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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서 울

1. 경 복 궁(景福宮)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지 정 : 사적 제117호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北闕이라고도 불렸던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건립에 따라 창건되어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조선 말기인 고종 때 중건되어 잠시 궁궐로 이용되었다.

이성계가 왕이 되어 곧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이때의 궁의 규모는 390여칸으로, 受朝之所인 勤政殿이 5칸에 상하층 越臺를 갖추었고 행랑·근정문·천랑(穿)廊) 角樓·康寧殿이 7칸, 延生殿 3칸, 慶成殿 3칸, 視事之所인 報平廳 5칸 외에 상의원·중추원·三軍府 등이 마련되었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3대 태종때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궁내에 慶會樓를 다시 지었는데, 연못을 넓게 파고 장대한 누각을 지어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편에 峨嵋山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 두었으며, 경회루 남쪽에 시각을 알리는 報漏閣을 세우고 궁 서북 모퉁이에 천문관측시설인 簡儀臺를 마련하였으며, 강녕전 서쪽에는 欽敬閣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태내는 玉漏器를 설치하였다. 1553년에는 궁내에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이듬해에 강녕전 외에 交泰殿·연생전·흠경각·思政殿을 복구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궁은 소실되고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에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다시 중건되기에 이른다.

이때에 중건된 경복궁은 여타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지어지게 되었는데, 그 규모는 7,225칸반이며 후원에 지어진 隆文堂 이하의 전각도 256칸이고 궁성 담장의 길이는 1,765칸이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때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어 1895년에는 궁 안에서 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은 이어한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은 주인 없는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殿·堂·누각 등 4천여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하고 1917년에는 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동행각·서행각·延吉堂·경성전·연생전·麟趾堂·흠경각·含元殿·萬慶殿·興福殿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 등의 내전을 지었다. 궁전 안에는 겨우 근정전·사정전·修政殿·千秋殿·집옥재·경회루 등과 근정문·홍례문·神武門·동십자각 등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하였다. 또한, 근정전의 정면 앞에 총독부청사를 지어 궁의 정전을 가려버렸다. 이밖에도 자선당 자리에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乾淸宮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 1945년 광복 후 궁은 공원으로 개방되는 한편, 日人들이 지었던 총독부청사는

정부청사로 이용되었다. 1971녀에는 궁의 동북 담장 가까이에 국립박물관이 목조기와건물의 모양을 본뜬 철근콘크리트조로 지어졌다가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구 총독부청사 건물로 이건되었다.

경복궁이 자리잡은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의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主山의 바로 아래이다. 궁의 전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전개되고 그 앞에 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內水인 청계천과 外水인 한강이 흐르는 명당 터이다. 궁의 왼쪽으로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오던 도성의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이다.

고종 때 중건된 궁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궁성의 둘레는 1만여척에 시가지를 내려다보듯이 南面하였으며 궁의 주요건물들도 모두 남향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는 크게 앞부분에 정전과 편전들이 놓이고 뒷부분에 침전과 후원이 자리잡고 있어 이른바 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이 정전과 침전들이 좌우에 놓이거나 앞뒤의 관계가 불분명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이 궁이 조선의 정궁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 같다.

현재 궁내에 남아 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수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전 등이다. 광화문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조로 복원되었다. 근정전(국보 제223호)은 조선왕조 정궁의 정전답게 중층의 정면 5칸, 측면 5칸의 장대한 건물이며 건물의 양식은 조선 말기에 속하여 세부의 장식적 처리가 두드러진다. 근정문(보물 제812호)은 정면 3칸의 중층지붕건물로, 좌우로는 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경회루(국보제224호)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장대한 누각건물로 하층은 네모진 기둥을 세우고 상층에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나무기둥을 세웠다. 주변에는 네모난 큰 연못을 파고 우측면에 세개의 돌다리를 놓았다. 향원정은 육각형 평면을 한 정자로 연못의 한가운데 있으며 목조구름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보물 제809호)은 침전건물의 하나인데, 이 건물에는 후원의 담장과 굴뚝에 묘사된 十長生무늬가 주목된다. 사정전 북쪽에 있는 아미산은 여러 단의 花階와 그 사이의 나무·괴석 등이 눈길을 끌며 전체적으로 사철의 변화에 따른 조화를 간직한 한국식 정원 모습을 남기고 있다. 여기에도 봉황·귀면·당초문 등을 새긴 육각의 花紋장식 굴뚝(보물 제811호)이 있다. 이밖에 18세기에 만든 바람의 방향과 강도를 측정하는 기기인 風旗臺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궁내에는 여러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데, 국보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경천사십층석탑·남계원칠층석탑·산청범학리삼층석탑·전흥법사염거화상탑·갈항사삼층석탑·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 등이 있고 9점의 보물로 지정된 탑비·석등이 있다.

경복궁은 비록 궁내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 주요건물들이 남아 있고 창건 때의 위치를 지키고 있어 조선왕조 정궁의 면모를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2. 창 덕 궁(昌德宮)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지 정 : 사적 제155호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離宮으로 태종대에 건립된 궁이다.

조선왕조 건국이후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다. 그러나 제2대 정종은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게 된다. 그 후 다시 한양을 수도로 삼은 것은 제3대 태종 때로서 태종은 개성에 남고자 했던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태종 4년(1404)에 한양 환도를 결정하고 동시에 왕이 入居親朝할 궁궐을 새로 지을 것을 계획한다. 그런데 성석린, 조준 등의 중신들은 이미 한양에 신궁(경복궁)이 있으므로 따로 궁궐을 짓는 불필요함을 지적하였다. 그 뜻을 받아들인 태종은 처음에는 경복궁의 보수를 명하지만 결국에는 1404년 10월에 창덕궁을 지을 것을 명한다. 공사는 태종 5년 10월에 완전히 끝나게 되었는데, 궁의 규모는 外殿 74間, 內殿118間으로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태종은 창덕궁이 완성된 이후로도 궁내에 누각을 새로 짓고 궁의 외문을 세웠으며 여러 정자들을 세웠다. 외전의 출입구인 추석문 밖에 석교를 만들었는데 이 석교는 현재도 창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錦川橋이다. 태종 12년 5월에는 추석문 남쪽에 敦化門이라는 樓門을 세웠는데 이문은 바로 창덕궁의 정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때에 이르러 어느 정도 궁성의 규모가 정하여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전인 仁政殿은 준공된지 10여년 만인 태종18년에 改營하였는데 그 공사는 세종 즉위년에 끝났다. 세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으나 바로 수리중인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연산군대에 들어와 창덕궁은 많은 개수공사를 벌이게 되는데, 연산군 11년의 反正으로 창덕궁내 조영이 대부분 실행에 이르지는 못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전소되었다. 난이 끝나고 궁들의 재건공사가 시작되었는데, 그 중 창덕궁의 복원이 제일 먼저 착수되었다. 이는 창덕궁이 이전까지 왕이 거처하던 궁이었고 경복궁이 풍수적으로 불리하다는 의견이 작용하였던 것 같다. 창덕궁의 중수조영은 광해군 3년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러나 광해군은 중건된 창덕궁에 移御하였다가 20일도 되지 않아 다시 전에 거처하던 慶運宮으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창덕궁에서 단종이나 연산군이 폐출되어 이곳을 흉궁으로 여겼던 것 같다. 결국에는 창덕궁으로 이어했던 광해군은 1623년(광해군 15)에 일어난 반정거사로 폐출되고 새로이 인조가 등극하였는데 이 와중에 창덕궁의 전각 대부분이 불에 타고 말았다. 이때에 소실된 전각은 인조 25년 6월에 그 공역이 시작되어 불과 5개월 만에 완성되었는데 700여간의 전각을 이처럼 단시일내에 끝마치게 된 것은 전각의 재건을 위하여 광해군이 지었던 仁慶宮의 전각을 헐어내고 그 자재를 그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창덕궁이 이후에 전대로 재현되기는 했으나 건물의 형태가 인경궁의 전각을 상당부분 그대로 옮겨 놓았고 인경궁에서 철거되어 온 창호 등의 자재가 대부분 이용되었다. 이 후로 효종대에서 영·정조년간에는 창덕궁의 대규모 중건이나 수리는 별로 없었다.

그 후 순조이후 대한제국말에 이르는 사이에 몇차례의 화재를 당하였으며 그때마다 많은 전각들이 다시 복원되었다. 순조 초년에는 인정전이 불에 탔다가 바로중건되었으며 순조 33년에는 大造殿을 중심으로 한 내전 대부분이 소실되는 큰 화재가 발생하여 이듬해에 중건되었다. 창덕궁이 마지막으로 큰 화재를 입은 것은 1917년으로 당시는 일제강점 이후로 정권이 일본인들에게 넘어간 후였고 조선왕조 마지막 왕인 순종이 실의 속에서 창덕궁에 지낼 때였다. 화재 4일 후에 피재의 처리를 위해 회의가 열렸는데 이때 피재건물의 복구에 있어서는 한국식을 위주로 하되 서양식 건물도 짓기로 하고 공역은 1919년에 완공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고종의 승하와 因山, 3·1운동 등 궁중·국내의 큰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 1920년에 가서야 준공을 보았다.

일제 때에 창덕궁은 내외국인에게 관람이 허용되어 이에 따른 각종 시설의 개수가 있었고 전각의 태반이 철거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광복 후 관람이 증가하면서 남아있던 전각들도 나날이 훼손되었고 특히 후원이 크게 변모되었다. 이에 따라 1976년부터 약 2년에 걸친 건물 및 주변의 정비가 이루어지고 더이상의 훼손과 변모를 막고 현상을 유지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3. 창 경 궁(昌慶宮)

소재 :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지정 : 사적 제123호

도성 내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창덕궁과 함께 東闕이라고 불리우는 창경궁은 고려시대의 南京 수강궁터로 전하며, 1418년(세종 즉위년)에는 상왕이 된 태종이 머물 곳으로 건물을 지어 수강궁이라고 불렀다. 1483년(성종 14)에 창경궁이 수강궁자리에 창건되었으며, 당초는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 덕종의 비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한 곳이었다.

이 궁은 조선 전기에는 두드러진 활용이 없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창경궁은 물론 경복궁, 창덕궁 등 조선조의 3대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그뒤 창덕궁과 창경궁만이 재건되어 창덕궁이 법궁이 됨에 따라 이와 인접한 관계로 궁궐로 활용되는 기회가 많아졌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던 궁은 1616년(광해군 8)에 재건이 이루어졌다. 이보다 앞서 창덕궁이 복구되어 왕이 머물게 되었으므로 양 궁궐이 있는 동궐은 이후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이후에도 잦은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는 일이 계속되었는데, 그 중 인조 때의 화제는 이괄의 난으로 빚어진 것으로 난군이 궁의 내전에 불을 질러 통명전·경춘전·환경전 등 내전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또 순조때 들어와서는 실화로 역시 내전의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 34)에 재건되었다. 이러한 건물의 변화와 함께 궁에서는 여러가지 사건이 벌어졌었는데, 그 중 특기할만한 것은 숙종 때 에 일어난 장희빈의 처형(신사년의 변고)과 왕세자의 즉위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다가 노론의 대신들이 죽음을 당한 신임년 사화, 그리고 영조 때의 사도세자의 변고이다.

고종연간까지 궁은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 당시 간행된 궁궐지에 의하면 모두 2,379칸에 달하는 여러 전각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오면서 일본인들에 의하여 궁은 크게 변형, 개조되었으며, 새로운 일본식 건물이 들어서고 궁궐 전체를 동물원 식물원 내지 박물관화시키면서 웅장하였던 건축군은 원형을 잃어버렸다. 1984년에 들어와 궁의 복원사업이 착수되어 우선 창경원이라는 명칭을 본래대로 창경궁으로 고치고, 궁내의 동물사를 모두 서울대공원으로 이전시키고 벚나무를 제거하였다. 1986년에는 발굴조사의 결과에 따라 없어졌던 일부건물이 복원되었다.

창경궁이 위치한 곳은 서쪽으로는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는 종묘와 통하는 곳으로 주변은 낮은 언덕들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궁은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은 경복궁, 창덕궁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 이유는 이 궁이 별궁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지며, 지형상으로도 동향이 적합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의 남쪽 경계에는 왕세자인 동궁의 처소가 마련되어 이곳에 많은 전각들이 자리잡고 있다.

현재 궁내에 남아 있는 건물 가운데에는 임진왜란 뒤 재건된 이래 광해군 때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간직한 건물과 순조 때 재건된 건물들로 크게 대별될 수 있다. 광해군 때의 건물은 외전의 중심 전각들로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이다. 순조 때 재건된 내전의 건물 중 현존하는 대표적인 것은 통명전, 환경전, 경춘전 그리고 함인정이다. 명정전은 국보로, 통명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밖에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는 풍기대, 천문을 관측하는 관천대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궁은 장조, 정조, 순조, 헌종 등의 많은 왕이 태어난 곳이며, 광해군 때 중건된 정문, 정전 등이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인접한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의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 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4. 덕 수 궁(德壽宮)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5번지

지 정 : 사적 제124호

덕수궁은 원래 조선 초기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뒤 서울로 돌아와서 이 집을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대소의 궁궐들이 모두 불탔기 때문에 당장 머물 궁궐이 없었으므로 정릉동에 있는 건물을 임시 시어소로 삼고 그곳으로 이어하였다. 선조는 궁내에 있어야 할 소임들 때문에 行宮내에 여러 시설이 필요하였는데 워낙 협소하여, 궁성이 남아 있는 경복궁에 임시 건물이라도 지어 이어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공사가 커서 단시일 안에 끝내기는 무리라는 대신들의 건의로 경복궁 대신 창덕궁의 중건을 명하였다. 하지만 선조는 창덕궁의 중건을 보지 못한채 행궁에서 승하하였다. 뒤이어 광해군이 행궁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그해에 창덕궁이 중건되었으므로 광해군이 이어하면서 이곳에 慶運宮이라는 宮號를 붙여주었다.

그후 광해군 10년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시키고 12년 10월에는 경운궁내외의 各衙門을 헐어내라고 명하였다. 그것은 인목대비 주위의 절대적인 인원의 감축을 꾀한 것이었다. 광해군 15년 3월 인조반정으로 즉위한 인조는 인목대비가 거처하는 경운궁으로 갔는데, 이어 인조는 인목대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인조 이후 경운궁은 영조 24년과 49년에 왕이 경운궁에 잠시 거동하여 선조의 還都三週甲을 맞아 배례를 행하였을 뿐이다.

고종 말년에 조선왕조가 열강들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왕이 경운궁으로 옮기자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하였던 고종은 태황후와 태자비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공사관에서 가까운 경운궁으로 옮겨가 있도록 하였다. 동년 2월에 고종은 경운궁의 수리를 명하고 1895년에 시해된 閔妃의 산역이 끝나자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궁내에는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일부는 서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하였다. 궁내에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眞殿이 세워지고 궁의정전인 中和殿 등이 세워졌다. 고종이 경운궁에 머물고 있던 1904년에 궁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전각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곧 복구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905년에는 卽祚堂·昔御堂·景孝殿·浚明殿·欽文閣·咸寧殿 등이 중건되었으며, 中和門·朝元門 등이 세워졌다. 1906년에는 정전인 중화전이 완성되고 大安門도 수리되었는데, 이 문은 大漢門으로 개칭되고 궁의 정문으로 되었다. 1907년 고종은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었으며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太上皇이 된 고종은 계속 경운궁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이후 고종은 13년 동안 함녕전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이곳에서 죽었다.

덕수궁은 당초 사가이던 것을 선조 때 임시로 왕이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이 된것인 만큼 궁이 자리잡은 위치나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 과는 다르다. 그 위치는 한성부의 皇華坊·貞陵洞 일대로 이곳은 원래 태조의 계비인 康氏의 무덤인 貞陵이 있던 곳이다. 능은 태종 때 옮겨지고 그 자리에 월산대군의 집이 지어졌던 것이다. 이곳은 도성내의 주요 가로와도 직접 면하여 있지않은 곳으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곳은 궁이 있는 곳으로는 여겨지지 않던 것으로 보인다. 덕수궁은 결국 고종 말년에 왕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갑자기 궁궐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건물의 배치도 이때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우어지는데, 정전과 침전이 있는 부분, 璿源殿이 있는 부분, 그리고 서양식 건물인 重明殿이 있는 부분이다. 이 가운데 궁의 중심이 되는 곳은 정전과 침전이 있는 곳으로, 정전인 중화전이 남향하여 있고 정남쪽에 중화문, 그 남쪽에 정문인 仁化門, 동쪽에 대안문, 북쪽에 生陽門, 서쪽에 平成門 등이 있었다. 정전의 뒤편에는 석어당·즉조당이 있는데, 이 두 건물은 고종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건물들이다. 정전의 동편에 침전인 함녕전이 있고 함녕전의 서쪽에 德弘殿, 북쪽에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 동북쪽에 壽仁堂, 동쪽에 永福堂이 있었다. 중화전의 서북쪽에도 많은 건물이 있었으며 觀明殿·寶文閣 등이 중요한 것들이었다.

석어당은 궁내 유일한 2층 전각으로 본래 이 건물은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여 선조를 추모하던 곳이다. 1906년 재건된 건물이 지금 남아 있으며 단청을 칠하지 않은 건물이다.

정관헌은 서양식 건물로 고종황제가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조적식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여진 건물이다. 평성문 밖 지금 미국대사관 서쪽에는 2층 서양식 건물로 접견실 또는 연회장으로 쓰던 중명 전이 있었고 그 북쪽에 晩喜堂·흠문각, 서쪽에 養福堂·경효전 등이 있었다. 이 주변 일대의 건물에 대하여는 전체를 漱玉軒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궁의 배치는 1904년에 큰 화재가 있는 뒤로 변화되었고 서양식 건물들이 지어지면서 기존의 건물과 조화를 잃게 되었는데 특히, 나중에 지어진 석조전·돈덕전등 서양식 건물들은 기존의 정전 건물들과 축(軸)도 일치하지 않고 그 위치도 정전과 인접하여 대규모로 지어지면서 종래의 궁궐의 공간적 규범을 깨뜨리고 말았다. 더욱이 석조전의 남쪽에 일본인들이 미술관을 세우고 전면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면서 궁의 본래의 모습이 상당히 파괴되었다. 덕수궁은 비록 조선 말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5. 국 립 중 앙 박 물 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국립중앙박물관은 1908년 9월에 발족한 창경궁내의 李王家博物館으로 출발하였다. 이 왕가박물관은 왕실의 재정적 뒷받침으로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1909년 11월 창경궁과 함께 일반에게 공개되었으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내 박물관 건물을 신축하고 1915년 12월 총독부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여기에서는 일부 구입품 외에 고적조사에 의한 자료와 매장문화재 및 사찰의 기탁품 등 역사?고고? 미술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전시하였다. 한편, 지방에서는 1915년부터 경주고적보전회에 의하여 신라시대의 유물을 전시해 오던 경주의 전시관이 1926년에는 총독부박물관의 경주분관으로 편입되었다. 부여와 공주에서는 고적보전회가 이끌어오던 유물전시관들이 1939년과 1940년에 각기 총독부박물관의 분관으로 편입되면서 광복 전까지 총독부박물관 산하에 모두 3개소의 분관이 설치, 운영되었다. 일본인들에 의해서 독점되었던 박물관도 광복이 되면서 같은해 9월에 인수받아 국립박물관으로 개편하고 곧이어 세개의 지방분관도 국립박물관 분관으로 운영되어나갔다. 1946년에는 개성부립박물관이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으로 편입되는 등 국립박물관의 기능이 점차 제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한때 6·25사변으로 수천점에 이르는 유물이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서울환도와 함께 덕수궁 석조전을 수리하고 이곳으로 이전함으로써 박물관은 한동안 마비되었던 기능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1969년에는 문화재관리국에 소속되어 있던 덕수궁미술관이 국립박물관에 통합되어 두개의 전시시설이 일원화되면서 대폭적인 소장품의 확충이 이루어졌다.

1971년 부여박물관이 신축된 것을 시작으로 하여 1970년대와 1980년대는 국립박물관의시설이 크게 확충된 기간이었다. 1972년 8월에는 서울의 국립박물관이 경복궁내에 현대식 설비를 갖춘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여 덕수궁에서 이전하면서 명칭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고쳐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게 되었다.

중앙박물관은 국민과 정부의 전통 문화에 대한 이해의 증진과 민족문화 정립의 시급함을 인식하고, 또한 그 사이 늘어난 유물의 분량과 함께 지금까지의 체제로부터의 탈피가 절실하던 때에 마침 정부청사의 이전계획이 이루어지고, 이에따라 구중앙청사로의 박물관 이전문제가 제기되어 이를 대폭 개수하여 1986년 8월 21일 새 청사로 이전·개관하였다.

소장유물은 현재 14만여점으로 우리나라의 역사·고고학·미술·민속 등에 관한 자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밖에도 민족항일기에 평양지방에서 발굴 수집된 낙랑유물과 중앙아시아지역에서 수집된 서역유물이 소장되어 있고 최근에는 신안해저에서 인양된 방대한 양의 원나라의 중국 유물을 확보하게 되었다. 유물의 전시는 우리나라의 고고학·미술사·역사 전반을 통한 우리 문화 발전의 큰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그밖에 중국·일본실을 마련하였고 이홍근·박병래의 기증문화재전시실과 특별기획 전시실이 있어 상설전시 외에 특별기획전시를 가능하게함으로써, 특수한 국내외의 문화를 집중 또는 재조명하여 상설전시에서 소홀하였던 부분을 보완하고 있다. 국내 전시 외에도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를 해외에 고양시키기 위하여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해외전시가 이루어졌다. 전시 외에도 일정 유적에 대한 계획적 발굴조사와 지역 사찰, 개인소장 문화재에 대한 연차적인 실물자료조사와 지표조사 등 학술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조사보고서로 간행하고 있다. 전시·조사기능 외에 사회교육 또한 박물관의 주요 기능 가운데 하나로, 박물관특설강좌를 비롯한 박물관대학 등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 3·1절을 맞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계획이 발표되었다. 오는 8월 15일까지 철거 실측작업을 마쳐 광복절에 총독부 건물 중앙돔의 첨탑을 끊어낸 다음 내년초에 본격적인 철거작업을 완료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경복궁의 복원도 함께 이루어져 우리 민족문화의 참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될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문화재들이 일제의 건물에서 전시되고 있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경과를 기대해 본다.

6. 국 립 민 속 박 물 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경복궁 내.

1945년 11월 8일 한국민속학의 선구자인 송석하(宋錫夏)의 수장품 기증으로 서울시 중구 예장동 2번지에 개관된 국립민족박물관이 그 시초이다. 그후 문화재관리국에 의하여 경복궁내 수정전(修政展)에 소규모의 한국민속관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 장소가 비좁아 1973년 6월 15일 경복궁내 현대미술관 건물을 인수하여 보수, 증축하고 진열공사에 착수하여, 1975년 4월 11일 한국민속박물관이라는 명칭으로 개관하였다. 그뒤 1979년 문화재관리국 소속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속으로 직제가 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진열실은 제1실이 생업실로 농경관계 길쌈 어로관계를 진열하고 있다. 농경은 농사를 지어나가는 순서에 따라 농기구를 진열하였으며, 쟁기질하는 모습은 실제소를 박제하여 농부와 함께 생동감있게 전시하였다. 디딜방아와 베틀부인, 그리고 대장간 등에도 마네킨을 이용, 동적인 전시를 시도하였다. 제2실은 민속공예실로,草藁 공예 매듭 華角 나전칠기 金箔 부채 갓일 등의 제작과정을 보여주어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제3실은 식생활실로, 우리의 고유음식을 모형으로 만들어 상차림을 전시하였으며, 음식을 저장하고 조리하는 기구 등을 입체적으로 전시하였다. 제4실은 주거실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주거생활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안방과 사랑방을 꾸미고, 각 방에 가구 네킨 등을 적절히 배치하여 그 분위기를 살렸다. 제5실은 복식실로, 남녀노소의 의복은 물론 모자와 머리장식, 몸에 찼던 패물 및 주머니, 기타 신발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전시하였다. 제6실은 신앙의례실로, 신앙에 있어서는 민간신앙인 무속 점복 등을 신앙기구 악기와 함께 전시하였고, 의례는 관혼상제에 産俗을 곁들여서 産育俗 관례 혼례 상례 제례와 사당까지를 포함한 관혼상제를 체계적으로 전시하였다.제7실인 예능오락실은 제기차기 팽이치기 공기놀이 고누 연날리기 등의 어린이놀이와 투전 바둑 장기 윷놀이 투호 골패 쌍륙 승경도놀이 등을 비롯한 농악 탈춤 꼭두각시놀음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모든 악기와 놀이기구 등을 전시하였다. 제8실은 사회문화실로 서당을 중심으로 과거제도 문방구 도량형 한약방 활자 등을 전시하였다. 마지막으로 중앙전시실은 특별전시실로 활용되고 있으며, 평소에는 전승공예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중앙전시실의 안쪽 로비에는 중요건물의 공포 부분을 축소, 전시하였으며, 99칸 건물인 연경당(演慶堂)을 20분의 1로 축소, 전시하고 있다. 연건평이 3,781제곱m이고 소장유물은 약 7천여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