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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의 정치상황과 수원성 
 
 

1. 조선후기 당쟁사 

2. 정조대의 정치상황 

3. 수원성의 축조 

나 선 하(93)

임진 병자의 양란 이후 조선후기 사회는 밖으로 명청교체로 말미암은 국제질서의 변화와 안으로 사회경제적인 급속한 변동 속에서 국가재건과 민생회복, 그리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이룩해야만 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앞장서서 이와 같은 시대변화의 추이와 상황전개 부응하는 현실론적 개혁을 선도해서 추진해야 할 정계는, 亂前의 東西黨論을 그대로 물려받아 보다 심각한 西南 내지 老少南, 老少 間의 당쟁에 휩싸이고 있었다. 이 당쟁은 양란 후 인조·효종·현종·숙종 때인 17세기에 해당된다. 뿐만 아니라 18세기를 맞이하면서도 老少로 좁혀진 당쟁은 老論一黨專制化와 그를 이은 時僻의 분립을 가져오는 경종·영조·정조 대에 이어진다.
 
 

1. 조선후기 당쟁사

18세기에 들어선 老少당쟁은 보다 격심한 양상을 연출하면서 老論전제화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쟁론은 景宗 및 英祖의 왕위계승과 관련된 忠逆義理論이었다. 그 기미는 이미 肅宗朝에 경종이 元子로 책봉될 때부터 발단되었다. 이때 老·少측은 원자가 南人系와 연관되는 장희빈의 소산인데다 신분도 譯官집안에서 나왔으므로 시기상조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정치적 재기에 고투하던 남인을 끌어들여 이를 반대하는 서인을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나아가 노론의 領袖인 宋時烈을 賜死시키고 노론가문의 仁顯王后까지 폐출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노론측은 인현왕후의 복위를 계기로 재집권하고 禧嬪 張氏를 끝내 賜死시키는 데 가담하고 세자에 대하여 냉담한 입장을 취하였다. 이에 반하여 소론측은 희빈 장씨의 소생이 일단 세자로 확정된 후에는 그의 보호에 최선을 다하였고 세자를 위하여 禧嬪 張氏가 인현왕후 謀害罪로 逆律로 몰리어 죽게 되는 것까지 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노론은 척신과 결탁하여 집권기반을 강화시켰기 때문에 경종이 즉위할 때까지 노론 정국이 유지되었다. 나아가 노론은 그들이 지지하는 경종의 異母弟인 延仍君을 경종 즉위 초에 서둘러 世弟로 책봉케 하고 곧이어 代理聽政의 단행을 기도하였다.

소론은 이를 빌미로 노론을 축출하고 소론집권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들은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등의 노론 4대신 이하 노론집권자들이 경종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것으로 간주하여 辛壬士禍를 일으켜 이들을 살육하고 소론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경종이 有疾無嗣하여 책봉된 연잉군의 世弟는 그대로 인정하고 말았다.

그후 경종이 4년만에 죽고 세제 英祖가 노론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즉위하여 정국은 다시 역전되고 말았다. 영조는 자기의 왕위 계승에 有功한 노론의 집권은 당연하지만 신임사화와 같은 살육의 보복은 막아야만 불안한 왕권의 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신임사화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던 緩少派 소론의 계열을 중심으로 蕩平策을 시행하며 당쟁의 폐해를 제거하려는 破朋論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임사화를 겪었던 노론은 이에 불만일 뿐 아니라 소론의 재둥장을 꺼려하여 老少破黨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나아가 노론은 소로이 경종과 관련되어 있었던 일체의 정치적인 명분을 반역으로 규정하고 그 대신 노론이 영조와 관련되어 있었던 모든 정치적인 명분을 忠義로 정립하여 소론은 의리론상 와전히 입지처를 상실하고 말았다. 따라서 조정에 남아 있던 소수의 소론은 물론 南人까지도 정치적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는 스스로 상소를 올려 지난 날의 잘못된 義理를 自訟하고 노론義理에 따라야만 했다.

노론의 일당전제로 변한 노소당쟁이 時僻의 대립으로 전환되는 시기는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 계기가 된 것이 '壬午之變' 이라는 思悼世子의 凶死사건이었다. 영조 말년에 14년간 대리청정을 맡았던 사도세자는 노론전제를 냉철히 비판하고 그를 부당하게 여겼던 것이다. 또한 겉으로는 노론집권의 義理를 인정하고 그들 전제정치에 순응하지만 그들과 정견을 달리하는 소론이나 그 밖의 반대세력은 사도세자의 정견을 옳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노론들로서는 큰 화근으로 여겨졌고 또한 사도세자를 장차 자기네 노론을 몰락시킬 수 있는 전제군주가 될 인물로 간주했던 것 같다. 여기에 영조는 자기의 왕위 계승이 노론의 의리와 명분론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정통성을 고수하기 위하여는 어쩔 수 없이 노론의 입장을 따라야만 했고 그 결과 노론의 전제정치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임오화변이란 28세의 사도세자가 父王인 영조에게 1762년(영조 38) 윤 5월 21일 창경궁 내 휘경궁 앞뜰에서 自盡을 강요당해 죽은 사도세자의 흉사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의 명을 받아 국정에 간여한 지 전후 10여년이 지난 뒤에 일어났고, 또한 죽던 시각에 '廢庶人'을 당해 哀乞求命의 간청도 묵살당한 前古에 보기 드문 정치적 참변이었다.

임오화변은 결국 소론·남인세력이 부왕 영조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사도세자를 앞세워 전제화된 노론정권의 전복을 꾀하다가 실패한 사건으로 보는 시각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어쨌든 노소당쟁은 이와 같은 임오화변과 정조 즉위를 전후하여 時僻의 대립으로 새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다.

2. 정조대의 정치상황

1777년 영조가 승하하자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정조(1752-1800)는 이른바 청류를 앞세우는 峻論 탕평정책을 통하여 기존의 노론 우위의 정국에 변화를 일으켜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즉, 정조는 영조의 調劑保合의 인재등용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계승하면서도 사대부의 의리와 명분을 중요시해온 청류들을 대폭 기용하는 차이를 보였다. 새 국왕으로서의 정조는 노론의 우위 여부를 문제삼는 기존의 척신당의 틈바구니에서 왕정체제확립의 한게를 직시하였고, 이리하여 그간 양척신당에 비판을 가해온 청류를 정계의 중심부로 대폭 끌어들여 이른바 준론탕평 또는 청류탕평을 펴게된 것이다. 淸流는 영조말에 淸流黨 또는 淸名黨을 이루어 척신당을 비판하던 노론계 인사들이 주축이었으나, 정조는 다른 당색도 배제하지 않은 가운데 규장각 및 抄啓文臣제도를 통하여 비노론계의 진출을 활성화시켜 갔다. 1788년(정조 12)에는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세력을 본격적으로 등용하여 노론과 남인의 보합을 도모하였고, 이에 호응한 영남 남인들이 1792년에 그간 노론의 우위 아래 금기되다시피 한 임오의리(임오화변) 문제를 제기하여 노론을 크게 당혹시키는 정세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노론 내부의 시파·벽파의 분열은 이러한 형세변화를 배경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청류 가운데서도 노론의 우위를 고수하고자 하는 부류가 벽파를 이루었고 정조의 정치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를 형성하여 종래의 사색당파 중심의 당쟁을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정조는 즉위하자 곧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규장각을 文衡의 상징적 존재로 삼아 각종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그는 학문적으로도 六經 중심의 남인학파와 친밀하였을 뿐 아니라, 禮論에 있어서도 '王者禮不同士庶' 를 주장하여 왕권 우위의 보수적 사고를 지니고 있는 남인하파 내지 남인정권과 밀착될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제학파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학풍을 특색있게 장려하여 文運을 진작시켜 나가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문화의 저변확산을 꾀하여 中人이하 계층의 委巷문학도 적극 지원하였다.

1762년 임오지변으로 조세한 영조의 맏아들 孝章世子의 후사로 되어 있던 정조는 자기가 왕위에 오르자, 비운에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예우문제를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외조부 홍봉한이 노론 세도가로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되었지만, 홀로 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생각하여 사면하여야 하는 갈등을 겪었고, 또 아버지를 장헌세자로 추증하였다가 뒤에 다시 莊祖로 추존하는 노력을 치렀다. 그러면서 양주 배봉산에 있던 묘를 수원 화산 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이라 하였다가 다시 융릉으로 올렸다.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 성곽의 꽃이라 할 수원성이 축조되었는데, 수원성의 축성동기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3. 수원성의 축성

수원성의 축성은 흔히 정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의 발로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한 읍을 옮기고 거기에 국력을 들여 새로운 모습의 성곽을 축조한 大役事의 동기를 단순히 효심의 발로에만 두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한데, 거기에는 새로운 도시의 건설이라는 문제에 얽힌 당시의 정치적인 배경이 크게 작용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곧 수원성은 기존의 수원읍을 새로운 장소로 옮기고 나서 이 읍을 보호하는 성곽으로 축조된 것이다. 이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화산은 당시 수원읍의 主山으로 거기에 세자의 무덤을 쓰려면 기존의 읍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에 정조가 1789년 7월 수원읍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명하자 새 읍은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결정되고 그 해 신읍의 조성이 마무리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정조 17년정월에는 새로운 읍을 華城이라 명명하고, 읍을 留守府로 승격시켜 초대 유수에 10년간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낸 당대 제일의 재상 채제공을 임명하였다.

한편 신읍이 이루어진 이듬해인 정조 14년 6월, 신읍에 성곽을 축조하는 문제가 건의되었으나 미처 실천에 옮기지 못하다가 정조 17년 12월에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 이듬해 2월부터 2년 반만에 완성을 보기에 이른다. 수원성은 북문이 천안문이요 남문이 팔달문인 것을 보면 새로운 수도로서 이곳으로 천도할 계획이었던것 같다. 정조 자신도

생각컨대 화성은 아버님 장헌세자의 의관이 보관되고 있는 곳이다.

금년 봄(정조 19년) 내가 壽母를 모시고 가서 幽宅을 둘러보았다. 10년

후면 내가 장차 늙은 나이가 될 것이다. 때문에 화성은 老來의 堂이다.

- 열수전서, 정헌묘지명.

이같이 천도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사도세자 무덤의 이전, 그에 따른 수원읍의 이전과 유수부 승격 그리고 화성 성곽 축조 등의 계획은 철저하게 시파의 관리나 학자들만으로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성이 완성된 후, 왕은 성내를 둘러보고 나서 한양의 운종가처럼 장관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비변사를 중심으로 하여 하루빨리 강구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좌의정을 포함한 비변사 중신들은 고심 끝에 한성부나 평양, 개성 등지의 巨商들을 수원에 이주시키는 방안과 수원 상인 중에 능력 있는 자를 골라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권을 주는 방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황을 고려할 때, 정조가 이곳에 경제적인 신도읍을 만들어 구세력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양과는 별도의 터전에서 신진 세력들을 중심으로 개혁적인 정치를 펴려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원대한 포부는 그가 기반으로 삼고 있던 사회세력의 힘과 그 경제적 기반의 취약으로 그의 죽음과 함께 수포로 돌아가게 될 수밖에 없었다.

정조의 죽음은 노론 벽파의 정치적 등장을 가져왔다. 그것은 왕세자가 너무 어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대왕대비로 정권을 장악하고 수렴청정을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조가 재세 시에 그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기 위하여 비호하여 성장시켰던 정치세력의 시련을 예고하였고, 과연 얼마 후에 그들은 시파의 모든 인물들을 천주교의 대금압이라는 방법으로 철저하게 제거하였다. 이렇게해서 정조의 왕권강화의 꿈은 사라지고 조선은 세도정치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 참 고 문 헌 >

* 왕조의 유산-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이태진, 지식산업사 1994.

* 조선후기당쟁사 연구, 이은순, 일조각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