 통해 당시 신라의 지방지배에 적용된 지배이념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불교 수용 이전에 신라의 지방지배에 적용되고 있던 신성이념의 흔적을 蔚珍鳳坪新羅碑(이하 鳳坪碑라 약칭함)의 다음 구절을 통해서 검토해 보기로 하자.

立石碑人인 喙部 소속의 博士가 이 때 교설하기를 ?이와 같은 자는 하늘에서 罪를 받으리라?고 하였다.

鳳坪碑는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4년전인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이다. 당시에 居伐牟羅를 중심으로 한 오늘의 울진지역에서 일종의 소요사태가 일어나자, 신라 중앙에서는 寐錦王[국왕] 이하 각 部 대표자들의 '共論'에 의거하여 '新羅六部?의 이름으로 敎를 내려 일정한 의식을 거행하게 한 뒤에 사태를 야기시킨 토착의 주동세력을 杖刑으로 다스리고, 마지막으로 그 내역을 새긴 비를 세우게 했으니, 봉평비가 그것이다. 봉평비의 후반부에 나오는 윗 구절은 비를 세움에 즈음하여 종교의식을 거행하면서 '立石碑人喙部博士'가 村主 이하 1,398명의 토착인을 앞에 두고 선언한 종교적 교설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獲罪?의 원천으로서 天을 지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 수용 이전에 천강신화를 바탕으로 한 신성이념이 당시의 지방민을 교화하고 지배하는데 적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때 교설을 행한 ?立石碑人喙部博士?는 종교적 立碑儀式을 집전한 종교전문가라 할 수 있겠는데, 그가 당시 寐錦王이 속한 喙部 소속인이었던 것으로 보아 매금왕 직속의 종교적 의례를 담당한 자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위의 교설은, 매금왕이 신성한 권위를 지닌 천강족이라는 관념을 강조하고, 이를 통해 지방민을 복종시키려는 의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면서 천강신화를 바탕으로 한 기왕의 신성이념은 불교에 반영된 신성이념으로 대체되었고, 종교전문가의 역할 역시 불교 승려가 대신하여 갔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眞興王巡狩碑에 보이는 ?沙門道人?이 이러한 역할을 담당한 승려의 부류로서 들 수 있겠다. 진흥왕 29년(568)에 북방의 변경지역에 세운 세 순수비 중 黃草嶺碑와 磨雲嶺碑에 의하면 그 전반부에는 이 지역의 ?民土?에 대한 적극적인 편제 의지를 밝힌 진흥왕의 교설이 세겨져 있고, 그 후반부에는 진흥왕을 隨駕한 인물들이 일일이 열거되어 있는데, 그 隨駕人들의 최선두에 다음과 같이 ?沙門道人? 두 사람을 기재해 놓았다.

于是隨駕沙門道人法藏慧忍

즉, 法藏과 慧忍이라는 法名을 가진 두 승려가 大等들 보다도 앞서 기재되고 있는데, 그 기재 순서로 보아 이들의 위치가 매우 중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은 수행하였을까?

진흥왕대에 세운 세 순수비는, 진흥왕 29년 당시에 있어서 고구려와의 협약에 의해 신라가 한강하류 지역과 동해안의 안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아, 진흥왕이 친히 巡狩하여 이 지역 일대의 民土에 대한 편제와 지배를 강화해 가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비문의 최선두에 열거된 두명의 '沙門道人'의 직능은, 이 지역의 民土를 신라 國界 내에 효과적으로 편제하기 위하여, 불교적 의식을 집전하여 지역민들을 교화하는데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지방을 편제하는데 있어서 불교의 신성이념에 의거하여 국왕의 권위를 홍포하는 임무를 수행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들은 이전의 봉평비에 나오는 ?立石碑人喙部博士?와 유사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세 순수비 중의 하나인 北漢山碑에는 '沙門道人'은 나오지 않고, 그 대신 다음과 같이 '石屈에 사는 道人'이 나오고 있어 주목된다.

見道人△居石窟△△△△刻石誌辭

진흥왕은 북한산 지역을 순수할 때에는 沙門道人이 국왕을 隨駕하지 않았던 대신에, 현지의 石窟道人을 친히 찾아보고 이 사실을 비문에 ?刻石誌辭?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흥왕이 석굴도인을 찾아본 것은 巡狩 중에 우연히 찾아 본 것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그를 禮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는데, 이는 결국 마운령비와 황초령비에서 沙門道人을 隨駕하게 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기대한 의도적 행동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찍이 북한산 지역 일대는 삼국문화의 교차지로서 문화수준이 남달리 높았을 터이므로 불교문화 역시 상당한 수준으로 보급되어 있었을 것이며, 또한 친고구려·친백제 세력 역시 무시못할 정도로 잔존해 있었을 가능성이 예상되는 바이다. 이런 면을 염두에 둘 때, 이러한 지역을 순수하여 지역민의 교화와 편제라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중앙에서 沙門道人을 隨駕人으로 대동하는 것 보다는 현지의 저명한 고승을 포섭하여 그를 통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진흥왕의 석굴도인 禮敬이야말로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 행하여진 것이었다고 볼 것이다.

현지 고승의 포섭을 통해서 그 지역민을 교화·편제한 사례는 居柒夫가 고구려 고승인 惠亮을 포섭하는 기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三國史記} 居柒夫傳에서 관련된 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가) 居柒夫는 少時에 사소한 일에 거리낌이 없고 뜻이 원대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사방을 유람하였는데, 문득 고구려를 염탐하고자 하여 그 지경에 들어갔다가 法師 惠亮이 강당을 열고 經을 강설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나아가 그의 講經을 들었다.

나) 12년 辛未에 왕이 居柒夫와 ..... 8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니,..... 居柒夫 등은 乘勝하여 竹嶺 이북 高峴 이내의 10郡을 취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惠亮法師가 무리를 이끌고 路上으로 나왔다....... 居柒夫가 혜량과 같이 돌아와서 왕에게 뵈니, 왕이 僧統으로 삼고 처음으로 百座講會와 八關의 法을 설하였다.

윗 기사는 거칠부가 처음에 승려의 신분으로 고구려 경계를 염탐하여 혜량과 교류하고[가 기사], 진흥왕 12년(551)에 다시 장수의 신분으로 고구려 경계에 진격하여 혜량을 포섭해온[나 기사] 과정을 전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惠亮은 고구려 변경지역, 구체적으로는 나) 기사에 나타나듯이 竹嶺과 高峴 일대에 머물러 있던 高僧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신라가 그를 포섭했던 것은, 진흥왕이 북한산 지역을 순수하면서 石窟道人을 禮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지 고승을 통해 신척경지역의 민들을 포섭·교화하고 이를 편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더나아가 진흥왕은 그를 僧官組織의 총수인 僧統으로 전격 발탁하였는데, 이는 고구려 출신 승려인 그를 통해서 僧官組織을 장악케 함으로써 국내의 귀족세력을 견제함과 함께, 새로이 척경한 옛 고구려 변방지역을 효과적으로 교화·편제한다는 양면적 의도가 작용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승관조직과 지방지배와의 관련성은 眞智王 3년(578)에 세워진 大邱戊戌塢作碑(塢作碑라 약칭함)에서 僧官인 都唯那 두 사람이 나오고 있는 것에서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 塢作碑에서는 塢의 축조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열거하는데 있어서, 都唯那 두 사람과 大工人 두 사람, 그리고 道尺 열두 사람을 순서대로 기재해 넣고 있다. 이는 築城 혹은 築塢의 대공사를 행함에 즈음하여 세우는 기념비에서 흔히 ① 왕경 파견인 ② 재지의 최고지배층, 그리고 ③ 일선에서 잡역부를 부리는 재지세력가 등의 순서로 참여 인사들을 기재하는 일반적 관행과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都唯那 두 사람은 왕경 파견인[남산신성비의 경우에는 邏頭와 道使]에 대응하여 기재된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실제 寶藏과 慧藏이라는 法名으로 표기되어 있는 이들은,

都唯那寶藏阿尺干都唯那慧藏阿尺干

라 하여 阿尺干이라는 경위를 가진 왕경인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본 築塢 공사에 있어서 이들 都唯那 두 사람이 수행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일찍이 이들에 대하여 僧職을 떠난 ?工事監督官?으로 파악한 견해가 제시된 이래 선진문화의 전달자로서의 기술적 기능을 담당한 존재로 이해하려는 것이 일반적이다. 築塢 공사의 기념비에서 왕경 파견인이 기재되는 위치에 기재되어 있다거나, 승려가 선진문물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당시의 추세로써 볼 때, 이러한 견해는 일견 타당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都唯那라는 僧職과 法名을 가진 승려 신분으로서의 이들이 邏頭나 道使 등의 俗職을 가진 왕경 파견인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감독자나 기능인으로서만 역할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都唯那의 성격을 불교와 관련하여 파악하려 한 견해들이 주목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香徒의 공동노동 기능과 연관하여 파악하려는 견해와 왕경 소재의 대사찰이 祿邑主로서 소유 祿邑의 생산력을 높일 목적으로 당 사찰 소속의 都唯那를 파견하여 築塢 공사를 주도했으리라는 관점에서 파악한 견해, 그리고 국가의 지방지배와 관련하여 승관인 도유나를 통해 불교이념을 홍포하려 했을 것으로 파악한 견해 등이 그것이다. 먼저 첫째의 견해는 6세기 후반 당시 지방사회에서 향도의 노동조직을 상정할 수 있을 정도로 불교신앙이 파급되어 있었을 것인가가 의문시되므로, 일단 취하기 어렵다고 본다. 둘째 견해의 경우, 사원의 녹읍지배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의 뒷받침이 미흡할 뿐만 아니라, 도유나라는 승관이 개별 사찰의 녹읍 생산력에 관여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세번째의 견해는 승관으로서의 도유나가 본 築塢工事에 즈음하여 불교적 의식절차를 집전함으로써 종교적 측면에서 신라국가의 지방지배에 일정하게 기능했으리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필자는 당시 주로 왕경에만 존재했던 興輪寺·永興寺·皇龍寺 등의 대사찰들이 국가와 왕실의 권위를 뒷받침하고 지배이념을 제공해 주는 성격이 강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道唯那의 역할이 국왕을 隨駕했던 沙門道人의 그것과 비슷한 면이 있었을 것으로 보아, 도유나의 종교적 기능이 지방에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자 한다. 오작비에 나오는 都唯那의 이러한 면모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都唯那를 포함하는 당시 僧官制 전반의 성격을 좀더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3. 僧官制의 성립과 地方支配

신라 僧官制에 대한 기사는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전해지고 있는데, 遺事의 기사는 몇몇 錯亂된 부분이 있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고, 史記의 기사가 상대적으로 당시의 사정을 비교적 정확히 전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도 주로 史記 측 기사를 중심으로 검토해 보기로 한다.

가) 政官(혹은 政法典이라고도 함)은 처음에 大舍 1인, 史 2인으로써 司를 삼았었는데, 元聖王 元年에 이르러 처음으로 僧官을 두고 승려 중에서 재주와 행실이 있는 자를 뽑아 충당하였는데, 緣故가 있으면 교체하되 임기는 없었다.

나) 國統(寺主라고도 한다)은 1인으로 眞興王 12년에 고구려 惠亮法師를 寺主로 삼았다. 都唯那娘은 1인으로 阿尼였다. 大都唯那는 1인으로 진흥왕이 처음 寶良法師를 이에 삼았는데, 眞德王 元年에 1인을 더하였다. 大書省은 1인으로 眞興王이 安藏法師를 이에 삼았는데, 眞德王 元年에 1인을 더하였다. 少年書省은 2인으로 元聖王 3년에 惠英·梵如의 두 法師를 이에 삼았다.

라) 州統은 9인이고 郡統은 18인이었다.

윗 기사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인용한 것인데, 이들은 각각 僧政機構와 中央僧官, 그리고 地方僧官에 해당한다. 이에 따르면 신라 僧官制는 크게 眞興王代와 眞德王代, 그리고 元聖王代의 세 차례에 걸쳐 정비되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중 가) 부분에 전하는 僧政機構는 대개 眞德王代에 시원적 형태가 갖추어진 이후 元聖王代에 이르러 완비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다) 부분에 전하는 州統·郡統 등의 地方僧官은 중대 9州制의 성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므로, 중고기 僧官制의 특징적 면모는 결국 나) 부분에 전하는 中央僧官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다.

中央僧官 중에서 진흥왕대에 설치된 것으로는 寺主라고도 칭해지던 國統과 大都唯那, 그리고 大書省 등을 일단 들 수 있겠다. 또한 阿尼가 취임해 있었다는 都唯那娘의 경우는 그 初置한 시기가 밝혀져 있지 않아서 확실히 알 수 없는 바이나, 이 역시 진흥왕대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신라의 승관제는 선행하여 성립한 인도나 중국의 승관제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겠지만, 그 구체적인 기능과 성격에서는 다른 면도 상당히 있었을 것이다. 일찍이 인도에서 발생한 僧官制는 관직적 성격의 것이 아니라 불교계 자체내에서 교단을 운영의 편의를 위해 설치한 불교계의 자치 기구였다. 그런데 이러한 승관제는 중국에 전해지면서 남북조시대에 불교를 통제하는 국가기구적 성격의 것으로 정비된다. 신라의 초기 승관제는 인도와 중국의 승관제와는 또 다른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승관제가 처음 성립되는 진흥왕대 전후의 시기에 왕실이 주도하여 세운 몇몇 대사찰만이 중앙에 한정하여 존재하고 있던 상태였으므로, 신라의 승관제를 인도와 같이 불교 교단의 자치적 운영기구로 보기도 어려울 것이고, 또한 중국과 같이 국가의 불교 통제기구로 간주하기도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윗 기사의 나) 부분에 나오는 진흥왕대 僧官職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國統의 경우를 보자. 국통은 寺主라고도 칭해졌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특정 사찰의 寺主를 겸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국통을 처음 둔 진흥왕 12년(551)에는 興輪寺와 永興寺의 2개 사찰밖에 없었고 이중 영흥사는 尼寺였으므로, 당시의 국통은 興輪寺의 寺主를 겸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최초의 寺主로 임명된 惠亮法師를 僧統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최초의 시기에는 국통 대신에 승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國統이란 칭호는 불교가 지방에 확산되어 지방 사찰[外寺]이 건립되면서, 불교에 대한 국가적 통제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중고말∼중대초에 州統·郡統과 더불어 칭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음에 都唯那娘의 문제이다. 도유나랑은 여성에게 부여된 승관직이었다는 점에서 타국가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것이라 할 수 있겠는데, 윗 기사에 의하면 阿尼라는 자가 도유나랑에 취임해 있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도유나랑에 대한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阿尼의 성격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阿尼를 인명으로 볼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겠다. 이 경우 기록상에 나타나는 阿尼라는 인명은 {三國遺事}에 나오는 脫解王妃와 眞德王母의 두 경우가 전부이므로, 阿尼는 眞德王母를 지칭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유나랑이라는 승관직은 진흥왕대보다 늦은 시기에 설치되었던 셈이 된다. 그런데 {三國史記}에는 脫解王妃와 眞德王母의 이름이 각각 阿孝夫人과 月明夫人으로 되어 있어, {三國遺事}에서 阿尼라 한 것과 다르다. 이중 脫解王妃의 경우는 阿尼와 비슷한 음인 阿孝로 되어 있으므로 이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眞德王母의 경우는 판이한 月明夫人으로 되어 있어 그렇게 보기도 힘들다. 이런 점에서 阿尼를 고유의 인명으로 보기보다는 일정한 지위에 있는 여성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몇가지 측면에서 이러한 추측을 점검해 보기로 하자. 먼저 윗 기사에서 '阿尼를 都唯那娘으로 삼았다'는 식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쓰지 않고, 이례적으로 ?都唯那娘一人阿尼?이라고만 쓰고 있어서, 阿尼가 특정인물을 지칭하는 고유 인명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을 갖게 한다. 실제 遺事와 史記의 기록을 살펴보면 阿尼와 유사한 여성이름으로서 阿老·阿婁·阿留 등이 다수 찾아지고 있고, 이러한 등류의 이름이 대체로 王母나 王妃, 혹은 王妹 등에게 붙여지고 있으며, 이들이 주로 종교적인 聖母로 인식되는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일반적으로 ?阿?의 칭호가 관칭된 명칭은 王母·王妃·王妹로서 종교적 의식의 주재자적 위치에 있는 여성을 존칭하던 보통명사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로서 다음의 기사를 살펴보자.

가) 南解次次雄···(중략)···妃는 雲帝夫人이다(혹은 阿婁夫人이라고도 한다).

나) 南解居西干은 次次雄이라고도 불렸다.···(중략)··· 妃는 雲帝夫人이다(혹은 雲梯라고도 쓴다. 지금 영일현 서쪽에 雲梯山聖母가 있는데 가뭄에 빌면 감응이 있다).

이에 의하면 남해왕비는 이름이 雲帝(혹은 雲梯)였는데 阿婁라고도 불렸으며, 후에 雲梯山聖母로 숭배되었다고 한다. 이는 후에 聖母로 인식되기도 한 남해왕의 왕비가 본 이름과는 별도로 阿婁라는 칭호로 불렸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 ?阿? 계통의 칭호가 붙여진 여성이 종교적 의식과 관련을 가지는 사례가 몇몇 눈에 띤다. 그 현저한 예로서는,

2대 南解王 3년 봄에 처음 始祖赫居世廟를 세워 四時로 제사를 드렸는데, 親妹인 阿老로 하여금 이 제사를 주관케 하였다.

는 기사를 들 수 있겠는데, 제사를 주관하는 남해왕의 王妹를 阿老라 칭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赫居世妃인 閼英(娥英 혹은 娥伊英)을 西述聖母의 발현으로 인식했던 것도 이런 유의 예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장황한 설명이었지만 이와 같이 阿老·阿婁·阿留·娥英 등의 칭호를 제사를 관장하는 신성한 여성에 대한 존칭으로 볼 수 있다면, 都唯那娘에 취임해 있었다는 阿尼 역시 특정인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불교 공인 이후 불교의식의 일부를 관장하는 신성한 여성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阿尼에 해당될 수 있는 여성으로서는 어떠한 인물을 들 수 있을까? 다음의 자료에 타나나는 두 여성을 우선 염두에 둘 수 있겠다.

가) 처음 役事를 일으켰던 乙卯年에 王妃도 또한 永興寺를 세우고 史氏의 유풍을 사모하여 (法興)王과 같이 머리를 깎고 尼가 되어 法名을 妙法이라고 하고는 永興寺에 住하더니 몇해만에 세상을 떠났다.

나) (眞興)王妃도 또한 이를 본받아 尼가 되어 永興寺에 住하였는데 돌아감에 國人이 禮로써 장례지냈다.

가) 기사는 法興王妃가 興輪寺를 기공한 535년에 永興寺를 세우고 尼가 되어 永興寺에 住했던 사실을, 나) 기사는 眞興王妃가 尼가되어 永興寺에 住한 사실을 각각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 法興王妃와 眞興王妃가 都唯那娘에 취임했다는 阿尼에 해당됨직한 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차례로 永興寺에 住하면서 불교의식의 일부를 관장하는 都唯那娘의 자리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불교 공인 이전 단계에 王母·王妃·王妹 등으로 하여금 전통적 종교의식을 주관하게 하고 이를 娥英·阿老·阿婁, 혹은 阿留라 칭했던 관례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여성 僧官職인 都唯那娘이 신라에만 존재했던 독특한 현상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寺主라 불리는 僧統은 興輪寺에 住하였고 都唯那娘인 阿尼는 尼寺인 永興寺에 住하면서, 진흥왕 단계 僧官制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성 僧官職인 都唯那娘이 寺主의 바로 다음에, 大都唯那 보다도 앞에 기재되었던 것은 都唯那娘의 이러한 위치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都唯那娘의 설치 시기는 寺主(僧統)와 大都唯那, 그리고 大書省 등의 僧官을 두게 되는 眞興王代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마지막으로 大都唯那와 大書省을 살필 자례가 되었는데, 이들은 僧統을 보좌하면서 불교의 제반 의식과 사무를 분장하는 기능을 담당한 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사 중에는 보이지 않으나 大都唯那의 하부 승관으로서 都唯那도 다수 두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바, 塢作碑에 보이는 都唯那 두 사람이 이에 해당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실질적인 제반 의식과 사무는 僧統을 정점으로 하여 大都唯那와 都唯那의 계열과 大書省의 계열이 분담 처리하였을 것이며, 여성이 취임한 都唯那娘은 다분히 상징적인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진흥왕대의 승관제가 왕실 사찰이라 할 興輪寺와 永興寺를 주축으로 하여 운용되었다고 한다면, 그 기능은 좀더 분명해 질 수 있다. 즉, 眞興王代에 있어서의 승관제의 기능은, 불교세력을 통제하는데 있었다기보다는 왕실의 신성한 권위를 불교에 의해 수식하여 여타 지배세력을 초월하는 신성왕 이데올로기를 창출하는 데에 있었다고 볼 것이다. 이러한 당시의 승관 조직은, 대외팽창이 대대적으로 추진되던 당시에 전쟁과정에서 희생된 전몰장병의 명복을 비는 八關會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호국법회로서의 百座講會을 주관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극대화하는 한편, 신척경지역의 세력집단을 교화·편제하는 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면에서 塢作碑에 나오는 都唯那는 僧官組織을 구성하는 하위 僧官으로서 築塢工事에 즈음한 불교적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지방민을 교화하고 편제하는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처럼 승관조직의 구성원들이 불교 이념을 전파하면서 지방민에 대한 교화·복속을 유도했다고 한다면, 이는 인도 아쇼카왕이 法大官(Darma Mahamatra)을 변방지역에 파견하여 政法(Darma)의 전파를 통해 인민들을 교화·복속하게 했던 것과 비교되는 바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관련하여 僧官制 관련 기사가 武官條에 실려있다는 점이 주목될 수 있겠는데, 이는 僧官이 신라의 대외 전쟁시에 從軍하여 불교이념에 의해 신척경지역민들을 교화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진흥왕이 순수시에 沙門道人 두 사람을 隨駕케 했던 것이나, 石窟道人이라는 현지 고승을 禮敬했던 것, 더나아가 장군 居柒夫가 고구려 변경을 공략할 시에 그 지역의 고승인 惠亮을 포섭했던 것 등은 승려들이 대외경략의 과정에서 군사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청소년 무사집단으로서의 花郞徒가 승려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종종 나타나고 있는 것 역시 승려 및 그들이 소속한 승관제의 성격을 다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볼 것이다.

4. 통일기의 僧官制 개편과 地方支配

중고 말에 불교가 지방에까지 확산되고 지방사찰이 증설되는 등 불교의 교세가 크게 팽창되어 감에 따라 불교계에 대한 국가의 통제 필요성도 점차 증대되어 갔다. 이에 따라 기왕에 국왕의 신성한 권위를 뒷받침하고 지방민을 교화·편제하는 조직으로 활용되던 승관제 역시 이제 불교계를 통제하는 기능을 위주로 하는 기구로 개편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통일기의 僧官制 개편의 이러한 추세는 다음의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慈藏을 大國統으로 삼아 僧尼의 모든 규범을 僧統에게 위임하여 주관하게 하였다.···(分註 생략)···자장은 이런 좋은 기회를 만나 용감히 나아가 불교를 널리 홍포하는 한편, 僧尼의 5部로 하여금 각기 舊學을 더욱 늘리게 하고 반 개월마다 계율을 설법하며 겨울과 봄에는 모두 시험을 보여 持戒와 犯戒를 알게 하였으며 官員을 두어 이를 유지케 하였다. 또한 巡使를 파견하여 外寺를 차례로 점검하여 승려들의 과실을 경계 독려케 하고 불경과 불상을 정비케 하는 것을 恒式으로 삼았다.

이는 자장이 중국에서 돌아온 善德王 12년(643) 이후에 취해진 조치였다. 왕도에 한정하여 몇몇 대규모 사찰만이 존재하던 이전 단계에 비해 불교가 지방사회에까지 널리 보급되고 승려가 크게 증가하였으며 지방사찰인 外寺가 전국에 들어서게 되는 등의 변화된 환경 속에서, 자장이 최고의 僧官인 大國統의 위치에서 불교계를 본격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통제의 내용을 보면, 첫째 승려들에게 교학에 대한 학습을 권장하고 계율을 설법하고 시험을 통해 그 성과를 점검했다는 점과, 둘째 이러한 업무를 관장하는 관원을 두었다는 점, 그리고 세째 外寺에 巡使를 파견하여 승려들의 동향과 불사의 정비상태를 점검케 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 이중에서 특히 관원을 두었다는 것은 僧官制의 운영을 담당하는 僧政機構를 정비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僧官制는 眞德王 元年(647)에 大都唯那와 大書省을 각각 1인씩 증치함으로써 더욱 진전된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바로 이 즈음에 전국의 불교계를 통제하는 승정기구도 더욱 보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통일을 완료한 직후에는 신라 국가는 9州制에 따라 州統과 郡統으로 구성되는 지방 승관제를 정비하여 불교계에 대한 통제망을 확충하였다.

통일기에 불교세력은 더욱 비대해져 갔다. 국왕과 귀족들의 사찰에 대한 물자와 田土의 대규모 시납이 빈번히 행해졌으며, 불교가 대중화되어 감에 따라 민들의 소규모 寄進도 잇따랐을 뿐 아니라, 개별 사찰 단위로 고리대와 토지 매입 및 겸병 등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면서, 사원 경제가 비대해져 갔던 것이다. 이에 따라 국가권력과 사원세력 사이에 마찰의 소지가 전혀 없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 만큼 국가의 사원세력에 대한 통제도 조직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우선 국가는 사원의 경제기반이 무한정 팽창하는 것을 방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문무왕 4년(664)에,

國人이 마음대로 財貨와 田地를 佛寺에 寄施함을 금하였다.

고 한 것은 사원 경제의 무한정한 비대화를 통제하기 위한 국가적 통제 조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마음대로'('擅')라는 단서에 함축되어 있듯이, 사원에 대한 시납이 원천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며, 국가가 정한 바의 일정한 절차를 밟아 시납하는 경우는 허용되고 있었다고 해야겠다. 이점은 다음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마침내 乾符 6년(憲康王 5년;879)에 莊 12구와 田 500결을 시납하여 절에 속하게 하였다.···비록 나의 田이라 하나 王土에 居하고 있으므로, 처음 王孫인 韓粲 繼宗과 執事侍郞 金八元과 金咸熙에게 질의하여 正法大統인 釋 玄亮에게 미쳤더니,···이에 太傅에 추증된 獻(憲?)康大王이 이를 윤허해 주었다. 그 해 9월에 南川郡 僧統 訓弼로 하여금 別莊을 擇定하고 正場을 구획하도록 하였다.

이 기사에 의하면 879년에 智證大師가 자신 소유의 莊 12區와 田 500결을 賢溪山 安樂寺에 시납할 때에, 왕손 계종과 執事侍郞 김팔원 및 김함희에게 질의하고 다시 正法大統 현량의 검토를 거친 연후에 헌강왕의 윤허를 받게 되는 등의 절차를 밟고 있으며, 또한 시납된 田莊에 대한 사후 처리가 南川郡 僧統의 주관하에 이루어지고 있음이 나타나 있다. 이를 볼 때 당시 佛寺의 경제상태의 변동에 대한 국가의 파악과 통제는 상당히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개별 사찰이 토지와 재화의 변동사항에 대한 기록을 남겨 보관했던 사례가 보이고 있는 것 역시 국가가 이를 통제하기 위해 각 사찰로 하여금 자료를 비치토록 한 것에서 연유한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서 正法大統이란 僧官組織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僧政機構로서의 正法典의 우두머리라 할 것이고, 南川郡 僧統이란 남천군의 郡統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시납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이를 사후 처리하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띤다. 이는 中代 이후에 있어서의 僧官制의 일차적인 기능이 비대해진 내외의 불교계를 통제하는데 두어졌던 것임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잘 알려져 있듯이 중대 이후의 僧官制는, 國統을 정점으로 하여 中央僧官과 州郡縣制와 결부하여 각 州 단위별로 1인씩의 州統(9명)과 2인씩의 郡統(18명)으로 구성된 地方僧官이 상호 연결되는 전국적인 조직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승관제의 이러한 정비는 기본적으로 중고말에서 중대초에 걸쳐 불교가 내외에 크게 확산되어 감에 따른 국가적 불교 통제 필요성의 증대에서 결과한 것이겠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僧官組織은, 중고기 이래 僧官制가 수행한 기능의 연장선상에서 국가의 지방지배에도 일정하게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僧官制의 이러한 기능은 다음의 鐘銘을 통해서 유추될 수 있다.

가) 成典和上 惠門法師 △惠法師

上坐 則忠法師 都乃 法勝法師

鄕村主 三長及? 朱雀大乃末

作韓舍 寶淸軍師 龍牟軍師

史六 三忠舍知 行道舍知

成博士 安海哀大師 哀△大師

節州統 皇龍寺 覺明和上

나) 節縣令含梁萱榮△△△△△△

△△時道乃△△聖安法師△△

上村主三重沙干堯王△△△

第二村主沙干龍河△△△

第三村主乃干貴?△及干

大匠大奈末

먼저 가) 기사는 興德王 8년(833)에 菁州蓮池寺鐘을 주조하는 데 있어서, 이에 참여했던 인물들을 기록한 부분인데, 여기에 成典和上·上坐·道乃[都維那]·成博士·州統 등을 칭한 승려들과 鄕村主·作韓舍·史六 등을 칭한 재지세력층 등이 함께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州統인 覺明和上은 황룡사 소속의 승려로서 주종사업을 총지휘('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州統이 관계 승려들과 지방지배층을 대표하여 鑄鐘사업을 주도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곧 蓮池寺鐘을 주조하는 데에 있어서 이러한 승관조직을 통해서 국가가 조직적으로 관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 기사는 文聖王 18년(856)에 竅興寺鐘을 주조하는데 있어서 이에 참여했던 인물들을 기록한 부분이다. 여기에는 지방관인 縣令을 위시로 하여 道乃[도유나]를 칭한 승려, 村主層, 그리고 大匠의 직함을 가진 인물 등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들 증에서 縣令이 관계 승려와 토착지배층을 대표하여 竅興寺鐘의 주조사업을 총지휘('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當 주종사업이 현령의 주도하에 현 단위로 행해진 실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윗 기사들을 통해서 볼 때, 地方僧官이나 地方官이 주종사업을 주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겠거니와, 여기에 촌주 등의 재지세력층이 적극 참여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지방 佛事를 행할 때에, 이에 소요되는 노동력과 경제력을 결집하는데 동원되고 있던 재지 불교신앙단체로서의 香徒組織을 연상케 하여 주목되는 바이다. 신라 통일기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지방사회에는 지역별로 불교신앙단체로서의 香徒가 조직되어 불상이나 종·석탑·사찰 등을 조성하거나 法會布施·埋香 등의 佛事를 행하는데 대규모 노동력과 경제력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위의 연지사종과 규흥사종을 주조하는데 있어서도 香徒, 혹은 이와 유사한 지방의 불교신앙조직이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지방승관이나 지방관이 관계 승려들과 함께 지방지배층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었을 신앙조직을 활용하여 지방 佛事를 주도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신앙을 홍포하고 장려함을 통하여 지방사회를 교화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그런데 州의 경우에는 지방승관인 州統이, 그리고 縣의 경우에는 지방관인 縣令이 각각 불사를 주관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지방승관이 파견된 州·郡의 佛事는 지방승관이 주관했을 것이고, 지방승관이 파견되지 않은 郡·縣의 佛事는 지방관이 대신 주관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地方 佛事의 주관은 기본적으로 地方僧官의 고유 기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중대 이후의 승관제는, 비대해져 가는 전국의 불교계를 통제하는 기능을 주로 수행하는 한편으로, 지방의 주요 佛事를 주관함으로써 불교신앙을 매개로 하여 지방사회를 교화하고 통제하는 기능도 부차적으로나마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곧 중대 이후에도 불교는 국가의 지배이념으로서 지방지배에 어느 정도 적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5. 맺음말

이상에서 신라의 지방지배에 적용된 지배이념의 문제를 僧官制의 운영과 관련하여 정리하여 보았다. 논의한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중고기 금석문 자료를 통해서 지방지배에 적용된 지배이념과 이를 담당한 종교전문가의 사례를, 불교 수용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검토해 보았다. 불교 수용 이전의 사례로서는 봉평비에 나오는 '立石碑人喙部博士'를 주목해 보았는데, 그 결과 그는 국왕 직속의 종교적 의례를 담당한 종교전문가로서 지방민의 복속을 강요하는 종교적 의례를 집전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그가 獲罪의 원천으로서 天을 강조했던 것은 天降族으로서의 국왕의 신성한 권위를 홍포함으로써 지방민의 자발적 복속을 이끌어 내려 했을 것으로 이해했다. 불교 수용 이후에는 불교 승려가 지방민에게 불교에 바탕한 신성이념을 홍포하여 그들에 대한 교화와 복속을 유도하는 새로운 종교전문가로 대두하게 됨을 지적하고, 그 사례로서 진흥왕순수비에 나오는 '沙門道人'과 '石屈道人'을 주목하였다.

다음에 진흥왕대에 성립된 僧官制를 지방지배 이념의 홍포 기구로서 주목하였다. 僧統을 위시로 하여 都唯那娘·大都唯那·大書省 등 진흥왕대에 설치된 僧官職들을 검토함으로써, 승관제가 불교를 통해 국왕의 신성한 권위를 창출하고 이를 내외에 홍포하는 기구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승관의 기능은 인도 아쇼카왕대에 政法(Darma)의 전파를 통해 변방민들에 대한 교화와 복속을 유도했던 法大官(Darma Mahamatra)과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어서 통일기의 僧官制에 성격 변화가 일어남을 주목하고, 이를 지방지배의 문제와 결부하여 살펴보았다. 먼저 통일기의 승관제가 사원에 대한 정치·경제적 통제와 감시를 행하여 불교계를 견제하는 기구로 개편되었음을 지적하였다. 다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이념의 홍포를 통해 지방지배에 작용되던 이전 단계의 승관제의 기능도 부차적이나마 유지되고 있음을, 금석문 자료에 나타난 몇몇 사례를 통해서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