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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강 화

1. 지 리 와 풍 토

강화도는 우리나라 중부를 흐르는 한강의 관문으로 서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섬이다. 크기는 비록 제주도와 거제도보다 작지만 선사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기시작하여 지금도 강화도에는 그때에 세워진 고인돌 무덤이 많이 남아 있다.

강화도는 행정 구역상 유인도 11개와 무인도 16개로 이루어져 있다. 강화도의 지형은 남북 길이가 29km, 동서 길이가 16km, 둘레가 112km인 타원형으로 총면적은 407.7제곱 킬로미터가 된다. 강화군은 행정 구역은 1개 읍, 12개면, 16개 리 이며 자연 촌락은 모두 313개이다. 여기에 2만 730호, 7만 433명(95년 현재)이 살고 있다. 군청은 강화읍 관청리에 소재하고 있다. 강화군에는 모두 31개 국민학교, 10개 중학교, 7개 고등학교가 있으나 아직 전문대학 수준 이상의 고등교육 기관은 없는 실정이다.

강화의 지질은 약 80%가 경기편마암 복합체 가운데 화강편마암이며 대체로 흑운모편마암, 장석편마암 등으로 분류된다. 특히 강화도 남쪽 끝 마니산의 지질은 마니산화강암 곧 흑운모화강암, 각석화강암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강화 해안 지대는 30m에서 40m 높이의 완만한 경사면을 가진 구릉 모양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이른바 저위 침식면 가운데 아래쪽 끝에 속하는 것으로 현재는 작은 하천에 침식당하고 있다. 이런 구릉지는 마을이 자리잡을 수 있는 좋은 입지를제공하고 경작지로도 이용되며 홍수나 해일과 같은 자연 재해를 피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다. 관개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하천은 충분하지 못하나 땅은 비교적 기름진 편이어서 농업 발달면에서 좋은 환경이 된다. 경기도 일대에 장마가 져도 강화에 큰 피해가 없는 것은 이러한 지형 조건 때문이다.

강화의 기후는 기온이 연교차가 심하지 않고 대체로 따뜻한 편이다. 연평균 기온도 11.1도이며 강우량도 연평균 1,005mm(1992년 1월 1일 현재)정도로 농사짓기에 매우 좋다. 남쪽에서 주로 자라는 탱자나무가 화도면 사기리와 강화읍 갑곶리 일대에 자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화 갑곶리의 탱자나무와 강화 사기리의 탱자나무는 각각 천연기념물 제78호·제79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강화군 서도면 바닷가의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04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강화의 특산물로는 강화 쌀을 비롯하여 인삼, 고추, 영지버섯, 감, 순무, 새우젓, 김 그리고 왕골과 화문석이 잘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인삼은 1900년대 초에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강화도에 들어서면 흔히 볼 수 있는 발이 덮인 인삼밭은 새로운 풍물적 요소이기도 하다. 또한 왕골을 곱게 물들여 짠 화문석은 그 촘촘하고 고운 문양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화문석 場이 따로 설 정도이다.

강화도 남단 길상면, 화도면 개펄은 쇠청다리도요새사촌, 노랑부리백로 등 희귀조류를 비롯하여 한국산 게 17종 가운데 13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민꽃새우, 젖새우, 딱총새우 등 희귀종의 갑각류와 38종의 해안 식물이 군락을 형성하고 있고 곤충류도 비교적 풍부하게 발견되고 있다. 이처럼 강화도는 우리나라 생태계 보고로 손꼽히고 있어 앞으로 해양 생태계 보호 지역으로 지정될 전망이다.

2. 강 화 약 사(略史)

강화도는 삼국시대에 백제의 서울인 위례성(한성)의 관문에 자리잡은 요새였고고구려와 교류를 하거나 바다를 통해 중국 등지의 대외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 기지가 되기도 했다. 한성을 도읍으로 한 백제 전기에는 서해 大島로 알려지기도 했다.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수군을 거느리고 한강 어귀인 강화 부근에 와서 크게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최대 격전지였던 것으로 알려진 관미성이 한강 유역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고구려는 강화해협을 뚫고 파죽지세로 아리수(우리하, 한강)를 거슬러 백제의 서울인 한성(지금의 강남 지구)을 함락시키고 백제 아신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이로써 백제는 한강 이북 58개 성 700촌을 고구려에 내주고 말았다.

그 뒤 5세기 후반 475년에 다시 장수왕이 5만 대군을 몰아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의 개로왕이 죽고 아들 문주왕은 그해 서울을 버리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한강 이남까지도 모두 고구려에 내주었다. 강화도는 이때 고구려에 귀속되었는데 당시 군 이름은 穴口 또는 甲比古次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접 교동도는 고구려의 高木根縣이 되었다.

그 뒤 551년 백제의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과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553년에는 신라에게 다시 내주고 말았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풍부한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을 확보하여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더구나 한강 어귀는 서해를 거쳐 중국과 직접 통교할 수 있는 거점이므로 통일의 결정적인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때 신라의 대외 교통로의 첫번째 관문은 강화였을 것이다. 이때는 海口郡 또는 穴口鎭이라 했다.

고려시대에는 강화도에서 우리 민족이 잊지 못할 역사가 전개되었다. 고종 18년(1231) 몽고의 침략을 당했고, 다음해인 1232년 고종은 왕실 귀족을 비롯한 조정 관료들과 함께 모두 강화로 천도하여 원종 11년(1270)에 개경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39년 동안 몽고군사와 대치하면서 나라를 지킨 파란만장한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부터 강화를 강도로 불렀다. 지금도 강화도에는 고려시대 별도인 강도의 왕궁터가 남아 있고 몽고와 항쟁하던 흔적들도 성곽 곳곳에 남아 있다.

한편 고려 무인 정권인 군사적 뒷받침이 되어 몽고와 항쟁해 왔던 삼별초는 원종의 개경 환도가 알려지자 즉시 대항하고 나섰다. 그들은 배중손을 중심으로 개경 정부와 대립하는 새로운 항몽 정권을 수립하였으나 곧 진도로 남하하고 말았다.

고려가 몽고와 항쟁하는 와중에서 남긴 가장 훌륭한 업적이라면 팔만 대장경의조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당시의 조판을 진행했던 장소와 그 경과를 밝히지 못하고 있어 아쉬움을 준다. 그런가 하면 고려 청자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보물들이 일제시대에 마구 도굴되어 그 폐단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고려 청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히는 국보 제133호 靑瓷辰沙蓮花紋瓢注子는 바로 강화도의 최충헌 묘에서 도굴된 것이다.

이 시기에 고려 사람들은 강화 남쪽 마니산 꼭대기에 첨성단을 다시 쌓아 하늘과 단군에게 제사지냈다. 이는 우리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고 국난을 당해 나라를 지키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조선시대 인조 임금은 1627년 금나라 3만 군사의 침입을 받고는 평복 차림으로 강화로 피신하여 100일 동안을 머무른 적이 있는데 이 사건이 바로 丁卯胡亂이다.

1636년 청나라 태종이 쳐들어왔을 때는 인조가 미처 강화로 피란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퇴각했는데, 강화가 청에게 넘어가고 봉림대군과 빈궁 및 여러 대신등 200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자 항복하고 말았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이때 강화도는 종묘 사직을 지키기 위한 背都가 되어 留守와 經歷을 갖추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뒤 효종은 인조 때 당한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계획하고 강화 해안에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 광성보, 인화보, 승천보 등과 같은 방어시설을 새로 쌓거나 고쳤다. 그리고 숙종은 강화도 해안 전역의 돌출부에 큰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작은 톱니바퀴 모양으로 53개(2개는 얼마뒤에 폐지되었다)의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강화도 전지역을 요새화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서양 세력이 조선을 넘보기 시작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먼저 항강 어귀 강화에까지 쳐들어온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를 침략한 신미양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때마다 강화의 백성들은 외세에 대항하여 번번이 나라를 구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875년 일본 군함이 강화에 침입하여 이른바 운양호사건을 일으켰고, 다음해(1876년)에 강화도 조약이 강요되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병자수호조약이다. 그로부터 35년 뒤인 1910년 조선은 일본에 의해 완전히 병합되고 말았다.

3. 마 니 산(摩尼山)

소재지 : 경기도 강화군 화도면

높 이 : 467M

마니산은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산정에서는 한눈에 강화도의 서해 및,넓은 김포벌판, 해안의 간척지, 염전 등을 조망할 수 있다. 마니산은 본래 古加島라는 섬으로 바다 한가운데 솟아 있었던 것인데, 1664년 유수 조복양이 가릉포와 선두포에 둑을 쌓은 뒤로 육지가 되었다. 이 산은 마리산?머리산이라고도 불리는데 {고려사}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摩利山으로 되어 있고 그뒤에 마니산으로 바뀌었다.

마니산 정상에는 참성단이 있고, 東峰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개산한 고찰 淨水寺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마니산 산록에는 조선시대부터 형성된 여러 촌락이 있다. 북록의 내리?문산리?상방리는 마니산을 오르는 입구에 있고, 동록에는 사기리, 남록에는 흥왕리, 서북에는 장화리 등이 있다. 沙器里는 지명이 말해주듯이 고려 분청사기의 가마터가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남쪽의 흥왕리에는 강도시대의 고려 이궁이 있던 흥왕리궁터가 있다. 또 내리 중앙에는 가곶보와 유수 조복양이 막았다는 가릉포 둑이 있다.

4. 참 성 단(塹城壇)

소재지 : 경기도 강화군 마니산

지 정 : 사적 제136호

마니산 정상에는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이 있다. 이것은 높이가 5m를 넘으며 자연석을 쌓은 것인데, 기단은 지름 4.5m의 원형이고 상단은 사방 2m의 네모꼴로 되어 있다. 이 단의 축조연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못하고 있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4천년을 넘는 유물일 것이다. 또 후세에 와서 그 위치나 구조로 보아 천문 관상대와 비슷하므로 이를 병용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도 왕과 제관이 찾아가 하늘에 제사를 올렸고 조선시대에도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단역은 수천년 동안 계속 수축되어온 흔적이 있다. 정확한 수축 기록으로는 1639년(인조 17)과 1700년(숙종 26)이 있는데, 숙종 때의 수축시에는 비를 세웠다. 그 비문에 "동녘땅 수천리 전체를 둘러서 마니가 으뜸가는 명산이라. 산 서쪽 제일 높은 곳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드니 이른바 참성단이라.

세상에서 전하되 단군께서 쌓아 제단으로 하여 한얼께 제사 지낸 곳이라 하니, 돌이켜보건대 오랜 연대가 흘러 비바람에 깎이고 허물어져서 서북쪽 태반이 무너지고 동쪽 층계가 많이 허물어져서 ···· 船頭浦別將 金德夏와 전등사총섭(傳燈寺總攝) 僧 愼默이 주로 맡아 고쳐 쌓으니 20일만에 일을 마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러 번 고쳐 쌓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그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참성단은 본래 제천의 대례를 행하고자 쌓아졌으니 그 뜻은 오늘날에도 전해져 전국체전 때에는 이 단에서 봉화를 채화하는 의식이 열리고, 특히 개천절에는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제천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5. 삼 랑 성(三郞城)

소재지 :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지 정 : 사적 제130호

삼랑성의 축성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으며 다만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인해 삼랑성이라고 한다. 정족산에 위치하고 있어 일명 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곽의 축조는 거친 할석으로 되어 있으며 성내도 할석으로 채워 안팎을 겹축하여,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과 같이 삼국시대의 석성구조를 보이고 있다. 1259년(고종 46) 5월에 고종은 中郞將 白勝賢의 풍수설에 따라 이 성내에다 假闕을 지었다. 1606년(선조 39)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하여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해오다가 1660년(현종 1) 삼랑성내의 정족산사고로 옮겼다. 이때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璿願譜閣이 같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모두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 있다. 삼랑성은 고려시대 때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739년(영조 15) 중수를 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宗海樓라 하였고, 1764년 다시 성을 보수하였으며 조선말기에도 계속적인 보수가 있었다. 이를 보면 삼랑성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성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해온 것 같다. 이 산성은 또한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하려던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첩지로도 유명하다. 현재 성내에는 당시 프랑스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양헌수의 승전비가 있고, 1976년 남문을 다시 복원하고 문루를 세워서 예전대로 종해루라는 현판을 달았다. 성의 둘레는 약 1km이다.

6. 선 원 사 지(禪源寺止)

소재지 : 경기도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지 정 : 사적 제259호.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을 때 국민총화의 일환으로 창건되었다. 송광사와 함께 당시 2대 사찰로 손꼽힌 곳으로 진명?원오?자오?원명국사 등 당대의 고승들이 차례로 주지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왕실이 다시 개경으로 환도한 뒤 차츰 쇠퇴하여 조선 초기 이후에 폐허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원사는 현재 해인사에 보관중인 고려대장경의 재조사업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1398년 이 절에 있던 대장경판을 서울로 옮겨왔다

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보아 대장경판은 조선초기까지 선원사에 보관되었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이 절이 대장경판을 만든 곳이라는 문헌상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大藏都監의 본사가 강화도에 있었고 승려들이 경판을 필사하고 조각하 였다는 점 등을 통하여 경판을 보관하였던 이 절에 대장도감을 설치하였을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선원사지는 그 입지적 조건이 대장경판 간행사업을 진행시키기에는 아주 적합한 곳이다. 강화의 행궁이 가까운 곳에 있었고, 절의 앞뜰에서 부두가 보여 목판 재목을 운송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이외에 선원사가 최우의 願刹이었다는 점과 충렬왕 때 궁전으로 사용하였을 만큼 규모가 컸다는 사실 등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절터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寶相花文塼, 명문이 새겨진 막새기와, 치미, 원숭이상 등이다. 이들은 그 양도 풍부하고 질적으로도 상당히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이 절에는 오백불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7. 고 려 궁 지(高麗宮止)

소재지 : 경기도 강화군 강화면 관청리

지 정 : 사적 제133호

고려가 도읍을 옮긴 뒤 몽고의 침략에 항거하던 39년 동안 강화에 궁궐이 세워졌는데 현재 그 터를 비롯하여 여러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다.

고려는 고종 19년(1232) 6월에 최우가 왕에게 권하여 천험한 요새인 이곳 강화로 도읍을 옮긴 뒤 二領軍을 발동하고 각도의 민정을 징발하여 궁궐과 관청 건물을 세우기 시작, 고종 21년에 완성했다. 비록 천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으나 궁궐의 풍모는 사뭇 송도의 그것을 방불케 하였다.

고려궁터는 지금의 강화읍 관청리 북산 중턱이다. 이곳에는 본궁인 연경궁을 비롯하여 14개의 작은 궁궐 건물들이 만들어졌었는데 원종 11년(1270) 5월 몽고와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한 뒤에는 궁궐과 성의 대부분이 무너지거나 불타 없어졌다.

조선시대에는 행궁이 있었고 1636년에는 강화성이 청나라군에게 함락되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 뒤 이 궁터에는 강화 유수부의 건물들이 들어섰는데 이때의 동헌과 이방청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長寧殿과 奎章外閣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고려시대의 흔적은 당시의 기와쪽이 축대에 묻혀 있을 뿐 찾아볼 수가 없고 게다가 담 밖 원래의 고려궁터 일부로 추정되는 대지에 강화군이 군립도서관을 신축하고 있는 중이다.

고려가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는 離宮을 비롯하여 궁궐과 관련된 건물들을 지었다. 興旺은 고종 46년(1259)에 세운 것으로 화도면 흥왕리 북쪽 언덕의 옛 흥왕사 자리 근처이다. 지금도 주춧돌과 돌들이 남아 있어 당시 모습의 편린을 보여주고 있다.

삼랑성 假闕은 1259년 중랑장 백승현이 풍수에 따라 세운 것으로 길상면 정족산전등사 경내에 그 터가 남아 있다. 神泥洞 가궐 역시 풍수설에 의해 같은 해에 세운 것으로 일설에는 지금의 지산리와 금월리 사이 도문고개 남쪽에 옛 터가 있다.

8. 홍 릉(洪陵)

소재지 : 경기도 강화군 부내면 국화리

지 정 : 사적 제224호

고려 제23대 왕인 고종(1192 - 1259)의 능이다. 고종은 1212년(강종 1)에 태자에 책봉되어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러나 46년간의 재위기간 대부분은 최씨의 독재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였으며, 잦은 민란과 거란과 몽고의 침입에 대한 항쟁 등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어야 했다.

특히, 1231년부터 30여년간에 걸친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도로 천도하여항쟁하였으나 막대한 인명손실과 국토의 황폐화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고종은 여러 차례의 강화교섭 끝에 1259년 강화를 청하기 위해 태자 전(뒤의 元宗)을 몽고에 보냈다. 그리고 무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몽고병으로 하여금 강화의 외성과 내성을 헐게 하였다. 이와같은 태자의 親朝와 성곽의 철거는 몽고에 대한 굴복을 뜻하는 것으로, 그뒤 고려는 몽고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종이 1259년 6월 재상 유경(柳璥)의 집에서 죽자, 그해 9월 홍릉에 장례지냈다. 그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趙復陽)이 찾아내어 다시 封墳하였다. 능역은 3단면으로 되어있고 14단에 능이 있는데 높이는 5척, 직경은 14척으로 규모가 작다. 능의 네 모퉁이에는 石獸가 각각 1구씩 배치되어 있고, 그 앞 2단면에는 각주형의 문인석 2쌍이 마주하고 있으며, 조선 태조 초년에 건립한 小碑가 있다. 병석은 3개가 남아 있으나 12각형으로 능을 둘렀던 것같다. 그리고 그 앞에 丁字閣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9. 이 규 보(李奎報 1168 - 1241)

고려의 문신이며 본관은 黃驪(驪州), 자는 春卿 호는 白雲居士이다. 만년에는 술을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한다.

9세 때부터 중국고전들을 두루 읽기 시작하였고, 문재가 뛰어남을 보였다. 14세 때 사학의 하나인 誠明齋의 夏課에서 奇才라 불렸으며 장래가 촉망되었다. 이때 그의 희망은 장차 문한직을 맡아 문명을 날려 크게 입신출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科擧之文 같은 것은 하찮은 소인배들이 배우는 일로서 멸시하였고, 司馬試에 연속 낙방한 원인이 되었다. 16세 무렵에는 江左七賢과 기맥이 상통하여 그 시회에 출입하였다.

1189년 司馬試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禮部試에서 同進士로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못하자 25세 되던 해 개경의 천마산에 들어가 시문을 지으며 세상을 관조하며 지냈다. 백운거사라는 호는 이 시기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26세에 개경에 돌아와 가난에 쪼들리게 되었고 수년래의 무관자의 처지를 한탄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왕정에서의 부패와 무능, 관리들의 방탕함과 관기의 문란, 민의 피폐, 그리고 10여년래의 남부지방의 농민폭동 등은 그의 사회 국가의식을 크게 촉발하였으며, 이때에 {東明王篇}·{開元天寶詠史詩} 등을 지었다.

1197년에는 조영인, 임유, 최선 등 최충헌 정권의 요직자들에게 求官의 서신을 썼다. 거기에서는 그동안 진출이 막혔던 문사들이 적지않게 등용된 반명 그는 30세에 이르기까지 불우하게 있음을 통탄하고 일개 지방관리로라도 취관시켜 줄 것을 진정하였다. 그는 32세에 최충헌의 초청시회에서 그를 국가적인 대공로자로서 칭송시를 읊고 나서야 비로소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1207년(희종 3)에 直翰林에 權補되었고, 1215년 우정언(종8품) 知制誥로서 참관이 되었다. 이로써 출세에 있어 동료문사들과 보조를 같이하게 되었고 쾌적한 문관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217년에 최충헌의 한 논단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부하의 무고로 인하여 정직당하고 이듬해 면직되었다. 그때까지 전통적인 왕조적 규범에 의하여 직무를 수행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태도를 관리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던 그는 자신의 사고와 태도를 바꾸어 보신에 특별한 마음을 두었다.

최충헌이 사망하자 최이에 절대적 공순관계를 유지했으나, 1230년 한 사건에 휘말려 위도에 유적되어 8개월만에 풀려나왔다.

71세에 사망한 그는 문필로서 양명하고 관리로서 현달하고 그의 문집이 후세에 오래도록 전해질 수 있게 되었으니 그의 생애의 기본목적은 달성이 된 셈이었다.

그는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문한의 관직자이며, 양심적이나 소심한 사람이었다. 학식은 풍부하나 그 작품들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나타낸 자기표현이 아니었으며 그때그때 의식에 떠오르는 바가 그대로 표출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그는 본질상 입신출세주의자이며 보신주의자였다. 그가 이러한 사람이 된 근본이유는 그의 가문을 올려세우고 그의 고유의 문명을 크게 떨치고자 하는 명예심에서였다. 그러나 이규보는 최씨정권하 일반 문한직 관리층의 한 전형이었다고 할 것이다. 문집으로 {동국이상국집}이 있다. 시호는 文順이다.

10. 광 성 보(廣城堡)

소재지 : 경기도 강화군 불은면.

지 정 : 사적 제227호.

강화 12鎭堡 가운데 하나로, 1658년 강화유수 서원리(徐元履)가 설치하였다. 광성보는 1679년에 축조된 오두?화도?광성 등 세 돈대(墩臺)와 1874년에 축조된오두정포대를 관할하였다. 이곳은 또한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한 미국함대가 강화해협을 거슬러올라오는 것을 광성 草芝·덕진·덕포·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으나, 4월 23일에 450명의 미국해 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진을 점령하였다. 이튿날 미군이 북상하여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 어재연 이하 전장병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중상으로 기동이 어려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 현재 광성보의 초입에는 안해루와 광성돈대가 인접하여 있고 이웃하여 어재연장군 형제 쌍충비각과 신미순의총이 있다.

11. 갑 곶 돈(甲串墩)

소재지 :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지 정 : 사적 제306호

강화 53돈대 가운데 하나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 방어책의 하나로 12진보가 설치되고, 다시 이 진보와 진보 사이에 몇 개의 돈대를 축조하였는데, 이것들은1679년 어영군 3천명과 함경?황해?강원 등 3도 승군 8천명을 동원하여 40일 만에 축조하였다. 이 가운데 갑곶돈은 통진(通津: 지금의 김포군)에서 강화로 들어가는 갑곶나루에 축조되었는데, 주위가 113보에 치첩이 40이었다. 이 갑곶나루에는 1875년에 축조된 갑곶포대가 있었는데, 갑곶돈은 망해?제승?염주 등 세 포대와 더불어 濟物鎭의 관할 밑에 있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함대가 병력을 이곳으로 상륙시켜 강화성을 점령하였으나,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부대에게 패한 뒤 물러났다. 1876년에는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黑田淸隆)가 6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서 이곳으로 상륙한 다음 조선의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강화도조약(일명 한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역사적인 유적이다. 그뒤 갑곶돈은 허물어져서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에 복원, 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2. 초 지 진(草芝鎭)

소재지 :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지 정 : 사적 제225호

초지진은 1716년(숙종 42) 강화 해안을 지키기 위하여 설치한 진으로, 1870년대에 미국과 일본이 침략하였을 때 이들과 맞서 싸운 전적지이다. {輿地圖書}와 {江華府志}에 따르면, 1716년 설치 이후 1726년(영조 2)에 鎭將으로 종4품 무관인 兵馬萬戶가 배치되었다. 1763년에는 진장을 종3품 무관인 僉使로 승격시켰으며, 군관 11명, 사병 98명, 墩軍 18명, 牧子 210명을 배치하였고, 鎭船 3척을 두었다.

초지돈·장자평돈·섬암돈이 소속되어 있었고, 포대는 9개가 있었다. 1871년(고종 8) 4월 23일 함포지원 아래 미국 해병 450명이 초지진에 상륙, 침략해오자 초지진 수비대가 이들을 맞서 싸웠으나 화력의 열세로 패배, 결국 미군에게 점령당하였다. 이때 진내에 있던 군기고·화약고·鎭舍 등 군사시설물은 미군에 의하여 모조리 파괴되었으며, 포대에 남아 있던 40여문의 대포 역시 강화해협에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그뒤 1875년 일본의 운요호에 의하여 또 한번 곤욕을 치렀다. 운요호의 함포사격으로 초지진 포대는 일시에 파괴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뒤 초지진은 폐진되었고, 시설은 모두 허물어져 돈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973년 초지진의 초지돈만 복원되었는데, 높이가 4m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m 되는 타원형으로 이 돈에는 3개소의 포좌가 있고, 총좌가 100여개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대포 1문이 포각 속에 전시되어 있으며 지금도 성채와 돈 옆의 소나무에는 전투 때 포탄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미국 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전투상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13. 덕 진 진(德津鎭)

소재지 : 경기도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지 정 : 사적 제226호

덕진진은 원래 水營에 예속된 진이었다. 龍頭墩臺와 덕진돈대가 덕진진에 소속되었고, 南障砲臺와 덕진포대가 있었다. 이 돈대와 포대는 모두 1679년에 축조된것이다. 특히 남장포대는 강화 9개 포대 중에 최대의 포대로서 대포 10문이 설치되었고 덕진포대도 대포 10문이 설치되었다.

덕진진은 경강어구를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서 용두돈대는 광성보쪽에 있지만 김포반도의 덕포진포대와 마주보고 급류로 흐르는 경강어구의 목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고려의 몽고 침략 때에도 이곳은 강화를 지키는 외성의 중요한 지역이었을 것이며 1886년 병인양요 때에는 양헌수 장군의 부대가 야음을 타고 이 진을 통하여 정족산성에 들어가서 프랑스군을 격파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에는 로저스가 지휘하는 미극동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전개하였다. 즉 덕진진의 남장포대와 덕진포대의 군인들이 광성보를 점령한 후 초지진에서 야영중이던 미군들을 습격한 것이다. 비록 화력의 열세로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이를 계기로 미군은 철수하였다.

이 진의 건물과 돈대와 포대는 모두 신미양요 때 파괴되어 허물어졌다. 덕진진의 성 문루는 공조루라 하였는데 이것도 지금은 모두 소실되어 홍예석문만 남아있다. 1976년 덕진진의 성문인 공예루와 성곽 일부를 보수하였으며 덕진돈대와 용두돈대를 복원하였다. 또한 강화 제1포대인 남장포대를 보수하였는데 포좌가 15문이다. 남장포대에는 조선시대 대포 6문과 덕진포대 내에도 소포와 대포를 전시하였다.

14. 외 규 장 각(外奎章閣)

강화도에는 1622년(광해군 14)에 왕실관계 건물로는 처음으로 태조의 御眞을 모시는 奉先殿이 세워졌다. 강화도는 임진왜란 동안 피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실록을 비롯한 史庫서책이 보관되던 곳이었다. 임진왜란 동안 강화도의 이와 같은 保章之處로서의 높은 안전도가 당시 북방의 불안한 정세 변동에 대처하여 봉선전, 즉 태조의 영정 안치 장소로 선택되었던 것이다. 이후 1631년(인조 9)에는 이곳에 행궁이 지어졌고, 효종이 북벌정책을 펴면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역대 왕들의 어제·어필과 고금의 도서 일부를 이곳으로 옮겨 보관시켰다.

이처럼 인조 이래 강화도에 행궁과 전각이 이루어지고 왕실 문서자료들이 이곳에 보내져 보관된 것을 배경으로, 정조 때에 이르러 이곳 행궁 옆에 외규장각(또는 규장외각)이 설치된다. 그런데 정조는 강화도에 규장각을 설치하기에 앞서 1779년(정조 3) 3월에 喬洞에 있던 統禦營을 이곳으로 옮겼다. 이는 정조의 새로운 정치체제 구상에 맞추어진 것으로, 정조는 통어영을 강화부로 이관시킴으로써 강화부의 지위를 격상시키고 각종 전투시설을 확충하여 왕실관계자료를 보관하는 장소로서 손색이 없게 하였다. 정조의 정치혁신은 왕실의 권위 회복에서부터 출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강화부의 지위격상을 배경으로 1781년(정조 5) 3월에는 이곳 궁전 자리에 외규장각이 설립되었다. 강화유수 徐浩修가 왕명을 받아 행궁 동쪽, 장녕전 서쪽 사이에 있던 燕超軒을 헐고 건물을 새로 지어 강화부 內冊庫의 책들을 모두 이곳으로 옮기고, 또 서울 궁성으로부터 의궤·옥책 등을 다수 옮겨왔다. 내책고는 효종 이래 강화부에 둔 책들의 보관을 위해 1753년 유수 申思가 객사 동쪽에 세웠던 것이다. 1778년(정조 2)에 反庫御史 沈念祖는 이곳의 軍器別貯置事를 감사하면서 내책고에 쌓여 있는 물건들을 직접 보고, "선대로부터 전해내려와 봉안하고 있는 璿籍, 어필, 어제, 金寶, 玉印, 竹冊, 敎命, 典章의 文字, 文簿가 너무 많아 가득 넘칠" 정도라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국왕은 이 보고를 받고 "봉안한 전장 문자가 많은 것이 史閣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외규장각이라고 할 만하다"고 하는 찬사 속에 외규장각 설립의 뜻을 확고하게 보였던 것이다. 외규장각은 이런 경위를 배경으로 1781년에 정식으로 발족되어, 1782년 2월에 건물 준공을 본 뒤 4월 2일을 길일로 잡아 직제학 심염조, 검교 직각 서정수가 배진관으로 봉안사와 찰리사의 직함을 받아 창덕궁 봉모당에 모셨던 물건과 대비전과 혜경궁과 정조의 책보를 옮기는 일을 맡았다. 어제·어필로 사고에 흩어져 있는 것도 모두 외규장각에 보관하게 하여, 어제·어필은 창덕궁 규장각과 이 외규장각 두 곳에만 봉안하도록 하였다.

15. 용 흥 궁(龍興宮)

소재지 :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1831 - 1863)의 잠저이다. 철종은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純祖妃, 金祖淳의 딸)의 명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정조의 아우 恩彦君의 손자였는데,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元範: 철종의 초명) 두 사람 뿐이었다. 이때 나이 19세였으며,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군으로서, 1844년(헌종 10) 형 懷平君 明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명을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나이가 어리고 농경을 하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하였는데, 이듬해 봄에 관서지방에 기근이 들자 宣惠廳錢 5만냥과 詞譯院蔘包稅 6만냥을 진대(賑貸)하게 하였다. 또 그해 여름에 한재가 심하자 재곡이 없어 구활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깝게 여겨 財用의 절약과 貪墨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약 천호의 여주의 민가에 銀子와 丹木을 내려 구활하게 하였고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천냥을 지급하는등 빈민 구호책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 일족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정치를 펴나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삼정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횡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마침내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철종은 三政 整廳이라는 임시 특별기구를 설치하고,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구폐를 위한 정책을 수립, 시행하게 하는 한편, 모든 관료에게 그 방책을 강구하여 올리게 하는 등 민란수습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철종의 이러한 노력도 뿌리 깊은 세도정치의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후사 없이 죽고 말았다. 1865년(고종 1) 경기도 고양의 禧陵 오른편 언덕에 예장되고, 능호를 睿陵이라 하였다.

용흥궁은 원래 초가 삼간의 움집이었던 것을 1853년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확대 개축하였다. 그후 수차에 걸쳐 보수하고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