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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수 원 

1. 융 릉(隆陵)

소재지 :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안녕리.

지 정 : 사적 제206호.

조선시대 장조와 그의 비 경의왕후의 능. 장조는 1735년(영조 11) 창경궁에서 태어나 그 이듬해에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62년 창경궁 휘경전 앞뜰에서 죽었다. 영조 가 뒤에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뒤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세자(莊獻世子)라 하고 고종 때 장조로 추존되었다. 경의왕후는 영의정 홍봉한의 딸로서 1744년 세자빈에 간택되었다가 세자가 죽은 뒤 1762년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랐다. 1815년(순조 15) 80세로 창경궁에서 죽었는데, 1899년 의황후로 추존되었다.

융릉은 원래 경기도 양주군의 배봉산에 있던 것을 수원의 옛 도읍 뒤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여 조선시대 어느 원보다도 후하고 창의적인 象設을 하였다. 능상설은 병석(屛石)을 두르고 인석(引石)화뢰형(花 形)으로 하고 문무인석을 세웠다. 장명등은 전기의 8각 장명등과 숙종?영조년간에 등장한 4각장명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 세웠다. 석인도 예전에는 가슴까지 파묻혀 있던 목이 위로 나와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등 조각수법이 사실적이다. 이러한 것들은 19세기 능석물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2. 건 릉(健陵)

소재지 :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안녕리.

지 정 : 사적 제206호.

조선 제22대왕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능으로 1821년(순조 21)에 정하였다. 원래 생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현륭원 東岡에 있었던 것을 1821년 현 위치의 현륭원 西岡으로 이장하여 효의왕후를 부장하였다. 이 능은 정조와 왕후를 합부한 同陵異室이며, 屛石은 없이 난간만 두르고 그밖의 모든 것은 융릉의 예를 따랐다.

그래서 합부릉인데도 혼유석(魂遊石) 1좌만 놓았고 융릉과 같이 장명등(長明燈)을 세웠다. 문무석(文武石)은 조각이 사실적이며 안정감이 있는 수작으로, 19세기 陵石物制度의 새로운 표본을 제시하였다. 令 1인과 참봉 1인을 두었었다.

3. 용 주 사(龍珠寺)

소재지 : 경기도 화성군 태안면 송산리

용주사는 854년(문성왕 16)에 창건하여 952년(광종 3)에 소실된 葛陽寺의 옛터에 창건된 사찰이다. 1790년(정조 14)에 사일(獅馹)이 八道都化主가 되어 哲學 등과 함께 팔도 관민의 施錢 8만7천여냥을 거두어 갈양사 옛터에 145칸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절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에 명복을 빌어주는 陵寺로 지어졌다.

창건과 동시에 용주사는 전국 5규정소(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승풍을 규정하였다.

그뒤 1911년에는 31본산의 하나가 되어 수원·안성·남양·죽산·진위·음죽·용인·고양·시흥 등에 있는 48개 사찰을 관장하였다. 1955년에는 관응이 불교전문 강원을 개설하였고, 1966년 주지 희섭이 東國譯經院의 譯場을 두었으며, 1969년 전강이 中央禪院을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790년에 건립한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地藏殿· 十方七燈閣·범종각·法鼓閣·奉香閣·天保樓·那由他寮·만수리실(曼殊利室)·三門閣·일주문·水閣·東別堂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범종, 금동향로, 청동향로, 상량문, 어제봉불기복게수사본(御製奉佛祈福偈手寫本), 병풍, 대웅전 후불탱화, 동판·석판·목판의 佛說父母恩重經板 등이 있다. 그중 병풍은 팔폭병과 사폭병 둘이 있는데, 이것은 정조가 용주사를 資福寺로 창건한 뒤 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을 하사한 것이라고 전한다. 현제 용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이다.

4. 수 원 성(水原城)

소재지 : 경기도 수원시

지 정 : 사적 제3호

수원성의 축성 계획에는 조선 후기에 대두된 성곽의 방어 능력 향상을 위한
 
 
 
 
 
 
 
 
 
 
 
 
 
 
 
 
 
 
 
 
 
 
 
 
 
 
 
 
 
 
 
 
 

노력과 실학파 학자들의 실용성을 추구한 학문적 관심 그리고 이 모든 생각들을 집대성할 수 있었던 조선 후기의 대학자 정약용이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조선 후기성곽 건축의 꽃이 필 수 있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조선은 왜적의 침입에 무력하게 무너진 조선의 방어 체제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성곽의 방어 능력을 향상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임진란 중에 재상을 맡아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체험한 유성룡은 난이 끝난 후 {징비록}을 저술하여 전란중에 느꼈던 개선점 등을 적었는데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이 성곽에 관한 것들이었다.

즉 성곽에서 중요한 것은 치성과 옹성인데 당시 조선의 성들은 거의 이런 기능을 제대로 갖춘 성이 없다고 지적하고 치성과 옹성을 반드시 갖출 것을 역설하였다.

치성이란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격퇴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며, 옹성은 성문 앞에 둥글게 또는 네모지게 한 겹 더 성벽을 쌓아서 성문을 이중으로 지킬 수 있도록 한 시설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은 중국 고대에서부터 고안되어 활용되어 오던 것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특별한 곳 외에는 거의 만들지 않았었다. 그 밖에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성가퀴도 충분한 크기로 만드고 砲樓를 설치할 것도 제안하였다. 그리고 조중봉, 강항, 유형원 등도 중국과 일본 城制의 장점을 연구하여 조선의 성을 보다 견고히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여러 사람의 제안도 있었고 조정에서도 성곽을 강화할 필요를 느꼈다.

그 결과 18세기 경에는 몇몇 지방에 방어 시설을 갖춘 읍성들이 생겨났다. 이보다 앞서 17세기 후반에는 남한산성을 개축하였고, 강화의 성곽을 보수하면서 이전에 없었던 墩臺를 설치하였다. 돈대란 일종의 望樓인데 강화에는 섬 주위에 51개소의 돈대를 새로 설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성곽 보완 노력에는 북학파 실학자들의 주장도 받아들여졌다. 즉 박제가, 박지원 등이 제안한 건축 구조 개선책 중에서 벽돌로 성벽을 축조하는 방안이 일부 관리들의 주목을 끌어 벽돌에 의한 성곽 축조가 강화에서 실험적으로 시행되었다. 당시 강화 유수로 있던 김시혁은 자신이 중국에 다녀온 체험을 살려 1774년 강화의 외성을 벽돌로 축조한 것이다. 그 후 수원성을 쌓으면서 벽돌은 대대적으로 활용되었다.

수원성은 이와 같이 조선후기의 축성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함께 그에 따른 지방읍성 방어 시설의 구축에서 얻은 일련의 체험 그리고 벽돌의 사용 등이 큰 역할을 했다. 또 이와 함께 중국을 다녀온 실학파 학자들의 여러 가지 제안 그리고 강화 외성의 실험적인 벽돌 성벽 축조 기술 등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18세기말 정조의 강력한 축성 의지와 함께 실학파 학자의 중용으로 이제까지의 성곽과는 여러면에서 다른 면모를 갖춘 성곽으로 계획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계획된 수원성은 1792년, 정조 18년 정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2년반 후인 정조 20년 9월에 완성을 보았다. 정조는 이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뜻 깊은큰 일을 했다. 그것은 수원성의 공사 과정을 낱낱이 적은 일종의 공사 결과 보고서를 발간한 일이다. {華城城役儀軌}(화성성역의궤)라는 이 책자는 전체 640여 장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整理字라는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인쇄한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의 초고는 공사가 완료된 직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으나 방대한 분량탓으로 곧 발간되지 못하다가 공사 완료 5년 후인 1800년(순조 원년)에야 출간되었다.

{화성성역의궤}는 首卷 1권, 本卷 6권, 附編 3권 등 전체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대체적인 구성을 보면 수권에는 공사 일정과 감독관의 명단과 직위 그리고 건물 각 부분을 그림으로 설명한 圖說이 수록되어 있다. 본권 제1권에서 제4권 사이에는 공사를 진행하면서 오고간 각종 공문서와 왕의 명령, 어전 회의 기록, 상량문, 공장들의 명단과 그들에게 지급한 노임 규정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5권과 제6권에는 각 시설물별로 그것을 짓는 데 소요된 각종 자재의 명칭과 수량이 상세하게 기록되었으며 그 밖에 공사에 소요된 비용의 출납 내역이 자세하게 밝혀져있다. 부편은 수원성 안에 만들었던 왕의 임시 처소인 행궁 건설에 관한 기록을 모은 것으로, 역시 행궁 건설을 위해 오고간 공문서와 각 상량문 그리고 행궁내 각 건물별 소요 자재의 수량을 적어 놓았다. 이처럼 {화성성역의궤}에는 그 당시의 건설 공사와 관련된 참으로 장대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어 오늘날 우리에게 귀중한 내용들을 알려 주고 있다.

수원성은 전체 길이 약 5.4km의 돌로 쌓은 성벽과 이 성벽에 부수된 여러 가지형태의 방어 시설, 4개의 출입문으로 구성되어 있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앙에 행궁이 자리잡고 있다.

수원성이 위치한 지세는 서쪽에 팔달산이 있고 그 반대쪽인 동편에도 나지막한 구릉이 있으며, 이 동서 경사지 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개천이 흐르고 그 주위에 약간이 평지가 펼쳐진 곳이다. 이 동서의 구릉 사이 평지에 수원부의 시가지가 전개되고 있으며 시가지를 둘러싸면서 성벽이 팔달산의 정상으로부터 반대쪽 구릉의 정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성벽의 대부분은 경사지의 지형에 따라 불규칙하게 굽어지고 성벽의 높이도 일정하지 않다. 이러한 수원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자연지세를 이용하는 우리나라 성곽의 특징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수원성의 각 시설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1). 성 벽

성벽은 원칙적으로 돌로 쌓았지만 일부 방어 시설은 전돌로 쌓은 곳이 있다.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평균 5m 내외이다. 그리고 성벽 위에 높이 1내지 1.2m 정도의 여장을 쌓고 如墻에는 여러 개의 총구멍을 내었다.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돌을 쓰고 위로 올라가면서 배가 안으로 들어가는 형태로 쌓았다. 이것을 圭形이라 한다.

2). 성 문

수원성에는 동서남북 방향에 4개의 성문이 있으며 서울을 향한 북문이 長安門, 반대 방향의 남문이 八達門, 그리고 동서에 각각 蒼龍門과 華西門이 있다. 이 가운데 장안문과 팔달문은 거의 같은 규모, 같은 형태이고 수원성의 남북 대문 구실을 하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장안문은 돌로 높이 쌓은 사다리꼴의 陸築 가운데에 홍예문(아치형 문)을 내고육축 위에는 2층으로 된 장중한 누각을 세우고 앞쪽에 반원형의 옹성을 쌓았다.

옹성 아치의 상부에는 五星池라는 구멍이 다섯 개 뚫린 일종의 물탱크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적이 성문에 불을 질러 파괴하려고 할 때를 대비해서 만든 것으로 다른 성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장안문의 좌우에는 敵臺가 각각 하나씩 있는데 이것은 높은 위치에서 적을 공격할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다.

남향하여 서 있는 팔달문은 모든 규모나 형태가 장안문과 동일하다. 역시 반원형의 옹성이 있고 문 좌우에 적대가 설치되어 있다. 동문인 창룡문은 장안문에 비하여 문의 규모도 작고 형태도 간략한 편이다. 창룡문에도 옹성이 있는데 아치문이 정면에 설치되지 않고 서울 동대문처럼 왼쪽 모서리에 설치되어 있다. 화서문의 제도는 창룡문과 거의 비슷하며 다만 성벽의 일부가 휘어져 있는데 이것은 지형에 맞추어 쌓았기 때문이다.

3). 암 문(暗門)

성곽에는 흠히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는 출입구를 내어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양식 등을 나르도록 하는데 이것이 암문이다. 수원성에는 모두 다섯 곳에 암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곧 북암문, 동암문, 서암문, 서남 암문, 남암문이다.

북암문은 동북 각루 남쪽 약간 골짜기진 곳에 있어서 성 밖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암문에는 일반적으로 위에 건물을 세우지 않지만 서남 암문의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鋪舍라고 부르는 일종의 망루를 세웠다. 이 포사는 한 칸 사방의 규모로, 안에는 온돌방이 있으며 사면에 板門을 대고 그 문에는 짐승의 얼굴을 그려넣었다.

4) 수 문(水門)

수원성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개천이 성내를 관통하고 있어 수문을 설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성내에는 북수문과 남수문이 있다.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는 일곱 개의 아치형 수문이 있고 그 위에는 화홍문이라는 누각이 세워져 있다. 아치문 위로는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 이 주변은 넓은 바위 위로 맑은 물이 흐르며 일곱 개의 아치문이 열을 지어 있고 그 위에는 시원한 누각이 장대한 모습을 자랑하고, 저만치 언덕 위에는 독특한 외관을 갖춘 동북 각루 곧 방화수류정이 있으며 그 아래는 연못이 있다.

그래서 이곳은 수원성내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곳으로 칭송되는 곳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수문은 단지 아홉 개의 아치문을 내고 그 위에 통로를 만들고 전돌로 여장을 높이 쌓았다. 특히 여기에는 長鋪라는 긴 포를 설치하였는데 길이는 수문의 다리와 같고 폭은 다리의 3분의 2이다. 이 포 안에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많은 砲穴을 설치하여 이곳을 지킬 수 있도록 하였다. 수문 외에도 성내의 물을 조절하는 시설인 南隱溝와 북은구가 있다. 이 은구는 가는 물줄기를 설치하여 성내의 물을 빼내는 장치이다.

5) 장 대(將臺)

성 주변 사방을 조망하면서 장병들을 지휘하는 곳으로 서장대와 동장대가 있다.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어 성의 안팎이 모두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이다. 건물은 2층 지붕의 건물로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와 같이 하층을 개방하고 그 일부에 마루를 들였다. 뒤편에는 노대(弩臺)를 세웠는데 이곳은 쇠노를 쏘는 弩手가 머무는 곳이다. 동장대는 성의 동북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지형은 높지않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언덕의 등성이가 솟아 있는 곳이어서 동쪽 구릉인 일명선암산의 가장 중요한 곳이다. 동장대 부근에도 역시 노대를 두었는데 이 동북 노대는 치성 위에 전돌로 대를 높이 만들어 성벽 밖으로 돌출되어 있다.

6) 공 심 돈(空心墩)

돈은 일종의 망루와 같은 것으로 이미 남한산성과 강화도의 해안 주변에 설치한적이 있다. 그러나 공심돈, 곧 돈의 내부가 비도록 한 것은 아마도 수원성이 최초가 아닌가 생각된다.

수원성에는 서북 공심돈, 남공심돈, 동북 공심돈 등 모두 세 군데에 공심돈이설치되어 있다. 서북 공심돈은 화서문 북치 위에 있는데, 전돌로 네모지게 높이

쌓았다. 내부는 3층으로 꾸며 2층과 3층 부분은 마루를 깔고 사닥다리로 오르내리

게 하였다. 남공심돈은 남암문의 동치 위에 세워져 있다. 제도는 대체로 서북 공

심돈과 같고 규모가 약간 작다. 동북 공심돈은 큰 원통 모양으로 수원성에서 가장특이한 건물의 하나이다. 동장대 옆 동북 노대 서쪽에 위치하며 중국 요동 지방의 계평돈을 모방하여 전돌로 둥그렇게 돈대를 만들었다. 내부에 나선형의 계단을 설치하여서 일명 이 건물을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벽에는 여러 개의 총안이 있어 안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건물제일 아래쪽에는 온돌방을 들여 군사들이 숙직하도록 하였다.

7) 각 루(角樓)

비교적 높은 위치에 누각 모양의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는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 있는데, 이를 각루라 한다. 동북 각루, 서북 각루, 서남 각루, 동남 각루가 있다. 이 가운데 외관이 가장 빼어난 것이 동북 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이라고 부르는 이 건물은 그 형태가 불규칙하면서도 조화를 이루고주변 경관과 어울림이 뛰어난 건물로 조선시대 정자 건물의 높은 수준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북쪽 수문인 화홍문에서 동쪽으로 경사져 올라간 위치에 있다.

서북 각루는 화서문의 남쪽 산 위 휘어 굽은 곳에 있다. 서남 각루는 일명 화양루라고도 하는데, 성의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지고 높은 지점 경치 좋은 곳에 따로 우뚝 서 있다. 이 서남 각루가 위치한 곳은 이른바 용도라고 하여 양쪽으로 성가퀴를 쌓고 그 사이에 군량을 운반하기 위한 길을 좁고 길게 낸 곳으로 서남 암문의 밖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서남 각루는 바로 이 용도 끝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 건물은 방어의 요충을 견고히 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8). 포 루(砲樓)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치성과 유사하게 하면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 그 안에 화포를 감추어 두었다가 적을 공격하도록 만든 것이다. 모두 전돌을 쌓아 벽을 이루고, 위에는 작은 누각식의 건물을 올렸는데 수원성에는 서포루, 북서 포루, 동포루, 동북 포루, 남포루의 다섯 포루를 설치하였다.

9). 포 루( 樓)

이 포루는 화포를 정착한 것이 아니고 치성 위에 대를 만들고 그 위에 건물 세운 것을 가리키는데, 치성의 군사들은 가려 적이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세운 것이며 모두 다섯 군데에 설치하였다. 동북 포루는 각건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방화수류정 동쪽으로 지세가 갑자기 높아져서 용두를 굽어보는 곳에 위치하였다. 그밖에 서암문 남쪽에 서포루, 북서 포루 서쪽에 북포루, 창룡문 남쪽에 동 1포루, 봉돈 남쪽에 동 2포루가 있다.

10). 봉 돈(烽墩)

봉돈은 행궁을 지키고 성을 파수하며 주변을 정찰하여 인근에 사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시설로 다섯 개의 커다란 연기 구멍을 두어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한것이다. 성벽 일부를 치성처럼 밖으로 돌출시키고 아래는 돌로 쌓고 위는 전돌을 성벽보다 높이 쌓아 상부에 성가퀴를 두었다. 내부는 3층으로 만들어서 제일 높은 곳에 다섯 개의 화두를 설치하였다. 다섯 개의 화두 가운데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째 것만 사용하는데, 저녁마다 남족의 화두에서 횃불을 올리면 동쪽으로 용인석 성산의 陸烽에서 봉화로 응하고, 서쪽으로는 수원부의 홍천대에 있는 바다 봉화둑에서 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