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Ⅷ. 개 항 과 강 화 도

고 정 서(94)

1. 개항이전의 시대적 상황

1) 병 인 양 요

2) 신 미 양 요

2. 강화도 조약의 체결과 개항

1) 운 양 호 사 건

2) 조 약 의 체 결

1. 개항이전의 시대적 상황

19세기에 들어 동양 3국의 외교적 균형은 서양 세력에 의해 깨어지게 되었다. 서구 열강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자본주의체제를 확립하고, 19세기 중엽 이후 제국주의체제로 이행하였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값싼 원료산지와 넓은 상품시장, 자본의 투하대상을 확보하기 위해 주로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등지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동북아시아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특히 중국은 주목되는 대상지였다.

영국은 1840년 아편전쟁을 도발하면서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개시하였다. 영국은 아편전쟁의 결과 중국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여 홍콩을 조차하고, 상해, 광주 등 5개 항구의 개방을 강제하였다. 뒤이어 프랑스와 미국도 중국과 각각 치외법권과 무역상의 최혜국대우를 보장받았다. 서구열강의 중국침략은 크림전쟁의 발발로 한때 주춤했으나, 1856년 전쟁이 끝나자 영불연합군은 1856년 제2차 아편전쟁을 도발하여 천진과 북경을 함락시켰다. 그 결과 천진조약(1858)과 북경조약(1860)이 체결되었다. 이제 중국은 자본주의 열강의 원료공급지와 상품시장으로 전락하였고, 국내의 산업은 파탄되어 반식민지화되었다.

미국은 1844년 중국과 불평등조약을 맺어 중국에 진출하는 한편, 1854년에는 페리가 이끄는 黑船의 무력시위로 일본을 위협하여 불평등조약을 맺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제2차 아편전쟁의 혼란을 틈타 1857년과 1858년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흑룡강과 연해주를 얻어냈다.

이와같은 동아시아국가에 대한 서구열강의 침략은 조선에 대해서도 예외일 수 없었다. 19세기 초부터 일본과 중국을 왕래하여 무역하던 외국상선, 즉 異樣船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식수나 식량의 공급을 목적으로 접근하였지만 점차 통상을 요구하였다. 1860년대를 전후하여 이양선의 출몰은 더욱 빈번해졌고, 국내에서는 천주교가 교세를 확장하면서 서양신부들이 들어와 봉건지배체제를 크게 동요시켰다.

이러한 국제정세는, 1863년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의 지위에 오른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쇄국정책을 실시하게 하였다. 대원군은 지방관리들에게 이양선의 출현을 경계하도록 명령하여 절대로 통상을 할 수 없게 하고, 강화도, 교동, 영종도 등 서해안 일대와 한강하구에는 성과 진을 수축, 정비하고 포대를 설치하여 해안경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또한 일본이 구미열강과 국교를 맺자 일본과의 통상마저 단절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동래성 일대의 방비도 강화하였다. 그러나 서구열강은 이러한 쇄국정책하에서도 온갖 구실을 붙여 조선에 대한 개국을 강요하였다. 영국은 1866년 2월 로나호, 같은해 7월 엠페러호를 파견하여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러시아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1865년부터 조선의 국경지대에 사절을 파견하여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대원군 정권이 러시아에 대한 내응자를 처벌하고, 두만강유역에 둔전을 설치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 병 인 양 요

프랑스는 1831년 조선교구가 북경교구 관할에서 분리, 독립되어 관할권을 프랑스 외방선교회가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다. 외방선교회에서는 1838년 초 앙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땅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여 천주교세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활동으로 1839년에는 천주교 신자가 9천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으나 조선정부는 천주교를 탄압하여 3명의 신부 모두를 처형하였다(기해박해). 프랑스는 이 사건을 조선침략의 구실로 이용하여 1846년과 1847년 두 차례에 걸쳐 극동함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폭풍 때문에 상륙하지 못하고 무력위협을 경고하는 서한만 남기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866년 초 조선정부는 프랑스 신부 9명과 8천여 명의 천주교도를 대대적으로 처형하였다(병인박해). 집권초기에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용적이었던 대원군은 때마침 부동항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던 러시아가 통상을 요구해오자 프랑스정부의 힘을 빌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인 신도 南鐘三과 프랑스 신부를 통하여 추진되던 이 계획이 실현 불가능해지고, 유생, 양반들의 천주교 금압요구가 높아지자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처형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이때 죽음을 면한 리델 신부가 천지으로 탈출하여 프랑스 극동함대에 이 사실을 알리자 천주교를 무기삼아 식민지 획득에 열중하였던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대규모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프랑스군은 1866년 8월에 우선 3척의 군함을 파견하여 경기도 남양만에서 서울 서강에 이르는 항로를 측량하고 돌아간 뒤, 9월에는 7척의 군함과 2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침략전쟁을 도발하였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한 후, 조선정부에 대해 프랑스 신부 살해에 대한 배상금 지급과 책임자 처벌 및 통상조약의 체결 등 침략적 요구를 제시하였다.

대원군 정권은 이러한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훈련대장 이경하에게 2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울과 한강연안의 사수를 맡도록 하는 한편, 전국각지에서 4000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하여 전투에 투입하였다. 이처럼 조선군의 결전태세가 정비되는 가운데 프랑스군운 통진에 상륙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맞서 조선의용군부대는 적을 문수산성으로 유인하여 섬멸하였다.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전투에서 패배하자 이번에는 강화성의 요충지인 정족산성을 점령하려고 기도하였다. 여기에 맞서서 양헌수가 지휘하는 의용군부대가 덕포에서 비밀리에 심야 潛渡작전을 전개, 강화해협을 건너서 정족산성에 들어갔다. 11월 7일 프랑스군대가 눈치채지 못한 가운데 500명의 군대가 정족산성을 점거한 것이다. 이와 같은 보고를 접한 로즈는 11월 10일 180명의 분견대를 파견하여 정족산성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적의 내습에 대비해 미리 잠복중이던 조선군이 일제히 포격을 가함으로써 일대 접전이 벌어졌다. 이날의 접전 결과 프랑스군은 29명의 부상자를 내고 퇴각한 반면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로즈는 상황이 극히 불리한 것으로 판단하여, 다음날 즉각 강화도를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이같은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江華留守府내의 궁전들을 파괴하고 그곳에 보관중이던 은괴와 외규장각 도서들을 약탈하였다.

강화도에는 1781년(정조 5) 3월에 外奎章閣이 설립되어 강화부 內冊庫의 책들과 서울 궁성의 의궤·옥책 등을 다수 옮겨와서 보관하고 있었다. 정조는 '성인절대군주'정치를 이루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정치사상과 체제를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왕실의 권위와 관계되는 일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음은 물론이다. 종래 전란에 대비해 강화도에 안치되었던 역대 왕들의 교명과 책보·어제·어필 등에 대한 관리문제는 정조의 이러한 정치체제 구상에서 새로운 중요성을 가지게 되어, 그 의도에 맞추어 강화부로 統禦營을 옮기고 외규장각이 설립되는 제도적 조치가 취해진 것이었다.

정조 8년에 편찬된 {규장각지}에 외규장각은 6칸 크기로 강도 행궁의 동쪽, 장녕전의 서쪽에 있었다고 하며, 1813년(순조 13) 이후 {外奎章閣圖書曝 形止案}(외규장각포쇄형지안)에 의하면 당시 이곳에는 1,042종 6,130책이 보관중이었다고 한다. 그중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것은 200종 340책으로 나머지는 모두 불에 타버렸던 것이다.

귀중한 문화재들을 잃어버렸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최근 우리 정부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의궤도서들을 반환해줄 것을 프랑스 정부에게 요청한 일이다. 1991년말의 이 요청은 그 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방한하였을 때 '반환' 약속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단 국외로 반출된 문화재를 되찾으려면 그만큼의 값을 치러야 한다. 이번 외규장각도서 반환건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문화재의 중요성과 그것을 보호하는 진정한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다.

2) 신 미 양 요

병인양요 이후 얼마지나지 않아 미국은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개항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871년 전통적인 砲艦외교에 의해 조선을 개항시키기로 결정하고 주청 미국공사 로우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에게 해군함대를 동원한 조선 원정을 명하였다.

이에 로저스는 인천 앞바다에 내침하여 서울로 가기 위한 수로를 탐색하고자 조선대표에게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한 뒤 6월 1일 강화해협의 탐측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손돌목 포격사건 직후 미국대표는 조선측에게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과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해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이같은 주장에 대하여 조선측은 강화해협은 국방 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미군함대가 조선당국의 정식 허락없이 항행하는 것은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에 상륙작전을 단행하였다. 해상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킨 뒤 초지진을 점거한 미군은 6월 11일 덕진진을 무혈점거하고, 마지막으로 광성진작전을 수행하였다. 광성진에는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수비병 100여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광성진에 대한 수륙 양면포격을 한시간 벌인 끝에 광성진를 점령하였다.

이 싸움에서 아군은 중군 어재연, 어재순, 군관 이현학, 천총 김현경, 광성별장 박치성 등 전원이 전사했고, 미군측도 해군 맥키 중위 이하 3명이 전사, 1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이렇게 되자, 강화부의 책임자 이장렴은 군사 500명을 인솔하고 밤에 기습작전을 감행하여 초지진으로 쳐들어갔다. 미군은 당황하여 초지진 앞바다에 정박시켜 놓은 군함으로 달아나기 시작했지만, 우리측 무기의 열세로 큰 피해는 입히지 못했다. 어쨌든 미군은 이 싸움으로 이 이상의 공격이 무모함을 깨닫고, 부평부사 이기조에게 외국 사신을 배척한다는 것은 불미한 일이라고 말하고 물러갔다.

대원군 정권은 광성진 전투에서 미국을 무찌른 뒤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열강의 침략에 대한 강력한 쇄국정책을 계속해 갔다. 그것은 격변하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을 외부세계와 차단시켜 봉건적 지배체제를 유지하려는 보수정책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대원군 정권이 반침략투쟁의 과정에서 발휘한 지도력은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오히려 봉건지배체제를 유지, 강화하는 방향으로 행사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타율적 개항을 맞아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2. 강화도 조약의 체결과 개항

1) 운양호사건

1865년 왕정복고에 의해 천황친정체제를 마련하고 급속한 근대화 운동인 명치유신을 단행하여 근대국가로의 발전을 기하게 된 일본은 근대적 국교관계를 맺고자 조선에 접근해왔다. 그러나 조선은 국서의 서식이 종래와 다르고 대마도주의 직함이 다르다고 하여 국서의 접수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書契문제에 얽혀 교섭이 난항에 빠지던 중 대원군의 하야와 민씨정권의 등장으로 통교 교섭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민씨정권 또한 개국을 以夷制夷정책의 한 방편으로 삼았을 뿐 개국에 대한 확고한 의지는 없었기 때문에 협상은 곧 결렬되고 말았다. 일본은 평화적 교섭에 의한 국교수립이 실패하자 그 책임을 조선에 전가하면서 征韓論에 입각한 무력개국정책을 다시 추진하였다. 정한론은 도쿠가와 막부시대부터 조선정벌을 꿈꾸는 침략주의자들에 의해서 주장된 것으로, 조선을 무력으로 침공하려는 일본의 침략적 팽창론이었다.

한편 일본은 1871년 4월 청과 <淸日修好條規商程各海關稅則>을 체결하여 조선과의 교섭에서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또 만일 무력을 행사할 때에도 청이나 구미열강이 간섭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일본은 정한론에 입각하여 1875년 8월 군함 운양호를 강화도에 파견하였다.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 부근에 정박한 운양호는 담수를 구한다는 구실로 연안 탐색을 시작하여 초지진 포대까지 이르게 되니 조선 수병은 포격을 가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응징보복으로 일본군은 포대를 파괴하고 영종진에 상륙하여 조선인을 살륙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1876년 1월 8척의 군함과 600여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통상을 요구하면서 부산항에 난입, 무력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때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제국주의 국가들도 일본의 무력개국정책을 적극 지지하였다. 특히 당시 주일미국공사 빙함(Bingham)은 副全權 이노우에(井上馨)에게 {페리의 일본원정소사}를 기증하여 일본을 강제개국한 미국의 예를 참고하도록 지시하는 등 적극 지원하였다.

2) 조 약 의 체 결

일본의 무력시위와 통상요구에 직면한 조선 정부는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강화를 회담 장소로 결정하고 교섭을 추진하였다.

회담은 모두 3차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어영대장 신헌을 내세워 일본공사의 서울체재 불허, 경기·충청·전라의 개항 불가, 최혜국 조항의 폐지, 미곡 교역의 금지, 아편 수입의 금지, 천주교 전래의 금지 등을 제안했으나, 일본측의 반대에 부딪쳐 최혜국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측이 제안한대로 통과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조선은 1876년 2월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면서 불평등조약인 <朝日修好條規>를 체결하여 개항을 하게 되었다.

조일수호조규 체결 당시 조선정부는 구래의 교린관계를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대일교섭에 임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근대적 국제관계에 대한 지식이 결여된 것이었고, 일본의 요구가 쉽게 관철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일본은 자신이 서양제국에게 강요강했던 불평등조약의 독소조항을 그대로 조선에 강요하였다.

12개조로 이루어진 조일수호조규는 첫째, 부산 등 3개 항구의 개방, 둘째 일본인 범죄에 대한 영사재판권의 허용, 세째 조선연해에 대한 자유로운 측량 및 지도작성의 자유보장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이 조약은 조선인이 일본에서 누릴 권리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일본인이 조선에서 누릴 권리만 상세하게 규정한 것으로 일본이 침략하는 길을 열어준 불평등조약이었다. 또한 이 조약은 조선사회 내부에서 발전하고 있었던 자본주의적 관계를 파괴하여 일본에의 경제적 예속을 촉진하였고, 치외법권, 측량의 자유 등을 허용함으로써 조선을 정치, 군사적으로 예속시킬 조건을 마련한 것이었다.

한편 조일수호조규를 보완하여 1876년 7월에 체결된 <조일수호조규부록>과 잠정적 통상협정인 <조일무역규칙>에서는 개항장에서의 일본화폐 유통권, 수출입상품에 대한 무관세권, 일본관리자의 내지여행 인정, 쌀과 잡곡의 수출허가 등을 규정함으로써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확실히 보장해 주었다.

조일수호조규의 주요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 1 조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 2 조 양국은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교제사무를 협의한

다.

제 5 조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허여한다.

제 7 조 조선은 연안항해의 안전을 위해 일본 항해자로 하여금 해안측량

을 허용한다.

제 10 조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

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제 11 조 양국상인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추후 통상장정을 체결한다.

특히, 제 1 조는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평가되며, 제 5조는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개 함으로써 통상업무 외에 정치적·군사적 침략 의도가 내포된 것이었다. 그리고 제7조는 조선연안 측량권을 얻음으로써 군사작전시 상륙지점을 정탐하게 하였으며, 제10조는 치외법권을 인정한 불평등조약이었다 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일본에 의한 독점적 경제침탈이 계속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정부는 {조선책략}의 '親中國', '結日本', '聯美國'이라는 외교방침의 시사에 따라 청의 지원을 받아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규를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는 협정관세율규정과 곡물수출금지조항이 갖춰져 있었지만, 새로이 최혜국대우조항이 설정되는 등, 여전히 불평등조약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정부는 청나라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외교관계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청국은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한 뒤, 조선에 주둔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 조약은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는 규정을 명시하였을 뿐 아니라 일방적인 치외법권, 서울과 양화진의 개시 및 청나라 상인의 내지통상권, 연안어업권, 연안무역권과 청국군함의 항행권까지 허용하여 이전의 어떤 조약보다도 불리한 것이었다. 이러한 조청간의 불평등조약의 내용은 1883년 조일수호통상조약의 수정체결시에 대부분 반영되었다.

그후 조선정부는 독일(1882), 영국(1883), 러시아(1884), 이태리(1884), 프랑스(1886), 오스트리아(1892) 등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들과의 조약에도 최혜국조항이 적용되어 조선은 이중삼중의 불평등조약체제하에 얽매이게 되었다. 즉, 조선은 1876년 개항을 계기로 구미자본주의 열강과 이에 종속된 일본·청에 의한 이중의 外壓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강화도조약의 체결은 조선이 국제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세계자본주의에 종속되었으며, 이는 곧 식민지화라는 민족적 위기를 조성하였다. 따라서 우리 역사에는 봉건적 사회모순을 극복하여 근대적 사회체제를 만들어가는 반봉건 근대화라는 과제와 함께, 제국주의침략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수호하고 독립국가를 유지해야 하는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이라는 두 가지 과제가 주어지게 되었다.
 

< 참 고 문 헌 >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6}, 탐구당.

* 이상옥, {한국의 역사 6 - 왕조의 조언}, 배영서적 1982.

*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3.

*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