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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등 사 와 史 庫

1. 전 등 사

2. 사 고

김 유 리(94)

1. 전 등 사

전등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로 강화도 남단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신비한 전설을 가지고 있는 삼랑산성을 울타리로 두루고 자리잡고 있다.

전등사는 현재 전해 내려오고 있는 전등사의 중창기문에 의하면 고구려 소수림왕 22년(381)에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는 바, 불교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아도(阿道)와 순도에 의해서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등사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이 되는 셈이라 하겠다.

이 절은 처음 고려왕실이 몽고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대불정오성도량(大佛頂五星道場)을 베푼 것을 계기로 진종사(眞宗寺)라 명명되었으며 이후 이것이 공식적인 사명이 되어 그 이름이 공민왕대까지 이어져 왔다.

전등사에 세전되어 내려 오다가 1910년 李王家博物館으로 이어져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항로의 명문에 "至正 이십육년 (1366, 공민왕 15년) 병오 오월일 眞宗寺 향완"이라고 새겨져 있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뒤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貞和公主)가 1282년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해서 송나라의 대장경을 인출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또 옥등(玉燈)을 시주한 이래로 절 이름을 전등사로 고쳤다 한다. 또한 海史 임승익이 지은 대조루중건모연문(對潮樓重建募緣文)에서는 육조의 의발을 相授하는 뜻에서 전등사라 했다고 밝히고 있다.

전등사의 명칭은 이미 {동국여지승람}에 보이고 있으니 늦어도 이를 발간한 성종 17년(1486)이전에는 전등사로 이름을 바꾸었을 것이므로 전등사의 명칭이 진종사를 대신하여 공시회되는 것은 고려 공민왕 15년(1366)에서부터 조선 성종 17년(1486)에 이르는 120년 동안의 일이었을 것이다.

전등사는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고려왕실의 비호를 받아왔으나 조선시대로 넘어와 1605년(선조38)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버렸고, 1614년(광해군 6)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어 버렸다. 이듬해 4월 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하여 1621년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이후 1678년(숙종4)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1707년 유수 황흠이 사각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하였으며, 1719년 이절의 최고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를 부여하였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을 수호하게 되면서 왕실의 관심이 전등사에 쏠리게 되었고, 1726년(영조2)에는 영조가 이곳에까지 친임하는 열의 속에서 취향당의 제액(題額)을 친히 써서 고쳐 걸게 하였으며, 1734년 곡식 수십석을 하사하였다. 또한, 1749년 2월 이 절의 중수불사가 당시의 총섭 초충(楚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수에 쓰인 재목의 대부분은 영조가 시주한 것이며, 이때 대조루(對潮樓)도 함께 건립되었다. 또한, 1761년 대연(大演)이 법당의 삼존불을 개금(改金)하였고 1784년(정조8) 정족창이 세워졌는데, 규모가 4,5칸에 불과하였으나, 1828년(순조28)양곡 5,0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40-50칸으로 확장되어 시설절목(施設節目)까지 마련되었다. 이후 1839년(헌종5) 서룡(瑞龍)을 비롯한 14명의 승려가 시왕전을 수리하고 담장을 보수하였다. 1841년 연흥(演興) 등이 대조루를 중건하였고, 1855년(철종 6) 규영(奎營) 등이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나 이때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1871년(고종 8) 포량고(砲糧庫)를 이 절에 건설하였고, 1872년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고 진상약애고(進上藥艾庫)와 산성별장소(山城別莊所)를 절 남쪽에 건설하였으며, 1876년에는 효월(孝月)이 대웅전과 약사전을 중수하였다. 1884년 3월 영담(映潭)이 관음암(觀音庵)을 중수하였고, 1905년 주지 서룡이 비로전의 불상과 약사여래 및 칠성탱(七星撑)을 개금(改金)하였으며, 1909년 오랫동안 이 절에 보존되었던 사고장본을 서울로 옮겼고, 1910년 당시의 군수 한영복(韓永福)이 이 절에 전래되어오던 유물인 동향로를 궁내부에 바쳤다.

한일 합방이후 불교는 일제 총독의 치하에서 새로운 체제로 개편, 1911년 사찰령 시행규칙이 발표됨으로써 불교교단은 조선 불교 30본산으로 형성되어 30개의 교구역으로 나뉘게 되었다. 1912년 조선 불교 30본산의 하나로서 강화, 개성 등 6개군에 소재하는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이 절의 당우는 본사의 건물로서 손색이 없으며 특히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후기 건축물로서는 으뜸가는 것으로 꼽아야 하겠다.

특히, 내부의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며,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데,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龍架의 배부분에 아홉개의 방울을 달아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 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하는 것도 있다.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 개판한 {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건물 밖으로 나오면 다시 기이한 목조장식이 네 귀퉁이 추녀 밑 보머리 사이에 끼워져 있는 것이 눈길을 끄는데 자세히 보면 발가벗은 여인의 나신상이 쪼그리고 앉은 채로 추녀를 떠받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나신상에 관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 법당을 지은 대목은 당대의 명공이었는데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한다. 그런데 그가 불사를 다하기 위해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여인은 딴 사내와 돈을 챙겨 도망가버렸다. 이 일을 알게 된 대목은 통분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일도 하지 않더니 어느날 다시 연장을 잡고 급기야 지붕밑에 깔리어 머리로 떠받고 있는 고통과 함께 알몸을 뭇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수치를 겪도록 하는 그녀의 나신상을 조각했다 한다. 이 전설은 당시 원의 제국공주의 투기와 탐음을 저주한 고려 민심을 반영한 것이라고도 한다.

보물 제179호인 약사전은 대웅보전의 서쪽에 위치한다.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대웅전과 동일한 양식이다. 그러나 전등사에 있어서 약사전 건립의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傳燈本末寺誌}의 기록에는 이 약사전에 대해 대웅전과 함께 기와를 중수했다는 사실이 보일 뿐 별다른 기록이 없다. 약사전의 건물 외향은 대체적으로 대웅전과 동일하여 대웅전의 건축양식에 따르는 조선 중기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물이라 하겠다. 내부의 천정 역시 우물 천장이며 주위에는 돌아가면서 연꽃과 비천 그림이 있어 화려하다. 또한 당우 안에는 약사여래상이 선정인을 취하고 있으며 수인 속에 보주가 걸려 있다. 불상은 석조좌상으로서 크고 높게 솟은 귀와, 그리고 이에 비해 다소 작은 느낌의 눈, 코, 입 등을 나타낸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법의는 두 어깨를 덮은 통변를 나타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아담하고 잘 조화된 작품이다. 이는 그 양식상 고려 말기에 속하는 석불로 봐야 할 것이다.

전등사의 또 하나의 자랑인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범종은 전형적인 우리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함을 금방 알 수 있다. 완전히 중국의 종으로서 전체 높이가 163cm이며 밑지름이 1m로 종루는 쌍용이 웅크리고 있고 음통이 없으며 종 몸에 상·중·하로 구획이 지여져 띠가 둘려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종 몸을 살펴보면 종 몸의 상하에 8개의 네모진 구획이 마련되어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많이 마멸돼 판독하기가 어렵다. 그 중 흐릿하게 보이는 몇자의 글자를 판독해 본 바 원래 이 종은 북송 철종 소성 4년 즉, 1097년에 제작된 것으로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게 밝혀졌다. 그러나 어떤 연유로 이 종이 전등사에 옮겨졌는지 분명하지 않다. 이 종은 한때 일제 말기에 일제의 공출이란 명목으로 박탈당하여 전등사를 떠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8.15광복과 함께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곳으로 옮겨 왔다. 이 종은 기하학적 무늬로 장중하고 소박한 중국 종의 솜씨를 보이며 종소리가 맑고 아름다운 게 특징이다. 이밖에 전등사에는 명부전, 삼성각, 정묵당, 향로전, 극락암 등과 많은 탱화가 걸려져 있다.

**** 가 람 배 치 도 ****
 
 
 
 
 
 
 
 
 
 
 
 
 
 
 
 
 
 
 
 
 
 
 
 
 
 

2. 사 고

정족사고는 조선 후기 외사고(外史庫)의 하나로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의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에 위치하였다. 정족사고가 설치된 계기는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가 1653년(효종4) 11월 실록각의 실화사건으로 많은 사적들이 불타게 되자 새로이 정족산성 안에 사고 건물을 짓고, 1660년(헌종1) 12월에 남은 역대실록들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게 되면서부터이다.

정족산사고에 보관된 실록들을 보면 {태조실록}에서 {인조실록}까지는 처음부터 봉안되었고, {효종실록}은 1661년 11월에 봉안되었으며, 1664년 12월에는 무려 223권에 달하는 실록들을 개사하였다. 1665년 9월에는 그동안 낙권(落卷)이 되어 있던 부분을 새로 등서(騰書)하여 채워넣었고, {현종실록}은 1683년(숙종 9) 3월에 완성, 봉안되었으며, {숙종실록}은 1728년(영조 4) 3월에 완성, 봉안되었다. {성종실록}은 1805년(순조5) 8월에, {순조실록}은 1838년(헌종4) 윤4월에 각기 완성, 봉안되었다. 그리고 {헌종실록}은 1852년(철종3) 9월에 인쇄하여 각 사고들에 봉안하였으며, {철종실록}은 1865년(고종 2) 윤 5월에 인쇄하여 봉안하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 때에 강화도를 일시 점거한 프랑스의 해병들에 의하여 이 정족상사고의 서적들이 일부 약탈되기도 하였다. 이 사고에 봉안되었던 역대실록 및 서적들은 때로는 서울로 가져가기도 하고, 일부는 약탈되는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춘추관(春秋館)의 관장하에 관리되어왔으나 대한제국시대에는 의정부에서 관원이 파견되어 강화군수와 협력하여 관리하고 포쇄(曝 )를 실시하며 보존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은 뒤부터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들 및 규장각의 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분실에 이장되었다가 1930년 경서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으로 옮겨진 뒤 광복으로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교로 개편, 발전되면서 서울대학교에 옮겨 보존 관리되었다. 현재 이 정족산사고지는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높이 150m에 위치하며, 사고지의 보호철책 안쪽에는 주춧돌들이 놓여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수호사찰인 전등사가 있어 이 사고를 보호하여왔기에 1910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실록과 서적들이 옮겨질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고의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성의 사진이 수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를 전후하여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사고 건물에 걸려 있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고 쓰인 현판은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다.

정족산사고본 실록들은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본 실록들로, 난을 피해 묘향산으로 옮겨졌던 전주사고본 실록들이 보다 안전한 마니산사고로 옮겨졌다가 이후 마련된 정족산성 내의 사고로 모아졌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정족산사고 실록은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보존, 관리되고 있다.

< 참 고 문 헌>

* {한국의 사찰 - 전등사}, 한국불교연구원, 일지사 1978.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崔完秀, {명찰순례}, 대원사 1994.

* 李孤雲·朴雲山, {명산고찰따라 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