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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 豪族聯合政權과 門閥 貴族制

  1.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통일 과정 

  신라는 8세기 후반부터 정치적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宣德王(780∼785) 즉위 이후 150년간 20명
의 왕이 교체될 정도의 혼란기였다. 金憲昌·梵文·張保皐 등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으며, 지방
에서는 지방의 세력가들인 호족들이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각지의 반
란 세력들도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였는데, 그 중 竹山(安城의 竹山)의 箕萱, 北原(原州)의 梁
吉, 完山州(全州)의 甄萱, 鐵圓(鐵原)의 弓裔 등이 상당한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즉 9세기 말에 
이르러 신라는 지방이 전혀 중앙정부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각지의 반란 세력 가운데 견훤과 궁예는 각각 주위의 대소 반란세력들을 병합하고 점차 자신들
의 세력을 성장시키어 마침내 후백제와 태봉(후고구려)를 건국하게 되었다. 견훤과 궁예는 각각 
백제, 고구려와는 관계가 없는 신라 출신들이었으나 백제와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난 부흥의 기
운에 편승한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신라의 실정과 백제, 고구려 지역에 대한 차별 대우에 대한 
백제, 고구려 유민들의 반감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그 자신이 개성 출신의 호족이었다. 처음에 궁예에게 귀부하여 장군으로서 상
당한 군공을 세웠다. 그러나 궁예의 정치가 점차 난폭해지고 사치와 낭비가 심해지자, 洪儒·裵玄
慶·申崇謙·卜智謙 등의 추대로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918년).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 하여 고구려의 부흥과 계승을 표방하였다. 이듬해에는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
인 松岳(開城)으로 옮겼다. 
  태조 즉위 초에 궁예를 지지하던 지방의 호족들의 반란이 극심하였다. 이에 태조는 신라, 후백
제와는 화친 정책을 취하면서 지방 호족의 반란을 진압하거나 호족들을 회유하여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이는데 전력하여 자신의 기반을 다져가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 기반이 다져지자 태조는 
친신라정책을 유지하는 한편 후백제와는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섰다. 후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격은 
집요한 것이어서 태조 10년(927년) 견훤은 경주까지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우기도 
하였다. 후백제의 공격에 시달리던 신라는 935년(태조 18년) 고려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56대 992
년만에 신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태조는 항복해 온 경순왕을 정승을 삼아 태자보다 상위에 두었으며 神鸞宮을 지어 경순왕의 거
처로 하고 신라를 경주라 하여 경순왕의 식읍으로 삼았으며, 장녀인 樂浪公主를 敬順王에게 출가
시켰다. 
  한편 후백제는 내분으로 자멸해 가고 있었다. 신라가 태조에게 항복하던 해, 견훤의 네 아들 중 
長子 神劍, 次子 良劍, 三子 龍劍 등이 견훤을 가두고 神劍이 왕위에 올랐다. 견훤은 유폐지에서 
탈출하여 고려 태조에게 귀부하였다. 태조는 귀부해 온 견훤을 尙父라 칭하게 하고 자리를 백관의 
위에 두었다. 태조가 이처럼 경순왕과 견훤을 후대하자 민심이 고려로 기운 것은 물론이고 후백제
에 남아 있던 견훤 지지세력들은 태조에게 귀부하거나 전쟁시 내응하겠다는 의사를 태조에게 전
달하기에 이르렀다. 견훤은 후백제를 정벌할 것을 태조에게 요청하여 태조는 이듬해(태조 19년, 
936년) 후백제와 최후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2. 호족의 성립 :  

  (1) 시대적 배경 : 신라 하대가 시작되면서부터 중앙의 정치는 왕권 쟁탈전으로 인해 매우 혼란
스러웠다. 37대 宣德王(780∼785)부터 56대 敬順王(927∼935) 때까지 155년 동안 20명의 왕의 교체
된 것은 이 시기의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중앙 정국의 혼란은 지방 유력자의 
독자적 세력화를 가져왔다. 
1
22
23
28
29
36
37
56
朴赫居世
智證王
法興王
眞德女王
武烈王
惠恭王
宣德王
敬順王
在位
 
500∼514
514∼540
647∼654
654∼661
765∼785
780∼785
927∼935
三國史記
上代
中代
下代
三國遺事
上古
中古
下古
 
 

  (2) 호족의 연원 :  

  1) 地方 土豪勢力(村主層)
  2) 몰락한 中央 貴族(眞骨 및 6頭品)
  3) 獨立한 地方官(郡太守, 縣令 등) 

  위와 같은 경위로 지방에서 중앙에 대해 정치적·군사적·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세력이 형성되
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城主·將軍이라 자칭하면서 지방 사회를 통치하였고 중앙의 정치
기구를 모방한 독자적인 지배기구도 갖추고 있었다.  

  (3) 豪族의 사상적 배경  

  1) 禪宗 佛敎 : 貴族層이 주로 敎宗 佛敎를 신앙하고 있던 데 비해, 豪族들은 禪宗 佛敎를 받아 
들였다. 敎宗 佛敎는 복잡한 敎理와 난해한 이론에 치우쳐 백성들로부터 유리되어 있었다. 반면 
禪宗 佛敎는 坐禪을 통한 개인적인 깨달음을 중시하여 백성들에게 쉽게 받아 들여질 수 있는 요
소를 갖추고 있었다.  

  2) 風水地理說 : 風水地理說은 禪宗과 더불어 유행되었다. 이 시기의 地理圖讖思想家들은 대개 
禪僧이었던 것이다. 高麗 太祖 王建이 風水地理說을 신봉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4) 豪族聯合政權說을 둘러싼 論爭
 
豪族聯合政權說
官僚制說
族
들
의  
자
성
1. 별도의 관료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2.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 태조 원년 6월 桓宣吉의 반역 사건 때 환 선길과 행동을 같이 한 '其徒五十餘人' 2) 태조 10년 8월 溟州將軍 王順式이 그의 아 들 長命을 개성으로 보내 태조를 호위하게 한 '卒六百' 3) 朴述熙가 王規와 반목하여 자신의 신변을 보호를 위해 배치한 '兵士 100여명' 지방에 있는 군사력은 그 지역 호족의 개인 적 군사력으로 볼 수 있으나 일단 개성에 올라 오면 완전한 독립세력일 수 없고 중앙군으로 편성되는 것. 
 
 
 
幣
卑
辭 
태조 때에는 왕권이 미약하여 호족들에게 중 폐비사의 자세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호족이 태조에게 귀부하였다고 해서 지방에 중앙의 행 정력이 미치는 것은 아니고 단지 호족들이 고려 편에 가담하거나 협력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는 호혜적 관계였다는 것이다.  지방 호족의 귀부 시, 개경에 인질을 보내는 것은 전적으로 왕권에 의해 호족들에게 강요된 것. 호족은 국왕의 신하가 됨으로써 고려의 보 호를 받으며 국가 권력의 권위를 후광으로 삼 고 지방에서 계속적인 안정세력을 유지하려는 것. '귀부'란 결국 왕과 호족 간의 군신적 상하 관계의 성립을 말하는 것이다.
祖
의
결
혼
태조 자신이 지방 유력 호족들의 딸과 결혼했 으며 자녀들의 결혼도 유사한 형태를 취했다. 또한 왕실의 공주들은 경순왕에게 출가한 2명의 공주를 제외하면 모두 형제들과 결혼하였다. 이 러한 근친혼은 다른 호족들과 결혼하게 되면 왕 실세력이 분열되지 않을까 염려한 결과이다.  태조의 29비 중 출신지를 알 수 있는 26명 가운데 고려 지역 출신이 11개 지역에 18명, 후 백제 지역 출신이 2개 지역에 2명, 신라 지역 출신이 4개 지역에 6명. 고려의 건국에 큰 역할 을 했거나 초기에 귀부한 사람들이 중앙에서의 자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자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度
上
의  
1. 廣評省은 최고 관부인데 단순한 행정기관 이라기보다 호족세력을 대변하는 국가 정책 결 정 기관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長官인 侍中이 2 명이며, 명칭 자체가 널리 평의한다는 뜻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2. 徇軍部는 여러 호족의 군사력을 효율적으 로 운용하는 협의체적인 군사지휘권의 통수부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靑州 豪族 林春吉이 徇軍吏 로 있을 때,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벌된 직후, 태조가 靑州 豪族 玄律을 徇軍 郞中에 任 命하려 하자 裵玄慶 등이 反對. 배현경 왈, "(林 春吉의 사건은) 兵權을 잡고 本州를 믿기 때문 입니다." 3. 기인제도와 사심관제도도 왕권과 호족 세 력간의 호혜적인 관계에 바탕을 둔 제도라는 것 이다.  1. 광평성은 공식적인 행정기구였을 뿐이고, 장관인 시중도 호족의 대표로 볼 수 없다. 태조 때 시중을 역임한 사람들의 출신지는 대부분 개성 근처. 
2. 병부는 군사행정, 순군부는 병권을 실제로 장악하고 있는 기관. 배현경 등이 현률의 순군 랑중 임명을 반대한 것은 지방 호족의 군사력 과 연결될 것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순군부 가 실제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기관이기 때 문이라는 것이다. 

3. 기인제도는 왕과 신하의 관계를 맺는 것으 로 왕에 의해 강요된 측면이 강하다. 이는 평등 한 관계가 아니라 상하관계이다. 왕은 때로는 지방 호족들을 벌주거나 制裁를 가할 수 있었 다.

擧
와 
斲
양인의 과거 응시가 제한되어 있었다. 제술과, 명경과, 잡과 중에서 관료의 주된 공급원이 되 었던 제술과에 양인은 응시할 수 없었다. 게다 가 급제 이후의 관직 생활에서 승진이 빠르고 높은 직위까지 올라가는 사람들은 대개 문벌 귀 족 출신이었다. 게다가 5품 이상 관원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문음은 어린 시절에 초입사하는 기회를 제공하 여 이들이 과거에 급제할 경우, 그 승진 속도가 문음을 거치지 않은 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 이다. 10세 이전에 관직 나가는 경우가 많고 5 세에 관직을 받는 예도 있다. 또한 음서에서 1인 1자에 한한다는 규정도 유 명무실한 것으로 1년에 1인 1자라는 설, 1인 1 자 원칙이지만 그 혜택이 子, 孫子, 女壻, 甥, 姪, 弟 등에까지 미쳐 托蔭者만 달리 하면 자손 은 몇 명이든 음서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는 설도 있다. {고려사} 열전에 기재된 650명 중 대부분이 과거 급제자이고 공신들의 자녀들도 과거에 적 극 응시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제가 절대적인 기능을 했으므로 고려 사회는 관료제 사회이다. 
음서의 경우 1인 1자의 원칙이 지켜졌으므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參考> 太祖의 訓要十條 (太祖 26年 癸卯 4月 朴述熙 等) 

   1) 佛敎를 우대하되 寺社間의 다툼을 禁하라.
   2) 寺院을 더이상 세우지 말라.
   3) 嫡長子가 王統을 잇는 것을 原則으로 하되, 不肖하면 次子가 계승하고, 次子도 不肖하면 兄
弟 중에서 여러 사람의 推戴를 받는 자가 계승하라.
   4) 中國의 制度와 반드시 같게 하려 노력하지 말 것이며, 契丹은 본받지 말라.
   5) 매년 2, 5, 8, 11월에는 西京에 100日 이상 거처하여 安寧을 이루라.
   6) 燃燈會와 八關會를 준수하라.
   7) 諫言을 따르고 讒訴를 멀리하며 백성의 &#27700;役을 輕하게 하고 稅賦를 薄하게 하며 賞罰을 바
르게 하라.
   8) 車峴(車嶺山脈) 以南과 公州江外는 山形과 地勢가 함께 背逆으로 달리니 人心도 또한 그러
한지라 저 아래 고을 사람이 朝廷에 參與하여 王侯, 國戚과 婚姻하여 國政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
를 變亂케 하거나 혹은 統合된 怨恨을 품고 擧動하는 길을 犯하여 亂을 일으킬 것이며 또 일찍이 
官寺의 奴婢와 津驛의 雜尺에 속하던 무리가 혹은 權勢에 붙어 移免(移는 賤人 身分을 옮김이고 
免은 身分에 隨伴하는 &#27700;役을 免除하는 것)하고 혹은 王侯의 宮院에 붙어 言語를 奸巧하게 하여 
權勢를 弄하고 政事를 어지럽힘으로써 災變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良民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벼슬 자리에 두어 일을 보게 하지 말지어다.
   9) 官僚를 祿俸을 함부로 加減하지 말고 論功行賞을 사사로이 하지 말라.
  10) 옛 일을 거울 삼아 오늘을 경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