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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역사
제3장 고려
제4절 고려 후기사회의 청주지역

1. 무신정권의 성립과 청주지역

1) 무신난과 경대승의 활동

고려시대를 크게 전기와 후기로 대별하고 있다. 그것은 의종대에 일어난 무신들의 쿠데타를 계기로 하여 고려사회가 정치,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즉 문신 중심의 전통적인 문벌귀족 사회는 붕괴되고, 무인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는 정치적 변화와 함께 사회,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 걸쳐 많은 변혁이 나타났다.

무신난이 발생하게된 주요 원인은 문치주의에 입각한 귀족정치의 모순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무신들의 지위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 경제적으로 문신들에 비해 매우 열등한 처지에 있었다. 무신들은 점차 문신들에 의해 천대받는 존재로 변해 갔다. 일찌기 무신 정중부는 문신인 김돈중에게 촛불로 수염을 태운적이 있었고 이어 대장군인 이소응(李紹膺)은 문신인 한뢰(韓賴)에게 뺨을 맞은 모욕을 당하였다.

무신난은 의종 24년에 일어났다. 왕이 개경 교외의 보현원에 갔을 때 미리부터 계획했던 장군 정중부·이의방 등이 왕을 호종하던 군인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에 수많은 문신이 무참히 살육당하였고 의종은 폐위당하였다. 이것이 곧 무신난이다. 무신난이 일어난뒤 모든 권력은 문신으로부터 무신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후를 무인정권이라 하는데 의종 24년의 쿠데타로부터 원종 11년까지 꼭 1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무신난 이후 얼마동안은 무인들 상호간의 내분으로 인하여 자주 정권이 교체되었다. 처음 정권을 장악한 인물은 쿠데타의 주동자였던 정중부, 이의방, 이고의 세사람이었다. 그러나 곧 이들 사이에 정권쟁탈로 말미암아 이고는 이의방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이후 이의방은 자기의 딸을 태자비로 삼고 모든 권세를 독차지하려다 이의방 역시 정중부에 의해 제거됨으로써 정중부가 홀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정중부는 문하시중이 되었고 그 아들 정균(鄭筠)과 사위 송유인(宋有仁) 등은 정치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정중부 일당은 그들의 권세를 이용하여 토지를 점탈하는 등 그 횡포가 심하였다.

이제 무인들은 고려 전기의 문신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전답을 강탈하여 축재하였고 사치와 방종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인심을 잃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정중부, 정균 부자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인물이 바로 청년 장군 경대승(慶大升)이었다. 경대승은 본이 청주이고 청주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의 가계 및 선대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별로 없다. 다만 {고려사} 경대승열전을 통해 그의 아버지인 경진(慶珍)에 대해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다. 경진은 명종 4년 9월에 일어난 조위총의 반란을 토벌하는 관군의 지휘관으로 우군병마사로 임명되었다. 이어 11월에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올랐다. 아마도 조위총 토벌에 대한 공으로 짐작된다. 그후 정중부 집권기에는 중서시랑평장사를 역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경진은 무인정권이 들어서면서 최고 지배계층에 속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아들 경대승은 무신난 이전 이미 음서로 교위(校尉)의 직을 받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의 가계는 무신난 이전에도 이미 상당히 높은 지위에 올라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경대승은 무신난 이후 순조롭게 승진하여 정중부 집권기에는 장군직에 올랐다.

경대승은 자신이 무신출신이면서도 정중부 등에 의한 무신난과 무인들의 불법적인 행동에 크게 분개하여 ?復古의 뜻?을 품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아버지 경진이 다른 무신들과 마찬가지로 남의 토지를 빼앗아 불법으로 많은 전토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가 죽자 대승은 토지문서를 군부에 바치고 가산을 축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청렴결백한 성품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탄복하는 바가 되었다고 한다.

정중부 일당이 권세를 잡고 여러가지 불법적인 행동을 자행하여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특히 중부의 아들 정균은 상서인 김태영(金胎永)의 딸을 유인하여 자기의 처로 삼고, 다시 처를 버리고 공주를 아내로 삼으려하자 왕이 두려워하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사위인 송유인(宋有仁)도 권세를 믿고 방자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에 경대승은 결사대 30여 명을 이끌고 쳐들어가 정균과 그의 일당인 대장군 이경백등을 잡아 죽였다. 이어 왕에 청하여 정중부와 사위 송유인, 송유인의 아들 장군 군수(群秀)를 체포하여 시가에서 목베어 죽였다. 당시 최고의 권세를 누리던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여 왕을 비롯하여 문신들에게는 크게 환영을 받았으나 대부분의 무인세력들에게는 공동의 적이 되고 말았다. 이 때의 경대승의 나이는 불과 26세의 청년장군이었다.

이후 무신들 중에는 경대승에게 적의를 품는 자가 많았고 이에 경대승은 신변의 위험을 느껴 사병 백수십명을 자신의 집에 불러 호위케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도방(都房)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대승은 항상 신변의 불안을 느껴 마침내 이로 인해 병들어 죽으니 이 때가 명종 13년 그의 나이 30세에 불과하였다.

도방이라는 말은 원래 사병들의 숙소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후에는 숙위대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도방은 신변 호위 이외에도 반대세력을 숙청하고 비밀을 탐지하는 등 폐단이 컸었다. 더구나 경대승은 도방의 병사들에 대해 커다란 특혜를 주고 있었기 때문에 도방의 병사들은 경대승의 권세를 배경으로 농민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인명을 살상하는 등 악행을 자행하고 있었다. 관청에서 도방에 속한 병사들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면 경대승이 번번이 이들을 풀어 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도방 병사들의 권세가 자못 높았고 그 폐단 또한 매우 심하였기 때문에 경대승이 사망하자 도방을 폐지하고 그 병사들을 색출하여 죽이거나 먼 섬에 유배보냈다. 그러나 최충헌이 집권하자 다시 도방을 설치하였고 그 수나 기능을 크게 강화하였다. 이후 최우·항의 4대에 걸친 최씨정권과 임연 부자의 집권기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도방은 경대승에 의해 처음 설치되었으나 무인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약 1세기 동안 지속되면서 무인정권을 지탱해 주던 중요한 지배기구로서 이용되었던 것이다.

2) 무신정권기 농민, 천민의 항쟁과 청주

고려사회는 12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농촌사회가 크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즉 예종대에는 이미 유망민이 속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중앙 귀족들은 전국적으로 토지를 점탈, 겸병하고 지방 관리들은 농민, 천민들에게 가혹한 수취와 역역의 동원 등이 가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인종과 의종대에 이르러 유망민이 도적화되고 일부 지방에서는 관청에 대한 반발로 폭동을 일으키는 사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농민, 천민들의 중앙 정부에 대한 반항은 의종 24년 무신난을 계기로 하여 더욱 확대되었다. 무신난 이후 무신정권이 들어서자 경제적인 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많은 혼란이 야기되었다. 무신정권기에 이르러 대토지겸병이 만연되고 농민에 대한 수취 또한 가중되었으며, 지방 관리들의 가렴 또한 극심하였음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그리하여 명종·신종대의 약 30여 년 동안 민란이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던 것이다. 이 기간은 정중부·이의방·이고를 이어 경대승·이의민·최충헌이 차례로 집권하면서 심한 정권쟁탈전이 계속되어 정치기강은 크게 문란해질 수 밖에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크게 약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무신집권기에 전통적인 신분질서가 문란해진데다가 피지배층의 사회의식이 크게 성장하였다. 무신난 이후 하극상의 풍조가 팽배해지고 실제로 보잘것 없는 신분 출신의 무인들이 크게 출세하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종래의 엄격했던 신분질서는 동요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사원 노비인 천민출신의 이의민이 무인정권의 최고 집권자가 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지만, 그 밖에도 천민출신이 고위 관직에 오른 사례는 많이 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모두 관기(官妓)였던 조원정이 정 3품인 추밀원부사의 요직에 오른 것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이러한 상황은 천민들로 하여금 신분제에 대한 관념을 변모시키고 더나아가 자신들의 지위 상승 의욕을 자극하게 되었다. 결국 무신정권 초기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농민과 천민들의 봉기는 이와 같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혼란이 그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대규모의 민란이 발생한 곳은 특수 군사지역인 서북면에서였다. 즉 명종 2년(1172)에 창주·성주·철주의 주민들이 수령의 횡포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다. 당시 서북면병마사인 대장군 송유인이 이를 수습하지 못하여 스스로 물러나고 대신 부임한 대장군 우학유 역시 이들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이들의 기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서북면의 민란은 서경유수인 조위총에 의해 1174년에 더욱 확대되었다. 그는 무인들을 제거하고 문신들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야심을 갖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서경 주민은 물론 자비령 이북 40여 성의 농민들이 주진군의 지휘관인 도령의 통솔아래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처럼 서북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있을 때 남부지방에서도 이른바 남적(南敵)이라 불리는 민란이 일어났다. 이중 양광도, 즉 지금의 충청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민란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당시 음성 지방민의 동태를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광도에서 일어난 민란 가운데 그 규모가 큰 것은 명종 6년(1176) 공주의 명학소에서 일어난 망이·망소이의 난이었다. 이들은 주민들을 모아 공주를 함락하였으며, 부근 여러 고을의 농민이 합류, 세력이 강화된 농민군은 수령들을 처단하고 창고의 곡식을 뺏어 나누는 등 그 규모나 세력이 대단하여 정부에서 파견한 3천여 명의 관군도 격퇴시켰다. 이에 중앙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켜 현령을 파견하는 회유책을 사용하였다. 농민군은 이에 만족치 않고 예산현을 습격하여 감무를 살해하였다.

정부에서도 무력토벌로 정책을 바꾸어 대장군 정세유 등을 처치병마사로 삼아 이들을 치게하는 한편, 서북면 반란농민군과 대적하고 있던 정부는 타협을 시도하여 망이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서북면 반란군이 진압되자 곧 관군은 이들을 공격하였다. 이에 망이·망소이 등은 이듬해 봄 다시 봉기하여 양광도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군을 규합하여, 서산, 황려현(驪州), 진주(진천), 직산까지 그 세력을 확대하였다. 그리고는 개경정부에 서신을 보내 "차라리 칼날 아래에서 죽을지언정 끝내 항복하지 않고 반드시 왕경에 이르고야 말겠다"고 하여 개경을 공격 목표로 정하였다. 한때 이들의 위세는 아주(아산)와 청주 일대까지 확산되었으나 끝내 1177년 여름 망이가 다시 왕을 찾아가 화평을 제의하려다 사로잡힘으로써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이처럼 망이·망소이가 지휘하던 농민 반란군이 처음 공주의 명학소에서 시작하여 진천, 청주, 직산, 여주 등지까지 그 세력을 확대했던 것으로 보아 청주의 주민들 역시 이 난에 참가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청주에 속해 있던 향, 소, 부곡의 주민들은 대부분 이때의 반란군에 합세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망이·망소이 등의 봉기는 기본적으로 집단천민인 소의 주민이 중심이 되었던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다른 민란과 마찬가지로 농민반란의 성격을 지니는 동시에 특히 이들에 대한 회유책으로 소를 현으로 승격시킨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신분해방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청주의 향, 소, 부곡민들도 이들과 동일한 입장에 있었을 것이며 같은 목적의식을 갖고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 후에도 신분해방을 목적으로 일어난 농민, 천민의 봉기는 많이 있었다. 그 규모가 큰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 전주에서 일어난 관노의 봉기 및 1198년 최충헌의 사노인 만적(萬積)이 주동이 되어 개경에서 일으킨 봉기는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2. 외적 침입기의 청주지역

1) 거란족의 침입과 청주

거란족은 퉁구스와 몽고의 혼혈족으로 옛부터 요하유역에 살고 있던 유목민족이다. 고려와 거란과의 교섭은 태조 때부터였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사신을 파견하여 낙타 50필을 바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태조는 거란을 무도한 나라라 하여 그 사신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밑에 붙들어 매어 굶어죽게 하였다. 그리고는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는 한편 고구려의 옛 서울인 서경(평양)을 중요시하여 그 복구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북진정책은 후대의 여러 국왕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고려의 북진정책은 자연 거란과의 충돌을 가져오게 하였다.

거란은 고려 성종 12년 소손녕을 장수로 삼아 고려에 침입하여 옴으로써 고려와 거란(요)과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서희의 외교활동으로 난국을 타개할 수 있었다. 서희는 소손녕의 군대를 스스로 물러나게 할 뿐 아니라, 거란의 승인 하에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 후 고려에서 김치양 일당이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옹립하는 정변을 일으키자, 거란은 이를 계기로 군대를 보내 제2차 침입을 하여 왔다. 거란군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점령하였고 현종은 이를 피하여 멀리 나주로 피난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거란군은 구주, 통주, 서경 등을 함락하지 못한 채 개경으로 곧장 진격한 까닭에 자칫 잘못하면 보급로가 차단되어 전군이 위험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그러므로 거란은 고려측의 정전 제의를 받아들여 현종이 친조한다는 조건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군사를 되돌려 돌아갔다. 이에 현종은 나주로부터 개경으로 환도하였는데, 현종 2년(1011) 2월 전주를 출발하여, 공주를 거쳐 청주에 도착하였다.

현종은 청주에 머물면서 2월 15일 행궁(行宮)에서 연등회를 베풀었는데, 이를 계기로 하여 이후 2월 보름에 연등회를 행하는 것을 하나의 예로 삼았다고 한다.

2) 몽고군의 침입과 청주

13세기 초에 몽고족이 새로이 흥기하여 동아시아의 국제정세가 크게 변하였다. 몽고족은 원래 지금의 몽고 평원에 자리잡고 있던 유목민족으로, 요, 금 시대에는 그들의 지배를 받아 왔으나 테무친이 주변의 부족들을 통일하고 황제의 지위에 올라 몽고의 태조, 즉 징기스칸이 되었다.

몽고와 고려가 처음 접촉한 것은 고종 5년 고려군에 쫓겨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의 유적을 토벌할 때였다. 몽고는 이를 계기로 고려에 대한 은인으로 자처하고 매년 고려로부터 공물을 요구하였고, 고려는 이 요구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불응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계기로 고려와 몽고는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고종 12년 정월 몽고의 사신 제구유(著古與)가 고려로 부터 귀국 도중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몽고가 고려를 침입하는 구실이 되었으나 이 때 몽고가 즉시 침입하지 않은 이유는 서방에 대한 경략과 징기스칸의 죽음 때문에 동방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몽고는 금의 정벌에 이어 고종 18년(1231) 제1차 침입을 하여 왔다.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고군이 고려에 침입하자 곧 몽고군에 대한 항쟁은 사실상 일반 민중의 손에 의해 수행되었다. 왜냐하면 최씨 무인정권은 몽고군이 개경을 포위하자 화친을 맺고 강화로 천도하였기 때문이었다.

고려와 강화를 맺은 몽고는 다루가치를 서북면에 두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당시의 집권자인 최이는 강화로 천도하고 몽고와의 항쟁을 결의하였으며, 이러한 고려의 항몽정책은 몽고를 자극하여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 비록 몽고의 장군 살리타이가 처인성(지금의 용인)에서 김윤후가 거느린 처인 부곡민에게 사살된 후 물러갔으나, 뒤에도 몽고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몽고는 전후 30년간 6차례의 침입을 해오기에 이르렀다. 강화로 천도한 정부는 항전과 강화교섭의 양면작전으로 전투에 임하였기 때문에 전쟁 수행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투는 주로 육지의 일반 민중들에 의지하는 것이었고 귀족들은 강화도에서 호화로운 생활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사치생활은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수취에 의하여 영위되었던 것으로, 백성들은 몽고에 대한 항전과 정부의 수탈이라는 이중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

무인정권의 대몽항쟁은 처음 농민이나 천민들의 뒷받침을 받아서 수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관악산의 초적들은 스스로 정부에 항복하여 몽고군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충주 노예군의 항전은 특히 유명하였다. 이들은 귀족관리들이 모두 도망치는데도 끝까지 성을 지키며 용감히 싸웠다.

특히 몽고 침입시 몽고군의 대장인 살리타이는 개경을 포위하였고, 이어 남하하여 청주를 비롯하여 충주, 음성, 괴산 등 충청일대를 공격하였다. 한편 강화로 옮긴 조정에서는 육지의 주민들을 강화로 들어오게 하고 연해의 둑을 더 쌓아 도읍의 방어를 한층 강화하였다. {고려사}24, 고종세가에 의하면, 고종 43년(1256) 장군 송유길을 청주에 보내어 청주의 백성들을 해도에 옮겼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사료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도읍(강화)의 방어를 위해서 내륙의 주민들을 이주시킨 구체적인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청주시 / '97 / 체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