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user.chollian.net/~toaya/
 
팔만대장경의 보전 철학
이태녕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지난 연말 경주 불국사 석굴암, 종묘와 더불어 해인사 장경각 판전과 팔만대장경이 유 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문화재들을 이제 우리 한국민의 문화 유산일 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에게 다같이 귀중한 명실공히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 고려시대 국난을 맞이하여 호국 염원을 담아, 우국 충정과 신앙 의 결정으로 태어난 인쇄매체의 정수요,예술의 정화인 대장경이 현대 사회의 요구에 부융 하는 전자매체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기념하는 뜻깊은 자리를 갖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기회에 훌륭한 오래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문화라는 자긍심 을 새로이 하고 선인(先人)들의 예지(叡智)어린 사상의 표출이면서도 탁월한 예술의 정 수(精髓)인 이들 문화 유산을 오늘날 우리가 감상할 수 있음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문화재가 우리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귀중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구 체적으로 그 중요한 이유를 살핌으로서문화재가 지니고 있는 가치(價値)를 올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가치(價値)의 인식(認識)이야말로 귀중함에 대한 진정한 자각이며 보전(保全)에 대한 바른 자세와 열의를 환기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재의 가치는 그가 지닌 역사성과 기능, 예술성에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국난을 당 하여 두 번씩이나 대장경의 조절을 발원하여 전 국민이 일체가 되어 그 대 역사 이면에 얽힌 국제, 사회 정세 등 지나간 역사의 산물로서 간직한 옛 조상의 문화 활동의 자취, 옛 건축가, 예술인, 장인의 "얼"과 교신(交信)하고 흘러간 역사의 발자취를 호 흡하면서 옛날을 더듭어 볼 수 있는 총체적 생명체로서 간직하고 있는 독특한 '가치'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어떻게 하면 팔만대장경을 위시한 이들 문화유산을 온전하게 잘 보존하여 오늘날 우리처럼 후손들도 감상할 수 있게끔 우리 후세에 면면(綿綿)히 기리 인 계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보존을 위해서 문화재에 대한 손질이 불가피한 경우일지라도 어떻게 하는 것이 문화재의 가치가 훼손(毁損)되는 것을 최소한도의 범위에 머무르게 하는 것일까?우리는 이러한 점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문화재 보존을 위한 우리의 의무와 책임을 다시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는 르네상스(14-18세기)시대에 이르러 귀족들의 골동 예술품의 수집 규모와 관 심이 커감엥 따라 대규모의 수집품 소장가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르네상스로부터 바로크 (Baroque, 18-18세기)시대에 이르는 동안까지는 수집품의 온전한 외관을 유지하기 위한 손 질과 수리가 행해지게 되었다. 당시 보존 수리는 대개 솜씨 좋은 화가나 조각가 등 미술전 문인에게 위탁하는 것이 일반적 통례였다. 그들의 작업 목표는 문화재를 잘 수리된 상태로 유지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주 손질해서 외관상 보기좋게 하는 것이 목적이 되 었고, 그에 따라서 자연히 그 시대의 기호에 맞게끔 변작의 손질이 되기 일쑤였다. 그러므 로 변작에 따르는 비가역적(非可逆的) 손상을 입히는 불행한 일들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 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원정할 때 저명한 학자들을 거느리 고 가서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를 유적과 유픔을 조사하여 과거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안 고 돌아왔다. 그들의 이집트 견문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과 기타 구라파 각국의 예술양 식에 많은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이 무렵 골동품 수집가와 고고학자들도 과거를 과학적으 로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를하게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골동품 이외에는 관심이 별로 없던 사람들도 문화 유적지나 건조물 등 문화재는 마치 국토 안의 강산이나 계곡과 같이 국민의 성격과 정서를 형성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적 등 문화재는 사회조직 및 안녕과 밀착된 국가의 생명과 같은 귀중한 국가적 보물로서 중요시되기 시작하였던 것 이다.

오늘날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보존 철학과 원칙을 분명하게 제창한 최초의 인사 중 에 윌리엄 모리스(Willam Morris:1834-1898)라는 사람이 있다. 모리스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예술가인 동시에 장인이기도 하였으며 시인 겸 문학평론가, 그리고 정치가이 기도 했던 당시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인사였다. 그는 대영 제국의 중요한 문화유산들이 외관상의 미화(美化)를 위주로 한 보수 작업에 의한 문화재의 훼손을 크게 우려하였다. 그 는 문화재의 보수 공사를 맡았던 건축협회 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고 한다.

"옛 기념탑 위의 시계를 그대로 두십시오. 외관을 다시 보기좋게 꾸며달라는 교 회의 요청이 있을지라도 비바람과 기후로부터 보호하는 것 이상의 어떠한 보수방법에 대해 서도 강력히 반대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고 건축물이 단순히 교회의 노리개가아니라 국민

의 번영과 희망의 성스러운 기념물임을 각성케 하십시오. "

1877년에 존 러스킨과 길버트 스코의 협조를 얻어서 모리스는 건축물의 보호운동을 위 한 최초의 사회단체를 설립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문화재 보존을 위한 '국제 문화재 보전 복구 연구센터'인 ICCROM, UNESCO, '국제 박물관 협의회'인 ICOM, '국제 기념물및 문 화유적지 연구 협으회'인 ICOMOS, 그리고 기타 각국의 연구 교육기관들이 벌이고 있는 문화재 보호 운동의 효시라 하겠다.

금번 우리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재 지정도 ICOMOS가 유네스코의 위촉을 받아서 심사 를 하게 된 것이다.

존 러스킨은 일찌기(1849) 건축 문화재의 보수, 특히 복원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한 바 있다.

"소위 레스토레이션이라는 것은 가장 나쁜 파괴행위이다. (그는 레스토레이션의 개념을 부활주의에 의한 복원-전체이거나부분을 막론하고-의 뜻으로 사용한 듯 함). 이 보 수라는 행위는 건축물의 총체적 파괴를 뜻한다. 이러한 파괴로부터 어떤 것도다시 수습될 수는 없다. 죽은 자를 소생시킬 수 없듯이 건조물 문화재에 있어서도 그것이 간직했던 역 사나 원래의 창조물로서의아름다움을 회생(回生)시킬 수는 없다. 작업한 장인의 눈과 손으 로 심어진 정신이 다시 부활될 도리는 없는 것이다. 시간적으로다른 시대에는 각각 다른 정신이 깃들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고 건축물을 다시 만들었다고 한들 그 건축물은 만든 시 대의 새 건축물일 따름이다. 죽은 장인들의 정신이 다시 소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적으 로 다른 시대정신은 다른 손으로 하여금 다른기법, 다른 아이디어가 깃들이게끔 다른 계 시를 할 것이다"

발달된 현대의 미학이론, 역사비판의 원리와 언어학 이론들은 이 러스킨에 의해서 주장 된 보존철학, 보존원리가 타당함을 지지해 주고 있다고 한다. 각 예술작품, 장식의 한조각 한조각, 개개의 역사적 참고자료들은 본질적으로 유일무이하며 위조물이나 모조품이 아니 고서야 시대와 작가를 달리하고 재현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라틴어 나 산스크리트어 등의 문법이나 언어 체계에 관해서 이해하고 그 언어를 재사용하는 것이 그 말이 지닌 원래의 표현이나 사상적 교감에는 접근할 수 없기때문이다. 이것은 과거의 얼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을 오로지 온전하게 보전(保全)된 오리지날한 것 밖에 없다는 의미와 같다.

한편 전통적 수공예 기법에 대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의 경우, 이 전통적 기법은 이 자체로 소중한 무형문화재임에는 틀림없지만, 오늘날 이 기법을 활용하여 옛 문화재를 재현하고자 시도할 지라도 이 결과로 만들어진 것은 결국 모조품일 따름이다.

이런 기법은 문화재를 수리할 때 쓸모있는 귀중한 수단이 됨은 틀림없는 것이기는 하지 만 사실상 진정한 과거의 표현은 물론, 현재의 표현도 아님으로 역시 미래에도 오늘날을 표 현하는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태리를 비롯하여 보존원리를 무시한 데서 일어났던 문화재 파괴의 많은 예 중에서 프 랑스에서 일찌기 있었던 예 하나를 소개하였다. 비오래 르 두 Violet le duc(1817-1879) 는 누구보다도 앞서서 프랑스 영내의 역사적 기념물의 조직적 복원공사를 시도한, 말하자 면 문화재 보존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임의로 구조물을 첨가하든가 모양 을 바꾸는 손질을 해서 변형또는 위작(僞作)을 하는 범실을 자주 저질렀다. 그가 문화재 수 호의 거룩한 기치 아래 행한 행위는 애국적 동기와 열성과는 반대로 유적 기념물이 과거 로부터 계승해 오는 진정한 메시지를 간직할 수 없게끔 문화재를 손상시킨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비오레르 두가 행한 보수는 문화재의 보존 철학이 정립되기 이전의 사건으로서 나 폴레옹의이집트 원정에서 접한 고대 이집트 문화에서겪은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 몰고 온 소산물이기도 하였다. 고고학적 지식과 애국, 향토애를 표방한 지나친 국수주의적 "복고주의 "가 뒤섞인 사고와 발상에서 유래된 문화재 파괴의 유명한 예가 되고만 것이다. 이러한 실책은 오늘날 소위 비오레르 두 방식이라고 불려지고 있으며 문화 재 보존에 있어서 항시 경계할 교훈이 되고 있다.

우리는 최근 40여년간 중요한 유적지의 발굴이 많이 있었다. 한편 여러번의 보수공사와 유적지의 환경미화 공사가 있었다. 이기간은 산업, 기술, 사회구조면에서 격변기였으며, 우리의 의식구조와가치관에도 큰 전환을 몰고 온 시기였다.

1975년 전재 등 돌발적 재해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정부의 주도로 공조시설을 갖춘 철 근 콘크리트 구조의 수장고(현재 강원으로 사용)를 신축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낙성 후 응축수로 뒤덮인 신판고는 경판고로서는 부적당하다고 판명되어 1979년 9월, 12월 1980년 12월 등 총 3차에 걸쳐 보수를 위한 조사가 있었으나 새 건물로의 경판 이안은 부적하다는 부정적인 결과가 보고된바 있다. 그리하여 사전에 장경각의 환경과 기능에 대한 철저하고 면밀한 연구와 조사 검토없이 강행된 신판고의 경솔한 이전계획은 결국 국고손실의 상흔만 남긴 채, 일부 보전 과학와 불교계의 강력한 반대로 실천되지 못했다. 이 군사문화의 대 표적 실례였던 무모한 시도가 좌절됨으로써 돌이킬 수 없이 당할 뻔 했던 문화재의 파괴 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음은 참으로 불행 중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금번 조사 연구 결과, 해인사는 인근 지역에 비해서 연중 습도가 높다는 것이 알려졌고, 해인사 중에서 제일 온도가 낮은 장경각 주변 환경은 해가 법보전 수다라전 후면으로부터, 오후에는 정면에 해가 골고루 드는 서남향의 배치이며 판전 내의 판전외부의 온습도 변화 의 차가 작았으며, 특히 판전 내부의 모든 공간의 온도 습도는 균일하였다. 그리고, 경판표 면의 온도와 습도는 이들 환경과는 달리, 여름에도 28°C이내에 머물고 일교차가 대략 5° C 내외에 머물며 습기는 통상 건조한 싯점과 다습한 때를 제외하고는 75-85% 범위 내 외를 유지하고 있다. 거의 개방되다시피한 건물 구조를 볼 때, 비교적 항온, 항습 상태를 유 지하고 있음은 경이적인 현상이다.

온도나 습도 유지에는 특이한 창 구조와 일광 조사관계, 판가 구조, 판의 배열, 수분과 온도에 관한 목재의 특성에 독특한 경판 배열구조가 크게 이바지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 었다. 현대적인 공기 조습으로 과연 이만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울 정도이 다.

과학이란 이름은 없었지만, 축적된 경험을 통한 놀라운 기술을 관찰할 때, 문화재 보존 철학의 준수는 옛 지혜까지도 보존하는것이다.