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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역사와 지리적 위치

1. 역 사 적 위 치

1) 선 사 시 대 

2) 삼 국 시 대 

3) 고 려 시 대 

4) 조 선 시 대

2. 지리적 위치

정 소 영(94)

조선은 태조 1년(1392)부터 순종 4년(1910)까지 27대 518년 동안 지속된 왕조이다. 475년 동안 고려 왕조의 수도였던 개성을 버리고 새로운 왕조의 수도와 궁궐을 건설한 곳은 한양 곧 조선시대의 한성이자 지금의 서울이다. 이 한양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의 도읍지였고 삼국의 쟁탈지였는데, 신라 통일 이후에는 수도인 경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한양군에 불과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개성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수도를 보좌하는 곳으로서 특별히 남경으로 승격되었다. 더구나 지리도참설의 영향으로 숙종(1095-1105) 때에는, 남경(당시의한양)에 궁궐을 지었으며 뒤이어 공민왕(1351-1374) 때에도 남경으로 천도할 계획아래 새롭게 궁궐을 짓기도 하였는데 끝내 천도를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이렇듯 이미 고려시대에 개성을 대신할 최적의 도읍지로 여겨질 수 있었던 한양의 역사적·지리적 위치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역사적 위치

1) 선사시대

서울의 강동구 암사동, 강남구 역삼동, 송파구 등지에서 신석기, 구석기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선사시대부터 이미 서울지방에 인간이 생활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청동기 시대에는 한강유역에 辰國이라는 군장국가가 생겨나게 되고 또 이들에게 북쪽에서 내려온 유이민을 통해서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사회가 점점 발전하게 되고 지역연맹체로서의 三韓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2) 삼국시대

한양이 가장 많은 수난을 당했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마한의 부족국가인 백제국의 온조가 남쪽에 내려와 한강이북의 하북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것을 시작으로 신라가 통일할 때까지 여러 왕조가 거쳐갔다. 백제 근초고왕 26년(371년)에는 漢山이라 했고, 뒤이어 북한산. 북한성이라는 이름도 보이는데 한산은 '큰 산', '한 뫼'에서 연유된 이름이며, 북한산이나 북한성은 남한산에 대칭으로 사용된 이름이다(여기에는 이설도 있다).

고구려 장수왕이 서울을 점령한 후에는 그전 이름대로 북한산군을 두었다가 장수왕 63년(475년)에 이곳을 남평양이라 했는데, 남평양은 고구려 도읍지 평양의 남쪽에 있는 평양(평양은 밝달, 배달, 버들의 한 표기로도 볼 수 있다)을 뜻한 것으로, 고구려가 이곳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한 후에는 이곳에 새로운 주를 설치했으므로 신주라 했다가 4년 후인 557년에는 그전 이름대로 북한산주라 했고, 또 11년 뒤인 568년에는 고을 다스리는 곳을 이천으로 옮기고 이름도 남천주로 바꾸었다.

진평왕 때(604년) 다시 그전대로 북한산주를 두었으며, 통일신라의 경덕왕 16년(757년)에는 이 일대를 한주라 하고 서울에는 한양군을 두었으니, 한양이란 이름은 이미 조선왕조가 아닌 신라 경덕왕때부터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3) 고려시대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초기에 서울지역을 양주로 고쳤고 문종(1067년) 때에는 양주를 남경유수관으로 승격시켰으나 나라에 큰 이로움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여 다시 양주로 격하하였다. 그러나 숙종때에 다시 남경으로 승격

시켰는데, 나라에 가뭄과 홍수, 우박이 내리는 등 여러가지 이변이 일어나므로 『道詵秘記』, {도선답사기』, 『삼각산 명당기』 등을 인용한 김위제의 주장에 숙종의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고려후기 충렬왕때(1308) 남경은 한양부로 개편되고 부윤을 두었다. 공민왕때 다시 일시적으로 남경이 되었다가 곧 한양부로 환원되었으며, 한때 한양으로 천도하기 위하여 궁궐을 짓기도 하였다. 우왕때에는 한양천도론이 활기를 띠었으나 최영의 반대로 중단되었다가 우왕 8년(1382) 9월에 잠시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며, 이듬해 2월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공양왕 2년(1390) 9월에도 한양으로 천도한 후 5개월만에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이처럼 고려 말기에는 왕조의 번성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두번이나 한양천도를 단행하였으나 그에 따른 이로움을 얻지 못하였으며 기울어져 가는 혼미한 왕조를 돌이켜 세우지 못하고 1392년 그 막을 내렸다.

그러므로, 고려의 서울지배는 태봉국의 궁예이후부터 계산하여 497년이 되는 셈이다.

4) 조선시대

위화도 회군에서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으로 고쳤으며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양으로의 천도를 서둘렀다. 그 까닭은 역성혁명의 인군은 반드시 도읍을 옮겨 새 국가의 면모와 민심을 일신해 왔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풍수도참설(松都地氣衰旺說)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1393년 2월 10일 처음에는 새 도읍지로 계룡산을 정하고 공사에 착수하여 10개월쯤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하륜이 계룡산 밑은 남쪽에 너무 치우쳐 있고 산은 건방 곧 서북방에서 왔는데, 물은 손방 곧 동남방으로 흘러가니 이는 '水破長生 衰敗立至의 형'이라는 신도불가론을 주장하므로 공사는 중단되었다. 다만, 신도안이라는 지명만 남겨 놓게 되었다.

이때 태조는 서울 북악산과 하륜이 주장한 모악, 적성의 광실원 동쪽, 장단의 도라산 등지를 둘러본 후 한양의 북악산 밑을 도읍지로 정하였다. 그리고 한양에 궁궐, 종묘, 관아 등 수도로서의 시설이 전혀 없는데도 1394년 10월 25일(양력 11월 26일) 개경을 출발하여 10월 28일(양력 11월 29일) 한양에 도착하여 숙원이던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1395년 6월 6일 한양부를 한성부로 고쳤다.

한양부를 한성부로 바꾸고 판사를 판부사로 고쳐서 1명을 두었으며 당시의 관할구역을 도성밖 10리까지로 한정하였으나 실제는 산세, 수로 등에 따라 10리가 넘는 곳과 10리가 못되는 곳도 있었다. 또, 지역을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의 5부로 나누고 다시 이를 52방으로 분할하였는데 방의 수는 시대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

예종 때에는 판부사를 판윤(判尹)으로 고치고 그 밑에 우윤과 좌윤을 두었으며 성종 때 정2품 판윤 1명, 그 밑에 종2품 좌·우윤 각 1명씩을 두었다. 조선시대의 한성판윤은 오늘날의 국무회의라고 할 수 있는 대각(臺閣)에 참례할 권한이 있었고, 또 판윤을 임명하려면 外家로 3대까지 그 지체를 살필 뿐 아니라 편파되지 않는 집안의 인물이어야 했으므로 "영의정 하기보다 한성판윤 내기가 더 어렵다"는 말까지 있었다. 갑오개혁 때 판윤을 폐지하고 부윤(府尹)을 두었으며 1895년 전국의 8도제를 23부 337개군으로 할 때 수도인 한성부를 낮추어 한성군으로 바꾸었다. 1890년 한성군이 다시 한성부로 승격되고 판윤 1명, 소윤 1명을 두었다.

한양 천도후 궁궐, 종묘, 사직, 분묘, 성곽 등 기본시설을 건설하며 조정이 안정되어 가고 있던 중 태조 7년 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남으로써 정종은 1399년 3월 7일 한양을 떠나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그러나, 개경환도후 제 2차 왕자의 난으로 1405년 10월 11일에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후 한양은 임진왜란과 광해군때의 화재,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 많은 수난을 겪으며 국도의 위치를 지켰지만 결국은 조선 말기 일제에 의해 서구 문물이 수용되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경장. 러일전쟁 등 숨가쁜 정국속에서 점점 일본의 손아귀에 잡혀들고 말았다.

참고로 조선시대 한성부의 호구와 인구 변천은 다음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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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별 | 세종 10년|효종 8년|영조 29년|고종 8년

| 구 분| (1428) | (1657)| (1753) |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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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구수 | 16,912 | 15,760| 34,956| 4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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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수 | 109,372 | 80,572| 174,203| 19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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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리적 위치

국도의 위치를 정함에 있어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의 집단 생활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에 유리한 곳을 택하였다. 이것은 국도가 한나라의 심장부로서 수도의 안전이 곧 나라의 운명, 왕실의 영고성쇠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도 삼국시대부터 명당으로 손꼽혀 온 땅이다. 조선왕조가 한양을 도읍지로 정함에 있어서는 중신의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지만 결국 삼각산 밑에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리적으로 뛰어난 여러 조건 때문이었다.

한성부 곧 한양의 도읍지는 그 산맥이 멀리 백두산으로부터 구불구불 그 정기가 뻗어 내려와 삼각산 곧 북한산에 집결하는 형국으로 흠잡을 데 없는 한반도의 중심이다.

14세기 조선이 개국하여 한양에 천도할 당시의 서울은 한양도성 내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 지형적으로 살펴보면 북악산(北岳山:일명 면악, 공극산 또는 맥악산, 342m)은 서울의 주산으로 북쪽의 현무가 된다. 동쪽의 낙타산(駱駝山:일명 낙산,125m)은 좌청룡이 되며, 서쪽의 인왕산(仁旺山:일명 필운산, 338m)은 우백호가 되고, 남쪽의 남산(南山:일명 목멱산, 인경산, 마뫼 둥둥, 265m)은 案山 곧 남주작이 되어 이들이 서울의 내사산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서울 도성은 이 내사산을 연결하여 성을 쌓고 그 사이사이에 문을 설치하여 출입을 통제하였으므로 이곳을 문안 또는 성안이라 불렀던 하나의 분지로서, 그 면적은 약 5백만 평에 불과하였지만 남쪽을 제외한 북쪽과 서쪽은 모두 좁은 재를 통해야만 들어올 수 있으므로 군사적 방어에 매우 유리한 천연의 요새였다.

오늘날의 서울은 북쪽으로 서울의 진산이자 종산이 되는 북한산(北漢山:부아악 836m), 남쪽으로는 시흥과 경계를 이룬 관악산(冠岳山:서울의 조산 632m), 동쪽으로 구리시와 경계를 이룬 용마산(龍馬山:348m)이 외사산을 이루며 도성을 두 겹으로 둘러싼 형국으로서 605제곱km의 넓은 지역이 되었다.

한양이 도읍지가 되기 위해서는 장풍의 조건과 함께 특수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물로서 도성의 중심을 흐르는 청계천과 한양의 바깥 남쪽을 감싸고 흐르는 한강이 있다. 오늘날 서울의 중심부를 흐르는 하천은 청계천에서 한강으로 바뀌었다. 어찌되었든 한양의 내명당수를 이루는 청계천은 서출동류의 하천으로 수태극형을 이루고 있다. 흔히 풍수지리에서 서출동류, 곧 물이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을 명당수로 보는 것은, 높은 곳인 서쪽에서 낮은 곳인 동쪽으로 물이 흘러야 좋다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처럼 서북계절풍이 부는 곳은 서북쪽 지대가 높아야 찬바람을 막아낼 수 있다는 이유와 서로 통한다.

한편 외명당수인 한강은 물이 동쪽에서 흘러와 서울을 감싸고 흘러 서쪽으로 빠져 나가는데, 이를 동출서류수라고 한다. 내명당수와 외명당수의 흐름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4대문안의 홍수를 방지할 뿐 아니라 기가 흘러 나가는 것을 막아 준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특수 형태로 본다.

더구나 수량이 풍부한 한강은 그 주변에 농경에 적당한 비옥하고 풍요로운 평야를 지니고 있으며, 해상수송과 내륙수로와의 연결, 군사적 방어 측면에서도 중요한 몫을 담당하여 왔다. 또한 청계천으로 모이는 성 안의 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뚝섬 북서쪽에서 중량천에 합류되어 한강으로 들어가는데, 이 하천이 서울분지를 빠져 나가는 수구가 남산과 낙산 줄기에 의하여 감싸여짐으로써 궁성에서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이상적 형태라는 점도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상과 같은 한양의 명당 조건은 내사산과 외사산으로 둘러싸인 서울 분지에 나쁜 기운이 머물지 않고, 도읍의 방어를 쉽게 하며, 사람을 건강하고 복되게 할 뿐 아니라 길한 방향으로 물이 모여 흐르면서 풍부한 수량을 제공하고 氣가 흩어짐을 막아 주는 등 풍수지리설에 기초한 자연관과 유교적 통치 이념이 총체적으로 융합되어 도읍지를 만들어 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참 고 문 헌 >

* {600년 서울, 땅이름 이야기}

* 임덕순, {600년 수도 서울}, 지식산업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