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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역사
제3장 고려
제5절 고려의 문화와 청주지역

1. 불교문화와 청주

신라말 고려초기에 있어서 불교계의 새로운 동향은 선종(禪宗)의 유행이었다. 선종은 경전에 의하여 그 종파를 구별하는 교종(敎宗)과는 대조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원래 화엄종으로 대표되는 교종은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조하고 골품귀족들의 신분적 특권을 옹호하는데 이용되고 있었다. 당시의 불교는 왕실불교 내지 귀족불교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므로 이 교학 불교는 지역적으로도 자연히 경주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일반 백성들과 유리되어 갔으며 나아가서 난해한 이론에만 치우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선종은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것이었다. 즉 선종에서는 '불입문자(不立文字), 견성오도(見性悟道)'라 하여 복잡한 교리를 떠나서 좌선을 통해 심성을 도야함으로써 스스로 불성을 깨닫도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선종은 개인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선종이 크게 유행한 것은 지방의 호족들로부터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선종 9산은 대부분 호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고려불교는 교계의 발전보다는 현실생활과의 접촉면에서 더 사회적인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고려의 귀족들도 여전히 불교를 국가나 개인의 현세에 있어서 행복을 좌우하는 현세 이익의 종교로 생각하였다. 공덕을 쌓음으로써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공덕사상이 그 뒷받침이 되었다. 많은 사찰을 세우고 각종 불교행사를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 모두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또 국가적인 불교행사가 행해졌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 연등회와 팔관회였다. 한편 불교의 숭상은 과거제도의 시행에 따라 승과제도를 창설케하였다. 승려들은 국가로부터 토지의 급여를 받았고 역의 의무에서 면제 되었다. 사원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경제적으로도 부유해 갔다.

무인정권 이후 고려 불교에는 새로운 경향이 생겨났다. 그것은 선종에 있어서의 조계종(曹溪宗)의 확립이었다. 의천이 비록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주장하면서 천태종을 개창하였다고 하지만, 그러나 천태종은 교종을 주로 하는 것이었다.

조계종의 세력을 크게 떨친 승려는 지눌(知訥)이었다. 무인정권시대에 수선사를 근거로 활약한 지눌은 정혜사라는 결사(結社)를 하며 불교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그의 중심 취지로 내세웠는데, 돈오는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는 것이고, 점수는 그 뒤에도 이 깨달음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다.

무인정권시대 이후에 조계종이 크게 융성한 것은 고려 불교의 내적인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불경의 가르침에 의한 공덕을 쌓음으로써 현실 세계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교종의 기성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는 또 왕실 및 문신 귀족과 결탁한 세속적인 불교의 부인이었다. 이리하여 조계종은 무인정권의 일정한 옹호를 받으면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조계종은 심성의 도야를 강조함으로 해서 장차 성리학을 받아들일 수 있는 터전을 닦아주는 구실도 하였다.

고려시대 청주지방의 불교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전해주는 자료는 별로 없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현전하는 불교사찰 및 그 유지(遺址)들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용두사와 철당간 : 현재 청주시 남문로 1가 진로백화점 뒷편에 마치 굴뚝처럼 생긴 철제기둥이 우뚝 솟아 있다. 이것이 바로 국보 41호로 지정된 <용두사지철당간>으로, 높이 약 4.2m의 화강암으로 된 두개의 당간지주 사이에 직경 약 40cm, 높이 약 63cm의 철제 원통 20개가 차곡차곡 쌓여져서 전체 높이 약 12.7m에 이른다. 특히 이 당간의 아래 3번째 원통에는 본래 당간 건립 과정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 있어, 고려초기 청주 지방의 불교계에 대한 내용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당간이 세워진 용두사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사찰이었는지, 폐사된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가 없다. {고려사}나 {조선사찰사료} 등의 사료에도 용두사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러나 이 절의 창건과 폐사된 시기는 어느정도 짐작할 수가 있다. 우선 창사 시기에 관해서 살펴보면, 대체로 신라말 고려초가 아닐까 추측된다. 그것은 이 철당간이 고려 광종 13년(962)에 건립되었으므로, 적어도 용두사는 그 이전에 창건되었음은 분명하다. 아울러 지방 호족세력의 후원을 받아 선종이 크게 대두하던 나말 여초에 창건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 후 커다란 번영을 누리며, 적어도 고려 선종(宣宗) 7년(1090)까지는 존속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충청도읍지} 청주목 고적조에 보면, '대안 6년 용두사금구(大安 六年 龍頭寺錦口)'라고 새겨진 고종(古鍾)을 땅속에서 발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대안 6년은 바로 1090년으로 이 때에 용두사에서 금구를 주조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초기의 지리지 등 많은 문헌에는 용두사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폐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용두사는 신라말에 창건되어 고려말까지 존속되었던 선종계통의 사찰이 아니었나 짐작된다.

다음 철당간에 대해서 검토해보면, 당간이란 본래 절에서 불교 행사가 있을때 이를 알리기 위해서 괘불(掛佛) 등을 걸어 놓던 장대를 말하는 것이니, 현재의 게양대와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당간은, 앞절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고려 광종대에 청주지방의 호족세력들이 중심이 되어 건립한 것으로 그 건립 목적과 과정 및 건립에 참가했던 인물 등에 대한 기록이 새겨져 있어 고려초 지방 호족들의 존재양태를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사료로도 주목받고 있다. 후일 풍수지리설이 성행하면서, 지역 주민들 사이에 이 당간이 홍수의 피해에서 청주를 막아주는 돛대의 구실을 할 목적에서 건립된 것처럼 전해 내려오기도 하였지만, 본래는 현실기복인 목적에서 이루어진 불사의 하나였던 것이 당간의 기록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보살사 : 현재 청주시 용암동 낙가산의 남쪽 기슭에 있다. {한국사찰전서}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28년(567)에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창건하였고, 혜공왕 14년(778)에 진표율사의 제자 융종(融宗)대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태조 원년(918) 증통(證通)국사가 중창하고 예종 2년(1107)에 자정(慈淨)국사가 또한 중수하였다고 한다.

한편 [보살사중수비]에 의하면 고려 공민왕대에 토지가 하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수비는 조선 숙종 9년(1683)에 건립된 것으로 1988년 파괴되어 매몰되었다. 또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지리지에는 보살사에 대한 기록이 빠짐없이 나타나고 있어 조선시대에도 계속하여 불사가 흥성했음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보살사는 청주관문의 동쪽 10리에 있고 편호(編戶)가 25호이며 남자가 47명이 있다고 하였다.

보살사에는 현재 지방유형문화재 제24호인 석조2존병립여래상(石造二尊竝立如來像)과 제56호인 극락보전, 제65호인 오층석탑, 제78호인 괘불을 비롯하여 석조지장보살좌상, 목조삼존불, 후불정화(後佛幀畵), 극락회정(極樂會幀), 보살사중수비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문화재에 대한 다음 장의 문화재편을 참고할 것).

흥덕사지와 직지심체요절 : 현재 청주시 운천동 515-1번지 양병산(梁兵山) 동남쪽 기슭에 흥덕사지가 있다. 1985년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그러나 정작 흥덕사에 대한 문헌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아 언제 창건되었고 언제 폐사되었는지, 그리고 어디에 있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의 간기에, "선광 7년 정사 7월일 청주목외흥덕사 주자인시(宣光 七年丁巳七月日 淸州牧外興德寺 鑄字印施)"라고 있어 청주 근교에 흥덕사라는 사찰이 있었고, 그곳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한 사실이 있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최근 운천동 택지개발공사 도중 '흥덕사'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금구(靑銅禁口)와 청동불발(靑銅佛鉢)이 출토되어 바로 이곳이 흥덕사지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곳은 1986년 사적 제315호로 지정되었고, 금당과 삼층석탑을 복원하였으며, 옆에는 고인쇄박물관을 건립하였다(이에 대해서는 다음절, 인쇄문화와 청주지방 편을 참조).

2. 유교문화와 청주

고려에서 신앙생활을 지도한 것은 주로 불교였던 데 비해 정치이념을 제공하고 도덕과 윤리의 기반이 된 사상은 유교였다. 물론 도교와 풍수도참사상등도 유행하였지만, 크게 보면 당시의 사상계는 유·불이 병립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어서 유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컸던 것이다.

유교가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불교보다 훨씬 앞서서였다. 그렇지만 삼국시대까지 유교는 불교에 압도되어 그리 크게 주목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통일신라시기에 이르러 전제왕권이 확립되고 유교교육기관인 국학이 설립되고, 도당유학생이 배출되면서 유교는 발전의 큰 계기를 마련하여 강수나 설총, 최치원 같은 대학자가 나오게 되었다.

고려왕조가 서면서 유교는 새 국가의 정치적 지도이념으로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태조의 주변에는 불교 승려들 외에도 당나라 유학생 출신인 유학자들이 유교주의에 입각한 국가의 운영을 권하였고 그 스스로도 이를 긍정하고 있었다. 그 후 광종의 과거제 실시를 계기로 유교는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시험에 유교 경전이 그 중요과목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유교는 역시 성종 대에 이르러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그는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철저할이만큼 유교주의에 입각한 여러 시책을 폈다. 최승로는 그의 시무책에서 불교를 비판하면서 ?치국의 근원?은 유교정치에 있다고 강조하였고 성종도 이를 적극 받아들였던 것이다.

유교 중심의 정책을 폈던 성종 대를 지나면, 불교는 그의 융성을 되찾게 되지만 그와 함께 유교도 발전을 계속하였다. 이 후 유학의 발달은 최충의 활동과 더불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는 목종 8년(1005) 과거에 장원 급제한 인재로서 문헌공도라고 불린 사학을 열어 9경, 3사를 중심으로 교육하였다.

이렇게 발전을 거듭하던 유학은 예종, 인종 대에 이르러 한층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이들이 유학의 진흥을 위해 다음과 같은 몇가지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그 첫째는 학교의 진흥책을 들 수 있다. 예종은 사학의 발달에 맞추어 관학을 일으키기에 힘썼다. 둘째로 들 수 있는 것은 국왕의 주재하에 경학에 대한 강론을 자주 열었다는 점이다.

요컨대 고려시대에 일관된 유·불 병립적 상황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숙종·예종·인종대는 고려 유학사에 한 절정기를 이룬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기에는 점차 사장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변해 갔고 그것은 의종 때에 문약으로 흐르면서 무신을 멸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뒤이어 무신난이 폭발하여 무인정권이 들어서면서 유학은 크게 위축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려 후기 충렬왕대에 이르러 신 유학으로서의 성리학이 고려에 들어오게 되었다. 안향·백이정이 성리학을 전한 이래 이제현을 거쳐 이색·정몽주·이숭인·정도전·권근 등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성리학은 그 기반을 넓혀갔다. 아울러 이들 고려말기의 성리학은 신진 사대부들의 정치이념으로 자리잡으면서 불교를 배척하면서 계속 발전하여 갔다.

고려시대의 청주지방에도 일찍부터 유교사상이 발달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지방에서 유학교육을 담당한 기관은 향교였다. 향교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성종대 부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종은 지방의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처음에는 주군(州郡)의 자제 260명을 서울로 뽑아 올려 학업을 닦게 하였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12주목에 경학박사(經學博士)와 의학박사(醫學博士) 각 1인씩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대체로 이 때부터 지방에 향교가 발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이 때 경학박사와 의학박사가 파견된 12주목가운데에 청주가 포함되었을 것은 분명하며, 이들 박사들은 청주일대 지방 유력인사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가 건국되고 나서 태조 13년에 서경에 학원을 창설한 것이 학교설립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지만, 그러나 이미 통일신라시대부터 청주를 비롯한 중요 지방에 학원이라는 명칭의 학교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청주에 현존하고 있는 용두사철당간기를 통해서 확인된다.(앞의 제3절 참조)

이러한 지방의 학원들은 성종대에 들어와 지방관제가 정비됨과 아울러 중앙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면서 향교로 개편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향교는 자제를 교육하는 교육기능과 공자(孔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을 제사지내는 봉사(奉祀)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향교에는 이를 위해 명륜당과 문묘가 갗추어져 있었다.

청주출신 유학자들의 활동도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왕가도(王可道), 이공승, 곽예 등이 있다(이들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제8편 인물 참조).

3. 인쇄문화와 흥덕사지

우리나라에 인쇄술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목판 인쇄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발달되었고 8세기 초인 신라 성덕왕 5년(706)경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됨으로써 신라시대의 인쇄술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목판인쇄는 비용과 시간이 많이들면서도 오직 한책의 인쇄에 국한되는 것이 커다란 폐단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목판인쇄는 많은 부수를 찍어내는 데는 매우 편리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 수요가 많은 곳에서는 판각을 한번 해 놓으면 언제든지 증쇄할 수 있고 비교적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대장경같이 수요가 많은 것은 이처럼 목판에 판각하여 계속 인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비교적 소수의 귀족들만이 서적을 필요로 하였고 따라서 적은 부수를 인출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므로 자연히 활판인쇄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즉 활판인쇄란 한벌의 활자를 만들어 놓고 필요한 책을 수시로 조판할 수 있으므로 고려 귀족사회에서는 이러한 활판인쇄가 절대로 필요하였던 것이다. 세계에서 금속활자를 처음으로 고안 보급시킨 것은 고려시대 우리의 선조임이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고려 무인정권기인 13세기 전기에는 주자인쇄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있어 늦어도 이 때에는 금속활자를 이용한 서적의 인쇄가 널리 보급되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즉 고려 고종 21년(1234)에 주자로서 {고금상정예문}을 인쇄하였다는 기록이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자체나 자형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확실한 사례로는 고종 26년(1239)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최이가 명하여 만든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들 수 있다. 이 책의 발문은 최이가 썼는데, 그것에 의하면 공인(工人)들을 모아 주자본(鑄字本)을 만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우왕 3년(1377) 7월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백운화상초록 불조 직지심체요절}(이하 직지심체로 약칭 함)이다. 이 직지심체를 초록한 백운화상은 법명이 경한(景閑)이며 충렬왕 24년(1298)에 출생하여 공민왕 23년(1374)에 77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선교사에 있어서 여말의 삼대선사로 손꼽히는 조계종의 대선사이다. 이 책은 백운화상이 75세되던 해인 공민왕 21년 9월에 편찬한 것으로 흥덕사에서 주자한 것은 그 보다 5년 뒤인 우왕 3년의 일이다.

이 책의 내용은 고려시대의 학승들이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 수의과(隧意科)에서 학습하게 되는 여러 불교서적들을 두루 섭렵하여 그 중 선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정수를 초록한 것으로 상, 하 두권으로 되어 있다. 그 제목의 중심이 되는 [직지심체]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란 수선오도의 명구에서 딴 것이며 그 뜻은 선을 수련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심성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참선하여 도를 깨달으면 마음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가 된다는 요지이다. 이중 상권은 없어지고 하권만이 전래되어 현재 프랑스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것이 1972년 프랑스에서 개최된 [세계도서의 해]기념 도서전시회에 처음 출품되어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본임을 공인받기에 이르렀다.

그 때까지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졌던 독일의 구텐베르크에 의해 1440년 인쇄된 {세계심판}보다 63년 앞선 것이다. 그런데 이 {직지심체}의 책 끝머리에 ?선광 7년 정사 7월 일 청주목외흥덕사주자인시(宣光七年丁巳七月 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라고 쓰여져 있어 이 책이 청주의 흥덕사에서 인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흥덕사에 대하여는 그동안 문헌기록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그 구체적인 유적지라든가 유물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그러던 것이 1985년 청주시 운천동에서 청주대학교 박물관 발굴조사팀에 의해 흥덕사지가 발견되었다. 흥덕사지의 발견, 조사 경위를 간략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84년 12월부터 한국토지개발공사에 의해서 [청주운천동택지개발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 운천동 일대에는 일찍부터 불교와 관련된 유물들이 발견된바 있었다. 즉 1970년 신라말 고려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동종과 금동보살입상, 금구, 청동제 향로 등이 발견된 바 있고, 1982년 3월에는 역시 운천동에서 ?수공(垂拱) 2년(신라 신문왕 6년. 686년)?이 새겨진 신라 사적비가 발견된 바 있다. 그리고 1984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청주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에 의해 운천동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구양사(句陽寺)}라는 명문이 있는 와당 및 도가니 20여 점이 발굴되었다.

한편 택지 조성공사가 진행되는 도중 새로운 사지가 발견되어 청주대 박물관에서 1985년 7월부터 발굴조사를 하게 되었다. 발굴이 진행되는 도중 "갑인오월일서원부흥덕사금구일좌(甲寅五月日西原府興德寺禁口壹坐)"라는 명문이 있는 금구편(禁口片) 및 "황통10년 경오4월일 흥덕사의지중대사영인왕생정토지원 불발일합구반운구입중2근2량인(皇統十年 庚午四月日 興德寺依止重大師領仁往生淨土之願 佛鉢一盒具鈑雲口入重二斤二兩印)"이 새겨진 청동제 불발(佛鉢) 뚜껑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이 사지가 {직지심체}를 주자 인쇄한 흥덕사지임이 처음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무분별한 공사 진행으로 말미암아 흥덕사지는 대부분 훼손, 파괴되어 사지의 완전한 형태는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유물들도 유실되었고 사지에서 반출해간 흙더미 속에서 금속탐지기를 동원한 조사 끝에 찾아내는 등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은 흥덕사지를 복원하였고, 사지 옆에는 고인쇄박물관을 건립, 교육의 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청주시 / '97 / 체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