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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고려의 대몽항쟁과 江都

임 남 진(93)

1. 최씨정권의 강화천도

1) 遷都論의 전개 

2) 遷都論의 결행

2. 천도 이후 강도의 경영

1) 궁궐및 관아

2) 저택과 민거

3) 방 어 시 설

13세기 고려의 대륙 몽고세력의 침략에 대한 항전은 정쟁 자체뿐 아니라,이후의 역사적 국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항전의 와중에서 새로운 도읍, 정치 및 항쟁의 중추도시로 갑자기 부각된 것이 강화이다.

주지하다시피 고려는 고종 18년(1231)몽고의 침략을 화의의 성립을 통해 종식시킨 다음 익년 강화도로의 천도를 단행, 이후 몽고와의 전쟁을 지속하다가 여몽관계의 새로운 국면과 무신정치의 몰락을 계기로 원종 11년(1270)개경으로 다시 환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강도시대는 대략 40년간 지속되었다.

이에 대몽항쟁사 혹은 무인정권시대라는 일반사적 체계를 고려하면서도 중심축을 강화도라는 지점에 설정함으로써 몇가지 사실들에 대해 접근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1232년 강화천도의 경과 및 배경, 논의내용 등을 전반적으로 정리하고 이어서 천도 이후 이루어지는 궁궐, 관아, 민거, 성곽 등 제반 강도의 시설 경영내용을 살펴 보겠다.

1. 최씨정권의 江華遷都

1) 遷都論의 전개

고려의 무인집정자 崔瑀(?-1249)가 몽고에 대한 항전을 결의하고 강화로 도읍을 옮긴 것은 고종19년(1232) 7월의 일이다. 이 사건은 이후 여몽전쟁의 전개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천도 문제가 고려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차 침입 이후인 고종 19년(1232) 2월이었다. 그리고 천도 방침이 확정된 것이 6월 16일이었고, 국왕이 강화에 入御한 것이 동년 7월 7일의 일이었으므로, 논의에서 확정 및 시행에 이르기까지 불과 반년의 기간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천도론의 논의과정을 시간순으로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2월 20일(辛未), 宰樞가 典牧司에 모여 移都할 것을 의논하였다.

5월, 재추가 宣慶殿에서 모여 대몽방어책을 의논하였다.

5월 23일(癸卯), 4품 이상이 또 회의를 하였다. 모두 城守拒敵을 말하였으나 宰樞 鄭묘와 大集成 등만은 마땅히 도읍을 옮겨 난을 피하고자 하였다. (이상 고려사 23,고종세가)

6월 16일, 崔瑀가 私第에 재추를 모아 천도를 의논하였다. (고려사절요)

집정자 崔瑀가 몽고의 1차 침입 이후 저들과 화의를 도모했던 것은 위기모면을 위한 다분히 임사방편적인 것에 불과하였고 화의 체결과는 별도의 새로운 방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서도 여전히 반대론은 제기되고 있었다. 그것은 곧 몽고와의 소극적 화친론 또는 적극적 대결론으로, 당시의 천도반대론을 대표하는 양론이었다.

유승단은 고려의 對金 사대관계를 염두에 두고서 그 상대를 몽고에 대한 것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그는 천도론의 허실을 지적하며 천도가 다만 소수 권력층과 관료들의 '피난'행위로 전락하여, 오히려 백성들을 환난과 곤경에 빠뜨리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 그의 주장은 의례적인 사대관계의 수립을 통하여, 전쟁을 방지하고 국가와 백성들을 위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것이었다.

이와 함께 김세충은 몽고와의 대결을 전제로 하는 개경고수론을 제기하였다. 이는 보다 명분론에 입각한, 천도론자가 논거로 삼고 있는 전쟁의 불가피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 고종 역시 천도에 부정적이었으며 유승단, 김세충은 이러한 중론을 대변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세충이 반대론을 개진하면서도 구체적인 개경 방어책에 대해서는 대답이 막혔던 것을 보면, 개경고수론은 명분은 섰지만 현실감이 부족하다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여몽간의 무력 충돌을 예상할 때 개경은 방어에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객관적 전력 또한 열세에 있다는 것은 그 전년 몽고와의 1차 침입에 의해 고려가 이미 경험한 바였기 때문이다. 아마 천도가 단행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고려의 항몽전쟁이 그처럼 장기화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였을 것이다. 반대를 무릅쓰고 최씨정권이 천도론을 제기, 강행하는 데에는 실로 이와 같은 대의명분이 전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2) 遷都의 決行

고종 19년의 천도책이 집정자 최우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진, 결의된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최씨정권이 천도를 결행하고 동시에 그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겠다.

무인정권이 몽고의 1차 침략을 계기로 천도를 결단하게 되는 배경으로, 첫째, 고종 6년 江東城 전투로 인한 여몽관계 성립 이후 몽고가 고려에 대해 보여 준 고압적 태도와 무례한 행동이 고려의 반몽의식을 자극시킨 점을 들 수 있다. 둘째는 몽고의 경제적 徵求가 지나치게 과중하였다는 점이다. 고종 6년 여몽관계가 성립된 이후 著古與 살해 사건이 있은 12년까지 공물 징구를 위한 사신이 매년 수차씩 파견되었고 1차 침략 이후에도 막대한 경제적 징구가 일방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셋째, 몽고의 고려에 대한 요구가 단순한 공물의 징구에서 끝나지 않고 군사의 조달 등 인적 자원 차원에까지 미침으로써 고려를 압박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요구로 인하여 고려가 심한 압박감을 느꼈을 것은 물론이며 동시에 이같은 압박감이 최씨정권의 천도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넷째, 1차 전쟁이후 몽고가 고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켰던 점 때문이라고 생각되는 데 그 구체적인 것이 達魯花赤(다루가치)의 설치였다. 고려와의 강화가 성립된 직후 몽고는 고려의 군사적 요지인 북계의 諸城을 72인의 達魯花赤을 설치하여 장악하였으며 이로 인해 고려는 변경의 방어거점을 상실해 버렸다. 게다가 達魯花赤은 개경에까지 파견되어 고려정부를 곤혹케 하였다. 1차 전쟁 이후 전개된 이상의 상황들은 몽고와의 화의론이 제기되기 어려운 객관적 여건이 되었다. 다섯째, 몽고의 간섭으로 인한 정치력 약화의 위기감이 최우로 하여금 천도를 통한 대몽항쟁을 결의케 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고종 19년 상반기의 천도 논쟁은 시종 그 가부문제만 논의되었을 뿐 천도지의 선정 등 여타의 구체사항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이는 천도론 자체가 많은 반대에 부딪쳐 보다 구체적인 여타의 문제를 논의할 여지가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천도지가 논의 단계에서는 이미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몽고의 1차 침략에 대한 고려의 대응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각 州縣 단위로 북계의 제 지역에서 소위 海島入保가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점인데, 이것은 몽고 병란의 피란책으로 海島의 이용이 이미 상식화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같은 사실을 전제할 때 집정자 최우는 해도입보책을 국가적 차원에서 채택하는 방식의 천도문제를 처음부터 검토했으리라고 생각된다. 해도입보 차원에서 천도지라면 제반 조건면에서 강화만한 곳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강화도의 지리적 조건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여러가지로 지적되어 왔지만 이를 종합하면, 첫째, 水戰에 취약한 몽고군의 약점을 이용할 수 있는 島嶼라는 점, 둘째, 육지에 핍근하면서도 조석간만의 차와 潮流 등으로 방어에 유리하다는 점, 셋째, 개경과의 근접성, 넷째, 지방과의 연결 혹은 漕運 등의 편의성으로 요약된다. 그리하여 천도론이 전개될 때 천도지에 대한 보다 정밀한 조사작업도 일면 병행되었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에, 최우는 제일 먼저 자신의 家財를 祿轉車 100여 輛을 동원, 강화도로 옮김으로써 천도를 기정사실화하고, 각 기관으로 하여금 이를 시행토록 독려하는 동시에 옮길 기한과 처벌사항까지 정하여 백성들에게 공시하였다. 그리고 이 최초의 움직임에 동조한 인물들은 최우의 추종자들이 중심이 되고 있었다.

천도의 진행과정에서 한 가지 두드러지는 것은 그것이 매우 전격적으로 결정, 수행되었다는 점이다. 즉 6월 16일자로 이를 의결시키자마자 그날로 최우가 家財를 강화로 옮기면서 천도 조치를 공시하고 그 이튿날 강화에서 궁궐 조영작업 개시, 그리고 7월 7일 국왕이 강화에 들어왔으며 궁궐이 마련되어 있을 턱이 없으므로 강화현의 객관 건물을 임시 처소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고종 19년 6월 최씨정권이 천도를 황급하게 서둘렀던 이유는 이 무렵 몽고가 곧 내침하리라는 일련의 정보 때문이었다. 즉 고종 19년 3월에 몽고에 파견되었던 사신단 중의 1인인 宋立章이 고려에 逃歸하여 몽고 내침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宋立章이 從行한 池義深은 고종 19년 3월 撒禮塔의 둔소에 파견되었는데, 이때 휴대한 서장에 의하면 만주 開州館과 宣城山기슭 등지로의 고려인의 徙民을 비롯, 제반 공물의 요구에 대해 고려가 완곡한 거부의사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신이 당도하자 고려의 소극적 반응에 분노한 撒禮塔은 "전에 보낸 문첩내의 것들은 왜 마련해 보내지 않느냐"고 힐난하며 지의심을 몽고 황제의 처소로 잡아 보내고 나머지는 狗囚하였다. 宋立章이 狗囚 상태에서 탈출하여 고려에 도망해 온 것이 바로 6월 15일의 일이고, 16일 최우는 사저에서 갑작스레 천도를 의결해 버렸던 것이다.

몽고군의 재침은 동 고종 19년 8월 이후에 시작되는데 그것은 고려가 강화천도를 확인하고 난 이후에 이루어졌다.

2. 천도 이후 江都의

1) 궁궐 및 관아

강화에서로의 천도는 급속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國都의 경영이라는 사전준비의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고종 19년(1232) 6월 16일 천도가 결정되자 다음날 바로 최우는 2領軍을 발하여 궁궐 조영에 투입시켰다. 이들 부대는 궁궐 조영 문제뿐만 아니라 천도를 앞둔 강화에서의 제반 사전 준비작업을 전담하였을 것이다. 국왕이 강화에 入御한 것은 이로부터 불과보름 남짓밖에 지나지 않은 7월 7일의 일이었기 때문에 작업이 진척되었을 리 없었으므로, 강화현의 객관에 왕은 임시 거처하게 되는 실정이었다. 이때문에 강도 천도는 先遷都, 後設備라는 逆順을 밟게 되었다.그러나 일단 천도가 단행된 이후 수도로서의 제반 설비작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한편 {高麗史} 및 {高麗史節要}의 기사 중에는 당시 궁실 등의 명칭이 단편적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를 열거하면 延慶宮(節 32. 3), 壽昌宮(史, 33.5), 龍嚴宮(史, 36. 윤2), 麗正宮(史, 36. 9), (闕)西宮(史, 37. 7), 今旦洞宮(史, 39. 4), 辰嚴宮(史, 元宗 9.12)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本宮이 아니고 別宮들이다.

궁전 외에 관아 등 공공시설물도 천도 초기 활발한 건축이 있었을 터이나 세부적 기록은 없고 다만 御醬庫, 太常府, 輪養都監 등의 관서가 見子山의 延慶宮 부근에 위치했다는 것이 확인되며, 최항 집권시대에 景靈殿,國子監(고종 38년 8월), 九曜堂(40년 6월), 太廟 등의 신 개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기본적 공공시설들이 대체적으로 정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고종 42년 최씨정권의 공적을 기리는 조서 가운데

晉陽公 崔怡는 ..... 몸소 乘 를 받들고 땅을 골라 천도를 단행, 몇년 되지 않아 궁궐과 관아를 모두 지으니 憲章이 다시 三韓을 再生시켰다. ({高麗史} 129, 崔抗傳)

라 한 것도 천도 초기에 궁궐과 더불어 관아건물이 우선적으로 營建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 파악해 보면 강도시대 각종 건축물의 조영은 고종 19년 7월 천도 이후 몽고의 3차 침입이 개시되는 22년 이전까지의 수년간 집중적인 작업이 있었고, 그후 고종 30년대를 전후한 시기, 그리고 36년부터 대략 40년 이전의 시기 등 주로 대몽항쟁의 소강기에 계속적인 정비 혹은 신 개축 작업이 보완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들 궁궐, 관아의 조영은 주로 정부의 부위군과 지방에서 징발된 民丁들의 努力 동원에 의한 것이었다. 이점은 고종 19년 천도 당시 궁궐의 營建을 위하여 2領의 병력이 우선적으로 동원되었다는 사실과, {고종세가} 21년 1월에 "諸道의 民丁을 징발하여 宮闕과 百司를 營建하였다" 고 한 것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이들 작업에서 군인과 民丁 이외에 최씨의 私兵이 동원되기도 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강도의 궁궐 조영이 최우의 私財와 私兵에 크게 의존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같은 현상은 최항의 시대에 있어서도 나타난다. 그의 墓誌에 "太廟는 곧 국가의 근본이고 大學은 곧 敎化의 원천이므로 모두 私財를 들이고 門卒을 보내 경영한 것" 이라 하여 고종 42년의 太廟와 동왕 38년의 國子監의 조영이 바로 최항의 出資와 私兵 동원에 의한 것임을 밝힌 것 이 그것이다. 고종 40년에 건축된 九曜堂도 이와 동일한 경우라고 생각되는데 최씨 집정자의 이같은 조치는 왕실과 文人들을 겨냥한 다분히 정치적인 배려였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2) 저택과 民居

고종 21년은 궁전 및 관아의 건축이 활발하였으며, 이러한 추세에 상응하여 집정자 최우도 사제를 새로 신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저택이 극히 광대, 호화로왔음은 개경으로부터 재목을 가져왔다던지, 정원수를 본토에서 전부 실어와 수십 리에 달하는 園林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에 의하여 짐작할 수 있다. 저택의 규모에 따라 이 役事에 동원된 인원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4천(4領軍) 이상, 아마도 6,7천은 족히 동원되었으리라 생각되는데, 이것은 고종 19년 7월 천도 당시 궁궐의 始營을 위하여 2領軍(2천)이 파견되었던 것을 기억할 때 막대한 인력 동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집정자 최우가 이와 같이 막대한 재력과 인력을 투입, 저택을 건축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것은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노출된 권위의 불안을 의식한 듯 하다.

이 최우 저택의 위치는 見子山 부근이었던 것 같다. 이로써 볼때 견자산 기슭은 북쪽에 延慶宮을 비롯한 몇몇 관서들과 法王寺라는 사원이, 그리고 동쪽 기슭에는 최씨의 거창한 저택이 자리잡고 있었으니, 견자산은 궁궐이 있는 송악산 하의 남쪽 기슭과 함께 당시 강도의 중심을 형성하였던 지역임을 알게 된다.

최씨의 저택 외에 지배관료들의 가택도 함께 건축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이들 권력자의 가택 건축, 특히 최씨 집정자의 가택 경영에는 주로 그의 사병과 문객들이 동원되어 勞役과 감독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의 부위군과 백성들도 다수 동원되었으니 이 사실은 {高麗史} 129, 崔怡傳 고종 21년 기록에 "최이가 자기 집을 짓는데 都房과 4領의 군사를 사역시켰다" 라고 한 것이나 또는 이때 門客將軍 朴承憤으로 많은 郡縣民을 동원, 정원수를 옮겼던 기록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와같은 현상은 최씨의 사병이 국가기관의 건축에 동원되기도 하였던 사실과 함께, 무인정권 자체가 가지는 公私混淆的 성격의 일면이 반영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한편 {江華府志} 고적조에 "舊邑址는 (江華)府의 북쪽 성밖 唐州洞에 있다." 라고 한 것을 보면, 麗代의 강도는 오늘날과 달리 성밖 북쪽 일대에 까지 도시가 광범하게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화 천도 당시 개경은 "京都의 戶가 10만에 이르렀다."라고 하여, 아마도 인구 10여만은 헤아리는 도시규모였던 것 같다. 이 가운데 강도로 이주한 인구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불명이지만 관료, 吏屬과 군인 및 그 家屬들만도 적지않은 수였을 것이다.

개경민 이외에도 인근 민호의 강화 입보가 시행되었으니, 고종 22년 몽고의 3차 침입이 개시되자 강도정부가 廣州와 南京民을 강화에 合入케 한 조치가 그것이다. 이렇게 하여 江都는 일거에 많은 民戶가 이주하였고 거기다 왕궁을 비롯한 각종의 관아와 군사시설 등이 경영됨으로써 도시구조가 전면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강도시대 민가에서의 화재 빈발은 무엇보다도 무질서하게 밀집되어버린 도시구조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갑작스러운 천도의 단행으로 한꺼번에 대규모 인구가 이입해 옴으로써 계획성 없이 민거가 밀집되었던 것이 특별히 대형 화재를 유발시킨 요인이었던 것 같다.

강도의 시가는 대궐 남쪽이 중심가를 이루었다고 보여지고 견자산 북쪽에도 큰 마을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께 보면 당시의 민가와 시가지는 오늘의 송악산 남쪽과 견자산 북쪽을 연결짓는 선상을 주축으로 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천도 초기 강도는 특히 식량문제로 곤란을 겪었는데 녹봉 지급조차 순조롭지 못해 재상을 지낸 이규보조차 자신의 빈곤을 자주 호소할 정도였다. 더욱이 전쟁이 계속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고종말년 이후 강도정부의 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이를 타계하기 위한 시책들이 취해지기도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무인집정자들은 제한적이나마 개경시대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여려운 상황속에서 불력을 빌어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하고자 대장경의 조판이 이루어졌다. 초조 대장경이 1232년(고종19)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불타자 당시의 집권자이던 최우 등을 중심으로 선원사에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6년만에 완성하였다. 일반적으로 이 대장경판은 고려시대에 판각되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이라 하며, 매수가 8만 4천 번뇌에 응하는 8만 4천 법문을 수록하였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현재는 해인사에 보관되고 있다.

3) 방어시설

몽고의 병란을 피하여 강화로 천도한 당시의 상황에서 강도의 방어설비는 궁궐, 관아시설 이상으로 긴요한 것이었다. 그 방어시설의 중심은 강도를 둘러싼 성곽으로 내성, 외성, 중성의 3중으로 구축되었다. 이를 개별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내성은 구 성격상 가장 먼저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축조시기에 관한 기록은 없다. 천도 초기 궁궐의 營造와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인데, 이때의 조영은 본래 있던 성에 천도 후 상당한 보수를 한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내성은 외성과 같이 대략 조선시대의 내성, 즉 오늘날의 강화산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내성은 현재 읍내의 송악산, 新門里, 南山里 일대를 둘러싸고 있는데 고종46년 6월 몽고와의 和議進展에 따른 선행 요구조건으로 몽고 사신 입회하에 파훼되었다.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인조 때에 다시 강화성이 축조되었다. 강화도에서 정묘호란을 치른 인조는 국방상의 요새인 이곳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옛 궁지를 중심으로 성을 쌓게 하였다. 그러나 강화성은 그후 병자호란 때 침입한 後金軍에 의해 1637년(인조 15)에 또다시 完破되었다.

다음으로, 외성은 {高麗史}에 축조시기에 대하여 고종 20년,혹은 동 24년의 두 가지로 등장하는데 이는 외성의 시축과 완공의 연대를 각각 나타내고 있는것 같다. 만일 이 추측이 사실이 라면 외성은 대략 5년의 축조기간이 소요된 셈이 되는데 외성의 규모를 감안할 때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고종 22년 12월 {高麗史節要}의 기록에 "최우가 재추와 더불어 州縣의 一品軍을 징발하여 강화 연안의 堤岸을 논의 하였다" 고 하였는데 외성이 강화 東岸의 線을 포함한다고 볼 때 이 공사는 결국 외성축성 작업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강도의 중성은 최항이 집권한 이듬해인 고종 37년 8월 27일 착공하였고, 둘레는 2,960여 間, 그리고 관련 성문이 17개인 규모였다. 그런데 동년 12월 최항이 중성 축조의 공으로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보면 공사기간은 불과 3개월여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중성의 규모가 작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중성 축조의 공으로 문하시중에 임명했다는 것은 아직 工役이 진행되고 있는 기간중에 관직이 부여되었던것 같다.

강화도는 一帶河를 사이에 두고 육지와 떨어진 섬이라는 점에서 몽고군 방어에 지리적 이점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성곽과 같은 인위적 방어시설이 가지는 방어상의 비중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의 집정자들이 많은 인력을 동원, 성곽을 3중으로 중첩하여 구축하였던 사실 자체가 이점을 잘 말해준다. 말하자면 단순히 강화도의 지리적 조건만으로 적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강도에는 중앙의 京軍과 夜別抄 및 최씨의 私兵都房 등 고려의 주요 병력이 집중되어 있었고, 강도 방어에 대한 무인정권의 확고한 의지와 입장, 거기에 3중의 성곽이 장치되었던 것이니 이러한 여러 요소가 강도의 안전을 보장하는 요소였던 것이다. 강도 방어상에 있어서 성곽의 중요성과 비중은 다음의 두 가지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즉 당시의 천도에 대한 칭송 혹은 강도의 안전을 표현한 詩文 가운데 성곽을 자주 들고 있는 점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말기 몽고와의 화의가 진행되면서 몽고가 우선적으로 요구한 것이 다름아닌 강도 성곽의 파훼였다는 사실이다.

한편, 몽고측은 강도의 축성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느데 고종 37년 최항에 의해 중선이 새로 축성되자 이 무렵 고려에 온 몽고사신은 "너희 나라가 이미 항복하고 출륙하고자 하면서 왜 성을 쌓느냐"고 항의를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는 "송나라의 해적선이 왕래하므로 성을 쌓아 대비하고자 하는 것으로 다른 뜻은 없다" 고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그 후 몽고는 고려에 대해 강도 성곽의 파훼를 정식으로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몽고의 5차침입 기간인 고종 46년 6월 몽고사신의 감독하에 내, 외성이 깨뜨려진다. 그것은 1253년부터 7년간 계속된 戰禍 이후, 太子의 入朝(4월)와 더불어 고려의 출륙 약속에 대한 선행조치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항몽전쟁으로 인하여 파란 많은 40년 기간을 수도로서 가능하였던 강도는 원종 11년 8월 개경에의 환도 조치 이후 蒙使에 의해 불태워져버렸다. "頭輦歌가 사람을 시켜 江華성내의 민가를 불태우니 무릇 未穀,財貨가 타버린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라는 기록이 말해주고 있다. 이로써 전시수도로서의 기능을 다하면서 무인정권 항몽정책의 여건을 뒷받침해 주었던 강도시대는 막을 내렸다.

고려의 항몽전쟁은 그것이 대외전쟁이라는 측면 외에 대내적인 정치권력의 향배문제와 직결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른 시기의 대외항쟁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하겠다. 그것은 국왕이 아닌 특정의 집정자에 의해 권력이 전단되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기인한 것인데, 강화천도는 특히 이러한 특수성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최씨정권의 강화천도는 강도시대의 文人들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는데, 이규보는 이를 고려의 정치적 독립성 및 문화적 자존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결단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강도시절 본토에서 몽고군에게 유린당한 백성들의 문제를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참 고 문 헌 >

* 尹龍爀, {고려대몽항쟁사연구}, 일지사 1991.

* 尹龍爀, {高麗史의 제문제}, 일지사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