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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편 역사
제3장 고려
제2절 고려왕조 성립기의 청주지역

1. 왕건의 고려건국과 청주지역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송악(개성)지방의 호족의 자제였다. 그는 신라의 변경에 설치된 군진의 무력을 배경으로 사회적인 진출을 꾀하였다. 그는 처음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많은 전쟁을 통해 공을 세웠으며 드디어 궁예정부의 시중이 되었으며, 918년 쿠테타를 일으켜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도읍을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기었다. 자신의 본거지인 송악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서 왕건은 정치적 군사적인 기반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아울러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그 이전의 궁예정부와는 달리 친신라정책을 꾀하였다. 그것은 신라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얻는데 유리할 뿐 아니라, 그당시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견훤을 타도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초기에는 견훤의 후백제와 화평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와 후백제는 대립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양국간의 전쟁은 처음에는 후백제에게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왕건 자신이 정예 기병부대 5천을 이끌고 견훤군과 공산(公山 : 지금의 대구 팔공산)에서의 대결은 고려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930년 고창(지금의 안동)전투를 계기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아울러 충북일대의 호족세력들도 점차 왕건에게 귀부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양국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매곡현(지금의 보은군 회북면)의 성주 공직의 귀부였다. 이어 청주일대가 고려의 세력권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점차 남쪽으로 내려와 충남의 홍성과 공주일대를 점령하면서부터는 완전히 고려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고려 건국 이후 후삼국 간의 세력다툼은 사실상 견훤과 왕건과의 패권다툼에 지나지 않았다. 신라는 이미 골품제도의 붕괴 등 내부의 모순으로 인해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져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일원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며 겨우 왕조의 명맥을 보존하기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왕건과 견훤의 대결은 자연 양국의 접경지대인 보은·회인·문의·청주·제천·충주 일대의 충북지역과 상주·김천·성주 등 경북 일대의 지역에서 주로 벌어지게 되었다.

특히 청주를 비롯한 중서부 지역은 전라도를 장악한 견훤이 한강 일대의 평야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으로나 교통상으로 아주 중요한 요충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일대의 호족세력은 당시의 세력 판도에 따라 언제든지 자신들의 향배를 바꾸기 일쑤였다. 따라서 왕건, 견훤 모두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청주는 일찍부터 궁예세력의 요람이었고 청주인들은 궁예정권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러면 청주세력이 궁예정권을 무너뜨리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에게는 어떤 태도를 취하였을까. 또 왕건은 청주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 갔을까 하는 점이 매우 궁금하다.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은 결국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여 자신이 왕이 되었다. 그런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전에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왕건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 가던 과정에서 청주인들 간에 분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아지태(阿志泰)사건?이다. 이 사건은 아지태를 비롯한 청주인들간에 분쟁이 발생하여 관청에서 조차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왕건이 나서서 아지태일파를 제거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청주의 지방세력들은 크게 분열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동안 궁예의 아성과 같았던 청주세력들 중에는 점차 왕건을 지지하는 세력이 늘어나게 되어, 궁예정권 말기에는 친궁예파와 친왕건파로 분열·대립하여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건이 궁예를 죽이고 고려 태조로 즉위한지 3일만에 처음으로 취한 행동은, 궁예에 의해 사형장에 끌려가던 청주의 군인 80여 명을 구출한 것이다. 이들은 과연 누구일까. 궁예는 어째서 이들을 죽이려 했으며, 왕건 즉위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이 80여 명의 청주인 사형수들을 구출한 이유는 무었일까.

이들 80여 명의 청주인들은 친왕건세력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는 쿠테타에 적극 참여했던 인물이고, 그로 인하여 궁예에게 죽임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궁예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죽이려고 했다든가 왕건이 막 끌려가고 있던 도중에 이들을 구출했다고 한 것을 보면, 궁예가 이들을 죽이려한 시기는 궁예가 쫓겨나기 직전의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결국 아지태사건 이후부터 청주 지방세력들 중에는 친왕건파가 상당히 형성되었으며, 이들이 궁예정권을 무너뜨리는 데에도 참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친왕건파들과는 반대로 왕건 즉위에 대해 불만을 품은 친궁예세력도 만만치 않게 존재하고 있었다. 청주는 일찍부터 궁예의 세력기반이었던 곳이고 아울러 수도 철원에 이주되어 궁예정권에서 활약한 청주인들도 많았기 때문에, 왕건이 정권을 장악한 후에도 청주인들을 완전히 지배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고려 건국 직후에는 청주인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순군리(徇軍吏) 임춘길(林春吉)의 모반사건을 들 수 있다. 임춘길은 태조 즉위 3개월 후인 9월에 모반을 꾀하다 처형되었다. 반란을 주동한 임춘길과 배총규는 청주출신이고 경종은 매곡인(昧谷人)으로, 매곡은 지금의 보은군 회북면이다. 이들은 친궁예적인 인물들이었을 것이고, 왕건의 즉위에 불만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왕건이 이들을 죽인 진짜 이유는 궁예정권하에서 활약했던 친궁예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반을 꾀했다고 한 것은 어쩌면 구실에 불과할지 모른다.

다음으로 청주수(淸州帥) 진선(陳瑄)과 선장(宣長) 형제의 반란사건을 들 수 있다. 이들 형제는 태조 원년 반란을 꾀하다 주살당하였는데, 형인 진선을 청주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청주의 대표적인 호족세력임에 틀림없다. 이들 형제가 무슨 이유로 반란을 꾀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반란을 일으킨 시기가 태조 원년 10월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왕건의 즉위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대부분의 청주세력과 마찬가지로 친궁예세력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밖에 왕건 즉위 후에 일어난 반란사건은 그 주모자가 비록 청주출신은 아니라 하더라도, 대부분 청주와 인접한 중부일대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주인 이외에 왕건의 즉위 후에 반란을 일으킨 것은, 먼저 마군장군 환선길(桓宣吉)의 반란사건을 들 수 있다. 태조 즉위 4일만에 일어난 최초의 반란이다. 이어 이틀 후에 종간과 내군장군 견부가 반란을 일으키다 주살되었다. 다시 7일 후인 마군대장군 이흔암(伊昕巖)이 모반사건을 일으켰다. 이 세차례의 모반사건은 모두 태조가 즉위한 6월에 일어났으며, 청주인들의 반란과 연관이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 청주사람인 임춘길과 진선·선장형제의 반란사건 및 환선길과 종간·견부 그리고 이흔암의 반란사건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왕건 즉위 직후에 연이어 일어났다는 점이다. 환선길 형제와 종간·견부 그리고 이흔암은 즉위 직후인 6월에, 임춘길은 9월에, 진선·선장형제는 10월에 각각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의 출신지가 청주를 비롯 중부지방이었다. 임춘길과 진선 형제는 청주인이고, 환선길은 음죽(陰竹 : 지금의 음성일대), 이흔암은 충주 혹는 공주출신으로 짐작된다. 모두 일찍부터 궁예의 세력기반이 되었던 곳이다. 또 이들을 밀고한 인물들이 모두 왕건의 핵심측근이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결국 이들은 친궁예적이었거나 비록 고려건국에 참여했다 하더라도 왕건의 핵심측근들에 의해 견제·의심받고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왕건의 6월정변 후 이들은 모두 모반죄를 이유로 제거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청주를 비롯하여 중부일대 지방세력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왕건은 한편으로는 이들을 제거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회유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것은 왕건이 즉위 후에 처음으로 행차한 곳이 청주였다는 점만 보아도 분명해진다. 즉 왕건은 즉위 1년 후에 친히 청주에 행차하였다. 왕건은 청주에 내려와 이곳 지방세력들을 위무하고, 아울러 이곳에 성을 쌓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왕건이 이처럼 직접 청주에 순행하여 주민을 위무하고 성을 쌓는 등 노력하였으나 그 후에도 청주의 지방세력들은 계속해서 왕건과 견훤사이에서 반부를 거듭하였다. 따라서 왕건의 청주에 대한 회유와 견제는 계속되었다. 그것은 바로 이곳의 호족세력들 중에 고려건국에 불만을 가진 친궁예세력들이 잔존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견훤이 점차 이곳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자 견훤과 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하는 호족세력들도 생겨났다. 따라서 왕건의 입장에서는 항상 청주를 견제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것은 왕건의 혼인정책에서도 잘 나타난다. 왕건은 전국의 유력한 호족세력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29명의 호족 딸들과 정책적으로 혼인하였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왕건은 청주지방의 호족과는 단 한명과도 혼인하지 않았다. 반면에 청주와 가까운 진주(지금의 진천)와 충주지방의 호족과는 혼인하였다. 청주호족이 왕건의 외척이 되지 못한 사실이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왕건의 청주호족에 대한 견제정책의 결과였다고 하겠다. 반면 진주나 충주는 청주호족을 진압·견제하기 위해 왕건에 의해 정책적으로 중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주(鎭州)라는 지명도 태조가 청주를 진압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진주라는 지명은 고려초 청주호족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왕건은 청주를 진압하기 위해 왕식렴·유금필 등 핵심 측근세력을 보내 이곳에 진주시킨 데서 그 이름이 연유된 것이다.

한편 고려개국 1·2등 공신 중에는 청주출신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건국초기에 대대적인 관직임명 기사에도 청주인들은 제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고려 개국에 참여했던 청주인이라 하더라도, 의심받거나 견제의 대상이 되었고 심지어는 모반을 이유로 제거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청주호족들은 처음에는 궁예의 세력기반이었지만 점차 왕건의 세력이 커지자 분열되었다. 그리하여 청주 호족세력들은 크게 친궁예세력과 친왕건세력으로 분열·대립되었고, 궁예와 왕건의 정권교체과정에서 친궁예세력들은 크게 반발하여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한편 친왕건세력들은 고려건국에 참여하였지만 병권이나 정치의 핵심에는 이르지 못하고 의심과 견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청주세력은 점차 고려 중앙정부에 흡수되거나 토착 향리층으로 변화하여 더 이상 고려의 중앙정부에 적대적인 지방세력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2. 고려초기 토성(土姓)의 분정(分定)과 청주토성

우리나라에서 한식(漢式) 성씨가 지배세력 사이에 널리 보급되는 것은 신라말 고려초기 호족세력의 성장과 그 때를 같이한다. 이 시기에 형성된 성씨집단인 토성(土姓)은 그후 새로운 군현제의 편성과 더불어 주·부·군·현의 성이나 촌성(村姓) 또는 향·소·부곡의 성 등으로 변화되었다. 이렇게 분화된 각 족단의 촌락은 동족이 어울려 사는 혈연집단적 거주지로서 지방 행정조직의 말단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지방의 말단 행정단위인 촌의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은 촌장(村長), 혹은 촌정(村正)이었다. 이들은 고려가 중앙집권적인 지방지배를 완성한 성종대 이래로 향리와 더불어 향촌의 유력자였다. 이들 향리나 촌장 등을 수장으로 하는 각 촌락은 일촌일성(一村一姓)을 원칙으로, 같은 성씨가 몰려사는 혈연적 동족집단인 동시에 지역적 촌락공동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러한 촌락의 구조는 고려 후기에 이르러 정치적 사회적인 변화와 그에 따른 지방 통치조직의 재편과 함께 동족이 아닌 타성도 서로 섞이어 사는 경우가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따라서 토성의 분포를 파악하는 것은 고려시대 각 지방의 사회적인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조에 들어와 15세기 전반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는 각 군현별로 토착성씨 즉 '토성(土姓)'이 기재되어 있으며, 토성이라는 용어는 위의 두 지리지에 처음 보인다. '토성'이란 고려초기 이래 전래되어 오던 중앙 소장의 군현성씨관계자료에 기재되어 있던 성씨를 지칭한 것이다. 여기에는 토성 이외에 '인리성(人吏姓)', '백성성(百姓姓)' 등과 성씨의 본관에 따라 주·부·군·현 토성과 촌·향·소·부곡성 등이 기재되어 있다. 한편 '망성(亡姓)', '내성(來姓)', '속성(續姓)' 등과 같이 시간적인 변화에 따라 여러가지 성종(姓種)이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토성의 형성과정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태조 23년 전국적인 군현의 개편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토성의 수는 각 읍세의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주·부와 같은 대읍은 7·8개의 토성이 있었고 평균적인 군현은 4·5개의 토성이 있었다. 결국 각 읍의 토성 수는 고려 초기 그 군현이 성립될 당시 참가한 구역수 내지 그 구역에 토착하던 족단수와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 후기 이래 군현의 신축과 읍격의 승강이 빈번해지고 또 유망민의 대량 발생과 신분변동이 심해짐에 따라 읍세와 토성수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고 변화되어 갔다.

재지 토성이 몰락하게 되면 '망성'이 되었다. 즉 고려시대의 성씨관계 문헌에는 기재되어 있으나 15세기 지리지 편찬 당시에는 이미 없어진 토성을 망성이라고 하였다. 망성의 발생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대체로 두가지 경우로 나누어 살펴볼 수가 있다. 하나는 자연적으로 족세가 쇠미하여 후손이 단절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급격한 정치적 사회적인 변동으로 말미암아 몰락한 경우이다.

한편 '내성'은 다른 지방에서 옮겨와 고려 초기이래 토착하게 된 성을 말하는 것이다. 토성이 확정된 후 그 토성이 유망 또는 소멸해서 망성이 생기듯이 이미 다른 지역에서 옮겨온 내성이 그후 다시 유망하거나 소멸되면 '망래성(亡來姓)'이 되었다. 성씨의 이동이 많았던 곳에는 망래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토착적인 기반이 약한 이주성이 쉽게 정착하지 못하고 전쟁이나 흉년 등으로 다시 다른 지역으로 유망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속성(續姓)'이 있는데, 이는 각 읍 성씨조의 맨끝에 기재되어 있고 반드시 내성의 다음에 기재되었다. 속성은 고려시대의 성씨관계 문헌에는 없고 그 대신 15세기 지리지 편찬 당시에 각 도의 보고서에 기재된 성씨를 말한다. 따라서 속성은 내성과 마찬가지로 다른 지역으로부터 옮겨와 토착한 성씨를 말한다. 다만 내성과 속성과의 차이는 그 형성시기의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서, 내성은 고려초기부터 형성된 성씨인데 반해서 속성은 고려후기 내지 고려말 조선초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속성은 촌(村)을 제외하고는 주군현과 속현 및 향·소·부곡에도 있었고 심지어는 역에도 있었다. 즉 속성은 고려후기 외적의 침입 등 격심한 사회변동으로 말미암아 토착 성씨들의 이동이 심해지자, 향리자원의 보충을 목적으로 각 지역간의 조정을 한 결과 본격적으로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각 군현의 토성관계 기록은 그 지방의 혈족집단의 형성과 그 변동과정 등의 내력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청주의 토성은 12개의 성이 있는데 한(韓), 이(李), 김(金), 곽(郭), 손(孫), 경(慶), 송(宋), 고(高), 준(俊), 양(楊), 동방(東方), 정(鄭) 씨가 그것이다. 그리고 내성은 1성으로 황보(皇甫) 씨가 있는데, 이는 개경에서 이주한 성이다. 또 속성은 1성으로 서문(西門) 씨이고, 망래성(亡來姓)이 5성으로 왕(王), 노(盧), 유(柳), 홍(洪), 김(金) 씨로 각각 개경, 포천, 목천, 회인, 경주에서 이주한 성이다.

망촌성(亡村姓)으로는 4성이 있는데, 박(朴), 한(韓), 신(申), 갈(葛)씨가 그것이다. 그리고 청주의 속현인 청천(靑川)의 토성으로는 손(孫), 전(田)씨가 있고, 망성은 문(文)씨가 있으며, 속성은 김(金)씨가 있다. 또 청주에 속해 있던 주안향(周岸鄕)의 토성으로는 하(河)씨가 있고, 속성은 오(吳), 조(趙), 장(張), 유(柳)씨가 있다. 한편 청주에 속해 있던 초자소(椒子所)에는 속성으로 김(金), 한(韓)씨가 있고, 망성은 필(畢)씨가 있다. 또다른 소인 배음소(拜音所)에는 속성이 박(朴), 이(李)씨가 있으며, 망성으로는 필(畢)씨가 있다.

이상 청주의 본주 및 그에 예속되어 있던 촌, 속현, 향, 소의 토성관계 기록을 정리하여 보았다. 이 기록은 비록 고려시대에만 존재하였고 이미 조선조에 이르러 소멸되었던 것이지만, 이를 통하여 고려시대의 청주지방 혈족집단의 형성과 변동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위의 기록을 토대로하여, 청주에는 이미 고려 초기부터 12개의 성씨집단이 유력한 토착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청주의 토착 성씨집단에 대해서는 현존하는 [용두사철당간]의 명문을 통해서도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명문에는 철당간을 건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10여 명의 인물들이 보인다. 10여 명의 인물들은 모두 김(金), 손(孫), 경(慶), 한(韓)이라는 성씨를 가지고 있으며, 이 성씨들은 앞의 지리지에 토성으로 기재된 성씨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이 당시 청주를 지배하던 토호세력임이 틀림없다. 다시 말하면 고려초기 청주지방은 김씨를 비롯한 손, 경, 한씨의 토성집단들이 연합하여 지배하던 호족연합적인 지배체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청주시 / '97 / 체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