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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의 선사문화

1. 강화도의 지리와 환경

2. 신석기 시대

3. 청동기 시대

이 인 주(94)

1. 강화도의 지리와 환경

강화도는 우리나라 중부를 흐르는 한강의 관문이자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 큰 섬으로 서해안에 자리잡고 있다.

강화도는 원래 한반도 마식령 산맥의 김포 반도에 이어진 내륙이었으나 오랜 세월의침강으로 내륙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뒤 낙조봉, 고려산, 혈구산, 마니산 등이 형성되면서 여러개의 구릉으로 둘러싸인 섬이 되었다. 그 뒤 한강과 임진강의 퇴적작용으로다시 김포 반도와 연결되었으나 염하(강화해협)가 한강에서 분류되어 머리 부분을 침식, 물줄기을 이루면서 하나의 섬으로 남게 되었다.

강화 해안지대는 완만한 경사진을 가진 구릉 모양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구릉지는 마을이 자리잡을 수 있는 좋은 입지를 제공하고 경작지로도 이용되며 홍수나 해일과 같은 자연 재해를 피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다. 또한 관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하천은 충분하지 못하나 땅은 비교적 기름진 편이어서 농업발달면에서도 좋은 환경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강화도에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신석기시대

강화도에 역사 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많이 살았음은 섬 곳곳에 남아 있는 선사시대유적과 유물들이 증명해 준다. 강화도의 선사시대 유적과 유물로는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 토기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무덤을 대표로 들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가 강화에서 계속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일찍부터 인간이 생활하기에 적합한 곳이었음을 말해 준다 하겠는데, 강화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은 화도면 동막리 유적으로, 우리나라 서해 도서 가운데 가장 먼저 알려진 신석기시대 유적이기도 하다.동막리 유적에서는 빗살무늬 계통의 토기말고도 가끔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 마연 토기 등 무문 토기계의 토기 조각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동막리에서 신석기시대에 이어 청동기시대에도 인류가 생활했음을 보여준다.

이밖에 하점면 삼거리 소동 부락에서 고인돌 무덤을 발굴할 때는 주위 밭 가운데에서적지않은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되기도 했으며, 양도면 도장리, 사기리 등지에서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앞으로 강화도의 신석기시대 문화유적은 강화도의 자연, 지리적인 여건으로 보아 지금까지 알려진 것말고도 더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3. 청동기시대

강화도의 청동기시대 문화 유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인돌 무덤이다. 강화도에 지금까지 알려진 고인돌 무덤들로는 사적 제137호로 지정된'강화 고인돌무덤'과 경기도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된'내가 고인돌 무덤' 외 몇 기의 무덤이 전부였다. 그러나 최근 조사에 의해서 강화 본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고려산 이북의 1개읍, 4개 면에서 무려 100기에 달하는 고인돌 무덤을 발견, 또는 확인했다. 이 가운데 44기가 북방식 고인돌 무덤, 35기가 남방식 고인돌 무덤으로 확인되었고 나머지 10여기는 형식이 분명하지 않은 매몰되거나 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수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전체 수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남방식이 북방식과 함께 강화도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확인되었다. 그 주요 유적은 다음과 같다.

* 고려산 북쪽 기슭의 고인돌 무덤

강화도에는 고려산(436m)을 중심으로 대개 북쪽 기슭에 고인돌 무덤이 많이 흩어져있다. 대표적인 것들로는 오류내 마을의 남방식 고인돌 무덤, 하도면 소방서 앞 고인돌무덤, 강화 고인돌 무덤(사적 제137호), 부근리 점골 고인돌 무덤, 하점면 삼거리 샘말 고인돌 무덤, 하점면 신삼리 고인돌 무덤 등이 있다.

특히 강화 고인돌 무덤의 크기는 덮개들의 크기가 긴 축의 길이 6.50m, 너비 5.20m, 두께 1.20m, 전체 높이는 2.60m이다.({강화도 고인돌 무덤 - 지석묘조사 연구}, 1992) 굄돌을 좌우에 세우고 한쪽 끝에는 마감하기 위한 판석을 세워 묘실을 만들어 시신을안치한 뒤 다른 한쪽을 마저 마감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지금은 양끝의 마감돌은 없어지고 좌우의 굄돌만 남아 있어 석실 내부가 마치 긴 통로를 연상케 한다. 동서 굄돌이 세워진 각도는 각각 약 70도인데 이 기울기가 원래 공법이었는지 아니면 후대에 기울어진것인지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로 보아 70도 기울기를 갖춘 돌기둥에 약 50t으로 추정되는 대형 판석을 얹은 역학적 구조가 불가사의하다.

이 밖에도 고려산 서쪽 봉우리인 낙조봉(해발 343m) 남쪽 능선인 내가면 오상리에 북방식 고인돌 무덤 1기가 있다는 것은 일찍이 알려져 있었으나 새로이 북방식 고인돌 무덤이 9기나 더 확인되었다.

* 별립산과 봉천산 일대의 고인돌 무덤

별립산(340m)과 봉천산(291m) 일대에도 상당수의 고인돌 무덤이 있다. 봉천산 서북쪽 능선에 자리잡은 하점면 신봉리에는 남방식 고인돌 무덤 1기가 있고, 하점면 이강리 일대에는 남향으로 수기의 북방식 고인돌 무덤이 흩어져 있다. 또 양사면 교산리에 상당수의 북방식, 남방식 고인돌 무덤이 서로 섞여 있다. 교산리 고인돌 무덤은 지금까지 알려진 강화 고인돌 무덤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자리잡은 것이다.

그리고 1966년에는 하점면 부근리 점골 고인돌 무덤에서 북쪽으로 약 70m 떨어진 지점에서 청동기시대의 집자리가 발굴되기도 했다. 고려산 북쪽 끝자락쯤에 자리잡고 있는 이 유적에서는 작은 기둥을 세웠던 기둥 구멍(小孔)이 발견되었고, 角形 토기의 바닥 모양을 갖춘 토기 조각도 출토되었다.

이것은 발해 연안 동쪽의 전형적인 무문 토기 문화의 초기 유형으로 당시까지만 해도각형 토기가 임진강 이남에서 발견된 것은 강화도가 처음이었다. 이런 유형의 각형 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유형으로 이러한 초기 각형토기가 유행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7세기경부터이다. 이 시기는 강화도 고인돌 무덤의 축조 시기와 부합되는 것으로, 청동기시대 집자리 유적이 고려산 북쪽의 고인돌 무덤을 축조한 인류의 생활 터전이었음에 틀림없다.

강화도 고인돌 무덤의 축조과정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밝혀지지 못한 상태에 있다. 굄돌이나 덮개돌로 사용한 거대한 돌들을 어떻게 운반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그 보다 더 궁금한 것은 큰 판석을 어떻게 캐냈는가 하는 점이다. 산상이나 해안의 자연판상석을 떼내어서 운반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가능한데 이것은 자연 판상석을 떼낸 흔적을 마니산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운반 도구와 운반 방법은 말할 것도 없고 이것을 세우는 건축 공법 따위가 모두 의문스럽다.

아무튼 몇 백명 이상의 인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지휘, 감독할 수 있는 지도력이나 통치력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원시적'이란 말로 가볍게 보아 넘기는 쉬운 부분들이다. 이를 통하여 당시 강화도 고대 사회의 사회적 구성과 농경 생활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활동, 권력의 집중 따위를 짐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하나의 고인들 무덤을 만드는 데 이와 같은 역학적 구조를 생각할 수 있다면, 무려 100기에 가까운 고인돌 무덤이 불과 반경 4km 안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사회 조직보다 훨씬 더 큰 조직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 참 고 문 헌 >

* 이형구, {강화도}, 대원사 - 빛깔있는 책들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